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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의 칠언 /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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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교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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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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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7:46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가상칠언 4)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십니다. 이 외침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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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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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27장-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네이버 블로그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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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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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문화 < 기사본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말은, 십자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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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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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무위키:대문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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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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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 설교]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크리스천투데이

… 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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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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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부재1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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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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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009년 여름수양회 주제강의 제 2 강 이창무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말씀 / 마가복음15:1-47 □ 요절 / 마가복음15:34 “ 제구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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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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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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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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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성경 Holy-Bible

개역개정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원문보기

개역한글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원문보기

공동번역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원문보기

새번역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원문보기

현대인의성경 오후 3시에 예수님은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 하고 크게 외치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었다. 원문보기

新共同譯 三時に イエス は 大聲で 叫ばれた. 「エロイ , エロイ , レマ , サバクタニ . 」これは, 「わが 神, わが 神, なぜわたしをお 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 」という 意味である. 원문보기

NIV And a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in a loud voice, “Eloi, Eloi, lama sabachthani?”–which means,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원문보기

KJV And at the ninth hour Jesus cried with a loud voice, saying, Eloi, Eloi, lama sabachthani? which is, being interpreted, My God, my God, why hast thou forsaken me? 원문보기

NASB A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with a loud voice, “ELOI, ELOI, LAMA SABACHTHANI?” which is translated,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원문보기

新改譯 そして, 三時に, イエス は 大聲で, 「エロイ , エロイ , ラマ , サバクタニ . 」と 叫ばれた. それは 譯すと「わが 神, わが 神. どうしてわたしをお 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 」という 意味である. 원문보기

마27장-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 말씀은 마태복음 27:45-66절입니다. 말씀인 제목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시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쏟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몸으로 감당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크게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위해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길 바랍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제육시 곧 12시부터 구시 곧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은 차마 보시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9시 곧 3시에 예수님은 어떻게 소리를 지르셨습니까? 48절을 보십시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를 질러 이르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시에 예수님은 크게 소리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말하신 말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였고 이것은 아람어였습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일생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던 교제를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친밀한 교제를 상실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실 때 죄에 대해서 쏟으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당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모든 죄를 향해서 쏟으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무게는 너무나 커서 예수님은 크게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홀로 자신만이 아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못자국에 걸린 체중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육체의 고통을 예수님은 당하셨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은 그 속에서 촛밀처럼 녹았습니다. 예수님의 혀는 잇틀에 붙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군병들의 채찍질과 침뱉음과 매질을 당하며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그의 제자들이 자신이 잡힐 때 도망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할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돌아보셨습니다. 예수님이 3년간 키우고 신뢰하였던 유다는 자기를 배반하고 목매달아 자살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런 일들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당하신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쏟으시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십자가 위에서 홀로 감당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으며 죄에 대해서 쏟으시는 하나님의 미움과 저주와 심판을 그 몸으로 다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이 예수님께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 고통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서조차 크게 부르짖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께 버림받으심으로 인간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갈대에 꿰어 예수님에게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신 고난이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기꺼이 마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로 인해 감당해야 할 고통과 심판을 완전히 감당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 예수님의 하나님께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신자들이 누리는 구원이 얼마나 큰 댓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신자들이 누리는 구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대신 당하심으로 신자들에게 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외치신 절규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에서 단말마같이 큰 비명을 지르신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죄의 심각성과 우리의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값비싼 구원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위해서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올 해에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은 느낌을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요즘 그런 느낌들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인간들에게 의해서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버림받음에 비하면 이것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버림받음에 조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버림받음에 동참하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가 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버림받음에 동참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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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서 주로 쓰는 성경 개역개정판은 Cain을 ‘가인’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본 서평에서는 옮긴이의 번역을 존중해 ‘카인’으로 표기합니다. – 편집자 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말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죽음 직전에 하신 말씀 중 가장 인간적인 말이다. 신음할 때마다 찾아오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어지럼증 속에서 수차례 경련하고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을 예수께서 최후 힘을 짜내 던진 말씀은 자신을 버린 하나님에 대한 절규였다.

다른 상황에서지만, 똑같이, 너무도 인간적인 말이 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말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뒤, 하나님이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카인이 답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카인의 항변은 “아우를 지키는 자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아닙니까? 내가 아우를 죽일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습니까?”라고 되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도 같은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고난과 고통, 죽음의 현장에서 인간을 구원해 줄 하나님은 대체 어디 있느냐는 외침이다. 예수의 절규는 처절한 인간의 실존을 대변하고 있다. 카인의 항변과 예수의 절규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주제 사라마구, 카인을 변호하다

그렇다고 살인자 카인의 항변을 변호할 수 있을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카인>(해냄)은 성경에 나오는 카인에 대한,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변론서다. 물론 온화한 변론서는 아니다. 1992년 <예수 복음>(해냄)으로 파문을 일으켜 포르투갈 정부와 갈등을 빚은 무신론자의 소설답게 구약성경을 상당히 발칙하게 비틀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재조명했다.

▲ <카인> / 주제 사라마구 지음 / 정영목 옮김 / 해냄 펴냄 / 212쪽 / 1만 4,500원 ⓒ뉴스앤조이 강동석

주제 사라마구는 본인을 카인에 투사해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실컷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인>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인들에게 <카인>은 읽기 불편한 소설일 수 있다. 하나님을 고집불통에 질투가 세고 공연히 힘자랑만 하는 지혜롭지 못한 존재로 그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지막 챕터에서 카인은 음모를 꾸미고, 하나님의 계획을 망쳐 놓는다. <카인> 속 하나님은 이런 카인의 음모를 눈치 채지 못한다. 카인과의 말싸움에서도 진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인용하는 히브리서 11장 4절에 덧붙인 글귀가 이 소설이 기본적으로 성경에 대해 취하고 있는 관점을 잘 말해 준다.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여호와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책>의 히브리서 11:4″

그러나 성경을 ‘말도 안 되는 책’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더 생각하게 만든다. 주제 사라마구는 “하나님은 선하다”는 명제로 가려질 수 있는 구약성경 속 모순(으로 보일 수 있는 대목)을 짚는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과연 선한 존재인지 의문을 던진다. 인간의 실존에 주목하고, 성경을 낯설게 보게 한다. 그런 점에서 <카인>은 문학의 역할에 충실한 책이다. <카인>이 전하는 메시지와 전개 방향은 아벨을 죽인 카인이 하나님과 나눈 대화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여호와가 묻자 카인은 질문으로 대답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네가 아우를 죽였구나. 네, 죽였습니다, 하지만 진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주이십니다, 주가 내 생명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우를 위해 내 생명이라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를 시험하는 문제였다. 주께서 직접 창조한 것을 왜 시험한단 말입니까. 나는 만물의 주권자인 여호와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존재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좋지만, 저와 내 자유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뭐, 죽이는 자유 말이냐. 주에게 내가 아벨을 죽이는 것을 막을 자유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아주 잠깐만 진실로 자비를 베풀어 겸허하게 제 제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께서는 그것을 거부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신들, 주와 다른 모든 신들은 스스로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에게 의무가 있으니까요.” (39쪽)

▲ 틴토레토(Tintoretto)의 ‘카인과 아벨'(Cain and Abel, 1550~1557년 作).

▲ 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의 ‘카인과 아벨'(Cain and Abel, 1542~1544년 作).

카인의 관점에서 읽는 구약성경

소설 속 카인은 하나님에게 아벨의 죽음에 대한 공동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따진다. 하나님은 카인의 말을 받아들이고, 카인의 이마에 표를 새겨 준다. 표를 받은 카인은 길을 떠나고, 시간 여행을 하면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들을 떠돌게 된다.

카인은 바벨탑이 허리케인으로 무너지는 현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모습,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리고성 점령과 아이성 전투에서의 패배, 이스라엘과 아모리족의 전투, 욥의 고난을 지켜보고,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는 등 곳곳을 여행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카인의 여정을 보여 주면서, 특유의 내레이션 기법으로 이를 해설한다.

주제 사라마구가 차용하는 내레이션 기법은 몰입감을 더해 준다. 변사가 자기 주관을 곁들어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소리 내어 읽기에 적합한 소설이다. 한 문장이 몇 줄이거나, 몇 페이지에 걸쳐서 한 문단이 이어질 때가 많고, 묘사와 서사, 대화와 생각과 해설 등의 경계가 모호하다. 중간중간 외경이나 신화에 나오는 모티프들도 더해진다.

카인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어린아이까지 심판하는 하나님을 비난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거나 심판할 권리가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고, 다른 여러 사건들 속에서 보인 하나님의 대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표한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든 일로 분노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레위 자손을 시켜 동족 3,000명을 죽이게 하는데, 이 현장을 본 카인은 이것이 정말 필요한 일이었나 되묻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체면을 세우는 일 말고 어떤 명분이 있느냐는 것이다. 카인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천사의 말에 “특히 사람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할 때는 계시더라고요”(164쪽)라고 비꼰다. 이런 문제 제기는 한편으로 충분한 설득력과 합리성을 갖는다.

“글쎄요, 내가 선택받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배웠어요. 그게 뭔데. 우리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는 완전히 미쳤다는 것. 감히 여호와 하나님이 미쳤다고 말하는 거야. 오직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미친 자만이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자신의 직접적인 책임이라고 인정하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할 겁니다, (중략) 하나님이라 해도 단지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자식을 죽여 장작 위에 올려놓고 태우라고 명령하는 건 옳을 수가 없어요, 가장 사악한 악마라도 어떤 사람한테 그런 걸 명령하지는 않을 겁니다.” (154~155쪽)

▲ 윌리암 부게로(William Bouguereau)의 ‘최초의 슬픔'(The First Mourning, 1888년 作).

하나님은 선한 존재인가

카인은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충분히 제기할 법한 의문을 꺼낸다. 하나님이 선하다고 하는데 반해, 이 땅에서 일반적인 정의 관념과 어긋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텅 빈 말”(164쪽)에 불과하며, “인간의 정의가 어때야 하는지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자의 관념”(155쪽)이라고 풍자한다. 카인은 동생을 죽인 자신의 죗값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죗값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죗값도 따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카인이에요, 기억하죠, 동생을 죽이고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주 가벼운 벌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릴리스가 말했다. 네, 그 말이 맞아요, 누구보다 내가 먼저 그 점을 인정할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55~156쪽)

특히 욥의 고난에 대한 카인의 의문은 기독교인으로서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맺는”(164쪽) 신을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욥이 부정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 하나님도 알고 있었겠네요. 아 그럼, 여호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지. 그러니까 여호와는 이길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내기를 하신 거네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그럼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군요, 여호와는 전보다 욥에 관해 더 알게 된 게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왜 욥이 곪은 상처로 몸이 덮인 문둥이가 되고,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어야만 했는지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171쪽)

카인이 내뱉는 말들은, 예측 불가한 사건 사고와 까닭 없는 재난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이 던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질문들이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신의 선함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 <카인>.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 줄 날이 와야만 했습니다”(206쪽)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선한 존재인지 되묻는 주제 사라마구의 <카인>에 대해 기독교는 어떤 대답을 준비할 수 있을까.

목사님 설교 텍스트 > 하나님의부재1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설교일 : 6월 28일

설교자 : 한흥렬 목사

본문말씀 : 마 Mt 27:41-50

하나님의 부재 시리즈 The absence of God 1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Why have you forsaken me?

마 Mt 27: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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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About the ninth hour Jesus cried out in a loud voice, “Eloi, Eloi, lama sabachthani?”–which means,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47절)

전 세계적인 두 가지 가장 뜨거운 화두;

코로나로 인한 ‘하나님은 무얼하고 계신가?’ 하나님 부재의 문제와

미국사태로 번져가고 있는 ‘인간은 왜 서로를 차별하는가?’ 차별과 환대의 문제중,

지난 두 주 환대시리즈 설교에 이어서, 오늘은 하나님의 부재시리즈 첫 번째 시간입니다.

1. 하나님의 부재는 누구나 느끼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음 없음으로만 치부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 경험 ‘하나님 어디에 계세요? Where is He?

뭐하고 계세요? What is He doing?’

2. 가상칠언을 보십시다.

첫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둘째: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셋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넷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다섯째: “내가 목마르다”(요19:28).

여섯째: “다 이루었다”(요19:30).

일곱째: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눅 23:46).

3.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41-44절)

4.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도 십자가에 함께 달려있었다.’

5.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지 않고야 우리 가정이(내 인생) 이렇게 될 수 있나요?’

시 22:1-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때로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옵니다. 때로 질병에 사로잡힙니다. 때로 실패하거나 어려운 시험에 시달립니다. 때로는 가정의 위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지만 어떤 때는 기도도 잘 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응답도 없습니다. 내 위의 하늘은 회색빛으로 변하고 무거운 납덩이로 짓누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시고 숨어 계시며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배도, 기도도, 교회 생활도 다 귀찮게 여겨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영혼의 어두운 밤에 던져졌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변함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기도할 수 있습니까? 고통스런 시련에 한 복판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시험당할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변함없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까? 자포자기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기도생활, 예배생활, 말씀생활, 봉사생활을 모두 중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영혼의 어두운 밤에 참된 믿음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다윗에게도 바로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하고 탄식합니다. 골리앗도 거꾸러뜨리고 단숨에 블레셋을 물리친 믿음의 거장 다윗도 하나님이 아주 멀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숨어버린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멀리 떠나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여전히 다윗을 사랑하시고 큰 계획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단지 다윗의 느낌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6. 십자가는 버림이 아니라 얻음입니다.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얻고자하심입니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무언가를 주시고자 함입니다.

버려야 얻습니다.

7.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He was there. God is here all the time.

라브리 공동체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에디 쉐이퍼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 죄수가 감옥의 창살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별을 보고 있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 어둠의 순간에 진흙을 보다가 그 진흙의 수렁에 깊이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끝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혼의 어두운 밤에도 별을 바라보고 소망중에 확신을 갖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8. 히 13:5하반절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God has said, “Never will I leave you; never will I forsake you.”

9. 광야를 지나며 / 히즈윌 노래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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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수양회 주제강의 제 2 강 이창무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말씀 / 마가복음15:1-47

■ 요절 / 마가복음15:34

“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라고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교훈으로 주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맨 처음부터 증거한 것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며, 그 사건의 의미였습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 결정적으로 성취된 사건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의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므로 구원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I. 사형 판결을 받으신 예수님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후 공회에서 철야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몰아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식민 통치하에 있었기에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법을 빌어 예수님을 죽이고자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막상 그들이 고발한 죄목은 예수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면서 로마 황제를 반역했다는 정치적인 죄목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의 칭호입니다.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고소가 사실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를 시인한다는 것은 로마의 반역자로 낙인 찍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분명하게 시인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일이 각본대로 되어가자, 신이 나서 여러 가지로 거짓 고소를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고소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가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사53:7).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죽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되 온 마음으로 전폭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아무 말 없이, 아무 변명도 없이 아버지가 주신 죽음의 잔을 마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 본 결과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처형한다는 것이 그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고소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장 예수님을 무죄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일어날 극심한 반발이 고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월절 특사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이 예수님께 받은 바 은혜가 있기에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 달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로부터 사주를 받은 무리들은 살인강도인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의외의 반응에 놀랐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그러자 백성들은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죽여라, 죽여! 예수를 죽여라!” 백성들의 외침 소리로 인해 빌라도에게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를 당혹해 한 것은 사람들이 왜 이처럼 죄 없는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에 귀신에서 놓임 받고 병고침도 받고 말씀도 받은 그 무리들이 아닙니까? 도무지 그들을 제 정신 가진 사람들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약속된 메시야, 유대인의 왕이 되심을 충분히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기는커녕 아예 없애버리고자 합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은 세상이 갖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공공연한 적개심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땅에서 꺼져 버려라.’ 이것이 그들의 외침입니다.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집 나간 탕자처럼 허랑방탕하게 사는 것도 죄요, 음욕을 품고 간음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행위나 삶이 죄의 핵심이 아닙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과 맞서려 하는 반역의 의지입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그의 속에는 온갖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면 옳지 않은 일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칩니다.

가롯 유다는 자기 욕심 때문에 은 삼십냥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기득권에 손상을 준다고 생각하고 거짓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소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총독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죄인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 주었습니다. 무리들은 자기들의 기대들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메시야는 필요없다며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라고 소리쳤습니다. 자기.. 자기.. 자기.. 온통 자기 자신만 생각하다가 그들은 그만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범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사랑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묻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만 사랑하던 자들이 저지른 죄를 고발합니다. 그들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인류 최악의 범죄에 공범자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와 다른 특별히 흉악무도한 자들이었을까요? 오래된 한 흑인 영가는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찬 147) “거기 너 있었는가?” 그렇습니다. 우리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도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우리도 진실을 회피했습니다. 우리도 소리 질러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소리질렀습니다. 그 모든 일에 우리도 공범자로 서 있습니다. 우리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 온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피 속에는 하나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죄를, 바로 여러분과 저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이 진실 앞에 우리가 마주 서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II. 고난 받으신 예수님

사형 판결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제 죽음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어떠했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처절한 육체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빌라도의 지시로 군병들에게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여섯 가닥 정도의 가죽 띠를 묶은 것이었습니다. 가죽 끝에는 날카로운 쇳덩이나 뼛조각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채찍에 맞으면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채찍을 무려 120대나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채찍에 맞아 찢기고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70Kg이나 나가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틀거리며 언덕을 오르시다가 쓰러지셨습니다. 이때 군병들의 채찍이 예수님의 등을 내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일어나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쓰러지신 후 더 이상 일어설 기력조차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은 마침 옆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만들어 낸 형벌 중에서 가장 악독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면 당장에 죽지 않고 2,3일 동안 처절한 고통을 맛보다가 피를 다 쏟고 기아와 갈증으로 죽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십자가에 못박힌 후 죽기까지 천 번 이상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하였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을 언도 받은 사형수에게 베풀어지는 유일한 자비는 두 다리를 부러뜨려 빨리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양 손과 두 발에 길이가 18cm, 두께가 7cm나 되는 굵은 대못을 박았습니다. ‘쾅! 쾅! 쾅!’ 망치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 쳤습니다. 대못이 예수님의 손목을 관통하여 나무에 박힐 때 혈관이 터져 피가 쏟아졌습니다. 신경들이 자극을 받자 온몸이 전율하였습니다. 몸에서 피와 물이 빠져나가 갈증 때문에 입천장이 갈라지고 목구멍이 바싹 바싹 타서 숨쉬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고통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시22:14,15).

둘째,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군병들은 채찍 맞으신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예수님의 이마를 뚫고 들어갔습니다. 고개 숙인 예수님의 얼굴에는 한줄기 두줄기 피가 흘려 내렸습니다. 군병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면서 조롱하고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꿇어 엎드려 절하고 “세상에 이 따위로 초라하고 힘 없는 왕이 어디 있냐?”하며 히히덕거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거벗겨진 채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셨습니다. 지나가던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였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대제사장들도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심지어 함께 못 박힌 강도들마저도 예수님께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이런 조롱과 멸시를 받으실 분이 전혀 아니십니다. 히브리서 1:3절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이 본래의 모습으로 변형되신 모습이 나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놀랍던지 해같이 세찬 빛이 예수님에게서 발산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따르면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가 없이 된 것이 없습니다. 이 예수님은 모든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 가운데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계 5:12) 그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자들로부터 수치를 당하시고 모독을 받으셨습니다. 시편 22:6절은 조롱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여기서 말하는 벌레는 ‘토라’라는 벌레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토라’를 많이 잡아 으깨서 그 즙으로 옷에 주홍빛 물감을 들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한 마리 벌레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성한 벌레가 아니라 으깨어지고 짓이겨진 피투성이 벌레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다 받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여섯 시간 동안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당하신 후 큰 소리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자기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잠시 버림 받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으심으로 예수님은 이제 온 우주에서 완전히 고독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다른 모든 순간에 예수님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어그러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진통제인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를 볼 때 예수님이 당하신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영적인 고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었습니다. 예수님도 늘 ‘하나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하는 아들이 고통으로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버림받는 아들의 고통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그 무서운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아들을 돌아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은 얼마나 더 컸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III.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에서 버림 받고 죽으셨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을 목도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십자가에 참혹하게 매달리셔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제 40문을 보면 “왜 그리스도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와 진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는 길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죄는 속량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고통의 시작점에 우리의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죄 짓는 것을 마치 커피 마시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합니다. 죄에 대해서 불감증에 걸려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별로 양심의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죄가 심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암세포와 같습니다. 처음에 암세포는 작고 미미하지만 점점 세포 조직을 파괴시켜 결국은 사람을 죽게 합니다. 이처럼 죄도 암세포같이 우리 안에 퍼져 영혼을 부패시키고 인격을 파괴시켜 사람을 추하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 영혼은 죄로 인한 고통으로 신음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또 심각한 것은 이런 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형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가 죄를 지은 이유를 아무리 유전자와 성장 환경과 잘못된 사회 구조 때문이라며 그 책임을 떠넘기려고 해도 죄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합니다(롬 6:23). 모든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죄에 대한 형벌로서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옥은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지옥에 관해 무려 70번이 넘게 언급하셨습니다. 지옥은 실제로 있습니다. 왜 있는 줄 아십니까? 죄인들을 영원히 심판하고자 하나님이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혐오하십니다. 죄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인간을 영원히 심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왜 그런 식으로 겁주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겁주는 것이 아니라 경고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죽어보면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한 줌의 희망도 없는 지옥에 갇혀 영원토록 형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계시록 21:8은 이렇게 지옥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여기서 둘째 사망이라는 말은 죽지 않고 영원히 심판만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 누구도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날개가 여섯 개 달린 순결한 천사도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 날개로 자기 얼굴을 가려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려며 외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똑똑히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분으로서 사람의 내면의 은밀한 죄까지 다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시는 죄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보실 때 하나님의 분노가 격발합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자신의 속성 때문에 반드시 죄를 벌하셔야만 합니다. 이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모두 다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까?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에 처할 수 밖에 없게 된 현실에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긍휼과 자비로 가득찼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용납하실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죽을 인간을 그냥 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거룩과 용서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그리고 완전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형벌을 그에게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진노를 죄 범한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모두 쏟아 부으심으로 자신의 거룩하심을 만족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살리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우리는 이 대속의 원리를 구약 시대 제사 제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1년 된 흠 없는 어린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택해 제사장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제물을 가져오면 제사장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였습니다. 안수한다는 것은 죄를 전가시킨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죄를 짐승에게 뒤집어 씌워 피를 흘리게 해 죽이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받아야할 죄의 형벌을 어린 양이 대신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어린 양은 장차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실 예수님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이는 “아! 드디어 우리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주실 그리스도가 오셨구나. 이제 죄에서 구원받게 되었구나”하는 감격의 외침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까? 바로 내가 당해야 할 수치와 저주와 형벌을 대신 담당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사람을 대신하여 사람이 받아야 할 수치와 저주와 형벌을 기꺼이 다 받으셨습니다. 이로서 우리가 죄에 대한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헌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그를 십자가에 높이 매달으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누구든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내 죄를 위해 죽으신 분, 자신의 그리스도로 믿을 때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진실되게 죄를 고백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서 거기서 행하신 일이 나에게 미치게 해달라고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시고 구원하여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눈을 들어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아무리 지독한 죄인이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비록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어떤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들은 다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공로를 의지하여 죄인으로서의 자기를 고백할 때 내면의 모든 죄가 완전히 지워집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더러운 우리의 죄를 흰 눈보다 더 희게 씻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을 더럽다 아니하시고 이제는 완전한 의인으로 간주하십니다. 더 이상 죄를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메시지요, 복음이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분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이 예수님 이외에 우리를 구원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는 바로 그때 성전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성소에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누구도 감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지성소(至聖所)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기에 죄로 더럽혀진 인간은 들어갈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휘장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죄로 막힌 담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그 순간 위에서 아래로 쫘-악 찢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찢으셨기 때문에 위로부터 찢어졌습니다. 하나님도 이 순간을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휘장이 찢긴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을 향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나와 너 사이의 죄 문제가 해결됐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야,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나오라. 두려워말고 담대히 나오라. 내 아들의 흘린 피를 보고 너를 기쁨으로 영접하노라”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가야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영접하고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간절히 이루고자 하신 바입니다. 이제 죄로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아빠! 라고 부르며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휘장을 지나 담대히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원래 십자가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수치의 상징이 아닙니다. 더 이상 저주의 상징이 아닙니다. 이제는 자랑스러운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내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십자가는 나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원수 마귀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십자가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최후 심판에서 구원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찬 149) 십자가 앞에서 세상에 속한 욕심이 헛된 줄 알고 버립니다. 십자가 앞에서 교만한 마음을 버립니다. 이제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죽으신 구주 예수님만을 자랑하겠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 복음만을 자랑하겠습니다.

제게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저의 자랑은 제 자신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 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노래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려서 국제 대회에서 입상했던 경력을 자랑했습니다. 고 1때부터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어려운 철학 서적을 읽으며 주워들은 얄팍한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남들이 제발 이런 나를 좀 알아주고 칭찬해 주고 인정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 앞에 서면 속으로 나를 흉보고 있다는 생각, 나의 약점을 캐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서 갑자기 입술과 온 몸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무 허물과 실수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되어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해 지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 버릴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일대일 성경 공부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제가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에게 경배와 영광을 돌리는 반역을 저지른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심판이 너무 두려워졌습니다. 어느 여름날 천둥 번개가 치는 밤이었습니다. 불현듯 저는 오늘이 내게 대한 심판이 임하는 날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불 속에 들어가 울고 두려워 떨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저는 생전 처음 진실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구원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를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십자가를 보니 역시 하나님은 제가 예상했던 대로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을 향해 쏟아 붓고 계셨습니다. 그 대상은 바로 저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제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 대신 물과 피를 쏟으시고, 저 대신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며, 저 대신 하나님께 버림받고 계셨습니다. “왜? 왜? 예수님이 왜?” 그 때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향한 사랑 때문이란다.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사랑 때문이란다.” 이해할 수도 측량할 수도 없는 이 사랑 앞에서 제 모든 고집과 불신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믿고 담대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그리스도로 옷입혀 주시고 자녀로 맞아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사귐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제가 더 알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일생 십자가 은혜에 잠겨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십자가의 증인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거룩하심과 한량없는 사랑을 완전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수님께서 흘린 피로 죄 씻음 받고, 하나님과 화평함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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