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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마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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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매일 주기도문으로 기도 드립니다
매일 말씀으로 기도 드립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 한시간 반복 듣기 / 주기도문낭독 / 주기도문암송
낙심이 될 때 용기를 주는 성경말씀
용기와 믿음을 주는 성경말씀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성경구절
평안과 위로를 주는 성경구절
잠자며 듣는 말씀 기도
잠잘 때 듣는 말씀 기도
잠이 안 올 때, 마음이 힘들 때, 평안이 필요할 때 듣는 말씀 기도
(저작권 때문에 개역한글판 성경으로 읽었습니다.)
#주기도문 #기도 #성경말씀
Kevin MacLeod의 Meditation Impromptu 03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 표시 4.0 라이선스가 적용됩니다.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4.0/
출처: http://incompetech.com/music/royalty-free/index.html?isrc=USUAN1100161
아티스트: http://incompete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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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주기도문 –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마6:9-13)
즉 성경에서 말한 예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기도 내용입니다. 참고 성경구절 마태복음 6장 9~13절(마6:9-13)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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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교회 – 성경 구절 … (마태복음 6장 9~13). ▽. 주기도문.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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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무엇인가? …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3절과 누가복음 11장 2-4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 성경은 그와 상반되게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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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주기도문 성경 구절
- Author: The blessing 축복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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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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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성경적인가?
♥ 주기도문 성경적인가?
♥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날 우리에게 우리의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마6:9-13).
Lord’s prayer,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경우에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1) 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 또는 목사가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 예배를 마칠 때 (목사가 있는 교회의 예배는 목사의 축도로 마침)
(2) 수요 예배나 금요 기도회 등 기도회 성격의 예배를 마칠 때
(3) 전도사나 교육 전도사 등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교역자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를 마칠 때(전도사나 교육 전도사가 지도하는 교회 학교의 예배라도 마치는 시간에 목사가 와서 축도를 하는 경우도 있음)
(4) 가정 예배를 마칠 때
(5) 교회의 각 기관에서 회의를 마칠 때
(6) 기타 주로 공식 예배 외의 예배나 집회 또는 모임을 마칠 때
이처럼 주기도문은 주로 예배를 마칠 때 많이 암송하고 있습니다.
또 주기도문은 목사가 없을 때 축도 대신 암송하기도 하며 목사가 있어도 예배의 성격에 따라 주기도문 암송으로 예배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목사가 참여하지 않은 예배를 끝날 때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이유를 물으면 많은 분들이 주기도문에 축도와 비슷한 영적/물적 축복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회와 달리 자유교회에서는 예배시간에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 성경적으로 알아보고 그 이유와 주기도문 암송에 따른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 주기도문의 배경♥
‘주님의 기도’ (Lord’s prayer)는 실제로 주님이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쳐 준 대로 형식에 가득한 위선적인 기도를 늘 반복해서 암송하였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잘못된 기도 관행을 고쳐주시기 위해 이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마 6:5, 킹흠정] ¶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마 6:6, 킹흠정]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마 6:7, 킹흠정]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마 6:8, 킹흠정]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이 말씀이 끝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처럼 기도하라.” 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기도해야 할 샘플 기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제목은 ‘제자들의 기도’ 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라고 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오용 ♥
근본적으로 이교도들은 7절에 있듯이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면 자기들의 신이 기도를 잘 들어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제외한 이방 종교의 중, 신부, 수녀 등이 묵주를 들고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교도들의 특징이며 그 당시 유대인들도 이런 관행에 빠져 있었으므로 주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 기도를 주셨습니다.
★ 그러므로 무슨 모임에서든지 끝날 때에 반복적으로 이 기도를 외우는 것은 주님의 의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려움을 겪을 때 주기도문을 많이 외우면 문제가 풀린다는 주장도 이교도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즉 ‘지성이면 감천’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목석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쓸데없는 반복 기도를 싫어하시며,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이 주어진 명백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여전히 주기도문을 글자 그대로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이 무슨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외웁니다.
★ 그러나 성경은 이와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더욱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붓지 단순히 암기한 말들을 암송하지 않습니다(빌4:6-7).
[빌 4:6, 킹흠정]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빌 4:7, 킹흠정]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미국의 교회들 중에 주기도문을 시도 때도 없이 암송하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역적 미국이 아닌 침례교와 자유교회들을 말함)
한국에서는 아마도 복음을 받아들인 뒤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주기도문 암송을 강요한 것이 지금까지 교회의 규례로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도문 암송 관행은 먼저 로마카톨릭 천주교회를 통해 중국에 전달되었고 그 뒤에 한국의 개신교회에도 전달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
천주교회(로마 카톨릭)는 기도에 대해 무어라 말할까요? 그들의 말을 직접 들어 봅시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곧 기도하자면 먼저 기도하려는 원의가 있어야 한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제4편 p.903 #2650]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 인용문에서 우리는 심각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두 가지 진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되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그 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한 기도의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내가 내 목소리로 주께 부르짖으매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산에서 내 말을 들으셨도다. 셀라] (시3:4). [오 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나를 고치셨나이다] (시30:2). [백성들아, 너희는 언제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너희 마음을 쏟아 놓으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62:8).로마 카톨릭주의의 기도는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기도문에 쓰여 있는 단어들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이교도들이 하는 행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기도 방법을 금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마6:7).★둘째, 카톨릭 교회의 교리 문답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성서가 기도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니 기도하는 방식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전승인 성전(聖傳)을 통해서 ‘믿고 기도하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교리 문답서는 성경이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카톨릭 교회가 있어야만 함을 뜻합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가 있기 오래전에도 사람들은 기도했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그의 여종들을 치료하사 그들이 자녀들을 낳게 하셨으니] (창20:17).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주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민11:2).성경의 성도들은 카톨릭 교회의 도움 없이도 자발적으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6-7).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50:15).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연 발생적인 감정의 표현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장려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에 박힌 듯이 주기도문 같은 것을 암송할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진심 어린 기도를 우리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 주기도문의 교리적 문제 ♥
★★★ 1. 율법적 구문 ★★★
주기도문에는 신약시대 구원의 교리와 상반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우리말 성경에는 ‘빚진 자들’ 이 ‘죄 지은 자들’ 혹은 ‘잘못한 자들’ 로 되어 있으나 ‘빚진 자들’ 이 맞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율법의 요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 그 대가로 주님이 무엇을 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1차적으로 율법하에서 율법의 의무를 지닌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의미 없이 외우다가는 연약한 지체들이 구원의 은혜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부분이 더러 나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편 51편을 사랑하여 외운다고 합시다.
밧세바와 간음한 이후에 책망을 받은 다윗이 자신의 참회의 심경을 여기에 적었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내용이지만 11절은 우리가 따를 수 없습니다.
[시 51:11, 킹흠정]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거룩한 영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1, 개역개정]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개역성경은 이것을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말라’ 고 기록합니다.
국내에는 이 부분을 그대로 담은 복음성가가 유행하므로 사람들이 이런 노래를 통해 주님께서 성령님을 거두어가는 일이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구약시대에나 가능하지 신약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약시대에는 한 번 구원 받으면 성도 안에 성령님이 영원히 내주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한번 해병대면 영원히 해병대다!” 라는 구호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해병대가 성경에서 이런 구호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습니다!”
구원의 영원한 안전 보장에 대한 구절은 성경에 너무 많으므로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신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여전히 구약시대에 살면서 헤매게 됩니다.
◆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 라는 구절도 사실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모든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고자 하는 독립 침례 교회 성도들과 자유교회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습니다.
★★★ 2. 천주교 주기도문과 개신교 주기도문의 차이 ★★★
로마카톨릭의 천주교인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는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 성경을 번역할 때 사용된 바티칸 사본의 본문이 신약시대 다수 성도들이 사용한 본문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개역성경도 마태복음 6장 13절에 각주를 달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은 고대 사본에 없다고 표시하였습니다. 개역성경이 말하는 그 고대 사본이 바로 로마카톨릭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입니다.
그러므로 카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을 외우지 않습니다. 그들의 성경 원본에 이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으므로 그냥 괄호를 쳐서 중간 지점에 머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 주어진 책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시는 메시아 왕국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기 위해 맨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주신 것입니다.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 3. ‘대개’ 의 문제 ★★★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대개’ 라는 말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대개’ 를 넣어 암송하기도 하고 어떤 교인들은 뺀 채 암송합니다.
그럼 ‘대개’ 를 넣어야 맞을까요, 아니면 빼야 맞을까요?
이에 앞서서 더 큰 문제는 그 뜻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호티’ 라는 그리스어 접속사 – 영어로는 for – 가 사용되었는데 그 의미는 ‘왜냐하면’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의 앞부분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이유는 [메시아]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대개’로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1930년대에 우리말로 성경을 번역하던 때에 ‘중국어 성경’ 을 참조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중국어 성경에서 ‘大槪’ 혹은 ‘大蓋’ 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 번역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대개’ 는 ‘대체로’ 혹은 ‘대략’ 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중국 성경도 ‘以’ 또는 ‘因爲’ 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의 경우 1936년 신약성경에는 ‘대개’ 로 썼다가 그 뒤 그 번역이 원문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대체로’ 라는 뜻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아예 생략하여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주기도문에는 아직도 ‘대개’ 가 들어가 있습니다.
★★★ 4. ‘나라’ 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 이 임한다 ★★★
그냥 ‘나라’ 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왕국’ 이 땅에 임하는 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주제입니다.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은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 (Heaven)이 아닙니다.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은 성경에서 ‘하늘’(Heaven)로 번역되었습니다. 기존의 우리말 성경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3:2; 4:17) 등에 나오는 천국은 원래 ‘하늘의 왕국’ 이며 이것은 결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천국 즉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중국어 성경을 참조하여 우리말 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땅에 임하는 하늘의 왕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중국어 번역처럼 ‘천국’ 으로 번역하여 교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 신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왕국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며 (엡1:6; 12; 14)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왕국에 대한 개념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동방에서 온 지혜자들이 “유대인들의 왕으로 오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물었으며 (마2:2) 그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마4:17).
또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십자가 위의 명패에도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 라는 글이 붙었습니다 (마27:37).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왕으로 즉 그들의 메시아로 오셔서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 배척당하시고 / 결국 그들의 왕으로 돌아가시면서 새 상속 언약 즉 신약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국을 잘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였으며(막1:1, 14) 그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6:10) 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구절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 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문자 그대로 실제로 땅에 임하게 하사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왕국 즉 ‘하늘의 왕국’ 을 제시하셨습니다 (마4:17).
★ 하늘의 왕국은 대언자 다니엘을 통하여 이미 오래전에 예언된 왕국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세우시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왕국입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마지막 때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실 터인데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단2:44).예수님은 바로 이 왕국을 유대인들에게 제시하시고 침례자 요한의 사역과 각종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통해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분을 거부했고(마23:37-39)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전달되었습니다(롬11:30-31).
[롬 11:30, 킹흠정] 너희가 지나간 때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으나 이제는 그들이 믿지 아니함을 통해 긍휼을 얻었나니 [롬 11:31, 킹흠정] 이와 같이 이 사람들 또한 이제 믿지 아니한 것은 너희가 얻은 긍휼을 통하여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늘의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
한편 예수님의 재림 전에 선포될 복음도 천국 복음이 아니라 왕국의 복음입니다.
[마 24:13-14, 킹흠정]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증언되기 위해 온 세상에 선포 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서 ‘끝까지 견디는 자’ 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께 헌신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끝나는 때까지 견디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1차적으로 앞으로 휴거 이후에 다가올 7년환란에 대한 말씀이며, 유대인들 가운데 믿음으로 7년 환난기를 통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이른 뒤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 는 말씀이 성취될 때에 구원받는 자들입니다 (롬11:26).
[롬 11:26, 킹흠정]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기록된바, 시온에서 구출자가 나와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돌이키리니그래서 7년 환난기에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 는 왕국의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고 / 그 이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셔서 이 땅에 문자 그대로 1,000년 동안 메시아로서 철장 권세를 가지고 천년왕국을 세워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실한 성도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랐고 (눅2:30-34; 38)
그래서 처음부터 그들에게는 왕국의 도래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구속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고 실망에 잠겼지만 (눅24:21)
[눅 24:21, 킹흠정]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그분의 부활 소식을 듣고는 그분이 승천하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왕국의 회복에 대해 물었습니다.
[행 1:6, 킹흠정]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왔을 때에 그분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주께서 이때에 그 왕국을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나이까? 하매이때에 그분께서는 왕국의 회복이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므로 너희는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고
[행 1:7, 킹흠정]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때나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 안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이에 그들은 왕국의 회복을 바라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강하게 권면했습니다 (행3:19-26).
★ 복음의 초기에는 이렇게 왕국의 회복과 관련해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이 선포되었으며 이방인들의 구원은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나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유대인들의 회개가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복음 사역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투스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훼파시키고 유대인들을 추방하여 왕국의 회복은 이방인들 중심의 교회 시대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물론 구약의 대언자들이 말하고 예수님이 초림 때에 세우려 했던 하늘의 왕국은 그분의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에서 문자 그대로 위엄 있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존의 우리말 개역성경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모든 성경에서 왕국으로 번역된 ‘kingdom’ 은 성경에 342회 나오며 이것은 원래 ‘왕권’ (kingship)을 의미했으나 후에는 주로 왕이 다스리는 통치 체제 즉 왕국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단어를 ‘나라’ 나 ‘천국’ 등으로 일관성 없게 번역하면 성경의 핵심 주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결과 인본주의자들은 누가복음 17장 20-21절 등을 인용하며 천국이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기존 우리말 개역성경의 ‘나라’ 는 원래 왕국입니다. ‘왕국’ 을 ‘천국’ 혹은 ‘나라’ 로 바꾸는 것은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를 완전히 가려 성도들의 성경 이해를 가로막는 심각한 폐해를 낳으며, 그 결과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이스라엘 대체신학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주기도문은 바로 이 ‘하늘의 왕국’ 이 유대인들에게 속히 임하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유대인들이 간구해야 함이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말 개역성경은 이런 기본적인 교리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용어가 바뀌어 변경되어 있습니다.
♥♥♥ 주기도문에 대한 결론 ♥♥♥
‘주님의 기도’ 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하나의 모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며, 기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들을 알려줍니다.
또한 주기도문은 결정적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도드릴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임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기도의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가 기도드릴 대상입니다. 단 기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면 되는것입니다. 대상이 바뀌거나 혼동되면 안됩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 외에도 주기도문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
죄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
사악한 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 등의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이런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은 반복해서 외우는 것을 금하기 위해 우리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샘플 기도입니다. (반복해서 이교도들 처럼 외우는 것은 주님이 금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잘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하나님께 그대로 암송해 드리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가 진심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시는 것은 그분과 교통하는 것이며 또 우리 마음에서 진심으로 흘러나오는 말이지 우리가 암송하는 특정한 형태의 말이 아닙니다. 매번 반복되는 아무런 감정도 뜻도 모르며 입으로만 암송하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서 믿음으로 나오는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필요한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개신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외우시는 분들도 이런 내용을 이해하고 바르게 행하면 좋겠습니다.
즉 의미 없이 아무생각 없이 예배나 모임의 끝에 주기도문을 붙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외우지 않는 분들도 외우지 않기 때문에 극도의 자만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 라는 구절이 교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 구원받은 성도로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소서.”라는 구절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자체를 천년왕국의 유대인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용서와 긍휼을 베풀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알면 아는 것 이상의 것을 행해야 합니다.
잘 모르는 처지의 형제들을 이해하고 진리로 잘 인도해야 합니다.
신약 교회의 초기부터 자유교회 성도들은 주기도문의 정신을 살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에게 경배하며, 그분의 왕국이 이 땅에 속히 임할 것을 기도하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기도해 왔습니다.
다만 예배 때마다 끝에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일은 반복하는 말로 암송 기도를 하지 말라는 주기도문 제정의 목적에 전적으로 위배됩니다.
그런 까닭에 예배에서는 암송하지 않습니다.
[마 6:7, KJV] But when ye pray, use not vain repetitions, as the heathen do: for they think that they shall be heard for their much speaking. [마 6:7, 킹흠정]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마 6:7, 개역]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KJV] Be not ye therefore like unto them: for your Father knoweth what things ye have need of, before ye ask him. [마 6:8, 킹흠정]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 [마 6:8, 개역]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마6:9-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기독교에서 하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한 예수님께서 직접 알려주신 기도 내용입니다. 참고 성경구절 마태복음 6장 9~13절(마6:9-13)입니다.
하나님의교회 – 성경 구절(마태복음6장) 주기도문
… 하나님의교회 – 성경 구절 …
(마태복음 6장 9~13)
▼
주기도문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
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
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
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
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
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
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교회 – 성경 구절 (마태복음6장) 주기도문
주기도문은
전 세계 초교파적으로 암송되고 있는 기도문이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
사도시대부터 지금까지
♥
2천 년 동안이나
♥
매 예배 때마다
♥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천국 소망을 각인시키면서 읊어지고 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녀들과의 관계를
가족의 핵심인 ‘아버지’라는 단어를 먼저 지정하여
특별호칭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
사전에서는
‘아버지’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
“자기를 낳아 준 남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
혹은,
“자녀를 둔 남자를 자식에 대한 관계로 이르거나 부르는 말”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자기를 낳아 준 남자, 자녀를 둔 남자가 바로 아버지인 것이다.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뿐만 아니라
또 누가 계셔야 할까?
하나님의교회 – 성경 구절 (마태복음6장) 주기도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하늘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늘어머니도 계신다.
아멘입니다~
패스티브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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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란 무엇이며 왜 드려야 하는가?
질문
주님의 기도란 무엇이며 왜 드려야 하는가?
답변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3절과 누가복음 11장 2-4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글자 그대로 암송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기도문이 그 말들 자체에 어떤 능력이나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마법을 가진 주문처럼 여깁니다.성경은 그와 상반되게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말보다는 마음 중심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6-7). 우리는 기도할 때 단지 암송하던 말을 낭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아야 합니다(빌 4:6-7).주기도문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 또는 모범으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기도에 들어가야 하는 ‘요소들’을 알려줍니다. 주기도문이 어떻게 나뉘어지는지 살펴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기도가 드려질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는 우리의 삶과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라고 격려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죄로부터 돌아설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던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 할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주기도문의 결론인,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죄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도움과 악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하는 것입니다.다시 한번 말하면, 주기도문은 우리가 암송하여 하나님께 낭송하는 그러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표본일 뿐입니다. 주기도문을 암기하는 것이 잘 못된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께 주기도문으로 기도 드리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당신의 마음이 그 기도 안에 담겨 있고 당신이 참으로 기도문의 내용을 의미하며 기도하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특정한 단어들보다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말하고 또한 그분과 교통하기를 바라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십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편집된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다
우리는 ‘편집된 주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천천히 읽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주기도문과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주기도문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마6:0~13; 눅11:2~4). 이에 대해 서로 다른 점들을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이 나타납니다.
ㅇ 문맥의 차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이 위치하는 문맥이 서로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기도에 관한 일련의 가르침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기도의 자세, 기도의 장소, 기도의 방법 등은 외식하는 자들과 구별된 기도여야 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전적으로 구별되는 기도여야 한다는 입장이 부각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의하면 세례요한과 그 제자들이 명시적으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 나아와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자신들에게도 기도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에 따라 예수께서 주기도문을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눅11:1~2).
문맥을 통해 주기도문이 위치되어 있는 부분을 회화적으로 그림 그리듯 해 보면 마태복음의 제자들은 이미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유대교 맥락 속에 파묻혀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기도, 자랑하는 기도, 자기를 내세우는 기도, 공개적으로 잘난 척하는 기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기도는 예수의 제자들, 예수의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구별된 기도, 따로 가르침을 받아 시행되는 차별화된 기도의 모범으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 선명히 나타납니다.
이와 달리 누가복음의 주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기도에 대해 세례요한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기도를 하는 것처럼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도 그런 측면에서 예수께 기도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기도는 ‘기도할 줄 모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의 모범’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표현(마6:9; 눅11:2)은 매우 비슷하지만 갖고 있는 속 뜻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이 위치하고 있는 문맥의 차이보다 주기도문의 내용이 똑같지 않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한 분 주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의 내용이 왜 이렇게 달라진 것이냐를 생각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ㅇ 내용의 차이:
먼저 하나님을 부를 때 마태복음 저자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저자는 ‘아버지’라고만 했습니다. 마태복음의 ‘하늘에 계신 우리’가 빠졌습니다. 누가복음 저자가 뺀 것일까요? 아니면 마태복음 저자가 추가한 것일까요?
한편 마태복음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추가한 내용일까요? 아니면 누가복음 저자가 자기들에게는 맞지 않는 내용이라고 보고 뺀 것일까요?
또 눈에 띄는 다른 점은 마태복음에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간구가 있는데 누가복음에는 이 간구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추가한 것일까요? 아니면 누가복음 저자가 뺀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내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단정적으로 마태복음 저자의 추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원본에 없는 표현을 마치 예수께서 가르치신 원본 주기도문인 것처럼 ‘편집’했다는 것이지요. 의심할 수 없게도 이 표현은 마태복음 저자가 추가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한글 성서본문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한글 성경 본문에 보면 이 부분은 ()안에 들어 있고 그 ()위쪽에 작은 글씨로 ‘4)’라고 표시된 각주 번호가 있습니다. 그 각주 번호를 따라 성서본문 하단에 기록된 내용을 읽으면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이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현재 우리들이 갖고 있는 헬라어 성경본문보다 더 오래된 본문으로 판단되는 고대 사본에는 이 내용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 마태복음 본문을 기록한 저자와는 다르게, 나아가 처음 예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후대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 이 부분이 “덧붙여졌다”는 뜻이지요.
감히, 주님의 가르침인 주기도문에 어떤 인간이 손을 댔다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ㅇ 주기도문은 진짜냐, 아니면 후대에 만들어진 가짜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중에서 어느 것이 주님의 가르침에 더 가깝냐고 물을 경우 두 가지 방향에서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입장입니다.
먼저 짧은 것이 원본에 더 가깝다는 본문비평의 견해에 따라 누가복음의 분문이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원래의 주기도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의 기도문이 주기도문 원본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그런데 어법으로 보면 예수는 1세기 팔렉스틴에서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셨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어휘와 어투에 근거해 보면 마태복음의 언어가 예수께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 신약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누가복음은 대체로 마태복음에 비해 더욱 더 이방지향적으로 나타나므로 마태복음의 유대적 표현들이 예수께 더 가까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논리에 근거합니다.
그에 따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마태복음의 어투로 바꾸면 그것이 아마도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셨던 주기도문에 가까울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누가복음 저자는 자신이 전해 받은 유대적 어투, 팔레스틴의 아람어적 어투를 헬라세계의 이방인들에게 맞도록 용어와 어휘들, 어투들을 관리(편집)했을 것이라고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시각에 근거하여 주기도문에 대해 결론적으로, “내용적으로는 누가복음이 원본에 더 가깝고, 언어나 어투, 어휘 측면에서 보면 마태복음이 원본에 더 가깝다”고 말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기도문 자체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상관없는 후대의 창작품이라는 견해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
그러면 마태복음 저자는 왜 누가복음 저자와는 달리 원본에 없는 말씀을 추가함으로서 주의 기도를 편집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 현재 우리들이 갖고 있는 마태복음 본문 중에서 마태복음 저자에 의해 추가된 내용인 ‘나라와 권세와 영과잉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의 부분만 보면서 그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ㅇ 권위 있는 고대 사본에 없는 (나라와….아멘)이 있는 이유
이 부분을 송영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송영은 예배의 처음과 끝부분에 있는 찬송가와 같은 부분인데 곡조는 없고 찬송가의 가사처럼 되어 있는 기도부분이어서 송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곡조가 붙어 찬송처럼 불리는 부분은 영광송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주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기를 기원하는 예배의 첫 영광송과 영광을 돌린 예배가 되었기를 바라는 예배의 마지막 영광송은 곡이 붙어 있어서 찬송가 형식을 갖고 찬송으로 불려 집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의 송영부분은 찬송가처럼 되어 있긴 하지만 찬송가처럼 불리는 곡조 붙은 영광송이 아니기 때문에 주기도문의 끝에 붙어 있는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송영부, 혹은 송영부분이라고 하거나 단순히 송영이라고 부릅니다.
주기도문의 끝에 추가되어 있는 이 송영부분은 초대교회에서 교인들의 응답송, 혹은 화답송 개념으로 활용된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세기 말경에 12사도 교훈집이라는 ‘디다케’가 만들어졌는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직역: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이라는 송영부가 주기도문에 끝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끝나면 그에 맞춰 교인들이 한 목소리로 반응을 보였던 화답송이라고 할 수 있는 응답부분입니다.
이 송영부는 초대교회에서 드려졌던 예배순서에 따라 주기도문이 사회자에 의해 낭송되면 주기도문의 끝에 이르렀을 때 예배 참여자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신앙을 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차원에서 행해졌던 송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곡조를 붙여 찬송가처럼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언어리듬에 맞추어 곡조 없이 화답하는 형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송영부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삼위일체 교리가 강조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나라는 영원히 당신의 것이옵니다 아멘’이라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건실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고백되는 신앙이 되게 하기 위한 장치를 만들려는 노력에 의해 생긴 결과로 보입니다. 원래의 기도문에는 없는 부분이 추가되어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뜻이지요. 특히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뒷받침하는 조직신학적 입장을 강조하기 보다는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신앙에 근거한 고백이 되도록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세상의 모든 존재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대상29:10~13참조)’이라는 신앙관을 가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을 돌리는 신앙을 자연스럽게 고백할 수 있으며(13절) 그에 따른 믿음의 생활도 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이 습관적으로 암송하는 하나의 주문처럼 사용된다거나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감각없이 사용되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요청하는 간구의 성격을 갖는 기도문이라는 범주에 머물러 외식적인 기도로 변질되어 가는 기도가 되게 하기보다는 주기도문 안에 이미 수차례 반복되어 나타나는 ‘우리’라는 단어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공동체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의 기도”가 “우리의 공동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이와 같은 ‘첨가구’를 추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상예수의 사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초대교회의 신학적 작업이라는 뜻이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주기도문을 낭송하는 사회자와 주기도문의 낭송이 끝나면 곧 이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아멘’으로 화답하는 교인들이 ‘우리의 공동기도인 주기도문’을 통해 서로 일체가 되는 하나 됨의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은 주의 뜻,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니 송영도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주의 뜻에 따른 기도라고 해도 별로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 저자의 이와 같은 수고에 대해 ‘필요하면 언제나 말씀을 편집해도 된다는 것이냐’며 마치 자신이 갖고 있는 말씀에 대한 거룩성이 훼손되기나 한 것처럼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그와는 달리 주의 기도가 또 다른 외식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서 예배의 기도로 자리 매김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더욱 더 경건한 마음으로 주기도문을 삶 속에 육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을 암송하실 때마다 무슨 주문 외듯이 하지 마시고 한 절 한 절 꼼꼼히 그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시면서 ‘누가복음에 없는 추가된 내용(하늘에 계신 우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을 통해 오히려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더 높이, 그리고 추가된 내용만큼 더 강하게 고취되도록 신앙적으로 생활 속에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성경읽기 0076 : 마태복음 6장 (부제 :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debt는 빚, 부채다. debtor는 빚진 사람, 채무자다. 거칠게 직역하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용서해(탕감해) 준 것같이 우리가 진 빚들을 용서해(탕감해) 주옵시고’가 된다. 의아해서 KJV, ASV 영어성경도 찾아보았지만 역시 debts, debtors다. 빚(debt) 진 것을 죄(sin or crime) 진 것으로 비유할 수도 있으나 이 둘은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왜 굳이 빚(debt)으로 표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채권채무관계, 계약관계로 많이 설명하고 있다.
용어에 따라 느낌이 틀리듯이 순서를 바꾸어도 느낌이 틀리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할 수 있게 하옵시고’는 같으면서도 틀리다. 전자는 우리 죄를 사함받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우리 역시 이웃의 죄를 용서하기를 다짐하는 쪽에 가깝다.
자기 죄는 용서받기를 바라도, 남의 죄는 용서하기 힘들다. 자기 빚은 탕감받기를 원해도, 남의 빚은 탕감해주지 않는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자기 짐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남의 눈에 든 것은 들보요, 자기 눈에 든 것은 티끌이다. 남에게는 엄격, 가혹해도 자기에겐 한없이 관대하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의 심리요, 행동방식이다. 나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받기 전에 주는 것, 만들어 놓은 걸 먹기 전에 남이 먹을 걸 만드는 것, 용서받기 전에 용서하는 것, 비난하기 전에 이해하는 것, 미워하기 전에 축복하는 것, 남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것… 어려운 일이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만일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마태 6:14]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은 자는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의무가 있다.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자는 하나님의 죄 사함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temptation은 유혹이다. 윤리적, 종교적 시험이다. 테스트나 평가와 같은 단순한 시험과는 다르다. ‘the T~’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받은 시험을 말한다.
temptation이든 test든 시험 좋아하는 사람 없다. 학업을 마친 후에도 얼마동안 시험치는 악몽을 꾸었던 기억이 난다. 째깍째깍 시간은 얼마 안 남았는데 문제는 1,2번을 풀고 있다. 안절부절, 눈앞이 하해지고… 하나둘 교실 문을 나가고… 혼자 남은 내게 감독관이 답안지를 가지러 다가온다.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다.
원래 마음이 어둡고 나약한 자, 악보다 권태를 못견뎌하는 자라면 스스로 유혹(temptation)을 환영하고 기꺼이 빠져들겠지만 그 결말 역시 언제나 파멸과 타락의 새드엔딩인 것은 마찬가지다. 떠 보는 것을 당하는 것, 남으로부터 평가받는 것, 유혹을 받는 것은 나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전제로 한 시험이기에 어느 것이든 유쾌하지 않다. 괴롭다.
유쾌하지 않지만..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하며, 세상은 위험과 유혹이 도처에 널려있다. 극복하고 뿌리쳤더라도 temptation도 test도 끊임없이 계속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다. 매일. 항상. 언제나. 끊임없이.
어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으니(12절), 오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혹 내일 우리가 시험에 든다면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13절)
여기서 ‘but’은 ‘그러나’가 아니라 ‘다만’이다. 간절함의 강조다. (원)죄 많은 인간으로서,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영광과 권세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유혹에 물들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복을 빌지 않으신다. 축복과 영광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신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몫이다.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옵고, 영광은 ‘다만’ 아버지께 돌릴 뿐이다.
주여! 저희를 ‘다만’ 긍휼히 여기소서. 저희를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악에 빠진 저희를 ‘다만’ 구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영원함을 가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들려주시기 전에 피해야 할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길모퉁이에 서서 하는’[6:5] 위선적인 기도,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는’[6:7] 말만 많은 무의미한 기도는 하지 말라 하셨다.
주기도문은 위선적이지 않고 진실하다. 무의미하지 않고 속이 꽉 차 있어 어느 한 구절, 한 단어 버릴 것이 없다. 문장이 힘이 있고 권위와 품격이 있으면서도 쉽고 소박하다. 하늘의 아버지를 간절히 부르면서도 허황되게 정신이 허공에 둥둥 떠 있지 않다. 땅 위의 우리가 실생활의 규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이 실용적이다.
비교불가의 완전한 기도(문)다.
6장 19절 너희를 위하여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고 도둑이 훔쳐갈 것이다. 20절 그러므로 너희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하늘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슬지 않으며 도둑이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할 것이다. 21절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24절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과 일맥상통한다. 탐욕을 버리고 필요이상으로 쌓아놓지 말라는 말씀이다. 숨어서 선을 행하는 것처럼 재물을 하늘에 쌓는 자만이 최고의 행복을 차지할 수 있다. 19, 20, 21절의 재물은 영문판 모두 treasure다. 24절의 재물은 NIV는 money고 KJV, ASV는 mammon이다. treasure는 보물, 보배다. 애지중지 아끼며 비장하고픈 것이다. money는 돈이다. mammon은 물신(物神)이다. 각기 그 뉘앙스가 다르다. 돈, 재물, 보배 중 돈이 가장 가시적이고 보배가 가장 추상적이다. 예수님은 treasure(보배)는 긍정적으로 money, mammon(돈, 재물, 물신)은 부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쉬운 성경>은 뭉뚱그려 보다 가치중립적인 ‘재물’로 번역하고 있다.
엄밀히 얘기해서 땅에 쌓으려는 것과 하늘에 쌓으려는 것은 다르다는 거다. 땅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고 도둑이 훔쳐갈 것, 곧 돈(money)이고 물질(mammon)이다. 하늘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슬지 않으며 도둑이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할 것, 곧 보물, 보배(treasure)가 된다. 땅 위의 보이는 것과 하늘 위의 보이지 않는 것, 무엇이 더 부질없는 것일까. 마몬(mammon)에 경도된 이들은 악착같이 땅 위의 보이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결국 좀이 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고 도둑이 훔쳐갈 것들이다. 종국에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들이다. 어리석은 자는 팔짱끼고 지내다 굶어죽는다고 하지만, 바람을 잡고자 두 손 벌려 수고하는 것보다는 한 줌으로 만족함이 더 낫다.[전도서 4:5,6] 하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땅 위의 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 마몬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만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의를 이루어 하늘에 보배를 쌓는 것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하늘에 쌓는 재물, 보배(treasure)는 자선, 선행, 사랑의 추상적인 것만 가리키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돈이 오고간다. 자선, 선행,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널 사랑하는 내 마음 알지!’, 달콤한 립서비스만으로는 영양가 없다. 말이야 사기꾼, 바람둥이가 오히려 더 잘한다. 실지로 돈이 오고가는 것으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 진심을 측정할 수 있다.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돈이 모든 것을 말한다. 돈이 향하는 곳에 사랑이 있다. 돈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있다. (검은) 돈이 흘러들어간 곳에 범죄의 단서가 있고 범인이 있다. Just Follow the Money!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사건을 제보한 딥스로트가 <워싱턴 포스트> 밥우드워드 기자에게 한 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 범죄도 마찬가지. 정치도 마찬가지. 돈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서 걷어서 어디에 쓰는지가 중요하다. 돈 씀씀이를 보면, 사람이라면 생활패턴, 취향, 인간성까지 알 수 있고 정권이라면 누굴 위한 정권인지 정권의 본질, 정체가 드러난다. 4대강? 우리들 호주머니에서 나와서 건설회사 금고로 들어간다! 무상급식? 우리들 호주머니에서 나와서 우리 아이들 입으로 들어간다! 또 글이 옆으로 세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강행이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태클이요… 요새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하도 답답하고 화가 나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하셨는데… 하지만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의 돈 씀씀이, 재정운용을 보면 위험수위다. “부족한 자에게서 먹을 것을 빼앗아, 부유한 자에게 보태어 주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예수님 말씀과 가장 가까운 겸애사상을 주장한 묵자(墨子)의 말이다. 재물을 그르게 쓰며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사람들,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기는 기독교도들이 너무 많다. 경계할 일이다.
6장 25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옷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느냐? 27절 너희 중에 누가 걱정해서 자기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 29절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보지 못하였다. 31절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33절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덤으로 주어질 것이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고, 오늘의 고통은 오늘로 충분하다. 걱정도 종류가 있다. 내몰려 하는 걱정도 있고 사서 하는 걱정도 있다. ‘먹을 수나 있을까?’, ‘마실 수나 있을까?’ 혹은 ‘입을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 하지만 31절 말씀은 뒤이은 32, 33절 말씀으로 볼 때 문맥상 사서 하는 걱정보다 내몰려 하는 걱정 쪽에 가깝다. 절대 빈곤과 행복한 고민이다. 절박한 걱정과 럭셔리한 걱정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자 혹은 후자의 걱정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나, 빈자든 부자든 사람의 고민과 걱정은 대개 이 둘 중의 하나다. 내 판단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 둘을 포괄한다.
먹는 것은 굶주림을 채우면 족하고, 마실 것은 목마름을 채우면 족하고, 입는 것은 몸을 가리고 깨끗하면 족하다. 그 이외의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탐욕스런 걱정이거나 헛되이 우리의 정신을 소모시키고 방황케 하는 무의미한 걱정이다. 굶주림을 채울 것이 없고, 목마름을 채울 것이 없고, 몸을 가릴 것이 없다.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데 진선미(眞善美)는 무엇인가! 인간의 이상(理想)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의로움은 무엇인가! 저차원의 비루한 걱정이지만 눈물겨운 걱정이다.
리히텐슈타인 작품 <행복한 눈물>을
‘어디에 감출까’하는 어느 재벌 회장님의 ‘행복한 걱정’
예수님은 탐욕스런 걱정, 무의미한 걱정을 경계하시며 눈물겨운 걱정, 절박한 걱정을 위로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경계의 뉘앙스보다 위로의 뉘앙스다. 복음이요, 희망이다. 그리고 산상설교중이시다. 산 중에 모인 대중의 대부분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다 잘 될 것이다. 너희들이 믿고 따르면 하나님이 다 주실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이다. 탐욕스런 걱정, 행복한 고민들이 심심찮은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못박히신 후 로마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가졌다는 것은 옷, 옷감이 당시에 상당히 귀한 재산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몸을 가리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만 해도 불과 삼사십년 전인 1970, 80년대에는 빵꾸난 양말을 기워 신고 대부분의 성인들이 단벌신사였다. 이런 걱정, 저런 고민 다 필요 없다. 어떤 걱정도 자기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그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고, 오늘의 고통은 오늘로 충분하다. 오직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쾌활하고 낙천적이시다. 하지만 가볍거나 허황되지 않으시다. 진실하지만 답답하지 않으시고, 진지하지만 완고하지 않으시다.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니 그 안에서 내 영혼이 쉼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다. ∽∽∽∽∽∽∽∽∽∽∽∽∽∽∽∽∽∽∽∽∽∽∽∽∽∽∽∽∽∽∽∽∽∽∽∽∽∽∽∽∽∽∽∽∽∽∽∽∽
이하는 마태복음 6장 3, 4절과 관련하여 2013/09/26 추가함
PS 1 : 예전에 목사님이 설교 중에 들려주신 이야기.
한 우동집에 행색이 초라한 앞 못 보는 사내가 그의 아들, 딸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의 부축을 받고 들어섰다. 사내는 가진 돈이 없으니 나눠먹을 수 있도록 우동 한 그릇과 빈 그릇 두 개를 달라고 하였다. 이를 불쌍히 여긴 가게 안주인이 남편인 우동집 사장에게 한 그릇 값만 받고 세 그릇을 주자고 하였지만 남편은 주문한 대로 우동 한 그릇과 빈 그릇 두 개를 내오는 것이었다. 안주인이 “뭔 돈 욕심이 그리 많아 야박하게 구느냐!”고 남편에게 한 마디 하자… 남편이 말하길… “온정을 베풀어 배고픔을 덜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안주인이 살펴보니 남편이 내온 한 그릇 안에 세 그릇 분량의 우동이 넘쳐나게 있었다는…
사랑과 동정과 자선을 베푸는 것도 세심해야 한다.
자존심, 받는 사람의 처지와 감정까지도 살펴야 한다.
주기 좋게 주는 것이 아니라 받기 좋게 주어야 한다.
PS 2 :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아마도 앞 못 보는 아버지와 허기진 아이들은 우동을 배불리 먹고 우동집을 흐뭇하게 나섰을 것이다. 우동집 사장과 안주인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숨어서 베푸는 사랑과 자선의 참 행복을 맛봤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아름답고 감동적인 해피엔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식사를 끝낸 사내가 돈을 지불하며 옆집에선 공짜로 먹여줬는데 여긴 인정머리 없이 제 값 다 받는다고 투덜대며 침을 뱉고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간다면… 짜다, 맵다, 벌레가 들어있다, 온갖 트집을 잡으며 가게를 소란스럽게 한다면… 가고 보니 오천원 내고 만원 훔쳐간 가짜 장님, 가짜 자식들의 도둑무리였다면…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선의를 악의로 갚는다면 괘씸하기 짝이 없다. ‘거지XX’, ‘깡패XX’, 육두문자를 날리며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다. 한 성질 하는 사람이라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는다고 뒤쫓아 가서라도 무전취식, 절도죄로 고발해 집어넣으려 한다. – 과연 이 우동집 사장님은 다음에도 이런 자선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감동적인 미담에서 그치면 좋으련만 왜 이리 부정적인가. 이야기가 전혀 아름답지 않아 받았던 감동이 일순 사라지고 기분 더러워졌지만 현실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약하고 가난한 것이 곧 선하고 순박한 것이 아니고 강하고 부자인 것이 곧 악하고 탐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강약과 선악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약할수록 비뚤어지기 쉽고 비뚤어지면 악의 유혹에 더 취약해진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사람은 더 비루해지고 더 비굴해지고 더 비열해질 확률이 크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들만의 생존술의 방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환멸을 일으킬 정도로 비굴하던지, 살의를 일으킬 정도로 비열하던지, 그들이 비참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은 ‘레미제라블’이다.
무엇인가? 진정한 선의와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아무 대가나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랑질하기 위함도 아니고 대접과 칭송을 받기 위함도 아니며 남몰래 뿌듯함을 느끼기 위함도 아니고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상급을 은연 중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선의와 사랑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주님의 가르침이지 주님께 인정받아 천국행 티켓을 예약하기 위함이 아니다.
무조건, 무조건이다. 이것이 순도 100%의 완전한 사랑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예수님의 절대사랑이다.
이것은 내가 쓰면서도 내가 듣기에 거북한 지극히 오만한 도덕선생의 훈장질이다.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간들에겐 매정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주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이고 주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주님의 말씀이 대개 이렇다. 간단치가 않다. – ‘아무도 너의 구제함을 모르게 하여라.’ 기와 조각으로 긁고 싶을 정도로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처자식 사랑하기에도 힘에 부칩니다.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대주어라.’ 조건반사적으로 주먹이 먼저 올라갑니다. ‘1.5킬로미터 동행을 요청받거든 3킬로미터를 동행해 주어라.’ 일분일초라도 같은 공간에 있기 싫은 얄미운 사람입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주님~ 제게 고통을 주시려 오셨습니까!…… ㅠ.ㅠ
인간은 무슨 보람으로 선행을 하고 의로움을 지켜야 하는가?……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 딱히 이유가 없다. 기대도 보람도 없이 최대한의 선을 행하라. 세상이 알아주던지, 주님의 상급을 받던지, 그건 다음의 일이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오늘 베푼 자선을 내일 잊어버려라. 아무 기대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선을 행하고, 너를 포함하여 아무도 너의 구제함을 모르게 하여라. 그러면 굳이 바라고 졸라대지 않아도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PS 3 : 6장 3,4절과 비슷한 맥락의 구절을 <논어(論語)>에서 찾아본다면…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서운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주기도문 (기도)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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