하나님의 심판 예화 | 하나님의 심판을 정말로 믿으면 나타나는 변화들 | 조정민목사 | 말씀노트 Live (시편 75편) 179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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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노트 Live] 시편 75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셀라)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꺼기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들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Audio Source: 제발 뿔을 들지 말라 (시편 75_1-10)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80216
https://youtu.be/j4mBAdUDBkE
(오디오 소스는 교회 측의 허가를 받고 사용되었고, 본 영상의 광고는 해당 교회와 무관합니다)

#말씀노트, #조정민목사,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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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해야 할 말씀,
기억해야 할 말씀,
기도해야 할 말씀,
차곡 차곡 모아서 나눕니다!
@2020 말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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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에 관한 예화 모음 – Daum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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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 거짓과 불의와 불경건을 회개하라고 할 만큼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붙잡힘을 받고 이 시대 앞에 거룩한 빛을 비추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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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 ” (신학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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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심판은 있습니다 – Pensées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 이후 사후 세계가 있으며, 성경은 부활이 있다고 말한다.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하나님 앞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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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부제 – 안식일학교 & 선교부

문1) 하나님의’심판 Judgment’ 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 [예화]독일 라벤스부룩 수용소 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나치의 살인적인 만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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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설교 – 마 13:47-50 심판을 준비하는 신앙 / 김동호 목사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다 그 불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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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ologi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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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예화 죽은후에는

죽은 후에 심판은 믿는 사람들이 받는 거다(히10:30) (벧전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겔8-9장) 성전에 성도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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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itsege.tistory.com

Date Published: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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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하나님의 심판 예화

  • Author: 말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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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1.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_QPL5Vc15WY

▣ 심판

성경: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잠19:29)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자인 미국의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한참 진행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듯 말했습니다. “여러 얘기하지 말고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듣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

거만하고 악한 사람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자신의 형편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형태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차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하겠습니다.

* 묵상: 내 생각만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한 일은 없습니까?

▣ 심판

성경: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잠18:5)

한 간악한 스코틀랜드인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말을 빌렸는데 사고였는지 거칠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죽고 말았습니다. 자연히 주인은 자기가 입게 된 손해보상과 함께 말 값을 지불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사는 손해배상은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현금대신 약속 어음을 받겠냐고 말 주인에게 묻자, 그 말 주인은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지불할 기한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마음대로 하시죠.”라고 말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간악한 그는 심판의 날에 지불하도록 어음을 발행했습니다. 결국 말 주인은 그 문제를 법정에 가져갔고, 거기에서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에서 판사에게 어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어음을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약속어음은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심판의 날이므로 내일 지불할 것을 판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쉬지 않고 천천히 돌아갑니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이 돌아감에 따라 갈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아도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리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매일 심판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 정의의 심판

성경: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9-20)

전 보르도 지역 경찰 책임자인 모리스 파퐁(87세)은 반인류적 범죄로 징역 20년을 구형 받았습니다. 파풍은 나치의 프랑스 지배가 끝난 뒤에도 샤를 드골 대통령의 밑에서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는 예산 장관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려왔습니다. 그가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계기는 81년 한 신문에 의해 유대인들을 대거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입니다.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유태인 희생자 가족과 단체들의 고발에 따라 지난 83년 정식으로 기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반인류 범죄로 프랑스 전직관리가 법정에 선 것은 파퐁이 처음입니다. 악인 중에는 당대에 재앙을 받아 죄 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형통하고 잘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그가 평생 누렸던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는 빈손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악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 묵상: 혹시 당신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공의의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 엄숙한 하나님의 심판

‘로댕’하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이 얼른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덕수궁에서 열렸던 그의 작품전에 가서 문제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 중에 지옥편을 소재로 해서 지옥문 위에 만들어진 조각품이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작품을 보며 제목을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지옥문 위에 붙여진 글귀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지옥문 앞에까지 갔다면 이미 끝난 것입니다. 지옥문에서 무슨 생각을 할 시간이 있으며 무슨 생각이 필요하겠습니까? 때가 너무 늦습니다. 그 작품을 감상하면서 약간의 모순을 느꼈지만 그것대로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나,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 다가올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우리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깊이 머리를 숙이고 손으로 턱을 고이고 조용히 겸손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그런 곳이 있단 말인가?’, ‘내가 비록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지만 그곳에 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나에게 있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요, 또한 엄숙한 과제입니다.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옥한흠

▣ 심판을 비웃는 사람들

‘죽음’이나 ‘마지막 심판’이라는 말을 아주 우습게, 장난끼 있는 말로 가볍게 다루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곰처럼 우직한 사람들도 있고, 세상적으로 보면 용감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어리석게 담이 센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화가 페루지노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임종할 때 성직자가 급히 찾아와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페루지노는 “나는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이 저 세상에서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 보고 싶소”라며 성직자의 기도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용감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지옥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모른다고 그저 덮어 두고 안심할 문제도 아닙니다.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가올 최후의 심판에 대해 겸손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면제받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옥한흠

▣ 최후의 심판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한 번은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인데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랍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웹스터 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웹스터는 얼굴을 들고 대답하기를 “제일 나에게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에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집니다.”하고 말했습니다.(계20:4-14)

▣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록

인간의 두뇌에는 120억 개의 뇌세포가 있으며 그 각각의 세포가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몬트리올 시 맥길대학교의 저명한 신경외과 의사인 월더 펜필드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인식 속으로 들어온 것은 무엇이든 상세하게 기록되고 머리 속에 저장되어 언제라도 밖으로 재생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법정에 서게 될 때 그리하여 그의 삶의 기록이 있는 그대로 재생되어 제시될 때 무슨 수로 그것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기록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사람(구세주)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여 놓으셨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간 순간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참조: 행17:31, 롬5:10, 14:10, 벧후2:4, 9, 요5:22, 30

▣ 노벨상 제도

1833년 스웨덴에서 노벨이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학자요 발명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33세에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조간신문에 난 가사를 보고 노벨은 깜짝 놀랐습니다. 기사 내용인즉슨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기자가 동명이인(同名異人)을 잘못 알고 “노벨이 죽었다”하니까 그 노벨인 줄 알고 당장 ‘노벨 사망하다’하고 기사를 실었던 것입니다.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노벨한테는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이너마이트의 왕 죽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라고 되어있는 기사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는 순간 노벨은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내가 살아있기에 망정이지 정말로 죽는다면 이 기사가 사실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이라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노벨은 마음속으로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모은 전 재산을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기 것을 다 내놓고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공헌한 사람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노벨상 제도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세상을 떠난다면 사람들은 무엇으로 결론을 맺으며, 어떻게 평가될 것 같습니까? 또 주님은 여러분을 좌측과 우측, 알곡과 쭉정이, 양과 염소 중 어느 쪽으로 분류 심판하실까요?

▣ 죽음과 심판

성경: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전쟁터에서 고참 병사가 총탄에 쓰러지자 군목이 달려와서 “병사,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라고 묻자 병사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수없이 싸우면서 죽음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두렵다니요, 저는 겁장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죽어가는 시간에 나의 감정을 건드리십니까?” “하지만 병사, 죽음 후의 일은 준비되었나?” 병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목사님, 바로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병사는 죽음 후에 올 일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이 세상의 위험에는 용감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지금 당신의 손을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구원이 있고 용서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시면 당신은 결코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 피할 수 없는 심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손을 피해 달아날 수 없습니다. 악인은 마땅히 멸종당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에 던지시고 철저히 멸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가벼운 징계를 받고 벗어날 수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한 바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합니다. 영원한 사망에 대해서 생각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감옥에 갇혀 자신이 교수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범죄자가 “아마 나는 채찍을 몇 대 맞는 것으로 이 감옥에서 방면되겠지”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믿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잘못을 백 번이나 저지르고, 그러면서도 한 번이나 생각할 둥 말 둥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또한 우리가 그 목전에서 아무것도 하나님께 섬긴 것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실과 생각을 하나도 잊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말과 악함으로 그들의 잘못을 덮는다 할지라도 그러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빛 가운데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은 결코 혼선을 빚지 않습니다.

-「욥과 하나님」/ 존 칼빈

▣ 심판 날에 서기 위해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날을 대비하며 우리의 할 바를 행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성주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의 성을 막강한 군사들이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부하들에게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명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명령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성주에 대한 나태함을 통한 일종의 반역행위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영혼은 마치 하나님의 성과 같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고 있다는 경계경보를 줄곧 듣고 있다. 어둠의 세력이 몰려올 때는 바로 ‘악한 날’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전투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군수품을 쓸데없는 곳에 허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재능을 개인의 영화를 위해 다 써버리면 나중에 악한 날이 도래했을 때 무슨 수로 변명을 할 것인가? 현명한 주인은 하인들이 제 일을 안하고 쓸데없는 일에만 정신 팔려 있을 때엔 결코 물품을 공급해주지 않는다. 우리의 시간 사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면 그 귀한 시간들이 어이없이 허비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매순간을 지혜롭게 보내야 한다.

▣ 집행관의 나팔소리

제롬은 그의 귀에 마지막 날의 나팔이 언제나 “너 죽은 자여, 일어나 심판을 받으러 오라.”고 말하는 듯 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무섭고 중요한 시기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헝가리의 어느 기독교도 왕이 슬픔에 잠겨 있자 쾌활한 성격을 지닌 그의, 아우가 슬픔의 원인을 알고 싶어했다. 왕이 말했다.

“아우여, 나는 하나님께 큰 죄인인데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모르고 심판 때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러자 그의 아우는 농담으로 말했다.

“그런 것은 단지 우울한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집 앞에 와서 사형 집행관이 나팔을 불면 그는 곧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는 것이 그 나라의 관례였다.

어느 날 밤이 아주 깊었을 때에 왕이 사형집행관을 보내 그의 아우의 집 앞에서 나팔 불게 했다. 그의 아우는 그 나팔 소리를 듣고 죽음의 사자를 보더니 황급히 달려가 왕을 배알하고 자신이 어떤 죄를 범했는지 알려 달라고 간청했다. 왕은 이렇게 말했다.

“아우여, 자네는 결코 나에게 죄를 범한 적이 없네. 그런데 내 사형집행관을 보는 것이 그토록 무서운가? 그렇다면 큰 죄를 범한 내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앞에 끌려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현재 진행형인 심판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운동장보다 더 큰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동시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노아를 비웃었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본능이 명령하는 대로 욕구를 따라 살았을 뿐이다.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홍수가 시작된 것이다. 방주를 지었던 노아 가족은 그 심판을 통해 인류의 두 번째 시조가 되는 영광을 얻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 심판 역시 어느 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짓기 시작하던 순간부터, 나머지 사람들이 노아에게 콧방귀를 끼면서 자기 쾌락만 탐닉하던 그때부터, 하나님의 심판은 현재 진행형으로 그들의 삶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의 셈하심의 심판대에 직접 서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셈하심은 그날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 삶 속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잊지 마라.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 심판의 원칙이다. 그대가 주님의 말씀을 좇아 울더라도 말씀의 씨앗을 뿌리면, 그대의 삶 속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의 열매가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결실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욕망을 좇아 욕망의 씨앗만을 뿌리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 그대의 삶-외형적으로 아무리 거창하게 보여도 속엔 실은 허망한 물거품만 현재 진행형으로 명멸하고 있을 것이다.

/ 이재철

▣ 더딘 심판

어떤 사람이 돼지를 도축장으로 몰고갑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돼지는 아무 저항도 없이 꼬리를 흔들면서 도축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비결을 묻습니다 “어째서 돼지가 도축장에 즐겁게 들어갑니까?”

그 사람은 그의 손에서 콩을 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돼지가 가야할 도축장의 길에 콩을 조금씩 떨어뜨리고 앞서가면 돼지는 그 콩을 먹는 맛에 도살장에 제 발로 꼬리를 흔들며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당장의 눈앞에 콩 주워 먹는 맛에 죽음의 길을 걷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렴풋이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과 권세와 쾌락과 명성이라는 달콤한 콩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콩을 주워 먹는 재미때문에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콩의 유혹이란 너무나 달콤해 지옥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지금 수많은 젊은이가 성적 타락과 인터넷과 위성TV에 돌아다니는 음란의 콩을 주워먹으며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외도 때문에 수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롯의 사위들처럼 심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하늘을 손으로 가린다 해서 하늘이 없어지지 않듯이 심판을 외면한다고 해서 심판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심판은 더뎌 보이지만 반드시 임한다.

/백금산

▣ 큰 심판을 면키 위한 작은 심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던 어느 자매에게 어느 순간인가 주님께 헌신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해지고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주일 낮 예배만 간신히 드리고 개인적인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찾아오는 건 허전함과 공허함뿐이었다. 그녀가 전에 하나님께 본인도 모를 만큼 수없이 약속했던 헌신의 약속들. 그녀는 잊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사인을 보내셨다. 본인과 가족들에게 크고 작은 고통을 쉬지 않고 내리신 것이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럼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그녀를 향한 심판의 회초리는 사랑 그 자체였다.

▣ 악인의 멸망

안티오쿠스 왕은 페르샤에 침입하여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그곳 주민들의 맹렬한 방어전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티오쿠스 왕은 화가 치밀어 올라 유다인들에게 앙갚음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말고 병거를 몰아가라고 마부들에게 명령하며,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곳을 유대인들의 공동묘지로 만들겠다”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내장이 뒤틀리고 격심한 복통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그는 유대인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폭언을 퍼부으면서 행군을 독촉했습니다. 그러다가 질주하는 병거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들것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었는데, 그의 몸은 썩어 들어가 구더기가 들끓었습니다. 그는 제 몸에서 나는 악취를 견딜 수 없어하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죽어야 할 인간이 하늘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않다”라고 신음하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루살렘에 자유를 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은 거두어지지 않아, 그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이국의 산골짜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악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젠가는 심판하십니다. 오늘도 악을 멀리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시37:20)

▣ 하나님의 심판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국에 두 사람의 농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한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한 날은 불신자 친구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고 믿지도 아니한다. 그러나 지난 봄에 파종을 잘하였고 여름엔 순풍으로 물대기와 김매기를 잘하였고 가을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신자 친구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었다.”

그때 그리스도인 친구는 이렇게 답신했습니다.

“하나님은 10월의 결과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의 정하신 날에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 언젠가 갑자기 밤의 도둑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지명 수배가 되었어도 수십 억의 채무가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신앙과 행위를 따라 추호의 가감도 없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 기도: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때때로 삶의 덧없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 주님, 그러나 하늘의 소망 가운데 주님만을 바라보고 언제나 최선의 삶을 살아가며 최선의 경주를 하게 하옵소서.

▣ 막을 수 없는 심판

1842년 프랑스 정부는 폴 에밀 보타(Paul Emile Botta)를 티그리스의 모술에 보내 그 일대 지역에 옛 도시인 니느웨의 잔재가 혹 남아 있는지를 고고학적으로 탐사해 보도록 했다. 모술 및 그 일대에서 탐사 활동을 벌였던 학자들은 마침내 그 지역들에서 그 옛날 교만했던 도시, 니느웨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니느웨라는 도시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논란이 있어 왔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니느웨라는 도시에 임한 심판이 얼마나 심각하고 처절했는가를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심지어 역사학자들조차 그 도시가 어디쯤에 위치했었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 니느웨는 약 664만m2에 이르는 매우 큰 도시였다. 그 도시 한편으로는 티그리스 강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상 도시 전체는 열다섯 개의 성문을 가진 내벽과 외벽으로 된 성곽으로 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해자(moats)와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견고한 성채였다. 그러나 이 모든 수비책이 있다 할지라도 메대와 바벨론의 군대를 막아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니느웨는 결국 처절하게 멸망당했다. 나훔은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것을 보고 있다. 그는 지존자께서 교만한 니느웨를 치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분의 심판을 막아설 자는 아무도 없다.

-「반더발 성경연구」/ 코넬리스 반더발

▣ 개미 떼를 심판하는 사람

배가 가라앉자, 한 사람이 온통 신의 불공평에 대해서 항의를 뱉아 놓는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요. 신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을 안 가진 사람이 이 배에 탔기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죽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 때 바닥을 기어다니던 개미 떼 중 한 마리가 그의 발등을 물었다. 자기 발등을 깨문 개미는 한 마리 였는 데도 그 사람은 개미 떼를 모두 밟아 죽였다.

이에 헤르메스가 기다란 막대를 하나 가지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나더니 그의 배를 찌르면서 야단을 쳤다.

“그대가 개미 떼를 심판하듯이 신들이 인간을 심판해도 되겠는가?”

* 금언: 재앙이 있는 날 신을 모독하지 말고 겸손히 자신의 잘못을 살펴보아라.

▣ 우물에 침을 뱉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탈무드>에는 다음 과 같은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떤 랍비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나이가 자기 집안의 돌을 길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랍비는 ‘왜 그런 짓을 하시오?’하고 물었으나 사나이는 웃기만 하였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이 사나이는 자기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땅을 남의 손에 넘기고 다른 고장으로 가려고 첫발을 떼는 순간 전에 자기가 버렸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가 한짓을 설사 잊고 있었더라도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고 만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속담으로, ‘자기가 마실지도 모르는 우물에 돌을 던지지 말라’는 것과 ‘화살을 만드는 자는 그로 인해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 심은 대로 거둡니다

영국의 어느 제과업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빵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그 제과업자에게는 매일 아침, 버터를 만들어 공급해주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납품되는 버터를 보니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납품된 버터를 저울로 일일이 달아 보았습니다. 예측한 대로 정량에 미달되었습니다. 화가 난 이 업자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에게 변상할 것을 요구하며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농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을 하던 재판관은 농부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만들어 그 제과업자가 파는 1파운드짜리 빵의 규격에 맞추어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서 납품을 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제과업자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그 1파운드짜리 빵의 양을 줄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농부는 줄여서 만들어진 빵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고 납품을 한 것입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빵을 줄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고야 만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헐뜯고 비난하고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 비난과 헐뜯음과 미움과 증오, 거짓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면 그 선한 결과가 자기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가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 의로우신 재판장

성경: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7)

몇 년 전에 대전에서 일부 판사들이 조직 폭력배와 술자리를 함께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판사는 양심과 법에 따라 판결을 해야 하는데, 조직 폭력배와 함께 어울림으로 인하여 그들의 판결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부이기는 하지만 재판 과정에 공정성이 결여되었다고 호소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사람이 내리는 판결은 불완전합니다. 의도적으로 판결을 굽게 할 수도 있고, 실수로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실수나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까지 꿰뚫어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아벨이 흘린 피의 호소를 들으셨던 하나님께서 판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사실은 발각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기도: 주님 보시기에 선한 삶을 살게 하소서.

▣ 심판의 날이 다가옵니다.

본문: 시96: 13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세계적인 부흥사 찰스 피니(Charls Finny)가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중 뉴욕의 한 치안판사의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피니야, 너 변호사가 되면 무엇 할래?”, “부자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는?”, “은퇴하겠지요”, “그 다음에는?”, “죽겠지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겠지요” 이 대답을 한 다음에 피니는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약 반 마일 되는 숲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이기적인 생활, 공허한 삶, 세상 쾌락을 즐기는 생활을 그만두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하고 간절히 기도한 끝에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왔습니다. 그 후로 50년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축복이 그의 삶에 충만했고 수천, 수만 명의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한 말씀대로 찰스 피니는 죽음과 심판을 깨닫고 생의 목적을 바꾸어 영광스럽고 보람 있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최종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하려는 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달력에는 온천하 만민을 공의로 심판할 날이 작정되어 있습니다. 죄의 심판과 그로부터의 구원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심판의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참 크리스천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한태완 목사 설교 중에서( http://www.je333.com)

▣ 심판에 관한 성경 말씀

0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겔33:20)

0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0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행17:31)

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0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0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

0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계18:8)

0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 심판에 관한 금언

0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평판이나 재산으로 그를 판단한다.(둑 드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의 생각을 표현할 때까지 판단을 미룬다. (어니스트 딤네)

0 명심하라. 판단이 약할 때는 편견이 강해진다. (카느 오하라)

0 황금을 시험하는 것이 시금석이듯 모든 판단에는 정확하고 진실된 표준이 있어야 한다.(에필테투스)

0 판단하기 전 그대의 마음을 비워 선입관이 없게 하라.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있든지 그대의 마음속의 자로 재면 잘못 재기 쉬우니라. 마치 황달병에 걸린 자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는 것과 같으리라. (필립 시드니 경)

0 사람을 그의 외모나, 습관이나, 생김새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대화의 특성과 그의 행함으로 판단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로 칭찬을 받는 것이 더 좋으니라.(로저 르스트랜지 경)

0 성실한 판단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사랑의 판단으로 남을 판단하라 (죤 M. 메이슨)

0 판단은 마치 저울과 같고 증거는 추와 같다. 그러나 의지가 저울대의 형평을 유지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균형 잡은 저울의 한쪽을 조금만 잡아당겨도 가벼운 쪽이 무겁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조금만 선입견이 가미되면 저울이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으로 나타나듯 형평을 완전히 잃게 된다. (리챠드 위틀리)

0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들을 판단하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한 것으로 우리를 판단한다. (헨리 웨이즈워드 롱펠로우)

0 인간은 누구나 남의 허물을 담는 주머니는 앞에 메고 다니나 자기의 허물을 주워 담는 주머니는 등에다 지고 다닌다. (김경선)

0 인간이란 자신의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투덜대면서도 자신의 판단력 부족에 대하여는 불평하지 않는다. (둑 드 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슬기로운 자는 사건의 중요성에 의해 결정짓고, 성급한 자는 억누르는 강도에 따라 결정지으며, 교만한 자는 무가치한 손에 들려진 남용하는 세력의 경멸과 분노에 의해 결정짓는다. (에드먼드 버크)

0 이웃에 대하여는 날카로운 눈으로 보나, 자신에 대하여는 두더쥐의 눈으로 본다. (쟝 드라 퐁테느)

0 지식의 자리는 머리에 있고, 지혜의 자리는 마음에 있다. 우리가 바르게 느끼지 못한다면, 잘못 판단할 것은 뻔한 일이다.(윌리엄 헤즐리트)

0 우리는 사람들 자체를 판단하지 않고,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판단한다. (스베친 부인)

0 어리석은 자는 어떤 일을 당하고 난 다음 그 사건에 의해 행동을 측량하고, 슬기로운 자들은 이성과 정당한 규칙에 의해 미리 판단한다. 어리석은 자는 행위를 판단하기 위해 결과를 살핀다. 나로 하여금 행위를 살피게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게 하리라. (리챠드 힐)

0 어떤 의견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반기를 들었고 내가 그렇게 했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몹시 쓰라리게 뉘우쳤다.(바르톨트 G.니부어)

0 경솔하고 천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웃고 조롱하며 그들과 다투고 경멸할지 모르나 자신에 대하여 어떤 존경심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을 천하게 생각하는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0 인간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느라 헛수고를 하고 오류를 범하며 쉽게 죄를 짓는 일이 간혹 있으나, 자신을 판단하고 살피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유종의 미를 충실하게 맺는다. (토마스 아 켐피스)

0 인간에 관한 우리의 판단에 있어서 광학의 법칙과는 상반된다. 우리 주위 가까이 있는 사물을 가장 희미하게 보는 것이다. (리챠드 워틀리)

0 어떤 사람의 마음은 마치 오목 거울이나 볼록 거울처럼 생겨서 사물의 영상을 받으나 결코 사실 그대로 받지 않는 습성이 있다. (주베르)

0 인간의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일보다 남의 일은 더 잘 보며 더 잘 판단한다. (티렌티우스)

0 결코 심판의 날을 잊지 마라. 어리석은 자들은 악한 일에 대한 심판은 더디며 이 땅에는 우연만 있고 공의가 없다고 생각하나 심판은 반드시 오며 비록 하루나 이틀 한 세기나 두 세기가 늦게 올지 모르나 인간에게 죽음이 있는 것처럼 분명히 심판이 있다. (토마스 칼라일)

0 마치 루터의 농부가 한 쪽으로 쓰러지는 것을 구해주자 다른 쪽으로 거꾸로 쓰러지는 것처럼 인간의 판단은 금하면 더하려 든다. (주세페 마치니)

0 시대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장점에 따라서 모든 것을 판단하라.(필립 도머 스탠호프 체스터 필드 경)

0 언제나 일에만 열중하는 자는 진정한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에드먼드 버크)

0 인간의 판단은 오류에 빠지기 쉽다. (오비디우스)

0 인간의 판단은 운명이 기대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죠지 채프먼)

0 판단할 때 조급함은 죄이다. (푸블리우스 시루스)

0 평범한 감각은 좀처럼 우리들을 나쁜 길로 이끌지 않는다.(에드워드 영)

0 한사람의 냉정한 판단이 천 번의 조급한 협의회와 맞먹는 가치가 있다. (토마스 우드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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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심판

1. 의의 심판

1) 이스라엘의 원수를 멸망케 함(사11:4, 사34:8, 사59:16-18, 학2:22,23)

2) 의를 세우기 위해 죄인을 벌주실 것임(출23:7, 왕상8:32, 대하6:23, 시51:4, 애1:18)

3) 의로운 자의 원수를 벌할 것임(시7:6-9, 시7:11-13, 시58:10,11, 시129:4)

4) 만민을 심판하실 것임(사51:5)

5) 큰 음녀를 심판하실 것임(계19:2)

2.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1)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심(신10:17, 골3:25)

2) 불의나 치우침이 없으심(대하19:7)

3)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벌하심(렘9:25)

4) 악을 행하는 모든 자를 심판할 것임(롬2:9, 벧전1:17)

‘심판’에 대한 준비

죽음은 노인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죽음과 가까운 곳에 사는 노인들은 오히려 죽음에 대

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죽음은 성격이 매우 급한 속성을 갖고 있다.

예고없이 찾아와 사람을 당혹하게 만든다.

또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 아무도 죽음을 연기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

신앙인들의 죽음이 평화스러운 것은 죽음을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4:12)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얼마 전 KBS-TV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요란해지고 사치와 환락이 판치는 강북과 강남의 유흥가를 현장 르포로 취재했습니다. 자정이 넘자, 밤이 되면 더욱 매상고를 올릴 수 있다는 과소비와 충동의 거리는 새벽 4시가 되어도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의 요란함과 흥청망청 자기의 젊음을 술과 성적욕망으로 채워나가는 돈 많은 젊은이들의 비행, 국산차가 아닌 외제차가 있어야 더 쉽게 젊은 여인들을 유혹하고 노닐 수 있다는 새 풍속도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취재 기자는 ‘어찌할꼬?’하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그곳을 찾는 젊은이들만의 행동양식이겠습니까? 우리 시대, 우리 모두의 삶에 감추어진 뒷면은 아니겠습니까. 한국민 전체의 절반 이상이 고스톱을 한다는 이야기나 술 소비량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성폭행이 늘어나고 마약 상용자가 늘며 부모를 구타하는 반인륜적인 자녀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불경건과 불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교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 거짓과 불의와 불경건을 회개하라고 할 만큼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붙잡힘을 받고 이 시대 앞에 거룩한 빛을 비추며 서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시대 정신과 사고에 의해서 오히려 교회가 조정을 받으며 그 세속정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 모두의 갈등과 혼란과 위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함을 피부로 느끼고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자체가 세속정신의 물결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현실 떄문에 자조 하고 있습니다. 교단의 총회장을 선출하는데 금전과 향응이 난무하고, 지방색의 결속과 배타가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도 이것이 어쩔 수 없는 당위성이라 수용하며 양심의 가책에서마저 면제를 받으려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가 도덕적 부패와 타락에서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다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에는 신앙과 신학의 문제가 깔려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어지럽고 부패해도 그래도 나는 이런 사람들보다 윤리적으로 조금은 노력하고 애쓰는 도덕론자라는 자부심이며, 다른 하나는 만약 이 부정과 부패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진다 해도 나는 예수를 믿고 있기 떄문에 안전하고 만약 내게 그 심판이 다가오더라도 불신자보다는 늦게 그리고 적게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입니다.

심판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엄격하고 두려운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국에 두 사람의 농부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고 한 사람은 불신자였습니다. 한 날은 불신자 친구가 그리스도인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고 믿지도 아니한다. 그러나 지난 봄에 파종을 잘하였고 여름엔 순풍으로 물대기와 김매기를 잘하였고 가을엔 풍성한 수확을 거두웠다. 신자 친구들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 없었다.”

그때 그리스도인 친구는 이렇게 답신했습니다.

“하나님은 10월의 결과를 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의 정하신 날에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 언젠가 갑자기 밤의 도둑같이 이른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지명 수배가 되었어도 수십 억의 채무가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죽음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신앙과 행위를 따라 추호도 가감도 없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심판

아프리카를 개척한 영국의 대표적인 탐험가는 세실 로드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다. 로드는 아프리카 원주민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벌어들임으로써 ‘애국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노예제도와 영국의 침략정책을 강력히 반대해 ‘반역자’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날 로드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빙스턴은 영국 국립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돼 국내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역사가 두 사람을 심판한 것이다.

성폭력의 역사 심판의 역사

닌릴 여신은 무더위를 피해 호수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언덕길을 걷고 있던 엔릴신은 닌릴의 아름다움에 도취돼 호수 속에 뛰어들어 그녀를 겁탈한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신화 “엔릴과 닌릴”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문명의 최초 언어로 쓰여진 신화들 속에 남녀 관계와 성폭력 사건이 많이 고증되고 있다.

구약성경에 다윗왕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관계로 하나님의 매서운 질책을 받는다. 그는 고의로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한다. 이로 인해 다윗의 집에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다윗의 딸이며 암살놈의 여동생인 다말을 성폭행 한다. 결국 전대미문의 궁중쿠데타가 일어나는 비극을 겪는다.

성폭력은 세계사의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을 보는 하나님의 시각에 따라 역사가 달라진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시한 패륜의 도시국가들은 하나님께서 파멸시키셨다. 약자와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불의와 문란한 행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세계의 선진국들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오늘처럼 어수선한 세태에 기독교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독교는 윤리적 도덕적 법적으로만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진정한 회개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 탄생 때까지 성행위를 하지 않았다.(마1:25)

인류의 성의 역사도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시작됐다. 죄악으로 도덕불감증에 빠진 인간의 양심을 소생시키고 회개의 기도가 터져 나오게 하는 길은 성령을 받는 것밖에 없다.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 눈과 손과 몸의 움직임이 달라져 여자를 보고도 음욕을 품지 않게 된다.(마5:27~30)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도록 간구하자.

하늘의 심판

한 탐욕스런 노인이 죽자 천사들이 그를 심판대 앞에 데리고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일생을 통틀어 자비를 베푼 사례를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돈을 모아놓고는 쓰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벌을 내리기를 그가 일생동안 번 돈을 단 열흘만에 다 써야지 안그러면 지옥으로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급으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아무리 좋은 옷을 사입고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을 해도 돈은 자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써도 써도 없어지지 않는 돈을 보며 그 노인은 한탄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돈을 많이 모았던고!

요즈음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비자금 파문을 보면서 그 엄청난 치부로 자선사업이나 넉넉히 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에게 시한부로 그 돈을 다 쓰고 오라고 한다면 이자만 가지고도 하루에 1억원을 써야한다는데 하루이틀 아니고 평생을 그렇게 써야한다면 돈쓰는 일이 얼마나 지겨울까요!

성서에 이르기를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느니라고 경고했습니다.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청년이 상습적인 도박꾼이 되었다. 그는 즉시 사탄의 손아귀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그런데 한번은 그가 잉글랜드 서부에 있는 어느 경마장에 갔다가 어디선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그곳으로 가 보니 노래하는 사람들을 가운데 두고 적은 무리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옥외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본 청년의 마음에서 갑자기 증오심이 솟구쳤다. 그는 짜증 섞인 소리로 이렇게 중얼댔다.

“이런 멍청이 같은 사람들을 봤나. 자기네 교회에서나 찬송가를 부를 일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경마장에까지 와서 찬송을 하고 야단이야!”

그런 다음 아주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가의 한 구절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흰 종이 위에 적힌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되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 글을 읽는 순간, 청년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즉시 경마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간구했다. 그 이후,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전 생애를 바쳤으며, 오늘날 복음전도자로 일하고 있다.

세가지 심판

본문: 히브리서 9장27-28절

공산주의 혁명을 하면서 4500만 명이나 죽인 스탈린이 죽는 장면을 그의 딸 스베틀라나 스탈린이 증언한 것이 뉴스위크지(Newsweek)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몹시 고통스럽고 무서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만 편안한 죽음을 허락 하시나봐요. 마지막 순간이 임하자, 갑자기 눈을 크게 부릅뜨고 방안에 있는 사람 하나 하나를 훑어보시는데 아주 무서운 눈빛이었습니다. 정신 나간 것도 같고 화난 것도 같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찬 눈초리였습니다. 한참 둘러보시더니 왼손을 허공을 향해 번쩍 들더니 마치 저주를 우리 모두에게 끌어내리는 듯한 행동을 하시는데 아주 협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 순간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도 없고 내세도 없다고 하며 교회를 파괴하며 공산주의 혁명으로 수천만 명을 잔인하게 죽이더니 지옥으로 떨어지면서 공포에 찬 죽음을 당했습니다. 영국에 무신론자 협회의 회장이었던 프란시스 뉴포트(Francis Newport)는 죽어갈 때 말하기를 “나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또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기 때문이다. 또 지옥이 없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내 영혼이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내게 소망이 있다는 말을 집어 치우라. 나는 영원히 버림받은 것을 안다.” 고 하면서 죽었습니다.

본문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하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심판 후에는 영원한 천국이 있고 영원히 고통을 받는 지옥이 있습니다. 강력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모든 것에 대해서 시간을 바쳐 생각해왔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인 죽음에 대해서만은 고려하지 않았구나”하면서 탄식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큰 심판을 면키 위한 작은 심판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던 어느 자매에게 어느 순간인가 주님께 헌신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해지고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주일 낮 예배만 간신히 드리고 개인적인 시간을 충분히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 찾아오는 건 허전함과 공허함뿐이었다. 그녀가 전에 하나님께 본인도 모를 만큼 수없이 약속했던 헌신의 약속들. 그녀는 잊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사인을 보내셨다. 본인과 가족들에게 크고 작은 고통을 쉬지 않고 내리신 것이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럼 당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그녀를 향한 심판의 회초리는 사랑 그 자체였다

심판자

죄인의 생명을 구해 준 판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죄인이 다시 죄를 지어 법정에 나왔습니다.

죄인은 얼마 전에 자기의 생명을 구해 주었던 판사를 보고 반갑게 소리쳤습니다.

“판사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전에 나의 생명을 구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판사는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전에 나는 당신의 구원자였지만 지금은 당신의 심판자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믿음으로 주 안에 나오는 자마다 누구든지 구원해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를 피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그를 몰아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가 오면 우리의 구원자로 나섰던 그분은 우리의 심판자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자비는 온데간데 없으며 다만 공의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개미 떼를 심판하는 사람

배가 가라앉자, 한 사람이 온통 신의 불공평에 대해서 항의를 뱉아 놓는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요. 신에 대하여 경건한 마음을 안 가진 사람이 이 배에 탔기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죽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럴 때 바닥을 기어다니던 개미 떼 중 한 마리가 그의 발등을 물었다. 자기 발등을 깨문 개미는 한 마리 였는 데도 그 사람은 개미 떼를 모두 밟아 죽였다.

이에 헤르메스가 기다란 막대를 하나 가지고 그 사람 앞에 나타나더니 그의 배를 찌르면서 야단을 쳤다.

“그대가 개미 떼를 심판하듯이 신들이 인간을 심판해도 되겠는가?”

* 금언: 재앙이 있는 날 신을 모독하지 말고 겸손히 자신의 잘못을 살펴보아라.

꿈속의 심판대

어느 목사님이 꿈속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었다.

의로우신 재판장인 하나님께서 신문하신다.

“너는 항상 진실했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너는 항상 깨끗하게 생활했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럼, 정직하게는 살았는가?”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신문이 끝나자, 목사님은 그만 머리를 깊이 떨구고, 지옥 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한 줄기 광채가 비치면서 예수님이 그의 곁으로 오시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여, 이 사람이 세상에 있을 때 깨끗하게도, 정직하게도 살지 못한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 목사는 평생을 나를 위하여 살아 왔으니, 저도 이 목사를 변호하겠나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 덕분에 천국으로 인도 받았다.

공의의 심판자

항상 당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가장 공정한 심판주 앞에 나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뇌물이나 변명으로 사정을 보아 주실 분도 아니며, 다만 공의로써,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의 진노 앞에서도 떨고 있는 어리석고 가련한 인생들이여, 당신의 모든 악을 샅샅이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무엇으로 대답하려고 합니까? (욥 21:14) 어찌하여 당신은 아무도 당신을 변명해 주거나 사정 보아 줄 자가 나설 수 없고 각자가 자기 행한 데서 답변해야 할 그 마지막 심판에 대하여 왜 아무러한 준비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의 노

력이 쓸 데 있고 당신의 눈물도 보람이 있어 영혼을 깨끗케 할 수 있고 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크고 전체적인 정화를 경험합니다. 고난이 해치는 동안 그 자신의 잘못을 탄식함보다 다른 사람의 악을 슬퍼하며, 그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그는 충심으로 그들의 진노를 용서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용서 구하는 일을 주저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분노보다 동정심을 가지며, 엄격하게 자기를 제어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그의 육체가 영혼에 복종하도록 애

씁니다.

우리의 죄를 보상하고 악을 지금 물리치는 것이 후일의 평화를 위하여 그냥 두는 것보다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육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하늘의 심판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미국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한번은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 저명인사 20여명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친구가

“웹스터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때 웹스터가 조금 있다가 얼굴을 들고,

“예, 제일 나에게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이 이 다음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 내 마음이 가장 엄숙해집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 하는 말, 하는 행동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을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심고 좋은 것을 거두어야겠습니다.

최후의 심판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다. 이 사람이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이다.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웹스터씨, 당신의 일생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니까 그는 조금 있다 얼굴을 들고 대답하는 말이

“제일 나에게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들이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 집니다.” 하고 말했다.

죽음과 심판

성경: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전쟁터에서 고참 병사가 총탄에 쓰러지자 군목이 달려와서 “병사,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는가?”라고 묻자 병사는 눈을 크게 치켜뜨고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수없이 싸우면서 죽음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두렵다니요, 저는 겁장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하필 죽어가는 시간에 나의 감정을 건드리십니까?” “하지만 병사, 죽음 후의 일은 준비되었나?” 병사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목사님, 바로 그것이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병사는 죽음 후에 올 일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경험한 이 세상의 위험에는 용감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셨습니까? 그리스도는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지금 당신의 손을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도록 요청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에게 구원이 있고 용서가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밖에는 남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로 나오시면 당신은 결코 심판대 앞에 서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심판

성경: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잠19:29)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자인 미국의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교회에서 회의를 한참 진행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듯 말했습니다. “여러 얘기하지 말고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듣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가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

거만하고 악한 사람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자신의 형편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형태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죄악이 가득 차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하겠습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

한 권사님이 하늘 나라에 갔다 오셨습니다. 그 분은 세상적으로 이름이 있는 분이었고 또 신유의 은사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분을 능가할 분이 없을 정도로 큰 은사를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분이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한 분이고 주님 앞에 외견적으로는 충성을 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가 보니 그 분에게 배당된 집은 개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를 아시느냐고 했더니 모른다고 하시더랍니다. 또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목사님을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분이 그런 일을 경험한 후에는 자기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북한 선교원에 몇십억을 기증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목사인 내가 그럴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깨끗하게 살면 존경받습니다. 목사가 성결하게 살면 사람들 눈에 돋보입니다. 목사가 성경이 말한대로 살면 존경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즈음 그 문제를 가지고 계속 주님 앞에서 묵상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향하신 뜻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제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눈 앞에 드러나 있는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참 바른 삶입니까? 아직도 멀었고 도무지 모르는 것도 많고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너희는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회당에서 기도한다고 외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다른 사람이 다 맡아버린 향기는 주님께 드려지지 않습니다.

밀봉되어 있던 선행들이 주님 앞에서 마지막 날에 열려질 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선이 잘못하다가는 어느 권사님의 경우처럼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라는 결론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심판은 꼭 있다

본문: 히9:27 * 찬송:162장, 221장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영국의 메리 여왕은 1553년 왕위에 오른 후 기독교인을 심하게 핍박했다.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후퍼도 있었다. 후퍼의 화형을 담당했던 집행관은 후퍼에게 신앙을 포기하면 살려 주겠다고 구슬리면서 「생각해 보시오 인생은 즐겁고 죽음은 고통스럽지 않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후퍼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영원한 기쁨의 삶을 살며 비신앙인은 영원한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우리 속담에 “남의 눈에 눈물내면 제 눈에는 피가 난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 는 속담처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

요즈음은 녹음기가 널리 보급되어 모든 대화나 강연을 있는 그래로 녹음하여 기록으로서 영구적으로 보존이 된다. 기침 하나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녹음된다. 그런데 과학자들에 의하면 오늘 한 말 뿐만 아니라 어제 한 말도 되살려 녹음기에 옮겨 놓을 수 있는 날이 오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마치 군용견이나 경찰견이 땅에서 범인의 냄새를 맡으며 어디까지라도 추격해 가는 것처럼 사람의 하는 말에도 각자 특유한 파장을 가지고 있어서 그 파장을 추적하면 우주 공간 어디엔가 날아가고 있을 그 사람의 말을 녹음기에 옮겨 놓을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이론이다. 사람도 이렇게 엄청난 생각을 현실로 옮겨 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정확하게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를 기억하고 계시겠는가? 그러기에 우리는 일생동안 행한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됨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전혀 없다.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며, 행한 대로 갚으시는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갈 6:7~9, 고후 9:6, 전 11:9)

구세주냐 심판주냐?

어떤 판사가 해수욕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건져주었는데 몇년 후에 그 사람이 큰 죄를 범하고 바로 그 판사 앞에 서서 전에 살려준 것같이 살려달라고 했으나 “전에는 살려주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네 죄를 재판하는 사람이다”라고

냉정히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어주시고 부활하셔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주셨으나(요한3:16)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

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7절)고 말씀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9:27) 고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지금 예수를 믿으면 구세주가 되시고 아니면,심판주가 되십니다.

최후의 심판

교황청의 사라진 영광을 자랑하는 화려한 건물 중의 하난가 바티칸의 시스틴 채플입니다. 1473년 교황 식스터스 4세를 위해 건립된 이 예배당은 특히 천재적 화가 미켈란젤로의 벽화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알려진 그림이 “최후의 심판”일 것입니다.

세상 끝날에 가서 사람들은 물론 천사들까지도 심판을 받는다는 성서적 사상을 웅장한 화면에 힘껏 묘사한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과연 공정한 세상이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아니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 속에 내재한 기본적인 도덕관념으로 한다면, 선한 사람은 상을 받고 번영하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고 패망해야 할 것인데 세상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가장 큰 위안이요 힘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불의한 수단으로 재물을 얻고 악한 방법으로 권세를 잡은 사람은 최후의 심판이 가장 두려움이요 고통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세상의 판검사는 뇌물로써 매수되어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있어도 최후의 심판을 맡은 재판장은 매수되는 일도 없으려니와 철두철미 공정무사하심을 확실히 믿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믿기 때문에 내 마음은 항상 든든합니다.

심판의 날에

심판의 날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열매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날에는 “너는 믿었느냐?는 질문이 아니라 “너는 실천자였느냐, 아니면 수다장이에 불과했느냐?” 는 질문을 들을 것이다.

정의의 심판

성경: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19-20)

전 보르도 지역 경찰 책임자인 모리스 파퐁(87세)은 반인류적 범죄로 징역 20년을 구형 받았습니다.

파풍은 나치의 프랑스 지배가 끝난 뒤에도 샤를 드골 대통령의 밑에서 파리 경찰국장을 지냈으며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는 예산 장관을 역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려왔습니다.

그가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계기는 81년 한 신문에 의해 유대인들을 대거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 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들이 공개되면서부터 입니다.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 그였지만 유태인 희생자 가족과 단체들의 고발에 따라 지난 83년 정식으로 기소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반인류 범죄로 프랑스 전직관리가 법정에 선 것은 파퐁이 처음입니다.

악인 중에는 당대에 재앙을 받아 죄 값을 치르는 사람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형통하고 잘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는 날 그가 평생 누렸던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는 빈손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드시 악의 실체는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이 한 번은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인데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랍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웹스터 씨, 당신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웹스터는 얼굴을 들고 대답하기를 “제일 나에게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하는 모든 일을 이 다음에 내가 하늘 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에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집니다.”하고 말했습니다.(계20:4-14)

이 세상에 있을 때도 받는 심판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逆天者亡, 順天者興)는 말과 같이 참 성도들의 피를 마신 악당들이 망하지 않을 리 없다. 영국의 니므롯이라던 매리 여왕도 천벌을 받아 죽고 신교도인 엘리자베스 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순교 성도 이글스(G. Eagles)를 배반한 라딘(Lardyn)은 목매어 자살했다. 아베스가 처형장으로 가던 중 장관의 하인이 그를 저주하고 야유하더니 불길이 그에게 떨어져 야베스가 자기 옷을 벗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 것과는 대조적으로 옷과 신을 벗어 던져 버리면서 “하나님의 참 종 야베스는 구원을 받고 나는 정죄를 받는다.”고 외치고 마차에 묶인 채 주인의 집에 가서 반년만에 죽었다.

극악스럽던 본나도 메리 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고 많은 로마 교도가 붙잡혔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본나였다. 파웰, 스미스, 스토리 등 박해자들은 이때 천벌을 받고 급사 또는 참사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3) 성도들은 상급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심판에 관한 금언

0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0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계18:8)

0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

0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겔33:20)

0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의 평판이나 재산으로 그를 판단한다.(둑 드 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의 생각을 표현할 때까지 판단을 미룬다. (어니스트 딤네)

0 명심하라. 판단이 약할 때는 편견이 강해진다. (카느 오하라)

0 황금을 시험하는 것이 시금석이듯 모든 판단에는 정확하고 진실된 표준이 있어야 한다.(에필테투스)

0 판단하기 전 그대의 마음을 비워 선입관이 없게 하라.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있든지 그대의 마음속의 자로 재면 잘못 재기 쉬우니라. 마치 황달병에 걸린 자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이는 것과 같으리라. (필립 시드니 경)

0 사람을 그의 외모나, 습관이나, 생김새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대화의 특성과 그의 행함으로 판단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로 칭찬을 받는 것이 더 좋으니라.(로저 르스트랜지 경)

0 성실한 판단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사랑의 판단으로 남을 판단하라 (죤 M. 메이슨)

0 판단은 마치 저울과 같고 증거는 추와 같다. 그러나 의지가 저울대의 형평을 유지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균형 잡은 저울의 한쪽을 조금만 잡아당겨도 가벼운 쪽이 무겁게 나타난다. 이와 같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조금만 선입견이 가미되면 저울이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으로 나타나듯 형평을 완전히 잃게 된다. (리챠드 위틀리)

0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들을 판단하나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한 것으로 우리를 판단한다. (헨리 웨이즈워드 롱펠로우)

0 인간은 누구나 남의 허물을 담는 주머니는 앞에 메고 다니나 자기의 허물을 주워 담는 주머니는 등에다 지고 다닌다. (김경선)

0 인간이란 자신의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투덜대면서도 자신의 판단력 부족에 대하여는 불평하지 않는다. (둑 드 라 프랑수아 로슈푸코)

0 슬기로운 자는 사건의 중요성에 의해 결정짓고, 성급한 자는 억누르는 강도에 따라 결정지으며, 교만한 자는 무가치한 손에 들려진 남용하는 세력의 경멸과 분노에 의해 결정짓는다. (에드먼드 버크)

0 이웃에 대하여는 날카로운 눈으로 보나, 자신에 대하여는 두더쥐의 눈으로 본다. (쟝 드라 퐁테느)

0 지식의 자리는 머리에 있고, 지혜의 자리는 마음에 있다. 우리가 바르게 느끼지 못한다면, 잘못 판단할 것은 뻔한 일이다.(윌리엄 헤즐리트)

0 우리는 사람들 자체를 판단하지 않고, 우리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판단한다. (스베친 부인)

0 어리석은 자는 어떤 일을 당하고 난 다음 그 사건에 의해 행동을 측량하고, 슬기로운 자들은 이성과 정당한 규칙에 의해 미리 판단한다. 어리석은 자는 행위를 판단하기 위해 결과를 살핀다. 나로 하여금 행위를 살피게 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게 하리라. (리챠드 힐)

0 어떤 의견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반기를 들었고 내가 그렇게 했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몹시 쓰라리게 뉘우쳤다.(바르톨트 G.니부어)

0 경솔하고 천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웃고 조롱하며 그들과 다투고 경멸할지 모르나 자신에 대하여 어떤 존경심이 있는 자는 다른 사람을 천하게 생각하는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0 인간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느라 헛수고를 하고 오류를 범하며 쉽게 죄를 짓는 일이 간혹 있으나, 자신을 판단하고 살피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유종의 미를 충실하게 맺는다. (토마스 아 켐피스)

0 인간에 관한 우리의 판단에 있어서 광학의 법칙과는 상반된다. 우리 주위 가까이 있는 사물을 가장 희미하게 보는 것이다. (리챠드 워틀리)

0 어떤 사람의 마음은 마치 오목 거울이나 볼록 거울처럼 생겨서 사물의 영상을 받으나 결코 사실 그대로 받지 않는 습성이 있다. (주베르)

0 인간의 본질은 자기 자신의 일보다 남의 일은 더 잘 보며 더 잘 판단한다. (티렌티우스)

0 결코 심판의 날을 잊지 마라. 어리석은 자들은 악한 일에 대한 심판은 더디며 이 땅에는 우연만 있고 공의가 없다고 생각하나 심판은 반드시 오며 비록 하루나 이틀 한 세기나 두 세기가 늦게 올지 모르나 인간에게 죽음이 있는 것처럼 분명히 심판이 있다. (토마스 칼라일)

0 마치 루터의 농부가 한 쪽으로 쓰러지는 것을 구해주자 다른 쪽으로 거꾸로 쓰러지는 것처럼 인간의 판단은 금하면 더하려 든다. (주세페 마치니)

0 시대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장점에 따라서 모든 것을 판단하라.(필립 도머 스탠호프 체스터 필드 경)

0 언제나 일에만 열중하는 자는 진정한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에드먼드 버크)

0 인간의 판단은 오류에 빠지기 쉽다. (오비디우스)

0 인간의 판단은 운명이 기대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죠지 채프먼)

0 판단할 때 조급함은 죄이다. (푸블리우스 시루스)

0 평범한 감각은 좀처럼 우리들을 나쁜 길로 이끌지 않는다.(에드워드 영)

0 한사람의 냉정한 판단이 천 번의 조급한 협의회와 맞먹는 가치가 있다. (토마스 우드로 윌슨)

마지막 날의 심판

한 권사 님이 하늘 나라에 갔다 오셨습니다. 그 분은 세상 적으로 이름이 있는 분이었고 또 신유의 은사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분을 능가 할 분이 없을 정도로 큰 은사를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분이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한 분이고 주님 앞에 외견 적으로는 충성을 다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가 보니 그 분에게 배당된 집은 개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나를 아시느냐고 했더니 모른다고 하시더랍니다. 또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목사님을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그분은 도저히 모른다고 말씀하셨답니다. 그 분이 그런 일을 경험한 후에는 자기 재산을 전부 정리해서 북한 선교 원에 몇 십억을 기증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분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목사인 내가 그럴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깨끗하게 살면 존경받습니다. 목사가 성결하게 살면 사람들 눈에 돋보입니다. 목사가 성경이 말 한대로 살면 존경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즈음 그 문제를 가지고 계속 주님 앞에서 묵상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향하신 뜻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제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나 있는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참 바른 삶입니까? 아직도 멀었고 도무지 모르는 것도 많고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밀봉되어 있던 선행들이 주님 앞에서 마지막 날에 열려질 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선이 잘못하다가는 어느 권사 님의 경우처럼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라는 결론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심판의 낱말뜻

1. 히브리어

둔 – 다스리다, 재판하다, 심판하다, 싸우다, 재판을 집행하다.

미쉬파르 – 법률로 선언된 판결, 재판을 받다.

솨파르 – 심판하다, 선고하다, 멈추다, 공의로 행하다, 결정하다.

2. 헬라어

크리마 – 복수, 벌, 심판, 형벌, 고소.

크리노 – 결정하다, 복수하다, 판결하다, 심판하다.

정죄와 심판

본문 : 요 3:18-19 ∴ 찬송:167장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어떤 곳에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부모에게 친절하고 자녀들에게 친절하고, 친구와 이웃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약속을 어기고 빈사 상태에 이르도록 부끄럽게 학대하여 마루 위에 내어 던져 기절하게 한 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수많은 증인들이 소환되었습니다.

모든 증인들은 다 바로 “이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 부모와 자녀와 이웃과 친구들에게 친절했던 사람입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결국 재판관이 언도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판결을 내리는 근거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처우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아내를 학대한 죄에 근거를 두고 재판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친절했었습니까?” 이 말에 동의하는 증언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정죄를 받았습니다. 비록 한 사람에게 대하여 죄를 범하여도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절히 대하고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불친절하게 대하므로 범죄자가 되시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활이나 친구에게 대하는 태도가 무엇이던 상관치 아니하고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경히 여기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냉대하면 그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요 5:24).

★ “나는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심판자(審判者)

우리나라 속담에 “똥 묻는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듯이, 자기 흉이 열 가지 있는 놈이 남의 흉 한 가지를 가지고 떠드는 것을 본다. 남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는 자가 자기 스스로 얼마나 떳떳한가를 따져볼 때 자신을 가지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한 일이다. 이러한 자기 스스로를 뉘우치도록 하는 예수의 교훈이 있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계실 때의 일이다. 예수를 미워하는 바리새 사람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 앞에 끌어다 놓고,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잡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그러한 자를 돌로 치라 하였는데 당신의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하고 물었다.

예수를 밉게 보았던 바리새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골려주려고 궁리하던 차에 마침 간음한 여자를 잡았으니 그것을 미끼로 예수를 시험해보려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예수가 이 여자를 죽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유다 사람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단죄(斷罪)할 권리가 인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불경한 자로 고발될 수 있고, 그렇다고 죽이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모세의 율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역시 소송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운 질문을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올가미를 씌울 생각으로 단단히 벼르고 미리 계략을 꾸민 것이었다.

때마침 예수는 올리브산 위에서 아침 일찍부터 그를 앙모해서 모여든 무리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여러 무리들과 이야기하고 또 손가락으로 땅에다 글씨를 쓰고 있었는데 바리새 사람들의 성화같은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할 형편이었다.

예수는 몸을 일으키면서,

“너희들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하고는 다시 허리를 굽히고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남을 심판하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이 완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들은 바리새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하나씩 둘씩 그 자리를 떠났다. 아무리 악한 바리새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양심에 찔리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간음한 여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모였던 모든 무리들이 가버리고 예수와 그 여자만이 남았다. 그때에 예수는 여자를 보고,

“여인이여! 그대를 처벌하려는 무리들은 어디 있느뇨?”하고 물었다.

그 여자는 대답했다.

“주여! 아무도 없나이다.”

예수는 다시 말했다.

“나는 너를 벌하지 않겠다. 가라.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심판, 인과응보에 관한 Q.T

0 나는 언제나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를 의식하고 살고 있는가?

0 나는 내가 사랑 없는 세상에 사랑을 심어야 하는 자인 것을 아는가?

0 나는 죄악의 어두컴컴한 터널 속에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속히 거기서 빠져 나오는가?

0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은 은밀한 곳에서 더 바른 행동을 하는가?

0 나는 눈물의 씨를 뿌림으로 기쁨의 단을 거두려는가?

0 나는 심판 날에 구원받을 확신이 있는가?

0 나는 지금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를 의식하며 살고 있는가?

0 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깨닫고 있는가?

0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이르기 전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행하고 있 는가?

0 나는 하나님의 뜻을 어겨 재앙 당한 일은 없는가?

0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을 그려보며 어떤 소망과 위로를 나눌 수 있습니 까?

0 나는 항상 주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순간 순간을 살고 있는가?

0 주님의 마지막 심판 날 나와 계산하자 말씀하실 때 내가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0 나는 항상 깨어 있어서 마지막 때를 잘 준비하고 있는가?

0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이 종말을 살아가는 나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 니까?

0 주의 날이 가까울수록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0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더 바른 행동을 하는가?

0 참된 판단을 하시는 하나님께 최종적인 판단을 맡기고 있습니까?

0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내가 버려야 할 교만과 이기심은 무엇입니까?

0 재앙의 원인들 중에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있습니까?

0 전쟁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려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0 나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0 나는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합니까?

최후의 심판

다니엘 웹스터라는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요 학자가 있었다.

이 사람이 국무장관으로 있을 때 된 일이다. 뉴욕의 어떤 호텔에서 저명한 사람 약 20명과 같이 저녁을 먹을 때 저녁을 다 먹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웹스터는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있더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웹스터씨, 당신의 일생을 통하여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 가운데 제일 중요한 생각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니까 그는 조금 있다 얼굴을 들고 대답하는 말이 “제일 나에게 엄숙하고 중요한 생각은 내가 지금 하는 모든 일들이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 가

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할 때 내 마음이 제일 엄숙해 집니다.” 하고 말했다.

역사적 심판기준

찰스 베어드의 역사연구의 핵심 4가지

찰스 베어드는 저명한 기독교 역사학자였습니다. 이분은 평생토록 역사를 깊이 연구하신 분인데, 하루는 기자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박사님께서 평생 역사를 연구하시면서 깨달은 것을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찰스 베어드 박사는 “요약하면 네 가지 진리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하고는 그 네 가지 진리를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나라나 인물을 멸하시고자 하는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이나 나라가 권세욕으로 날뛰고 있는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랑, 자기 의지, 자기 교만에 빠질 때 망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교만하면 망한다.” 가 아니라 교만 자체가 심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아주 천천히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의식하지 못합니다. 50년, 100년이라고 하면 굉장히 긴 시간 같지만, 역사에서 보면 그건 순간입니다. 역사를 보면 50년, 100년, 200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심판하셨는지가 보입니다. 따라서 단견으로 “공의가 없다. 사라졌다”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잘 따져보십시오. 만약 중국에 모택동이 없었다면 얼마나 선교하기가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모택동이 전국을 철도로 다 연결시켜놓았습니다. 그리고 만다린어로 언어까지 통일시켰습니다. 등소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개혁개방 정책 때문에 복음 전파의 길이 많이 열렸습니다.

네 번째로 역사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원리는, 어두움이 깊을수록 별이 또렷하게 보이고, 별이 보이면 곧 날이 밝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우리는 망했다. 소망이 없다” 이런 비판섞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심판

성경: “악인을 두호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잠18:5)

한 간악한 스코틀랜드인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말을 빌렸는데 사고였는지 거칠게 다루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이 죽고 말았습니다. 자연히 주인은 자기가 입게 된 손해보상과 함께 말 값을 지불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변호사는 손해배상은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현금대신 약속 어음을 받겠냐고 말 주인에게 묻자, 그 말 주인은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지불할 기한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마음대로 하시죠.”라고 말주인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간악한 그는 심판의 날에 지불하도록 어음을 발행했습니다. 결국 말 주인은 그 문제를 법정에 가져갔고, 거기에서 변호사는 자신의 변호에서 판사에게 어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어음을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약속어음은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심판의 날이므로 내일 지불할 것을 판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쉬지 않고 천천히 돌아갑니다.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쉬지 않고 돌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이 돌아감에 따라 갈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아도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악의 모양을 버리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성경연구

1. 최후 심판 날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묘사

1) 여호와의 날(사2:12, 사13:6, 욜2:11, 욜3:14, 암5:18, 슥14:1 계16:14)

2) 주의 날(고전1:8, 고전5:5, 고후1:14, 살전5:2,3, 살후2:1,2, 벧후3:10)

3) 그리스도의 날(빌1:10, 빌2:16)

4) 그 날(딤후1:12, 딤후1:18, 딤후4:8, 히10:25)

5) 권고하시는 날(벧전2:12)

6) 심판 날(마11:22, 마12:36, 행17:31, 벧후2:9, 요일4:17)

7) 진노의 날(롬2:5)

8) 심판과 멸망의 날(벧후3:7)

9)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욜2:30-32)

10) 마지막날(요12:48)

11) 주께서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날 때(살후1:6-10)

12)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 날(마25:31)

13)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날(고후5:10)

14) 낮(롬13:12)

2. 최후의 심판의 때

1) 죽은 후(히9:27)

2) 그리스도의 재림 때(마25:31-33)

3) 정해진 날(마13:30, 행17:31)

4) 세상 멸망의 때(벧후3:7, 벧후3:10-12)

5) 하나님만이 아심(막13:32)

3. 최후 심판의 근거

1) 자기 행위고전3:11-15)

2) 자기 신앙(마7:22,23)

3) 양심(롬2:14-16)

4) 율법(롬2:12)

5) 복음(약2:12)

6) 하나님의 의와 진실(시96:13)

7) 그리스도의 말씀(요12:48)

8) 생명책(계20:12-15)

4. 성도와 불신자를 향한 심판의 양면성

1) 상급을 위한 심판과 형벌을 위한 심판(마6:4, 마5:10,11, 롬2:7-10)

2) 사랑의 심판과 공의의 심판(시9:7,8, 시96:10, 요3:18, 요5:24, 행17:31)

3) 자비의 심판과 진노의 심판(눅6:38, 약2:13, 습1:15,16, 롬2:5-8)

4) 선행의 보상과 악행의 응보(마25:31-40, 마25:41-46)

5) 긍정적 소망과 영원한 절망(눅19:12-27, 고전15:19,20, 벧전1:5-7)

5. 최후 심판 때 보석같이 여겨질 행위들

1) 진실된 회개(눅15:7-10)

2) 전도(단12:3)

3)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요15:13)

4) 세상을 이긴 믿음(히11:6, 요일5:4)

5) 순교(계2:10)

6) 핍박을 기뻐함(마5:11,12)

7)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살전2:19,20)

8) 불타지 않는 공력(고전3:13, 14)

9) 겸손한 봉사(마10:42)

10) 주님께 대한 충성(마25:23)

11) 고난 중의 인내(히11:25,26)

12) 시험에 대한 승리(벧전1:7, 벧전4:12,13)

6. 최후 심판을 부인하는 자들의 결과

1)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됨(롬2:5)

2) 몹시 당황함(마24:48-51, 살전5:2,3)

3) 두려움에 떨며 자책함(계6:13-17)

4) 슬피 울며 탄식함(마25:24-30)

5) 영육의 구원을 얻지 못함(마16:27, 롬2:6-9, 롬10:10)

6)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지 못함(살후1:8,9)

7) 산산이 깨어지고 흩어짐을 당함(삼상2:10)

8)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마25:41-46)

9) 성도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함(계20:4,5)

10) 둘째 사망에 처함(계20:12-14)

7. 최후 심판의 엄정성에 대한 묘사

1) 하나님의 공의가 결코 굽지 않음(행17:31, 살후1:6,7)

2) 악인은 그 심판을 도저히 견딜 수 없음(시1:5, 시5:4,5, 벧전4:17)

3)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들이 선악간에 판단될 것임(전12:14, 고전4:5)

4) 죄악은 하나도 남김없이 징계됨(렘1:16, 마5:26)

5) 하나님의 극렬한 분노가 죄인 위에 쏟아질 것임(겔22:22)

6) 의인과 악인은 완전히 분리됨(마13:36-43)

7) 아무도 그 심판에 대해 변명할 수 없음(마22:12)

8) 누구도 이 심판을 피해갈 수 없음(히9:27)

9) 생명책과 행위의 책을 통해 전혀 틀림없이 심판함(계20:12)

8. 최후 심판이 예수의 재림 때까지 연기된 사실이 주는 교훈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심(딤전2:4, 벧후3:15)

2) 택한 백성은 한 사람도 잃지 않을 것임(요6:39)

3) 누구든지 회개할 충분한 기회를 받았음(롬2:4, 벧후3:9)

4) 끝내 회개치 않은 자는 변명할 수 없음(롬2:5)

5) 최후 심판 후에는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음(고후6:2)

6) 범죄 후 즉각 벌하시지 않은 사랑에 감사해야 함(사42:14)

7) 성도는 상급 위해 일할 충분한 기회를 부여받았음(갈6:9, 딛2:14)

8) 성도는 그리스도께 보일 열매를 준비해야 함(마25:19,20)

9) 범죄한 자는 미루지 말고 즉각 회개해야 함(마26:75, 벧후3:9)

10) 자신을 점검하고 게으르지 않도록 채찍질해야 함(고전15:58)

11)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써야 함(벧후3:13,14)

심판에 관한 성경연구

1. 심판자

1) 하나님(창16:5, 삿11:27, 대상16:33, 시75:7, 시96:13, 전3:17, 전12:14, 사2:4, 사3:13, 말3:5, 롬2:5, 롬3:6, 고전5:13, 딤후4:8, 히10:30, 히13:4)

2) 예수 그리스도(마13:30, 마16:25-27, 막8:38, 요5:27-30, 행17:31, 롬2:16, 고후5:10, 살후1:7,8, 딤후4:1-8, 벧후2:9, 계1:7, 계22:12)

2. 심판의 원인

1) 불순종(레26:14-39, 신28:15, 신32:19-43, 대하7:19-22)

2)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함(대하36:16,17)

3) 우상숭배(렘7:30-34)

4) 통치자의 행악(대하21:4-6)

5) 악을 사랑함(롬1:18-32)

3. 심판의 의도와 목적

1) 보상과 형벌의 기준을 밝힘(고후5:10, 딤후4:8, 계11:18, 계22:12)

2) 감추인 것이 드러남(전12:13,14, 눅12:2,3, 롬2:16, 고전3:13)

3) 회개시키기 위해(신30:1-3, 왕상8:33,34, 대하7:13,14, 욥5:17, 욥34:31,32, 시94:12,13, 시107:10-14, 겔20:37-43, 호5:15, 고전11:32)

4) 겸손하게 하려고(고후12:7, 단4:28-37)

4. 심판의 특징

1) 예고함(전11:9, 벧후2:4, 유1:6, 마13:30, 마13:40-43, 마13:49, 히6:2)

2) 무섭고 맹렬함(눅3:17, 눅10:10-14, 사66:24, 막9:48,49, 계21:8)

3) 심판을 피하지 못함(출34:7, 겔14:13,14, 마23:33, 히2:1-3, 히12:25)

4) 인간이 심판의 도구로도 사용됨(렘51:1,2)

5) 심판이 지연되기도 함(시10:5,6, 시50:21, 시55:19)

6) 오래 생각하지 않으심(욥34:23)

7) 주의 심판은 높아서 악인의 안력이 미치지 못함(시10:5)

8) 발하는 빛과 같은(호6:5)

9) 이방에 알게 하심(마12:18)

10) 죄를 밝히 드러내심(딤전5:24,25)

11) 말씀을 기준 삼음(요12:48)

5. 심판하시는 때

1) 현세에서(요12:31, 벧후2:3)

2) 장차(행24:25)

3) 믿지 아니할 때(요3:18)

4) 날을 작정하심(행17:31, 벧후3:7)

5) 일시간에(계18:10)

6) 부활시에(요5:29)

7) 내세에서(히9:27)

6. 하나님의 심판방법

1) 공의로 심판하심(창18:25, 시9:8, 렘11:20, 행17:31, 벧전2:23, 계16:7)

2) 행위대로 심판하심(삼상26:23, 욥34:11,12, 시62:12, 잠12:14, 잠24:11,12, 전12:14, 사59:18, 렘17:10, 렘32:19, 겔7:3,4, 겔7:8, 눅13:6-9)

3) 은밀한 것을 심판하심(전12:4, 롬2:16)

4)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하심(요5:22-30)

7. 하나님의 심판대상

1) 의인과 악인(전3:17, 유1:14,15, 계11:18)

2) 악인(욥21:30, 겔18:20-28, 벧후2:9, 벧후3:7)

3) 산 자와 죽은 자(행10:42, 딤후4:1, 벧전4:5)

4) 타락한 천사들(벧후2:4, 유1:6)

5) 임금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 자주자(계6:13-17)

6) 모든 사람에게 명시됨(막4:22, 행17:31, 고후5:10)

7) 우상 숭배자(렘1:16)

8) 거만한 자(잠19:20)

9) 거스리는 자(롬13:2)

10) 요동케 하는 자(갈5:10)

11) 믿음을 저버린 자(딤전5:12)

12)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계17:1)

13) 살인자(마5:21)

14) 노하는 자(마5:22)

15) 경건치 아니한 자(벧후3:7)

16)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죄를 범한 자(히10:26,27)

17) 불의를 좋아하는 자(살후2:12)

18) 간음하는 자(히13:4)

8. 심판 받은 자들의 실례

1) 하와(창3:16)

2) 아담(창3:17-19)

3) 가인(창4:11-15)

4) 노아의 홍수 이전의 사람들(창6:1-7:24)

5) 소돔(창19:23-25)

6) 애굽인(출7:20- 14:28)

7) 나답과 아비후(레10:1-3)

8) 가나안 사람들(신7:23,24)

9) 미리암(민12:1-15)

10) 아비멜렉(삿9:52-57)

11) 엘리의 집(삼상2:27-36, 삼상4:10-22)

12) 웃사(삼하6:7)

13) 유다에서 온 선지자(왕상13:1-24)

14) 여로보암(왕상14:7-15)

15) 시므리(왕상16:18,19)

16) 아합과 이세벨(왕상21:19-24)

17) 게하시(왕하5:27)

18) 산헤립(왕하19:35-37)

19) 아하시야(대하22:7-9)

20) 므낫세(대하33:11)

21) 하나냐(렘28:15-17)

9. 심판을 면하는 법

1) 기도함(시143:1,2)

2) 예수의 말씀을 받고 믿어야 함(요3:18, 요5:24, 요12:48)

3) 사랑을 실천해야 함(요일4:16-19)

4) 긍휼을 행해야 함(약2:13)

5)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함(막5:7-9)

심판에 대한 성구

“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 ” (신학 논단)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 은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켜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한 남자가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모습 속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사실성 있게 감돌고 있다. 이 근육질의 청동 조각상은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생각하는 사람” 은 “지옥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기 전에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인간의 내면세계” 를 묘사하고 있다. 그 청동 조각상에 담긴 핵심 사유는 “고민” 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고민에 빠져 사는 존재가 “인간” 이다. 그가 고민한다는 것은 갈등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갈등은 두 가지 이상의 목표나 동기, 정서 등이 상충할 때 한 개인이나 집단 안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 새, 물고기 같은 동물들은 생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살기에 목표의 충돌에 따른 갈등이 없다.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모종의 동기가 있고 특정 상황에서 느끼는 정서가 있다 해도, 그것을 정의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인간의 몫이지 짐승들은 자신들을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한편 인간에게 고민과 갈등이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이성과 양심이 있다는 증거이다. 『 14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에 있는 일들을 행할 때에는 율법이 없어도 이것들이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그들의 양심도 증거하고 그들의 이성이 송사하거나 서로 변명하여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여 주느니라.) 16 이런 일은 하나님 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있으리라』 (로마서 2:14 ∼ 16 ) . 성경은 죄에 대한 이방인들의 고민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시킨다. 이방인이 자기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근거해서 죄를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갈등한다는 것은, “심판” 이 인간의 본성이 지니는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인간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고 그의 이성이 송사하거나 서로 변명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결과에 대해 스스로 가치를 매기고, 더 나아가 그에 대해 심판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물건에 책정된 값이 있듯이 인간의 행위에도 값이 매겨진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저울로 달아 보신다. 일례로 바빌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이 하늘의 주를 거역하여 자신을 높이고 주의 전의 기명들에 술을 따라 마시며 우상들을 찬양하자, 하나님께서는 손가락을 보내시어 궁전 회벽에 글을 쓰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 』(다니엘 5 : 25 ) 이었다. 다니엘이 내린 해석에 따르면, 『 26 … 메네 는 하나님 께서 왕의 왕국을 헤아려서 그것을 끝내셨다 함이요, 27 테켈 은 왕을 저울에 달았더니 부족함이 나타났다 함이요, 28 페레스 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데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 … 』 (다니엘 5 : 26 ∼ 28 ) 는 뜻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치를 저울에 달아보시는 분으로서 그 사람이 저지른 죄에 “죗값” 을 매겨 그에 따른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 30 그날 밤 칼데아인들의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31 메디아인 다리오가 그 왕국을 취하니, 약 육십이 세였더라』 (다니엘 5:30 , 31 ) .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 안에 심판의 본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류가 제정한 형벌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다. 기원전 1750 년경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함무라비 법전” 은 문자로 표현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일종의 성문법이었는데, 총 282 개 조로 구성된 그 법전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의 원칙이 담겨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제 1 조 ─ 만약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워 놓고도 그것을 입증하지 못할 때는 모함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 제 6 조 ─ 만약 사람이 사원이나 궁전의 재산을 훔치면 사형에 처한다. 또한 그렇게 훔친 물건을 받는 사람도 사형에 처한다. 제 7 조 ─ 만약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들이나 노예로부터 증인이나 계약서 없이 은이나 금, 남녀 노예, 소나 양, 나귀 등을 사거나 보관하기 위해 받으면 그 사람은 도둑으로 여겨져 사형에 처한다. 」 함무라비의 법은 눈에도 사형, 이에도 사형이라 할 정도로 잔혹했다. 함무라비 때의 “사형” 은 오늘날과 달리 “기본 형벌” 에 속했는데, 당시에는 소위 “인권” 이란 것이 전혀 없었던 셈이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집행된 형벌은 그 종류가 다양했는데, 고대 중국의 경우 끓는 물이나 기름에 삶아 죽이는 “팽형,” 죄명을 얼굴이나 팔뚝에 문신으로 새기는 “묵형,” 죄인의 코를 베어 내는 “의형,” 죄인의 발뒤꿈치를 베어 내는 “월형,” 무릎 아래를 자르거나 무릎 연골을 잘라내는 “빈형” 등이 있었다. “참수형” 과 “투석형” 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슬람권에서 실행되고 있으며, “태형” 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에서 집행되고 있다. “가스형,” “교수형,” “약물 주사형,” “전기의자형,” “총살형” 등도 각 나라에서 사형의 한 방법으로 제정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형법 제 66 조에 따라 “교수형” 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사형 제도 외에도 수형자를 교도소 내에 가두고 복무하게 하는 “징역” 과 교도소에 구치하는 “금고,” 30 일 미만 내에서 감금하는 “구류,” 일정한 자격을 상실시키는 “자격 상실,” 자격을 한동안 정지시키는 “자격 정지,” 돈을 내게 하는 “벌금” 등이 형법에 규정되어 있다. 인간은 죄에 대해 형벌을 집행하는 소위 “심판하는 만물의 영장” 인 것이다.

하지만 짐승과 곤충의 세계에는 심판이 없다. 바다나 민물에 사는 물고기들에게서 형벌이 집행되는 것을 보았는가? 전혀 없을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그것들에게는 이성과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사형과 태형, 사지 절단, 징역, 자격 정지, 벌금 등과 같은 형벌은 어떤 나라, 어떤 문명에서도 존속해 왔다. 따라서 “인간이 왜 동료 인간을 심판해야 하는가?” 라는 고민은 오직 인간이라는 피조물에게서만 일어나는 유의미한 사색인 것이다.

간혹 자신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그것이 그들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조금만 눈길을 돌려 봐도 법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보행자법” 과 “도로 교통법” 을 보라.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의 길과 도로는 이 두 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시민에게는 벌금이 부과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단 횡단을 할 때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경찰이 있나 없나를 살핀다. 남들 앞에서는 떳떳하지 못하여 눈을 내리깔고 부끄러운 얼굴로 그 일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법을 어기고 있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신호 위반이나 중앙선 침범, 주정차 위반 등을 하는 차량 운전자들도 마찬가지다. 평소 즐겨 다니는 길 위에서 무형의 법을 알게 모르게 의식한다는 사실은, 비록 그 법이 형체가 없다 해도 그 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인간은 법의 감시 아래서 살아간다.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서 감시를 받았으며 나중에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갇혀 있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23 ) .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법의 기본 기능은 “감시” 이며, 그것을 범했을 때는 정죄와 심판으로 이어진다. 이 점을 의식하든 안 하든 인간이 법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법이 지닌 감시와 정죄의 기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생을 영위하려 한다면,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는 남극이나 북극에 가서 나 홀로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들이 불가능하다면, 그가 서 있는 그 땅의 법 아래서 살아야 한다. 법과 형벌은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며, 그 둘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법과 형벌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범죄하는 존재이기 때문인데(전도서 7 : 20 ┃ 로마서 5 : 12 등), 무엇이 범죄인가는 기본적으로 그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이 알려 주고 있으며(로마서 2 : 15 ), 또한 국법에 따라 처벌받는 것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을 때 그를 법 없이 내버려 두지 않으셨는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사람에게 주신 법은 ‘창세기 2:16 , 17 ’ 에 기록되어 있다. 『 16 주 하나님 께서 그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네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17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범죄로 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이 법을 지켜야만 했던 것이 당시 첫 사람 아담의 생존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형을 선포하셨는데, 금지된 열매 하나를 따 먹었다고 죽음을 선고하시는 분이 바로 인류의 창조주이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과연 세상이 원하겠는가? 세상은 사형을 선언하신 하나님을 증오한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 (로마서 6 : 23 ) 이라는 원칙은 처음부터 규정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결코 그런 적이 없었지만, ‘창세기 11 장’의 바벨탑 사건은 그런 무모함이 낳은 결과가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좌시하시지 않고 인간의 일에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을 멀리 흩어 버리신 것이다! 인간이 창조주를 벗어나서 마치 그분이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 『 1 ○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이 헛된 일을 꾀하는가? 2 땅의 왕들이 나서고 치리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주 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3 “우리가 그들의 결박을 끊고 그들의 멍에를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들에 앉으신 분이 웃으실 것이요, 주 께서 그들을 조롱하시리로다. 5 그때 그가 진노 가운데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심히 불쾌하여 그들에게 화내시기를 6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 왕을 세웠도다.” 하시리라.』 (시 편 2:1 ∼ 6 ) . 인간이 하나님의 결박과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신다. 오히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시온 산 위에 왕으로 세우심으로써 인간을 더욱 옥죄실 것이다. 미래의 재림 때 펼쳐질 이 “철권통치” (시편 2 : 9 )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창조주와 소통하도록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은 마귀에게서 나온 거짓말이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고 있다(히브리서 1 : 3 ). 마귀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떨면서도(야고보서 2 : 19 ) 인간에게 엉뚱한 생각을 불어넣어 멸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마귀들이 믿는다면 인간도 믿을 수 있다!” 마귀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떤다면 인간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불신은 고의적인 불신이고, 심판에 대한 부정 또한 고의적인 부정이다. 『그들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마땅히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하나님 의 심판을 알면서도 이 같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좋게 여기느니라』 (로마서 1:32 ) .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심판자이시다(히브리서 12 : 23 ). 온 땅의 심판자로도 불리시며(창세기 18 : 25 ), 온 우주의 유일한 입법자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다(야고보서 4 : 12 ).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은 낮추시고 다른 사람은 세우시는 재판장이시다(시편 75 : 7 ). 모든 일이 바로 그 “살아 계신 하나님 ” 께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성을 지닌 인간은 그 심판의 하나님을 고의로 잊으려 하는데(베드로후서 3 : 3 ∼ 7 ), 이러한 현실은 교회들과 신학교들도 마찬가지여서 지옥의 심판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학자들과 목사들이 그 저주받은 혀들을 강단에서 놀리고 있다(야고보서 3 : 1 ∼ 8 ).

교회들의 강단에서 지옥이 사라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 지옥에 관한 설교를 매우 자주 하셨다(마태복음 5 : 22 , 29 , 30 / 10 : 28 / 11 : 23 / 16 : 18 / 18 : 9 / 23 : 15 , 33 ┃ 마가복음 9 : 43 ∼ 48 ┃ 누가복음 10 : 15 / 12 : 5 / 16 : 23 ). 지옥이 없다면 왜 설교하셨겠는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지옥을 친히 마련하신(마태복음 25 : 41 ) 하나님께서는 실로 “불가항력적인” 분이시다. 사탄은 결박할 수 있어도(요한계시록 20 : 1 , 2 ) 하나님은 결박할 수 없다. 그분께서 “심판자” 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들은 사랑의 하나님만을 노래하고 공의의 하나님은 외면한다. 그런 교회들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어겼다는(출애굽기 31 : 15 ) 이유로 그분의 백성을 돌로 쳐서 죽게 하신 분이다(민수기 15 : 32 ∼ 41 ). 이런 하나님을 세상은 물론, 교회라는 곳들까지도 원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알라나 마리아 같은 물러터진 우상만을 원할 뿐, 그분의 말씀이 격심하고 크고 강한 칼이며(이사야 27 : 1 ) 그 말씀이 불같고 바위를 부수어 조각내는 큰 망치 같은(예레미야 23 : 29 ) 심판자는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께서도 관망만 하고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받으심으로써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다. 재림때도 세상은 그분을 원하지 않겠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 22 아버지 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 에게 맡기셨나니, 23 이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 를 존경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 을 존경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5 :22 , 23a ). 심판의 여부에 관한 고민은 창조주께서 살아 계시는 한 부질없는 짓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 의 “모든 심판” 을 맡으신 아들이시며, 반드시 다시 오시겠다고 신약성경의 맨 끝에 세 번이나 약속해 놓으셨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2 : 7 , 12 , 20 ).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다고 하는 자들까지도 지옥 불에서 태우실 것이다(데살로니가후서 1 : 8 ).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로마서 1 : 19 ).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 까지도 피조 세계 안에 계시되어 있으므로 아무도 변명할 수 없다고 경고하시면서(로마서 1 : 20 ) 그 죄인들의 입을 틀어막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마귀들도 이 점을 알기에 인간을 속이면서도 그들 자신은 떨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고민하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지옥의 심판을 피하도록 하라. BB

┃ 월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No.347/2021-02) … ┃

(시 편 103:1 ∼ 22 ) ─ 다윗의 시 ─

1 ○ 오 내 혼아, 주 를 송축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오 내 혼아, 주 를 송축하고 그의 모든 베푸심을 잊지 말라. 3 그는 네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며 네 모든 질병을 치유하시고 4 너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 자애와 온유한 자비들로 네게 관을 씌우시고 5 좋은 것들로 네 입을 흡족케 하시니 네 젊음이 독수리의 젊음같이 새로워지는도다. 6 ○ 주 께서는 압제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의와 심판을 행하시는도다. 7 그는 그의 길들을 모세에게, 그의 행사들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8 주 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자비가 풍성하시도다. 9 그는 항상 꾸짖지만은 아니하실 것이며 분노를 영원히 품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0 그는 우리의 죄들을 따라 우리를 처리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들을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그의 자비가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크심이라. 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그가 우리의 죄과들을 우리로부터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주 께서도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라. 15 사람으로 말하면 그의 날들은 풀과 같고 그의 번영은 들의 꽃과 같아서 16 바람이 그 위를 지나가면 사라지나니 그 자리가 그것을 더 이상 알지 못하리라. 17 그러나 주 의 자비는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 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자손손에까지 미치나니 18 즉 그의 언약을 지키는 자들과 그의 계명들을 기억하여 그것들을 행하는 자들에게로다. 19 ○ 주 께서는 그의 보좌를 하늘들에 마련하셨으며 그의 왕국은 모든 것을 통치하는도다. 20 능력이 뛰어나고 주의 말씀의 음성에 경청하여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너희 그의 천사들아, 주 를 송축하라. 21 그의 기쁨을 행하는 그의 모든 군대들아, 그의 수종자들아, 너희는 주 를 송축하라. 22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장소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들아, 주 를 송축하라. 오 내 혼아, 주 를 송축할지어다.

(시 편 143:1 ∼ 12 ) ─ 다윗의 시 ─

1 ○ 오 주 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의 신실하심과 주의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2 주의 종과 함께 심판으로 들어가지 마소서. 이는 주의 면전에서는 살아 있는 어떤 사람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니이다. 3 원수가 내 혼을 박해하였고 내 생명을 땅에 내리쳤으며 나로 하여금 죽은 지 오래된 사람들처럼 암흑 속에서 거하게 하였나이다. 4 그러므로 내 영이 내 안에서 쇠잔하며 내 안에 있는 내 마음이 절망하나이다. 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묵상하며 주께서 손으로 하신 일들을 생각하나이다. 6 내가 주께로 내 손을 펼치며 내 혼이 마른 땅처럼 주를 갈급해 하나이다. 셀라. 7 ○ 오 주 여, 속히 내게 들으소서. 내 영이 쇠잔하오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들과 같이 될까 하나이다. 8 아침에 나로 주의 자애를 듣게 하소서. 이는 내가 주를 의지함이니이다. 나로 하여금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게 하소서. 이는 내가 나의 혼을 주께 들어올리기 때문이니이다. 9 오 주 여, 내 원수들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내가 숨으려고 주께로 피하나이다. 10 주의 뜻을 행하도록 나를 가르치소서. 이는 주께서 나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니이다. 주의 영이 선하시니 나를 정직한 땅으로 인도하소서. 11 오 주 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소생시키소서. 주의 의를 위하여 내 혼을 고난에서 이끌어 내소서. 12 주의 자비로 내 원수들을 끊어 버리시고 내 혼을 괴롭게 하는 자들을 모두 멸하소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이사야 40:6 ∼ 8 )

6 그 음성이 말하기를 “부르짖으라.”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무엇을 부르짖으리이까?” 하였느니라. 모든 육체는 풀이요,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니 이는 주 의 영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이라. 그 백성은 정녕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 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베드로전서 1:21 ∼ 25 )

21 너희는 그를 통하여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셨고 그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 을 믿는 자들이니 이는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 안에 있게 하려는 것이라. 22 너희가 성령 을 통하여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너희 혼들을 정결케 하여 가식 없는 형제 사랑에 이르렀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 의 말씀 으로 되었느니라. 24 이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져도 25 주 의 말씀은 영원토록 남아 있음이라. 이것이 너희에게 복음으로 전해진 말씀이니라.

(요한일서 2:15 ∼ 17 )

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 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요, 아버지 께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라. 17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사라지지만 하나님 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 』

by

【 신학 논단 】 /한 승용(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Copyright ⓒ 2021 Korean by Word of God Preservation Society.

Printed in Korea.

(요한복음 6 :63 )

『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It is the spirit that quickeneth ; the flesh profiteth nothing :

the words that I speak unto you, they are spirit, and they are life. 』

(요한복음 7:38 )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씀한 것과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하시니

He that believeth on me, as the scripture hath said,

out of his belly sha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 』

『 14:24 만군의 주 가 맹세하여 말하기를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계획했던 대로 그것이 확고히 되리라. 4:12 그러므로 오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같이 행하리라. 내가 너에게 이것을 행하리니 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을 만날 준비를 하라. 』

(이사야 14:24 ┃ 아모스 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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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심판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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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심판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 이후 사후 세계가 있으며, 성경은 부활이 있다고 말한다. 악인은 심판의 부활로, 의인은 생명의 부활로 하나님 앞에 선다. 사도 바울은 심판은 없으니 오늘 먹고 즐기면 끝이라는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심판은 있다.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잠시 잠깐 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잠시 피고 지는 꽃과 같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제자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사람의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까지 죽일 수 없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까지 주관하시는 심판관이시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야 한다.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을 두고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한다.(시편14편)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악을 저지르고 부정한 삶을 살아간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 먹고 마시는 것을 최고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은 끝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을 예로 드리며, 이것조차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고 일러 주신다. 참새를 잡고 파는 것은 상인들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 만약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생사화복을 주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늘 하루 성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천국을 확신하고 경험해야 한다. 거룩한 훈련, 순종하는 삶이 곧 천국의 열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전도의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무엇이 두려운가? 하나님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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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부제: 하나님의[심판론]에 오해(거짓 교리)를 하는 교사와 교인들을 위하여> > 교과토의 자료

제4과 은혜와 심판의 하나님 기억절: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예화]”어떤 판사가 해수욕을 갔다가 물에 빠져 죽게된 사람을 건져주었는데 몇년 후에 그 사람이 큰 죄를 범하고 바로 그 판사 앞에 서게 되었으나, 그 사람은 전에 자신을 살려준 것같이 살려달라고 애원 하였다” 그러나 판사는 전에는 살려주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네 죄를 심판하는 사람이다”라고 냉정히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저를 믿는 자는 심판 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이미,already)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둠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둠이다” -DA,22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왜곡시켜 놓았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요3:17) 하나님은 공의와 지대한 위엄의 하나님이신 까닭에 사단은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는 분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자비가 그분의 공의(율법)를 파괴시켰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시켰다고 선언했다. 하나님의 품성인 자비와 공의(은해와 심판)는 과연 서로 상충되는 것인가? 주님은 당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자비를 손상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율법은 의로우며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셨다. 하나님의 품성은 사단의 품성과 대조되어 드러나야 한다. <일요일> 심판의 날 문1) 하나님의’심판 Judgment’ 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심판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인류에 대한 최종적 대 심판의 날과 개인적, 민족적인 역사적 심판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심판의 중심 개념은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이며 심판의 적용 원칙은 “심은대로 거둔다”(갈6:7)이다. 심판의 기준은 율법과 복음이며, 심판의 본질과 주제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이며 실재적인 역사이다. 심판(헬:크리마,히:미스파트)이란 말은 판단,분별,심문 이란 뜻의 법률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심판한다는 것은 선과 악을 분리하여 그 열매대로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문2)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은 어떻게 조화되는 진리인가? “공의에는 자비라는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둘은 나란히 서며, 서로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RH, 1881.8.30.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않게 그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이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시 85:10)다.”-DA762 적용) 영생에 대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구세주에 대한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구세주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인정되고 하나님께 용납된다(롬3:24~26) 복음을 불신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율법에 의하여 죄인으로 판정되며 결국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된다. 교훈) 심판과 구원의 개념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의 품성을 반영하고,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절대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지 않는 진리이다. 인류의 구속의 계획에는 공의와 자비가 결합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월요일> 에덴에서의 심판과 은혜 문1) 최초에 범죄한 인류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복음)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네가 어디 있느냐…주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범죄한 사실을 알아 보시려는 것이 아니라 범죄한 부부에게 죄를 깨닫게 하려 하심이었다.”-살아남는 이들,39 “하나님의 ‘자비’가 죄인에게 애소(哀訴)하는 동안 ‘공의’는 오랫동안 기다린다. 그러나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이다(시 97:2),”-실물교훈,177 “예수께서는 죄를 가볍게 하시거나 죄책감을 경감시키지 않으시는 동시에 정죄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려고 노력하신다.-DA,462 [예화]무디 목사님이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죄를 덮어버리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만약 당신이 죄를 숨기려고 한다면 그 죄는 언젠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주님께서 그 죄를 덮어버리도록 맡긴다면 악마도, 인간도 그 죄를 다시는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교훈)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기 전에 구원과 소망의 복음을 먼저 선포하셨다. <화요일> 홍수 문1) 우리는 노아 홍수를 떠올릴 때마다 어떤 감정이 작용하는가? 심판자에 대한 두려움?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되게 나타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창조주에 대한 그릇된 관념을 가지게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도리어 무서워하고 미워하게 하고자 애를 썼고,”-GC,16 “대쟁투의 초기에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은 순종할 수 없으며, 공의가 자비와 조화되지 않으므로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는 죄인이 용서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만일 하나님이 죄의 형벌을 면제해 준다면 그분은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사단은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죄인들에게 은혜를 나타내고 계심으로 그분은 공의로우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DA,761 “그들은 사단이 그들에게 원하는 그런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품성을 그릇 나타내는 행동을 취함으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폭군(暴君)으로 생각하게 하였다.”-DA,36 문2)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믿는가? 이유는? “노아는 홍수 전에 사람들에게 120년 동안 전도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은혜의 시기를 식별한 자들은 소수였다. 노아와 그의 가족 외에는 한 사람도 믿는 사람들로 헤아려져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거민들 중에서 여덟 사람만이 그 기별을 받아들였지만, 그 기별은 세상을 유죄 선고했다. 빛은 그들을 믿게 하고자 주어졌다. 그 빛에 대한 그들의 거절은 그들의 멸망을 입증했다.”-교회증언7권,36 적용)그대는 어떤 점에 있어서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마지막 조사심판이 진행되는 은혜의 시기에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 교훈)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이유는 인간들의 죄 때문이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12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구원의 기회와 은혜의 빛을 베풀어 주셨다. 수요일> 정죄와 은혜 문1) 하나님의 사랑의 공식은 죄에 대하여 은혜가 어떻게 반비례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고(寶庫)가 교회와 세상 사람들의 앞에 열려졌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은 얼마나 놀랍고도 심오한 사랑인가! 율법의 엄중함만을 깨닫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큰 손실을 입고 있는가!”-복음교역자,157 “우리가 십자가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품성을 연구할 때 우리는 공평과 공의가 섞인 자비와 친절과 용서를 발견한다.”-AA,333 [예화]독일 라벤스부룩 수용소 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나치의 살인적인 만행을 겪은 누군가가 쓴 글이다. “오 주님,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악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가한 고통 일체를 잊지는 마옵소서. 그 대신 이러한 고통 때문에 우리가 맺은 열매들, 우리의 교제, 서로에 대한 충성, 겸손, 용기, 관대함을 기억하소서. 이 같은 고난으로부터 성장한 마음의 위대함을 기억하소서. 핍박한 자들이 주님 앞에서 심판 받는 날, 우리가 맺은 모든 열매로 그들을 용서하소서.” 문2) 하나님의 은혜도 제한이 있는가? “각 시대마다 사람들에게 저희 시대의 빛과 특권, 즉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은혜의 기간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 은혜에는 제한이 있다. 자비는 여러 해 동안 간청하지만 멸시와 거절을 당한다. 그러나 자비가 마지막 탄원을 할 때가 온다. 마음이 매우 굳어져서 성령의 감화에 응답하기를 그친다. 그 때에 상냥하고 마음을 사로잡는 음성이 죄인에게 더 이상 간청하지 않으며 책망과 경고도 그친다.”-DA,587 적용) 그대의 노력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계속 거절하는 영혼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사자들에게 권하노니, 결코 실망치 말며 아무리 완악한 죄인이라도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로 간주하지 말라. 외모로 보기에는 아무 가망이 없이 보이는 자라도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믿는 자들이 있다.”-복음교역자,267 교훈)십자가의 은혜는 어떤 죄인이든지 누릴 수 있다. 다만 정죄의 심판을 당하는 것은 복음을 거절한 까닦이다. <목요일> 심판할 때 문1) 삼중 기별이 왜 ‘영원한 복음’인가? “심판이 가까왔다는 선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공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선포를 영원한 복음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전도하고 그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일이 복음 기별에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나타내고 있다.”-실물,226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과 하나님의 율법의 영원성에 관한 빛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것들이 요한계시록 14장에 제시된 진리임을 발견하였다. 그 장(章)의 기별은 주님의 재림을 위하여 지상의 거민들을 준비시키게 될 삼중으로 된 경고의 기별이다.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는 기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봉사를 가르쳐 준다.”-GC,435 “최후의 큰 날, 곧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이 내리게 될 때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의 거치는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보복하는 산처럼 그들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의로운 자에게 생명이 되는 그분의 얼굴의 영광이 악한 자에게는 소멸시키는 불이 될 것이다. 사랑을 거절하고 은혜를 멸시한 까닭에 죄인이 멸망을 당할 것이다.”-DA,660 [예화]”결코 심판의 날을 잊지 마라. 어리석은 자들은 악한 일에 대한 심판이 더디며 이 땅에는 우연만 있고 공의가 없다고 생각하나 심판은 반드시 오며 비록 하루나 이틀 한 세기나 두 세기가 늦게 올지 모르나 인간에게 죽음이 있는 것처럼 분명히 심판이 있다”(토마스 칼라일) 적용) 예언의 기별을 어떻게 복음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방법을 논해 보라. 교훈)은혜가 없다면 아무도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최후의 기별에도 은혜를 기초로 한 심판의 경고가 담겨 있다. (결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시인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신다. 이 대속은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이다.십자가는 죄에 대한 진노(공의)와 죄인에 대한 자비(은혜)가 섞인 하나님의 품성을 동시에 보여 준다. (묵상)”죄가 발견되는 곳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히 12:29)이 되신다. 그의 권능에 굴복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죄를 소멸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죄를 버리지 않으면 그들은 죄와 동일시된다. 그러면 죄를 멸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또한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DA,107

댓글목록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12-01-27 16:15 ===============부 제=================================================================

***하나님의 [심판론]에 오해(거짓 교리)를 하는 교사와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과연 형벌을 주시거나 진노하지 않는 분이신가?

그런 모습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과 배치되는가?

오늘날 재림교회 안에 심판론에 대한 진리를 오해시키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그럴듯한 논리로 하나님의 품성과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제4기 교과를 연구하면서 우리를 햇깔리게 하는 심판에 대한 문제를 숙지해 볼 것이다.

끝까지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반론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댓글을 환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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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관한 성경적 정의는 ‘불법’(요일 3:4),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약 4:17),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롬 14:23)하는 모든 것 등을 포함한다. 죄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것을 행하는 데 등한히 한 것이나 혹은 그분께서 특별히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 등,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는 것’(“Sin, I” SDA Bible Dictionary, rev. ed., p. 10)을 말한다.”(기본교리, 89. 시조사, 2007년)

엘렌 G. 화잇은 죄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의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이다.”(쟁투, 492)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단순하며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공의의 속성을 지니신 분이다. 하나님은 죄가 발생하면 자동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돌격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경고하셨고, 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도록 지시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출 19:21, 22, 개정)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돌파하고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출 19:24)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을 애써 부정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시행하시는 데는 매우 적극적이지만, 공의를 집행하시는 데는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결코 공의를 집행하지 않으시며, 고통이나 형벌은 사단 혹은 어떤 자연법칙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데는 기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불의하신 분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설명한다.

“단 한 계명을 범했거나 가장 작은 세목 하나를 범해도 율법을 범하는 것은 죄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부 측 입장에서는 그 죄의 형벌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재판관이시요, 공의의 보수자시다. 그것이 그의 보좌의 기초이다.”(원고 145, 1897)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께서 죄인을 멸망시키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성격의 것으로 오늘날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낮은 정의와 공의의 표준으로 추론한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이시며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입법자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율법을 만드시고 또 집행하신다. 형벌이 없는 법률은 힘이 없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해방시켜 줄 능력을 갖고 계신 동안 그들이 불로써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일을 보지 않게 해 달라는 탄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유익과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범법자를 형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계획대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람이 그의 동료 인간 앞에서 행사할 권한이 없는 무한한 공의를 행하실 수 있다. 노아가 자기를 괴롭힌 조롱자들이나 조소자들 중 한 사람을 익사케 했다면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대한 세계를 물에 빠뜨리셨다. 롯은 그의 사위들에게 형벌을 과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엄격한 공의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12MR, 207-209; 10MR, 265(1876).”(사건, 240, 241)

C. S. 루이스는 <인도주의 형벌론>(The Humanitarian Theory of Punishment)에서 “응보의 개념은 형벌과 공의의 개념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인 것이다. 어떤 판결이 의로운가 불의한가 하는 것은, 그것이 그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는가 하지 못하는가에 따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에는 적극적이시지만, 형벌에는 소극적이거나 혹은 아예 형벌을 내리는 분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니시며, 그의 용서와 사면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처벌이나 형벌이 없는 용서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화잇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의 공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원고 145, 1897)

이 정의는 하나님께서는 죄로부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욥 34:10)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시 5:4)

뿐만 아니라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 11:5)신다. 그러므로 하박국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합 1:13)신다고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신 6:15)고 하였다.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에서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나 1:2-3)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14장의 셋째 천사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계 14:10)에 대해 경고한다.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계 14:10)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죄를 멀리 하시며, 미워하시고, 참아 보지 못하시는가? 이러한 하나님은 잘못된 분이신가? 아니면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잘못 나타낸 것인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롬 3:5)고 반문한다.

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가? 에밀 브루너는 “죄는 도전, 교만,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은 독립적이라는 주장, …자율적인 이성, 도덕, 그리고 문화의 구성체”라고 정의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왜 나쁜가? 우리의 자녀들이 성장하면 스스로 자립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독려하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게 끝없이 의존하기를 바라시는가?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존과 존재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두 번이나 하나님을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민 16:22; 27:16)이라고 불렀다. 다윗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라고 하였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닿아 있다. 죄는 이 원천으로부터 흘러나가는 생명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가 발생할 때 그 죄를 처리하기 위해 돌격하는 것이다.

“죄악을 품는 곳에는 어디든지 신속하고 정확한 하나님의 형벌이 따를 것이다.”(부조, 585)

“예레미야 3장을 읽어 보라. 이 장은 현대 이스라엘을 위한 교훈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의 죄를 용납지 않으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죄도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로 기울어지는 선천적, 후천적 성향을 증오하신다.”(편지 34, 1899)

“자비가 섞이지 아니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것은 무서운 죄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죄악에 관한 경고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반드시 온 세계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들이 어찌하여 저희가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 또 어찌하면 그것을 피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되어야 한다.”(쟁투, 449)

“율법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약 2:10)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대하여 불충성하지 않고는 열 계명 가운데 단 하나도 범할 수 없다. 율법의 요구에 대한 가장 작은 이탈 행위일지라도 무시하거나 고의적인 범죄를 하는 것은 죄이며 모든 죄는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한다.”(1기별, 218)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은혜의 시기와 시련기 동안에 우리를 위하여 온 우주를 감동시킬 수 있는 놀라운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의 은혜의 기간이 끝난 이후에 우리 자신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발견된다면 그 사랑은 복수의 사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타협하지 않으신다. 불순종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1기별, 313)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보좌처럼 불변한다는 설득력 있고 지속적인 논증이 되어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의 고민과 모욕과 조롱,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퍼부어진 욕설들, 또 십자가의 공포와 수치는 하나님의 공의가 죄를 범할 때는 그 일이 아주 철저히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또 무섭게 보여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보증인이신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율법을 범한 죄인을 하나님은 결코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도들과 죄인들과 우주 앞에 무궁토록 서 있을 논증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리는 모든 죄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계산서에 기록된다. 그리고 공의의 칼을 잡으시는 날,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가해졌던 그 일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을 내려칠 것이다.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는 격렬하고 불가항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원고 58, 1897).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이것은 홍수로 옛 세상이 멸망한 역사로도 증명이 되었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소돔성 거민들을 멸망시킨 기록으로도 입증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죄 많은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셨을 때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고뇌 속에서 입증된 것만큼 그렇게 크게 증명된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겟세마네 동산이 죄로 가득찬 세상에 가장 큰 고통의 장소가 된 것은 죄의 결과, 곧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결과이었다. 어떤 슬픔도, 어떤 고뇌도 하나님의 아들이 견디신 것을 측량해 볼 수 있는 것은 없다.”(화잇주석, 마 26:36-46)

“만약 우리의 품성에 흠이 있으면, 사랑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놓으신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의가 입구에 서서 하나님을 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순결과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그 문을 열어서 각자의 품성과는 상관없이 다 들어가게 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하늘에는 사단이 추방되기 전보다도 더욱 악한 상태가 되어 불만과 반역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평화와 행복과 하늘의 조화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화잇주석, 롬 3:24-26)

오래 전에 아리스토테레스가 말했던 것처럼, 정의란 본질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바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라고 말하고,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신 30:19)라고 권고하신다. 그리고 최후에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대로 갚아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죄가 처리되고, 범죄자가 받는 형벌은 어떤 결과나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의지이다.

=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조우함=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며 동시에 사랑을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 하셨다.

“그리스도의 목표는 공의와 자비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공의와 사랑이 각기 독립된 위엄을 보존하게 하셨지만 서로 연합되게 하셨다. 그의 자비는 유약한 것이 아니었고, 죄를 벌하는 두려운 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사랑을 이끌어 내는 힘이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의는 그 드높은 거룩함을 단 한 점도 손상시킴이 없이 용서가 가능케 되었다. 공의와 자비는 넓다란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각기 반대편을 마주보고 서 있다. 우리의 구속주께서 신성에다 인성을 입으시고 인간을 위하여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품성을 이루셨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다 십자가를 심으시고 그것을 두 길 곧 사랑과 공의를 끌어당겨 서로 만나게 하는 물건이 되게 하셨으며, 그 깊은 수렁을 건너서 사랑과 공의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공의가 그 높은 보좌에서 일어나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십자가에 가까이 이르렀다. 거기에서 공의는 불의와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담당하신 분, 하나님과 동등이신 분을 보았다. 공의는 완전히 만족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십자가에 머리를 숙이고 “족하다”고 말한다(원고 94, 1899).”(화잇주석, 약 2:13)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 시야는 하나님께 이르기까지 확장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심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증오심을 바라보는 한편 우리는 또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그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진리요, 빛이요, 사랑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는 논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사인즈 1895. 3. 7).

“주님께서는 인류의 머리로서 자비와 공의를 화목시킨 의를 드러낸 거룩한 정부의 원리 가운데 있는 교훈들을 인간에게 가르치셨다. 자비와 공의를 화목시키는 일에 있어서 죄와의 어떤 타협도 없었으며 공의의 어떤 주장도 무시되지 않았다. 자비와 공의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서 각기 제정된 위치가 있는데 자비는 그 자체의 온화하고 관대한 기질

을 소멸함이 없이, 또는 그 자체의 동정적인 특성을 상실함이 없이 회개

하지 않는 완고한 죄인을 벌하는 데 그 기능을 행사할 수 있으며 공의는 그 자체의 성실성을 범하지 않고 회개한 죄인을 용서하는 일에 그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1기별, 260, 261)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 않게 그분의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의 의가 평화의 적이 된다는 것을 밝혀 보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는 이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셨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시 85:10)다.”(소망, 762)

대쟁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증되면서 하나님의 승리로 마친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4).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진리와 오류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이제 분명해졌다. 반역의 결과, 곧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한 결과가 모든 지적 존재자의 눈앞에 분명해졌다. 하나님의 통치와 반대되는 사단의 법칙이 실천된 결과가 무엇임이 온 우주에 공개되었다. 사단 자신의 사업이 그를 정죄했다.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는 완전히 옹호되었다. 대쟁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취하신 처사가 오로지 당신의 백성들의 영원한 행복과 그분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 일임이 드러난다. ‘여호와여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시 145:10). 죄의 역사는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의 행복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충성된 자와 반역한 자들을 막론하고 온 우주는 대쟁투에 속한 모든 사실을 바라보면서 한 마음으로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고 선언한다.”(쟁투, 670)

3. 형벌 대속 교리

현대 교회의 성장 모델을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로버트 슐러(R. Schuller) 목사가 교회성장학을 강의하러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이렇게 권고했다.

“죄에 대하여 많이 설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은혜에 대해서 설교하십시오.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하여 많이 말하십시오.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설교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복음에 배치되는 주장이다. 죄가 없는데 어떻게 용서가 있으며, 형벌이 없는데 어떻게 은혜가 존재할 수 있는가? 반복음적이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통해 교회가 성장한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대신 사람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 십상이다.

교회는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강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설교해야 한다. 회중들은 죄의 심각성을 체험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죄의 상처들이 드러나고, 자신의 환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십자가를 찾게 되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갈구하게 된다.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인간의 타락한 본질과 죄의 참상을 깨달을 때에 추구하게 된다.

1) 하나님의 진노

사랑의 하나님께서 악을 ‘형벌’하시거나 ‘심판’하시는가? 그렇다. 성경은 전편에 걸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수백 번 언급하고 있다.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민 11:1)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민 11:3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민 25: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로 사십 년 동안 광야에 유리하게 하신 고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필경은 다 소멸하였느니라”(민 32:13)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대상 13:10)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22:31)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나 1:2)

구약에만 이런 표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 5: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6)

참으로, 십자가의 본질적인 배경은, 인간의 죄, 책임, 그리고 죄책뿐만 아니라, 이런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반응, 곧 그의 거룩과 진노도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성경적 종교의 기초이다. 따라서 죄가 하나님의 거룩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하나님의 거룩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그의 진노인데 사실 이것은 악에 대한 그의 거룩한 대응이다(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128, 129). R. V. G. Tasker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 두 가지 속성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공리이다. 또한 과거 대부분의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 두 측면에 동시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많을 그리스도인들을 당혹하게 한다. 사랑의 하나님이 과연 진노하시는가? 이에 대해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의 신성한 반발”이며,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의 강인한 반대”라고 정의하였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의 분노는 절대적으로 순결하며, 인간의 분노를 악한 것이 되게 하는 그런 요소들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의 분노는 발작적인 폭발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불쾌한 감정과 보복하려는 시도에 의하여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의해서만 일어나고, 악에 대한 정죄 속에서만 표현되는, 하나님의 계속적이며 확고한 적대(antagonism)이다. 하나님은 사적인 원한이나 앙갚음 같은 것을 전혀 가지지 않으신 분이시다. 실로 하나님은 그 적대자에 대해 감소되지 않은 사랑을 동시에 유지하신다.”고 하였다.

거룩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경의 개념에 공통적인 것은, 이 둘이 죄와는 병존할 수 없다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를 폭로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대적한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이런 사실을 예증하기 위해 성경은 몇 가지 은유들을 사용한다.

무서워님의 댓글 무서워 작성일 12-01-27 23:18 이 무서운 심판이 시작된 것입니까? 드디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 단 한명도 없게 되었구려 박금하씨도 포함해서….. 혹시 장감리 교인이신지?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12-01-27 23:30 하나님을 너무 무서운분으로 묘사하시네요, 그리고 내 견해와 다르다고 거짓교사, 거짓교리를 가르친다고 하는것은 어이없는 독선 아닙니까? 성경을 잘 보셨으면 합니다. 왜 이런말씀 있지요? 성경에 무엇이라 쓰였으며 너희가 어떻게 읽느냐? 그당시 무서운 하나님을 가르치던 율법사와 바리세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박금하씨 이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보세요.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12-01-27 23:54 정구성씨, 성경과 예언의 신에서 하나님이 어떤 속성과 품성을 가지고 계시는지 깊이 연구해 보십시요.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알아 보십시요. 저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도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요?

오히려 죄가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고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런 죄의 저주와 진노와 멸망의 심판에서 구속하여 주신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하여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공의도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임을 잊지 마십시요.

지금 여기 교사중에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으신 분들이 있어서 교단적으로 말이 좀 있습니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12-01-28 00:12 정구성씨, 교과 공부는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연구하여 진리의 토대 위에 믿음을 세우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 위주로 쓰자면 얼마든지 회자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설교 시간에 필요한 것이니다. 여기는 성경 연구 마당입니다. 그리고 자의적인 해석이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교수하는 것이 교사들의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교사는 재림교회가 표방하고 믿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도구요 메신저에 불과한 것입니다. 얼뚱한 논리를 끌어 들여와 혼동을 야기하는 것은 시정되어야 되는 것이고, 오직 진리만을 레슨 받아야 하는 것이 교인들의 권리이자 하나님의 뜻이지요.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12-01-28 00:34 진리가 뭐지요?

진리가 옳다 그르다를 분별하는것입니까?

은혜가 빠진 교과공부가 진리입니까?

교과공부를 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알기위함이지 성경공부하기위함이 아니지요.

성경이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어떤분인지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박금하씨가 말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 죄라는게 뭐지요?

죄가 인격체입니까? 죄가 의식이 있습니까? 죄가 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죄라는것은 어떤 개체로서 존재하는것이 아닙니다.

죄가 무엇인지부터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박금하씨가 하나님입니까?

심판관입니까?

누가 문제가있다고 단언합니까?

지금 여기 교사중에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으신 분들이 있어서 교단적으로 말이 좀 있다는데

그 교단이 누구를 말하는거지요?

그리고 박금하씨가 그 교단을 대표하는 분입니까?

아니면 박금하씨가 교단입니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면 함부로 말씀하는거 아니지요.

드리고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교사의 해석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것처럼 말하시는데 성경은 둘째치고

기본교리부터 읽어보세요

재림교회의 기본교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위에 댓글을 단 분 ‘무서워’님에게 어떻게 이런식으로 말하시는지?

“님이 위의 성경 말씀에 대하여 두려워 떠는 것은 실명도 제대로 공개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뭔가 하나님 앞에 드러내지 못하시는 회개하지 않은 죄를 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그 ‘무서워’라는분이 죄인이라고 단정하시네요?

님은 의인이구요?

이곳에 글을 올리신 것은 공적인 행위입니다.

그럼 글 한자 한자가 공인으로서 올려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글을 올리고 싶어도 공적인 책임감등을 생각해서 글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마치 요즘 화두가 되는 정치인식의 발언은 삼가하셧으면 합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하기전에 품격부터 올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12-01-28 00:40 ‘저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도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요?’라고 하셨는데요

솔직히 저는 무섭지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글을 읽으면서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우리 재림교인 중에도 이렇게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하고요.

제가 걱정하는건 이런 글로인해

첫신앙을 하는 분들이 하나님이 무서워서 교회를 떠날것 같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요?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12-01-28 06:15 정구성씨! 이번 주 교과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분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님이 교과 내용을 아직도 간파를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은혜와 심판, 공의와 자비는 쌍둥이 형제라니까요?

공의가 임하는 곳에 자비도 함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은 온 우주의 유익과 악인들의 유익을 위해 내리신다고 했습니다(대쟁투 542)

그리고 유독 심판에 대한 용어에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제 저녁에 우리 교회 테릉교회 찬양대 반을 제가 교과 지도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고 모두 수긍하였습니다.

재림교회 기본교리 27 “천년기와 죄악의 종말” 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단과 죄악을 어떻게 형벌하시는지 말입니다.

[사단과 죄인들이 멸명함]

“사단과 그의 사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선고가 내리자 즉시 형벌을 받는다.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계 20:9) 구원 받지 못한 모든 자들을 소멸한다. 성 바깥의 지구의 표면은 녹아지는 것처럼 보이고,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벧후 3:7)을 위하여 하나의 큰 불못이 된다. 주님께서 그분의 원수들을 멸하시는 “비상”(사 28:21)한 일을 하시는 “여호와의 보수할 날”(사 34:8)이 이르렀다. 요한은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5)고 말했다. 마귀와 그의 동료들도 같은 운명을 당한다(계 20:10).”

정구성씨!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기본교리 28 신조는 다 알아야 합니다.

한가지 질문 할까요?

광야에서 고라와 나단이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죽었습니다.

소돔성에 하늘에서 유황 불이 내려와 진멸되었습니다

노아 때 비가 내리지 않던 시대에 40주야 비가 쏟아져 홍수로 땅의 생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자연 현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초 자연적인 신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까?

정구성씨 위의 기본교리 27번을 읽고 저하고 다시 얘기하시지요.

영 안통하는군요.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12-01-28 06:50 정구성씨 저에게 전화 좀 주십시요

여기서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못하는 여러가지 알려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그럼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010-2070-0114, 070-7651-6200

새지평님의 댓글 새지평 작성일 12-01-28 07:07 정구성이라는 분께

정구성님, 님의 말투부터가 아주 기본이 안 되어 있습니다.

박금하님은 장로님이십니다.

님이 박금하님을 깍아 내릴 요량으로

‘씨’자를 붙이며 상대를 비하시키는데

님이 성도이기전 사람으로서의 예의부터 지키시기 바랍니다.

박금하님이 님에게 같은 “씨”를 붙였다고 항변하지 마시고

님이 먼저 시비를 걸 목적으로 글을 쓰셨군요

재림 교회 안에 거짓된 교리와 이설이 슬그머니 들어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바르게 묘사하지 못하고

엄위와 공의가 빠져 버린 인자와 자비만을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진정한 사랑과 의미를 잘 못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엄위와 공의가 빠져 버린 것짓된 사랑으로

오늘날 죄 짓기를 좋아하는 수많은 영혼들을 격려하고 있음도 유념하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그리고 죄를 용서하지 않으시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도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의 기본를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새지평님의 댓글 새지평 작성일 12-01-28 07:19 그리고 정구성님, 위 박금하 장로님이 인용하신 선지자의 말씀 중

아래 말씀을 다시 한 번 숙지하세요

박금하 장로님의 윗 글들은 지극히 원론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그리고 재림교회의 기본 교리에 대해

정확히, 명확히 대변한 글로 사료됩니다.

————–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께서 죄인을 멸망시키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성격의 것으로 오늘날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낮은 정의와 공의의 표준으로 추론한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이시며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입법자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율법을 만드시고 또 집행하신다. 형벌이 없는 법률은 힘이 없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해방시켜 줄 능력을 갖고 계신 동안 그들이 불로써 하나님의 형벌을 받는 일을 보지 않게 해 달라는 탄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유익과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범법자를 형벌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계획대로 일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사람이 그의 동료 인간 앞에서 행사할 권한이 없는 무한한 공의를 행하실 수 있다. 노아가 자기를 괴롭힌 조롱자들이나 조소자들 중 한 사람을 익사케 했다면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대한 세계를 물에 빠뜨리셨다. 롯은 그의 사위들에게 형벌을 과할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엄격한 공의로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12MR, 207-209; 10MR, 265(1876).”(사건, 240, 241)

제진전님의 댓글 제진전 작성일 12-01-28 07:45 명백하고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성경의 기록들과 선지자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철학적인 말놀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못 제시하는 현실에

심한 우려를 표명합니다.

죄인들을 더욱 죄인되게하고

죄인들이 죄 짓는 일에 더욱 담대하게 만드는

거짓된 ‘복음’이 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성경 역사 속에 반복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교묘한 속임수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어우러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공의와 엄위를 빼 버린 자비와 인자함만을

강조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위험천만한 거짓 복음으로 사료됩니다.

지금 재림교회는 심각한 영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너무 깊이 잠에 빠져 있으며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세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때에

시기 적절한 바른 복음을 제시하는

박금하 장로님의 글을 적극 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12-01-28 08:35 박금하씨나 새지평씨나 참 답답합니다.

장로에게 씨자를 붙인게 불경입니까?

기막힌 발상입니다.

장로는 님자를 붙여야 합니까?

참 한심합니다.

장로가 뭔데요?

벼슬입니까? 맡은바 직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내가 시비를 걸기위해 들어온것이 아닙니다.

자기와 견해가 다르다고 마치 이단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된것이라고 한 것이고.

그것을 마녀사냥하듯이 몰고가려는 의도가 불순해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교단을 자신이 대변하는 듯한 그런 표현들….

나도 그 이상한 교리들을 펼치는 사람들을 경계합니다.

그러면 나도 교단을 대표하는 것처럼 해도 될까요?

누차 말하지만 이곳은 공적인 장소 입니다.

자신의 논리의 확신떼문에 남들을 매도하지 마세요.

재림교인님의 댓글 재림교인 작성일 12-01-28 08:45 제가 보기엔 정구성님이 위의 어느 교사님의 대변인처럼 보입니다.

정구성님이 교과를 해설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나친 편견에 사로잡히신 분 같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시각도 부족하시고요.

새지평님의 댓글 새지평 작성일 12-01-28 08:45 정구성님,

이런 공적인 곳에서는

거의 대부분 보통… ‘님’자를 붙이는 것이 기본적 예의입니다.

인터넷 상에서 ‘씨’는 비하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 호칭에 관계 없이

님의 말투나 태도가 상당히 격분한 듯이 보여집니다.

왜 그리 격분하고 분노하시는지요?

박금하 장로님의 글이 일반적인 재림교회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님의 생각과 다르다고 왜 분노하시지요?

참 이상하십니다.

님이 누구의 대변자이십니까?

님의 생각과 다른 글이라면 그냥 참고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박장로님은 성경과 예언의 신에 명백히 언급된

재림교회의 기본적 입장과 다른 글에 우려를 표명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너무 흥분하시지 말고

차분하게 그리고 신사답게 처신하십시오.

오늘은 안식일입니다

정구성님의 댓글 정구성 작성일 12-01-28 08:56 위의 글들을 보니 한가지 공통점이 발견 됩니다.

댓글을 다는 분들이 이상하게 제에게 촛점을 맞추어 박금하씨를 옹호하는군요,

또, 논리가 박금하씨와 똑같습니다.

셋째, 다 가명을 썼더군요.

실명로그인을 안한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표현(?)

그것도 댓글을 단 제글에 타깃을 맞추어서

혹시 설마하니

댓글을 단 세분

박금하씨 자신은 아니겠지요?

이런 웃기는 말장난 그만합시다.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12-01-28 14:43 정구성님 혹시 제일 위 덧글 닉네임 ‘무서워’가 혹시 님 같은데….. 아닙니까?

언사가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 질문에 답해 보십시요 동문서답 그만 하시고요.

광야에서 고라와 나단이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죽었습니다.

소돔성에 하늘에서 유황 불이 내려와 진멸되었습니다

노아 때 비가 내리지 않던 시대에 40주야 비가 쏟아져 홍수로 땅의 생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자연 현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초 자연적인 신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까?

오직 성경으로 답을 해 보십시요.

어떤 답을 하실지 사뭇 기다려 집니다.

혹, 잘 모르시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십시요.

새지평님의 댓글 새지평 작성일 12-01-28 09:10 정구성님

정말 성격과 성미가 고약하시군요

제가 박금하 님이라고요?

ㅎㅎㅎㅎ

정말 참 이상하시네요

만약 제가 박금하님이라면

이곳 관리자가 단번에 알아 볼 수 있게끔

이 글들을 올릴 때마다 반드시 기입하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박금하님은 서울에 사시고

저는 지방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제가 박금하님인가요?

참 의심도 할 것을 하셔야지요

그리고 그런 정도의 의심을 하실 분이라면

님이 그런 행위를 과거에도 현재에든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박금하 님을 그런 정도의 아류로 보셨다면 정말 잘 못 보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박금하님은

과거 이곳에 안교연구를 올리실 때

가장 많은 분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님이 왜 이렇게 평범하고 지극히 원론적인

재림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시는 박금하 장로님의 글에

분노하시고 격분해하시는지

님 스스로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님은 지금 한참 잘 못 나가고 계십니다.

김보영님의 댓글 김보영 작성일 12-01-30 08:01 여기저기 휘졌고 다니며 성경공부를 할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박금하 장로님(?)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몇가지 우문을 드리겠습니다.

혹 유치하다 생각마시고 댓글 다신분들 처럼 감정섞인 단어없이 진정한 답글 주시기바랍니다.

①그동안 제가 공부한 바로는 죄는 사단으로부터 왔다고 배웠는데(틀렸다면 바르게 알려 주시길) 그러면 사단은 어디서 죄를 받았을까요?(사단에게서 스스로 자생?)

본문의 한 소절에

“만약 우리의 품성에 흠이 있으면, 사랑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열어 놓으신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공의가 입구에 서서 하나님을 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순결과 거룩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공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그 문을 열어서 각자의 품성과는 상관없이 다 들어가게 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하늘에는 사단이 추방되기 전보다도 더욱 악한 상태가 되어 불만과 반역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평화와 행복과 하늘의 조화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화잇주석, 롬 3:24-26)“

인용글 밑줄친 부분의 의미로 볼때 사단이 추방되기 전에도 하늘이 악한상태?

불만과 반역의 사탄이 쫒겨난 후론 평화를 되 찾았다고 설명하신다면 사탄은 쫒겨난후에도 수시로 드나들었지 않습니까?(욥기)

②아래와 같이 인용하신 본문에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며 동시에 사랑을 충족시킬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동시에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 하셨다.“

밑줄친 부분과 이미(벌써) 심판 받았다고 교과 저자가 인용한 성경(요3,18) 해석에 우리가 살면서 지은 죄까지 포함된다는 교과저자의 해석에 보충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③그리고 인용문을 옮겨오진 않았습니다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은 생명인가요? 아니면 문자그대로 세상 축복(공자의 오복)인가요? 또 구약의 복과 신약(오늘날)의 복이 다른가요?

질문이 황당하거나 답변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시면 안하셔도 됩니다만 가급적이면 진솔한 답을 기다리겠습니다.(메일로 주셔도 됩니다. [email protected])

박금하님의 댓글 박금하 작성일 12-01-30 17:45 김보영님

저는 성경에 관하여 질문하고 토의하는 것 좋아 합니다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빠서 내일 꼭 답을 드리겠습니다.^^

김보영님의 댓글 김보영 작성일 12-01-30 08:07 밑줄친 부분이 빠졌군요.

①”하늘에는 사단이 추방되기 전보다도 더욱 악한 상태가 되어 불만과 반역이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

②”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자신의 선언을 충족시키셨으며,” 입니다

IT세계와 컴퓨터 그리고 삶 :: 전도예화 죽은후에는

죽은 이후에 전도사람이 죽은 후에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있습니다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고지옥은 악한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천국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고지옥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갑니다이 지옥가는 사람들은 건지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예수 믿으세요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1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천국과 지옥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았냐로 나뉜다.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신다요5:29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3:18)죽은 후에 심판은 믿는 사람들이 받는 거다(히10:30)(벧전4: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겔8-9장) 성전에 성도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여주고말씀대로 산 자 이마에 표를 찍고 안찍힌 사람은 죽였다.(마7:21-23) 믿는 다고 다 가는 거 아니다. 불법행하면 못간다.(계14:14-)알곡의 최후 vs 포도송이의 최후우리에게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정신 차려야 한다.심판을 믿고 신앙 생활 하는 것과심판을 믿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천국과 지옥으로 차이가 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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