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장 주석 | 다 무엇 때문입니까? (히브리서 2:1-9)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90228 29157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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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무엇 때문입니까? (히브리서 2:1-9)
아침예배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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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 주석 – 공동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히브리서 2장 주석 … 세가 ‘천사의 중재’를 통해 받은 율법이었으나(2:2) 새 계시는 그의 아들인 … 출 19장과 20장에서는 천사에 대한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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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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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 투토 데이 페리쏘테로스 프로세케인 헤마스 토이스 아쿠스데이신 메포테 파라뤼오멘 개역개정,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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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히브리서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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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 – 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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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히브리서 1,2장에 대한 주해와 적용 … 우리는 주석할 때 멀리 있는 문맥보다도 가까이 있는 문맥, 특히 그 단어나 표현이 속해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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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람성경] 히브리서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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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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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히브리서 2장 주석

  • Author: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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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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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장 주석

히브리서 제 2장

=====2:1

그러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 )는 앞장의

내용 전체를 가리킨다(Morris, Hewitt). 따라서 이것은 ‘아들인 그리스도가 천사들 보

다 우월한 존재이므로’라는 의미이다.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 ‘들은 것’의 헬라어 ‘아쿠스데이

신'(* )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

적인 계시 즉 ‘복음’ 혹은 ‘케리그마’를 의미한다(Bruce, Lane, Morris).옛 계시는 모

세가 ‘천사의 중재’를 통해 받은 율법이었으나(2:2) 새 계시는 그의 아들인 그리스도

를 통하여 직접 임한 것으로서 옛 계시보다 우월하고 온전한 구원의 복음이다(Bruce).

한편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페릿소테로스 프로세케인'(*

)은 ‘더욱 많이 주의하여 숙고하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며, 전해주신 복음이 온전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열심히 복음을 상고해야 함을 강조한다(Hewitt).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 ‘흘러 떠내려갈까’의 헬라어 ‘파라뤼오멘'(*

)은 ‘흘러가다’ 혹은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다’의 의미로

복음에 대한 관심 부족과 부주의로 인해서 진리를 잃어버린는 것을 시사한다(Lane).

이것은 성도가 복음의 진리라는 안전한 항구에서 떠나 위험하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

(Westcott).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 이것은 모세가 시내(Sinai)산에서 하나님께

로부터 받은 율법을 암시하고 있다(갈 3:19). 출 19장과 20장에서는 천사에 대한 언급

이 나타나지 않으나 신 33장에서는 하나님의 출현을 묘사할 때 하나님께서 일만 성도

가운데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70인역에서는 ‘천사들이 그의 오른편에 함께 하였

다’고 언급하고 있다(LXX 신 33:2;시 68:7). 1세기의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율법을 전해준 천사에 대해 설명했으며(Antiq XV. 36),랍비들도 율법과 관련된 천사들

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천사들이 율법을 전해주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Lane,

Bruce).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율법은 하나님의 목적과 바람을 계시해 주었고 율법 안

에 제시된 모든 규례들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요하였다(Robinson).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 ‘순종치 아니함’의 헬라

어 ‘파라코에'(* )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는 것으로(TDNT)

‘범죄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도적(意圖的)인 거절을 내포한다(Lane). ‘공

변된’의 헬라어 ‘엔디콘'(* )은 ‘…안에서’를 의미하는 전치사 ‘엔'(*

)과 법정 용어인 ‘공의’를 의미하는 ‘디케'(* )의 합성어로서 ‘공의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한 ‘보응’으로 번역된 헬라어 ‘미스다포

도시안'(* )은 응당히 치러야 할 ‘보수’라는 뜻으로 율법

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리대로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의 행위를 시사한다

(롬 2:2-12). 하나님께서 옛언약 아래서 천사들을 통해 전해주신 율법에 대한 범죄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는 상응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 ‘큰 구원’이란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율법의 구원 사역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시사한다(Bruce, Morris, Hewitt). 한편 ‘어찌 피하리요’로 번역된 헬

라어 ‘포스 에크퓨크소메다'(* )는 수사적 의문문으

로서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은 그리스도보다 열등

한 천사를 통해 전해준 율법을 거역해도 그에 상응한 심판을 받는데 하물며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을 무시하게 되면 율법을 통해 시행되었던 공의의 심판보다

더 큰 보응을 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 ‘주로’에서 ‘로’의 헬라어 ‘디아'(*

)는 ‘…을 통하여’의 뜻을 갖는 전치사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

하여 구원을 이루셨다는 의미로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낸

다(Morris).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들은 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

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로서 복음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증거해줄 사람들을 가리킨다(Morris, Lane). 한편 ‘확증한 바니’의 헬라어 ‘에베바이

오데'(* )는 법률 용어로서 ‘보증인을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이

것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한 말이다.

=====2:4

하나님도…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 본절은 ‘큰 구원'(3절)과 상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큰 구원에 대해 함께 증거하셨음을 나타낸다. ‘함께 증거하셨느니라’의 헬

라어 ‘쉬네피마르튀룬토스'(* )는 ‘쉰'(*

, ‘…함께’)과 ‘마르튀레오'(* , ‘증거하다’)가 결합된 이중

합성어이다. 예수로부터 복음을 들은 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

께 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선포할 때 확증시켜주신 방법은 네 가지이다.

표적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오이스'(* )는 ‘표시’,

‘증거’, ‘표적’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적

의 의미, 곧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표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Morris, Lane, Hewitt).

기사들 – 이로 번역된 헬라어 ‘테라신'(* )은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에서 ‘표적’과 함께 나타난다(마

24:24; 막13:25; 요4:48; 행2:19,22,43; 4:30; 5:12; 6:8; 7:36; 14:3; 롬15:18; 고후

12:12). 이것은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역사로서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Lane).

여러 가지 능력 –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메신'(* )은

본래 자연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힘을 의미했지만 후에 표적과 기사를 내포하는 하나

님의 초자연적인 힘(마8:13)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하나님

은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이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도 하며 또

한 계시하신 말씀을 확증하고 보증하시기도 한다(Lane, Hewitt).

성령의 나눠 주신 것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소유격으로된 ‘성령

의’를 목적격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을 의미한다는 해석

(갈3:5). (2) ‘성령의’를 주격으로 보아 믿음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나눠

주신 은사를 의미한다는 해석(고전12:11).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하나님

께서 복음을 확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Morris,

Hewitt).

=====2:5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 ‘장차 오는 세상’에 해당

하는 헬라어 ‘텐 오이쿠메넨 텐 멜루산'(*

)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셔서 왕으로 등

극하시고 온 우주에 대한 구원을 행사하시는 새창조된 세상을 가리킨다(Lane, Bruce,

Hewitt). 천사들은 이러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없으며, 이러한 세상도 천사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전

전하신 율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창

조되었기 때문이다.

=====2:6,7,8

본 구절들은 시 8:4-6을 인용한 것이다.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 본문은 유대인들의 문어체 표현 방식으로서 저자와

서신의 수신자들이 본절에서 인용된 시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

다.(Hewitt, Robertson, Morris).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

시나이까 – ‘사람’과 ‘인자’는 히브리 시(時)의 병행 법칙을 따른 것으로 동일한 의미

를 지닌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서 ‘…의 아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관용구로

서 어떤 것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됨의 속성을

지닌 자’ 즉 ‘사람’이란 의미이다(Morris, Hewitt). 본절에서 사용된 ‘인자'(*

, 휘오스 안드로푸)는 본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인자'(* ,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와 동일하지

않다.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인자’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

신 인자와 동일시하고 있다(Lane, bruce, Hewitt). 한편 ‘생각하시며’의 헬라어 ‘밈네

스케'(* )는 도움을 베풀기 위해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이며 ‘권고

하시나이까’의 헬라어 ‘에피스케프테'(* )는 ‘조사하다’혹은 ‘방

문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돕기 위해 기억하시며 돌보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저를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천사’에 해당하는 맛소라 본문은 ‘엘로

힘'(* )으로서 RSV는 이것을 ‘하나님'(God)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NIV는

‘천상의 존재들'(heavenly beings)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명확하게 ‘천

사들'(* , 파르 앙겔루스)로 번역하고 있으며 탈굼역

(Targum)도 역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저자는 70인역을 따르고 있다. 한편 ‘못하게

하시며’는 맛소라 본문을 따를 경우 하나님보다 잠시 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

으나(Westcott) 저자가 1장에서 그리스도와 천사를 비교한 것으로 볼 때 천사보다 못

한 상태 즉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빌 2:7,

Morris).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 ‘관 씌우시며’의 헬라어 ‘에스테파노사스'(*

)는 ‘왕관을 씌우다’라는 의미로 왕위에 오르심을 시사한다

(Hewitt).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승리자로서 영광과 존귀로 하나님

의 우편 즉 왕위에 오르셨으며(1:3: 엡4:8),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주권적인 권한을

소유하셨음을 시사한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

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 본문은 1:13의 인용문인 시 110:1과 연결된다. 1:13

에서는 원수가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모든 만물’이 그

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만물’은 맛소라 본문에서는 ‘모든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만물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로 왕위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므로 모든 만물 즉 온 우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셨으며, 자신의 완전한 주권

을 통해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 한편 여기서 ‘저에게’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맛소라 본문을 근거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

라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저에게'(* , 아우토)

가 대표적 단수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ruce, Lan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를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9절의 내용과 연결될 수 없으며, 저자가 시편을 인용하면서 ‘인자’나 ‘사람’을 순수하

게 ‘사람’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자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

문이다(6절).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 본절은 시 8편에는 없

는 구절이다. 본절의 ‘저에게’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Hewitt).

‘아직’의 헬라어 ‘우포'(* )는 ‘일시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미래에 성취

되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Michel, Lane).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의

모든 주권을 회복하여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의 왕국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이 이 때의 지배자처럼 행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

지 못한다 할지라도(마4:8,9; 엡2:2)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즉 그분의 왕국이

온전히 실현되는 날 보게 될 것이다.

=====2:9

천사들 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

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 본 구절은 7절의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들

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오직 잠깐 동안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본절

에서는 ‘잠깐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라퀴 티'(* )를 7절과 다

른 위치에 삽입함으로 이 말을 7절보다 더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7절 *

(엘라트도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 겔루스)

9절 *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라트토메논)

한편 ‘인하여’의 헬라어 ‘디아'(* )는 예수께서 ‘관’을 쓰셔서 왕이 되시는 것

이 ‘죽음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Bruce, 빌 2:8,9). 더욱이 저자는

여기서 특별히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그의 ‘인간되심’과 ‘죽으심’에 초점을 맞

추고 있다(Morris, Lane).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

이라 – ‘이를 행하심’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죽으심과 영광의 관을

쓰심 모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Bruce), ‘죽음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Morris, Hewitt, Moffatt).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이

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판토스'(*

)에서 ‘판토스’는 두가지로 해석된다. (1) ‘판토스’는 중심으로서 ‘온 우주’를

가리킨다(Origen). (2) ‘판토스’는 남성으로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Hewitt,

Morris, Bruce, Robinson).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

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6절). 한편 ‘하나님의 은

혜로 말미암아’의 헬라어 ‘카리티 데우'(* )는 몇몇 사본에 ‘코

리스 데우'(* , ‘하나님을 떠나서’)로 기록되어 있다(Minuscule

1739, Vulgate Codex, Peshitta Codices). 그래서 대부분의 교부들이 본문을 ‘코리스

데우’로 보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뜻하며(마

27:46; 막15:34)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

로서 그의 신성이 상실되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Origen, Eusebius, Theodoret,

Jerome, Ambrose). 그러나 본문은 ‘카리티 데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Tasker,

Morris, Jerome, Ambrose). 대부분의 사본들이 이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견해

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Hewitt).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역의 성취는 그

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됨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

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10절; 12:15, Lane, Morris).

=====2: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 ‘만물이 인하고’의 헬라어 ‘디 혼 타

판타'(* )는 ‘만물’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미하며

‘만물이 말미암은’의 헬라어 ‘디 후 타 판타'(* )는 ‘만

물’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역

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Morris).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 본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목

적을 나타낸다. ‘많은 아들'(* , 폴로스 휘우스)은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구속받을 자가 극소수

가 아님을 의미하며 나아가 ‘아들되었음’을 시사한다(Lane, Kogel). 한편 ‘영광’은 그

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킨다(Montefiore, Morris).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합당하도다 – 본절의 ‘주’에 해

당하는 헬라어는 ‘아르케곤'(* )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

된 ‘주'(* , 퀴리오스) 즉 만물의 통치자이며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용어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르케곤’은 문자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

는 자’, ‘개척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구원의 주’란 죽음을 통해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새로운 길을 이루사 구원받을 모든 후사의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Hewitt, Lane, Muller). 또한 ‘온전케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털레이오사

이'(* )는 본래 모세 오경의 제의 본문에서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

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출29:9,33: 레8:33; 16:32; 21:10;

민3:3). 이런 제의적 배경을 가진 ‘텔레이오사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승귀되심을 시사한다(Klappert, Lane).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인

승귀되심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

과 똑같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구원시키기에 완전한 조건을 구비하셨다는 의

미이다(Bruce).

=====2: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 ‘거룩하게 하시는 자'(*

, 호 하기아존)는 모세 오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출31:13; 레

20:8; 21:15; 22:9,16,32).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를 가리킨다(Bruce, Morris,

Procksch).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백성으

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10:14;13:12). 또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런 표현은 ‘하

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비교와도 같다.

다 하나에서 난지라 – 비록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

지라도 양자는 모두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되어 있다. ‘다’의 헬라어 ‘판

테스'(* )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내포한다. 한편 ‘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노스'(* )에 대해서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헤노스’를 중성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Phillips). (2) 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아담이

나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Hering). (3)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보

면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Lane, Hewitt,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

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아들인 그리스도와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자녀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둔 영적 가족 관계를 형

성한다(Kogel, Sqicq, Michel).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형제’는 영적인 의미의 형제

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의미한다(마12:49,50; 막3:33-35;

눅8:21; 롬8:29).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형제 관계

를 이루며, 가족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1:6). 본절의 이러한 확언은 그리스도인들에

게 용기를 준다(11:16).

=====2:12,13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인 형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 본

절은 초대 교회가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한 시 22:22의 인용이다(마 27:26;막 15:34;요

19:34). 본절의 내용 중에서 1인칭 대명사는 인용문인 시 22편이 메시야 시편이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Bruce).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영

적인 형제들에게 선포하셨다. ‘이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속성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

한다(Morris). 따라서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들

에게 선포하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의 증거

본문이다. 한편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클레시아스'(* )는 사

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나(행 7:38;19:32,39,41) 신약 시대에는 그리

스도인들의 집회를 나타내는 특별한 용어가 되었다. ‘여클레시아스’는 본절에서 ‘형제

들’과 동일한 의미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을

시사한다.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 본문은 사 8:17의 인용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로 사 12:2

이나 삼하 22:3을 들 수 있다.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인들과 형제로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 본절은 사 8:18의 인용이

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당시에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들인 그의 아

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락하스바스와 그의 제자들과 관해 했던 언급으로 저자는 이사야

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들의 모형

으로 해석하고 있다(Hewitt, Morris). 저자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

도와 그리스도인들간의 친밀한 관계와 결속(結束)을 강조한다(Lane).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혈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이 ‘혈육’에 속한 ‘자녀들’에 대한 해

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1) 혹자는 ‘자녀’가 ‘전체 인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Hewitt). (2) 혹자는 ‘자녀’가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본절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였으매’의

헬라어 ‘케코이노네켄'(* )은 완료 능동태로 인간의 본래적

인 특질을 나타낸다. 반면에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심은’의 헬라어

‘메테스켄'(* )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해진 시

기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음을 시사한다(Bruce, Lane).

저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

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다(창 2:17; 3:19; 롬 5:12,

Lane, Morris). 한편 ‘없이 하시며’의 헬라어 ‘카타르게세'(* )는

‘무효화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가 끼치는 영향력을 제해버리셨

음을 시사한다(Hewitt).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

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反逆)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이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하심이니 –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Robertson). 이러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

의 권세를 무기력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

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한편 ‘매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노코이'(* )

는 ‘붙잡혀 있는’이라는 의미로 노예 상태를 암시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사

로잡혀 있음을 생동감(生動感)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2: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

려 하심이라 – ‘붙들어’의 헬라어 ‘에필람바네타이'(* )

는 ‘…을 붙잡다’ 또는 ‘…성질을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후자의 뜻

을 받아들여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특성을 취하여 천사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성을 취하여 인간으로 이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주

장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Hewitt, Lane, NIV). 한

편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견해도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아브라함의 후손된 그

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Bengel, Moffatt, Westcott, Bruce, RSV, NIV). (2) 혹자

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Chrysostom, Ambrose, Beza, KJV).

두 가지 해석 중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첫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갈 3:29).

=====2:17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마땅하도다’의 헬라어 ‘오페일

렌'(* )은 ‘…할 의무가 있다’ 혹은 ‘빚지다’라는 의미로 책임을 강조

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 즉 성육신하심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스스로 떠맡으셨으므로(요3:16;

10:17) 그의 성육신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 본절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대

제사장'(* , 아르키에류스)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타나는 칭

호로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 속에 구약 시대의 속죄 행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잇음

을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속을

위한 제사 행위를 주관하며(민18:19; 렘33:20-2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성결(聖

潔)을 보존시키는 일을 하였다(출28:38; 민18:1). 한편 ‘자비하고 충성된’에서 ‘자비’

가 먼저 나온 것은 강조의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

루셨음을 나타내며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충성을 시사한다.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예

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과 유혹을 맛보셨으

며(마4:1-11; 눅4:1-13) 그분의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

로 절정을 이루었다(4:15; 5:2,7-10).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시험은 앞절

에서 언급한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대제사장’임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앞절에서 제시된 ‘자비로운 대

제사장’이 되심을 입증하는 증거이다(Lane).

헬라어 히브리서 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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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 투토 데이 페리쏘테로스 프로세케인 헤마스 토이스 아쿠스데이신 메포테 파라뤼오멘

개역개정,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새번역,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말성경,1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들었던 모든 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들은 것을 더욱더 명심하여, 빗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영어NIV,1 We must pay more careful attention, therefore, to what we have heard, so that we do not drift away.

영어NASB,1 For this reason we must pay much closer attention to what we have heard, so that we so not drift away from it.

영어MSG,1 It’s crucial that we keep a firm grip on what we’ve heard so that we don’t drift off.

영어NRSV,1 Therefore we must pay greater attention to what we have heard, so that we do not drift away from it.

헬라어신약Stephanos,1 δια τουτο δει περισσοτερως ημας προσεχειν τοις ακουσθεισιν μηποτε παραρρυωμεν

라틴어Vulgate,1 propterea abundantius oportet observare nos ea quae audivimus ne forte pereffluamus

히브리어Modern,1 לכן אנחנו חיבים ביותר להכין לבבנו אל אשר שמענו פן ילוז ויאבד ממנו׃

성 경: [히2:1]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그러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투토'(*)는 앞장의 내용 전체를 가리킨다(Morris, Hewitt). 따라서 이것은 ‘아들인 그리스도가 천사들 보다 우월한 존재이므로’라는 의미이다.

󰃨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 ‘들은 것’의 헬라어 ‘아쿠스데이신'(*)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 즉 ‘복음’ 혹은 ‘케리그마’를 의미한다(Bruce, Lane, Morris). 옛 계시는 모세가 ‘천사의 중재’를 통해 받은 율법이었으나(2:2) 새 계시는 그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임한 것으로서 옛 계시보다 우월하고 온전한 구원의 복음이다(Bruce).한편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페릿소테로스 프로세케인'(*)은 ‘더욱 많이 주의하여 숙고하라’는의미이다.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천사보다 우월하며, 전해주신 복음이 온전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열심히 복음을 상고해야 함을 강조한다(Hewitt).

󰃨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 ‘흘러 떠내려갈까’의 헬라어 ‘파라뤼오멘'(*)은 ‘흘러가다’ 혹은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다’의 의미로 복음에 대한 관심 부족과 부주의로 인해서 진리를 잃어버린는 것을 시사한다(Lane). 이것은 성도가 복음의 진리라는 안전한 항구에서 떠나 위험하게 되는 것을 나타낸다(Westcott).

에이 가르 호 디 앙겔론 랄레데이스 로고스 에게네토 베바이오스 카이 파사 파라바시스 카이 파라코에 엘라벤 엔디콘 미스다포도시안

개역개정,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새번역,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효력을 내어, 모든 범행과 불순종하는 행위가 공정한 갚음을 받았거든,

우리말성경,2 천사들을 통해 하신 말씀도 효력이 있어 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마땅한 징벌을 받았는데

가톨릭성경,2 천사들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유효하고, 그것을 어기거나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정당한 벌을 받았는데,

영어NIV,2 For if the message spoken by angels was binding, and every violation and disobedience received its just punishment,

영어NASB,2 For if the word spoken through angels proved unalterable, and every transgression and disobedience received a just recompense,

영어MSG,2 If the old message delivered by the angels was valid and nobody got away with anything,

영어NRSV,2 For if the message declared through angels was valid, and every transgression or disobedience received a just penalty,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ι γαρ ο δι αγγελων λαληθεις λογος εγενετο βεβαιος και πασα παραβασις και παρακοη ελαβεν ενδικον μισθαποδοσιαν

라틴어Vulgate,2 si enim qui per angelos dictus est sermo factus est firmus et omnis praevaricatio et inoboedientia accepit iustam mercedis retributionem

히브리어Modern,2 כי אם הדבר הנאמר על ידי המלאכים היה קים וכל פשע ומרי נשא את ענשו כמשפט׃

성 경: [히2:2]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 이것은 모세가 시내(Sinai)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암시하고 있다(갈 3:19). 출 19장과 20장에서는 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으나 신 33장에서는 하나님의 출현을 묘사할 때 하나님께서 일만 성도 가운데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으며 70인역에서는 ‘천사들이 그의 오른편에 함께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LXX 신 33:2;시 68:7). 1세기의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율법을 전해준 천사에 대해 설명했으며(Antiq XV. 36), 랍비들도 율법과 관련된 천사들의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천사들이 율법을 전해주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Lane,Bruce).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율법은 하나님의 목적과 바람을 계시해 주었고 율법 안에 제시된 모든 규례들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요하였다(Robinson).

󰃨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 ‘순종치 아니함’의 헬라어 ‘파라코에'(*)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는 것으로(TDNT) ‘범죄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도적(意圖的)인 거절을 내포한다(Lane). ‘공변된’의 헬라어 ‘엔디콘'(*)은 ‘…안에서’를 의미하는 전치사 ‘엔'(*)과 법정 용어인 ‘공의’를 의미하는 ‘디케'(*)의 합성어로서 ‘공의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이란 의미를 갖는다. 또한 ‘보응’으로 번역된 헬라어 ‘미스다포도시안'(*)은 응당히 치러야 할 ‘보수’라는 뜻으로 율법을 범한 죄인들에게 진리대로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의 행위를 시사한다(롬 2:2-12). 하나님께서 옛언약 아래서 천사들을 통해 전해주신 율법에 대한 범죄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거부는 상응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포스 헤메이스 에크픀소메다 텔리카우테스 아멜레산테스 소테리아스 헤티스 아르켄 라부사 랄레이스다이 디아 투 퀴리우 휘포 톤 아쿠산톤 에이스 헤마스 에베바이오데

개역개정,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새번역,3 하물며 우리가 이렇게도 귀중한 구원을 소홀히 하고서야, 어떻게 그 갚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주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것이요,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하여 준 것입니다.

우리말성경,3 우리가 이 큰 구원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징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며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 것입니다.

가톨릭성경,3 하물며 우리가 이렇듯 고귀한 구원을 소홀히 하면 어떻게 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처음에 주님께서 선포하신 것으로, 그것을 들은 이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주었습니다.

영어NIV,3 how shall we escape if we ignore such a great salvation? This salvation, which was first announced by the Lord, was confirmed to us by those who heard him.

영어NASB,3 how shall we escape if we neglect so great a salvation? After it was at the first spoken through the Lord, it was confirmed to us by those who heard,

영어MSG,3 do you think we can risk neglecting this latest message, this magnificent salvation? First of all, it was delivered in person by the Master, then accurately passed on to us by those who heard it from him.

영어NRSV,3 how can we escape if we neglect so great a salvation? It was declared at first through the Lord, and it was attested to us by those who hear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3 πως ημεις εκφευξομεθα τηλικαυτης αμελησαντες σωτηριας ητις αρχην λαβουσα λαλεισθαι δια του κυριου υπο των ακουσαντων εις ημας εβεβαιωθη

라틴어Vulgate,3 quomodo nos effugiemus si tantam neglexerimus salutem quae cum initium accepisset enarrari per Dominum ab eis qui audierunt in nos confirmata est

히브리어Modern,3 איך נמלט אנחנו אם לא נשים לב לתשועה גדולה אשר כזאת הנאמרה מתחלה בפי האדון ותקים לנו על ידי שמעיה׃

성 경: [히2:3]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 ‘큰 구원’이란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셨던 율법의 구원 사역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을 시사한다(Bruce, Morris, Hewitt). 한편 ‘어찌 피하리요’로 번역된 헬라어 ‘포스 에크퓨크소메다'(*)는 수사적 의문문으로서 ‘도무지 피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본절은 그리스도보다 열등한 천사를 통해 전해준 율법을 거역해도 그에 상응한 심판을 받는데 하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을 무시하게 되면 율법을 통해 시행되었던 공의의 심판보다 더 큰 보응을 피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 ‘주로’에서 ‘로’의 헬라어 ‘디아'(*)는 ‘…을 통하여’의 뜻을 갖는 전치사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다는 의미로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낸다(Morris).

󰃨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 ‘들은 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로서 복음이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가를 증거해줄 사람들을 가리킨다(Morris, Lane). 한편 ‘확증한 바니’의 헬라어 ‘에베바이오데'(*)는 법률 용어로서 ‘보증인을 세우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원의 복음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한 말이다.

쉬네피마르튀룬토스 투 데우 세메이오이스 테 카이 테라신 카이 포이킬라이스 뒤나메신 카이 프뉴마토스 하기우 메리스모이스 카타 텐 아우투 델레신

개역개정,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새번역,4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표징과 기이한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시고, 또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주심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말성경,4 하나님께서도 표적과 놀라운 일들과 여러 가지 기적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나눠 주신 성령의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뜻에 따라, 표징과 이적과 갖가지 기적을 통하여, 또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 주시어 당신의 증언을 보태어 주셨습니다.

영어NIV,4 God also testified to it by signs, wonders and various miracles, and gifts of the Holy Spirit distributed according to his will.

영어NASB,4 God also bearing witness with them, both by signs and wonders and by various miracles and by gifts of the Holy Spirit according to His own will.

영어MSG,4 All the while God was validating it with gifts through the Holy Spirit, all sorts of signs and miracles, as he saw fit.

영어NRSV,4 while God added his testimony by signs and wonders and various miracles, and by gifts of the Holy Spirit, distributed according to his will.

헬라어신약Stephanos,4 συνεπιμαρτυρουντος του θεου σημειοις τε και τερασιν και ποικιλαις δυναμεσιν και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μερισμοις κατα την αυτου θελησιν

라틴어Vulgate,4 contestante Deo signis et portentis et variis virtutibus et Spiritus Sancti distributionibus secundum suam voluntatem

히브리어Modern,4 וגם אלהים העיד עליה באתות ובמופתים ובגבורות שנות ובהאציל מרוח קדשו כרצונו׃

성 경: [히2:4]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복음에 대한 순종]

󰃨 하나님도…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 본절은 ‘큰 구원'(3절)과 상관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큰 구원에 대해 함께 증거하셨음을 나타낸다. ‘함께 증거하셨느니라’의 헬라어 ‘쉬네피마르튀룬토스'(*)는 ‘쉰'(*, ‘…함께’)과 ‘마르튀레오'(*, ‘증거하다’)가 결합된 이중합성어이다. 예수로부터 복음을 들은 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선포할 때 확증시켜주신 방법은 네 가지이다.

󰃨 표적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메이오이스'(*)는 ‘표시’,’증거’, ‘표적’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 곧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표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Morris, Lane, Hewitt).

󰃨 기사들 – 이로 번역된 헬라어 ‘테라신'(*)은 가시적(可視的)으로나타나는 경이로운 기적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약성경에서 ‘표적’과 함께 나타난다(마24:24; 막13:25; 요4:48; 행2:19,22,43; 4:30; 5:12; 6:8; 7:36; 14:3; 롬15:18; 고후12:12). 이것은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역사로서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Lane).

󰃨 여러 가지 능력 –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메신'(*)은 본래 자연적인 현상에서 나타나는 힘을 의미했지만 후에 표적과 기사를 내포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마8:13) 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초자연적인 이적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도 하며 또한 계시하신 말씀을 확증하고 보증하시기도 한다(Lane, Hewitt).

󰃨 성령의 나눠 주신 것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소유격으로된 ‘성령의’를 목적격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성령’을 의미한다는 해석(갈3:5). (2) ‘성령의’를 주격으로 보아 믿음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성령께서 나눠주신 은사를 의미한다는 해석(고전12:11).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확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본절은 하나님의 뜻을따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주시는 은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Morris,Hewitt).

우 가르 앙겔로이스 휘페탘센 텐 오이쿠메넨 텐 멜루산 페리 헤스 랄루멘

개역개정,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새번역,5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는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영어NIV,5 It is not to angels that he has subjected the world to come, about which we are speaking.

영어NASB,5 For He did not subject to angels the world to come, concerning which we are speaking.

영어MSG,5 God didn’t put angels in charge of this business of salvation that we’re dealing with here.

영어NRSV,5 Now God did not subject the coming world, about which we are speaking, to angels.

헬라어신약Stephanos,5 ου γαρ αγγελοις υπεταξεν την οικουμενην την μελλουσαν περι ης λαλουμεν

라틴어Vulgate,5 non enim angelis subiecit orbem terrae futurum de quo loquimur

히브리어Modern,5 כי לא תחת יד המלאכים שת את העולם הבא אשר אנחנו מדברים עליו׃

성 경: [히2:5]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 ‘장차 오는 세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오이쿠메넨 텐 멜루산'(*)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셔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온 우주에 대한 구원을 행사하시는 새창조된 세상을 가리킨다(Lane, Bruce,Hewitt). 천사들은 이러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없으며, 이러한 세상도 천사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전전하신 율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디에마르튀라토 데 푸 티스 레곤 티 에스틴 안드로포스 호티 밈네스케 아우투 에 휘오스 안드로푸 호티 에피스켚테 아우톤

개역개정,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새번역,6 어떤 이가 성경 어딘가에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여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 ㉠시 8:4-6(칠십인역), ‘사람’과 ‘사람의 아들’은 인류를 일컫는 것임

우리말성경,6 그러나 누군가가 어디에 증언하며 말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해 주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십니까?

가톨릭성경,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영어NIV,6 But there is a place where someone has testified: “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영어NASB,6 But one has testified somewhere, saying, “WHAT IS MAN, THAT YOU REMEMBER HIM? OR THE SON OF MAN, THAT YOU ARE CONCERNED ABOUT HIM?

영어MSG,6 It says in Scripture, What is man and woman that you bother with them; why take a second look their way?

영어NRSV,6 But someone has testified somewhere, “What are human beings that you are mindful of them, or mortals, that you care for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6 διεμαρτυρατο δε που τις λεγων τι εστιν ανθρωπος οτι μιμνησκη αυτου η υιος ανθρωπου οτι επισκεπτη αυτον

라틴어Vulgate,6 testatus est autem in quodam loco quis dicens quid est homo quod memor es eius aut filius hominis quoniam visitas eum

히브리어Modern,6 כי אם כאשר העיד האמר במקום אחד מה אנוש כי תזכרנו ובן אדם כי תפקדנו׃

성 경: [히2:6,7,8]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본 구절들은 시 8:4-6을 인용한 것이다.

󰃨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 본문은 유대인들의 문어체 표현 방식으로서 저자와 서신의 수신자들이 본절에서 인용된 시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Hewitt, Robertson, Morris).

󰃨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 ‘사람’과 ‘인자’는 히브리 시(時)의 병행 법칙을 따른 것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서 ‘…의 아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어떤 것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됨의 속성을 지닌 자’ 즉 ‘사람’이란 의미이다(Morris, Hewitt). 본절에서 사용된 ‘인자'(*, 휘오스 안드로푸)는 본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인자'(*,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와 동일하지않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인자’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인자와 동일시하고 있다(Lane, bruce, Hewitt). 한편 ‘생각하시며’의 헬라어 ‘밈네스케'(*)는 도움을 베풀기 위해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이며 ‘권고하시나이까’의 헬라어 ‘에피스케프테'(*)는 ‘조사하다’혹은 ‘방문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돕기 위해 기억하시며 돌보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 저를 잠간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천사’에 해당하는 맛소라 본문은 ‘엘로힘'(*)으로서 RSV는 이것을 ‘하나님'(God)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NIV는 ‘천상의 존재들'(heavenly beings)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명확하게 ‘천사들'(*, 파르 앙겔루스)로 번역하고 있으며 탈굼역(Targum)도 역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저자는 70인역을 따르고 있다. 한편 ‘못하게 하시며’는 맛소라 본문을 따를 경우 하나님보다 잠시 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Westcott) 저자가 1장에서 그리스도와 천사를 비교한 것으로 볼 때 천사보다 못한 상태 즉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빌 2:7,Morris).

󰃨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 ‘관 씌우시며’의 헬라어 ‘에스테파노사스'(*)는 ‘왕관을 씌우다’라는 의미로 왕위에 오르심을 시사한다(Hewitt).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승리자로서 영광과 존귀로 하나님의 우편 즉 왕위에 오르셨으며(1:3: 엡4:8),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주권적인 권한을 소유하셨음을 시사한다.

󰃨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 본문은 1:13의 인용문인 시 110:1과 연결된다. 1:13에서는 원수가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만물’은 맛소라 본문에서는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만물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로 왕위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므로 모든 만물 즉 온 우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셨으며, 자신의 완전한 주권을 통해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 한편 여기서 ‘저에게’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맛소라 본문을 근거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2) 혹자는 ‘저에게'(*, 아우토)가 대표적 단수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ruce, Lane, Hewitt).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를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9절의 내용과 연결될 수 없으며, 저자가 시편을 인용하면서 ‘인자’나 ‘사람’을 순수하게 ‘사람’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자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6절).

󰃨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 본절은 시 8편에는 없는 구절이다. 본절의 ‘저에게’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Hewitt).’아직’의 헬라어 ‘우포'(*)는 ‘일시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미래에 성취되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Michel, Lane).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의모든 주권을 회복하여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의 왕국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이 이 때의 지배자처럼 행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마4:8,9; 엡2:2)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즉 그분의 왕국이 온전히 실현되는 날 보게 될 것이다.

엘랕토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돜세 카이 티메 에스테파노사스 아우톤

개역개정,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새번역,7 주님께서는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그에게 씌워 주셨으며,㉢ / ㉡또는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또한 그를 주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 위에 세우시며’가 더 첨가되어 있음

우리말성경,7 주께서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게 하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우셨습니다.

가톨릭성경,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영어NIV,7 You made him a little lower than the angels; you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r

영어NASB,7 “YOU HAVE MADE HIM FOR A LITTLE WHILE LOWER THAN THE ANGELS; YOU HAVE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R, AND HAVE APPOINTED HIM OVER THE WORKS OF YOUR HANDS;

영어MSG,7 You made them not quite as high as angels, bright with Eden’s dawn light;

영어NRSV,7 You have made them for a little while lower than the angels; you have crowned them with glory and honor,

헬라어신약Stephanos,7 ηλαττωσας αυτον βραχυ τι παρ αγγελους δοξη και τιμη εστεφανωσας αυτον και κατεστησας αυτον επι τα εργα των χειρων σου

라틴어Vulgate,7 minuisti eum paulo minus ab angelis gloria et honore coronasti eum et constituisti eum super opera manuum tuarum

히브리어Modern,7 ותחסרהו מעט מאלהים וכבוד והדר תעטרהו ותמשילהו במעשי ידיך׃

판타 휘페탘사스 휘포카토 톤 포돈 아우투 엔 토 가르 휘포탘사이 아우토 타 판타 우덴 아페켄 아우토 아뉘포탘톤 뉜 데 우포 호로멘 아우토 타 판타 휘포테타그메나

개역개정,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새번역,8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말성경,8 주께서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심으로 그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시110:1

가톨릭성경,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영어NIV,8 and put everything under his feet.” In putting everything under him, God left nothing that is not subject to him. Yet at present we do not see everything subject to him.

영어NASB,8 YOU HAVE PUT ALL THINGS IN SUBJECTION UNDER HIS FEET. “For in subjecting all things to him, He left nothing that is not subject to him. But now we do not yet see all things subjected to him.

영어MSG,8 Then you put them in charge of your entire handcrafted world. When God put them in charge of everything, nothing was excluded. But we don’t see it yet, don’t see everything under human jurisdiction.

영어NRSV,8 subjecting all things under their feet.” Now in subjecting all things to them, God left nothing outside their control. As it is, we do not yet see everything in subjection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8 παντα υπεταξας υποκατω των ποδων αυτου εν γαρ τω υποταξαι αυτω τα παντα ουδεν αφηκεν αυτω ανυποτακτον νυν δε ουπω ορωμεν αυτω τα παντα υποτεταγμενα

라틴어Vulgate,8 omnia subiecisti sub pedibus eius in eo enim quod ei omnia subiecit nihil dimisit non subiectum ei nunc autem necdum videmus omnia subiecta ei

히브리어Modern,8 כל שתה תחת רגליו הנה באשר שת כל תחתיו לא השאיר דבר שלא שת תחתיו ועתה זה לא ראינו עדין כי כל הושת תחתיו׃

톤 데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랕토메논 블레포멘 예순 디아 토 파데마 투 다나투 돜세 카이 티메 에스테파노메논 호포스 카리티 데우 휘페르 판토스 규세타이 다나투

개역개정,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새번역,9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우리말성경,9 다만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시 낮아지신 분, 곧 죽음의 고난을 통해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바라봅니다. 이는 그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시려 하심입니다.

가톨릭성경,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영어NIV,9 But we see Jesus, who was made a little lower than the angels, now crowned with glory and honor because he suffered death, so that by the grace of God 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영어NASB,9 But we do see Him who has been made for a little while lower than the angels, namely, Jesus, because of the suffering of death crowned with glory and honor, that by the grace of God 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영어MSG,9 What we do see is Jesus, made “not quite as high as angels,” and then, through the experience of death, crowned so much higher than any angel, with a glory “bright with Eden’s dawn light.” In that death, by God’s grace, he fully experienced death in every person’s place.

영어NRSV,9 but we do see Jesus, who for a little while was made lower than the angels, now crowned with glory and honor because of the suffering of death, so that by the grace of God 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헬라어신약Stephanos,9 τον δε βραχυ τι παρ αγγελους ηλαττωμενον βλεπομεν ιησουν δια το παθημα του θανατου δοξη και τιμη εστεφανωμενον οπως χαριτι θεου υπερ παντος γευσηται θανατου

라틴어Vulgate,9 eum autem qui modico quam angeli minoratus est videmus Iesum propter passionem mortis gloria et honore coronatum ut gratia Dei pro omnibus gustaret mortem

히브리어Modern,9 אבל ישוע המחסר מעט ממלאכים אותו ראינו מעטר בכבוד והדר מפני ענותו עד מות למען אשר יטעם בחסד אלהים את המות בעד כלם׃

성 경: [히2:9]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천사들 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 본 구절은 7절의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오직 잠깐 동안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잠깐 동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브라퀴 티'(*)를 7절과 다른 위치에 삽입함으로 이 말을 7절보다 더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7절 * (엘라트도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 겔루스) 9절 *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라트토메논) 한편 ‘인하여’의 헬라어 ‘디아'(*)는 예수께서 ‘관’을 쓰셔서 왕이 되시는 것이 ‘죽음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Bruce, 빌 2:8,9). 더욱이 저자는 여기서 특별히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그의 ‘인간되심’과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Morris, Lane).

󰃨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이를 행하심’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죽으심과 영광의 관을 쓰신 모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Bruce), ‘죽음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타당하다(Morris, Hewitt, Moffatt).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판토스'(*)에서 ‘판토스’는 두가지로 해석된다. (1) ‘판토스’는 중심으로서 ‘온 우주’를 가리킨다(Origen). (2) ‘판토스’는 남성으로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Hewitt,Morris, Bruce, Robinson).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6절). 한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의 헬라어 ‘카리티 데우'(*)는 몇몇 사본에 ‘코리스 데우'(*, ‘하나님을 떠나서’)로 기록되어 있다(Minuscule1739, Vulgate Codex, Peshitta Codices). 그래서 대부분의 교부들이 본문을 ‘코리스데우’로 보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뜻하며(마27:46; 막15:34)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서 그의 신성이 상실되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Origen, Eusebius, Theodoret,Jerome, Ambrose). 그러나 본문은 ‘카리티 데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Tasker,Morris, Jerome, Ambrose). 대부분의 사본들이 이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견해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Hewitt).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역의 성취는 그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됨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10절; 12:15, Lane, Morris).

에프레펜 가르 아우토 디 혼 타 판타 카이 디 후 타 판타 폴루스 휘우스 에이스 돜산 아가곤타 톤 아르케곤 테스 소테리아스 아우톤 디아 파데마톤 텔레이오사이

개역개정,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새번역,10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그, ‘아들들’

우리말성경,10 모든 것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보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그들의 구원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 완전케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톨릭성경,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영어NIV,10 In bringing many sons to glory, it was fitting that God, for whom and through whom everything exists, should make the author of their salvation perfect through suffering.

영어NASB,10 For it was fitting for Him, for whom are all things, and through whom are all things, in bringing many sons to glory, to perfect the author of their salvation through sufferings.

영어MSG,10 It makes good sense that the God who got everything started and keeps everything going now completes the work by making the Salvation Pioneer perfect through suffering as he leads all these people to glory.

영어NRSV,10 It was fitting that God, for whom and through whom all things exist, in bringing many children to glory, should make the pioneer of their salvation perfect through suffering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πρεπεν γαρ αυτω δι ον τα παντα και δι ου τα παντα πολλους υιους εις δοξαν αγαγοντα τον αρχηγον της σωτηριας αυτων δια παθηματων τελειωσαι

라틴어Vulgate,10 decebat enim eum propter quem omnia et per quem omnia qui multos filios in gloriam adduxerat auctorem salutis eorum per passiones consummare

히브리어Modern,10 כי נאה היה לו אשר הכל למענו והכל על ידו בהנחתו בנים רבים לכבוד להשלים בענוים את שר ישועתם׃

성 경: [히2:10]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고난]

󰃨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 ‘만물이 인하고’의 헬라어 ‘디 혼 타판타'(*)는 ‘만물’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미하며’만물이 말미암은’의 헬라어 ‘디 후 타 판타'(*)는 ‘만물’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역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Morris).

󰃨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 본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목적을 나타낸다. ‘많은 아들'(*, 폴로스 휘우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구속받을 자가 극소수가 아님을 의미하며 나아가 ‘아들되었음’을 시사한다(Lane, Kogel). 한편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킨다(Montefiore, Morris).

󰃨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 본절의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르케곤'(*)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주'(*, 퀴리오스) 즉 만물의 통치자이며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지칭하는 용어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르케곤’은 문자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는 자’, ‘개척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구원의 주’란 죽음을 통해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새로운 길을 이루사 구원받을 모든 후사의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Hewitt, Lane, Muller). 또한 ‘온전케 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털레이오사이'(*)는 본래 모세 오경의 제의 본문에서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출29:9,33: 레8:33; 16:32; 21:10;민3:3). 이런 제의적 배경을 가진 ‘텔레이오사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승귀되심을 시사한다(Klappert, Lane).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인 승귀되심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구원시키기에 완전한 조건을 구비하셨다는 의미이다(Bruce).

호 테 가르 하기아존 카이 호이 하기아조메노이 엨스 헤노스 판테스 디 헨 아이티안 우크 에파이스퀴네타이 아델푸스 아우투스 칼레인

개역개정,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새번역,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1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가톨릭성경,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영어NIV,11 Both the one who makes men holy and those who are made holy are of the same family. So Jesus is not ashamed to call them brothers.

영어NASB,11 For both He who sanctifies and those who are sanctified are all from one Father; for which reason He is not ashamed to call them brethren,

영어MSG,11 Since the One who saves and those who are saved have a common origin, Jesus doesn’t hesitate to treat them as family,

영어NRSV,11 For the one who sanctifies and those who are sanctified all have one Father. For this reason Jesus is not ashamed to call them brothers and sister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 τε γαρ αγιαζων και οι αγιαζομενοι εξ ενος παντες δι ην αιτιαν ουκ επαισχυνεται αδελφους αυτους καλειν

라틴어Vulgate,11 qui enim sanctificat et qui sanctificantur ex uno omnes propter quam causam non confunditur fratres eos vocare dicens

히브리어Modern,11 כי גם המקדש גם המקדשים כלם מאחד המה ועל כן לא בוש מקרא להם אחים׃

성 경: [히2:11]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 ‘거룩하게 하시는 자'(*, 호 하기아존)는 모세 오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출31:13; 레20:8; 21:15; 22:9,16,32).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를 가리킨다(Bruce, Morris, Procksch).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10:14;13:12). 또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비교와도 같다.

󰃨 다 하나에서 난지라 – 비록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양자는 모두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되어 있다. ‘다’의 헬라어 ‘판테스'(*)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내포한다. 한편 ‘하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노스'(*)에 대해서는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헤노스’를 중성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Phillips). (2) 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아담이나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Hering). (3)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Lane, Hewitt, Morris).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아들인 그리스도와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자녀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Kogel, Sqicq, Michel).

󰃨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형제’는 영적인 의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의미한다(마12:49,50; 막3:33-35;눅8:21; 롬8:29).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형제 관계를 이루며, 가족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1:6). 본절의 이러한 확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준다(11:16).

레곤 아팡겔로 토 오노마 수 토이스 아델포이스 무 엔 메소 엨클레시아스 휨네소 세

개역개정,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새번역,12 그리하여 그분은 ㉥”내가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 ㉥시 22:22(칠십인역)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2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교회 가운데서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시22:22

가톨릭성경,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영어NIV,12 He says, “I will declare your name to my brothers; in the presence of the congregation I will sing your praises.”

영어NASB,12 saying, “I WILL PROCLAIM YOUR NAME TO MY BRETHREN, IN THE MIDST OF THE CONGREGATION I WILL SING YOUR PRAISE.”

영어MSG,12 saying, I’ll tell my good friends, my brothers and sisters, all I know about you; I’ll join them in worship and praise to you.

영어NRSV,12 saying, “I will proclaim your name to my brothers and sisters, in the midst of the congregation I will prais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λεγων απαγγελω το ονομα σου τοις αδελφοις μου εν μεσω εκκλησιας υμνησω σε

라틴어Vulgate,12 nuntiabo nomen tuum fratribus meis in medio ecclesiae laudabo te

히브리어Modern,12 באמרו אספרה שמך לאחי בתוך קהל אהללך׃

성 경: [히2:12,13]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인 형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 본절은 초대 교회가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한 시 22:22의 인용이다(마 27:26;막 15:34;요 19:34). 본절의 내용 중에서 1인칭 대명사는 인용문인 시 22편이 메시야 시편이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Bruce).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영적인 형제들에게 선포하셨다. ‘이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속성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Morris). 따라서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의 증거 본문이다. 한편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클레시아스'(*)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나(행 7:38;19:32,39,41)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나타내는 특별한 용어가 되었다. ‘여클레시아스’는 본절에서 ‘형제들’과 동일한 의미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을 시사한다.

󰃨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 본문은 사 8:17의 인용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로 사 12:2이나 삼하 22:3을 들 수 있다.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인들과 형제로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 본절은 사 8:18의 인용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당시에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들인 그의 아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와 그의 제자들과 관해 했던 언급으로 저자는 이사야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들의 모형으로 해석하고 있다(Hewitt, Morris). 저자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간의 친밀한 관계와 결속(結束)을 강조한다(Lane).

카이 팔린 에고 에소마이 페포이도스 엪 아우토 카이 팔린 이두 에고 카이 타 파이디아 하 모이 에도켄 호 데오스

개역개정,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새번역,13 또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사 8:17(칠십인역) ㉨사 8:18(칠십인역)

우리말성경,13 하시고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하시고 또다시 보라. 나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8:17;사8:18

가톨릭성경,13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영어NIV,13 And again, “I will put my trust in him.” And again he says, “Here am I, and the children God has given me.”

영어NASB,13 And again, “I WILL PUT MY TRUST IN HIM.” And again, “BEHOLD, I AND THE CHILDREN WHOM GOD HAS GIVEN ME.”

영어MSG,13 Again, he puts himself in the same family circle when he says, Even I live by placing my trust in God. And yet again, I’m here with the children God gave me.

영어NRSV,13 And again, “I will put my trust in him.” And again, “Here am I and the children whom God has given me.”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παλιν εγω εσομαι πεποιθως επ αυτω και παλιν ιδου εγω και τα παιδια α μοι εδωκεν ο θεος

라틴어Vulgate,13 et iterum ego ero fidens in eum et iterum ecce ego et pueri mei quos mihi dedit Deus

히브리어Modern,13 ועוד וקויתי לו ועוד הנה אנכי והילדים אשר נתן לי יהוה׃

에페이 운 타 파이디아 케코이노네켄 하이마토스 카이 사르코스 카이 아우토스 파라플레시오스 메테스켄 톤 아우톤 히나 디아 투 다나투 카타르게세 톤 토 트라토스 에콘타 투 다나투 퉅 에스틴 톤 디아볼론

개역개정,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새번역,14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우리말성경,14 이와 같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므로 그 자신도 이와 같이 그들과 함께 속하셨습니다. 이는 죽음으로 인해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이며

가톨릭성경,14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영어NIV,14 Since the children have flesh and blood, he too shared in their humanity so that by his death he might destroy him who holds the power of death–that is, the devil–

영어NASB,14 Since then the children share in flesh and blood, He Himself likewise also partook of the same, that through death He might render powerless him who had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devil;

영어MSG,14 Since the children are made of flesh and blood, it’s logical that the Savior took on flesh and blood in order to rescue them by his death. By embracing death, taking it into himself, he destroyed the Devil’s hold on death

영어NRSV,14 Since, therefore, the children share flesh and blood, he himself likewise shared the same things, so that through death he might destroy the one who has the power of death, that is, the devil,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πει ουν τα παιδια κεκοινωνηκεν σαρκος και αιματος και αυτος παραπλησιως μετεσχεν των αυτων ινα δια του θανατου καταργηση τον το κρατος εχοντα του θανατου τουτεστιν τον διαβολον

라틴어Vulgate,14 quia ergo pueri communicaverunt sanguini et carni et ipse similiter participavit hisdem ut per mortem destrueret eum qui habebat mortis imperium id est diabolum

히브리어Modern,14 ויען כי הילדים כלם יחדו בשר ודם אף הוא לבש בשר ודם כמוהם למען אשר יבטל על ידי המות את אשר לו ממשלת המות הוא השטן׃

성 경: [히2:14,15]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혈육’은 인간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이 ‘혈육’에 속한 ‘자녀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1) 혹자는 ‘자녀’가 ‘전체 인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witt). (2) 혹자는 ‘자녀’가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rris). 두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본절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였으매’의 헬라어 ‘케코이노네켄'(*)은 완료 능동태로 인간의 본래적인 특질을 나타낸다. 반면에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심은’의 헬라어’메테스켄'(*)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해진 시기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음을 시사한다(Bruce, Lane). 저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한다.

󰃨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 것이었다(창 2:17; 3:19; 롬 5:12,Lane, Morris). 한편 ‘없이 하시며’의 헬라어 ‘카타르게세'(*)는 ‘무효화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가 끼치는 영향력을 제해버리셨음을 시사한다(Hewitt).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反逆)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이었다.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하심이니 –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Robertson). 이러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무기력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한편 ‘매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노코이'(*)는 ‘붙잡혀 있는’이라는 의미로 노예 상태를 암시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생동감(生動感)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카이 아팔랔세 투투스 호소이 포보 다나투 디아 판토스 투 젠 에노코이 에산 둘레이아스

개역개정,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새번역,15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말성경,15 또한 죽음이 두려워 평생 노예로 매여 사는 사람들을 풀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가톨릭성경,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15 and free those who all their lives were held in slavery by their fear of death.

영어NASB,15 and might deliver those who through fear of death were subject to slavery all their lives.

영어MSG,15 and freed all who cower through life, scared to death of death.

영어NRSV,15 and free those who all their lives were held in slavery by the fear of death.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απαλλαξη τουτους οσοι φοβω θανατου δια παντος του ζην ενοχοι ησαν δουλειας

라틴어Vulgate,15 et liberaret eos qui timore mortis per totam vitam obnoxii erant servituti

히브리어Modern,15 ולהתיר את אלה אשר מאימת המות היו נתנים לעבדות כל ימי חייהם׃

우 가르 데푸 앙겔론 에필람바네타이 알라 스페르마토스 아브라암 에필람바네타이

개역개정,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새번역,16 사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십니다. / ㉩그, ‘씨’

우리말성경,16 물론 그는 천사들을 붙들어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붙들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영어NIV,16 For surely it is not angels he helps, but Abraham’s descendants.

영어NASB,16 For assuredly He does not give help to angels, but He gives help to the descendant of Abraham.

영어MSG,16 It’s obvious, of course, that he didn’t go to all this trouble for angels. It was for people like us, children of Abraham.

영어NRSV,16 For it is clear that he did not come to help angels, but the descendants of Abraham.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 γαρ δηπου αγγελων επιλαμβανεται αλλα σπερματος αβρααμ επιλαμβανεται

라틴어Vulgate,16 nusquam enim angelos adprehendit sed semen Abrahae adprehendit

히브리어Modern,16 כי אמנם לא במלאכים החזיק כי אם בזרע אברהם החזיק׃

성 경: [히2:16]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 – ‘붙들어’의 헬라어 ‘에필람바네타이'(*)는 ‘…을 붙잡다’ 또는 ‘…성질을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후자의 뜻을 받아들여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특성을 취하여 천사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성을 취하여 인간으로 이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orris).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Hewitt, Lane, NIV). 한편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견해도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아브라함의 후손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Bengel, Moffatt, Westcott, Bruce, RSV, NIV). (2) 혹자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Chrysostom, Ambrose, Beza, KJV).두 가지 해석 중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첫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갈 3:29).

호덴 오페일렌 카타 판타 토이스 아델포이스 호모이오데나이 히나 엘레에몬 게네타이 카이 피스토스 아르키에루스 타 프로스 톤 데온 에이스 토 힐라스케스다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투 라우

개역개정,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7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7 이러므로 그는 모든 것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가톨릭성경,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17 For this reason he had to be made like his brothers in every way, in order that he might become a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 in service to God, and that he might make atonement for the sins of the people.

영어NASB,17 Therefore, He had to be made like His brethren in all things, that He might become a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 in things pertaining to God, to make propitiation for the sins of the people.

영어MSG,17 That’s why he had to enter into every detail of human life. Then, when he came before God as high priest to get rid of the people’s sins,

영어NRSV,17 Therefore he had to become like his brothers and sisters in every respect, so that he might be a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 in the service of God, to make a sacrifice of atonement for the sins of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7 οθεν ωφειλεν κατα παντα τοις αδελφοις ομοιωθηναι ινα ελεημων γενηται και πιστος αρχιερευς τα προς τον θεον εις το ιλασκεσθαι τας αμαρτιας του λαου

라틴어Vulgate,17 unde debuit per omnia fratribus similare ut misericors fieret et fidelis pontifex ad Deum ut repropitiaret delicta populi

히브리어Modern,17 על כן היה עליו להדמות לאחיו בכל דבר למען אשר יהיה כהן גדול רחמן ונאמן בעניני אלהים לכפר על חטאת העם׃

성 경: [히2:17]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마땅하도다’의 헬라어 ‘오페일렌'(*)은 ‘…할 의무가 있다’ 혹은 ‘빚지다’라는 의미로 책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 즉 성육신하심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스스로 떠맡으셨으므로(요3:16;10:17) 그의 성육신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 본절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대제사장'(*, 아르키에류스)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타나는 칭호로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 속에 구약 시대의 속죄 행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속을 위한 제사 행위를 주관하며(민18:19; 렘33:20-2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성결(聖潔)을 보존시키는 일을 하였다(출28:38; 민18:1). 한편 ‘자비하고 충성된’에서 ‘자비’가 먼저 나온 것은 강조의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음을 나타내며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충성을 시사한다.

엔 호 가르 페폰덴 아우토스 페이라스데이스 뒤나타이 토이스 페이라조메노이스 보에데사이

개역개정,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새번역,18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8 그는 몸소 시험을 받으시고 고난당하셨기에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영어NIV,18 Because he himself suffered when he was tempted, he is able to help those who are being tempted.

영어NASB,18 For since He Himself was tempted in that which He has suffered, He is able to come to the aid of those who are tempted.

영어MSG,18 he would have already experienced it all himself–all the pain, all the testing–and would be able to help where help was needed.

영어NRSV,18 Because he himself was tested by what he suffered, he is able to help those who are being tested.

헬라어신약Stephanos,18 εν ω γαρ πεπονθεν αυτος πειρασθεις δυναται τοις πειραζομενοις βοηθησαι

라틴어Vulgate,18 in eo enim in quo passus est ipse temptatus potens est eis qui temptantur auxiliari

히브리어Modern,18 כי באשר הוא בעצמו ענה ונתנסה יכל לעזר את המנסים׃

성 경: [히2:18]

주제1: [큰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예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과 유혹을 맛보셨으며(마4:1-11; 눅4:1-13) 그분의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4:15; 5:2,7-10).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시험은 앞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대제사장’임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앞절에서 제시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심을 입증하는 증거이다(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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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히브리서 02장

2:1 구원의 확증(히브리서 2:1-4)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하여 아주 논리적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즉 교리를 전제하고 그것의 근거를 밝히고 다음 그 용도를 설명한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가 앞서서 주장하고 증명한 진리가 적용되어 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진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사용되고 있다. 본장은 바로 이 접속자로 시작되는데 이 접속사는 본장이 전 장과 연결된 것임을 나타내 보여준다. 전 장에서 바울은 율법을 제정한 천사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했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복음의 섭리가 율법의 섭리보다 더 뛰어남을 주장하였었다. 이제 바울은 위의 교리를 권면과 주장의 두 가지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현실에 적용하였다. Ⅰ. 바울은 권면을 통해 전 장의 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본문에서 그는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삼갈지니”(1절)라고 하였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첫 번째 방법을 들은 바를 굳게 간직하는 것임을 나타내 보여 준다. 복음 시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진지하게 복음의 기준으로 삼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열심히 복음대로 행하며 그것을 늘 일고 묵상하며 신앙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며 기억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복음에 의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제해야 한다. Ⅱ. 바울이 한 주장의 방법. 바울은 논증을 통해 전 장의 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그는 논증을 통해 그가 준 권면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1. 우리가 들은 복음에 귀를 열심히 기울이지 아니할 경우에 우리는 큰 손해를 입을 것임을 바울은 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고 하였다. 즉 우리는 복음을 굳게 간직하지 않으면 복음은 우리에게서 빠져나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달아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태만함으로 인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

(1)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늘 따른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과 기억은 구멍이 많은 뚫린 배와 같다. 따라서 상당히 주의하지 않으면 한번 들어왔던 것도 쉽게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이 같은 오래 간직할 수 없음의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되었고 또 사탄이 간교를 부리고 우리를 대적하며(사탄은 우리에게서 말씀을 훔쳐간다) 세속의 유혹과 혼란 즉 좋은 씨앗을 질식케 하는 가시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2) 한 번 받아들인 복음의 진리를 상실해 버리는 자들은 치명적인 손실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수천량의 금은보다 더 좋은 보물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종자(파종한 씨)도 잃어버리고 듣는데 소요된 시간과 고통도 잃어버리며, 추수할 희망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복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3) 이러한 모든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복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부주의하게 듣는 자들은 들은 것을 곧 잃어버리는 자들이 될 것이다.

2. 만약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율법에 복종치 않고 율법을 무시한 자들이 파멸한 것 보다 더 무서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바울은 논하였다(2,3절).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여기 기록되었다.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주어진 말씀으로 공고한 것이라”고 하였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선포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팔을 불면서 아마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말씀을 선포하였을 것이다. 또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천사들에게 두 번째로 나팔을 불게 하셔서, 모든 심판 받을 자를 모으시고, 그들이 율법대로 행하였는지 아니 행하였는지에 따라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또 “율법은 공고한 것이라”했다. 율법은 불변의 약속이다. 그것은 진리이고 신실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복종 여부에 따라 그 힘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은 공변된 보증을 받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볼지라도 율법은 인간을 결코 가벼이 다루지 않을 것이다. 율법은 과거에 죄인들을 모두 심판했고 모든 시대의 모든 죄인들을 재판할 것이다. 공의로우신 주이시며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율법을 공포하시면서, 율법을 무시하고 범죄하는 자들을 벌하지 않고 그냥 두시지는 않으시고자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율법을 범하는 자들과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불복종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서 응분의 벌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제까지 죄인들에게 가하였던 가장 무서운 벌일지라도 그것은 그 죄의 대가로 정당한 것이었고 죄보다 무겁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 벌은 “공정한 응분의 대가”이다. 벌은 공정한 것이어서 죄에 상응하는 정도로 주어졌다. 복종에 대한 보상도 마찬가지로 공정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상급은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에 비하여 넘치게 주어질 것이다.

(2) 복음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기록되고 있다. 복음은 구원이다. 복음의 구원은 너무도 위대한 구원이므로 어느 구원도 이것과 비교될 수 없다. 복음의 구원은 너무도 위대하여 그 누구도 그것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으며 또 그 위대성은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은 위대한 구원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한 위대하신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그는 바로 인간의 본성과 몸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큰 죄와 비참 가운데서 어떻게 구원될 수 있으며 또 큰 거룩과 큰 축복에로 어떻게 구원될 수 있으며 또 큰 거룩과 큰 축복에로 어떻게 돌아갈 있는가를 보여 준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한 위대한 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우리로 구원을 얻을 자격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며 우리로 구세주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복음은 위대하고 뛰어난 은혜의 섭리 즉 새 계약을 보여 준다. 복음을 통해 구원의 대헌장이 선포되었고 이 헌장은 계약에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해 준다.

(3) 복음에 대해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를 바울은 기록하였다. 이 죄는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경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경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인 것이다. 또한 구원에 대한 경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복음의 은총의 가치를 고려해 보지도 않고 또는 자신들의 복음이 결여되어 있음과 그것이 없음으로 인한 비참함을 생각지도 않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깨닫거나 수궁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복음의 유익함을 깨닫고 복음에 접근하고 또 자기에게 복음을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태도들이 보여질 때 그 자는 곧 구원을 경시하는 자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복음의 은총을 멸시한 악하고 비참한 죄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 복음을 무시한 죄인들이 당할 비참성이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처벌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이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어찌 피하리요(3절)”라고 하였다.

[1] 위의 말씀은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을 이미 정죄 아래 있음을 뜻한다. 즉 이미 체포되어 심판의 손길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의하여 저주 아래 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의 범죄를 여기에 더하므로 더욱 무거운 저주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하였다.

[2] 이 저주를 받고 나면 복음 안에서 발견되는 큰 구원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빠져 나올 길이 없음을 위의 말씀은 암시해 준다. 복음의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으며,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저주로부터 구제될 수 없다.

[3] 위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더욱 격렬한 저주와 심판이 있을 뿐이고 그들은 이 무서운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판날에 그들은 숨을 수도 없고, 자기가 행한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으며,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감옥을 부수고 나올 수도 없다. 그들에게 열려질 자비의 문은 다시는 없다. 또한 그들은 죄를 대속해 줄 어떠한 희생 제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버리움을 받을 것이다. 이 같은 비참한 처지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은 “어찌 피하리요?”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말은 매우 타당성을 띤 말씀으로써 죄인들 자신의 양심에 대한 호소인 것이다. 이 말씀은 죄인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모든 힘과 계략과 결속과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에서 달아날 길을 찾아 낼 수 있겠느냐는 도전인 것이다. 위대한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은 심판의 날에는 무력할 뿐 아니라 탄원이나 변명도 할 수 없게 될 것임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심판에 대하여 이의가 있으면 말하라고 할 때 유구무언일 것이다. 또한 스스로의 양심에 의해 찔림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비참함은 율법의 권위를 무시한 사람들이나 또는 율법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 즉 죄를 지은 이방인들에게 그 주어지는 비참보다 정도가 심할 것이다.

3. 복음을 최초로 말씀하기 시작하신 분의 위엄과 그의 뛰어남은 논하므로 바울은 자기의 권면의 근거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 구원의 소식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전해 주신것이요”라고 하였다(3절). 즉 이 말은 구원의 소식은 그가 곧 여호와 이시며, 생명과 영광의 주인이시고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무오의 지혜와 선함과 의심할 수 없는 영원한 진실함과 충실함, 절대적인 위엄과 권위, 강력한 권능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 주셨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소식을 맨 처음으로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였다. 그가 오시기 전에 주어진 말씀들은 유형에 불과하거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고 또 인간들이 말하는 식으로는 결코 말씀하지 않는 주님에 의해 말씀되어지기 시작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리라고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4. 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한 자들의 인격의 놀라움을 들어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논하였다(3,4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저희와 함께 증거 하였노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함”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도들과 전도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어지고 확증되었다는 사실이다(행 1:1). 이 복음의 증거자들은 이같이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어떤 세속적인 생각이나 그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은 결코 품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증거의 목적은 오직 구세주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들 자신의 구원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증거 하느라고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또 그들 중 수다한 사람들은 이 중거를 하다가 죽기까지 하였다.

(2)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증거자들의 보증을 서 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들로 그리스도와 또한 그에 의한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라고 그들에게 위임하사 파손하셨음을 증거 하셨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보증이 되셨는가? 즉 그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평안을 주시고, 모든 고난을 견딜 인내를 주시고, 말로 할 수 없는 용기와 즐거움을(이런 사실은 그 증거자들 자신에게 증거가 되는 것들이었다) 주심으로써 그들의 보증이 되셨다. 또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표징과 놀라운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나타내시고 또한 당신의 뜻을 따라 성령을 선물로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보증이 되셨던 것이다.

[1] “표징”이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표징과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표징을 말하는 것이다.

[2] “놀라운 일”이란 자연의 법칙과 순리를 초월하여 역사되어지는 말씀의 역사 즉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과 경이로 가득차게 하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또 설교 내용을 열심히 탐구하도록 만드는 역사인 것이다.

[3] “여러 가지 기적” 또는 능력 있는 역사란 초월적으로 강력하게 역사되어지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4] “성령의 은사”란 복음 증거자들로 그들이 불리움을 받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성령께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2:4 이하). 또한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를 믿음 위에 확고히 서게하며 우리의 소망을 확고하게 하시려는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도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율법의 권위와 우수성을 입증하시었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실 때는 더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복음의 섭리가 더욱 뛰어나고 놀라운 것임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큰 이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셨다.

우리가 들은 복음에 귀를 열심히 기울이지 아니할 경우에 우리는 큰 손해를 입을 것임을 바울은 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고 하였다. 즉 우리는 복음을 굳게 간직하지 않으면 복음은 우리에게서 빠져나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달아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태만함으로 인해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을 배우도록 하자.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그것을 잃어버릴 위험이 늘 따른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마음과 기억은 구멍이 많은 뚫린 배와 같다. 따라서 상당히 주의하지 않으면 한번 들어왔던 것도 쉽게 빠져나가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이 같은 오래 간직할 수 없음의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되었고 또 사탄이 간교를 부리고 우리를 대적하며(사탄은 우리에게서 말씀을 훔쳐간다) 세속의 유혹과 혼란 즉 좋은 씨앗을 질식케 하는 가시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한 번 받아들인 복음의 진리를 상실해 버리는 자들은 치명적인 손실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수천량의 금은보다 더 좋은 보물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종자(파종한 씨)도 잃어버리고 듣는데 소요된 시간과 고통도 잃어버리며, 추수할 희망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복음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이러한 모든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복음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부주의하게 듣는 자들은 들은 것을 곧 잃어버리는 자들이 될 것이다.만약 우리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율법에 복종치 않고 율법을 무시한 자들이 파멸한 것 보다 더 무서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바울은 논하였다(2,3절).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여기 기록되었다.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주어진 말씀으로 공고한 것이라”고 하였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선포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팔을 불면서 아마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말씀을 선포하였을 것이다. 또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천사들에게 두 번째로 나팔을 불게 하셔서, 모든 심판 받을 자를 모으시고, 그들이 율법대로 행하였는지 아니 행하였는지에 따라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또 “율법은 공고한 것이라”했다. 율법은 불변의 약속이다. 그것은 진리이고 신실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복종 여부에 따라 그 힘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은 공변된 보증을 받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볼지라도 율법은 인간을 결코 가벼이 다루지 않을 것이다. 율법은 과거에 죄인들을 모두 심판했고 모든 시대의 모든 죄인들을 재판할 것이다. 공의로우신 주이시며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율법을 공포하시면서, 율법을 무시하고 범죄하는 자들을 벌하지 않고 그냥 두시지는 않으시고자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율법을 범하는 자들과 계산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불복종의 성격과 정도에 따라서 응분의 벌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제까지 죄인들에게 가하였던 가장 무서운 벌일지라도 그것은 그 죄의 대가로 정당한 것이었고 죄보다 무겁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 벌은 “공정한 응분의 대가”이다. 벌은 공정한 것이어서 죄에 상응하는 정도로 주어졌다. 복종에 대한 보상도 마찬가지로 공정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상급은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에 비하여 넘치게 주어질 것이다.복음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기록되고 있다. 복음은 구원이다. 복음의 구원은 너무도 위대한 구원이므로 어느 구원도 이것과 비교될 수 없다. 복음의 구원은 너무도 위대하여 그 누구도 그것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없으며 또 그 위대성은 인식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복음은 위대한 구원을 보여 준다. 그것은 한 위대하신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그는 바로 인간의 본성과 몸을 입으시고 나타나신 하나님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큰 죄와 비참 가운데서 어떻게 구원될 수 있으며 또 큰 거룩과 큰 축복에로 어떻게 구원될 수 있으며 또 큰 거룩과 큰 축복에로 어떻게 돌아갈 있는가를 보여 준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한 위대한 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우리로 구원을 얻을 자격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며 우리로 구세주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복음은 위대하고 뛰어난 은혜의 섭리 즉 새 계약을 보여 준다. 복음을 통해 구원의 대헌장이 선포되었고 이 헌장은 계약에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해 준다.복음에 대해 범하는 죄는 무엇인가를 바울은 기록하였다. 이 죄는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경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경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태도인 것이다. 또한 구원에 대한 경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복음의 은총의 가치를 고려해 보지도 않고 또는 자신들의 복음이 결여되어 있음과 그것이 없음으로 인한 비참함을 생각지도 않는 것이며 복음의 진리를 깨닫거나 수궁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복음의 유익함을 깨닫고 복음에 접근하고 또 자기에게 복음을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태도들이 보여질 때 그 자는 곧 구원을 경시하는 자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복음의 은총을 멸시한 악하고 비참한 죄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복음을 무시한 죄인들이 당할 비참성이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처벌은 피할 수 없는 것임이 선포되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어찌 피하리요(3절)”라고 하였다.위의 말씀은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을 이미 정죄 아래 있음을 뜻한다. 즉 이미 체포되어 심판의 손길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아담의 죄에 의하여 저주 아래 있으며 또한 그들 스스로의 범죄를 여기에 더하므로 더욱 무거운 저주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하였다.이 저주를 받고 나면 복음 안에서 발견되는 큰 구원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서는 빠져 나올 길이 없음을 위의 말씀은 암시해 준다. 복음의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으며,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저주로부터 구제될 수 없다.위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더욱 격렬한 저주와 심판이 있을 뿐이고 그들은 이 무서운 저주를 피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심판날에 그들은 숨을 수도 없고, 자기가 행한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으며,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감옥을 부수고 나올 수도 없다. 그들에게 열려질 자비의 문은 다시는 없다. 또한 그들은 죄를 대속해 줄 어떠한 희생 제물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철저히 버리움을 받을 것이다. 이 같은 비참한 처지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은 “어찌 피하리요?”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말은 매우 타당성을 띤 말씀으로써 죄인들 자신의 양심에 대한 호소인 것이다. 이 말씀은 죄인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모든 힘과 계략과 결속과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에서 달아날 길을 찾아 낼 수 있겠느냐는 도전인 것이다. 위대한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은 심판의 날에는 무력할 뿐 아니라 탄원이나 변명도 할 수 없게 될 것임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심판에 대하여 이의가 있으면 말하라고 할 때 유구무언일 것이다. 또한 스스로의 양심에 의해 찔림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비참함은 율법의 권위를 무시한 사람들이나 또는 율법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 즉 죄를 지은 이방인들에게 그 주어지는 비참보다 정도가 심할 것이다.복음을 최초로 말씀하기 시작하신 분의 위엄과 그의 뛰어남은 논하므로 바울은 자기의 권면의 근거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이 구원의 소식은 주님께서 처음으로 전해 주신것이요”라고 하였다(3절). 즉 이 말은 구원의 소식은 그가 곧 여호와 이시며, 생명과 영광의 주인이시고 만물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또한 무오의 지혜와 선함과 의심할 수 없는 영원한 진실함과 충실함, 절대적인 위엄과 권위, 강력한 권능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 주셨다는 말씀이다. 구원의 소식을 맨 처음으로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말씀하신 분은 바로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였다. 그가 오시기 전에 주어진 말씀들은 유형에 불과하거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고 또 인간들이 말하는 식으로는 결코 말씀하지 않는 주님에 의해 말씀되어지기 시작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리라고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리스도와 복음을 증거한 자들의 인격의 놀라움을 들어 바울은 자기의 주장을 논하였다(3,4절). 그러므로 “이르기를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저희와 함께 증거 하였노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복음의 전파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함”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도들과 전도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어지고 확증되었다는 사실이다(행 1:1). 이 복음의 증거자들은 이같이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어떤 세속적인 생각이나 그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은 결코 품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증거의 목적은 오직 구세주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들 자신의 구원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증거 하느라고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었고 또 그들 중 수다한 사람들은 이 중거를 하다가 죽기까지 하였다.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의 증거자들의 보증을 서 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그들로 그리스도와 또한 그에 의한 세상의 구원을 선포하라고 그들에게 위임하사 파손하셨음을 증거 하셨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보증이 되셨는가? 즉 그들의 마음속에 크나큰 평안을 주시고, 모든 고난을 견딜 인내를 주시고, 말로 할 수 없는 용기와 즐거움을(이런 사실은 그 증거자들 자신에게 증거가 되는 것들이었다) 주심으로써 그들의 보증이 되셨다. 또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표징과 놀라운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나타내시고 또한 당신의 뜻을 따라 성령을 선물로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보증이 되셨던 것이다.”표징”이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표징과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표징을 말하는 것이다.”놀라운 일”이란 자연의 법칙과 순리를 초월하여 역사되어지는 말씀의 역사 즉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과 경이로 가득차게 하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또 설교 내용을 열심히 탐구하도록 만드는 역사인 것이다.”여러 가지 기적” 또는 능력 있는 역사란 초월적으로 강력하게 역사되어지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성령의 은사”란 복음 증거자들로 그들이 불리움을 받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성령께로부터 오는 여러 가지 은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12:4 이하). 또한 이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를 믿음 위에 확고히 서게하며 우리의 소망을 확고하게 하시려는 뜻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도 표징과 놀라운 일을 행하심으로 율법의 권위와 우수성을 입증하시었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실 때는 더 크고 놀라운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복음의 섭리가 더욱 뛰어나고 놀라운 것임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큰 이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셨다.

2:5 그리스도의 수난의 목적(히브리서 2:5-9) 사도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천사들보다 뛰어나다는 교리를 실제적인 생활과 연관시켜 권면한 후 다시 먼저 번의 교리 즉 그리스도의 인격이 천사들 보다 뛰어나시다는 교리로 돌아가 그 교리를 더욱 규명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시지는 않습니다”(5절)라고 하였다. Ⅰ. 본문에서 바울은 부정적인 어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인격의 뛰어나심을 주장한다. 즉 복음에 의해 주어지는 나라, 본문대로 한다면 “장차 올 세상”은 “천사들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구속자 자신의 특별한 보호와 지휘 아래 있음을 말한다. 이 말씀은 현재 교회가 존재하는 이 세상 국가나 또는 장차 올 완성된 세상(이 세상은 이 세상 임금들이 쫓겨나고 이 세상 왕국들이 그리스도와 왕국이 될 때 임하는 세상이다)이 천사들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큰 권세를 가지시고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복음을 주실 때 율법을 주실 때 하셨던 것처럼(율법의 시대는 옛 시대요 지나간 시대인데) 천사들을 심부름꾼으로 삼으시지 않으셨다. 이제 새로운 세계는 그리스도께 위임된 것이며 오직 그에게만 모든 영원하고 영적인 것에 관한 절대적인 권능이 부여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통치하신다. 그가 이같은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에게는 영광이 되며 그의 교회에게는 축복과 안위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초의 창설과 포교, 치리 또는 교회의 마지막 심판과 완성은 어는 것도 천사에게 위임된 것이 없고 오로지 그리스도에 위임된 것이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천사들에게는 그런 큰 권세를 부여하지 않았고, 그의 천사들은 그런 무거운 책임을 맡기에는 너무나 약했던 것이다. Ⅱ. 우리는 본문에서 복음의 세계가 축복 받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이 구약 성경을 통해 설명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시편 8편 4-6절 즉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에게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까?……”는 말씀이 인용된 것이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본문의 경우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1.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전체 인간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겸손과 친절하심에 대하여 감격을 금치 못하게 된다.

(1)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사랑의 섭리에 의하여 인간들을 기억하시고 다음에 두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모든 인간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 전서부터의 계획과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을 생각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잊혀진 바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 그가 인간을 찾아 주심에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인간을 찾아오시게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거하고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위험 속에 우리가 처해 있으며,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자 하셔서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매일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자.

(3) 하나님이 인간을 이 낮은 세상에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심에 대하여 또 그가 인간을 건물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며,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으뜸 되는 존재가 되게 하시며, 육신으로 있는 이 세상에서는 천사보다 조금 낮게 하셨으나, 의로운 자의 부활시에는 천사와 동등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감격하게 한다(눅 20:36).

(4)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씌우심에 대하여 즉 그가 영혼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또 신체에는 신체대로 우수한 지체를 주신데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배려로 인하여 인간은 영과 육의 세계에 동시에 속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영과 육의 세계에서 주어지는 행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5) 인간에게 만물을 통치할 권리와 지배권을 주신데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충실하며 의무를 다하는 한, 다른 동물들을 계속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다.

2. 이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해 보자. 그리고 특별히 8,9절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 주심으로 보여 주신 사랑의 주된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도대체 쓸모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어떤 직책을 부여 하셨는지가 구약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여기 증언되고 있는데 이제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권고 하셨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로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가 대 희생물로써 이 세상에 오시기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선약이 이루어져 있었다.

[3]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지으심으로 그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게 하심으로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4]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존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인성에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셨다는 사실이다. 또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을 그에게 주시고, 삼위의 제 이위로써 거룩함을 주셔서, 신격이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충만하게 하셨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또한 모든 인간이 가지는 죽음을 맛보심으로 즉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저주스러운 십자가 처형의 쓰디쓴 순간을 맛보심으로 인간의 속죄를 이루어 주셨고 그같이 하시므로 인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시었다.

[5] 죽음을 맛보시기까지 낮아지신 그의 겸비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에게 주시고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권을 주시었다. 이같이 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모두 성취되게 하셨다. 구약 성경의 말씀이 이같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예는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인간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은 전체 인간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겸손과 친절하심에 대하여 감격을 금치 못하게 된다.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사랑의 섭리에 의하여 인간들을 기억하시고 다음에 두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모든 인간에 대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 전서부터의 계획과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들을 생각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잊혀진 바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그가 인간을 찾아 주심에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인간을 찾아오시게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거하고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위험 속에 우리가 처해 있으며,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자 하셔서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매일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자.하나님이 인간을 이 낮은 세상에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심에 대하여 또 그가 인간을 건물의 머릿돌이 되게 하시며,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으뜸 되는 존재가 되게 하시며, 육신으로 있는 이 세상에서는 천사보다 조금 낮게 하셨으나, 의로운 자의 부활시에는 천사와 동등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감격하게 한다(눅 20:36).하나님이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씌우심에 대하여 즉 그가 영혼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시고 또 신체에는 신체대로 우수한 지체를 주신데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배려로 인하여 인간은 영과 육의 세계에 동시에 속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영과 육의 세계에서 주어지는 행복을 동시에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인간에게 만물을 통치할 권리와 지배권을 주신데 대하여 우리는 감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께 충실하며 의무를 다하는 한, 다른 동물들을 계속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셨다.이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해 보자. 그리고 특별히 8,9절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그리스도를 인간에게 보내 주심으로 보여 주신 사랑의 주된 동기는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도대체 쓸모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어떤 직책을 부여 하셨는지가 구약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여기 증언되고 있는데 이제 이 사실을 생각해 보자.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권고 하셨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로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가 대 희생물로써 이 세상에 오시기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 선약이 이루어져 있었다.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지으심으로 그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게 하심으로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존재가 온전히 거룩하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인성에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셨다는 사실이다. 또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을 그에게 주시고, 삼위의 제 이위로써 거룩함을 주셔서, 신격이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충만하게 하셨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또한 모든 인간이 가지는 죽음을 맛보심으로 즉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우며 저주스러운 십자가 처형의 쓰디쓴 순간을 맛보심으로 인간의 속죄를 이루어 주셨고 그같이 하시므로 인류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시었다.죽음을 맛보시기까지 낮아지신 그의 겸비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씌우시고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에게 주시고 만물을 지배하는 절대권을 주시었다. 이같이 함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이 모두 성취되게 하셨다. 구약 성경의 말씀이 이같이 온전하게 이루어진 예는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인간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2:10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적(히브리서 2:10-13) 그리스도의 죽음을 서술한 후 바울은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의 이해되지 않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무슨 이유로 고난을 받게 했는가를 밝힘으로 또한 그의 이러한 고난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받게 되었는가를 보임으로 위의 작업을 진행하셨다. Ⅰ.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그리스도로 고난을 겪게 하셨는가를 본문은 말해 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10절). 1. 여기서 하나님이 만물의 최종 목적이요 또 만물의 제일 원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보존하기 위해, 즉 그가 지은 모든 것이 그에게 욕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 그가 인간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

2. 본문은 인간 구원의 목적을 정하시고 그 방법을 정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1) 인간 구원을 작정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것은 많은 아들들을 인도하여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즉 복음의 영광된 특권을 누리게 하며 또한 장차 하늘나라에서의 영광까지 누리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었다.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우리가 하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중생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만 한다. 하늘나라는 유산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자녀들만이 이 상속을 받을 후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구셨으니(요 1:12)”라고 하였다.

[3] 비록 때와 장소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과 몇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들이 함께 모이면 그들이 많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이시다.

[4]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또한 아무리 흩트려져 있고 파가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함께 영광에로 이르게 될 것이다.

(2) 인간 구원의 방법을 정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셨다.

[1] 구원의 대장이 되는 사람을 정하신 것도 하나님이었다. 구원받을 자들은 남을 구원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대장과 인도자의 지도하에서 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대장의 깃발 아래 모여야만 한다. 또한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고난을 인내하여야 한다. 그들은 대장을 좇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자들만이 멸망으로부터 안전하게 인도되어 위대한 영광과 존귀를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받게 하심으로 그를 완전케 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도록 하셨다(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 직책에 임명하셨고 그 일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대장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넉넉하신 주의 성령에 힘입어 지혜와 용기와 힘이 있어야 온전하시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되셨다. 즉 그리스도는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완성하셨고, 또한 그의 이러한 피흘림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심에 아무 결격이 없는 분임을 나타내 주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내셨다. 따라서 그의 백성들 또한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웬(Owen)박사는 고난을 통하여 봉헌되고 또 완전해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고난을 통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이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시었다고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이는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그들이 존귀해지고 유익을 얻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이 만물의 최종 목적이요 또 만물의 제일 원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보존하기 위해, 즉 그가 지은 모든 것이 그에게 욕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 그가 인간의 구속을 이루신 것이다.본문은 인간 구원의 목적을 정하시고 그 방법을 정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인간 구원을 작정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것은 많은 아들들을 인도하여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즉 복음의 영광된 특권을 누리게 하며 또한 장차 하늘나라에서의 영광까지 누리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었다. 영원한 영광이 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우리가 하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중생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만 한다. 하늘나라는 유산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자녀들만이 이 상속을 받을 후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구셨으니(요 1:12)”라고 하였다.비록 때와 장소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과 몇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들이 함께 모이면 그들이 많다는 사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이시다.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또한 아무리 흩트려져 있고 파가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함께 영광에로 이르게 될 것이다.인간 구원의 방법을 정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셨다.구원의 대장이 되는 사람을 정하신 것도 하나님이었다. 구원받을 자들은 남을 구원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대장과 인도자의 지도하에서 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대장의 깃발 아래 모여야만 한다. 또한 그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고난을 인내하여야 한다. 그들은 대장을 좇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자들만이 멸망으로부터 안전하게 인도되어 위대한 영광과 존귀를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다.우리의 구원의 대장을 고난받게 하심으로 그를 완전케 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 아버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도록 하셨다(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 직책에 임명하셨고 그 일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대장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넉넉하신 주의 성령에 힘입어 지혜와 용기와 힘이 있어야 온전하시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완전하게 되셨다. 즉 그리스도는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완성하셨고, 또한 그의 이러한 피흘림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심에 아무 결격이 없는 분임을 나타내 주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내셨다. 따라서 그의 백성들 또한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웬(Owen)박사는 고난을 통하여 봉헌되고 또 완전해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고난을 통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이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도록 예비하시었다고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이는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그들이 존귀해지고 유익을 얻게 된다. Ⅱ.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얼마나 큰 혜택을 입게 되는가를 보여 주신다는 사실을 본문은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결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위에서 고찰되었다. 여기서는 이 고난이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 됨이 말씀되고 있다. 이 고난을 통해 주를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와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1. 그의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와 연합하게 된다. 본문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11절)”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심으로 거룩케 하는 성령을 인간들에게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는 일의 으뜸이 되신다. 우리를 믿는 자는 거룩하게 하는 성령도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참되게 믿는 자는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생활 원리들과 능력을 부여받고 추악함과 못된 생활에서 떠나 거룩하고 높은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영광으로 이르기 전에 먼저 거룩하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는 일을 주제하시는 그리스도와 이를 받아들여서 따르는 신자들은 모두 하나에서 난 것이다. 어떻게 왜 그렇게 되었는가?

(1)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모두 한 하늘 아버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심은 영원 전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로를 통해서 정해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 되심은 양자 선택과 중생의 방법을 통하여서인 것이다.

(2) 또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모두 세상의 아버지인 아담의 자손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다같이 인간의 품성을 가지고 있다.

(3) 이 양자는 다같이 영적인 존재이다. 즉 다같이 거룩하고 또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같은 영을 소유하고 있다.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마음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도 있는 것이다. 같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은 깨닫게 하고 일하게 하신다.

2. 그의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된다. 서로간의 사랑은 그들의 연합의 필연적 결과이다. 저자는 처음에 이 사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선포하고 이 관계를 설명하고 증명하게 위해 구약에서 세 구절을 인용한다.

(1) 저자는 이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선언한다. 위에서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들은 다 하나에서 낳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와 믿는 자는 형태이다.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형제이다. 또한 혈통으로 볼 때도 서로 형제이다. 지상에서의 관계에서 볼 때 그러하듯이 하늘 나라에서 관계에서 볼 때도 그러한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이런 관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본래적인 비열함과 죄에 의해 악해진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로 부르신 사실은 그의 놀라운 선하심과 겸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는 누구나 결코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고 욕을 먹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2) 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세 구절을 예로 들어 위의 사실을 설명한다.

[1] 저자는 먼저 시편 22장 22절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는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이 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뛰어난 예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편 22장은 또한 십자가상에 성의 그리스도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언된다. 첫째,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교회 또는 회중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를 기꺼이 따르는 추종자들은 지니실 것이 예언된다. 둘째, 이들 추종자들은 서로서로 형제가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형제가 될 것이 예언된다. 셋째,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즉 그의 품성과 속성과 의지와 마음을 형제들에게 선포할 것이 예언된다. 사실 그리스도는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동안, 아버지의 이름을 몸소 전하시었고 그리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그들로 세상 끝날까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하셨다.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할 것이 예언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목적하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이었다. 그리스도의 심정은 오직 이 사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이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백성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그와 함께 참여하도록 하시었다.

[2] 저자는 둘째로 시편 18장 2절의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시 18:2)”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유형인 다윗이 당한 역경을 설명하고 어떻게 다윗이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니신 이외에 또다른 본성 즉(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성을 지니셨음을 보여 준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주는 우리의 머리요 지휘자로서 고통을 당하시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제들도 역시 고통을 겪어야 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한다.

[3] 저자는 셋째로 이사야 8장 18절의 “볼지어다. 나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사 8:18)”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양친과 그의 자녀들은 같은 천성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원한 사랑의 섭리를 통하여 그에게 주신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평화의 계약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므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다. 그들이 그의 약속을 확신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영접하시고 지배하시며 그들을 미쁘게 여기시며 그들의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 나라로 데려가시며, 거기서 하나님께 그들은 대면시키신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신다.

그의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와 연합하게 된다. 본문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11절)”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자신을 대가로 지불하심으로 거룩케 하는 성령을 인간들에게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는 일의 으뜸이 되신다. 우리를 믿는 자는 거룩하게 하는 성령도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참되게 믿는 자는 거룩하게 된 자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생활 원리들과 능력을 부여받고 추악함과 못된 생활에서 떠나 거룩하고 높은 목적을 위하여 구별된 자들이다. 왜냐하면 영광으로 이르기 전에 먼저 거룩하게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는 일을 주제하시는 그리스도와 이를 받아들여서 따르는 신자들은 모두 하나에서 난 것이다. 어떻게 왜 그렇게 되었는가?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모두 한 하늘 아버지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심은 영원 전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로를 통해서 정해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 되심은 양자 선택과 중생의 방법을 통하여서인 것이다.또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모두 세상의 아버지인 아담의 자손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다같이 인간의 품성을 가지고 있다.이 양자는 다같이 영적인 존재이다. 즉 다같이 거룩하고 또 하늘나라를 지향하는 같은 영을 소유하고 있다. 비록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마음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도 있는 것이다. 같은 성령이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들은 깨닫게 하고 일하게 하신다.그의 고난을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된다. 서로간의 사랑은 그들의 연합의 필연적 결과이다. 저자는 처음에 이 사랑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선포하고 이 관계를 설명하고 증명하게 위해 구약에서 세 구절을 인용한다.저자는 이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선언한다. 위에서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들은 다 하나에서 낳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그리스도와 믿는 자는 형태이다.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형제이다. 또한 혈통으로 볼 때도 서로 형제이다. 지상에서의 관계에서 볼 때 그러하듯이 하늘 나라에서 관계에서 볼 때도 그러한 것이다.그리스도는 이런 관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들의 본래적인 비열함과 죄에 의해 악해진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로 부르신 사실은 그의 놀라운 선하심과 겸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자는 누구나 결코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를 위하여 부끄러움을 당하고 욕을 먹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저자는 구약 성경에서 세 구절을 예로 들어 위의 사실을 설명한다.저자는 먼저 시편 22장 22절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는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이 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뛰어난 예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편 22장은 또한 십자가상에 성의 그리스도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기도 한다.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언된다. 첫째,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교회 또는 회중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를 기꺼이 따르는 추종자들은 지니실 것이 예언된다. 둘째, 이들 추종자들은 서로서로 형제가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형제가 될 것이 예언된다. 셋째,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 즉 그의 품성과 속성과 의지와 마음을 형제들에게 선포할 것이 예언된다. 사실 그리스도는 우리가운데 거하시는 동안, 아버지의 이름을 몸소 전하시었고 그리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그들로 세상 끝날까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하셨다.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할 것이 예언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목적하신 것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이었다. 그리스도의 심정은 오직 이 사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이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내놓으셨다. 그리고 그는 그의 백성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그와 함께 참여하도록 하시었다.저자는 둘째로 시편 18장 2절의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시 18:2)”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유형인 다윗이 당한 역경을 설명하고 어떻게 다윗이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신성을 지니신 이외에 또다른 본성 즉(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성을 지니셨음을 보여 준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주는 우리의 머리요 지휘자로서 고통을 당하시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제들도 역시 고통을 겪어야 하며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한다.저자는 셋째로 이사야 8장 18절의 “볼지어다. 나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사 8:18)”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양친과 그의 자녀들은 같은 천성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원한 사랑의 섭리를 통하여 그에게 주신 사람들인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평화의 계약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므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다. 그들이 그의 약속을 확신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을 영접하시고 지배하시며 그들을 미쁘게 여기시며 그들의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 나라로 데려가시며, 거기서 하나님께 그들은 대면시키신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신다.

2:14 그리스도의 성육(히브리서 2:14-18) 위의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을 계속 주장한다. 즉 그가 천사의 속성을 지니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의 이유와 목표를 제시한다. Ⅰ. 그리스도의 성육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로 그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고 하였다(16절)(역주: 한글 개혁과 다소 틀림). 그리스도는 혈과 육을 지니셨다. 그가 하나님으로서는 영원부터 선재 하셨으나 때가 이르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므로 참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붙들려 하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려고 오셨다. 천사들이 타락했을 때 그는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셨고 희망이나 도움도 없이 죄의 지배와 수치와 버림받은 상태를 그대로 지니게 하시었다. 그리스도는 결코 타락한 천사들의 구세주가 되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계보가 타락되자 그대로 내버려 두시되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천사들의 본성을 지니셔서는 천사들이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회복하고 타락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인 한 사람으로 나심으로 인성을 입으셨고 또한 죄를 범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가 이렇게 하심은 인간에게 희망을 던져 주시고 또 그들 모두가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혜택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많은 죄인들에게 희망과 도움이 있게 되었다. 여기서 모든 인간에 대한 충분하고 적절한 대가가 치루어짐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를 구원하게 보여 주신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보여 주신 특별한 자비를 활용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성육의 이유와 계획이 선포되고 있다. 1. 본문에서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하시어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였다(14,15절). 그가 그렇게 인성을 입으신 이유는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채울 수도 없었고 또 인간들을 희망이 있는 상태로 끌어올리며 또한 믿는 자들을 하나님에게는 자녀로 또 그리스도에게는 형제로 끌어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성을 입으므로 당할 고난을 아셨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알았음에도 자진하여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에 의한 제사와 제물로 인간의 죄를 속해 주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태어나셨고 그랬기에 그리스도에 “주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3. 그는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었다”(14절). 마귀는 최초의 죄인이며, 죄의 최초의 유혹자였다. 그리고 죄는 죽음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인간을 죄로 이끌고 또 그 길을 사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때로 사망의 두려움으로 인간의 양심을 위협하며 또한 그가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이며 또 인간의 인체에서 그들의 영혼을 끌어내어 심판을 받도록 하나님의 재판 자리까지 데려가 거기서 저주를 받게 하며 또한 인간의 유혹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그를 멸하사 다시는 그로 하여금 아무도 영적인 죽음에 처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고, 또한 아무것도(죽음의 치명적 요인인) 죄에도 끌어들이지 못하게 하셨으며 또 사람들의 영혼을 주장치도 못하게 하시었다. 그리고 자진하여 마귀에 노예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대적을 고집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셨다.

4.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자주 경험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셨다. 여기서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이란 특별히 예속의 영 아래 있었던 구약의 성도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 불멸에 대한 지식이 복음에 의해 제시된 것처럼 그들에게 밝히 제시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는 본문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혹은 그것이 신약이든지 구약이든지를 막론하고 자주 죽음과 영원한 삶에 대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동을 느끼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고 죽으신 것은 인간들로 죽음은 이미 정복된 적일 뿐만 아니라 두려울 것이 없는 친구와 같은 것임을 알게 하고 또한 죽음이란 영혼에게 해를 입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버리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슬픔과 불만을 종식시키고 영생과 축복의 길로 영혼을 이끌기 위해서 보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그들을 영혼의 불안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사탄의 지배 아래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죽음은 사탄의 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인이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이에게는 죽음은 사탄의 손길을 따라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되었다.

5. 그리스도는 형제들과 닮게 지어지셨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공의와 영예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의 백성들을 지지하시고 위로하시는 두 가지 일을 다 감당하는 자비롭고도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는 충실하시고 인간에게는 자비로우셔야만 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이루셔야만 했던 일.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명예를 충족시켜 드리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공의가 손상됨이 없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그의 인격을 손상시킴이 없이 인간을 원상 회복시키며 하나님과 인간을 온전히 화해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편에서 감당해야 할 임무였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불화와 투쟁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고, 죽음으로써 그 갈등을 중단시키고 훨씬 더 관계를 아름답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은혜와 우정으로써 받아들이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가 감당하셔야 했던 일. 그것은 곧 그의 백성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자기가 시험을 봤어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18절)”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

[1] 그리스도의 수난. 본문에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고 하였다.

[2] 그리스도의 자비. “그리스도는 시험받는 자들의 능히 도우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의 약함을 친히 아셨다. 또한 그는 부드러웁고 기술이 좋고 동정심 많은 의사이셨다. 그리스도는 유혹 아래 있는 영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가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러한 같은 병을 앓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혹과 영혼의 고민을 통해 인간의 아픔을 체험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겪은 슬픔과 유혹에 대한 기억이 그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시련에 모두 관심을 지니게 하셨고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첫째,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많은 유혹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혹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일랑 품지 말도록 하자. 둘째, 유혹 때문에 우리 영혼은 고민과 위험 속에 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러한 유혹 속에 서 있는 사람들로 자신을 따르도록 도와주신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이었고 유혹을 받았었기 때문에 믿는 자들을 여러 가지로 훨씬 잘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하시어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였다(14,15절). 그가 그렇게 인성을 입으신 이유는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채울 수도 없었고 또 인간들을 희망이 있는 상태로 끌어올리며 또한 믿는 자들을 하나님에게는 자녀로 또 그리스도에게는 형제로 끌어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 되었다.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성을 입으므로 당할 고난을 아셨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알았음에도 자진하여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율법에 의한 제사와 제물로 인간의 죄를 속해 주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태어나셨고 그랬기에 그리스도에 “주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었다”(14절). 마귀는 최초의 죄인이며, 죄의 최초의 유혹자였다. 그리고 죄는 죽음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인간을 죄로 이끌고 또 그 길을 사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때로 사망의 두려움으로 인간의 양심을 위협하며 또한 그가 하나님의 공의의 집행자이기 때문이며 또 인간의 인체에서 그들의 영혼을 끌어내어 심판을 받도록 하나님의 재판 자리까지 데려가 거기서 저주를 받게 하며 또한 인간의 유혹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귀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력을 잡은 그를 멸하사 다시는 그로 하여금 아무도 영적인 죽음에 처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고, 또한 아무것도(죽음의 치명적 요인인) 죄에도 끌어들이지 못하게 하셨으며 또 사람들의 영혼을 주장치도 못하게 하시었다. 그리고 자진하여 마귀에 노예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대적을 고집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형을 집행하지 못하게 하셨다.그리스도는 인간들이 자주 경험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셨다. 여기서 “한평생 죽음의 공포에 싸여 살던 사람”들이란 특별히 예속의 영 아래 있었던 구약의 성도들을 두고 한 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 불멸에 대한 지식이 복음에 의해 제시된 것처럼 그들에게 밝히 제시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는 본문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혹은 그것이 신약이든지 구약이든지를 막론하고 자주 죽음과 영원한 삶에 대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동을 느끼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 말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고 죽으신 것은 인간들로 죽음은 이미 정복된 적일 뿐만 아니라 두려울 것이 없는 친구와 같은 것임을 알게 하고 또한 죽음이란 영혼에게 해를 입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버리기 위해 보내진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슬픔과 불만을 종식시키고 영생과 축복의 길로 영혼을 이끌기 위해서 보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그들을 영혼의 불안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사탄의 지배 아래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죽음은 사탄의 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하인이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모든 이에게는 죽음은 사탄의 손길을 따라 지옥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되었다.그리스도는 형제들과 닮게 지어지셨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공의와 영예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의 백성들을 지지하시고 위로하시는 두 가지 일을 다 감당하는 자비롭고도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는 충실하시고 인간에게는 자비로우셔야만 했다.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이루셔야만 했던 일.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명예를 충족시켜 드리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공의가 손상됨이 없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그의 인격을 손상시킴이 없이 인간을 원상 회복시키며 하나님과 인간을 온전히 화해하는 일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편에서 감당해야 할 임무였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불화와 투쟁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시고, 죽음으로써 그 갈등을 중단시키고 훨씬 더 관계를 아름답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은혜와 우정으로써 받아들이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명심하자.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가 감당하셔야 했던 일. 그것은 곧 그의 백성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자기가 시험을 봤어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18절)”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여 보자.그리스도의 수난. 본문에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고 하였다.그리스도의 자비. “그리스도는 시험받는 자들의 능히 도우실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우리의 약함을 친히 아셨다. 또한 그는 부드러웁고 기술이 좋고 동정심 많은 의사이셨다. 그리스도는 유혹 아래 있는 영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가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러한 같은 병을 앓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죄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혹과 영혼의 고민을 통해 인간의 아픔을 체험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이 겪은 슬픔과 유혹에 대한 기억이 그로 하여금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시련에 모두 관심을 지니게 하셨고 그들을 도울 수 있게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첫째,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많은 유혹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혹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일랑 품지 말도록 하자. 둘째, 유혹 때문에 우리 영혼은 고민과 위험 속에 처하게 되며 그러기에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러한 유혹 속에 서 있는 사람들로 자신을 따르도록 도와주신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이 인간이었고 유혹을 받았었기 때문에 믿는 자들을 여러 가지로 훨씬 잘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서는 중요한 서신이면서도 많은 성도들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저자의 문체가 특이하며 논리 전개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특히 1장에 나오는 많은 성경 인용들은 무엇을 말하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1,2장을 몇 개의 문단으로 나누어서 그 중심 되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I.계시의 완성자 그리스도(1-3절)

히브리서 1장은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1절부터 3절까지는 구약의 선지자들보다도 더 뛰어나심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1절),이 부분은 분사구문으로 되어 있어서 이어서 나오는 2절 말씀을 위한 부수적 역할을 한다. 여기 1절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지자들은 ‘계시의 도구’이며 하나님이 ‘계시의 주체’라는 사실이다. 구약성경은 선지자들이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한 것이다(벧후 1:21). 성경에서 계시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인간만 보고 만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자가 아니라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역사가가 되고 말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2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아를’()이다. 비록 ‘아들’ 이란 단어에 관사가 붙어 있지 많지만 문맥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아들’을 통한 계시는 그 이전의 선지자들을 통한 모든 계시들의 최종적 완성이다. 이런 면에서 ‘아들’을 통한 계시는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계시라 할 수 있다.

여기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란 표현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구약성경의 ‘후일에’ 또는 ‘말일에’(be’a arithhayyamim, 창49:1, 민24:14, 신4:30, 사2:2, 렘 23:20, 겔38:16, 단 10:14, 호3:5, 미 4:1 등)란 표현과 같은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F.F.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 1964, p.3). 이 ‘말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실 때이며 메시아를 보내실 때이다(F.W.Grosheide, De brief aan de Hebreen, 1927,p.65). 그래서 어떤 사람은 히브리서의 이 표현은 ‘시작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을 의미한다고 한다(Bruce, 3 각주 14). 그러나 히브리서의 이 표현을 자세히 보면 구약의 ‘후일에’ 란 표현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 히브리서 1장에서는 ‘이’()라는 지시 대명사가 붙어 있어서 ‘앞에서 말한 날들의’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해 오시던 ‘계시 역사’의 마지막 때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하고자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소위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는 여태까지의 모든 계시 행위들의 최종적 완성이요 궁극적 성취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석할 때 멀리 있는 문맥보다도 가까이 있는 문맥, 특히 그 단어나 표현이 속해 있는 문장을 더 중요시해야하며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2절 하반절에서는 이 ‘아들’에 대해 총괄적으로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만유의 후사’() 곧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으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여기서 ‘세계’라고 번역된 ‘아이오네스’()는 주로 ‘세대’(ages)란 의미로 쓰이지만 ‘우주, 세계’ (worlds)란 의미로도 쓰인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단지 ‘세계’란 의미가 아니라 ‘세계의 역사’ 곧 이 세계와 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를 포함한 개념으로 보기도 하지만(Grosheide,66), 그러나 여기에 ‘지으셨다, 만드셨다’()는 단어가 있으므로 세상 ‘역사’로 보기는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여기에 ‘지으셨다’는 단어뿐만 아니라 ‘주관하신다, 다스리신다’ 는 단어가 왔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아이오네스’는 11장 3절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우주, 세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Bruce 4).

3절에서는 이 ‘아들’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여기서 ‘본체’란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인데 아직 이후의 교의학에서 발전된 바와 같은 ‘위격’(Person)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는 그 단어의 원래의 의미를 따라 ‘존재’ (existence) 또는 ‘본질’(essence)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Grosheide 67f.). 그리고 ‘형상’()이란 말은 ‘도장을 찍은 인’(印)을 뜻한다. 도장을 찍으면 그 ‘인’(印)은 ‘도장’과 동일하지만 도장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위격상으로는 ‘구별된 존재’()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광채’()가 되신다(Grosheide,67).

II.친사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4-14절)4절

이하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뛰어나심에 대해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논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뛰어난 성경지식과 논증의 예리함을 볼 수 있다.

1.더 나은 이름을 얻으심(4,5절)

4절과 5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더 나은 아름’을 얻으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 ‘아름다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비교급으로서 더 나은, 우월한(superior)이란 뜻이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으셨지만, 천사는 결코 그런 적이 없다는 것이다.

2.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심(6,7절)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지만, 천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불과하다(6,7절). 6절에서는 그리스도를 ‘프로토토코스’()라고 부른다. 이것은 개역판 성경에 ‘맏아들’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뜻은 ‘먼저 나신 자’이다(골1:15 참조). 그리고 6절에서 ‘경배한다’()는 단어는 ‘…에게 무릎을 꿇는다’ 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7절은 시편104편 4절의 인용인데, 우리 개역판 성경에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여기의 ‘바람’() 이란 단어는 경우에 따라 ‘영들’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같은 절 안의 ‘불꽃’과의 대비 관계 때문에 개역판 성경에서처럼 ‘바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사역자들’()이란 단어는 ‘섬기는 자들’(servants)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어했든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는 문장은 그 의미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 문장은 가능한 목적어를 두 개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단어를 목적어로 보고 어느 단어를 목적 보어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시편에서처럼 목적어와 목적보어를 바꾸어서 “바람을 그의 천사(天使또는使者)로 삼으시며, 불꽃을 그의 사역자(使役者 또는 섬기는 자)로 삼으시느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cf. G.W.Buchanan, To the Hebrews. 1981,p.18f.)

3.하나님 되심(8,9절)

8절과 9절에서는 시편 45편 6절과 7절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부분에서 논하고자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논증이 왜 성립하는지는 우리 개역판 성경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 이유는 8절에서 2인칭 인칭 대명사를 ‘주’(主)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8절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이여 너의 보좌가 영영하며 너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너’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던 여기서 ‘너’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데 9절에 보면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승[勝)하게 하셨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의 ‘너’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통사람들은 지나쳐 버리기 쉬운 인칭 대명사에 주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논증하는 것을 볼 때,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성경을 얼마나 자세히 읽고 연구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4.창조자 되심(10-12절)

10절부터 12절까지에서는 시편 102편 25절부터 27절까지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창조주 되심과 영존하심을 말하고 있다. 10절 초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다. ‘주’()란 만물의 주재자이며 또한 우리의 주관자임을 뜻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주께서’, ‘주의’,그리고 ‘주는’은 다 원래 2인칭대명사(너, 당신)이다. 그렇다면 여기의 2인칭 대명사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구절들과 시편 102편의 전체문맥을 볼 때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구약에서 일차적으로 ‘여호와’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70인역에서 ‘주’로 번역되었고 이것이 신약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예가 많다. 이것은 삼위일체 안에서 위격의 혼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기” 때문이다(cf. Grosheide, 79).

5.천사의 열등함(13-14절)

그러나 13절에서 천사들에게는 이러한 영광과 권세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곧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시 110:1)는 말씀은 천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시편에 있는 이 구절의 서두(“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를 볼 때, 이 말씀은 메시아에게 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14절에서는 결론적으로 천사란 어떤 존재인가를 말하고 있다.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신 것”이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로서, 그 섬김의 대상은 ‘장차 구원을 상속할 자들’()이다. ‘구원을 상속한다’는 것은 종국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천사들은 구원받은 성도들, 곧 종국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영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천사들을 경배하거나 의지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경배하고 섬길 분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뿐이시다.

Ill.이같이 큰 구원(2:1~4절)

2장에 들어와서는 앞장에서 말한 사실에서 실제적인 교훈을 도출하고 있다(1-4절). 이처럼 천사보다 월등히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가 믿고 있으니, 우리가 받은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님이 위대할수록 우리가 받은 구원도 그만큼 위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이같이 큰 구원’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조심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같이 큰 구원’ 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3절과 4절에서 말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 책에 있는 필자의 “히브리서 난제 구절 해설”을 참조하라).

IV.고난 받으신 그리스도(2:5-10절)

5절부터 10절까지에서는 다시금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말한다. 먼저 천사와의 대비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1장에서와 같다. 그러나 점점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나아가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서 시편 8편 4절부터 6절까지를 인용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히 2:6-8).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시편 8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인자(人子)의 발아래 복종케 하셨다고 하였지만, 만물이 저에게 복종한 것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자 예수를 보고 있다(8-9절). 이 사실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을 복종케 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이 필요함을 논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의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한낱 이스라엘의 역사책이나 유대교의 경전으로 읽으면 안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이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으로 읽어야 한다(요 5:39).물론 구약 성경의 아무데서나 억지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되지만,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구약의 어떤 구절들에서 합당한 근거가 있을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시간의 진행이 필요함을 보고 있다. 만물을 메시아의 발아래 복종시킬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즉시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구약의 예언이 기계적으로 이루어졌겠지만, 우리 인간의 구원이 배제된 의미 없는 승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승리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무시된 그리스도 혼자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발아래 두시기 전에 먼저 자신이 고난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온전케 되시는 일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도록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10절).

위 시편 8편의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아직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여기 나오는 ‘인자 (人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잠깐 동안’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먼저 시편 8편 4절(히 2:6)의 ‘인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전 여기의 ‘인자’()는 바로 앞의 ‘사람()과 동의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여기의 ‘인자’에 대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약에서의 ’인자‘ 란 표현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온 것이며, 시편 8편에서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Grosheide, 91 각주 2).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히브리서 2장에서 ‘인자’란 표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간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이 점에 대해서는 Buchanan, 27이 잘 지적하고 있다). 물론 다윗이 시편 8편을 기록할 때 과연 ‘메시아’ 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고 기록했을지는 의문스럽다. 어쩌면 다윗은 그냥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 비록 타락한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 의 존귀함과 영화로움을 노래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저자(제 2 저자)의 생각을 뛰어 넘어서 역사하시는 원저자(제 1 저자)가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인간 저자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미래에 대한 예언을 당대의 평범한 말들 가운데 심어 두시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인간 저자가 당대나 지나간 일들에 대해 말한 것이 미래의 메시아 시대의 일에 대한 예언이 되는 경우도 있다(예를 들어 호 11:1). 시편 2편의 ‘열국을 다스리시는 왕’(王)에 대한 말씀과 110편의 ‘원수를 발등상 아래 두게 될 주’(主)에 대한 말씀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는 사실을 과연 이를 기록한 다윗이 알았을까? 나아가서 이사야서의 많은 메시아 예언에 대해서도 이사야가 그 의미를 그 당시에 이미 알았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오늘날 우리가 확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아직 신약 시대에서와 같은 분명한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 11)고 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성경은 인간 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이 들어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 9).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을 한밭 인간의 작품으로 보게 되며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이에 대해서는 1997년 6월호 [그말씀], 189-196에 실린 필자의 “선지서 예언의 해석과적용”을 참조 하라).

어쨌든 시편 8편에서 모호했던 것이 히브리서 2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도 머뭇거림없이 시편 8편에 언급된 ‘인자를’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로 보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시편 8편에 기록된 ‘인자’가 고난 받으시고 영광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첫날에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편을 기록할 당시에 다윗이 이 모든 의미를 다 알았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윗은 이 시를 기록할 때 자기로서는 아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영화로움을 노래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시 가운데 고난 받으시고 영광 받으실 메시아의 모습을 함께 표현하셨다. 전자의 의미는 인간 저자 다윗이 표현하고자 했던 일차적 의미이며, 후자는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셨던 참된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후자의 의미일 뿐 아니라 전자의 의미도 받으셨다. 그러나 다윗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도 나름대로 진리이지만 하나님께서 심어 두셨던 후자의 의미가 더 중요하고 심오한 진리이다. 이 심오한 메시아적 의미는 때가 차매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신약 성경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어떤 구절의 말씀은 ‘이중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약 성경, 특히 예언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 이중적 의미 또는 다중적 의미를 배제해 버린다면 근본적으로 구약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부인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단지 인간 저자만 보고 말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인간 저자를 통해 표현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대개의 일상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 저자를 뛰어 넘어서 그 인간 저자가 알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주실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인간 저자는 대개 당대의 어떤 사실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표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서서 장차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질 것들을 예언하시는 것이다. 이 때에는 인간 저자의 이해와 신적 저자의 이해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대개 신적 저자의 이해는 인간 저자의 이해를 배척하지 아니하고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은 구약 성경대로 자연스럽게 읽혀지지만, 그 참 의미는 신약성경에 의해 드러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된다. 이처럼 어떤 특정 부분에서 성경의 이중적 의미의 가능성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결국 전능하신하나님의 역할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다음으로 7절과 9절에 있는 ‘잠깐 동안’()이란표현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표현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 조금(a little), 2) 잠깐 동안(for a little while). 의미상으로는 두 가지가 다 가능하며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단어가 여기서 ‘인자가 천사보다 못한 것’과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것’ 사이에 대비되는 문맥에서 사용된 것을 볼 때‘잠깐 동안’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된다(Grosheide, 92).곧 예수님께서는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한 상태로 낮아지셨지만 (시 22:6,빌 2:6-8 참조), 곧 하나님에 의해 영화롭게 되신 것이다.

V. 우리의 형제 되신 그리스도(2:11-18절)

11절 이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시고 형제가 되신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곧 앞 문단에서 말한 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좀더 발전시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우리의 형제 되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속(救贖)하시기 위함이다(17절). 여기서도 우리는 높으신 그리스도, 모든 천사들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께서 홀로 영광을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낮고 비천한 인간을 돌아보시는 사랑의 구주가 되심을 알 수 있다.

먼저 11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도와 그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신 사실을 말하고 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 란 하나님의 아들을 뜻하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 란 하나님 아버지를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생의 근본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 전부터 나셨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를 믿으므로 거듭 태어난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출생과 우리의 출생 ‘근원’이 같으므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형제’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서 논증하고자 하는 핵심이다(11-13절).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혈육'(血肉)에 속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혈육’에 속하였음을 말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 참 사람이 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되셨지만 죄는 없으시다(히 4:1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것은 헛된 신화에서처럼 사람되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이 되신 것은 종의 형체를 가져 비천하게 되신 것이요 엄청난 자기 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신 것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무력화시킴으로 사망의 공포에 사로잡혀 종노릇하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14,15절). 곧 죄에 빠져 죽어 가는 우리 인류를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비천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14절의 “마귀를 없이하시며”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이 책에 있는 “히브리서 난제 구절 해설을 참조하라).

그래서 17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자비한’()이란 말은 ‘긍휼히 여기는’ 이란 뜻이다. 곧 죄에 빠져서 사망의 종노릇하는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리고 ‘충성된'()이란 것은 ‘자기의 맡은 일을 성실히 감당하는’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구원하라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성실히 이루셨다. 힘들고 짜증나고 고통스럽고 억울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자기의 소임을 다 이루셨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 제도에 잘 나타나 있듯이 백성의 죄를 속(贖)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제물로 드렸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을 제물로 드리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 인 동시에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 이 되셨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드리신 예수님의 희생과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 수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이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새 천년, 새 세기에는 남을 헐뜯고 비방하며 꼬집고 욕하기를 잘하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우리 예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본받아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이웃을 감동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되며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 된다. 이것이 새 천년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각오와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50114 히브리서 2장.hwp

네, 오늘 히브리서 2장입니다. 1장, 우리가 지난번에 14절까지 있는 것을 봤고요. 오늘은 조금 기네요. 18절까지 있습니다. 원래 성경은 장과 절이 없었어요. 나중에 학자들이 읽기 편리하기 위해서 나눈 겁니다. 나눈 게 정확하게 나눈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하긴 해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2장이에요. 히브리서 기자가,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할 수 없고 사도 바울의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 신학 성경, 구약도 대게 그렇습니다만 저자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자기 이름으로 책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이런 것들이 개인이 쓰기도 합니다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이 아니라 구약도 마찬가지에요. 시편이 보통 다윗이 기록했다고 그러지만 실제적으로 다윗이 한 건 아니고 그러한 신학적 전통을 가진 유대인들, 역사 안에서 형성된 거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2장 오늘 볼 텐데요. 이 히브리서가 약간 지루한 책입니다. 세밀하게 우리가 잘 파고들지 않으면 좀 낯설어요.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있고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하고, 복음서는 그래도 좀 낫긴 합니다만, 그리고 바울의 다른 서신들, 로마서라든지 이런 것들은 굉장히 구원의 문제, 의로움에 대한 문제들이 강력하게 표현이 되어 있잖아요. 그렇데 이거는 조금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약간 색다른 책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을 같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5.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오늘은 간단하게 A4용지 한 장으로 공부할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문건으로 드렸습니다. 참고하시면 되겠어요. 1절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들은 것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하자, 들은 것, 들은 것은 구약입니다. 율법이에요. 초기 기독교는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시작 할 때요. 상당한 시간 동안 없었어요. 당연히 그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보고 살았습니다. 들은 것, 그런 거 율법에 열심히 좀 하고, 그리고 그거는 제가 좀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되겠네요. 다음 주에 제가 좀 더, 지금 말씀드려야겠네요. 집에서 읽고 할 때는 율법으로 생각을 했는데 다시 읽다 보니까 아닐 수도 있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히브리서를 읽어야 될 사람들이, 그 교회 공동체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 대한 것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가리키는지 아니면 정말 율법을 가리키는지, 제가 약간 혼란이 돼서요. 그 정도로 접어 두겠습니다. 이거 다 끝마칠 때쯤 정확하게 생각이 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들은 것,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것을 잘 유념해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다. 흘러 떠내려간다는 것은 부화뇌동한다, 왔다갔다,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유지하지 못하는 거죠. 이게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게 구약에서도 유대인들이 열심히 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잘되지 않는 거예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가장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일단 들은 것, 이것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일상생활이 너무 여러 가지로 복잡하기 때문에 들은 것,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그 안에서 서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은 약하다는 그런 말이 될지 모르겠어요. 이게 쉬운 게 아닌 겁니다. 이게 쉬운 거라면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죠. 잘 붙들고 있어라. 이런 것들이 상투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붙든다고 하는 게 많이 읽어라, 그런 얘기일수도 있고요, 그 말씀대로 서라, 그런 얘기일수도 있어요. 그게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 수 있을까요?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서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잖아요. 지금 뭐 다 배우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겠습니다만. 어쨌든 1학년 들어가서 공부할 때 선생님 따라서 어머니, 아버지, 바둑아 이리 오너라,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단어, 문장 하나하나 바로 서는 거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사물의 대한 이해도 더 넓어지고 어떤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커지고 합니다. 신앙도 비슷한 거거든요. 우리가 수요일 공부하는 것도 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거죠. 그러한 한 걸음 한 걸음 그 세계에 들어감으로써 기독교 영성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불가능 합니다 기본적으로.

2절,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건 율법이 확실한 거예요.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그러니까 그 안에 전통이 된 거에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천사가 거기 역할 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 2장에도 천사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와요. 1장에서도 많이 나왔습니다. 천사들을 통해서 이제 모세가 율법과 십계명, 그런 것들을 받아서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하나의 전통으로 굳건하게 서게 됐습니다. 그런데 범죄함과 순종하지 않음으로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따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해서 거기에 대한 벌, 책임, 그걸 당하게 되었다. 간단한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드린 유인물을 보시면, 2절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대가를 예로써 몇 가지 들었어요. 바벨론의 포로, 로마 식민으로 떨어진 것들, 그리고 각종 고난들, 이런 것들이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고난과 이런 것들이 무조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말 할 수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도 많아요, 사실은요. 사건 사고도 많고 이렇게 저렇게 인생살이가 엮여져서 하나님 말씀을 바로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전체 흐름에서 볼 때, 전체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지 못하게 됨으로써 유대인들이 이러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건 뭐 틀린 이야기는 아니죠.

3절, 그런데 율법에 관계는 그렇고요.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율법을 바로 순종하지 못함으로써도 그러 한 징벌과 책임,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하물며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떻게 되겠냐, 더 심각한 것 아니냐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큰 구원이라고 얘기했어요. 구원이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지는 않습니다. 중요하다 그런 뜻이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된 구원을 가리킵니다. 조금 더 여러분들이 구원이 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은 그렇게 자주해요. 구원 받았다, 구원 얻어야 된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하는데 실질적으로 구원이 잡히나요? 제가 앞에서 찬송가 부를 때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 찬양한다고 할 때 주에 대한 생각이 어떠냐 했잖습니까? 그 질문을 여러분들이 자꾸 하셔야 되는 거예요. 근본에 대해서는 아는 것 같아도, 사실 근본은 다 끝나지 않은 거예요. 종말까지 가기 때문에 여러분 질문을 하셔야 됩니다. 주님이란 것도 그렇고 지금 구원이라는 것도 그런 거예요. 구원이 뭔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간단히 교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것만 아니라 살아서 평화를 누린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의 기쁨을 누린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상당히 관념적인 거예요. 틀렸다는 게 아니고 옳은 이야기인데 그것이 더 실질적인 내용으로 보충 되어야 합니다. 그건 세상 끝 날까지 계속 보충되어질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실 겁니다. 그냥 한 말씀만 거기다가 생각을 그런 쪽으로 하시라는 차원에서 도움의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게 생명에 관계된 문제에요. 과연 인간의 생명이 뭐냐, 삶이 뭐냐, 그거를 이해하는 게 깊어질수록 이 구원에 문제도 더 깊어지게 됩니다. 만약에 인생살이가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그런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늘 구원을 그런 차원으로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죽어서도 하늘나라에 가서 여기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듯이 그런 걸 머릿속에 넣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런 정도 수준에 떨어지게 되고 말겁니다. 그런데 생각이 좀 있는 사람들이나 등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철학에서도 여러 가지를 많이 얘기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드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질문하자, 구원이 뭐냐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라 그 뜻입니다.

3절입니다. 중반부터 보겠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 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내용은 간단하죠. 예수님 말씀 하신 거고요. 그리고 들은 자들이, 이들은 누구일까요? 들은 자들은. 당연히 제자들이죠. 사도들, 초도 기독교 1세대나 2세대 그러한 사람들이죠. 그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거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들은 자들이 전해준거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누가 기도를 많이 하고 갑자기 번쩍, 이렇게 깨달음이 있어서 들어간 게 아니라 역사에요. 그러니까 예수가 말한 내용, 바실레이아, 하나님 나라, 그분이 그 얘기를 어떻게 했느냐, 말씀하신 거와 구원이 연관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제 안계시니까 예수님을 본 사람들, 직접 만난 사도들, 이 사람들이 뒤에 전한 거잖아요. 계속 여기까지 내려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건 역사죠 흘러 내려 온 것. 이것을 소상하게 따라가는 게 신앙에서 중요한 거예요. 복음서에 어떤 얘기가 기록되어 있는지 사도들이 어떤 얘기를 했는지 그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쭉 역사를 거쳐서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을 아는 게 기독교 신앙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게, 배우는 거죠. 신앙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분명히 얘기하잖아요. 주로 말씀하신 거고 또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해 준거다.

4절,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와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굉장히 단어들이 좀 복잡하죠. 표적, 기사, 능력, 성령이 나눠 주신 것, 이런 게 나와 있습니다.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라서 다 따라가기 힘듭니다. 그 당시에 이 사람들이 어떤 뜻으로 썼는지 우리가 그대로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어요. 다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그리고 제자들이 후세대에게 전해 준 것, 그러한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 구원의 문제가 지금까지 내려오게 됐는데 그러나 그런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은 다 성령의 활동이시다, 성령의 역사이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거기까지가 한 패러그래프가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지고 있는 성경에도 4절까지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죠? 큰 구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5절, 조금 주제가 바뀌면서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다시,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천사들이 나와요. 몇 번 나옵니다. 2절에서도 천사가 나왔고요. 천사라고 하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날개달린 어떤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천사라고 표현이 되어 있고 또 주의 사자,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보이는 날아다니는 천사, 날개가 있는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 그렇게 하면 약하고요. 신학적인 상상력에 근거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는 어떤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천사에요.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 할 수 있으세요?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와야 되잖아요. 그래서 성경도 기록됐고 많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냥 연결 되지 않는 거예요. 헬라 철학에서는 제우스의 뜻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신을 가리켜서 헤르메스라고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그 어떤, 보이지 않으나 분명한 힘을 가진 어떤 이를 가리켜서 천사라고 얘기한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헷갈릴 수 있어요. 천사라고 하는 낱말이 있으니까 자꾸만 구체적으로 생긴 어떤 것을 생각을 하는데 그건 아니고요. 그렇다고 해서 허황된 것, 확실하지 않은 건데 말만 붙인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해도 안 되고요. 그러한 완전히 우리하고 다른 초월적인 어떤 존재의 그 뜻이 인간에게 알려지는 그 사건, 그걸 가리켜서 계시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의 자기의 뜻을 알린다고 하는 것, 거기에는 그냥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어떤 시각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는 사람의 어떤 인식이 굉장히 좋아서, 지적으로 굉장히 날카로워져서 알아 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거기서 있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힘, 알리심, 그걸 천사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천사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이 많았어요. 굉장히 그런 것에 대한 생각들이 절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사라고 생각을 한 기독교 집단들도 있었어요. 이단이라기보다도 천사는 초월적이니까, 뛰어나니까,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천사쯤으로 생각을 한 거죠. 초기 기독교는 그것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 거예요. 천사를 강조한 것은 영지주의하고 연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안에도 사실은 영지주의, 신비롭게 뭔가를 안다, 영지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상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초기 기독교는 굉장히 건강 했어요 이런 면에서. 굉장히 신비스러운, 비밀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려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신비이고 비밀이지만 그것을 조금 아까 얘기한 전문적인 용어로 영지주의, 천사론, 이런 쪽으로 가지 않고 대단히 역사적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으로 꾸준하게 밀고 나갔어요. 물론 예수님이 인간만은 아니죠.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긴장을 쉽게 해소 시키지 않았어요.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5절, 그런 걸 바탕으로 해서 천사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천사 중요한 게 아니다.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라고 얘기 했잖아요.

6절,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서에서 증언하여 가로되 거기서부터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있어요. 6절부터요. 사람이 무엇이기에, 계속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각주에 ‘ㄴ’보면 시편 8편 4절 이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과 인자, 이건 뜻은 다르지만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7절, 재밌어요. 그를, 그는 누구죠. 여기 나오는 사람과 인자인데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를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그 잠시라고 하는 단어에도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조금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 기독교에서 어떤 파가 예수님을 천사로 생각하려고 했던 것은 굉장히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우월성, 어떤 초월성을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천사가 우월하잖아요, 사람보다. 날아다닐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선지, 뭘 미리 내다 볼 수 있고 말이죠. 어떤 영향을 받지 않잖아요. 배고프지도 않고 그렇지 않습니까. 신적인 어떤 속성을 가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런 쪽에 가두어 가지고 쉽게 처리하지 않고 계속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붙든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보면 인간과 천사를 놓고 볼 때 누가 더 뛰어나요. 천사가 당연히 뛰어나죠. 그걸 해명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천사보다 못하다. 외롭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 다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죠. 예수님의 인간성, 그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래도 그걸 설명하는 거예요. 잠시 동안 그렇게 된 거다. 잠시 동안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동안일까요. 예수님이 살아 계신 공생애 동안이죠. 그리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예수님의 부활, 예를 들자면, 그걸 통해서 예수님에게는 천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영광과 존귀의 그 분이 되셨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천사들에게 복종한 게 아니라고 얘기했고, 이건 여러분들 머릿속에 구도를 보고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사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니다 인간이다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서 이것을 교통정리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순전한 인간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고 했었던 영지주의나 천사론 주의자들, 이런 사람들의 입장이 옳은 게 아니다 그걸 말하려고 하는 거죠. 8절에 보면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만물이 복종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참 이 히브리서 기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하네요. 그리고 어렴풋하게 얘기하지 않죠. 아주 정확하게 얘기 하는 거죠. 이게 눈에 들어오시죠. 그리고 애매하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복종해야 되는데 그게 실제로는 아직까지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8절 후반절에 정확하게 지적을 하고 있어요. 그렇잖아요.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도 고난당하고 힘들고 죽고 세상에 악이 있고 계속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걸 그냥 어렴풋하게 지나가지 않고 정확하게 짚고 있습니다.

9절,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난, 십자가죠.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통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 이런 말들도 굉장히 관념적이죠.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광채, 이렇게 표현 많이 해요.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이런 게 다 영광이라고 하는 단어에 들어 있는 뜻들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얼굴,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고요. 하나의 은유 방식으로 성경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걸 좀 더 확실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영광과 존귀라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의 사건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 아주 궁극적인 생명으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여기서 십자가와 구원, 십자가와 영광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보세요. 영광은 승리죠. 정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에요. 십자가는 실패에요. 고난이고 이건 누구라도 다 피하고 싶은 거고요. 이 세계는 아직까지도 십자가의 모습들이 많이 있는데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어떤 비약, 뭐가 좀 필요합니다. 생각의 비약,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천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꾸만 초월적인 능력자로만 보아요. 그렇게 또 보려고 했어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굉장히 중요한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핵심요소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거는 실질적으로 실패입니다. 그거는 고난이고 말이죠. 천사는 죽을 수 없어요.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당하셨는데 오히려 천사들은 죽지 않고 배고프지도 않고 초월적인 능력이 있고 그 방식으로는 영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역설적인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용어로 하면 부활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나 사건을 가리키는데 그게 연결이 되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였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사는 거죠.

그 다음 10절,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래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러니까 천사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당연히 없죠. 죽을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죽으셨고요.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과 존귀의 관으로 씌우셨기에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살리신다, 구원하신다, 그렇게 온전하게 하신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그러한 기독교의 기초 교리입니다. 그것을 이제 성서가 반복해서 말을 하고 있고요. 우리가 그것을 좀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11절,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여기서 거룩하게라고 하는 것은 하기오스, 그러한 단어인데 구별되었다는 뜻이에요. 성서 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1절은 어떤 제사 행위와 연관된다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구별되느냐. 여러분들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실까요? 11절,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거룩하게라고 하는 말은 구별시켰다는 뜻이다. 세상 것들은 모두 지나가고 말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신 예수와 그를 믿는 자들은 거기서부터 구별된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별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11절에 설명하고 있는 그대로에요. 그 다음 12절, 12절에 이제 시편을 인용해서 다시 한 번 형제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3절에서도 계속해서 시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4절, 자녀들은, 형제와 비슷한 차원의 의미에요.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혈과 육, 피와 살인데요. 그냥 인간의 구체적인 형체를 가리켜요. 사람을 가리키는 겁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때동안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내심은 앞에 있는 이야기하고 좀 비슷한 반복입니다. 똑같이 인간으로서 고난과 죽음을 받으셨다는 그러한 뜻이죠. 혈과 육을 함께 지내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표현이 좀 재밌죠.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알듯알듯한데 확 들어오지는 않을 겁니다. 죽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멸했다. 대충 그러려니 생각하면 되긴 하겠지만 과연 뭘까요?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것도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하나의 공식하고 비슷한 건데 이런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어요. 그건 이제 죽음의 세력한테 굴복 당하신 건데 결국 예수님도 천사처럼 초능력이 있어 가지고 십자가에 달렸다고도 용케 풀려나서 하늘로 올라가는 성경의 기록처럼 확실하게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의 세력에 굴복 당한 건데, 무너진 건데.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전제한다면, 부활이 뭐냐 지금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걸 전제하게 된다면 앞으로 죽게 될 모든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 공식은 이해하시겠죠. 그렇다면 결국 마귀를 멸한 거죠. 죽음의 세력이 무너진 거죠. 그런데 이것은 부활이 뭐냐 이런데 까지 더 이야기가 돼야 되는데 그건 오늘 주제는 아닙니다. 이미 그런 것들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에요. 제가 8시 30분까지 하겠습니다.

그 다음 15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활 생명을 얻는다는 확신, 믿음, 그런 게 있다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당연히 자유로워 진거죠. 종노릇하는 것에서부터 풀리는 거죠. 16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요. 천사 많이 나오죠. 그 때 당시 천사론 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얘기예요. 그건 굉장히 매력적인 거예요. 그렇잖아요. 내가 뭐 신기한 거 봤다 요즘에도 많이 기독교 신앙이 그렇잖아요. 환상 봤다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비슷한 것들이에요. 그게 아니다. 천사를 붙들어 주려하심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이다.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후손들, 혈과 육을 가진 그런 나약한 사람들이다. 그걸 붙들어 주려하심이라 되어있습니다. 17절, 그러므로, 거의 결론에 갑니다. 그가 범사에, 그는 누구죠?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그가 범사에 모든 일에 형제와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처럼 되어야만 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야만 구원이 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하심이라. 대제사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제사 행위를 통해서 하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을 대제사장이라고 하는데 구약적인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랑 똑같이 죽었어요. 그게 천만다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를 믿음으로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고 하는, 그러니까 대제사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켜주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옳다 그 얘기죠.

마지막 18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계속 반복해서 나오죠.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우리와 똑같이 그렇게 사셨다는 이야깁니다.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여기까지입니다. 이게 여러분들 쭉 공부하면서 봤듯이 천사주의자들과 대립되는 것을 볼 수 있죠. 예수님을 초월적인 능력이 있는 천사로 생각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반론으로써, 단순히 그들에 대한 반론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쨌든 천사에 대한 호감, 이런 걸 많이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 혈과 육을 지니심으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제사장이시다.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히브리서 2장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신앙 그 과정에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그 길에서, 귀중한 디딤돌이 되도록, 영적인 소양이 되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이 천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사셨기에 죄와 죽음가운데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셨다는 그 놀라운 고백, 그리고 증언을 저희들이 듣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지금도 주관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줄로 믿습니다. 2015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금년 마칠 때까지 우리의 삶을, 특별히 신앙의 삶을 주님께서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히브리서 2장. 하나님의 큰 구원

히브리서 2장에서도 천사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된다. 특히 구원사역과 관련된 천사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장차올 세상올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5절)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혈과 육을 가지고 온 것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곧 교회를 붙들어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16절)

즉,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만물을 천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앞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또한 교회인 성도들을 위한 사역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과 관련해서 천사는 하나의 도구는 될 수 있어도, 구원사역을 통해 영광을 받을 대상도 아니고, 구원 사역을 통해서 직접적인 은혜를 입는 대상도 아닌 것이다. 구원 사역과 관련해서 천사들이 전면에 나올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천사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측면에서는 교회, 곧 성도와 비교해도 우월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등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하나님의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자가 받을 그 보응에 대한 것이다.(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 2:3)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큰 은혜로 베푸셨는데 이것을 알고도 그 은혜를 거절한다면(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거기에 따라서 보응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장을 받고도 여러가지 말도되지 않는 이유를 들어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한 보응이 당연한 것처럼 그 큰 구원의 은혜를 알면서도 그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그 보응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구원의 은혜가 크면 클 수록, 하나님편에서의 노력과 열심이 크면 클 수록 그들의 거절은 더욱 큰 악이되며 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하셨다는 것이다.(14절)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가 고난을 통과하신 것이라고 말한다.(10절)

2. 이와 같은 고난을 통하셔서 그 아들이신 예수는 우리와 같은 처지에 처하심을 통해서(모든 시험을 받으심)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는 실제적 정서적 동질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18절)

3. 우리를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음을 통하여 마귀를 멸하고,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평생에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자유하게 해 주셨다.(14,15절) 즉 우리를 살리기 위해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신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시려고 말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우리 위해서 행하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큰(은혜를 베푸신)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구원의 소식을 우리에게까지 전해 주셨다는 것이다.(3,4절)

큰 은혜를 받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전혀 다른 운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서 그 큰 은혜 아래 오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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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해4 (히브리서 2장 요약, 히브리서 2장 1절~4절, 구원을 소홀히 여김, 큰 구원,하나님의 증언, 완전함에 이름, 성육신, 성화)

강해 노트 자료: www.KeepBible.com, 다운로드 자료실, 히브리서 강해노트

(다운로드 귀찮으면 아래 내용 보시면 됩니다.)

교제 :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 생명의 말씀사 총판), 히브리서 연구(M. R De Hann 지음, 김영균 옮김)

영어성경 : www.e-sword.net (성경은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야 하니 꼭 설치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강해 제4과

히브리서 2장

요점: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자들은 천사들의 중재에 의해 주어진 율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사도는 그분께서 사람이 됨으로써 여러 목적들을 이루심을 보여 준다.

I. 아들이 말씀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천사들에 의한 말씀에 불순종해서 심판을 받은 자들도 있다(2:1-4).

II. 다가오는 세상은 천사들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람이 되신 아들의 지배를 받는다(2:5-9). 이것은 구약성경의 성취이다(2:9).

III. 사도는 그분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설명한다(2:10-18).

A. 성육신을 통해 구속자와 그분의 백성이 동일시되었다(고난, 시험 등에서).

B. 백성의 모델이 되셨다.

1-4절: 큰 구원을 멸시하지 말라

1절: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대언자들과 천사들과 상대가 안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우리가 들은 것들: 주님에게서 직접 혹은 사도들에게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1. 이것을 구원의 상실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2. 이것은 구원을 소 홀 히 여기고 성도로서 섬김 과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을 뜻 한다 .

3. 3절이 이에 대해 분명히 가르쳐 준다. ‘ 우리가 구원을 소 홀 히 여기면 ’

4. ‘우리’는 기록자와 수신자들 모두를 가리키며 성도들이다.

5. 구원을 거 부 하는 것이 아니라 소 홀 히 여기는 것이다 .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이미 가진 것이 있음을 뜻한다. 여기의 히브리 성도들은 은혜로 거저 주시는 이 큰 구원을 이미 받아 의롭게 되어 안전한 상태에 있다. 그런데 구원 뒤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것은 곧 성도가 완전함으로 나가는 것이다( 히 6 : 1 – 2 ).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의 주제이다. 어린양의 피에 의해 이집트에서 탈출한 성도들의 대다수는 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고 중도에 죽었다(심지어 모세도).

6. 그러므로 빌2:12를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야 한다.

7.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work out your salvation).” 개역처럼 ‘구원을 이루라’가 아니라 이미 가진 구원을 일로, 행위로 드러내라는 것이다. 워크아웃 기업, 이미 있는 기업, 완전함에 이르는 것

8.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있다.

9. 고후5:10,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10. 여기의 ‘우리’도 구원받은 자들, 구원받은 뒤 몸으로 행한 것들에 대한 심판이 있다.

11. 이 심판석에서 선한 판정을 받은 보상을 받는 자들이 있고 소홀히 여긴 자들은 손실을 당할 것이다.

12. 고전 3 :11 – 15

13. 여기서 보상의 손실을 당하는 것, 이것이 바로 히2:2의 ‘피할 수 있으리요?’의 뜻이다.

14. 지옥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이다.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보상의 손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요지이다. 그래서 바울은 히2:1,3에서 이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15. 구원받은 성도의 임무: 엡 4:13 – 15

16. 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구원은 받되 부끄러움을 당한다(요일2:28).

17. 그러면 패배의 삶에서 벗어나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

18. 히12:1-2, 각종 죄 처리, 예수님께 고정

19. 그리고는 히12:11-13처럼 일어나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2절: 구약의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 제정되었다(신33:2; 시68:17; 행7:38; 53; 갈3:19).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1. 정당한 보응의 대가를 받았다(신32:35; 민15:30-31; 고전10:1-12).

2.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 있다고 죄를 너무 쉽게 간과한다.

3. 그리스도인의 죄는 사실 불신자의 죄보다 더 나쁘다(눅12:48).

3절: 이 큰 구원(great salvation)

1. 창시자가 위대하다.

2. 큰 죄들에서 구원하므로 위대하다.

3. 지옥의 큰 위험에서 구출하므로 위대하다.

4. 사람에게 위대한 것들을 주므로 위대하다: 하나님의 아들로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게 함.

5. 위대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사랑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위대하다.

6. ‘주님께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침례자 요한의 준비, 예수님의 선포, 이후 제자들

7. 이 말은 구약에는 구원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요1:16-17).

8. 구약의 예표와 그림자가 실체로 명확하게 드러났다는 말이다.

9.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사도들이다. 확증했다(행1:3). 바울은 사실 직접 계시를 받았다(갈1:16-19).

4절: 하나님의 증언

1. 표적, 이적, 기적, 성령님의 선물들(행2:4-6; 롬12:3, 6; 고전12:4-11; 고후12;12)

2. 사도들의 증언을 확증해 준다(막16:20).

3. 그분의 뜻에 따라(고전12:7, 11)

4. 영적 선물의 본질: 총 18개, 지속되는 ‘청지기 선물’과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표적 선물’

a. 표적 선물(사라지는 선물)

(1) 사도, (2) 대언, (3) 기적, (4) 병 고침, (5) 타언어(방언), (6) 방언 통역, (7) 지식

b. 청지기 선물(지속되는 선물)

(1) 지혜, (2) 영 분별, (3) 주는 것, (4) 권면, (5) 섬김, (6) 긍휼을 베푸는 것, (7) 다스리는 것, (8) 믿음, (9) 가르치는 것, (10) 복음 선포자, (11) 목사 겸 교사

c. 성경이 완성되기 전인 AD 50-60년경에 어떤 사람의 대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적을 보 임 으로

(1) 예수님의 사역(요3:2; 마10:1, 7-8; 11:2-5; 요20:30-31)

(2) 바울의 사역(롬15:18; 고후12:12)

(3) 사도들의 사역(히2:4)

d. 처음에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 기적 선물들이 필요하였지만 성경이 완성되어 진리와 오류를 구분해 주면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e. 성경 기록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마지막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보여 주었다( 딤 후3 : 15 – 16 ).

5. 이런 표적들은 한시적인 선물, 완전한 말씀이 AD 90년경에 주어진 이후로는 말씀을 통해 확증한다.

[형람성경] 히브리서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예수

[히 2: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懇切)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念慮)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시므로’라는 뜻이다. ‘모든 들은 것(to what we have heard)’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가리킨다. 히브리서 1장의 내용을 개략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의 본체(실체)의 형상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만유의 후사”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누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모든 진리들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 더욱 간절히 삼간다(the most careful attention)에서, ‘삼간다’는 원어(프로세코)는 ‘주의한다. 주목한다’는 뜻이다. ‘더욱 간절히’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이다. 삼간다는 주의와 주목이 함께 있는 의미이다. 삼가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긍정 의미이다.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들은 것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배운 많은 성경 진리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한다. 영생을 결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이다.

[히 2:2-4절] [이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堅固)하게 되어 모든 범죄(犯罪, παράβασις)함과 순종(順從)치 아니함이 공변된[公遍, 공의로운, ἔνδικον] 보응(報應)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救援을 等閑)히 여기면 어찌 피(避)하리요![피할까 함이라.]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標蹟)들과 기사(奇事)들과 여러 가지 능력(能力)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모든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the message spoken by angels)’은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들을 가리킨다(김효성). 견고한(βέβαιος, binding-구속력이 있는, stedfast-변함없는)은 관용적 표현으로 “성취된다”는 의미이다(루터). “천사들로 하신 말씀”에 대해서 벗어남(transgression)과 불순종(disobedience)함으로 공적으로 보응을 받았다(2절).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한 행태가 정당하다고 밝혔다. 유대인들에게는 분통을 줄만한 선언이다. 그러나 냉혹하게 수용해야 할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해석에 의해 가변적이나 상황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절대 가치를 갖는다.

유대의 멸망과 그리스도의 도래는 매우 독특한 배치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같이 큰 구원’(3절)이라고 말한 것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이스라엘의 근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왕국의 주권이 여호와께 있다. 그 주인이 오심으로 형식적 이스라엘의 기능은 종료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신 주 하나님을 경솔하게 여기는 것은 여호와의 백성으로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으로 자기 뜻과 성령(through signs, wonders, various miracles, and gifts of the Holy Spirit)을 나눠주셨다(4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유효한 것은 성령의 사역이지만, 주께서 표적과 기사와 기적과 능력을 보여주셨다. 이 문장의 특징은 하나님(God)이 한 것인데, 나타나는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매우 짧지만 그의 의지(αὐτοῦ θέλησιν, his will)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협약(pactum salutis)와 관련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선한목자로서 아들이시다. 루터는 “자기 뜻”에서 “우리의 뜻이 없다”는 것을 제시한다.

본문은 이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 이 구원은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바이다. 구원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둘째, 이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들은 자들’은 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던 제자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가 ‘들은 자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확증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이다. 표적(sign)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진리를 확증하심을 보인다. 기사(奇事, wonder)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줌을 나타내고, 또 능력(power)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인다. 또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을 가리킨다. ‘자기 뜻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심을 의미한다.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수단들이었다.

[히 2:5-9: 천사가 아닌 예수께 복종하여 예수를 믿음]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暫間)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暫間)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χάριτι Θεοῦ)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휘페르 판토스)[각 사람을 위하여](관사가 없을 때)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잠간(暫間)과 잠시(暫時). 잠시잠간(暫時暫間), 당분간(當分間)이다. 暫時(잠시) ‘잠깐의 때'(잠시간[暫時間])로 얼마 되지 않는 동안. 暫間(잠간) 매우 짧은 동안. 우리말에서는 ‘잠깐’으로 발음함. 정재도(한말글연구회)는 잠깐과 잠간으로 연결하는 것을 극구 부정하였다.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은 구약 시대가 종료되고(세례 요한) 새로운 시대(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그리스도 왕국의 실현)이다. 본문에 인용된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케 창조하셨음을 노래한 시이다. 본문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한다.

‘잠깐(a little while)’이라는 원어(브라퀴)는 ‘잠시’ 혹은 ‘조금’이라는 뜻이다(7절). 시편 8편 4-6절의 인자를 예수께 지목하며, 저(당신)를 천사보다 못하게 만드셨다(7절). 인자께서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 완성을 히브리서 기자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었다고 하였다(you crowned him with glory and honor, 7절).

본래 성자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주로 통치자이셨지만,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후(보좌 우편에 앉으심)에는 만유의 통치를 명확하게 현시하셨다(8절). 그러므로 누구도 변명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he might taste death for everyone, 9절). ‘맛보다’는 ‘먹음(eat)’이 아니지만 그 가치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가치를 몸소 하신다. 체휼(sympathize, 히 4:15), 위격적 감내인데, 신성에 고난이 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달콤함(suavitas)’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였다. 예수께서는 고난과 죽음의 맛을 보았고, 그의 자녀들은 복음의 달콤함을 맛본다.

[히 2:10절] 만물이 인因하고(디 호 타 판타)[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 만물이 인(因)하고 ->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라는 개역개정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인하여는 원인을 의미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있음이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는 말씀은 인자,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many sons to glory)’은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 구원의 목표는 영광 곧 죄가 없는 상태로 그의 이름만 영광인 상태이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should make the founder of their salvation perfect through suffering.)”는 말은 구원의 주(ἀρχηγὸν)는 “구원의 창시자”(the author, the founder)로 개정하여 번역하였다(참고 히 12:2). 루터는 암브로시스가 “구원의 인도자”라는 것을 선호하는 것을 밝혔다. “구원의 원인”, “구원의 왕자와 우두머리” 등으로 이해된다. 구원의 창시자는 구원을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원으로 인도하며 완전케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주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서 완전함(perfect)을 가져왔다. 단순한 명령으로 구원을 실현시킨 것이 아니라 몸소 고난을 받으심으로 의를 충족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구원을 막을 수 없으며 꺾을 수 없다.

[히 2:11-13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the One)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those)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며,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성도들이다(11절).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롬 8:29). 메시아 예언시인 시편 22:22에서도 성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또 ‘내가 그를[하나님을] 의지하리라’는 말씀도 그의 인성의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보인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는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친구라고, 제자라고 부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배반이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선포하였다.

12절은 시 22:22 LXX(70인경)을 글자 대로의 인용하였다. 다윗은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the congregation)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하게 다윗과 함께 “주의 이름(το όνομά σου, your name)”을 형제들에게 선포하였다. 사도는 주의 이름을 εκκλησίας에 찬송하겠다고 밝혔는데, ‘교회’가 아닌 ‘회중’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는 구약의 다윗과 신약의 사도들과 동일한 고백이며 계승이다.

13절은 사 8:17 LXX를 인용한 것이다. 루터는 시 22:22과 사 8:17-18절을 모호한 방법으로 인용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크리소스톰도 그렇게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는 “성부의 입장”으로 해석한 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성자”께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 다윗이 자기를 주라고 고백한 것을 밝히셨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 22:45).

히브리서 기자는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한 “내가 그를 의뢰하리라”를 반복하였다. 다윗의 고백과 이사야의 고백을 반복한 것이다. 이 본문에서 1인칭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1인칭은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한 다윗과 이사야이다. 루터는 나(이사야)와 하나님의 자녀는 율법 시대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때를 기다림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그 시대(혈육의 시대)가 종료된 것은 지시하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flesh and blood)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the power of death)을 잡은 자 곧 마귀(the devil)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free)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the offspring of Abraham)을 붙들어(helps) 주려 하심이라.

자녀들은 혈육, 율법에 속하였다(14절). 그런데 그 혈육 이스라엘에서 한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혈육, 유다인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거주하시며 죽음을 맞이하셨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궤멸시키셨다. 죽음의 세력 아래에서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천사가 아닌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시는 것이다(16절).

죄의 삯인 죽음(사망)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에게 압박이고 두려움이다. 현대인은 탁월한 인간성으로 죽음을 담담하게 수용하는 생명의 가치를 낮게 하는 것으로 대체시키기도 한다. 죽음이 생명과 함께 혼재는 우리의 삶의 구조는 슬픔이고 부조리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합당하게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자구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방도뿐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독생자,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두려움에서 자유를 주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된 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구주께서 사망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구원하신다.

첫째, 구주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 곧 마귀를 잡으셨다. 마귀는 죄와 어두움의 권세자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그는 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지만 사망의 권세가 마귀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얼마 동안 내어줌에 대한 제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의 모든 죄와 그 형벌을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의 형체로 담당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파하셨다.

둘째, 구주의 죽으심은 죽음의 공포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일평생 죄와 돈과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다. 마귀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주 예수를 믿는 것이며, 믿음으로 구원받아 죄에서 해방된다. 그의 이름은 주 예수의 전체이다.

[히 2:17-18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a merciful and faithful high priest)이 되어 백성의 죄(ἁμαρτίας)를 구속(救贖, ἱλάσκεσθαι, atonement)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하게 성자 하나님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을 고백하였다. 그것은 주께서 충성된 대제사장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구속하시는 길이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은 죽으실 뿐만 아니라 몸소 시험, 고난을 받으셔서, 시험과 고난에 있는 형제를 능히 도우신다(18절).

구약의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구속하지 않는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짐승 제물을 드려 속죄를 확증시키는 직무이다. 그러나 예수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직접 드려 속죄함으로(he might make atonement/propitiation-유화, 화목제물- for the sins of the people) 자기 백성이 은혜로 죄사함을 고백하며 확증하는 방식이다.

셋째, 구원을 위해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심이다. 예수님은 유다 지파이시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대제사장이 되셨다. 예수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은 히브리서가 유일하다. ‘구속(救贖)한다’고 번역된 원어(힐라스코마이)는 ‘유화(宥和)한다,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넷째, 주께서 구원을 이루실 때에 시험과 고난을 당하셨다. 주께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으신 것은 택한 백성의 고난에서 도우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16절에 아브라함의 후손을 붙드심이라고 하였을 때, help라고 제시하였다. 18절에서 성도의 시험과 고난에서 도움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또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난과 비천함, 모욕과 핍박과 비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고 특히 인간의 시험과 연약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도우시는 구주이심을 계시하셨다. 주께서 몸소 역사에서 현시하신 시험과 고난을 믿고 신자를 돕는 주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히브리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확실한 구원을 잘 보존해야 한다(1, 2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이루신 큰 구원이며 많은 증인들의 증거와 하나님 자신의 기적들과 은사들로 증거하신 확실한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귀한 보화일수록 보관을 잘해야 한다. 구원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귀에게 도적 맞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고귀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목하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사역의 핵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마귀의 권세는 파하여졌다. 우리의 모든 죄책과 죄의 형벌이 단번에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넷째, 우리의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가난과 비천한 환경을 경험하셨고 사람들에게 모욕과 비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그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친히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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