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 | [Live] 양과 염소를 나누다 (마태복음 25:31-46)_아침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10323 7727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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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비유 하나님 말씀]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 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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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비유 하나님 말씀 중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이 이 땅에 강림하시면 양과 염소를 가르신다고 했습니다.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두신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오른쪽의 개념은 영광이고 왼쪽은 수치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오른쪽에 두시게 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 31-46)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마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심판에 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중에서 본 비유는 가장 엄숙하고 또 명백하게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명확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비유의 형식을 빌린 직설적인 설화로서 자기 자신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베푸시되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여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신다.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현재 상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들의 천국관은 자기 민족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불행에서 구원을 받는 현세적이며 지상주의 천국관,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적인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유대 민족을 뛰어넘어 세계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 모아 선악 간에 심판하여 의인들만으로 구성되는 나라임을 보이고 있다. 이때에 이런 계시는 유대인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의 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표면상으로 볼 때는 선행의 보상으로 받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점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선행의 보상으로 영생에 들어간 것이 아님은 34절에 내 아버지께 복 받은 자들이여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이 거저 베푸신 은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셨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공로를 세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자신들의 선행의 공로로 이 나라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로 인하여 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창세전에 예비하신 나라이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나를 선택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시려고 했다. 이 땅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셨다. 이 땅에 내려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시켜 주시는 것이다.

* 이 비유들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해서 영생을 상속하라고 교훈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주님의 오랜 지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주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주님이 더디게 오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때가 되매 구름 타고 강림하신다. 우리는 그 주님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35절, 가톨릭 – 구원의 원인에 대한 논쟁. 영생이 선행의 공로 때문이라고 주장.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선행을 격려하는 데 있다. 우리는 율법주의 신앙관을 버려야 한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져 있으면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않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한다.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선행은 영생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저 받는 것이다. 그 상은 입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함께 후사가 됨으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상은 당연한 몫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부여된 상이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상속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여 열심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 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믿음과 간구가 구제보다 더 가치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실례를 들어 보인다.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인간들에게 따스하게 대하는 구제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구제와 선행에다 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명확히 보인다. 신실한 자들이란 입술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봉사를 입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에 옮겨서 보여주실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를 하라고 말씀한다. 그것이 예배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자신들이 짜낸 선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에서 이탈한 자들은 누가 네게 이것을 요구하였나 책망받는다. 이 구절을 핑계 삼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영적인 일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인이기에 나타내는 선행과 구제가 귀하다. 우리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고 구원받은 백성은 선행과 구제를 해야 할 것을 말씀한다. 구원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거듭났으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하나님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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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교리비교<59>]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는 누구인가

성경은 인류에게 가장 많이 보급된 베스트셀러지만 완독률이 가장 낮은 책으로도 꼽힌다. ‘천국과 구원의 길’이 제시된 신서(神書)이자 언약서로 일컬어지는 성경은 신학자마다 해석이 달라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각기 다른 해석은 교단분열과 이단시비의 빌미가 되면서 교단끼리 배타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원인이 돼 왔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면서 교인들 스스로 다양한 교회 설교를 비교해 보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본지는 이런 흐름에 맞춰 편견 없이 성경의 교리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온라인에 공개된 설교 및 성경 강해 영상 중 기성교단과 코로나19 이후 관심이 증폭된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의 교리를 주제별로 비교 정리했다. 해당 교단 관계자의 성경 해석을 최대한 가감없이 정리했으며 옳고 그름의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출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천지일보 2021.7.2

양, 새 언약과 계명 지킨 자들 염소, 새 언약·계명 안 지킨 자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결론부터 내리자면 양은 하나님의 약속 새 언약과 계명을 지킨 자들이며, 염소는 하나님의 약속 새 언약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자들이다.

마태복음 25장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연결되는 내용으로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마태복음 24장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 24장은 주님 다시 오시는 재림과 그때의 징조에 대한 말씀으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면 산으로 도망하라 하셨으며,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달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지는 배도와 멸망의 일 후 예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택하신 자를 추수하여 모으는 구원의 역사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마태복음 25장 1절의 ‘그때’는 마태복음 24장의 예언된 사건이 일어나는 주 재림 때를 말한 것으로 재림하시는 주를 맞이하는 성도들의 자격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출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천지일보 2021.7.2

마태복음 25장 1~13절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집에 참석할 자와 참석하지 못할 자를 알린다. 즉 등과 기름을 예비한 자는 혼인잔치에 참석할 자이지만, 등은 있지만 기름은 준비하지 못한 자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자인 것이다. 등은 성경이요, 등을 밝히는 기름은 성령의 증거이며, 기름 파는 자는 요한계시록의 현장을 직접 보고 들은 신천지 약속의 목자이다. 그러므로 등을 밝히는 기름을 준비하려면 반드시 신천지 약속의 목자께서 전하시는 증거의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

또 어린양의 혼인잔치집에 참여하려면 예복을 입어야 하는데 예복을 입은 자는 증거의 말씀으로 옳은 행실을 갖춘 자요, 예복을 입지 못한 자는 옳은 행실을 갖추지 못한 자이다.

이어지는 14~30절은 주인이 종들의 재능에 따라 각각 금 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에 간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할 때 장사하여 이익을 남긴 자와 남기지 못한 자가 있다. 이익을 남긴 자는 금과 같이 귀한 증거의 말씀으로 전도한 자이며, 이익을 남기지 못한 자는 증거의 말씀을 듣고도 귀한 것을 깨닫지 못해 전도하지 않은 자이다.

또 31절 이하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는 주 재림 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양과 염소를 나누는 내용이다.

형제 중 하나가 증거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주리고 목마를 때 말씀을 주며, 예복을 입지 못하여 헐벗었을 때 옳은 행실을 갖추게 한 자가 계명을 지킨 양 같은 신앙인이요. 돌봐주지 않은 자는 계명을 지키지 않은 염소같은 신앙인이다.

인자가 올 때는 마태복음 19장에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이며,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이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신다고 하신 바로 그때이다. 그 처소는 계시록 21장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며,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새 하늘 새 땅에 임해온다.

(출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천지일보 2021.7.2

이 사건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의 오른손에서 역사한 일곱 금촛대 장막의 일곱 사자가 계시록 2~3장과 같이 배도하고, 계시록 6장에서 해달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지는 멸망의 일이 있게 됨으로 이뤄진다. 이 일 후 계시록 7장에서 추수하여 인 맞은 자들로 12지파를 창조하는 것이 계시록 14장의 시온산이며, 계시록 21장의 새 하늘 새 땅 신천지이다.

이곳에서 양같은 신앙인과 염소같은 신앙인으로 나누는 것이다.

양같은 신앙인은 하나님의 새 언약과 계명을 지킨 12지파 처음 익은 열매로 신천지 약속의 목자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전도하는 자요. 창세로부터 예비 된 천국을 상속받고 영생의 복을 받는 자들이다.

반면 염소같은 신앙인은 새 언약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자들로 옛 습관에 젖어 부패하고 변화가 없어 자기 배만 채우고 조금도 하나님 나라에 도움을 주지 않아 영벌에 들어가는 자들이다.

양, 물질 나누고… 염소, 자기만 먹어 양과 염소, 창세전부터 정해져 있어

기성교단 순복음교단 / 장로교단

순복음교단 A목사

양은 가난한 이웃에게 많이 나눠주는 사람이 양이다. 염소는 가난한 이웃이 가난해도, 교회가 가난해도, 목사가 가난해도, 성도가 가난해도, 형제가 가난해도, 지만 잘 처먹고 잘 살면 된다고 해가지고 호의호식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장로교단 B 목사

가난한 자 주린 자 목마른 자 병든 자 고난받는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자들이다. 주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주님이시다. 그 섬긴 남녀 종들이 양이요,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들이 있다. 오시자마자 핍박했다. 주님을 섬긴 자들은 양이요,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다. 주님을 핍박했던 자들은 죽인 자들은 염소들이다.

장로교단 C목사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그들은 이미 창세 전에 갈려 있다. 양과 염소들은 갈려진 상태에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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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31-46 심판 6 _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31-46 심판 6 _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강화 마지막 부분입니다. 24-25장의 심판에 관련 된 말씀의 최종 결과를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주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서 모든 민족은 각각 구분되어 보좌 오른편과 왼편에 서게 있게 됩니다. 오른편은 복 받을 자들로 예비된 나라(영생)에 들어가고, 왼편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 영원한 불(영벌)에 들어가게 됩니다.

# 목자와 임금의 이미지는 서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목자는 긍휼로, 임금은 통치와 심판을 행하시는 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목자되신 주님과 왕되신 주님에 대한 뉘앙스는 이렇게 온도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사랑과 공의의 주님이 신실하심을 믿기에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경성과 누림사이의 긴장들을 늘 갖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다.

#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기준인 ‘지극히 작은 자’와 ‘내 형제’는 누구이며, 이들을 향한 행위가 영벌과 영생의 결과를 달리 한다면 이를 행위구원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를 정리해 보는 것도 중요한 묵상의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 본문 해석에 고려해야 할 배경 단상

24-25장의 예루살렘 성전 멸망과 재림에 대한 말씀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배경을 염두할 때 그 메시지가 좀 더 분명해 지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당시의 상황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의 비장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강화를 통해 제자들을 비롯한 천국 백성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믿음의 여정을 교훈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태복음의 기록 시기를 주후 80-90년대 정도로 본다면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64년 네로의 박해 이후 90년대 도미티안 황제의 두번째 박해를 앞두고 여전히 로마 치하의 엄혹한 시기를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상황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신념과 신앙과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무너지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러한 사건에 대한 이해와 정리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이후 삶의 목적과 내용이 좌우됩니다. 이전에 기원전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포로기와 포로 후기에 회고하며 재해석하고 교훈삼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미국도 9.11사건 전후가 달랐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러한 역사적 전환점들이 많았습니다. 가깝게는 4.16세월호 사건에 대한 부분도 여전히 진실규명이 덜 된 상태이지만 이에 대한 교훈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억해 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이후의 삶의 방향과 내용 그리고 삶의 자세도 달라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독립한 적이 없습니다(지금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은 성경의 이스라엘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주님은 교회 곧 그리스도인들로 새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약속의 땅으로 왔을 때부터 늘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리고 강대국의 지배 하에서 하나님나라 백성과 공동체로 살아왔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일에는 항상 환난과 핍박이 지속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속에서 세상과의 싸움과 전쟁과 갈등의 역사가 구약의 역사이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도 지속되고 있으며 마태 공동체에게도 여전히 살아가야 할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이제 AD70년 예루살렘 멸망 후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한 팍스로마나의 세상에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재해석과 종말신앙(개인과 우주적인 종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엄혹한 현실 속에서 변함없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힘과 원동력이 될 수 있었기에 마태는 다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회고하면서 해석하고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들을 함께 고려할 때 마태복음 24-25장의 이야기가 2천년 전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앞선 이야기도 오랜 역사를 회고하며 예언의 성취의 관점들을 계속 재확인하는 것도 당대의 현실을 해석하고 살아가기 위한 이유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로마 같은 세상 속에서, 세상의 주류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세속에 휩쓸려 가느냐, 역류하느냐 아니면 선도하고 주도해 갈 것이냐의 싸움이 여전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다시금 예루살렘 멸망과 재림에 대한 말씀이 과거의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은 우리와 거리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지금 살아내야 할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묵상할 수 있길 기대합니다.

# 31-33절 경성&준비해야 할 이유 9 : 마침내 주님 앞에서 심판 받아 구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을 모아 각각 구분해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좌우로 구분하는 것처럼 세울 것입니다.

*

인자 곧 예수님께서 목자되시고 만왕의 왕이시며 메시아 되신다는 사실을 줄곧 증거해 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재림에 대한 교훈을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에 심판이 있고 그 때에는 이 땅에서의 삶의 내용을 따라 분명하게 두 부류로 나뉘어 질 것에 대해 말씀하신대로 다시금 분명하게 좌우로 나뉠 것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비유해 주고 계십니다.

양과 염소는 그리고 오른편과 왼편의 상징은 주로 흰색 양은 의인으로 검은색 염소는 악인으로 상징됩니다. 오른쪽은 대게 명예와 긍정적인 의미로, 왼편은 그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목자는 제 양을 알고 염소 또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인과 악인에 대한 구분을 주님의 판단 기준을 따라 정확하고 분명하게 하실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

그동안 계속 경성과 준비해야 할 삶의 이유들을 정리해 왔습니다. 결국 종말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염세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오늘과 오늘 주어진 현실의 삶을 더 책임있게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고, 우리로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 수 있는 달란트를 주셨으며, 주님의 즐거움을 동참케 하셨고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천국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살 이유와 소망을 충분히 주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니 어려움과 염려와 근심의 이유들이 차고 넘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대하면서 오늘을 감당하고 이겨 나갈 힘을 얻어 책임있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목자되시는 주님이 함께 하사 도와 주실 줄 믿습니다.

# 34-40절 경성&준비해야 할 이유 10 : 의인들에게 예비된 나라(영생)를 상속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때에 주님(임금)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은 복받을 자들로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 받을 것이라 판결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도와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묻는 의인들에게 주님은 주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복’과 ‘예비한 나라’와 ‘영생’(46절)은 결국 같은 의미로 구원 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선 비유에서는 ‘혼인 잔치’와 ‘주인의 즐거움’으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을 상속받는 이유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의 모습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소외된 이들 곧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인들의 모습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본문에서는 묘사된 상태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된 것까지는 앞선 소외된 이들의 모습과 유사하지만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것은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옥에 갇히는 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여정에서 이와 같은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작은 자’는 앞서 마 10: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에서도 언급된 제자들로 보입니다. 주님은 또 40절에서 이들을 ‘내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서 마 12: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10:40에서는 “너희를 영접하는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시면서 역시 제자들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것과 동일시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자’는 일반적으로 세상의 불쌍한 이웃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인간들을 다 포함한다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주님의 제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웃 사랑에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만 사랑해야 한다고 국한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에 있는 이웃들의 아픔에도 당연히 동참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이제 환난과 핍박을 앞둔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함이고 그 길을 가는 이들을 교회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를 교훈하기 위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한 선행이 영생과 구원을 얻는 조건이라고 한다면 그럼 믿음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을 얻는것이냐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작은 자에 대한 이해가 주님의 제자들이고, 결국 이들을 향한 선행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이를 행위구원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선행은 결국 믿음의 양면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얻은 천국백성은 당연히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선행을 수반하는 삶을 통해 믿음의 열매를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악인의 모습은 앞서 주여주여 하는 자들과 같은 말과 행위가 다른 곧 열매가 없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

지금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며,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혀 있는 것같은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따르는 과정 속에서 이런 일을 겪는 것이라면 주님의 제자요 형제로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맡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또 이러한 이웃이 있나요? 그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붙여주신 사람들이며,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할 기회, 제자임을 증명할 기회, 천국 백성의 열매를 맺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실 사람도 붙여주셨고, 사랑을 줄 사람도 붙여주신 줄 믿습니다. 영생의 상속자로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 41-46절 경성&준비해야 할 이유 11 : 악인들에게 예비된 영원한 불(영벌)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판결합니다. 이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들에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에게는 영벌에 들어가리라 선언하십니다.

*

이 사람들은 앞서 7:21-23에 나온 이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래서 44절에 주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이 언제 주님을 향하여 선을 행하지 않았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 10:15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미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핍박하고 돕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영벌에 처해질 저주받을 자들입니다. 자신들은 나름대로 주를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왔다고 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구분하신 것입니다. 앞선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

위선과 외식 곧 자신들이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칭찬받는 의인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위선, 그리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내면과 일상에서는 불의를 행하며 믿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른 외식에 대한 심판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영벌입니다. 이는 위선과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이면서, 그런 이들의 핍박속에 살아가야 할 제자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는 우리들 또한 위선과 외식을 유의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하지도 않는다면 더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는지 아니면 경고가 되는지는 각각 자기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들려진다면 지금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 기도

우리의 목자요 왕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내용을 따라 마침내

주님 앞에서 구분되어질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로

주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도록

목자와 같은 사랑으로 함께 해 주심을 감사하옵고

왕되신 주님의 통치와 뜻을 따라서

거룩한 자녀로 살아갈 길을 인도해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소외된 우리를 긍휼히 여겨서

천국 백성 삶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

천국가족들을 향한 사랑으로 증명됨을 배웁니다.

주님이 붙여주신 작은 자들을 향하여

아낌없이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온전한 믿음 주시옵고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랑의 능력도 허락해 주옵소서.

천국백성의 여정의 끝에서 결산하는 것을 기억하고

지금 곁에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넉넉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도

풍성하게 부어주시옵소서.

이웃을 향하여 주께 하듯

아낌없이 최고의 것으로 사랑할 수 있길 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헬라어 강해] 재림의 징조 양과 염소 비유(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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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재림의 징조 양과 염소의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양과 염소를 가지고 비유하셨습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신다고 했습니다. 양은 구원받은 백성을 염소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을 말합니다. 오른쪽은 성경에서 영광을 상징합니다. 왼쪽은 수치를 상징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는 창세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을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거룩한 신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도둑같이 오셔서 심판하십니다. 노아 때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모든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에 정신이 팔려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여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종말론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

31절 호탄 데 엘데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엔 테 독세 아우투 카이 판테스 호이 하기오이 앙겔로이 메트 아우투 토테 카디세이 에피 드로누 독세스 아우투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25:31

인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 이 말을 직역하면 사람(안드로푸)의 아들(휘오스)이 된다.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명백히 자신을 ‘인자’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문맥상(24:3) 종말의 때에 심판주로 구속주로 임하시기로 약속된(단 7장 ; 율 3:1-12 ; 슥 14:5)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셨다(8:20 ; 눅 5:24).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 심판의 주께서 최후의 순간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다(16:27 ; 24:30 ; 살전 4:16 ; 살후 1:7, 8). 여기서 특별히 ‘영광으로’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신적(신적) 광휘가 충만한 예수가 오시는 모습을 바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붙여진 형용구이다(Broadus).

그리고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사실은 예수 재림의 장면이 전우주적인 성격을 지닌 장엄한 것임을 암시한다(24:31 ; 살후 1:7, 8 ; 계 14:14-20). 한편 본문의 말씀은 주께서 수난 당하시기 전 단지 3일 전에(26:5, 17)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예언적 메시지가 지니는 신적 탁월성과 차고 넘치는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심판자로서 뿐 아니라 왕으로서(34절) 오실 것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19:28 ). 특히 그의 ‘보좌’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사될 것을 가리킨다(28:18; 고전 15:25 ; 히 12:12).

32절 카이 쉬나크데세타이 엠프로스덴 아우투 판타 타 에드네 카이 아포리에이 아우투스 아프 알렐론 호스페르 호 포이멘 아포리제이 타 프로바타 아포 톤 에리폰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25:32

모든 민족을(판타 타 에드네) – 똑같은 구절이 24:14과 28:19에도 나온다. 여기 ‘모든 민족’은 유대 민족을 포함하여 이방 세계의 모든 민족까지 가리키는 것으로서(행 17:26) 보편적 심판의 의미를 주고 있다. 따라서 종말적 심판이 보편적 심판이라는 것은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실로 천국 복음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기 때문에(2:1-12 ; 3:15, 16; 8:11) 모든 민족은 왕 앞에 서야 한다.

모으고(쉬나크데세타이) – 수동태로서 번역하면 ‘모여지고’가 된다. 이는 모든 인류를 주 앞으로 모으는 추수꾼 천사의 사역이 역력히 암시된 표현이다(24:31). 수동태이기 때문에 아무나 종말에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모여지게 된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선택받은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 종말적 심판의 때에, 열 처녀 비유나 달란트 비유처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한다는 것을 비유의 서두(序頭)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양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 없이 섞여 지낸다. 그러나 특히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기후인 팔레스틴에서는 잠을 잘 때에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하였다.

왜냐하면 양들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도록 하였다. 또 낮에도 서로 구분되기는 하는데 왜냐하면 팔레스틴 염소들은 대부분 검은 계통인데 반해 양들은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성격이 판이(判異)하게 다른 짐승인지라 저희들끼리 무리를 이룬다.

여기서는 목자가 직접 무리를 구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는, 앞에서 ‘모든 민족’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보아 양과 염소를 심판의 대상이 되는 모든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

33절 카이 스테세이 타 멘 프로바타 에크 덱시온 아우투 타 데 에리피아 엑스 유오뉘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양분함으로써 심판의 명료성(明瞭性)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제3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정녕 최후 심판의 순간에는 옳거나 틀린 것만 있을 뿐이다. 또 여기서는 오른편에는 양을 세우고 복 받은 자로 칭찬하고 왼편에 선 염소를 저주받은 자로 경멸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오른편’을 의로운 자리로 표현하고 ‘왼편’을 저주받은 자리, 곧 불의한 자리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묘사는 구약시대 때부터 ‘오른편’을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해 온 사실에서 비롯된다(출 15:6 ; 왕상 2:19 ; 욥 30:12 ;시 45:4). 그리고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힘의 상실로서 이해되어 왔다(삿 3:15 ; 삼하 20:9:10 ; 전 10:2). 따라서 심판의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나타낸다.

한편 본문의 이 같은 구분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1) 염소보다 더 가치 있고 값비싼 짐승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양이 흰색인 반면 대부분 검은색으로 된 염소를 대비시켜 선과 악, 생명과 멸망을 상정적으로 대비하고자 했을 것이다. (3) 하나님을 목자로 보고 그의 백성들을 양 떼로 보는 당시의 유목민적 사고를 빌어왔기 때문인 것이다(18:10-14 ; 겔 34:11, 12 ; 막 6:34 ; 눅 15:3-4 ; 요 10:1-21 ; 히 13:20). (3) 염소는 풀밭을 못쓰게 만들고 나무를 상하게 하여 초목을 죽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 염소를 왼편에 세워 불의한 짐승으로 구분했을 것이다.

34절 토테 에레이 호 바실류스 토이스 에크 덱시온 아우투 듀테 호이 율로게메노이 투 파트로스 무 클레로노메사테 텐 헤토이마스메넨 휘민 바실레이안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25:34

임금 – 여기서 심판의 주체가 임금으로 바뀐다. 즉 31절에서 심판의 주체가 ‘인자'(인자)였는데 여기서는 ‘임금’으로 달리 표현함으로써 인자를 임금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의 주로서 뿐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묘사하는데, 그러한 비유는 2:2 ; 21:5 ; 27:11, 29, 37, 42에서도 나타난다. 여하튼 이 같은 칭호는 보좌에 앉으신 인자의 통치권(통치권)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진다. 즉 모든 민족의 통치권과 심판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롬 14:9 ; 계 19:16).

내 아버지께 –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아버지와 연관시키고 있다(10:32, 33 ; 11:25-27 ; 15:13 ; 16:17, 27:18:10 ;20:23 ; 26:29,5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대행자(대행자) 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복’의 궁극적 시여자(시여자)는 아들을 통해 전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복 받을 자들이여 – 오른편에 선별된 사람들을 향한 호칭이다. 여기서 특별히 ‘복 받을 자들'(호이 율로게메노이)은 완료 분사 구문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이는 한번 시여 된 축복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결국 현세와 내세를 초월한 축복의 영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말은 41절의 ‘저주를 받은 자들아’와 대비되는 문구로서 단순히 축복의 말씀 이상의 실제적인 복의 전달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나와라 – 이 단어 역시 41절의 ‘나를 떠나라’와 대조되는 말로서 ‘나아온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친밀)한 만남을 의미한다. 같은 형식의 비유인 열 처녀 비유에서 ‘잔치에 들어가고’라는 구절과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라는 구절(10, 21, 23절)에서도 표현한 바와 같이 구원은 주님과의 만남이고 함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요 12:26).

창세로부터(아포 카타보레스 코스무). – ‘세상을 창조한 이래로’라는 뜻이다. 그런데 혹자(Bengel)는 `… 로부터’라는 뜻인 ‘아포’를 ‘그 이전부터'(*, 프로)라는 뜻으로 이해함으로써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일치시키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창세 전부터 미리 선택해 두시고 그 유업을 상속케 하셨다는 것이다(요 17:24; 엡 1:4; 벧전 1:20).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오 한 예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집념과 성실성을 대변해 준다.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 이 구절은 앞에서 ‘복 받을 자’라는 말에서 나온 ‘복’의 내용을 보여 주고 있다. ‘예비된 나라’는 하늘나라를 말한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계획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비된'(헤토이마스메넨)은 완료 분사 형태를 취함으로 해서 그 동작이 이미 오래전부터 성취된 상태에 있었음 보여 준다.

즉 하늘나라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의 입국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11). 한편 ‘상속하라'(클레로노사테)는 말의 원어는 부정 과거 명령형으로서 ‘지체치 말고 즉시 네 분깃을 얻으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받으라’라고 명령하지 않고 나라를 ‘상속하라’라고 명령한 것은, 그 피 명령자에게 당연히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상속이라는 말은 본래 자기와 상관없는 어떤 것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있는 권리(권리)로서 하늘나라를 물려받는 것을 뜻한다. 실로 아무도 창세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이 상속 물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즉 영원한 자기 소유인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창세 때부터 준비된 하늘나라를 영원한 소유로서 상속받게 된다. 여하튼 ‘예비된 나라’라는 구절은 41절의 ‘예비된 불’과 대칭적으로 앞에 나온다. 이것은 다른 비유들과 같이 대칭 구조속에서 반복 어투를 사용하는 문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35절 에페이나사 가르 카이 에도카테 모이 파게인 에핍세사 카이 에포티사테 메 크세노스 에멘 카이 쉬네가게테 메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절 귐노스 카이 페리에발레테 메 에스데네사 카이 에페스켑사스데 메 엔 퓔라케 에멘 카이 엘데테 프로스 메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5:35,36

이 두절은 복 받은 자들이 하늘나라 상속권을 소유한 까닭을 말하고 있다. 즉 그들이 환영을 받고 유업을 상속하도록 초대받은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왕의 형제들을 섬겼기 때문이다(사 58:7). 그런데 이 섬김의 내면을 살펴보면 그 섬김이 곧 그들 의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약 2:20-26). 즉 이는 순결한 믿음, 참된 신앙만이 표출할 수 있는 선행인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선행을 상기시키는 왕의 대답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의인들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37-39절). 정녕 의인들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과 기대에 따라 능동적으로 그 일을 수행했던 것이다(엡 2:10). 여기서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선행 중 35절에 제시된 세 종류는 율법적 의무 조항에 근거한 선행이며(창 19:1,2 ; 출 23:9 ; 신 10:18 ; 14). 36절에 제시된 세 종류의 선행은 율법의 의무 조항 이상의 자원적이고 헌신적인 섬김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의 시대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 식. 주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고 많은 질병과 억울한 누명과 과중한 채무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웠다. 사실 예수께서 당신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만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옥에 갇힌 자 방문’은 복음 시대 기간 중에 복음과 그리스도로 인해 공적인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은연중에 제시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고난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고난 받고 굶주리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행(善行)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6절).

37절 토테 아포크리데손타이 아우토 호이 디카이오이 레곤테스 퀴리에 포테 세 에이도멘 페이논타 카이 에드렙사멘 에 딥손타 카이 에포티사멘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절 포테 데 세 에이도멘 크세논 카이 쉬네가고멘 에 귐논 카이 페리에발로멘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절 포테 데 세 에이도멘 아스데네 에 엔 퓔라케 카이 엘도멘 프로스 세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25:37-39

의인들(호이 디카이오이) – 여기서 ‘복 받은 자들’이 ‘의인들’이라는 호칭으로 바뀐다. 즉 마치 ‘인자’가 ‘임금’으로 호칭이 바뀌어 그 인격에 대해 더욱더 구체성을 띠게 하듯이, 고난 받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푼 자들을 가리켜 의인으로 선언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여기서 ‘의인들’이라 함은 그 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므로써 결국 이 땅에서의 온갖 자기만족의 유혹과 고초를 이겨내고 끝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 앞에 선 자를 가리킨다. 물론 이 ‘칭의’는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적이고 절대적 선언에 근거한 것일 뿐 사람들의 인격이 절대 순결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편 의인들의 대답은 앞서 임금이 조목조목 나열한 항목을 똑같은 형식으로 반복하면서 언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지금껏 행해왔던 선행이 결코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되며 또한 커다란 상금을 바라고 선행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의 최상의 겸손을 나타내 보였다. 이러한 자기 선행을 부인하는 모습은 외식하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그 당시 위선적 종교인들에게 크나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여호와 경외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제 사랑을 도외시한 채 외식하며 겉치레적인 신앙생활에 몰두하던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 학자들을 여러 기회들을 통해 격렬하게 비판하셨다(23:1-36 ; 12:38-40 ; 눅 11:37-52 ; 20:45-47).

결국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마음가짐을 제시해 주며 당시의 비 실천적인 이론적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6:1-4에 나오는 바와 같이 남을 구제할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은밀하게 하라는 교훈을 묵묵히 암시하고 있다.

40절 카이 아포크리데이스 호 바실류스 에레이 아우토이스 아멘 레고 휘민 에프 호손 에포이에사테 헤니 투톤 톤 아델폰 무 톤 엘라키스톤 에모이 에포이에사테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5:40

내 형제(아텔폰 무) – 여기서 형제(아델포스)는 일차적으로 임금의 형제 곧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12:47-50)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도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형제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32절). 따라서 여기서의 형제는 광의적인 뜻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동참하는 고난 받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35, 36절).

지극히 작은 자 하나 – 이와 비슷한 문구가 10:42 ; 18:6, 10, 14에서 ‘소자 중의 하나’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18:5에는 ‘어린아이 하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매우 축소 지향적인 묘사이다. 즉 ‘작은 자’를 ‘지극히’라는 단어로 더 축소하여 강조하며 ‘하나’라는 최소 단위의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와 극한 대비를 이뤄 ‘가장 작은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가장 큰 자’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라는 단어는 막연한 대상을 나타내는 부정사로 쓰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구체적(具體的)인 어떤 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임을 암시한다. 실로 성도의 바른 신앙은 묵묵히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그 진수가 있다.

내게 한 것이니라(에모이 에포이에사테) – 35, 36절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면서 의인이 반문한 것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내게’라는 뜻의 ‘에모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과 배려를 의미하는 여격이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외받고 궁핍하며 고통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과 강한 연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실로 예수께서는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성육신(Incarnation)하심으로써 이미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同參)하셨다(빌 2:6-8). 또한 그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본질적으로 인간의 연약한 한계 아래 머무시면서 그 속에서 아픔과 고뇌를 맛 보시었다(8:17 ; 사 53:4 ; 63:9). 정녕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의 표상이자, 그들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시는 그들의 친구였다(히 4:15). 따라서 그분은 자신 있게 고난 받는 자와 ‘하나’라 선언하실 수 있었으며 고난 받는 자의 위안자와 보호자가 되어 주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고난받는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22:34-40 ; 히 13:2).

41절 토테 에레이 카이 토이스 엑스 유오뉘몬 포류에스데 아프 에무 호이 카테라메노이 에이스 토 퓌르 토 아이오니온 토 헤토이마스메논 토 디아볼로 카이 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25:41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 – 이 구절은 34절의 ‘복 받은 자들이여 나아와’와 대칭되는 문구이다. 한편 7:23에는 본문과 비슷하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즉 저주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바깥 어두운데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분과 영영히 관계가 단절될 것이다.

그런데 ‘저주를 받은 자들’이란 문구는 34절의 ‘복 받은 자들’이란 말에서 볼 수 있는 관사(호이)가 생략됨으로 하나의 독립적 문구라기보다 종속적 분사로 보아 ‘저주를 받아 나에게서 떠나가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Wycliffe). 이는 결국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판 의지를 강조한 표현이 된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 이 구절은 34절의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와 대칭적으로 대비되는 문구이다. 즉 의로운 자들을 위해 그 나라를 창세 전부터 준비하였지만 마귀와 사자들을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된 것이 서로 다르다.

예비된 – 동사 헤토이마조(Homer 이래)는 헤토이모스(2092: 준비된)에서 유래했으며, ‘준비하다, 준비를 갖추다, 예비하고 있다’를 의미한다. 문법은 동사 분사 완료 수동태 목적격 중성 단수이다. 지옥의 불로 떨어질 자들은 창세전에 준비된 불 못으로 들어가게 된다. 완료로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동태이기 때문에 지옥은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다. 이곳에 염소와 같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영영한 불’이 염소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것이 아니라 원래는 마귀와 그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점이다(계 20:10). 실로 영영한 불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하고 타락한 삶을 살므로 얻어지는 것이다.

한편 ‘마귀'(디아볼로스)는 ‘중상자’, ‘비방자'(Slanderer)를 의미한다. 새 번역에서도 ‘악마'(the devil)로 번역한다(4:1 ; 눅 4:2 요 13:2 ; 옙 4:27 ; 히 2:14 ; 딤후 2:26 등). 그런데 여기서의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주동자(主動者) 곧 어둠에 속한 세력의 주관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사자'(앙겔로스)라는 말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messenger), ‘사절'(envoy), 또는 ‘천사'(angel), ‘보냄을 받은 사람'(one who is sent)을 뜻한다.

여기서는 ‘메신저'(messenger)로 보는 것이 옳으며 새 번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그의 사자'(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로 번역해야 옳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 ‘마귀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된다.

영영한 불(토퓌르 토 아이오니온) – 이 말은 영영히 꺼지지 않고 지속적인 고통을 제공하는 심판의 불(fire)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46절의 ‘영원한 형벌’과 같은 표현이다. 실로 이곳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된 장소라는 점에서 그 고통의 도는 최고치에 이를 것이다. 한편 ‘불’이라는 묘사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지옥에 대한 개념이다(3:12 ; 5:22 ; 18:8 ; 유 1:7 ; 계 20:10-15).

42절 에페이나사 가르 카이 우크 에도카테 모이 파게인 에딥세사 카이 우크 에포티사테 메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절 크세노스 에멘 카이 우 쉬네가게테 메 귐노스 카이 우 페리에발레테 메 아스데네스 카이 엔 퓔라케 카이 우크 에페스캅사스데 메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25:42,43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의 정죄받은 이유를 35,36절의 문장 형식을 빌어 고발하고 있다. 특히 ‘아니하였고'(우)라는 부정어구를 5번에 걸쳐 후렴구로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심판 기준의 적극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즉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남에게 비록 악행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실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다(19:19). 한편 예수께서 이 같은 강경한 메시지를 전하신 것은 적어도 말세, 종말의 때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황폐(荒廢)해 질 것을(딤후 3;3) 익히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44절은 토테 아포크리데손타이 아우토 카이 아우토이 레곤테스 퀴리에 포테 세 에이도멘 페이논타 헤 딥손타 헤 크세논 에 귐논 에 아스데네 에 엔 퓔라케 카이 우 디에코네사멘 소이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25:44

이 구절 역시 37-39절의 경우처럼 판결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고 있다. 저주의 판결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다만 놀랄 뿐이다. 실로 그들은 양들이 자신의 선행을 잊어버리듯, 자신들의 악행(이웃에 대한 무정과 무관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Bengel).

한편 그들이 놀란 이유는 (1) 자기들의 기억으로는 주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를 돌보아 드리겠느냐는 사실 때문이다. (2) 심판의 임금으로 오신 주께서 굶주리고 나그네 되어 목말라하며 감옥에 갇힌 고난 받는 자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3) 그리고 무엇보다 양들이 마지막 날에 보답받기 위해 예수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닌 것처럼, 염소들은 마지막 날 보응(retribution) 받는 것을 멸시해서 형제들에게 냉담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예수의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영원한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필시 예수의 형제들에게 온정과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다.

45절 토테 아포크리데세타이 아우토이스 레곤 아멘 레고 휘민 에프 호손 우크 에포이에사테 헤니 투톤 톤 엘라키스톤 우데 에모이 에포이에사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25:45

이 구절은 40절과 대칭되는 구절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40절과 구별되게 ‘내 형제 중에’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이웃에 무관심했던 염소에게 있어서 형제 우애를 들먹일 만큼의 여유가 없음을 묵시적으로 꾸짖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실로 하찮게 보이는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에게 대해 무신경한 자는 그들의 형제와 친구이신 예수를 무시하고 그분의 뜻을 철저히 짓밟는 자인 것이다.

46절은 카이 아펠류손타이 후토이 에이스 콜라신 아이오니온 호이 데 디카이오이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론을 내리는 구절이다. 여기서 저주받은 자들의 벌과 의인들이 받은 보상을 영원한 생명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먼저 영벌(콜라신 아이오니온)은 영원한 징벌(punishment)을 뜻한다. 여기서 ‘콜라시스’는 원래 ‘잘라내다’의 뜻의 ‘콜라조’에서 유래한 말로서 죄인의 교화와 훈육을 위한 목적으로 내려진 징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을 근거로 해서 혹자는 본문의 ‘영벌’이 궁극적으로는 염소들을 구원키 위해 내려진 교정적 차원에서의 벌로 이해한다. 그러나 신약 어느 곳에서도 지옥에 처한 자의 회개나 교회가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최후 심판이라는 관점에서의 ‘벌’을 이야기할 때 이 ‘콜라시스’보다는 공의에 입각한 엄격한 보복이라는 뜻의 ‘티모리아가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콜라시스’는 본문에서 목적적 차원에서의 해석보다는 집행적 차원에서의 해석을 통해 ‘지독한 고통’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히 10:29). 특별히 ‘콜라시스’가 영원성을 강조한 ‘아이오니온’과 결합됨으로 형벌의 영원성, 곧 최후 심판으로서의 형벌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18:8 ; 살후 1:9 ; 유 1:13).

이와 더불어 의인에게 약속된 영생(조엔 아이오니온)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life)을 의미한다. 물론 이 생명은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을 뜻하기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향유하게 되는 지복(至福)에 달한 생명으로서(trench),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이 현세에서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부활한 생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살전 4:14-17).

한편 ‘형벌’과 ‘생명’을 각각 수식하는 형용사 ‘아이오니온’은 시작 또는 종결이 없거나 아니면 양자 모두가 없는 시간 개념으로서, 묵시 문학이나 종말론과 연관된 구분들에서는 항상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재림한 이후에 의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영원한 구별은 바로 이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를 통해 결정된다는 사실에, 끊임없는 긴장(緊張)과 그 나라와 주의 재림에 대한 성실한 준비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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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강해 ‘양과 염소’ 마태복음 25장 31-46

지극히 작은 형제를 예수님처럼

양과 염소 마태복음 25장 31-46

요즈음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오스카상 황금종려상에 작품상 극본상, 감독상등 4개부분에 상을 휩쓸어 동양100년에 쾌거라고 했는데 이 세상의 위대한 감동의 예술, 조각, 음악, 그림, 소설 작품의 대작은 성경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벤허’를 생각해보세요, 상대가 됩니까? 오늘의 말씀제목 양과 염소라는 것을 바탕으로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 낸다면 위대한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태 25장의 주님의 말씀은 이 세상끝에 인생의 끝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열 신부들이 먼저는 성령의 기름 을 가득채워 가지고 등불을 밝혀서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이 맡기신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스럽게 장사하며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지극히 작은 형제를 예수님처럼 대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지극히 작은 형제를 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대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 인생의 삶을 준비하면서 살면 내인생의 유ㅗ피아, 영원한 유토피아, 내 후손의 유ㅗ피아, 이 나라의 유토피아,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1. 양과 염소의 구별하신다

31-33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예수님은 구별하지 않으시는 것같지만 내양과 남의양과 구별하십니다. 그리고 옆에잇는 양과염소를 구별합니다. 그것은 마지막에 구별합니다. 일종의 상벌의 심판입니다. 영광으로 천사와 함께 오십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시고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현재 십자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십니다 . 그 다음에 재림하여 심판하십니다 . 예수님은 심판하실 때에 주인이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양같은 사람은 오른쪽에 두고 , 염소같은 사람은 왼쪽에 두십니다 . 양은 순하고 목자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 양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 제자들과 같은 자 들이 양같은 사람입니다.

양과 염소는 어떻게 다른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기 어렵듯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염소는 양과 비숫하지만 질적으로 다릅니다. 뿔과 수염이 있어 주인을 대적합니다. 염소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반항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목자로 영접하지 않고 비판하는 자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 들이 염소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2. 복받은 우편 양

34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

임금은 오른쪽에 앉은 양같은 사람들에게 복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 아브라함의 약속받은 아들입니다. 땅에서도 복을 받지만 그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친아들 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 들이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여 예수님과 같은 새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 우리가 받을 최고의 복입니다.

3, 천국가는 양의 본질 특질

35-36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신언서판이란 말이있지만 구별하기가 쉽지않다 어떤 자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상속자인가? 참제자인가? 천국들어갈자….

이들은 예수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 수님이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 헐벗을 때에 입을 옷을 주었습니다.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면회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지금없는데 누가 예수님인가? 아래에 40절보면 “ 지극히 작은자 하나 ” 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작은 자가 예수님이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옷에 갇힌 자의 모습으로 오신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지 않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집의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예수님과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아보고 잘 대해준 자들은 마지막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이유는 바로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는 사람을 잘 대해주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름으로 냉수한그릇도 잊지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창18장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들을 임신케되었습니다. 19장에 소돔의 사람들은 부지중에 천사를 악당으로 대접하였더니 불심판을 받았습니다.

(1) 자기의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

37-38.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의인들은 정작 자신들은 예수님을 대접한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칭찬을 하시니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음식을 대접하지 않았고 목마른 것을 마시게도 하지 않았고 나그네 된 것을 영접하지도 않았고 헐벗은 것을 옷입힌 적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겸손의 극치입니다. 아직도 은혜를 더 갚아야 하는데 더 해야하는데 늘 부끄럽고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갚을 줄 알아 이 벌레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주님의 종의 자세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고도 못했다고 느끼는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10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것을 다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

은혜를 깨닫고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손님을 풍성하게 대접하였는데 그 손님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한 후에 아들 이삭이 태어난다는 소식을 구체적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을 통하여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소식도 알게 되었습니다. 손님 대접을 통하여 조카 롯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롯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손님을 예수님처럼 대접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2) 지극히 작은 형제에대한 긍휼심을 가진자들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임금은 예수님을 대접한 적이 없다는 의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작은자 형제와 예수님을 동일시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연약하고 어린 자들 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배고프고 헐벗는 자들 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일하는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자 중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하나님처럼 잘 섬겨 드려야합니다. 이 마음은 이 모든 받은 복이 나의것이아니라 생명과 물질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사용하여야하는 청지기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나누기를 원하는 마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가난한자가 무조건 잘한다는 것이거나 받기만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로 태어나고 환란당하고 강도만나나자 병들고 실패한 자들이 하나님을 구하는 그런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입니다.

미국에서 은행에 다니던 청년이 있었다. 그는 1859년, 세계 최초로 석유갱이 발견되자, 친구인 록펠러와 함께 석유 회사를 세웠다. 사업은 기대이상으로 성공했고, 그는 벼락 부자가 되었다. 고향인 클리블랜드 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도시 곳곳에 누구나 공짜로 갈 수가 있는 학교와 병원과 교회 를 지었다. 게다가 완공된 건물을 시에 기증을 했다.

그의 이름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 이다. 그는 빈민과 고아를 돌보았던, 부모님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평생 자선 활동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1900년의 어느 날, 그는 뉴욕 카네기 홀에서 연설을 들었다. 연사는 조선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는 의사 에비슨 이었다.

“조선에 있는 병원들은, 병원이라 부를 수가 없을 만큼 빈약합니다. 간호사도 없이, 한 명의 의사가 모든 것을 운영합니다”.

그는 흔쾌히 많은 돈을 기부를 했고, 4년 후에 경성에 조선 최초의 종합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졌다.

왕부터 백성까지, 모두다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자선 병원이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주치의인 어빙 러들로도 조선으로 보냈다.

러들로는 26년 동안 외과 전문의로 활동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를 했다. 러들로가 입국한 이듬해, 세브란스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인해서,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그만 세상을 떠났다.

※ 세브란스의 주머니에서 발견한 낡은 수첩에는, 기부를 약속한 곳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필리핀 세부 여학교 . / 중국 체푸 병원 ./ 항주 유니언 여학교 . 태국 치앙마이 학교 등등.

세브란스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약속이 지켜질 수 있도록, 기금까지 마련해 두었으나, 정작 자신명의의 집은 한 채도 없었다.

그는 생전에 기부를 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받는 당신보다, 주는 내가 더 행복합니다”. – 옮긴 글입니다 –

////오르간 연주를 잘하고 신학교 교수였던 슈바이처는 헐벗은 흑인을 보고 아프리카에 원주민을 위해서 살고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의대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의대에 입학한 후에 슈바이처는 헬레네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선교를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여러 해를 고민하다가 헬레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사명 때문에 결혼을 받아주지 않아도 그는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헬레네는 왜 진작 얘기 하지 않았느냐 내가 간호사인데 나의 도움없이 아프리카에서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의사가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아프리카 원주민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4. 지옥에 가는 염소의 특질

41-43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45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예수님은 왼편에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마귀와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왜 이렇게 혹독하게 무자비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첫째는 – 완전히 못본척했다 완전히 문전박대했다 혹은 그들을 간접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문전 박대 누가복음에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호의호식 하면서 거지 나사로를 박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거지 나사로로 온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부자는 갈비를 뜯으면서도 자기 개에게는 갈비를 주어도 나사로에게 갈비 하나를 주지 않았습니다. 부자가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아서 개가 거지 나사로의 헌데를 핥아 돌보아 주었습니다. 거지는 천국에 갔는데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는 예수님을 박대하여 지옥에 간 것입니다. 쌓아놓고 나누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반대로 열심히 일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복음위해서 쓰려고하는 자의 받을 상급이 이런 사람이 진짜 예수님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을 떠서 지극히 작은 성도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아야합니다. 임금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박대한 것이 예수님을 박대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못 대하면 결국 지옥에 가게 됩니다.

둘째 : 자기의를 내세우며 조금하고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 아무것도 아니한 자들보다 100배가 낫는데도 말입니다. 아무것도 아니한 자도 있고 그 불우한 자들에게 감옥에 쳐넣고 강도처럼 뺏아간 사람도 있는데 그들처럼 그렇게 말할수있 있는지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아무리 억지로 형식적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렇치 해도 너무합니다. 이만큼 했으면 많이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도 전부 나를 인정해준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이런 행한 것을 다 기록하고 다 알고있다 증명해 준다고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꼭 같습니다.

주님은 이럴수록 아니라고합니다. 저들이 한 선행이라는 것이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니다.

예를 들면 마태 7장에(22)“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선지자..귀신을…권능을…그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기는 하지만 자기이름을 내려고한 금식도하고 구제도하고 했는데 다 자기이름을 내려고 한것이기 때문에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너희상을 받았느니라(마7장)

여러분 오늘의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주님께 향한 마음의 진실입니다.이것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 예배를 드릴 때도…..

* 기도를 드릴 때도

* 헌금을 드릴 때도….

* 구제를 할 때 남을 도울때도…..

* 교회에 일을 할 때도…..

큰 것 하는가 작은 것 하느냐? 이런 액수나 양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성을 보십니다.

결론 / 영벌과 영생을 결정하는 것

46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결국 예수님은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에 따라서 영벌과 영생에 나누어서 들여보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형제를 잘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형제자매를 사랑해야합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고 병이 든 사람을 사랑해야합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자를 도와 주어야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물질과 시간을 써서 도와 주어야합니다. 우리는 또한 주의 종을 주님처럼 대해야합니다. 그분들 안에 예수님이 성령으로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예수님처럼 대하면 우리 교회가 천국처럼 바뀔 것입니다.

원종수 박사는 서울의대에 들어가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첫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돈을 홀어머니에게 드리려고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에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렸을 때 거지 할아버지가 동냥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 그냥 무시하고 갔는데 계속하여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밟혔습니다 . 그래서 그 아르바이트한 돈을 다 할어버지에게 던져주고 엉엉 울었다고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새벽기도하러 갔을 때 에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 그 할아버지가 나였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원종수 박사의 어머니도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할어버지를 모셔다가 옷을 갈아입히고 시래기 죽을 쑤어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원박사와 어머니에게 나를 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옆에있는 분들에게 “당신은 나의 예수님이십니다” 여기는 예수님이 몇분이 있는가요?

우편의 양은 하나님의 편에 선자입니다.

1. 우편의 양은 목자만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입니다. 그러나 죄편염소는 불순종합니다.

2. 우편의 양은 순종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입니다.–소.양.비둘기,

3. 우편의 양은 겸손합니다.-자기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 바리새인과 차이

4. 우편의 양은 작은 일에 충성합니다. 보이지않는곳에서도 진실하게 충성합니다.

– 본문에 지극히 작은자(약자,) –음식, 옷, 감옥–사람이 안보아도

5. 우편의 양은 하고도 무익한 부족한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염소는 말이많고 억지로합니다.

5. 우편의 양은 성품이 온유합니다.-우쪽에 있는자는 약한것 같지만 강한자요 주님이 함께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닮은 자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이런 섬김의 사람들때문에 교회가 부흥됩니다. 이런 양들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들은 복있는 자들이요 하난미의 나라의 주인공이요 대접을 받을 존귀한 사람들이요, 천국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5장(3) 양과 염소 심판- 이응주 목사

마태복음 25장(3) 양과 염소 심판

양과 염소로 분별의 심판

(마 25;31-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31-34)

1. 염소와 양

염소(Goat)는 양과 같이 되새김질하는 포유동물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력이 뛰어나 일찍부터 사육되었으며(창 15:9), 그들의 고기와 우유 그리고 치즈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어린 염소들은 최고의 고기로 여겨졌으며(신 14:4; 삿 6:19), 그 가죽들은 물병 또는 술병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그들의 털은 노끈과 섬유로 엮어 쓰였다. 또 염소 머리털은 성막 덮개를 만드는 데 쓰였다(출 26:7). 염소들은 희생 제물로 쓰였으며 특히 속죄 제물로 합당하였다(레 1:10; 4:28).

팔레스타인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지만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는데, 이는 양들은 바깥을 좋아하는 데 비해 염소들은 따뜻한 곳에 있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염소는 때로 죄와 난폭함, 불순종을 상징하기도 했다(레 16:8-26; 마 25:31-46).

마지막 때의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천국에 대한 세 번째 비유이다(마 25:31-46). 이 비유는

(1)첫째, 심판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히 9:27).

(2)둘째, 심판 때에는 양과 염소로 구분이 되며, 중간 지대는 없다는 사실이다.

(3)셋째, 천국과 심판은 결국 현재의 삶의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봉사하고, 어떻게 섬기느냐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비유이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여기서 상속(Inheritance)이란 신분, 재산, 지위 등을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 상속(잠 19:14)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할라’(nachalah)는 기업(신 4:20), 유업(잠 17:2), 산업(잠 20:21)으로도 번역되었다. 구약에서 상속은 토지를 분배받는 일이나 재산을 물려받는 일을 의미하는 뜻으로 주로 쓰였다(잠 19:14).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말하는 의미로도 쓰였지만 성도가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의미로 본문에서 쓰여 졌다.

25장에서 첫 부분은 열 처녀 비유는 다음에 오게 될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고, 달란트 비유는 다음 무대를 위해 열심히 장사하는 자들처럼 왕국의 백성답게 부름에 합당하게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와서는 결산하는 장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른편 양들이 받는 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청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 된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것이었다.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다는 것은 왕이 자기 아들 왕자에게 왕위를 물러줄 때 쓰는 말이다.

2. 나그네 되었을 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7-39)

일반적으로 나그네(stranger)란 집을 떠나 여행길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를 나그네로 보았다(히 11:13; 벧전 2:11). 천국을 본향으로 삼는 사람은 이 땅에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삶의 길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의 자세를 견지했으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갔다(히 11:13-14).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칭함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신다고 하셨다(히 11:16). 나그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지낸 것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다(출 22:21; 23:9; 레 19:33-34; 신 10:19; 23:7).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나그네들을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쉬는 것(출 23:12), 공평한 재판을 받는 것(신 16:18), 추수 때 이삭과 열매를 남겨 두는 것(레 19:9-10),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의 소산을 주어 먹게 하는 것(신 26:12) 등을 나그네에게 행하라고 명하셨다. 선지자들도 나그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사 58:7; 겔 18:7).

심지어 나그네들도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었으며(출 12:43-44, 48) 이스라엘의 절기와 희생 제사, 율법에 관련된 조항들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출 12:49; 레 16:29; 17:8-9; 18:26; 민 15:29). 성경에는 아브라함(창 18:1-8)이나 롯(창 19:1-3), 욥(욥 31:32) 등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중요하게 가르치셨으며(마 25:35-40) 예수님의 제자들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강조하여 가르쳤다(롬 12:13; 갈 6:10; 딤전 6:18; 딛 1:8).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감독과 장로, 참 과부의 자격 요건 중 하나였다(딤전 3:3; 5:10; 딛 1:8).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권면하였다(벧전 1:17).

그리고 여기서 특징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만왕의 왕 그리스도) 한 것이란 뜻이고 ‘선을 행한 자나, 악한 자’는 자신들은 소자가 왕인 것을 모르고 살아온 것뿐이란 것이고, ‘작은 소자에게 행한 일’로 의인과 악인으로 신분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자에게 행한 일로 영벌과 영생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31)

이곳에 언급한 내용들은 연구 주제로 제시해 본다. 구약의 개념은 하나님을 섬심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신약에서의 구원은 사람을 섬겨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구역에서는 ‘신본주의’ 신앙을 요구한 것이고, 신약에서 예수님의 요구는 ‘인본주의’신앙에 대해 가르침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기존교회에서 신앙을 배워 온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만왕으로 오셨지만 짧은 생애동안 섬기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까지 지시고 인류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지금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초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본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려야 하는가? 왜 구약개념과 신약개념이 다른 것이라고 하는가? 그것을 먼저 이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는 객관적 관계였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섬겨서 구원은 받는 것이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는 주관적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섬기는 대상도 바꾸어져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멀리서 섬겼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예수님) 안에'(요 15;7) 있어서, 나와 하나님(예수)이 한 몸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섬기는 댕상도 달라진 것이다. 왜, 우리가 사람을 섬겨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예수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는 전(고전 6:19)으로서 교회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사람을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막 10;45), 우리 곁에 섬기는 자로 계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눅 22;27). 본문에서도 소자를 섬기는 자에게 구원이 약속되어 있고(46), 예수를 사랑하면 사람(양)을 치라, 먹이라고 한 것은 섬기라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요 21;15-17).

이러한 말씀들은 지금까지 전통 지식으로는 이해가 어려울지 몰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말씀들이 아니라, 재조명에 의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깊이 검토해야 할 주제라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니던 교회구조는 종교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의 자리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이 되어 왔지만 성경대로라면 그리스도는 몸으로서의 교회여야 하고, 몸으로서의 교회일 때는 섬김의 대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쉽게 이해 될 수 없기 때문에 연구 주제로 제시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구약개념의 형태에서 신앙을 배우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이해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야 한다. 아직도 전통지식에 머물러 있다면, 좀 더 포괄적으로 성경의 역사와 내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구약의 마지막 시대 때 400년 동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없어서 백상들이 방자한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광야에 세례 요한이 나타났고 또한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나타나신 것이 아닌가?

예수가 오신 것은 ‘성전을 헐고’ 새로운 몸으로 성전 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과 승천을 하시고,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엄청난 사건을 그동안 종교주의 자들에 의해서 신약의 사건들을 교리로 만들고, 실제적으로 신앙생활은 구약의 시스템을 도입해서 종교로서의 교회를 만들어 가르치고 유지해 온 것이 아닌가?

21세기에 교회개혁이란 화두가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은 결코 유연으로 넘기거나 모른 채 하고 지나칠 수 많은 없는 중요한 주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개혁의 대안으로 연구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관심을 가지고 함께 검토했으면 좋겠다.

3.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1)

위의 내용들이 진리로서 실현이 되려면, 지금의 구조로는 불가능 할 수밖에 없다. 말씀의 실현을 위해서는 부득이 형태변화가 와야 한다. ‘하늘 이 끝과 저 끝에서 모은 다’는 말씀을 교회당 형식에서 실현될 수는 없다. ‘모은다’는 말을 어느 공간에 ‘모은 것’으로 이해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지구촌 전체가 만왕의 왕 되시는 주님의 통치 영역이 되게 하신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7). 재림의 주로 오시는 왕은 공간도 시간도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부여된 마지막 사역으로 준비해야 할 일은 왕의 통치 영역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맡겨주신 달란트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양과 염소의 심판은 계시록 20;11-15절에 나타나 있는 소위 백 보좌 심판의 장면을 간략하게 미리 예언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영벌과 영생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0-46)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은 죄인들이 지옥에서 받게 되는 영원한 형벌을 말한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영벌에, 양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 25:46). 요한일서에서는 두려움에 형벌이 있으며, 사랑은 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다(요일 4:18). ‘영원한 불’(마 18:8; 25:41; 유 1:7), ‘영원한 죄’(막 3:29), ‘영원한 결박’(유 1:6), ‘영원한 멸망’(살후 1:9) 등은 모두 비슷한 개념들이다.

영생(Eternal life)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47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복음서에 만 31번 기록되어 있다. 영생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의 축약형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oe)와 ‘영원한’의 뜻을 가진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영생은 살아있는 것이 끝난 후의 단순한 시간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그 시작을 갖기 때문에(엡 1:4) 끝이 없는 지속이다. 그리고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생명과 질적으로 같다(요일 5:11-12). 따라서 우리의 영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예정하심과 선택하심에 있다 해도, 영생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참된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요 17:2-3; 갈 2:20) 얻는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영생은 성경에서 요한복음(3:15-16, 36; 4:14, 36; 5:24, 39; 6:27, 40, 47, 54, 68; 10:28; 12:25, 50; 17:2-3)과 요한일서(1:2; 2:25; 3:15; 5:11, 13, 20)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영생의 시작을, 요한복음 6장에서는 그것의 계속을, 요한일서 1:1-4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영생의 근원이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영생은 일상적인 육신 생활과 대조되어 나타나 있다. 물론 인간의 삶은 무한히 계속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적 생명은 가졌지만 영생을 갖지 못한 것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이며, 정죄된 상태, 잃어버린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생을 가진 사람들, 즉 구원받은 것으로 선언되고 멸망치 않을 것으로 약속된 사람들과 대조된다(요 3:15-16, 18, 36; 5:24; 10:9).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를 믿는 동시에 성령의 활동하심으로 부여받는다. 영생이란 중생과 동일시될 수 있으며 구원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이후에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을 갖고 있는 것뿐 아니라 현재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 시대에 영생을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생명이 육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멸하는 것이 아니고 더 영원한 생명에 의해 덧입힘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롬 5:21). 지상의 삶은 영생과 연결된 삶이다(요 5:24). 기독교인들의 삶은 따라서 죽음을 뚫고 부활의 세계를 향해 가는 종말적 출애굽의 삶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정착할 수 없고 세상의 행복에 안주할 수 없다. 다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충성스럽게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마태복음 25

열 처녀 비유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달란트 비유(눅 19:11-27)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1)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1)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1)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1)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1)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1)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1)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1)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1)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1)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1)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1)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1)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1)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1)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1)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1)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1)달란트를 빼앗아 열 1)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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