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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텔러 : 책 읽어 드림
‘로마서강해’ 중 ‘피조물의 고대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 책 정보
제 목 : 로마서 강해
저 자 : 마틴로이드 존스
번 역 : 서문강
출판사 : 기독교 문서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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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텔러 책읽어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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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9(양장본 HardCover)마틴 로이드 존스 – 교보문고

마틴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 제9권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저자가 1955년부터 1968년까지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신약성경 ‘로마서’에 대해 강해 설교한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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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8/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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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 다음블로그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7권(롬1장 하나님의 복음) 1장 서론, 로마서를 통해 … 교회 역사에서 성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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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6/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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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1권 – 마틴로이드존스 (요약본 / 과제용 / 강의안)

(King James version에는 두 단어로 표현).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이 두 단어는 사도가 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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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oibin.tistory.com

Date Published: 9/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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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 (1-14권) (반양장)

강해설교의 아버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최고의 명설교집! 로이드 존스 목사가 1955년에서 1968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설교했던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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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ll.duranno.com

Date Published: 4/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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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세트 – 전14권 (반양장) – 알라딘

로이드 존스 목사가 1955년에서 1968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설교했던 것을 성경 강해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출판되자 곧 20세기의 기독교 고전(古典)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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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3/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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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1 – 14 – 마틴로이드존스 – Google Books

로마서 강해: 1 – 14. Front Cover. 마틴로이드존스. Clc(기독교문서선교회), Aug 31, 2017 – 421 pages. 0 Reviews. Reviews aren’t verified, but Google checks f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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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ooks.google.com

Date Published: 12/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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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존스 ‘로마서 강해’ 완간 – 기독신문

마틴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 제1권이 우리말로 옮겨져 나온 것은 1976년 11월. 옮긴이는 당시 총신 신대원 3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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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4/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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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세트 | YES24 블로그 – 내 삶의 쉼표

20세기 최고의 교리 설교,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본서는 로이드 존스 목사가 1955년에서 1968년까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설교했던 것을 성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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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yes24.com

Date Published: 7/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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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9(양장본 HardCover)

상품상세정보 ISBN 9788934109693 ( 8934109696 ) 쪽수 443쪽 크기 153 * 224 mm 판형알림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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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 제9권 . 저자가 1955년부터 1968년까지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신약성경 ‘로마서’에 대해 강해 설교한 내용을 엮은 기독교의 고전이다. 조감적인 눈과 현미경적인 통찰로 ‘로마서’의 흐름을 붙잡아 어휘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밝혀낸다.

제9권 은 ‘로마서’ 9장에 대한 강해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명료하게 다룬다. 양장본.

목차

– 저자 서문

제1장 새로운 대목의 목표

제2장 고뇌에 대한 엄숙한 표현

제3장 주지주의(主知主義)의 위험

제4장 하나님께 대한 유대인의 관계

제5장 언약에 대한 성경의 개념

제6장 예배의 참된 방식

제7장 만물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제8장 바울은 반론을 다루기 시작함

제9장 하나님의 자녀들

제10장 선택의 원리

제11장 택하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제12장 위대한 강론자들의 증거

제13장 요한 웨슬리의 논거

제14장 하나님께서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방법

제15장 토기장의와 진흙

제16장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의 무모함

제17장 진노의 능력을 나타내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제18장 부요의 척도인 은혜

제19장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제20장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것이 예언됨

제21장 하나님의 선고

제22장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제23장 하나님의 정하심과 부르심

제24장 그리스도의 죽음이 계획되고 예언됨

제25장 교회를 위한 교훈들

마틴로이드존스 (요약본 / 과제용 /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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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1권

1권, 속죄와 칭의(3:20-4:25)

머리말

이 강해집의 시리즈는 3장20절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필자가 로마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단숨에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의와 사죄의 위대한 교리의 고찰로 직접 옮아갈 수 있기 위해 처음 두 장 반의 논점을 요약하였다.

설교 형식을 취한 강해들은 강의도 아니고 주석도 아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간단한 성경 주석과 성경 연구서들이 많다. 그래서 지금 가장 큰 요구는 강해식의 강도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강해식 강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부흥시대나 복음운동이 일어났을 때 행해졌던 방식이다. 성경과 그 메시지의 위대함과 영광, 그리고 성경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기 위해 이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방식은 많은 반복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진리의 다양한 국면들로 너무나 감동 받았기 때문에 반복하여 진술하였다. 사도 바울도 자주 반복하며 말하고 있다. 아덴 사람들(행17:21)처럼 “아 나는 그것을 압니다”라고 말하며 인내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에 많이 있다.

필자의 소원은 이 책과 다음에 나올 책들이 성도들에게 신앙의 위대한 중심 원리를 명백히 이해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가득찬 영광으로 충만해지며 ‘감격과 사랑’ 그리고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바이다.

제1장 서론적 기초

(롬3:19-20)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기독교 역사와 기독교회의 가장 주목할 만한 지도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로마서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없다. 성 어거스틴의 개종은 로마서 13장 마지막 몇 절을 읽음으로 되어진 것이다. 마틴 루터는 1:17의 참된 의미가 깨달아짐으로 종교개혁자가 된 것이다. 존 번연의 개종도 루터의 교리로 되었으며 요한 웨슬레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진’ 것도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고 있을 때였다.

로마서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이 점은 성경 전체의 총괄적인 주제이다.(1:16,17).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에 관해 로마서에서 명백하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교리는 사람들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화해의 길을 하나님이 친히 예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오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의 행하심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은혜로 용서하시며 도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에게 이식된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기에 열납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존전에서 의로운 백성으로 “세움”(5:19)을 받은 것이다. 만일 당신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는 교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동의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교회의 가르침에 동조하지 않는다기보다 성경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칭의에 관한 메시지는 성경의 처음서부터 끝까지 발견된다. 3:3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것은 실로 성경 전체의 줄기찬 메시지이다.

바울은 3:21의 “이제는”이란 말로 다음이 연결되는 영광스런 사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표현하며 복음을 매우 자랑함을 강조한다. 그는 황제든 노예든 어느 누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롬1:14).

그가 복음을 자랑하는 것은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자를 위한 것이며 모든 자에게 해당된다(1:17).

복음만이 인간의 이중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첫째 문제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둘째 문제는 인간이 실제적으로 불경건하고 불의한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 두 가지 문제를 표현한 순서에 강조점을 살펴 보자.

인간의 첫 번째 필요는 하나님을 알며 발견하는 것이다. 불경건은 불의보다는 우선한다. 왜냐하면 불의는 불경건의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대 세계의 비극이다. 세계는 병의 증상들만을 약으로 치료하고 있으며 질병의 원인은 잊고 있다. 세상은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등 모든 영역에서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물음에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핳라 하신 것이라”고 대답하셨고, 둘째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막12:28-31). 참으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한 참 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바울이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제일 큰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이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전도할 때 예수를 친구로서 육신의 치료자, 한 조각의 평안을 주는 자로 소개해서는 안된다. 그는 구세주이시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임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견해를 혐오하고 싫어하며 또한 공의와 의의 사상, 그리고 심판 받는다는 사상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이 점을 설파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 메시지 중에 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왜냐하면 내가 거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죄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실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진실로 교회가 이 점을 잊어버리고 방황하는 것은 비극적인 상황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예수”로 시작하고 “예수”로 끝난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의와 절대적인 거룩함 가운데서 계시는 하나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내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하지 않는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아빠” “우리 아빠”로 부르며 기도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 분이시다. 주님은 친히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은 “거룩하신 아버지”였다.

복음이 제 1차적으로 우리들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어떠한 것을 행해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완전하게 창조된 사람을 두셨으나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배반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그들을 내쫓으시며 그 대가로 받을 결과를 말씀하셨다. 모세는 불순종함으로 약속된 땅에 들어갈 허락을 받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만일 죄를 범하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대가와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경로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1:24-27). 그리고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무서운 죄목을 열거한다. 백성들이 하나님 음성을 듣기 싫어하고 그의 율법을 거역하며 하나님 없이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장담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신다. 처음에는 사신을 보내어 깨닫게 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악한 길을 고수하며 반역을 계속하면 “그들을 멋대로 내버려 두어” 간섭지 않으실 때가 오는 것이다. 그런 다음 하나님 없는 인간의 종말을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할 것은 “불경건”과 “불의”의 순서, 즉 불경건이 불의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이 점을 망각하지 말자.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좋아한다. 그들은 피조물인 인간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을 “영원히 찬송받으실 조물주보다 더”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이방인들이 받을 궁극적인 저주를 명백히 한다(1: 2:4). 그러므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사회적인 개혁을 단행했든지, 얼마나 많이 불의와 악한 것들을 완화시켰든 간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난 그의 어리석음을 회개케 하거나 깨닫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무익한 것이다.

– 이제 유대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것이 2장의 주요 주제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또한 할례의 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2:25에서 바울은 그런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심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로서다”. 바울은 자기의 할례를 의지하는 모든 유대인의 사례를 뒤엎었다. 국적이나 어떤 인간적인 연관성에 의지하는 모든 것은 할례에 관한 이 역설에 의하여 완전히 배제된다.

율법에 관하여 2;13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2:17, “보라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의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 스스로 믿으니” 라고 지적한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것은 또한 비기독교인 중 자기들의 도덕성을 의지하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말해 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을 반대하며 조롱한다.

유대인들 특히 유대 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로 그들은 스스로를 율법에 대해 전문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율법에 무지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둘째로 그들은 율법 조문의 다수와 율법의 주요 부분을 지키는 이상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율법의 99%를 지키고 1%를 지키지 못했다면 율법을 어긴 것이며 또한 율법을 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약2:10).

그들이 더 심각한 것은 의문에는 전문가였고 정확하였지만 영에는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예리하게 지적하셨다. 의문과 영은 차이가 있다. 만일 영 안에서 범죄했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간음하는 죄를 지은 것이며 살인한 것이다. 탐심의 문제는 7장에서 길게 취급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탐심의 의미를 깨달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죄행을 범하지 않는 한 무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님께서 탐심이란 범행만큼 못된 일이며 정욕이란 겉으로 나타난 행위만큼 몹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 3장 초두에서 바울은 그럼 유대인에게는 어떠한 이익도 없으며 할례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아, 그렇지 않다. 범사에 많으니 그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특수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방인들에 반해 완전히 드러난 율법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율법을 인식한다. 율법을 아는 것은 모든 인종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유익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나타내 주셨으며 금상첨화격으로 그것을 기록된 형식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3:20까지의 나머지 부분은 유대인의 본래적인 부패 때문에 그 유익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3:19-20 안에 있는 요약과 굉장한 결론에 이르게 되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의 핵심적인 서두를 접하게 된다. 바울은 1:16에서 시작한 말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마음 안에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밖으로 나타났다는 사실 그것 뿐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뜻하는 참다운 목적은 “모든 입을 막게 하기 위함”이란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당신의 입이 닫혀져 함봉되고 할 말이 없어지기 전에는 아직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주장을 내걸고 당신의 모든 의를 내보이면 율법은 그 모든 것을 쓸모없는 지푸라기이며 ‘더러운 넝마’와 ‘분토’라고 말한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죄 안에 있는 인간이 그것을 지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지식’을 주기 위함이다. 죄의 가공할 성격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율법이 온 것은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 많게’ 하려 함이다.(7:5). 그러면 율법이 죄냐(7:7)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율법의 전 기능은 정죄하며 죄의 본성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핑계도 할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의 또다른 기능이 있다.(7:13) 사람 안에 있는 죄가 어느 정도 깊은고 하니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하나님의 율법마저도 그를 더욱 악하게 만들어 그로 인하여 죄짓도록 충동질하며 결국 율법은 죽음의 방편으로 변하게 할 정도로 깊다는 것이다. 율법이 행한 만큼 죄의 넘치는 악성을 보여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전적인 무능력적인 절망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고 구속하며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키며, 영원토록 안전을 보장하는 오직 유일한 분이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며 율법으로는 죄의 죄됨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포하는 복음을 바울은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2장 위대한 전환점 “이제는”

(롬3:21-31)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1:16~17 복음에 대한 진술

1:18~3:20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

3:20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 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는 말로 끝맺음.

– 바울은 그 점을 못박아 놓고서 이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는(But now)’ 이란 두 마디 말보다 성경 전체에 나타난 말 중에서 도 놀라운 말이 없다.(King James version에는 두 단어로 표현).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 이 두 단어는 사도가 복음을 소개할 때마다 함께 사용한 말이다. 청교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비교적 최근까지 진정한 복음 전도는 반드시 ‘율법의 작용(a law work)’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언제나 죄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시작했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의 모든 것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바울의 말을 이해했고 죄 아래 빠진 인간에 관해 표현한 모든 진술을 신중히 숙고했으며 또한 우리의 본성적인 자아나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자아를 파악했다면 “이제는”이라는 말보다도 우리에게 더 복되고 놀라운 말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 말은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확실히 아는 시금석 중의 하나이다. “이제는” 이란 말이 여러분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이 있는가? 여러분의 체험 가운데 “이제는” 이라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가?

당신에게 마귀가 와서 대들면서 “네 마음 속에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나 행하고 있는 것, 전에 행한 것들을 보니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비난하며 당신을 저주할 때, 당신은 마귀에게 무어라고 대꾸하는가? 옳다고 끄덕이는가? 아니면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율법의 저주와 양심의 가책 그 외에 우리를 짓누르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대처하는 신앙의 답변 태도이다.

어떤 면에서는 신앙이란 진실로 일종의 저항(protest)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대적하는 모든 말을 듣고도 또한 가장 가혹한 환경 가운데서라도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 사탄의 공략이나 의심의 공격을 받지 아니할 거라고는 상상치 마시기 바란다. 믿음의 모든 비결은 그 모든 것을 대항하여 이 두 마디로 대처하여 일어서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브라우닝, “나에게 있어서 믿음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신앙을 잠잠헤 하는 방편이다.”

그의 말은 마치 미가엘 천사가 뱀의 머리를 발로 누르고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믿음은 우리를 대적하는 세상과 지옥에서 나오는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굳건히 서게 하는 지주이다. 믿음으로 서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낼 수 없고 한가닥의 소망도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확실하다면 “그러나 이제는”이란 말을 기뻐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바울은 “이제

막 끝낸 이 사건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생애와 죽음 부활 승천 등 모든 사건들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며 죄에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기쁜 소식이다(1:16,17). 자기 존재의 참 모습을 지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을 생각할 수 없다.

– 이 경탄스러운 기쁜 소식이 무엇인가?

:21-24 구원의 길

첫째, 하나님께서는 의를 준비하셨는데 이제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전에는 약속하셨고 이제는 확증시켰고 제시해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율법이 행위나 율법을 따른 결과가 아니고 단지 전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길은 모든 자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넷째,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하며 유효하다는 것이다.

:25~31 이 위대한 구속의 특징

첫째, 이 구속의 길이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는 것이다(:25~26).

둘째, 이 길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길이라는 것이다(27~28).

셋째, 이 길이 하나님이 모든 세상과 모든 족속의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주는 길이라는 것이다(:29~30)

넷째, 그 길이 율법을 영예롭게 하고 굳게 세우는 방법이라는 것이다(:31).

구속에 대한 우리의 사상이 반드시 이 부분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과 이 부분을 시금석으로 해서 우리의 사상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논리인 것이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오게 하려고 너무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같아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결과를 얻기 위해 너무나 과민돼 있다. 우리는 우리의 메시지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하나님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진술이며 또한 그 진술은 우리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 것도 그냥 흘려 버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가감해서 말해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에 대한 이 진술 그대로를 말해야 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으며 그들은 신학에는 관심이 없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인 되려 한다면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진리를 듣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처리하시기까지는 그들을 절대 신학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그것을 깨닫게 하실 것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진리를 심어 주실 것을 믿으며 그들에게 설파하는 것이다.

– 진리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체계를 꼭 가져야 한다. 바울은 그의 마음에 떠오른대로 말하지 않고 하나의 경우(case)를 설정하고 그 다음에 복음을 천명하고 복음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핵심점은

첫째로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에 의해 제공된 의,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의, 하나님에 의해 유효하게 된 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복음적인 열심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무시하고 제2격위인 아들에게 얼마나 많이 봉헌하고 있는가? 복음에 대한 모든 것은 제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죄가 결국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죄의 진짜 문제는 죄가 하나님과 틀어지게 하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우린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이고 구원은 하나님께 대한 화해이다.

둘째로, 구원의 길을 제공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하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보내셨고 그에게 그의 사역을 부여하셨던 것이다. 베드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의 모든 목적과 의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데 있다고 했다(벧전3:18).

셋째, 그것이 창세 전의 영원전부터 계획되었다는 것이다(3;20). 복음은 율법이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그제야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율법과 선지서 가운데 복음이 있다.

창 3:15 원복음

창 17: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에 대한 예표이 다.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친 것, 그의 후손을 인하여 온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 레위기에서 번제와 희생제물 소제와 화목제 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 자이며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행하셨다.

시 22: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묘사이다.

사 7: 9: 11: 40: 엘 9:

눅 24: 주님께서 시편과 선지서를 통하여 자신과 관계 있음을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신구약을 함께 연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거스틴, “복음은 구약에 감추어 있고 신약에 나타나 있다”. 만일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구약에 복음이 있다는 것을 안다. 신약은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실제적으로 실현된 완성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다주는 몽학선생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한가지로 우리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며 주님이 오실 것을 예표해 준다. 율법은 죄를 선포하여 구원의 길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행한 모든 일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제3장 사죄보다 더한 것

(롬3:21-31)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바울 사도는 이 구속이 이제야 나타났다는 사실을 감격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전에는 그림자만 비추었지만 이제는 열려졌고 완벽하게 나타났다. 우리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어떤 일이 최근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전환점이 정말 일어났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심이었다. 그로 인해서 우리들은 새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옛시대는 가고 새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철학이 아니요 단순히 하나의 교훈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단순히 교훈이지만 우리의 신앙에는 교훈에 앞서서 역사적인 사건과 사실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생애와 죽음 부활 승천이라는 역사적 사건들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속에서 그것을 행하셨던 것이다. 독일의 불트만의 교훈은 복음의 ‘비신화화’에 대한 필요성을 말한다. 이런 교훈은 “이제는”이라는 말과는 상충되며 신약의 전체적 가르침과도 배치된다(고전15:)

주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 구원의 길을 위해서 오신 것이다. 바울은 3장을 통해 계속 이 점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적극적인 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열심을 다하여 도달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성과 철학으로 그것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가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 그 자체로는 하늘에 들어가는 들어갈 허락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들어갈 허락을 얻을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는 필연코 의로 옷입어야 하는 것이다(마22:1-14).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 위대한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주님의 의로 우리를 옷입히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의는 이제 유효한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행하시고 다시 아버지께 가심으로 그 일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어떻게 이 의가 우리의 것이 될까? 어떻게 내가 그 의를 받을 수 있을까?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다”. 사도는 한 의를 강조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은 무의미하게 되었고 중요성도 상실하게 되었고 율법은 더 이상 쓸모 없으며 떠나가 버린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3:31을 읽은 사람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율법은 변동이 없다. 바울은 지금 누구도 자신을 구원하겠다는 발견이나 성취하겠다는 생각일랑 더 이상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이 길은 율법을 완전히 만족시키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서 의롭다 할 육체가 없기 때문이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아직도 건재하며 아직도 심판의 방편이다. 바울이 역설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는 더 이상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리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것은 :22에서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그를 신뢰함으로 말미암아”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는 진리에 대한 앎, 진리에 대한 동조, 진리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신앙은 단순히 진리의 지적인 앎이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인정이 아닌 것이다. 지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은 없을 수 있다. 신앙이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행하신 일만 바라보는 것이다. 오직 그는 그것에만 의지한다. 믿는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죄의 생활을 살아왔다. 나는 신성모독자였다. 그리고 행악자였고 비열한 사람이었다. 내가 범하지 않는 죄란 거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내 자신의 의로써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의를 나의 것으로 간주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위대한 영성의 표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믿음에 대한 부정이며 확신을 가지지 못한 증거이다. 레위기에서 제사장들이 그들의 죄를 위해 희생될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의 죄를 대신 희생될 동물에게 전가시켰다. 당신의 죄들은 들추어 내어 살펴보라 그리고 인식하라. 부끄럽게 여기라. 더 나아가서 “나는 그것들을 주께 맡긴다”고 하라.

주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수는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 율법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자신을 바라봄으로 인하여 마귀에게 구원의 기쁨을 강탈 당하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우리로서는 절대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한다고 하면 당신의 믿음은 공로가 되는 것이며 자랑할 거리를 갖게 된다. 당신은 스스로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통해서) 구원 얻는 것이다. 믿음이란 단지 도구일 뿐이지 내가 의롭다 함을 얻는 원인은 아닌 것이다. 내가 의롭다 함을 받는 원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이다. 나는 거기에다 아무것도 심지어 나의 믿음까지도 첨가해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만이 자리할 뿐이다. 3: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자랑할 것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가 나의 것으로 되는 데 있어서 통로에 불과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전1:3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24)

–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이 구속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바울은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류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① ‘표적을 잃어 버리는 것’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것’ ② ‘범법’ ③ ‘바르지 못함’ ④ ‘위반’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을 따라 가는 것을 말한다. ⑤ ‘사악’ ⑥ ‘계명을 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우리 모두가 그 모든 것을 범했다는 것이다(3:10).

바울은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고”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결핍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탕자의 비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리고 기뻐하라는 뜻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영광에 대해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시는 자요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영광이 열려 나타냄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고 그것을 기뻐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전부이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그것에 대해 알 뿐만 아니라 그것을 또한 함께 누리고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영광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일정하게 우리 가운데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의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내 안에 새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영광스럽다. 내 안에 있는 새 사람은 계속해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육신마저도 영화롭게 되는 더욱더 경탄스런 날이 올 것이다(빌3:21).

죄란 얼마나 가공할 일인가? 죄는 우리에게 의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박탈해 가는 것이다. 구속이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 그것은 나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의까지 주는 것이다. 또한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전에 어떠하였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완전히 행하신 일을 믿으면 우리는 그의 의로 옷 입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이식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벧후1:4)가 되는 것이다.

제4장 오직 값없는 은혜로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구속 방법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개요를 계속 말하고 있다. 그 말씀은 요한복음 3:16과 족히 비교될 수 있는 진술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한 하나의 완벽한 요지이다. 이 구절의 진술은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속이란 무엇인가? 둘째 구속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 셋째 하나님께서 그러한 구속을 우리를 위해 주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가?

첫째, 구원이란 ‘의롭다 함을 얻는 것’ 즉 우리가 의인으로 판단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며 의롭다고 선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는 우리들 안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함에서 오는 열매가 아니고 ‘우리들을 위해 행해진’ 어떤 것이다. 믿음을 가지는 이 순간 우리의 것이 된다. 이 말씀은 진정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5:1에 바울은 “의롭다 하심은 얻었은 즉”라는 말을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루터는 카톨릭 신자로 현세에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러나 큰 빛이 루터에게 비침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즉각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둘째, 이 구원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값없이와 은혜”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구원이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온 선물이다. 우리는 전혀 그것을 받을 만한 어떤 자격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분명히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이다(:21). 율법은 우리가 응해야 할 요구를 제시한다. 그러나 구원에는 그와 같은 것이 없다.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준 과분한 총애나 자비를 의미한다. 구원은 단순히 값없는 선물 만이 아니고 그와 정반대 되는 것(진노)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신 값없는 선물이다.

이 위대한 은혜의 교리를 이해하는 가장 휼륭한 지름길은 율법과 대조시켜 보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요1:17). 율법은 주로 죄를 통제하며 또한 그것은 우리 죄됨을 나타내기만 하고 그것을 없앨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에는 값없는 또는 은혜로운 일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21) 율법이 줄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과 은혜는 정반대이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 가운데 있는 위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전했으며 불순종했고 반역했으며 죄를 지었던 것이다. 우리를 그와 화해시킨 것은 그의 은혜이다. 이것은 분명하고 명백하게 구원에 대한 유일한 방편인 것이다.

셋째 무엇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 말은 가장 중대한 말이다. 창조사역에서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면 되었다. 그러나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구원의 길을 발표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닦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말미암아(through)”. “구속(redemption)”은 ‘속전을 지불하고 해방하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하여 인도하여 내기 위해서 오셨고 또한 그는 값을 지불하셨다. 그런고로 우리가 마귀로 인하여 포로로 갇혀 있던 모든 감옥은 열리고 노예였던 우리는 자유롭게 된 것이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21 “그러나 이제는(but now)”-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모든 분기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해방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값을 지불한 것은 그가 실제적으로 오셔서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신 일들 때문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그의 못박힘- 안에서 일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죄와 정죄감과 죄의 노예인 것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또한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해놓으신 일을 알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화목과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며 열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빌3:3, 고전1:30,31)

제5장 화목제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함을 받으며 더 나아가 그것이 왜 이런 식으로 일어나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21절에서 31절까지의 말씀은 기독교 교리와 구원의 방도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25절 말씀이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말씀으로 많은 논쟁과 다툼을 일으켜 왔다.

이 말씀의 진술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공공연하게 세웠으며 계시하였다고 묘사한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화목제물’과 ‘피’를 의미한다. 바울이 25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혔다는 것이다.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화목제물을 속죄소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속죄소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언약의 돌판을 넣은 법궤 윗면의 금판이었다. 대제사장이 들어가 피를 뿌릴 때 하나님께서는 흡족하심을 천명하시고 백성들은 죄사함을 얻었다는 것을 천명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기를 25절에서 가르치는 바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새로운 속죄소이며 거기에서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를 만나시고 계명은 높임을 받았고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소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25절의 이 말은 화목제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가 속죄소로 언급된 곳은 성경 전체를 통해 한곳도 없다. 그러나 화목제물이나 속죄물 등으로 언급된 곳은 여러 곳에 있다. 화목제물의 피는 화목되는 장소 즉 속죄소에 뿌려진다.

– 또 어떤 사람들은 ‘화목제물’이 아닌 ‘속죄제물’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두 가지 이유는 첫째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70인역에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그런 뜻으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는 어떠한 진노가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사람이 나쁜 일을 저지르면 고통받게 되어 있으며 악한 것을 향하면 반드시 일어나는 자연법칙이며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만 필요한 것은 사람의 눈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사실에 열려져야 하고 하나님 편에서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교리이다. 현대 교사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 사상은 580회나 나타나 있다. 신약에서도 요3:36, 마25:, 행17:31,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로마서에서 10번 언급, 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악한 모든 것에 대한 그분의 변함없는 대적하심과 그의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죄란 인간 존재의 상황이며 영혼의 상황이다. 인격과 죄를 분리시킬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실 때는 인격도 처리하셔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은 죄와 죄인을 적대시한다고 가르친다.

죄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죄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들어와(사59:1-12)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파괴한다. 어떤 사람들은 ‘속죄’란 선에대한 필연적 귀결이라고 하며 그들은 진노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의 죄는 반드시 말소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행하심으로 인간의 죄는 말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목제물을 말하는 데는 그것과 전혀 다르다. 죄가 존재하는 동안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그 점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성경적 원리가 말하는 바이다(요일2:1-2). 사람들은 속죄제물이라 하든지 화목제물이라 하든지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가를 정말 알기 원한다면 화목제물에 대한 견해를 취해야 한다. 화목에 대한 개념은 속죄의 개념보다 더 크고 깊은 것이다.

–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그것을 행하고 있는 이는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를 바꾸신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마련하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의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의 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을 제시한 이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화목과 속죄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화목이란 누군가가 공격을 당했고 누군가는 손해를 끼쳤으며, 상해가 있었으며, 양편에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는 관념을 전달해 준다. 이 위대하고 영광스런 교리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해를 끼친 바로 그 하나님께서 범죄자를 해결하여 주실 길을 제공하셨고 죄인을 향한 진노는 풀어졌고 그럼으로써 사람을 그 자신에게 화해시킬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죄있는 사람이나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이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복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성경 가운데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빼버린다면 거기에는 아주 작은 성경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 가르침을 반대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적인 계시를 헬라 철학으로 대치시킨 것이다. 헬라 철학자들의 신은 감정이 없어서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일어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감동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죄나 죄인에 대해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노도 없고 화목제물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성경적인 하나님 개념 대신 헬라 철학적인 하나님 개념을 가지고 출발한다면 진노의 사상을 밖으로 내던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성경일 수 없으며 또한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내가 성경에 복종하고 성경의 계시를 인정하든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로는 — 이렇다”라고 말하든지 양단간의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1840년경 이후 계시 진리에 우선하여 철학을 놓고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내시기를 그렇게 기뻐하셨던 것 앞에다 철학 사상을 갖다 놓았기 때문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그것은 모든 영역 즉 모든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사건인 갈보리 언덕 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사건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제6장 예수 그리스도의 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바울의 근본 선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그분을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우리를 속량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셨는가? 그것은 ‘그의 피’로 라는 말이다. 이것은 신약을 일관하는 진술이다. 행28:8, 롬5:9, 엡1:7, 엡1:13, 히9:12, 히10:19, 벧전1:19, 계1:5.

왜 성경에서는 단순히 죽음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 특별히 ‘그의 피’라고 말하는가? 신약에 있는 모든 것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피’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약 교리는 언제나 구약적인 희생을 나타내는 언어로 쓰여졌고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신약은 언제나 이 교리를 구약의 희생에서의 교훈의 차원에서 표현한다.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약의 시작이다. 주님은 구약 레위기의 가르침 가운데서 예시되고 암시되고 예표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셨다(마5:17,18). 주님은 모든 모형들이 바라고 또한 예표하고 있었던 위대한 원형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첫 번째 ‘피’란 말을 좋아하지 않고 모욕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유대주의에 불과할 뿐이며 이교 사상과 밀접히 관련된 부족신을 말하는 구약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현현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한다.

두 번째 집단은 피는 생명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헌신의 최종적인 행위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피’는 생명을 대신하지 죽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바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회피하기 위해 그 짓을 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근본 사상과 형벌 의식을 싫어하고 그렇게 해서 화목제물의 필요성을 싫어하기 때문에 이 말들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성경에서 ‘피’란 말이 “죽음으로 끝난 생명”을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생명과 몸을 밀접하고 또 필수적인 것으로 피는 언제나 생명이 쏟아 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피’란 ‘희생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동물의 희생 죽음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화목을 얻는 것은 속죄로 말미암아서이다. 죄가 도말되고 씻어지면 이제 화목된 하나님께로 가게 되는 것이다.

셋째, 가해자에 의해 또한 가해자를 위해 대체된 희생물에 대한 여러 가지 심판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해자인 죄인은 동물의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그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켜 짐승을 도살하는 것이다.

넷째, 희생 제사의 효력은 범죄자에 대한 용서와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이다. 이상의 원리들은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4대 원리이다. 단순히 동물이 죽임을 당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피가 흘려져야 한다. 이 점이 희생 제사 제도가 제 기능을 발휘하는 방식이다.

왜 이 모든 것이 필요하는가? 히 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죽음을 떠나서는 죄가 처리될 수 없다. 피흘림을 떠난 죄사함은 없는 것이다. 이 성경적 교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언급하고 있다. 인간이 타락했을 때부터 구약시대를 통해 내려오고 주님께서도 자신이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그분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거기엔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음의 모든 영원성과 경이로움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는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시작하는 것은 실로 여기서부터이다. 나와 여러분에게 임해야 할 심판이 우리의 죄성과 죄악으로 인해서 그분에게 임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에서 아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은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분은 그가 담당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아야 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히9:12,14에서 그는 단번에 그리고 동시에 희생 제물과 대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의 피를 가지고 제사를 드리셨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피를 가지고 “가장 거룩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의 죽으심은 충분하셨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전부 쑫은 바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와 율법은 완전하게 충족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된 것이다(히10:9). 그와 함께 빛 가운데서 행하면 그의 피가 모든 죄와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항상 죄짓고 부정하게 되어도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항상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모든 것을 안전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피’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새 언약에 속한 피조물이다. 그 증서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날인되었다(히9:). 우리가 성찬식에서 함께 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새 언약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새 언약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재음미하게 한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 피로 가리움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가 새 언약에 속하고 그리스도의 뜻과 그가 우리에게 남겨 주신 일, 그리고 우리의 부요한 기업의 모든 영광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피로 인하여 그것이 전부라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는 결코 그의 생명으로 제사 드린 것이 아니고 그의 생명은 죽음으로 바쳐졌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신” 그분을 믿는 사람들 모두-오직 그들만의- 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하나님의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치는 것이다.

제7장 하나님의 자기 변호

(롬3:25-26)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기독교회의 역사는 이 두 절 말씀이 성경이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해 내는 방편이었고 불쌍한 한 죄인에게 구원의 지식과 구원의 확신을 최초로 주실 때 사용하셨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바울은 복음을 말한다. 지금 구원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과 별도의 것이며 우리가 율법을 준수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저 주신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속하셨고 ‘화목제물’과 ‘피’로 대속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얻은 구속이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른다. 바울은 좀더 나아가서 어떤 다른 것을 말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세우셨다”는 말은 “확증하셨다” “명백히 했다”는 뜻이다. 거기에 “그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무엇이 하나님을 그렇게 행하시도록 하였으며 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행하셨을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를 천명하시는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21)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런 속성 가운데 하나인 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당성과 고유한 하나님의 도덕적이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의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죄를 간과하심을 이유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신약 전체에 사면이라는 말을 여기에만 사용하였다. 사죄라고 된 말은 신약에서 17번이나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사면’보다는 오히려 ‘간과(불문에 부침)’라는 뜻이고 바울이 의도적으로 택한 중요한 단어이다. ‘간과’는 ‘지나치다’ ‘눈감아 버리다’ ‘고려하지 않다’, ‘고의적으로 눈감아 버린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울이 ‘지나침’(유월)의 사상을 전해줄 목적으로 썼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면’과 ‘간과’의 차이는 ‘용서’와 ‘심판하지 않음’의 차이인 것이다. 용서한다면 확실히 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간과’ ‘지나침’ 등의 용어는 사면에 미치지 못한다.

‘지난(전에 지은)’은 ‘이전에 지었던 죄’라고 해야 할 것이고 바울은 아주 한정적인 시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 구절 ‘이때에’라는 것과 대조되는 시간이다. 전자는 ‘그때’요 후자는 ‘이때’이다. 그는 그때, 옛 시대, 즉 하나님께서 옛 시대에서의 죄, 옛 언약 아래서의 죄, 구약 시대에서의 죄를 간과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때에 행한 어떤 일에 대해 무엇인가를 행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세우셨다는 것이다.

‘길이 참으심’이라는 말은 ‘자제’ ‘관용하심’ ‘관용’을 의미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갈보리 언덕에 벌려 놓으신 이 공적 행위는 구약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그 시대에 하나님은 자제하심과 관용하심 속에서 그때 사람들의 죄를 간과하시고 눈감아 주시고 지나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표시를 보이셨고 그 목적은 주님을 발견케 함인 것이다. 이 25절의 구절에 대한 진정한 주석은 히9:15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과 옛 언약 아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린 희생 제물에 관해 명백히 알 것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옛 제도 아래서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죄를 처리할 방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그것은 단지 죄를 간과하고 덮어두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같은 옛 제사와 희생 제물들은 일종의 육체적인 정결을 위한 것들이었고 하나의 의식적인 결례였으며 그것들은 백성들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도움을 줄 뿐이었다. 구약 아래서는 참으로 죄를 처리할 수 있는 희생 제사는 없었던 것이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장차 오실 이 희생(그리스도의)을 예표하고 있었던 것 뿐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도들은 사죄받지 못했단 말이냐? 그들은 분명히 용서함을 받았으며 그들이 용서함을 받은 것은 그들이 드린 희생 제사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용서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을 명백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그 교훈을 믿었고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느날 한 희생 제물을 제시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며 신앙으로 그것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신약 시대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는 분으로 죄를 심판할 것이며 죄에 대한 심판은 죽음이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피가 죄를 없앨 수 없는 데도 죄를 지나쳐 버리셨다. 하나님은 수십 세기 동안 그의 진노를 억제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그것을 완전히 드러내신 것이다.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은 죄에 쏟아 부을 진노를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부으셨던 것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여러분과 제게 쏟아졌을 하나님의 분노가 그분 위에 부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는데 그러면 현재 우리가 짓는 미래의 죄를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그 대답 역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속에 있다(요일2:2). 그분은 죄를 위해 ‘단번에’ 제물로 드려졌다. 오직 거기에만 용서의 방편이 있다. 전에 지었던 지금 지은 죄든 시간에 관계 없이 모든 시대의 죄, 어떠한 죄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가능케 하는 방도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어떻게 하여 하나님은 용서하시면서 여전히 하나님답게 존재하고 계시는가? 십자가는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다른 무엇보다 더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 공의, 거룩, 기타 모든 영광스런 하나님의 속성들을 보여 준다. 만일 여러분이 그 모든 것들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십자가을 알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은 의로우시면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는 불경건한 죄인들의 죄를 당신의 아들 안에서 심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들 위에 자기의 진노를 퍼부으셨고 죄를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 대신 다른 분을 심판하셨기에 그는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번에 동시적으로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인 것이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대한 관점과 이해가 이 모든 것을 함유하도록 확고히 하라. 여러분은 건성으로 하나님은 사랑이며 용서하신다는 것이 전부다 라고 하지 말라. 이것은 영광스런 복음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다.

제8장 자랑할 데가 어디뇨?

(롬3:27-31)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바울은 이미 2:17에서 유대인들의 자랑하는 경향을 취급했었다. 그는 다시 그 문제로 돌아오고 있다. 첫째 이유는 바울은 주제의 위대성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크고 중대하고 치명적이라서 어떠한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둘째 이유는 우리의 죄스런 상태 때문에 진리가 긍정적으로 뿐 아니라 부정적으로도 진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성경의 모든 곳에서 특히 교훈적인 부분에서 긍정적일 뿐 아니라 부정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부정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입장을 확고하게 한다. 바울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 유대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구약 전체를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편견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베드로의 경우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며 고넬료를 통해 이 진리를 가르쳤다(행10:9-16). 그러나 그 이후에 베드로가 옛 유대적인 선입견이 머리를 든 것을 보고 바울은 면박을 주어야 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교인들 가운데 개종한 유대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분명해지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는 이 속죄 교리의 엄청난 결정에까지 논리를 끌어온 다음에 갑자기 “자랑할 데가 있느냐?”고 묻는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그는 주장하고 논박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의 만연되어 있는 사상은 논증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인이기만 하면 어쨌든 좋은 것입니다. 논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나눕시다. 그 점이 교회 연합 운동의 전체 초석입니다.” 만일 속죄 교리에 반대하기 시작했다면 논쟁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은 주장하고 논박하고 논증한다. 논쟁을 위한 논쟁은 해서는 안되지만 사람들이 진리에 관하여 명백하지 못할 때 그들이 거짓에 요동되어 헛되이 살 때 우리는 진리를 변증해야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왜 그렇게 했는가? 첫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자랑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자랑함이 그가 개종하기 전에 그의 가장 큰 아픔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을 자랑하고 자신을 추겨 세우고 이방인을 멸시했다(빌3:).

그 오만함, 그가 속한 민족, 그의 가문, 그의 교육, 그의 지식, 그의 통찰력, 그의 종교심, 그의 도덕성, 언제나 그는 그것들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 멸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중심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 점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논증해야 했다. 여러분은 아직도 무엇인가를 붙들고 있는가? 여러분은 아직도 그것을 영광스런 복음의 메시지의 빛 가운데서 고집할 수 있는가?

구원의 길에 대한 해석은 더욱 영광스런 방식으로 자랑을 빼앗아 버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영단번에 좇겨났다. 그러나 인간의 죄의 본성, 유대적인 선입견, 이것들은 기독교인을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방문 앞에 있다. 여기서 ‘법’이란 모세의 율법을 뜻하지 않고 ‘원리’(principle)이다. 우리가 여기서 대하고 있는 것은 “너희가 무슨 원리로 자랑할 데가 있다고 말하느냐 사람이 하는 행위의 원리로냐 아니라 믿음의 원리로니라”.

오늘날 대중적인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먼저 행위의 율법을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주셨다. “너희가 그것들을 행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지킬 수 없었던 첫 율법을 한쪽으로 제쳐 놓고 단순히 내 아들을 믿어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3장 마지막 절로 바울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모세를 통해 준 율법) 그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대답한다. 구원의 길은 율법을 취소하거나 무효로 하는 것과는 달리 율법을 세운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교훈은 구원의 방법은 율법을 세우지 못한다고 말하며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옛 법과 새 법의 차이가 전에는 어떤 행위를 하라는 것이었고 지금은 다만 믿기만 하라는 것이었다면 여러분은 믿음과 신앙을 행위로 바꾸고 있으며 그래서 믿기 때문에 어딘가 자랑할 것이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믿었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았다. 내 믿음이 나를 구원했다. 그래 나의 믿음의 행위가 나를 구원했노라.”

만일 여러분의 생각이 믿음에 대한 자랑을 하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를 위해 율법이 지켜지고 이루어졌던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구원의 ‘매개체’에 불과하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믿음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믿음으로’ 혹은 ‘믿음을 통해서’ 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되는 ‘도구’ 내지 ‘통로’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완벽한 공로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완전한 삶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존전에 그리스도가 나아가심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키심으로 말미암는다. 믿음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 붙잡아 매는 것에 불과하다.

약2:24와 3:28의 말씀은 서로 모순되고 있지 않은가?

성경의 모든 진술들은 언제나 그 문맥과 그 배경 가운데서 취급되어야 한다. 야고보는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도 ‘믿음’이란 말을 지적 찬동으로 밖에는 의미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약2:14-26). 야고보의 논증들 중의 한 예로 아브라함은 믿음이 허탄한 사람이 행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어떤 것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드림으로 자기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증거한다.

믿음이란 지적 찬동만은 아니다. 믿음이란 첫째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둘째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 그것에 자기 자신을 위임하고 전폭적으로 그것을 믿고 그것에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다. ‘믿는 것’과 ‘위탁’ 사이, ‘믿는 것’과 ‘신뢰’ 사이에 틈이 있어서는 안된다.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믿음이라 칭하는 이 위대한 것이 율법 아래의 행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고 야고보는 믿음을 위대한 일이며 단지 지적 찬동 즉 ‘나는 믿는다’ 하는 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와 함께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별도로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로 인정한다” 그러나 “행위 없는 믿음이란 죽은 것이며” 그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제9장 차별이 없느니라

(롬3:29-31)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29, 3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사람들 사이의 모든 차별을 폐하셨다는 것이다. 구원에 관한 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모든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을 말하고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바로 그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모든 구분과 차별이 온전히 폐하여진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전혀 무익하다. 엡2장에서 바울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고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힘 담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제 하나님의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오직 한분인데도 이것을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이 존재하고 이방인들을 위해서는 다른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잡다한 신들을 가진 이교도들의 오류였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틀림없이 한 분 하나님 밑에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한 분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한 길을 제공하셨다고 역설한다. 또 하나님은 한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여러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지 않고 오직 한 방법만을 가지신다. 바울의 두 번째 주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비난하는 것이다고 한다.

30절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by faith)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 by와 through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 둘 사이에 어떤 구별도 전혀 없으며 단지 표현을 다양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쓰기를 즐겨하고 있다(갈2:16, 갈3:8). 구원은 오직 한 길 뿐이며 그 한 길은 구원받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복음 전도 초기에 이 점을 기정화 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나를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한때 훌륭한 사람들, 종교적인 사람들을 안 적이 있었다. 그들은 부모들이 그리스도인이니까 자기들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이 구원의 복음과 회심의 필요성은 빈민굴이나 그와 유사한 곳에서나 필요할지 모르나,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복음은 선한 사람들만 위한 것이 아닐뿐더러 악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로 인하여 누구든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불교, 유교, 힌두교, 기독교가 소위 하나의 “세계 신앙 회의”(World Congress of Faiths)를 가지고 있다. 현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과거에 너무 좁고 완고했었다. 서로의 교제를 거절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란 사실을 알기에 모든 종교는 같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예배한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정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다 함께 교제하기 위해 ‘세계 신앙 회의’를 열자. 비평은 그만 두고 우리는 모두 우리의 각각 다른 방법으로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기뻐하자” 그런 주장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한 철저한 부인이다. 세계 신앙 회의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라”로 출발하고 그것으로 멈추고 만다.

바울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역설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하나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힌 그 안”에 있다고. 그분은 자신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4:6). 다른 종교를 가진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가기 전에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여러분은 아직도 바울 사도가 이런 원리들을 연역해 내느라 수고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성령으로 인도하사 단순히 구원의 길만을 진술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주의 보혈을 극히 주의하게 하고 그것이 얼마나 중대하며, 그것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신 데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사 이것을 보게 하시고 이 교묘한 기만에서 우리를 보전하소서. 소위 사랑이란 명목으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을 부정하고 있는 이 가장 교활한 이단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소서”.

그들은 복음이 여러 개라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같은 것이 아닌 ‘천국 복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초림 당시 세례 요한과 같이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것을 거절하자 하나님은 은혜 복음, 현재 우리가 전파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이 은혜의 복음은 대 환난이 있기까지 전파되고 나서는 종말을 고한다. 다시 천국 복음이 되돌아 올 것이고 유대인들이 거절했던 천국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지 않고도 천국 복음을 통해서 구원 얻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란 뜻이다.

전에 교회를 괴롭혔던 오류와 이단들은 이런 모양으로 현대 기독교인에게 다가온다. 우리 조상들은 너무 율법주의적이고 너무 완고하며 너무 세련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사랑에 관한 놀라운 발견을 했다. 그렇게 출발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또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은 중대한 문제에 언제나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너무 유별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부정적이어서는 안 되죠. 그것은 사랑이 결핍된 탓이요” “당신네들은 복음을 배반한 것이요 만일 우리가 실수하여 잘못을 범했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요”.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처지가 절망적이다. 즉 민중들과 대중들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끌어들이고 너무 유별나게 굴지 말고 우리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자”.

그리스도의 피는 본질적인 것이다. 오직 그분과 그분의 피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분 없어도 하나님을 안다고 부르짖는 사람들과는 어떠한 교제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판단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리를 천명하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다.

자랑은 사라지고 구분과 차별은 폐하여졌다. 온 세계가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 앞에 정죄 아래 있다.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과 그의 사죄, 그의 부성을 알지 못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허무하게 죽지 않았고 우리의 조상들은 쓸데 없이 고난 받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의 눈을 열어 진리를 알게 하신다.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삼게 하시고 열심히 그것을 주장하게 하시며 그것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하신다.

제10장 세워진 율법

(롬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원의 길, 즉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움으로 이루어진 이 구원의 길을 율법으로 세운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고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정관사가 없는 믿음(faith)이 아니고 ‘the faith’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전파함으로 율법을 폐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바로 “그럴 수 없느니라”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도리어 율법을 세우느니라”.

“율법을 무익하게 만드는 것과 달리 우리는 그것을 서있게 도와주고 있다. 아니 우리는 그것을 세우고 있다. 진정으로 우리는 그것의 본질적인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노라”.

어떤 이들은 여기서 ‘율법’은 구약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종종 구약 성경을 ‘율법’이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모세 오경이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구약 전체를 율법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21절부터 이후의 전체 문맥을 보면 바울은 모세를 통해준 모세 율법, 즉 도덕법, 의식법, 특히 도덕법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울의 역설은 진실로 복음 외에 그처럼 율법을 세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교훈 “새로운 제도 아래서 구약의 율법은 완전히 폐하여졌고 따돌림 받았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믿음의 법을 맞이했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된다”. 그 교훈이 철저하게 그릇된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교훈이 율법을 세우는가?

현 시대의 인기있는 교훈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로 가르치는 교훈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방편으로 해서 우리는 이제 율법생활을 할 수 있으며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선한 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인해 율법을 지킬 수 있고 존귀케 할 수 있고 완성할 수 있는 강건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얼마나 그럴 듯한 주장인가? 그것은 흔히 부활절 메시지로 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가 아닌 그의 부활 생명과 권능으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았다. 십자가는 지나가 버렸다. 우리가 그를 바라보며 기독교적 삶을 살도록 도움을 요청하면 구원을 얻고 그 기독교적 삶이 은연 중에 율법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 교훈은 전적으로 거짓되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바울은 3장에서 ‘칭의’만을 말하고 있다. 그들처럼 기독교적 삶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성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교훈은 종국적으로 성화되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로마 교회의 칭의관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전혀 성화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합을 얻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3장의 끝까지 흐르는 주제는 칭의의 길이다. 20절과 24절에 그 답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것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사도가 가르치는 칭의 교리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이 그릇된 해석은 칭의의 진정한 방편이 우리의 행위라고 진술한다. 우리는 그 진술을 거절해야 한다. 칭의는 비록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죄 가운데 있지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에 의한 법정적이고 법률적인 선고이다.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율법을 존귀케 하며 세운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산상 설교 마5:17~18에서 말씀하셨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율법을 이루심으로 율법을 세우신 것이다. 먼저 주님은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서 율법을 존귀케 했다(갈4:4). 주님은 친히 자신을 율법 아래 두셨으며 그것에 대해 완전히 복종하셨다. 율법은 순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지 못함에 대한 심판을 선언한다. 그리스도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수난의 순종 속에서 율법을 더욱더 뚜렷하게 높이셨다. 자기 영혼을 죄를 위한 제물로 드리시고 ‘도살자 앞으로 가는 어린 양’으로 끌려가 우리 모든 요구를 자기 위에 세우신 하나님께 불평이나 도망하지 않고 순순히 복종함으로써 그분은 율법을 세우신 것이다.

이 구원 방법만이 율법을 세우고 존귀케 하고 붙들어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첫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를 나타내었다.

둘째, 십자가는 율법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진노에 관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결단을 명백하게 나타낸다.

셋째, 율법이 죄와 우리의 죄됨에 관한 모든 것을 확증한다.

넷째, 십자가만이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과 우리의 철저한 절망과 무력을 확증하는 것이다.

다섯째, 구약의 희생 제사의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며 그럼으로써 제사들을 세우는 것이며 나아가서 그것들을 명한 율법을 세운다.

여섯째,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하나님께서는 친히 율법에서 “피흘림 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 주셨다.

일곱째, 율법은 근본적으로 영적이며 단순히 도덕성이나 행동의 문제가 아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단지 용서하심 뿐만 아닌 깨어진 개인적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십자가에 대한 어떠한 견해이든지 간에 이들의 요소를 나타내지 않는 것은 그릇되고 거짓된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만일 내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대한 대목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았다면, 저는 틀림없이 로마서 3:21-31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기에 복음의 심장과 핵심이 있다. 교회사는 전 세기를 걸쳐 이를 명백하게 보여 준다.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고 타락하여 교회가 자기의 능력을 상실하는 것은 복음에 대해 그릇되어 있을 때이다. 메시지는 이것이니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다. 그것은 복음의 심장이다.

사람들이 우리가 하려고 했던 방식대로 해석하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 보자.

첫째, 당신들은 바울의 교훈을 바로 해석했지만 바울이 틀린 것이다. 바울은 그릇된 신관과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진노란 사랑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피의 희생 제도를 설정하셨다는 사상은 괴이하고도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성경을 영감으로 된 것이며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그들과 토론할 필요가 없다.

둘째, 다드(C.H.Dodd) 박사에 의해 대표되는 학파이다. 다드 박사는 중세와 종교 개혁 시대에 바울 신학이 재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드 박사는 ‘하나님의 진노’와 모든 형벌 개념, 그리고 우리 주님의 대신 고난 받은 것, 화목에 관한 교훈, 이것들을 종교 개혁자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청교도 기타 그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에 의해 교훈된 교리이며 모든 위대한 전도자들에 의해 전파된 것들이다. 교회가 수 세기를 걸쳐서 실수해 왔고 우리 만이 진리를 안다. – 그들은 그리스도 “피”에 관해 우리와 얘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 이론은 궁극적으로 그 점을 설명해주는 “십자가의 원수”이다.

셋째, 피와 희생과 진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현대 정신을 겨냥하는 것이니 그래서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 정신이 모든 진리의 표준이 된다. 이 현대 사상도 20년 내에 낙후된 것으로 쫓겨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참된 권위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권위는 사도 즉 ‘부름 받은 사도’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모든 세기를 걸쳐 전도되었고 성령에 의해 높임을 받은, 그리고 개인을 중생시킬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상 대 부흥을 가지고 왔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는 이 구속의 복음을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어리석게 되지 말자. 그들이 소위 ‘최초의 발견’이라는 것에 흔들리지 말자. 영광의 하나님의 복음은 오직 하나 뿐이다. 이것만이 우리를 구원하며 이것만이 의롭다 한다.(갈1·:8-9)

제11장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

(롬4:1-3)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장은 계속해서 믿음에 의한 칭의라는 같은 주제이다. 특히 유대인들이 그 교훈에 대항하여 제기할 수 있는 반대를 다루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4장의 목적이 구약의 법 아래서 구원의 길이 그저 예고만 된 것이 아니라 그때에도 사람들을 취급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필요성은 세 가지 주요 이유가 있다.

첫째, 유대인들은 개종하고 거듭 났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식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와지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베드로도 한때 바울에게서 책망을 들은 것을 안다(갈2:). 둘째, 그들이 복음이 구약과 상치된다고 느낀 것은 구약을 잘못 이해함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밝히 드러내고 싶어 했다. 셋째,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자랑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제거해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좀더 교리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4장의 주제는 오직 ‘은혜 언약’만 있을 뿐이며 제도에는 차이가 있으나 구약시대에서도 신약시대와 같은 은혜언약이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나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먼저 그 안에 있었고 우리들은 그들과 함께 그 안에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상속자요 동일한 소유자요 동일한 시민이다(엡2:-3:). 참감람나무인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들 중 얼마가 그들이 믿지 아니함을 인하여 꺽여지고 돌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나무요 같은 뿌리이다(롬11:).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신약시대나 구약시대든지 구원의 길도 오직 하나 뿐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오랜 역사 가운데서 살았던 가장 좋은 증인 두 사람, 아브라함과 다윗을 택한다. 유대인들은 이 두 사람을 매우 자랑으로 여겼다.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그렇게 뚜렷하게 확증하는데 쓰인 그 지위와 신분을 얻게 되었는가? 바울의 답변은 하나님께서 지금 사람들을 구속하고 구출하고 의롭다 하시고 계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나 방법으로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의 논증은 :1-5절. 아브라함의 경우를 그 사실과 그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통해 알아보고 있다. 6-7절.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직설적으로 말한 것을 대하게 된다. 9-12절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에 있었던 것과 그러므로 할례가 결정적인 것은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13-17절. 이런 것이 역시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있었다는 점을 논증한다.

18-마지막 절. 이 믿음이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어떻게 확증되었으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는가를 설명해 준다. 마지막에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것과 같이 지금도 그것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위대한 논증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은 나로 하여금 한 사람의 위대한 변호사를 연상케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현재 생활은 너무 바빠서 내가 원하는 것은 긍정적인 메시지와 오직 구원받는 방법과 어떻게 살아나갈까 하는 것 뿐이다. 논증을 추종해 나가려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느끼고 4장을 빼놓고 5장으로 넘어가길 좋아한다. 5장은 좀더 실제적이고 삶에 좀더 가까운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저는 4장이 3장의 이신칭의를 더욱더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말하겠다. 그는 우리가 정말로 이해하였는지를 확실히 알기를 원한 것이다. 이 4장이 구약을 이해하는 매우 귀중한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다른 사람(구원에 대해 고심하는)을 돕기 원한다면 이 4장의 논증을 포착해야 함이 진수가 된다. 구원에 대한 조감적인 안목을 가지는 것보다 믿음을 더욱 강건케 하는 것은 없는 줄 안다.

1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이 아니라 ‘그런즉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육신이란 말의 의미는 내적이고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썼다. 국적이나 세례 받았다는 사실 등 우리에게 속한 것들 우리가 구원을 위해 의지하기 쉽고 자랑하기 쉬운 것을 말한다.

2절을 다시 표현하면 “아브라함의 사람됨과 행한 것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열납 되었느뇨?”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이 그의 성품과 착한 행실 때문에 축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느뇨? 나의 나됨과 내가 할 바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렇게 대접했느냐?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거리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의 진술을 말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바울은 성경들이라 하지 않고 성경이라고 단수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창15장을 토대로 서술하며 그가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이신칭의 교리가 분명하게 진술된 맨 처음의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은 단순히 지적인 찬동만을 표현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 이상의 무엇이며 신뢰와 의탁의 전체 사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말을 사용한 것이다.

몇몇 그릇된 해석을 살펴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하나는 아브라함이 행한 대로 그를 대접했다는 것이다. 창15장의 의미가 그러하며 지금도 여전히 구원의 방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한 사람이고 경건한 사람이고 기도를 하며 종교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 받는다고 한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사람은 자랑할 권리를 가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전에 기도하러 온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다(눅18:9-12).

또 하나의 해석은 복음적인 사람들 가운데 더 보편적인 해석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걷어 치우셨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믿음을 행위로 돌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자랑하고 떠벌일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내가 너와 언약을 맺기 원하노라”고 말씀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에 대한 커다란 약속을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길을 계시해 주셨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으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그에게 오셔서 “너와 사라- 늙은 부인, 아이를 낳을 연령을 훨씬 넘은- 에게서 궁극적으로는 메시야가 태어나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또 이삭의 희생 번제 사건에서 그에게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을 예시하셨고 하나님이 어떻게 구속할 것인가를 보여 주셨던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것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브라함은 여러분과 제가 믿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속 방법을 믿었던 것이다(요8:56). 이제 그것은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이루어지기 2천여년 전에 멀리서 바라보았고 다윗도 똑같은 식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여기신 바’라는 말은 어떤 사람의 계산상 부족한 금액을 채워주는 것을 의미한다(바울-빌레몬-오네시모의 빚진 것). 우리가 전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더한다. 우리에게 전가하고 우리의 것으로 여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채무와 빚을 깨끗이 청산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행할 때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다고 법적 선언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을 읽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칭의 방법이 행위로나 율법이나 할례로 또는 어떤 종류의 것들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알아야 하고 파악해야 함은 중요한 핵심점이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날을 보며 즐거워했다니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8;56). 다윗도, 율법 아래 있던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그것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여전히 의가 없으며 아무것도 없는 처지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그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

제12장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심

(롬4:4-8)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길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임을 알았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은 이 구원의 방법,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사람에게 의를 베푸심, 그리고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점을 믿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행한 것만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좀더 분명한 태도로 서술하기 위해 4-5절을 계속해 나간 것이다.

4절에서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을 위해 일정량의 일을 했고 내 품삯을 청구하고 그는 내 품삯을 지불한 것이면 그 사람 편에서는 은혜스런 행동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당연한 일이다. 만일 그가 나에게 값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그는 나에게 빚이 있는 것이다.

5절에서는 4절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여 그리스도인 되는 것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바울이 주장했던 칭의에 관련이 되어 있다.

누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인가?

① 일하지 않는 자이다. – “일한 자”와 ‘일하지 않은 자’를 대비시켜 일하지 않은 자는 아무 일도 못했으므로 아무것도 요청할 수 없다.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보기에 선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 점을 3장에서 계속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를 되돌아 보면 우리는 결코 경건치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경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의 본성으로는 아담의 타락 이래로 다른 사람과 같이 불경건한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의롭다 하신다. 그것은 칭의가 완전히 하나님의 행위이며 우리의 행동을 기초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경건하게 만드신 다음에 의롭다 하시지 않으시고 경건치 않은 자를 경건케 하시고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신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세례(영세) 받음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고 경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화(성결) 되었으니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에 정반대 되는 것이다.

③ 칭의가 완전히 법정적이며 법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사람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에게 전가시켜서 그를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칭의는 사람에게 어떤 것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더 선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의 의로 그에게 입혀 주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신다.

6~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에 대한 굉장한 확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미 아브라함에 대해 언급했었고 이제는 다윗의 경우로 말하고 있다. 시편 32편에서 다윗은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바울은 더 나아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라고 말하고 있다. 다윗은 용서를 말하고 있지만 바울은 용서를 통한 완전한 화해 단계로 해석하고 있다. 구속이 칭의와 성화와 궁극적 구원과 영화를 의미한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바로 그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결코 다시 보시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그것에서 완전히 건진 바 된 것이다. 그것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게 계산하고 나의 것으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바울이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것이 죄인을 처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계산하지 않는다. 그의 독생자에게 그 모든 것을 전가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담당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께 화해하는 방법이다(벧전2:24, 사53:1).

칭의는 첫 단계로 우리의 죄가 그에게 전가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단계이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 대신 죄를 삼으셨다. 그것은 “우리도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그리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하시고 세상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다. 이것이 칭의가 의미하는 바이다. 우리는 전혀 공로가 없고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배설물과 같다. 우리는 경건치 않으며 소망이 없고 무기력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옷입혀 주신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믿고 깨닫는 사람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구원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다. 만일 여러분이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물론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은 후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애를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을 구원하지 않는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회개한다. 그러나 회개함이 그를 구원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나 자랑할 데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다.

이제 여러분은 자기는 전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가? 더 이상 당신은 어떠한 것을 하려는 시도도 멈추었는가? 그러나 나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있는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이 교리가 말하는 것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다.

제13장 오직 믿음

(롬4:9-16) (9)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바울은 3장에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를 진술하였고 4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이 교훈에 반하여 제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반대 의견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1-5절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서가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다음에 시편 32편이 역시 이 교리를 뒷받침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9-12절에서 행위가 그렇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필수적이긴 하다는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 13-16절에서는 유대인들처럼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은 할례 받기 전까지만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동안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할례란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바에야 무엇 때문에 할례를 하나의 표로써 주셨겠느냐고 한다.

9절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답변은 10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았을 때가 아니고 무할례 가운데서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가 할례 받기 14년 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전가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계속 11절 12절에서 왜 할례가 주어졌던가를 설명하고 있다.

할례가 주어졌던 이유가 무엇인가?

① 할례는 아브라함이 14년 전에 받은 칭의에 대한 인으로써 주어진 외적인 표였다. “인쳤다”는 것은 진짜임을 보증한다는 뜻이다.(요6:27)(엡1:13-14). 할례 자체는 아브라함에게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약속이 자기에게 확증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할례는 그에게 그 약속을 인친 것이다.

② 11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고 표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는 방법을 뚜렷하고 노골적으로 확증시킨 최초의 경우는 아브라함에서였다 아벨과 에녹, 노아 같은 사람들도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전에는 그것이 법률적인 방식으로서는 선언되지 않았던 것이다.

11절 하반절에서 12절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

① 무할례인 이방인들에 대해 언급하며 아브라함이 무할례자라도 믿는 모든 자의 조상임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11절 하반절)

② 아브라함은 믿는 모든 무할례자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동일한 신앙을 가진 모든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것이다.(12절)

할례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또 할례 받는다는 그 자체에는 어떤 효력도 없다(갈5:6).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다. 로마서 안에서 바울의 주된 강조점은 할례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원리가 문제라는 것이다.(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 오늘날 우리는 출신이나 세례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구원 받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 곧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에 의해서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복되신 구세주의 공로로 값주고 사신 구속은 이 통로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된다. 믿음에 의한 인침 밖에는 안되는 세례 위에 무엇을 쌓아 놓는 것은 이 치명적으로 중대한 이신칭의의 교훈을 부정하는 것이다.

13-16절에서 율법과 칭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13절의 ‘약속’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 의미는 창15:7, 창22:16-18에서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바울은 18절에서 바로 이 약속이라고 말한다. 이 약속은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갈3:17)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만 아니라 온 세상을 기업으로 받을 자라는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후손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갈3:16) 그리스도는 후손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우리에게 임한 모든 약속들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은 에베소서에 나타난 우리에 대한 말씀이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2-13)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제14장 전능자의 은혜로 보증된 구원

(롬4:13-17)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16)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제기하고 있던 반대 즉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구약의 교훈을 묵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반대 의견을 다루고 있다.

13절에 그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율법의 중개를 통해서가 아니고 믿음의 의를 통해서라는 명확한 진술이 있다. 그 역사는 아브라함의 사적을 다룬 창세기의 여러 장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그 역사적 사실은 유대인들이 좋아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언약이 하나님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이다. 약속이 할례 받기 전에 주어졌기 때문에 율법을 인하여 그 약속이 맺어지지 않고 ‘믿음의 의’로 말미암았던 것이고 이 믿음을 통하여 그에게 임한 이 의의 빛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14절에서 뜻하는 것은 만일 그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맺어진 것이고 우리에게 이르렀다면 믿음은 발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항상 우리의 행동, 행위에 관해 명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율법을 제기하는 순간 여러분은 행위로 돌아가는 것이며 믿음은 사라지고 추방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행위와 반대되는 것이다. 14절 하반절에서 그 언약 역시 쓸모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율법을 살펴 지킨다는 조건으로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맺으셨다면 그 언약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약이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맺어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주신 것을 왼손으로 도로 빼앗는 격이 되고 그것은 언약이 될 수 없다.

15절에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고 말한다. 율법은 정죄를 가져오기 때문에 진노를 이룬다. 진노는 축복의 약속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진노는 심판과 고난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

7장에서 율법 그 자체는 거룩하고 흠이 없고 선한 것이지만 내가 육체에 속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사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은 나의 마음에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인식시켜 준다. 그러면 나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고 말한다. 죄와 허물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율법이 하는 일은 그 죄를 규정하고 죄를 범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율법의 의도는 우리의 죄책을 더욱더 확신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우리들 모두를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절망하게 한다.

16,17절에서는 13-15절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을 이곳에서는 긍정적인 면에서 바라보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이것이 믿음으로 되나니’

구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기다리는 모든 것인-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① 은혜로 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는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자비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될 수 없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2:17) “만일 은혜로 된 것이라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믿음의 길만이 그것이 전적으로 은혜로 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영광은 오직 하나님과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한다. 만일 믿음 외에 어떤 것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깍아내는 것이다. 믿음의 원리는 은혜로 인도하고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확증해 주는 것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은혜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믿음으로 되어야 한다.

② 구원의 언약의 포괄적인 성격(유대인이나 이방인,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다 포함됨)을 보증하는 것은 오직 믿음의 길 밖에 없다고 말한다. 만일 구원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만 구원이 될 것이고 율법을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전혀 소망이 없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축복을 가져오는 것은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 구원의 원리는 믿음과 은혜 하나 뿐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복음을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종교성과 도덕성도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오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복음이 적용되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

–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행위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네가 율법을 지킨다면 너는 여기서 살게 될 것이고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덴 동산 안에서 조차 그의 성품 안에 죄가 없는 사람인데도 타락을 했다. 만일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이 우리 안에 있는 무엇에 달려 있다면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구원이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님을 감사 드린다. 하나님이 나를 전능한 힘으로 붙잡고 계심에 감사드린다(빌1:6, 롬8:38-39, 요10:28-29).

17절에서 계속 강조하며 색인하듯이 표현하고 있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이 말씀은 우리 구원의 기초이며 소망 확신의 기초이다. 아브라함은 99세요 사라는 90세로 아기를 낳지 못한 부부였기 때문에 이삭은 태어나지 않았으며 이삭이 있으리라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과 모든 후손들의 아비였던 것이다. 그 점이 ‘하나님 앞에서’라고 한 의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후손들의 조상이요 장차 올 수많은 종족들의 조상으로 보셨다. 또한 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정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가? 바울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라고 대답해 준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하나님은 그 후에 이삭의 번제 사건 속에서 똑같은 일을 행하셨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아브라함이 실제로 칼을 들어서 이삭을 제사하기 위해서 죽이려 할 순간에도 머뭇거리지 않았던 것이다(히11:). 그 후손인 하나님의 독생자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의 저주를 받고 나무에 매달리고 못박혀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그를 통하여 생명과 영생을 밝히셨다. “그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이시다” 아무것도 없으나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실 수 있다.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었다.

’부르다‘는 종종 ’이름을 붙이다‘는 의미를 가질 때가 있다(사40:). 하나님은 이 노인 아브라함이 사라와 함께 별들 아래서 있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후손을 있게 하셨고 그들 후손에게 이름을 지어 주셨던 것이다. 여러분의 이름도 제 이름도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들을 아시고 그들이 존재하기 전에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처음과 마지막을 다 아시기 때문이다(롬8:29).

그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이루셨다. 아직 저와 여러분은 땅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영화롭게 되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이나 나중이나 차별이 없으며 처음부터 끝을 아신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영화롭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엡2:6). 이 순간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거기에 있는 여러분을 아신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다.“ 이것이 우리 구원의 대헌장이다. 전능하신 분 외에는 성도의 견인을 보증할 자가 없다. 사람은 똑같이 소망이 있는 것이며 어떤 것도 이 구원의 과정을 막지 못하며 어떤 것도 그것을 좌절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신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것이다. 그것은 행위나 율법이나 할례나 또는 사람 안에 있는 무엇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며 모두 은혜로 되는 것이다.

제15장 믿음의 본질

(롬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신칭의의 전체 문제에 대한 완벽한 예증으로 말하고 있다. 믿음의 본질에 대해 이 구절 이상으로 그렇게 극적이고 분명하게 진술된 것은 성경 전체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의 궁극적 목적은 4:23-24의 “저에게 으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함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진리를 보여 주는 데 있다.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그의 믿음의 결과 즉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무엇을 행하게 했는가?

① 하나님이 그에게 맺었던 언약의 놀라운 말씀을 믿게 했다.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바닷가의 모래를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음 같이,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이 두 가지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 아이가 없는 99세의 남자와 90세의 아내에게 육신적 자손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후손에 관해서도 동시에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이 약속을 분명하게 하셨던 것이다(갈3:16).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그분을 세우실 것”을 나타내 보여 주셨던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이삭을 잡아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사건에서 그 점을 거듭 반복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뜻을 알았던 것이다.

– 또한 아브라함은 영적 의미에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자의 조상이다.(마8:11).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적나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그것을 믿을 때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믿음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며 증명거리를 찾지도 않는다. 신앙은 하나님 말씀 만으로 족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으니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던 것이다.”

②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로 하여금 이 엄청난 약속을 (모든 현상이 그것과 정반대 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 말씀에 입각해서만 믿게 하였다. 그때 아브라함은 완전히 소망이 없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망에 차서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오실 소망, 구원의 소망, 인도의 소망, 이방인들이 가입하여 오는 소망, 그것은 구약을 명백히 뜷고 흐르는 위대한 소망이다.

③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이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했다(;21). 우리의 믿음, 참 믿음이란 언제나 그 안에 이 확신의 요소를 가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하여야 한다. 신앙은 단순한 소망스러움이 아니고 완전히 확신하여 완전히 설복 당하는 것이다.

히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믿음이란 확실한 보증이 있는 권리 증서(부동산)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희미하고 불확실하며 불투명하고 애매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 믿음을 소위 ‘신앙주의(believism)’와 구별하여야 한다. ‘산데마니안주의’라는 이단은 18세기 교회를 괴롭혔다. 그것은 ‘예수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떠들어대는 교훈이다. 믿음은 지각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가슴 속에서 전인적으로 일어난다. 완전히 ‘확신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참되고 본질적인 신앙의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은 것을 행했고 믿는 대로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④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입각하여 행동했다. 창17:5 하나님은 ‘아브람(높은 아버지)’이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많은 민족의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자신을 아브라함으로 불렀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새 이름을 알도록 했다. 그는 그에 따라 행동을 행했던 것이다.

히11:13, 아브라함은 ‘외국인과 나그네’가 되어 하나님이 건축자 되시어 기초가 놓인 하나의 도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는 그 위대한 약속을 붙들었다. 그는 그가 믿는 바에 입각해 행동하였고 그가 ‘완전히 확신한’ 이 약속에 의지하여 행동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믿음이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4:20). 믿음이란 우리들을 강하게 하고 열심 있고 능력 있게 만들어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19절에서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엄연한 사실들 앞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가장 나쁜 상황을 본 것이다. 그는 보았지만 전혀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사실들과 장애와 환경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고 그밖에 다른 무엇- 다른 분을 보았다. 불신앙은 어려움과 문제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신앙은 문제들을 두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들 위로 올라서는 것이다. 믿음은 의심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의 의심을 극복하고 그 의심에 대답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귀는 의심이 오도록 조작할 것이다. 마귀가 우리에게 던지는 불화살이다(엡6:).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들은 모두 소멸될 것이다. 의심은 아브라함에게도 왔듯이 여러분에게도 올 것이다. 아브라함은 약해지지 않았다.

제16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

(롬4:18-22)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의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강한 믿음의 비결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 자신을 더 강하게 할 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강하여진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영광스런 ‘속성’을 숙고해 보고 명상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관한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를 경배함으로써 영광 돌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함으로 영광 돌리는 것이다.

①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영원하다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숙고했다. 하나님은 여호와(I am that I am)요 영원부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관해 깊이 생각하였다.

② 하나님의 ‘편만성’을 음미해 보았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어 전 우주 안에 안 계신 곳이 없다(시139).

③ 하나님의 ‘전지성’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다. 그는 시작과 끝을 아신다..

④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했다. 그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그의 능력은 절대적이요 영원하며 전능하다.

⑤ 하나님의 의와 공평과 진리, 거룩, 불변성, 영존하심 등에 대해 생각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한 뒤 다음과 같은 것을 추론해냈다.

우리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약속을 잘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가볍게 허술하게 약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을 알았다(약1:17, 딛1:2). 하나님은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확실하게 이루실 것이며 결코 번복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약속은 확실하며 이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원한 권능이 그로 하여금 자기 목적하신 모든 것을 이루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 그에게 더 모욕적인 것은 없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이 가장 영화롭게 나타나는 것은 그들의 시련과 시험과 문제에 봉착한 가운데서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그들은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이며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분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바로 그 점이 바울이 예를 들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강한 믿음’이라고 말하며 또는 ‘그는 믿음에 강하였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큰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더욱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신앙에는 차등이 있음을 암시한다(마17:20, 물에 빠진 베드로, 귀신들린 소년–) 여러분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완전히 확실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약한 믿음이 있고 그러나 신앙이 약하면서도 참 신앙일 수 있다. 그것은 불신앙이 아니다. 약한 빛이 가물거리더라도 그것은 빛이다. 그러므로 비록 매우 약하다 할지라도 믿음은 믿음인 것이다. 비록 어린 아이가 크고 힘있는 근육을 가진 사람과 대조할 때 아무 힘도 없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능력을 결정하는 두 가지 주요 동인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첫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둘째, 아는 것을 적용시키는 것이다. 순전한 신학적 지식은 그것이 믿고 아는 바를 시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강한 믿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에 아는 것에 대한 적용이 반드시 덧붙여져야 한다. 폭풍이 있을 때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의 문제는 자기들이 가진 믿음을 적용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파도가 배로 넘어 들어오는 물만 바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신앙과 무모함의 구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다. ‘신유’를 예를 들어 야고보서 5:13과 마가복음 11:20-24를 살펴 보면, 이 두 대목의 말씀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받은 교훈을 따라 하나님께 치료되기를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 감사까지 드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치료는 되지 않고 심히 당황하게 된다. 신유 뿐만 아니라 날씨, 자녀의 성공, 자기에게 이루어지기 원하는 일 등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두 가지 주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①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한 것을 오해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언제나 건강해 있어야 한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때때로 질병을 통하여 징계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건강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비성경적인 견해이다. 그들은 믿음을 ‘해낼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여러분이 의자에 앉을 때면 의자가 여러분을 지탱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저 –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99.9% 이상 안전할 것이라는 의식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수학적 확률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사람 안에 있는 본성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② 신앙이란 자기 암시의 방식에 따라 우리 자신을 믿노라고 절망적으로 부르짖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믿을 꺼야’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마가복음 11:22의 해석은 얼마나 많이 잘못 해석되는 말씀인지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를 시작하여 나는 그것을 실로 받을 것이라고 믿고 또 믿으며 자신을 설득한다. 기도했으면 멈추어야 하며 받을 줄로 믿고 감사하라고 한다. 그것은 참으로 믿지 않고 받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앙은 짜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소리 없이 확신하게 하고 의탁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긴장과 압박감이 없다. 믿음은 언제나 확신의 요소를 가진다. 이 뿌리 깊은 확신은 그들의 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

허드슨 테일러는 막 11장의 본문에 대해 “하나님을 믿으라”를 “하나님의 신실함을 붙잡으로”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믿음은 난관을 바라보지 않는다. 믿음은 결코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거나 믿음 그 자체에 관해 얘기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것은 제게 있어서 하나의 시금석이다. 이단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주의를 돌리고, 하고 있거나 한 일에 눈을 돌리게 한다. 믿음에 대해 큰 문제는 내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의 믿음의 능력의 척도는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그의 하나님에 대한 앎의 정도이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치명적인 원리는 없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믿음에는 열광적인 것이 없다. 흥분적인 것도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게 되었고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일 때 그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요 강한 믿음의 소유자이다. 그것은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앎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의 응답받는 기도이다.

만일 여러분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며 또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신앙이란 언제나 당신이 어떤 형의 인격자가 되느냐에 달려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여러분은 거룩함이나 하나님께 순종함이 없이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여러분이 강한 믿음을 갖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읽으시라.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해 나가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기의 성품을 나타내시는 계시에 온 정신을 집중하라. 특별히 예언서를 눈여겨보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주시하라. 그런 다음 성경의 역사적 부분을 읽고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으라.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을 할애하면서 그는 말한다. 너희 자신과 같은 이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비밀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와 그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것이 그들의 비결이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 묵상해보라. 기도하고 그분의 존전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분을 기다리라. 끝으로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일어났던 특별한 경우에 하나님께 의심치 말고 영광을 돌리라. 그것이 믿음의 비결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적은 믿음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지 마시고 하나님을 더욱 많이 생각하라. 그에 대한 진리를 깨달으라.

제17장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

(롬4:23-25)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의 경우는 분명히 하나님의 의의 방식, 구원 방법, 이신칭의의 전 과정에 대한 가장 뛰어나고 극적인 실례이며 예증이다. 아브라함에게 진리였던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과거나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진리이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처럼 믿는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것처럼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다.

– 의롭다 함을 얻는 이 믿음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는가?

첫째,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영화롭게 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다.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결코 언급하지 않거나 하나님에다가 모든 강조를 하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성경이 무시되거나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우도 있다. 위대한 삼위일체 교리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경향을 보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 문제를 성경에 나타난 순서로 유지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에게서 마친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둘째,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모하멧 교도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않는 한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전 15장). 부활의 사실은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중추적이며 치명적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은 예수가 주님임을 말한다고 한다. 그는 부활 사건은 예수가 주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아들이라는 점을 선언하는 것이 부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격위의 교리 즉 한 인격 안에 두 성질을 가진다는 교리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이다.

다음에 이 예수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준 바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단순히 ‘예수는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범죄함을 위해 내어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줌은 우리의 범죄함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를 거두시어 그에게 짊어 지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심판하셨다.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 때문에 주님은 자발적으로 복종하셨다. 어느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자기 자신에게 지우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처리하는 유일한 길이 그것이기 때문에 죽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의 죄악을 처리하셨던 것이다.

다음 단계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 나셨느니라” 그런데 5:9에서 바울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순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죽음과 부활은 떼놓을 수 없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역사를 완전히 만족해 하신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살리심으로 아들이 사역을 완성시켰으며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택한 증인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후 승천하셨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그의 피를 가지시고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거기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그를 완전히 열납하셨고 그의 제물을 흠향하셨다는 증거이다. 그는 거기서 바로 하나님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하신다. 또한 그는 우리의 대표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모든 위대하고 풍성한 은사를 받으셨다. 우리는 그로부터 그것을 받는다(요1:) 부활은 이 모든 것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시고 계셨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이다. 신앙은 여러분의 완전한 구원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그것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점은 ‘우리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는’ 바로 그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가 알아 보았듯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행동하였다. 반대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그가 능히 이루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에 입각해서 행동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언제나 그래야만 한다. 저는 여러분에게 약한 신앙과 강한 신앙이 있지만 약하든 강하든 모든 신앙 속에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기독교적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린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내어준 바 되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사기 위해서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자기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 성령, 성육신, 생애, 순종, 죽음, 장사, 부활, 승천 등 이 모든 것을 의뢰하는 사람이다.

분명히 신자는 자기의 행위나 다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자기를 의롭다 하는 것이나 그렇게 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행한 선한 일이나 여러분의 됨됨이를,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 받지 못하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무엇이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인가? 아직도 자기 속에 악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마귀가 “너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고 말하면 “그렇다.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는 것을 안다.”고 확신하며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비록 약하고 절망적이고 비천하고 힘 없지만 나는 부활의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 새 사람을 새 본성을 조성하시고 힘과 능력 주심을 믿는다. 나는 ‘흠 없고 점 없고 티 없이’ 될 자이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는다. 죽음이나 무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신자가 뽐내고 있는 것 같이 들릴 줄 모르나 그러나 이것은 극한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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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존스 ‘로마서 강해’ 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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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유하기 김은홍

마틴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 제1권이 우리말로 옮겨져 나온 것은 1976년 11월. 옮긴이는 당시 총신 신대원 3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서문강이라는 20대의 젊은이였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이 시리즈의 마지막 제14권이 우리말로 옮겨 나왔다. 제1권을 번역할 때 20대 젊은이 서문강 전도사는 이제 50대의 절반을 넘어선 서문강 목사(사진)가 되어있다.마틴 로이드-존스 목사가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로마서를 강해 설교한 기간은 10년. 그리고 그 강해설교가 전집으로 묶여 나온 기간은 30년. 여기에, 이 전집이 우리말로 옮겨 나온 기간 역시 30년. 하나의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단 세월만이라도 이만큼은 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여기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스며있을까.서문 목사가 마틴 로이드-존스를 알게 된 건 1974년 총신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당시 문창수 목사가 로이드-존스의 ‘산상설교’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신학생들에게 읽히면서였다. ‘산상설교’를 읽고서 서문 목사는 비로소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 성경이 말하는 설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로이드-존스에 매료된 젊은 서문 목사는 이를 계기로 그의 ‘로마서 강해’를 우리말로 옮기게 됐다.제1권이 출간되고 서문 목사는 학우들과 당시 총신 학장이었던 김희보 교수를 모시고 번역 출간 감사 예배까지 드렸다. 저서도 아니고 번역서를 내고 감사예배까지 드렸다는 게 지금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한국 신학교육의 현장에서 변변한 신학 서적 한권 찾아보기 힘든 형편에서는, 모두들 번역서 출간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그러나 3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말로 나온 마틴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는 ‘단순한 번역서 출간’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1974년 ‘엑스폴로 74’를 계기로 한국 교회에는 성장의 기폭이 마련됐다. 그러나 그 성장의 기세에 ‘바른 말씀’이 지남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한국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마틴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는 제1권이 나오고 이어 2권, 3권이 잇따라 나오면서 젊은 신학생들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한국 교회에 ‘바른 말씀’의 기반을 다졌던 것이다.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를 우리말로 간행한 곳은 기독교문서선교회(CLC). 이 선교회의 대표 박영호 목사는 마틴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 출간과 함께 “기독교문서선교회의 청교도 복음주의 서적 보급이라는 문서 선교의 사명이 기반을 다지고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생명의말씀사와 기독교서회가 이제 막 신앙서적을 내놓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1970년대 중반,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 출간은 한국 교회와 신학교에 복음적 신학 서적의 단비와도 같았다.박영호 목사는 막 우리말로 출간한 ‘로마서 강해’ 제1권을 1977년 1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에게 건네주었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판권이라고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 박 목사는 “무단으로 번역한” 이 책 1권을 로이드-존스 목사에게 “용감하게” 내보였다. 그 때 로이드-존스 목사는 한국이라는 생소한 나라에서 자신의 책이, 그것도 무단으로 번역 출간됐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는 로열티를 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게다가 박 목사에게 자신의 또 다른 책 ‘목사와 설교’까지 선사했다는 사실이다. 로이드-존스 목사 역시 이미 ‘로마서 강해’가 자신을 벗어나 세계 교회의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기독교문서선교회는 ‘로마서 강해’ 시리즈 정오표를 여럿 보관하고 있다. 이 선교회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보내 온 것들이다. 박 목사는 “출판인으로서 부끄러움과 동시에 큰 감동과 격려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박 목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로마서 강해 전권의 출간은 이 시리즈 한 권 한 권이 나올 때마다 읽고 다음 권을 기다린 독자들이 함께 만든 것입니다.”서문강 목사는 30년이 걸려 완결된 ‘로마서 강해’ 번역 작업에 대한 감회를 “참으로 즐겁게, 힘들지 않았던 일”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번역 실력을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던 번역 작업”이라는 고백이다. 한 권 분량만 해도, 많게는 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원서에 기가 질릴 법도 했겠지만 서문 목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실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체험한” 30년 번역 사역이었다고 했다.마틴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가 고전에 들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이들의 숨은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2005년 2월 24일 저녁 6시 백주년기념관에서는 마틴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전권 번역출간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배가 있게 된다. 1976년 11월 제1권을 출간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듯이 30년 세월이 지난 이번에도 그렇게 함이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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