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복음 16 장 주석 | 송태근목사 누가복음 42강 \”불의한 청지기의 두 가지 지혜\”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13601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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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목사 누가복음 42강 \”불의한 청지기의 두 가지 지혜\”
본문 – 누가복음 16:1-8
성경읽기는 지루하다? 성경공부는 어렵다? No!
좋은 선생님과 좋은 학생들이 함께 하는 즐거운 성경공부시간!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CBSBible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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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목사 누가복음 42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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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16 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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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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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주석

누가복음 제 16장

=====16:1

어떤 부자 – 현장에 관리를 둔 대지주(大地主)이거나 (Jeremias) 혹은 당시 갈릴

리에 흔하였던 부재 지주(Grundmann)를 가리킨다고 본다. 아무튼 사람들이 그에게 빚

진 정도를 보아 그는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 한편 부자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

에는 많은 의견듸이 있다. 알포드(Alford)에 의하면 ‘그 부자’는 이 세상의 아들을,

메이어(Meyer)는 맘몬(돈의 신)을,올스하우젠(Olshausen)은 마귀를, 쉴라이에르마허

(Schleiermacher)는 로마인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든 간에, 본 비

유의 초점은 위기의 때를 맞아 지혜롭게 재물을 융통한 청지기에 맞춰져 있다.

청지기 – 이 말은 맡은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탁을 받은 ‘고용인’이나 ‘대리인’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말이다.KJV에는 ‘간사’ 혹은 ‘급사’, ‘집사’의 뜻인 ‘스튜어드’

(steward)로 번역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조일 수도 있으며(창 39:4-6) 또한 자유인으

로서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은 자일 수도 있다.그런데 이 비유에서와 같이 그들은 맡

은일의 성격상 재산을 관리하는 동안 부정(不正)을 저지를 가능성이 항상 있었다.한편

이 청지기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도 그의 주인인 ‘어떤 부자’에 관한 의견과도

같이 다양하다.알포드(Alford)에 의하면 청지기는 모든 제자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 안

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한편 바리새인 혹은 가룟 유다 심지어는 본디

오 빌라도를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그러나’어떤 부자’와 마찬가지로 이’청지

기’또한 개별적으로 특정 사람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다만 예수는 당시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본 비유와 같은 전체적 상황을 통해 당

신의 제자들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교훈하고자 하셨을 것으로

짐작 된다.

허비한다 – 헬라어 ‘디아스코르피조'(* )는 돈이나 재물 등을

마구탕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 청지기는 횡령 혹은 부실 경영을 퉁해 주인의 재

산을 축내었으리라 보여진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고대 근동사람들은 부

기(簿記)나, 규정된 회계 감사등을 몰랐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셈

(account), 증서(statements) 등의 용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도 이미 장부(帳簿)

등은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6:2

이 말이 어찜이뇨 – 헬라어 ‘티 투토'(* )에 대해서는 (1) ‘이것이

무슨 말인가?’, (2)’ 왜 내가 이것을 듣게 되었는가?’등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단순히 주인이 듣게 된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파 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들은 내용의 일부 혹은 전부를 사실로 여기고 ‘왜 그러한 잘못

을 행했는가’라고 질책하는 말이기 때문에 (2)의 해석이 보다 정확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 ‘보던 일’의 헬라어는 ‘로고스'(* )이다. 로고스는

‘말씀’, ‘이성’, ‘사건’ 등의 뜻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계산'(account)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재산 목록과 장부 및

각종 문서를 작성,보관하는 일까지 챗임맡고 있는 관리인이라 할수 있다. 한편 ‘셈하

다’의 뜻인 ‘아포디도미’는 단순히 계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산해서) ‘넘겨주다’,

(증서를) ‘양도하다'(render,KJV)는 의미까지도 내포된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 전체는

‘네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사무를 청산(淸算)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는 의미

가 된다.

=====16:3

땅을 파자니 – ‘파다’의 원어 ‘스카프토'(* )는 일반적으로 정신 노동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육체 노동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육체 노동 중에서도 농사짓는

것이을 의미한다.

빌어 먹자니 – ‘에피이테오'(* )는 ‘위를(위에)’이라는 뜻의 ‘에피’

와 ‘요청하다’는 뜻의 ‘아이테오’의 합성어로서 ‘구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삶의 위기 의식을 느낀 칭지기의 독백은 무엇을 해도 절망적이기만한 급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한편 그 청지기는 비록 부정을 저질렀지만 신속한 판단과 빈틈없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즉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파악하고 즉시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결단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결단은 곧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항상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바를 제시해 주고 있다.즉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여러 가

지 난감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회피하거나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

있고 결단력 있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사실 신앙 생활을 한 마디로 특징 짓는다

면 그것은 결단(決斷)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고된 모습에서 우리는 자

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16:4

직분을 빼앗긴 후에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흥청 망

청 써 버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주인은 그를 해고하게 되고 그는 난처한 상황에

서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자신이 부여받은 힘과 지혜와 재물 등 모든 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능력에 의해 스스로 획득한 것인양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하며 우리 인간들은 그것들을 가지

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창 1:28-31;욥 1:21).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낭비라는 삶은 곧 이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며,교만한 소행인 것이다.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청지기 의식(stewardship)을 가지고 겸손한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19:13;마 25:14,15;고전 6:20;벧전 4:10).

=====16:5

빚진 자 – 여기서 주인과 빚진 자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예레미야

스(Jeremias)에 의하면 빚진 자들은 아마도 토지수확의 일정량을 소작료로서 지불해야

될 소작인들이거나 또는 채무 증서를 쓰고 곡물을 받은 도매 상인들을 가리킨다고 한

다. 그런데 청지기나 빚진 자들이 이미 전에 서명한 ‘증서’를 위조(僞造)할 수 있었다

고(6, 7절)한다면 아마도 이 빚진 자들은 청지기와만 계약을 맺은 것 같다.

=====16:6

기름 백 말 – 빚을 기록한 증서는 헌금이 아닌 물품으로 적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자의 실제적인 양을 숨기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W.L.Liefeld). 본문에서 빚진 자들

의 빚진 수량은 대단히 많았는데 예컨대, 밀 백말은 약 백 에이커(acre)의 땅에서

산출되는 양이라고 한다. 요세푸스(Josphus)에 의하면 ‘말’의 뜻인 헬라어 ‘바토스’

(* )는 대략 23리터(l)에 해당된다. 따라서 기름 백 말은 약2,300 리터에 달

한다. 팔레스틴에서 감람나무 한그루의 평균 수확량은 올리브 열매로 120Kg,기름으로

는 25리터가 된다. 그러므로 기름 백말은 감람나무 약 92그루의 소산에 해당하며,돈

으로 환산하는 경우에는 천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증서를 가지고…쓰라 – ‘증서’의 뜻인 헬라어 ‘그람마(* )는 ‘문서’,

‘글’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 절에서는 ‘채무 증서’를 가리킨다. 본문의 청지기는 채

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임대차 계약서나 채무 증서 또는 약정서롤 보관하고 있었는데

증서를 채무자들로 하여금 자필로 다시 고쳐 쓰게 하거나, 새로 쓰게함으로써 속임수

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한편,율법에 의하면 이자롸 받는 행위가 불법으로 되어 있으

나(출 22:25;25:36, 37;신 15:7, 8;23:19, 20)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본문의 청지기 또한 주인 몰래 이

자를 착복해 오다가 궁지에 몰리자 그 이자부분 만큼 탕감해줌으로써, 빚진 자에게 선

심을 쓰는 한편 주인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으로 짐작된

다.

=====16:7

밀 백 석 – ‘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로스'(* , 히브리어 ‘코르'( )에

서온 마른 곡식을 재는 단위)는 약 27,500Kg으로 42헥타아르 정도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밀 1 코르의 표준가격은 금 25 데나리온이며 은

화로는 25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따라서 밀 백 석 은 2,500데나리온에 해당된다.

팔십 – 기름을 백 말 정도 빌린자에게 그 절반인 오십 말로 공재(控除)해 준것에

비해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5분의 1정도인 20석만을 공제해 주었는데 이는 두 물

품의 상품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

서는 밀이 기롬보다 훨씬 비쌌다. 빚진 자들이 가각 삭감받은 수량 즉 기름 50말, 밀

20석을 돈으로 환산하면 모두 각각 5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오백 데나리온이라고 하

는 금액은 1데나리온이 임금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노동자 한 사

람이 약 16개월 둥안 일해야 벌수 있는 금액이다.

네 증서를 가지고 – 청지기는 주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채무자들이 직접 자필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은 청지기가 임대차 계약이나 채무자들과의 계

약을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에게 유

리한 방향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각각 절반에서 1/5정도로 부체를 탕감(蕩減)해 주었

다. 미루어 짐작컨어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러한 수준에서 빚을 탕감해 주었을 것이

다. 이렇게 빚을 탕감해준데 에는 그 채무자들이 청지기가 쫓겨난 후 그에게 받은 은

혜로 인하여 그의 생계(livelihood)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저의가 숨어 있다.

=====16:8

이 세대의미…더 지혜로움이니라 –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지혜롭다는 뜻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

의 일처리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욱

지혜롭고, 단결이 잘 되며, 열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때때로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유대(紐帶) 관계가 하나넘의 자녀들

끼리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의 사

람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즉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反目) 하며

자신들만이 진리에 선 것 것처럼 타인을 멸시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하지만 본

절의 목적은 불신자들이 지혜롭게 행한 것보다 성도들은 더욱 지혜롭게 행하여야 한다

는 데 있지 결코 불신자들의 부정직과 사기술을 칭찬한 데 있지 않다(롬 2:6-8).

=====16:9

불의의 재물 – 혹자는 이 말을 금욕주의적인 쿰란(Qumran)종파의 이원론과 같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 즉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을 악하다고 보는 관점에서

나온 히브리적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부정직하게 얻은 재물’이라기

보다는 ‘하늘의보화’에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세상의 재물’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

다.

친구를 사귀라 – 재물이 선용(善用)되지 못하고 악용될 경우 황금만능 풍조가 만연

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재물일지라도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재물을

선용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시친구를 사귄다고 하는 말은 KJV에서는 ‘스스로 친

구가 되게 하는 것'(make to yourselves friends)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친구

들’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Danker), 예수께서는 물론,

누가 자신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구제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세상의 재물을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이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가 되라고 하는 말인데 이

는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길'(12:33;마 6:20)이 된다. 이 의미를 좀더 확대하

면 ‘친구’는 곧 ‘하나님’을 의미한다고도 볼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

들과 불우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12:33; 마 :20;19:21;25:31-46).

없어짙 때에 – 세상의 재물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쌓아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

면 언젠가는 부요함이 사라지고 남는 것이 전혀 없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12:21).한편’없어지다’라고 하는 말의 헬라어 ‘에클레이포'(* )

는 일반적으로 부와 세상 재물이 다 소용없게 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

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후반부의 ‘영원한 처소’를 단순히 재정적(財政的)인 면에서

안전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도의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의 나라로

서 이해한데 따른 것이다.

영원한 처소로 – 일반적으로 장막의 뜻인 ‘스케네'(* )는 일시

적인 거주지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영원한 것 즉 영구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

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서의 초월적인 영원한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 전체의

의미는, 재물을 잘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죽

음을 맞이하게 되어도 하나님이 그를 잊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구원의 방법론으로 제시하신 것은 아니다.

=====16:10

지극히 작은 것..,큰 것 – ‘지극히 작은’의 뜻인 헬라어 ‘엘라키스토스’

(* )는 ‘작은’의 뜻인 ‘미크로스'(* )의 최상급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이 잣은 것, 보잘것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큰’, ‘많

은’의 뜻인 폴뤼스(* )는 원급 형용사이다. 이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의 또다

른 표현은 11절에 의하면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 12절에 의하면 남의 것과 너희의 것

이된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세상의 재물은 하늘의 보화 즉 복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응 정도로 작은 선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세상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부

름으로써 주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가치를 과대 평가하는 것을 경고(警告)하셨다.

충성되고 – 직역하면 ‘충성된 자가 된다’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충성된 자’ 헬라

어로 ‘피스토스'(* )인데 이 말이 어원은 ‘믿다, 옳게 여기다’의 뜻인 ‘페

이도'(* )이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 즉 불의의 재물에 ‘충성하는 자’란 재

물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돈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

니라, 재물을 주고받고 또 보관하는 등의 경제 생활 영역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

뢰를 받는 사람임을 의미한다.결국 본 주석에서는 비록 청지기의 죄가 간사한 것이긴

하지만 난관을 타개해 나가는 열심과 지혜만큼은 칭찬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를 죄악된 술수로 규정할 뿐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

녀들이 이 청지기와 같은 식으로 처신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투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

한 상이한 해석에 관해 정확 한 답을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전체적 문맥을 고려하건데

본 주석의 해석이 무난하리라 본다.

=====16:14

돈을 좋아히는 자라…비웃거늘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노고에 비추어 그만한 물질적 대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당연한 측복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사회적 특권을 이용하뗘 축재하는 일

을 당연시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결과를 초

래했다. 그들은 위선(僞善)의 탈을 쓰고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척 하는 자들이었

지만 그들의 주관심사는 재물에 었었다. 이렇듯 탐욕이 가득하면서도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비유(15:1-16:13)로써 그들의 잘못을 날

카롭게 지적하셨다. 이에 대해 그들은 한낱시골 출신의 이름 없는 선생인 예수를 비웃

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교만한 자들은 그 눈이 어두워져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18:11;욥 33:9;요 9:41;계 3:17).

=====16:15

스스로 옳다 하는 –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의 뜻인 ‘디카이오오'(*

)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정당화하려고 애쓰다’이다. 즉 이는 성도가 그의

믿음 즉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게명을 지킴을 통해서 인정받게 되는 ‘하

나님의 의’와는(롬 1:17) 대조적으로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이를 정

당화(justify)하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 앞에서…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 스스로를 의롭다 하고 그것

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으니 그들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 원

하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메우 엄격하였으며 당시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과 이스라엘의 종교를 지키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대단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종교계의 다른 분파들

인 사두개파(Sadducess)와 에세네파(Essenes) 그리고 일반 백성들을 멸시하였다. 그

리고 그들은 정통적인 율법의 수호자이며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로서 자처(自處)하여

일반 백성에게 존경을 받으며 국가로부터도 그에 합당한 대접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한 속마음을 다 아셨다. 즉 그들이 인간의 눈은 속일 수 있

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시 139:7-18).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영적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교만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이 되며 우리 종교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영적

교만의 한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18:11;요 9:41).

=====16:16

율법과 선지자 – 율법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모세 오경을 그리고 선지자의 글

은 모세 오경을 제외한 구약의 나머지 부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율법과 선지자’라

는 말은 구약성경의 대명사이다(마 5:17;7:12).

요한의 때까지요 – 마 11:12 에는 ‘세례 요한때부터로 되어있으므로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의 구분속에서 세례 요한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헬라

어 상으로는 마태복음의 ‘때부터’의 뜻인 헤오스(* )나 누가복음의 ‘때까지’의

뜻인 ‘메크리'(* )는 모두 요한을 율법 시대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역

사의 전환점을 이루는 요한에 대한 본절의 언급과 관런하여 콘첼만(Conzelmann)은

구속사적 시대 구분이 이 부분에서 행해졌다고 주장한다. 결국 역사는 (1) 율법과 선

지자들의 활동시기와 (2) 예수 자신의 활동시기 (3) 또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

후의 성령 혹은 교회의 시기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예수의 핵심적인 메시지

로서 당신의 가르침 속에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4:43;6:20;9:2;13:

18;17: 21;21:31 등). 그 사상은 성서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구약에는

‘나라’라는 말 자체는 자주 언급되지 않으나 하나님 나라의 기본 개념 곧 여호와가

왕으로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개념이 저변에 깔려있다. 예컨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으로서(왕하 19:15;시 29:10;33:13,14),특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신

35:5;시 48:2) 묘사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상의 모든 불의와 궁핍이 제기된

이상적인 미래의 왕국에 대한 비전도 제시되어 있다(시 146:10;사 24:23;34:12;52:7).

이례듯 구약 속에서 그림자처럼 암시되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

도의 사역과 더불어 이 땅에 실제로 임하게 된 것이다.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 마 11:12 에는 ‘침노를 당하다’라고 하는 수동태

로 되어 있는 것에 반해 본절에서의 ‘비아제타이'(* )는 ‘침입하다’의

중간태 형이다. 여기서는 능동태와 복음에 대해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적극

성을 나타낸다. 여기서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다고 하는 표현은 만인

에게 복음이 개방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다시말해, 율법과 예

언자들은 천국을 예언하는 일을 하였고, 세례 요한은 도래할 천국을 예비(豫備)하였으

나 메시야이신 예수를 통해서 천국은 이미 도래했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그 천국을 붙

잡을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으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천국이 비록 종

국적(終局)완성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수안에서 그와 더불어 하나의

강력한 현실로 세상에 들어왔고 따라서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었으니 누구라도 믿음으

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본절의 의미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는 가고 그들 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는데도 불구하

고 바리새인들이 게속 율법 준수를 고집하는데 대한 깨우침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16:17

한 획 – 마 5:18에 의하면 이는 ‘일점 일획'(一點一劃)이라 표현되어 있다.

‘획’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한 문자를 다른 문자와 구분 지어 주는 역할을 하는 가

장 작은 단위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히브리

어 문자 중 가장작은 글자인 ‘요드'( )를 가리키며 헬라어의 ‘이오타'(* )와 상

응한다. 한편 ‘일획’이라 했을 때는 ‘벱;카프/달렛/헤;헷( ; / ; / ; )따위

등의 비슷한 모양의 글자를 구별해주는 돌출 표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율법

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로 구약성경의 붓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 조차도 모두 권위(權威)를 갖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이 말은 세상

이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구약의 말씀이 변치 않으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비록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어 복음의 시대가 임했지만 구

약의 예언과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였다(마 5: 18). 왜

냐하면 복음은 율법의 완성에서 오는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결실이므로 복음과 율법은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셨을 뿐 율법을 폐기하

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실 율법의 말씀을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구원(救援)의 확실

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갈 3:24). 이렇듯 율법과 복음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상호 보완적 역할에 의해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16:18

무릇…간음함이니라 – ‘음행한 연고’라고 하는 단서를 붙인 마 5:32절보다 본문

은 훨씬 더 엄격한 인상을 준다. 당시 이론에 관한 견해는 매우 다양했으나 그중 보수

적인 샴마이학파(School Hillel Shammai)의 진보적인 힐렐학파(the Hillel School) 의

견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전자는 이혼 조건을 부정(不貞)이나 율법 파기

등에 국한시킨 반면 후자는 어떤 이유든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를 밝힐 경우

에는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특히 힐렐의 경우는 여자 음식 솜씨 여하에 따라

이혼도 가능함을 시사하였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부도덕한 결혼 생활을 반영하

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갑자기 ‘이혼 문제’를 제기한 깃은 특별

히 ‘이혼 문제’를 통해서 율법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

고 율법의 영구성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 19:6-8의 ‘하나님이 짝지어주

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잘 나타낸

말씀이다 .그러나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보내라'(신 24:1-4) 한 말씀은 다만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해서 허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요

한의 때까지이고 지금은 복음과 메시야의 시대지만 율법의 진정한 정신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16:19

한 부자가…연락(宴樂)하는데 – 이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

였다. 그의 의복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이었는데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던 매우 비싼 옷이었으며 고운 베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더 비쌌다. 또

한 그는 매일 잔치를 벌여 세상 연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사실 부자가 누리는 부

(富) 자체가 죄일 수는 없다.다만 넘치는 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난한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에 부자의 잘못

이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자신의 부귀가 스스로의 뛰어난 노력에 대한 대가로 주

어진 것이라 믿으며 가난한 자들의 가난을 무능과 게으른 탓이라고 돌려버리기 쉽

다. 따라서 부자는 점점더 특권 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만큼 어렵다고 경계하신 예수의 말씀은(18:25)

재물의 강한 부정적 흡인력을 경계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부자들의 이러한 냉혈성을 염

두에 두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16:20

나사로 – 이는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

라는 뜻이다. 예수의 비유들 속에서 등장 인물에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이곳 한 군데 뿐

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경건을 암시하기도 하나 그가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죽

은 후에는 평안을 누리게 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의 이

름과 일치하는가 하면 나사로는 요 11장에 나오는 인물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요,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샬린자의 이름과 같다.

헌데를 앓으며 – 나사로는 몸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자(* , 에베블

레토. ‘던져져 있는’)이며 피부병을 앓는,거지이다. 그의 병이 ‘궤양’ 혹은 ‘종기’라

고도 하지만 문둥병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사로가 문둥병 환자라고 한다면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대문 – ‘퓔로나'(* )는 보통의 대문과는 달리 장식이 된 높은 솟을 대

문과 갈은 것으로서 그 부자의 집의 호화스러움과 사치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16:21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 대개의 유대인들의 경우 일단 그릇에서 바닥에 떨어

진 빵조각은 먹어서는 안 되며 도로 접시에 담지도않는데 이는 전염병을 염려해서 생

긴 습관이다.오히려 그들은 찌꺼기를 식탁 아래로 버린다(S.Kraub). 여기서 ‘떨어지

는 것’이라는 말은 ‘던져지다’의 의미이다. 즉 부자의 식탁에 앉은 자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땅 바닥에 던진것을 뜻한다.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여기서 개란 사람들이 집 안에서 기르는 개인

‘퀴나리온'(* )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뜻인 ‘퀴온'(* )이다. 이러한 개에게 시달리는 사람이란 고대 유대교의 인과

응보(因果應報)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을 의미한다. 리펠

드(Liefeld)에 의하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는 것은 나사로가 ‘개’에게까지 모욕

을 당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 한편 몇몇 학자들은(Vincent,Geldenhuys,Alford) 개들

만이 나사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헌데를 핥아주었다고 해석한다.

=====16:22

천사들에게 받들려 –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고 인도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는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천사의 역할을 보여주는 표현이다(행 27:23;히 1:14). 한

편 후기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선한 천사들이 받들어

모셔가고, 악한자가 죽으면 악귀들이 데려간다고 한다. 아마도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

을 부자의 죽음과는 달리 거지인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이 공동 묘지와 같은 곳에

버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들의 영혼이 도달하게 된 장소는 전혀반

대였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일반적

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막 12:26;행 7:32)

이시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 2 :23)으로서 낙원에 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간접적이나마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

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죽은 후 머무는 처소에대하여 성경이 결

정적인 확증을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단

7:10;마 25:31,46;롬 14:10;고전 15:44;히 9:27)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수 있다.

즉, 사후에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낙원

과 음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

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인 반면, 음부는 이 세상에 비

해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

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23:43;고후 12:4;계 2:7;6:9-11;7:9,10;20:13).

=====16:23

고통 중에 – 24절에는 그가 ‘불꽃’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지

옥의 상태가 종종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당하는 고통 상태로 묘사된다(막 9:43).

이 불로인해 당하는 고통이 문자 그대로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거지 나사로의 축복된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철저한 결핍과 소외의 상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의인들이 풍성하고 사랑

가득한 교제의 축복을 누리는데 반해, 악인들은 그 마음 속에 있는 엄청난 탐욕과는

정반대로 결핍 가운데서 목말라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부자의 돈을 매개로 찾아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말자 더 큰 결핍과 소외에 직면케 된

것이다.

눈을 들어…보고 – 예레미야스(Jeremias)는 말하기를 ‘의인들과 악인들이 저 세상

에서 서로 마주 본다고 하는 것은 후기 유대교에 잘 알려진 표상’이라고 하였다. 그러

나 13:28에 의하면 저주받은 자들이 축복받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은 최후심판 이후

에나 있을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는 장차 지옥에서 당할 끔찍한 고통

의 장면을 어느 정도 앞당겨 보여줌으로써 경고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16:24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요 8:39). 이 부자 역시 아브라함

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자랑

하는 바리새인들처럼(마 3:9)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긍횰을 얻기를 간구한다.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 21절에서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표

현과 대조가 된다. 후기 유대 사상에 의하면 의인들이 있는 곳에는 생수가 흐르고 있

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상태가 저 세상에서는 완전히 뒤바뀌

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고민하나이다 – ‘오뒤나오'(* )의 원래 뜻은 ‘괴로움을 겪다’, ‘고통당

하다’이다. 이 말은 ‘고틔’, ‘근심’, ‘비탄’의 뜻인 ‘오뒤네'(* )에서 온 것

으로, 고틔 으로 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 극심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육체적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영적 절망과 소외감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16:25

얘 – ‘테크논'(* )은 일반적 으로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호칭으로 남자

아이일 경우 ‘아들아’하는 말이며 여자 아이일경우 ‘딸아’라는 말과 같다. 아브라

함은 그를 ‘아들아’라고 부름으로써 그 자손됨을 시인(是認)하였지만, 다음에 나오는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자신의 자손 즉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유대인만의 특권이 결

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치로는 인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네 좋은 것…고난 – ‘네 좋은 것'(your good things,NLV)의 ‘네’라고 하는 소유

대명사는 12:21에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자기를 위하여’라는 의미와 유사하다. 그

러나 나사로가 받은 고난(bad thing,NLV)앞에는 소유 대명사가 없음으로,부자가

받은 ‘좋은 것’은 자신의 재물로 누린 안락인 반면 나사로는 자신의 잘못에 의해

서 받은 고난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사회의 구조적인 악 또는 가난

등에 의해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라는 정죄를 받았던 세리와 창기

들과 같은 자였음을 암시한다.

위로를 받고…고민을 받느니라 – ‘위로를 받고’의 원어 ‘파라칼레오'(*

)는 ‘옆으로 혹은 자기가 있는 쪽으로 부르다’의 뜻이 있다.이는 고통이나 슬픔

을 당한 사람 옆에서 그를 격려,고무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의미한다.한편 본 구절이,

지상에서의 부유함이 저 세상에서는 고난을,지상에서의가난함이 저 세상에서는 위로를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 응보론적 논리를 가르치거나 부는지옥을,가난은 낙원을 예비한

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탐욕과 이기심과 허영을 위해 자기자신의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가난하여 다른 사람을 돕지는 못했으나 그의 이름’나사

로'(하나님의 도우시는 자)에서 그 견건성을 추측할 수 있는 거지가 더욱더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수 있다.한편 스탤톤(Stanton)에 의하면

‘그 부자는 재물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무관심한 죄 때문에정죄 받

았다’고 한다. 즉 여기서 무조건 정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재물의 남용,과소비와 가난

한 이웃들에 대한 묵가심과 외면이다.이 비유는 그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웃을 향하여

나내었던 냉혹한 태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16:26

큰 구렁이 끼어 있어 – 정확한 의미는 ‘큰 구렁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이다.

‘큰구렁’의 원어 ‘카스마아(* )는 ‘벌어진 틈’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은

팔레스틴의 사막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으로서 장마철외에는 전혀 물이 없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말인 ‘와디’나 ‘협곡’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급은 하나님의 결정이 결코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1)

이 땅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죽고 나면 더 이상 그 같은 기회가 없게 된다는 것

과(2) 죽음에 의해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어느 누구의 권세의 능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연옥'(purgatory)이

란 교리를 만들어 지상이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가있는 자를 위

해 미사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할 때 그는 점차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김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벧전

3:18-20).

=====16:27

나사로를…보내소서 – 유대인들 중에는 죽은 사람을 퉁해서(물론 그 방법은 꿈이

든지 환상일 수 있다) 산 사람들에게 전갈을 보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많았다. 그

들은 그 예를 구약의 사울이 엔돌에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본 사실에서 제시하기도 한

다(삼상 28:8-19).그러나 사람이 죽게되면 그 영혼은 즉시 지상의 세게와 다른 차원의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한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

거해 볼 때(19-31절;23:43;고후5:1) 사울의 경우는 사단의 기만에 속은 예였다. 한편

여기서 부자는 나사로를 여전히 그의종 정도로 생각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

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현세에서의 신분 차이가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효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말이다.

=====16:28

증거하게 하여 – ‘증거하다’의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

)는 ‘자세하게 모든 것을 증언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확언이나 맹세 또는 경고

등을 의미한다.이는 죽고나서 음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심판의 엄정함과 무서움을 깨

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만 나사로를 보내주도록 요청한 것은

여전히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낸다.

=====16:29

모세뫄 선지자들…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들을지니라’의 원어 ‘아쿠오'(*

)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는 것, 더 나아

가서는 들은 바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말씀을 듣고 암송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한편 부자는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그의 다섯 형제에게 나타난다

면 그들이 나사로를 하나님의 사자로서 확실히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

수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끊임없이 강조한 모세와 선지자들을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설령 죽었다 살아난 자가 경험담을 이야기해준다고 해도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해 버리고 말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

은 그 완악한 심령 가운데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 가운

데 들어있는 아이러니(irony)를 주목해 보라. 예수는 그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

조차도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

게 알고 계셨다.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발걸

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16:30

죽은 자…회개하리이다 – 이 부자의 생각은 오늘날일반인들의 생각과 같다.즉 초

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불신자들도 믿음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만 연연하는 자는 그 기적이 드러내고자 하는 참된 진리에는 오히려 무관

심하다. 더욱이 초자연적 기적이 계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곧 자신의 세

속적인 삶으로 쉽게 복귀 하고 만다.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이중

의 폐단을 제시하며 부자의 요청을 거절하였다.하나는 현재적 사실로 그들이 현재 율

법과 선지자의 글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그 글에서 지시하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는다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미래의 가능성,즉 요11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서도 회개치 않은 것처럼,누군가가 살아 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으로부터 맡겨진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사용하는 참신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이브라함의 이말은 이 비유 뿐만 아니라 본장 전체의 결론에 해

당한다.

헬라어 누가복음 16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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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새번역,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청지기 하나를 두었다. 그는 이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서,

우리말성경,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 집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영어NIV,1 Jesus told his disciples: “There was a rich man whose manager was accused of wasting his possessions.

영어NASB,1 Now He was also saying to the disciples, “There was a rich man who had a manager, and this manager was reported to him as squandering his possessions.

영어MSG,1 Jesus said to his disciples, “There was once a rich man who had a manager. He got reports that the manager had been taking advantage of his position by running up huge personal expenses.

영어NRSV,1 Then Jesus said to the disciples, “There was a rich man who had a manager, and charges were brought to him that this man was squandering his property.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λεγεν δε και προς τους μαθητας αυτου ανθρωπος τις ην πλουσιος ος ειχεν οικονομον και ουτος διεβληθη αυτω ως διασκορπιζων τα υπαρχοντ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dicebat autem et ad discipulos suos homo quidam erat dives qui habebat vilicum et hic diffamatus est apud illum quasi dissipasset bona ipsius

히브리어Modern,1 ויאמר גם אל תלמידיו איש עשיר היה ולו פקיד על ביתו וילשינהו אליו באמרם כי מפזר הוא את קניניך׃

성 경: [눅16:1]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어떤 부자 – 현장에 관리를 둔 대지주(大地主)이거나 (Jeremias) 혹은 당시 갈릴리에 흔하였던 부재 지주(Grundmann)를 가리킨다고 본다. 아무튼 사람들이 그에게 빚진 정도를 보아 그는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 한편 부자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에는 많은 의견듸이 있다. 알포드(Alford)에 의하면 ‘그 부자’는 이 세상의 아들을, 메이어(Meyer)는 맘몬(돈의 신)을,올스하우젠(Olshausen)은 마귀를,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로마인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든 간에, 본 비유의 초점은 위기의 때를 맞아 지혜롭게 재물을 융통한 청지기에 맞춰져 있다.

󰃨 청지기 – 이 말은 맡은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탁을 받은 ‘고용인’이나 ‘대리인’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말이다. KJV에는 ‘간사’ 혹은 ‘급사’, ‘집사’의 뜻인 ‘스튜어드'(steward)로 번역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조일 수도 있으며(창 39:4-6) 또한 자유인으로서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은 자일 수도 있다.그런데 이 비유에서와 같이 그들은 맡은 일의 성격상 재산을 관리하는 동안 부정(不正)을 저지를 가능성이 항상 있었다. 한편 이 청지기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도 그의 주인인 ‘어떤 부자’에 관한 의견과도 같이 다양하다.알포드(Alford)에 의하면 청지기는 모든 제자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한편 바리새인 혹은 가룟 유다 심지어는 본디오 빌라도를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떤 부자’와 마찬가지로 이 ‘청지기’ 또한 개별적으로 특정 사람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다만 예수는 당시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본 비유와 같은 전체적 상황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교훈하고자 하셨을 것으로짐작 된다.

󰃨 허비한다 – 헬라어 ‘디아스코르피조'(*)는 돈이나 재물 등을 마구 탕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 청지기는 횡령 혹은 부실 경영을 퉁해 주인의 재산을 축내었으리라 보여진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고대 근동사람들은 부기(簿記)나, 규정된 회계 감사등을 몰랐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셈(account), 증서(statements) 등의 용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도 이미 장부(帳簿)등은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카이 포네사스 아우톤 에이펜 아우토 티 투토 아쿠오 페리 수 오포도스 톤 로곤 테스 오이코노미아스 수 우 가르 뒤네 에티 오이코노메인

개역개정,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새번역,2 그를 불러 놓고 말하였다. ‘자네를 두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 된 일인가? 자네가 맡아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그 일을 볼 수 없네.’

우리말성경,2 그래서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들여 물었다. ‘자네에 대해 들리는 말이 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장부를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내 청지기가 될 수 없네.’

가톨릭성경,2 그를 불러 말하였다. ‘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영어NIV,2 So he called him in and asked him, ‘What is this I hear about you? Give an account of your management, because you cannot be manager any longer.’

영어NASB,2 “And he called him and said to him, ‘What is this I hear about you? Give an accounting of your management, for you can no longer be manager.’

영어MSG,2 So he called him in and said, ‘What’s this I hear about you? You’re fired. And I want a complete audit of your books.’

영어NRSV,2 So he summoned him and said to him, ‘What is this that I hear about you? Give me an accounting of your management, because you cannot be my manager any longer.’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φωνησας αυτον ειπεν αυτω τι τουτο ακουω περι σου αποδος τον λογον της οικονομιας σου ου γαρ δυνηση ετι οικονομειν

라틴어Vulgate,2 et vocavit illum et ait illi quid hoc audio de te redde rationem vilicationis tuae iam enim non poteris vilicare

히브리어Modern,2 ויקרא אתו ויאמר אליו מה זאת שמעתי עליך תן חשבון פקדתך כי לא תוכל להיות עוד פקיד׃

성 경: [눅16:2]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이 말이 어찜이뇨 – 헬라어 ‘티 투토'(*)에 대해서는 (1) ‘이것이 무슨 말인가?’ (2)’ 왜 내가 이것을 듣게 되었는가?’등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단순히 주인이 듣게 된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파 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들은 내용의 일부 혹은 전부를 사실로 여기고 ‘왜 그러한 잘못을 행했는가’라고 질책하는 말이기 때문에 (2)의 해석이 보다 정확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 네 보던 일을 셈하라 – ‘보던 일’의 헬라어는 ‘로고스'(*)이다. 로고스는’말씀’, ‘이성’, ‘사건’ 등의 뜻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계산'(account)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재산 목록과 장부 및 각종 문서를 작성, 보관하는 일까지 책임맡고 있는 관리인이라 할수 있다. 한편 ‘셈하다’의 뜻인 ‘아포디도미’는 단순히 계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산해서) ‘넘겨주다’, (증서를) ‘양도하다'(render,KJV)는 의미까지도 내포된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 전체는 ‘네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사무를 청산(淸算)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는 의미가 된다.

에이펜 데 엔 헤아우토 호 오이코노모스 티 포이에소 호티 호 퀴리오스 무 아파이레이타이 텐 오이코노미안 앞 에무 스캎테인 우크 이스퀴오 에파이테인 아이스퀴노마이

개역개정,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새번역,3 그러자 그 청지기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낯이 부끄럽구나.

우리말성경,3 청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주인이 내게서 일자리를 빼앗으려 하는데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하구나.

가톨릭성경,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영어NIV,3 “The manager said to himself, ‘What shall I do now? My master is taking away my job. I’m not strong enough to dig, and I’m ashamed to beg–

영어NASB,3 “The manager said to himself, ‘What shall I do, since my master is taking the management away from me? I am not strong enough to dig; I am ashamed to beg.

영어MSG,3 “The manager said to himself, ‘What am I going to do? I’ve lost my job as manager. I’m not strong enough for a laboring job, and I’m too proud to beg. . . .

영어NRSV,3 Then the manager said to himself, ‘What will I do, now that my master is taking the position away from me? I am not strong enough to dig, and I am ashamed to beg.

헬라어신약Stephanos,3 ειπεν δε εν εαυτω ο οικονομος τι ποιησω οτι ο κυριος μου αφαιρειται την οικονομιαν απ εμου σκαπτειν ουκ ισχυω επαιτειν αισχυνομαι

라틴어Vulgate,3 ait autem vilicus intra se quid faciam quia dominus meus aufert a me vilicationem fodere non valeo mendicare erubesco

히브리어Modern,3 ויאמר הפקיד בלבו מה אעשה כי יקח אדני ממני את הפקדה לעדר לא אוכל ולשאל על הפתחים אני בוש׃

성 경: [눅16:3]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땅을 파자니 – ‘파다’의 원어 ‘스카프토'(*)는 일반적으로 정신 노동과 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육체 노동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육체 노동 중에서도 농사짓는 것을 의미한다.

󰃨 빌어 먹자니 – ‘에피이테오'(*)는 ‘위를(위에)’이라는 뜻의 ‘에피’와 ‘요청하다’는 뜻의 ‘아이테오’의 합성어로서 ‘구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삶의 위기 의식을 느낀 칭지기의 독백은 무엇을 해도 절망적이기만한 급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한편 그 청지기는 비록 부정을 저질렀지만 신속한 판단과 빈틈없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즉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파악하고 즉시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결단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결단은 곧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항상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바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회피하거나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있고 결단력 있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사실 신앙 생활을 한 마디로 특징 짓는다면 그것은 결단(決斷)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고된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에그논 티 포이에소 히나 호탄 메타스타도 에크 테스 오이코노미아스 뎈손타이 메 에이스 투스 오이쿠스 아우톤

개역개정,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새번역,4 옳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다. 내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날 때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조치해 놓아야지.’

우리말성경,4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겠다. 내가 청지기 자리를 잃을 때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해야겠다.’

가톨릭성경,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영어NIV,4 I know what I’ll do so that, when I lose my job here, people will welcome me into their houses.’

영어NASB,4 ‘I know what I shall do, so that when I am removed from the management people will welcome me into their homes.’

영어MSG,4 Ah, I’ve got a plan. Here’s what I’ll do . . . then when I’m turned out into the street, people will take me into their houses.’

영어NRSV,4 I have decided what to do so that, when I am dismissed as manager, people may welcome me into their homes.’

헬라어신약Stephanos,4 εγνων τι ποιησω ινα οταν μετασταθω της οικονομιας δεξωνται με εις τους οικου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4 scio quid faciam ut cum amotus fuero a vilicatione recipiant me in domos suas

히브리어Modern,4 ידעתי מה אעשה למען יאספוני אל בתיהם בעת אוסר מפקדתי׃

성 경: [눅16:4]

주제1: [부(富)에 관한이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직분을 빼앗긴 후에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흥청 망청 써 버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주인은 그를 해고하게 되고 그는 난처한 상황에서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자신이 부여받은 힘과 지혜와 재물 등 모든 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능력에 의해 스스로 획득한 것인양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하며 우리 인간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있다(창 1:28-31;욥 1:21).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낭비라는 삶은 곧 이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교만한 소행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청지기 의식(stewardship)을 가지고 겸손한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19:13;마 25:14,15;고전 6:20;벧전 4:10).

카이 프로스칼레사메노스 헤나 헤카스톤 톤 크레오페일레톤 투 퀴리우 헤아우투 엘레겐 토 프로토 포손 오페일레이스 토 퀴리오 무

개역개정,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새번역,5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우리말성경,5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들였다. 그가 첫 번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가톨릭성경,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영어NIV,5 “So he called in each one of his master’s debtors. He asked the first, ‘How much do you owe my master?’

영어NASB,5 “And he summoned each one of his master’s debtors, and he began saying to the first, ‘How much do you owe my master?’

영어MSG,5 “Then he went at it. One after another, he called in the people who were in debt to his master. He said to the first, ‘How much do you owe my master?’

영어NRSV,5 So, summoning his master’s debtors one by one, he asked the first, ‘How much do you owe my master?’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προσκαλεσαμενος ενα εκαστον των χρεωφειλετων του κυριου εαυτου ελεγεν τω πρωτω ποσον οφειλεις τω κυριω μου

라틴어Vulgate,5 convocatis itaque singulis debitoribus domini sui dicebat primo quantum debes domino meo

히브리어Modern,5 ויקרא אל כל איש אשר נשה בהם אדניו וישאל את הראשון כמה אתה חיב לאדני׃

성 경: [눅16:5]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빚진 자 – 여기서 주인과 빚진 자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빚진 자들은 아마도 토지수확의 일정량을 소작료로서 지불해야 될 소작인들이거나 또는 채무 증서를 쓰고 곡물을 받은 도매 상인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청지기나 빚진 자들이 이미 전에 서명한 ‘증서’를 위조(僞造)할 수 있었다고(6, 7절)한다면 아마도 이 빚진 자들은 청지기와만 계약을 맺은 것 같다.

호 데 에이펜 헤카톤 바투스 엘라이우 호 데 에이펜 아우토 뎈사이 수 타 그람마타 카이 카디사스 타케오스 그랖손 펜테콘타

개역개정,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새번역,6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 ㉠그, ‘바투스’. 백 바투스는 약 3킬로리터

우리말성경,6 그 사람은 ‘올리브 기름 100바투스를 꾸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청지기가 말했다. ‘당신의 빚 증서요. 어서 앉아서 50바투스라 적으시오.’

가톨릭성경,6 그가 ‘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6 “‘Eight hundred gallons of olive oil,’ he replied. “The manager told him, ‘Take your bill, sit down quickly, and make it four hundred.’

영어NASB,6 “And he said, ‘A hundred measures of oil.’ And he said to him, ‘Take your bill, and sit down quickly and write fifty.’

영어MSG,6 “He replied, ‘A hundred jugs of olive oil.’ “The manager said, ‘Here, take your bill, sit down here–quick now–write fifty.’

영어NRSV,6 He answered, ‘A hundred jugs of olive oil.’ He said to him, ‘Take your bill, sit down quickly, and make it fifty.’

헬라어신약Stephanos,6 ο δε ειπεν εκατον βατους ελαιου και ειπεν αυτω δεξαι σου το γραμμα και καθισας ταχεως γραψον πεντηκοντα

라틴어Vulgate,6 at ille dixit centum cados olei dixitque illi accipe cautionem tuam et sede cito scribe quinquaginta

히브리어Modern,6 ויאמר מאת בתי שמן ויאמר אליו קח את שטרך ומהר שב וכתבת חמשים׃

성 경: [눅16:6]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기름 백 말 – 빚을 기록한 증서는 헌금이 아닌 물품으로 적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자의 실제적인 양을 숨기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W.L.Liefeld). 본문에서 빚진 자들의 빚진 수량은 대단히 많았는데 예컨대, 밀 백말은 약 백 에이커(acre)의 땅에서 산출되는 양이라고 한다. 요세푸스(Josphus)에 의하면 ‘말’의 뜻인 헬라어 ‘바토스'(*)는 대략 23리터(l)에 해당된다. 따라서 기름 백 말은 약2,300 리터에 달한다. 팔레스틴에서 감람나무 한그루의 평균 수확량은 올리브 열매로 120Kg,기름으로는 25리터가 된다. 그러므로 기름 백말은 감람나무 약 92그루의 소산에 해당하며, 돈으로 환산하는 경우에는 천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 증서를 가지고…쓰라 – ‘증서’의 뜻인 헬라어 ‘그람마(*)는 ‘문서’, ‘글’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 절에서는 ‘채무 증서’를 가리킨다. 본문의 청지기는 채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임대차 계약서나 채무 증서 또는 약정서롤 보관하고 있었는데 증서를 채무자들로 하여금 자필로 다시 고쳐 쓰게 하거나, 새로 쓰게함으로써 속임수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한편, 율법에 의하면 이자를 받는 행위가 불법으로 되어 있으나(출 22:25;25:36, 37;신 15:7, 8;23:19, 20)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본문의 청지기 또한 주인 몰래 이자를 착복해 오다가 궁지에 몰리자 그 이자 부분 만큼 탕감해줌으로써, 빚진 자에게 선심을 쓰는 한편 주인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에페이타 헤테로 에이펜 쉬 데 포손 오페일레이스 호 데 에이펜 헤카톤 코루스 시투 레게이 아우토 뎈사이 수 타 그람마타 카이 그랖손 옥도에콘타

개역개정,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새번역,7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묻기를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였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받아서,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였다. / ㉡그, ‘코루스’. 백 코루스는 약 35킬로리터

우리말성경,7 그러고 나서 청지기는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의 빚은 얼마요?’ 그 사람은 ‘밀 100코루스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청지기가 말했다.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서 80코루스라 적으시오.’

가톨릭성경,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7 “Then he asked the second, ‘And how much do you owe?’ “‘A thousand bushels of wheat,’ he replied. “He told him, ‘Take your bill and make it eight hundred.’

영어NASB,7 “Then he said to another, ‘And how much do you owe?’ And he said, ‘A hundred measures of wheat.’ He said to him, ‘Take your bill, and write eighty.’

영어MSG,7 “To the next he said, ‘And you, what do you owe?’ “He answered, ‘A hundred sacks of wheat.’ “He said, ‘Take your bill, write in eighty.’

영어NRSV,7 Then he asked another, ‘And how much do you owe?’ He replied, ‘A hundred containers of wheat.’ He said to him, ‘Take your bill and make it eighty.’

헬라어신약Stephanos,7 επειτα ετερω ειπεν συ δε ποσον οφειλεις ο δε ειπεν εκατον κορους σιτου και λεγει αυτω δεξαι σου το γραμμα και γραψον ογδοηκοντα

라틴어Vulgate,7 deinde alio dixit tu vero quantum debes qui ait centum choros tritici ait illi accipe litteras tuas et scribe octoginta

히브리어Modern,7 ואל אחר אמר כמה אתה חיב ויאמר מאת כר חטים ויאמר קח את שטרך וכתב שמנים׃

성 경: [눅16:7]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밀 백 석 – ‘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로스'(*, 히브리어 ‘코르'(*)에서온 마른 곡식을 재는 단위)는 약 27,500Kg으로 42헥타아르 정도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밀 1 코르의 표준가격은 금 25 데나리온이며 은화로는 25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따라서 밀 백 석 은 2,500데나리온에 해당된다.

󰃨 팔십 – 기름을 백 말 정도 빌린자에게 그 절반인 오십 말로 공재(控除)해 준것에 비해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5분의 1정도인 20석만을 공제해 주었는데 이는 두 물품의 상품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밀이 기롬보다 훨씬 비쌌다. 빚진 자들이 가각 삭감받은 수량 즉 기름 50말, 밀 20석을 돈으로 환산하면 모두 각각 5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오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금액은 1데나리온이 임금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노동자 한 사람이 약 16개월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 네 증서를 가지고 – 청지기는 주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채무자들이 직접 자필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은 청지기가 임대차 계약이나 채무자들과의 계약을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각각 절반에서 1/5정도로 부체를 탕감(蕩減)해 주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러한 수준에서 빚을 탕감해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빚을 탕감해준데에는 그 채무자들이 청지기가 쫓겨난 후 그에게 받은 은혜로 인하여 그의 생계(livelihood)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저의가 숨어 있다.

카이 에페네센 호 퀴리오스 톤 오이코노몬 테스 아디키아스 호티 프로니모스 에포이에센 오티 호이 휘오이 투 아이오노스 투투 프로니모테로이 휘페르 투스 휘우스 투 포토스 에이스 텐 게네안 텐 헤아우톤 에이신

개역개정,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새번역,8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우리말성경,8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의 약삭빠른 행동을 보고 오히려 칭찬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삭빠르다.

가톨릭성경,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영어NIV,8 “The master commended the dishonest manager because he had acted shrewdly. For the people of this world are more shrewd in dealing with their own kind than are the people of the light.

영어NASB,8 “And his master praised the unrighteous manager because he had acted shrewdly; for the sons of this age are more shrewd in relation to their own kind than the sons of light.

영어MSG,8 “Now here’s a surprise: The master praised the crooked manager! And why? Because he knew how to look after himself. Streetwise people are smarter in this regard than law-abiding citizens. They are on constant alert, looking for angles, surviving by their wits.

영어NRSV,8 And his master commended the dishonest manager because he had acted shrewdly; for the children of this age are more shrewd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are the children of light.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επηνεσεν ο κυριος τον οικονομον της αδικιας οτι φρονιμως εποιησεν οτι οι υιοι του αιωνος τουτου φρονιμωτεροι υπερ τους υιους του φωτος εις την γενεαν την εαυτων εισιν

라틴어Vulgate,8 et laudavit dominus vilicum iniquitatis quia prudenter fecisset quia filii huius saeculi prudentiores filiis lucis in generatione sua sunt

히브리어Modern,8 וישבח האדון את פקיד העולה על אשר הערים לעשות כי בני העולם הזה ערומים הם בדורם מבני האור׃

성 경: [눅16:8]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이 세대의미…더 지혜로움이니라 –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지혜롭다는 뜻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처리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욱 지혜롭고, 단결이 잘 되며, 열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때때로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유대(紐帶) 관계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 즉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反目) 하며 자신들만이 진리에 선 것 것처럼 타인을 멸시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하지만 본절의 목적은 불신자들이 지혜롭게 행한 것보다 성도들은 더욱 지혜롭게 행하여야 한다는 데 있지 결코 불신자들의 부정직과 사기술을 칭찬한 데 있지 않다(롬 2:6-8).

카이 에고 휘민 레고 헤아우토이스 포이에사테 필루스 에크 투 마모나 테스 아디키아스 히나 호탄 에클리페 뎈손타이 휘마스 에이스 타스 아이오니우스 스케나스

개역개정,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새번역,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 ㉢그, ‘맘몬’ ㉣그, ‘장막’

우리말성경,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너희를 위해 친구를 만들라. 그래서 재물이 다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장막으로 환영하게 하라.

가톨릭성경,9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영어NIV,9 I tell you, use worldly wealth to gain friends for yourselves, so that when it is gone, you will be welcomed into eternal dwellings.

영어NASB,9 “And I say to you, make friends for yourselves by means of the wealth of unrighteousness, so that when it fails, they will receive you into the eternal dwellings.

영어MSG,9 I want you to be smart in the same way–but for what is right–using every adversity to stimulate you to creative survival, to concentrate your attention on the bare essentials, so you’ll live, really live, and not complacently just get by on good behavior.”

영어NRSV,9 And I tell you, make friends for yourselves by means of dishonest wealth so that when it is gone, they may welcome you into the eternal homes.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γω υμιν λεγω ποιησατε εαυτοις φιλους εκ του μαμωνα της αδικιας ινα οταν εκλιπητε δεξωνται υμας εις τας αιωνιους σκηνας

라틴어Vulgate,9 et ego vobis dico facite vobis amicos de mamona iniquitatis ut cum defeceritis recipiant vos in aeterna tabernacula

히브리어Modern,9 וגם אני אמר לכם עשו לכם אהבים בממון העולה למען בעת כלתו יאספו אתכם אל משכנות עולם׃

성 경: [눅16:9]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불의의 재물 – 혹자는 이 말을 금욕주의적인 쿰란(Qumran)종파의 이원론과 같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 즉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을 악하다고 보는 관점에서 나온 히브리적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부정직하게 얻은 재물’이라기 보다는 ‘하늘의 보화’에 반대되는 의미로서의 ‘세상의 재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겠다.

󰃨 친구를 사귀라 – 재물이 선용(善用)되지 못하고 악용될 경우 황금만능 풍조가 만연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재물일지라도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재물을 선용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친구를 사귄다’고 하는 말은 KJV에서는 ‘스스로 친구가 되게 하는 것'(make to yourselves friends)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친구들’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Danker), 예수께서는 물론, 누가 자신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구제해야 할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세상의 재물을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이 가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요 친구가 되라고 하는 말인데 이는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길'(12:33;마 6:20)이 된다. 이 의미를 좀더 확대하면 ‘친구’는 곧 ‘하나님’을 의미한다고도 볼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과 불우한 자들에게 구제하는 것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12:33; 마 :20;19:21;25:31-46).

󰃨 없어짙 때에 – 세상의 재물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쌓아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부요함이 사라지고 남는 것이 전혀 없는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12:21). 한편 ‘없어지다’라고 하는 말의 헬라어 ‘에클레이포'(*) 는 일반적으로 부와 세상 재물이 다 소용없게 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후반부의 ‘영원한 처소’를 단순히 재정적(財政的)인 면에서 안전한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성도의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해한데 따른 것이다.

󰃨 영원한 처소로 – 일반적으로 장막의 뜻인 ‘스케네'(*)는 일시적인 거주지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영원한 것 즉 영구적인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서의 초월적인 영원한 나라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 전체의 의미는, 재물을 잘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도 하나님이 그를 잊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께서 구원의 방법론으로 제시하신 것은 아니다.

호 피스토스 엔 엘라키스토 카이 엔 폴로 피스토스 에스틴 카이 호 엔 엘라키스토 아디코스 카이 엔 폴로 아디코스 에스틴

개역개정,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새번역,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

우리말성경,10 누구든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은 많은 일에도 충성할 것이요, 누구든지 적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많은 일에도 불의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영어NIV,10 “Whoever can be trusted with very little can also be trusted with much, and whoever is dishonest with very little will also be dishonest with much.

영어NASB,10 “He who is faithful in a very little thing is faithful also in much; and he who is unrighteous in a very little thing is unrighteous also in much.

영어MSG,10 Jesus went on to make these comments: If you’re honest in small things, you’ll be honest in big things;

영어NRSV,10 “Whoever is faithful in a very little is faithful also in much; and whoever is dishonest in a very little is dishonest also in much.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 πιστος εν ελαχιστω και εν πολλω πιστος εστιν και ο εν ελαχιστω αδικος και εν πολλω αδικος εστιν

라틴어Vulgate,10 qui fidelis est in minimo et in maiori fidelis est et qui in modico iniquus est et in maiori iniquus est

히브리어Modern,10 הנאמן במעט מזער נאמן גם בהרבה והמעול במעט מזער מעול גם בהרבה׃

성 경: [눅16:10]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청지기 비유]

󰃨 지극히 작은 것..,큰 것 – ‘지극히 작은’의 뜻인 헬라어 ‘엘라키스토스'(*)는 ‘작은’의 뜻인 ‘미크로스'(*)의 최상급으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이 잣은 것, 보잘것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큰’, ‘많은’의 뜻인 폴뤼스(*)는 원급 형용사이다. 이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의 또다른 표현은 11절에 의하면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 12절에 의하면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된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세상의 재물은 하늘의 보화 즉 복음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응 정도로 작은 선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상 재물을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부름으로써 주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가치를 과대 평가하는 것을 경고(警告)하셨다.

󰃨 충성되고 – 직역하면 ‘충성된 자가 된다’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충성된 자’ 헬라어로 ‘피스토스'(*)인데 이 말이 어원은 ‘믿다, 옳게 여기다’의 뜻인 ‘페이도'(*)이다. 따라서 지극히 작은 것 즉 불의의 재물에 ‘충성하는 자’란 재물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돈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주고받고 또 보관하는 등의 경제 생활 영역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결국 본 주석에서는 비록 청지기의 죄가 간사한 것이긴 하지만 난관을 타개해 나가는 열심과 지혜만큼은 칭찬을 받았다고 설명하였다. 반면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은 이를 죄악된 술수로 규정할 뿐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청지기와 같은 식으로 처신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투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상이한 해석에 관해 정확한 답을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전체적 문맥을 고려하건데 본 주석의 해석이 무난하리라 본다.

에이 운 엔 토 아디코 마모나 피스토이 우크 에게네스데 토 알레디논 티스 휘민 피스튜세이

개역개정,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새번역,11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 ㉤그, ‘맘몬’

우리말성경,11 그러니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 충실하지 못했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가톨릭성경,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영어NIV,11 So if you have not been trustworthy in handling worldly wealth, who will trust you with true riches?

영어NASB,11 “Therefore if you have not been faithful in the use of unrighteous wealth, who will entrust the true riches to you?

영어MSG,11 If you’re a crook in small things, you’ll be a crook in big things.

영어NRSV,11 If then you have not been faithful with the dishonest wealth, who will entrust to you the true riches?

헬라어신약Stephanos,11 ει ουν εν τω αδικω μαμωνα πιστοι ουκ εγενεσθε το αληθινον τις υμιν πιστευσει

라틴어Vulgate,11 si ergo in iniquo mamona fideles non fuistis quod verum est quis credet vobis

히브리어Modern,11 לכן אם בממון העולה לא הייתם נאמנים את האמתי מי יפקיד בידכם׃

카이 에이 엔 토 알로트리오 피스토이 우크 에게네스데 토 휘메테론 티스 휘민 도세이

개역개정,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새번역,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였으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인들 내주겠느냐?

우리말성경,12 또 너희가 남의 재산을 다루는 데 충실하지 못했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 몫의 재산을 주겠느냐?

가톨릭성경,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영어NIV,12 And if you have not been trustworthy with someone else’s property, who will give you property of your own?

영어NASB,12 “And if you have not been faithful in the use of that which is another’s, who will give you that which is your own?

영어MSG,12 If you’re not honest in small jobs, who will put you in charge of the store?

영어NRSV,12 And if you have not been faithful with what belongs to another, who will give you what is your own?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ει εν τω αλλοτριω πιστοι ουκ εγενεσθε το υμετερον τις υμιν δωσει

라틴어Vulgate,12 et si in alieno fideles non fuistis quod vestrum est quis dabit vobis

히브리어Modern,12 ואם בדבר אשר לאחרים לא הייתם נאמנים את אשר לכם מי יתן לכם׃

우데이스 오이케테스 뒤나타이 뒤시 퀴리오이스 둘류에인 에 가르 톤 헤나 미세세이 카이 톤 헤테론 아가페세이 에 헤노스 안뎈세타이 카이 투 헤테루 카타프로네세이 우 뒤나스데 데오 둘류에인 카이 마모나

개역개정,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새번역,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 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그, ‘맘몬’

우리말성경,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이 주인은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든가, 저 주인에게 헌신하고 이 주인은 무시하든가 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가톨릭성경,13 “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영어NIV,13 “No servant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he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영어NASB,13 “No servant can serve two masters; for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else he will be devoted to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God and wealth.”

영어MSG,13 No worker can serve two bosses: He’ll either hate the first and love the second Or adore the first and despise the second. You can’t serve both God and the Bank.

영어NRSV,13 No slave can serve two masters; for a slave will either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God and wealth.”

헬라어신약Stephanos,13 ουδεις οικετης δυναται δυσι κυριοις δουλευειν η γαρ τον ενα μισησει και τον ετερον αγαπησει η ενος ανθεξεται και του ετερου καταφρονησει ου δυνασθε θεω δουλευειν και μαμωνα

라틴어Vulgate,13 nemo servus potest duobus dominis servire aut enim unum odiet et alterum diliget aut uni adherebit et alterum contemnet non potestis Deo servire et mamonae

히브리어Modern,13 אין עבד אשר יוכל לעבד שני אדנים כי ישנא את האחד ויאהב את האחר או ידבק באחד ואת האחר יבזה לא תוכלו עבד את האלהים ואת הממון׃

에쿠온 데 타우타 판타 호이 파리사이오이 필라르귀로이 휘파르콘테스 카이 엨세뮈크테리존 아우톤

개역개정,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새번역,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를 비웃었다.

우리말성경,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습니다.

가톨릭성경,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영어NIV,14 The Pharisees, who loved money, heard all this and were sneering at Jesus.

영어NASB,14 Now the Pharisees, who were lovers of money, were listening to all these things and were scoffing at Him.

영어MSG,14 When the Pharisees, a money-obsessed bunch, heard him say these things, they rolled their eyes, dismissing him as hopelessly out of touch.

영어NRSV,14 The Pharisees, who were lovers of money, heard all this, and they ridicul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4 ηκουον δε ταυτα παντα και οι φαρισαιοι φιλαργυροι υπαρχοντες και εξεμυκτηριζο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4 audiebant autem omnia haec Pharisaei qui erant avari et deridebant illum

히브리어Modern,14 וישמעו כל זאת גם הפרושים אשר הם אהבי כסף וילעגו לו׃

성 경: [눅16:14]

주제1: [부(富)에 간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돈을 좋아하는 자라…비웃거늘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노고에 비추어 그만한 물질적 대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당연한 측복이라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사회적 특권을 이용하뗘 축재하는 일을 당연시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들은 위선(僞善)의 탈을 쓰고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척 하는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주관심사는 재물에 었었다. 이렇듯 탐욕이 가득하면서도 스스로 의인으로 자처하는 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비유(15:1-16:13)로써 그들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셨다. 이에 대해 그들은 한낱시골 출신의 이름 없는 선생인 예수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교만한 자들은 그 눈이 어두워져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18:11;욥 33:9;요 9:41;계 3:17).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에스테 호이 디카이운테스 헤아우투스 에노피온 톤 안드로폰 호 데 데오스 기노스케이 타스 카르디아스 휘몬 호티 토 엔 안드로포이스 휲셀론 브델뤼그마 에노피온 투 데우

개역개정,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새번역,15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혐오스러운 것이다.

우리말성경,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눈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너희 마음을 다 아신다.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영어NIV,15 He said to them, “You are the ones who justify yourselves in the eyes of men, but God knows your hearts. What is highly valued among men is detestable in God’s sight.

영어NASB,15 And He said to them, “You are those who justify yourselves in the sight of men, but God knows your hearts; for that which is highly esteemed among men is detestable in the sight of God.

영어MSG,15 So Jesus spoke to them: “You are masters at making yourselves look good in front of others, but God knows what’s behind the appearance. What society sees and calls monumental, God sees through and calls monstrous.

영어NRSV,15 So he said to them, “You are those who justify yourselves in the sight of others; but God knows your hearts; for what is prized by human beings is an abomination in the sight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υμεις εστε οι δικαιουντες εαυτους ενωπιον των ανθρωπων ο δε θεος γινωσκει τας καρδιας υμων οτι το εν ανθρωποις υψηλον βδελυγμα ενωπιον του θε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15 et ait illis vos estis qui iustificatis vos coram hominibus Deus autem novit corda vestra quia quod hominibus altum est abominatio est ante Deum

히브리어Modern,15 ויאמר אליהם אתם הם המצטדקים לפני האדם ואלהים יודע את לבבכם כי הגבה באדם תועבה הוא לפני האלהים׃

성 경: [눅16:15]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스스로 옳다 하는 – ‘옳게 여기다’ ‘정당화하다’의 뜻인 ‘디카이오오'(*)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정당화하려고 애쓰다’이다. 즉 이는 성도가 그의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을 통해서 인정받게 되는 ‘하나님의 의’와는(롬 1:17) 대조적으로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이를 정당화(justify)하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 사람 앞에서…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 스스로를 의롭다 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으니 그들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 원하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메우 엄격하였으며 당시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과 이스라엘의 종교를 지키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대단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 종교계의 다른 분파들인 사두개파(Sadducess)와 에세네파(Essenes) 그리고 일반 백성들을 멸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정통적인 율법의 수호자이며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로서 자처(自處)하여 일반 백성에게 존경을 받으며 국가로부터도 그에 합당한 대접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한 속마음을 다 아셨다. 즉 그들이 인간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시 139:7-18). 그런데 그들의 이 같은 영적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교만은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원인이 되며 우리 종교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영적교만의 한 예가 된다고 할 수 있다(18:11;요 9:41).

호 노모스 카이 호이 프로페타이 메크리 요안누 아포 토테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유앙겔리제타이 카이 파스 에이스 아우텐 비아제타이

개역개정,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새번역,16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다. 그 뒤로부터는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모두 ㉦거기에 억지로 밀고 들어간다. / ㉦또는 ‘그리로 침입한다’

우리말성경,16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의 때까지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며 모든 사람이 그 나라 안으로 침략해 들어가고 있다.

가톨릭성경,16 “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그 뒤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이 나라에 들어가려고 힘을 쓴다.

영어NIV,16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proclaimed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is being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

영어NASB,16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proclaimed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has been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

영어MSG,16 God’s Law and the Prophets climaxed in John; Now it’s all kingdom of God–the glad news and compelling invitation to every man and woman.

영어NRSV,16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in effect until John came; since then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is proclaimed, and everyone tries to enter it by force.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 νομος και οι προφηται εως ιωαννου απο τοτε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ευαγγελιζεται και πας εις αυτην βιαζεται

라틴어Vulgate,16 lex et prophetae usque ad Iohannem ex eo regnum Dei evangelizatur et omnis in illud vim facit

히브리어Modern,16 התורה והנביאים עד יוחנן ומן אז והלאה בשורת מלכות האלהים וכל איש בחזקה יבוא בה׃

성 경: [눅16:16]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율법과 선지자 – 율법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모세 오경을 그리고 선지자의 글은 모세 오경을 제외한 구약의 나머지 부분을 가리킨다. 따라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대명사이다(마 5:17;7:12).

󰃨 요한의 때까지요 – 마 11:12 에는 ‘세례 요한때부터로 되어있으므로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의 구분속에서 세례 요한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헬라어 상으로는 마태복음의 ‘때부터’의 뜻인 헤오스(*)나 누가복음의 ‘때까지’의 뜻인 ‘메크리'(*)는 모두 요한을 율법 시대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는 요한에 대한 본절의 언급과 관런하여 콘첼만(Conzelmann)은 구속사적 시대 구분이 이 부분에서 행해졌다고 주장한다. 결국 역사는 (1) 율법과 선지자들의 활동시기와 (2) 예수 자신의 활동시기 (3) 또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의 성령 혹은 교회의 시기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예수의 핵심적인 메시지로서 당신의 가르침 속에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4:43;6:20;9:2;13: 18;17: 21;21:31 등). 그 사상은 성서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구약에는 ‘나라’라는 말 자체는 자주 언급되지 않으나 하나님 나라의 기본 개념 곧 여호와가 왕으로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개념이 저변에 깔려있다. 예컨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으로서(왕하 19:15;시 29:10;33:13,14), 특히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신 35:5;시 48:2) 묘사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현실상의 모든 불의와 궁핍이 제기된 이상적인 미래의 왕국에 대한 비전도 제시되어 있다(시 146:10;사 24:23;34:12;52:7). 이렇듯 구약 속에서 그림자처럼 암시되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이 땅에 실제로 임하게 된 것이다.

󰃨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 마 11:12 에는 ‘침노를 당하다’라고 하는 수동태로 되어 있는 것에 반해 본절에서의 ‘비아제타이'(*)는 ‘침입하다’의 중간태 형이다. 여기서는 능동태와 복음에 대해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적극성을 나타낸다. 여기서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있다고 하는 표현은 만인에게 복음이 개방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누가의 관심을 반영한다. 다시말해, 율법과 예언자들은 천국을 예언하는 일을 하였고, 세례 요한은 도래할 천국을 예비(豫備)하였으나 메시야이신 예수를 통해서 천국은 이미 도래했으며 따라서 사람들이 그 천국을 붙잡을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으며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천국이 비록 종국적(終局) 완성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수안에서 그와 더불어 하나의 강력한 현실로 세상에 들어왔고 따라서 사람들이 소유하게 되었으니 누구라도 믿음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본절의 의미는 이미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는 가고 그들 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게속 율법 준수를 고집하는데 대한 깨우침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유코포테론 데 에스틴 톤 우라논 카이 텐 겐 파렐데인 에 투 노무 미안 케라이안 페세인

개역개정,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새번역,17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 더 쉽다.

우리말성경,17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율법에서 한 획이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 쉽다.

가톨릭성경,17 율법에서 한 획이 빠지는 것보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이 더 쉽다.”

영어NIV,17 It is easier for heaven and earth to disappear than for the least stroke of a pen to drop out of the Law.

영어NASB,17 ” But it is easier for heaven and earth to pass away than for one stroke of a letter of the Law to fail.

영어MSG,17 The sky will disintegrate and the earth dissolve before a single letter of God’s Law wears out.

영어NRSV,17 But it is easier for heaven and earth to pass away, than for one stroke of a letter in the law to be droppe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ευκοπωτερον δε εστιν τον ουρανον και την γην παρελθειν η του νομου μιαν κεραιαν πεσειν

라틴어Vulgate,17 facilius est autem caelum et terram praeterire quam de lege unum apicem cadere

히브리어Modern,17 אבל נקל כי יעברו השמים והארץ מאשר יפל קוץ אחד מן התורה׃

성 경: [눅16:17]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한 획 – 마 5:18에 의하면 이는 ‘일점 일획'(一點一劃)이라 표현되어 있다. ‘획’은 히브리어에 있어서 한 문자를 다른 문자와 구분 지어 주는 역할을 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히브리어 문자 중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를 가리키며 헬라어의 ‘이오타'(*)와 상응한다. 한편 ‘일획’이라 했을 때는 ‘벱;카프/달렛/헤;헷( ; / ; / ; )따위 등의 비슷한 모양의 글자를 구별해주는 돌출 표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은 율법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로 구약성경의 붓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 조차도 모두 권위(權威)를 갖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이 말은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구약의 말씀이 변치 않으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비록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어 복음의 시대가 임했지만 구약의 예언과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였다(마 5: 18). 왜냐하면 복음은 율법의 완성에서 오는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결실이므로 복음과 율법은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셨을 뿐 율법을 폐기하신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실 율법의 말씀을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구원(救援)의 확실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갈 3:24). 이렇듯 율법과 복음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상호 보완적 역할에 의해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파스 호 아폴뤼온 텐 귀나이카 아우투 카이 가몬 헤테란 모이큐에이 카이 호 아폴렐뤼메넨 아포 안드로스 가몬 모이큐에이

개역개정,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새번역,18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은 간음하는 것이며,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사람도 간음하는 것이다.”

우리말성경,18 누구든지 남자가 자기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고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8 “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누구나 간음하는 것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영어NIV,18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and marries another woman commits adultery, and the man who marries a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영어NASB,18 “Everyone who divorces his wife and marries another commits adultery, and he who marries one who is divorced from a husband commits adultery.

영어MSG,18 Using the legalities of divorce as a cover for lust is adultery; Using the legalities of marriage as a cover for lust is adultery.

영어NRSV,18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and marries another commits adultery, and whoever marries a woman divorced from her husband commits adultery.

헬라어신약Stephanos,18 πας ο απολυων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και γαμων ετεραν μοιχευει και πας ο απολελυμενην απο ανδρος γαμων μοιχευει

라틴어Vulgate,18 omnis qui dimittit uxorem suam et ducit alteram moechatur et qui dimissam a viro ducit moechatur

히브리어Modern,18 כל איש המשלח את אשתו ולקח אחרת נאף הוא וכל הלקח את הגרושה מאישה נאף הוא׃

성 경: [눅16:18]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대한 책망]

󰃨 무릇…간음함이니라 – ‘음행한 연고’라고 하는 단서를 붙인 마 5:32절보다 본문은 훨씬 더 엄격한 인상을 준다. 당시 이론에 관한 견해는 매우 다양했으나 그중 보수적인 샴마이학파(School Hillel Shammai)의 진보적인 힐렐학파(the Hillel School) 의 견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전자는 이혼 조건을 부정(不貞)이나 율법 파기 등에 국한시킨 반면 후자는 어떤 이유든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를 밝힐 경우에는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특히 힐렐의 경우는 여자 음식 솜씨 여하에 따라 이혼도 가능함을 시사하였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부도덕한 결혼 생활을 반영하는 표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갑자기 ‘이혼 문제’를 제기한 것은 특별히 ‘이혼 문제’를 통해서 율법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고 율법의 영구성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 19:6-8의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바로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잘 나타낸 말씀이다. 그러나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보내라'(신 24:1-4) 한 말씀은 다만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해서 허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이고 지금은 복음과 메시야의 시대지만 율법의 진정한 정신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안드로포스 데 티스 엔 플루시오스 카이 에네디뒤스케토 포르퓌한 카이 부쏜 유프라이노메노스 맏 헤메란 람프로스

개역개정,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새번역,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우리말성경,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항상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기며 사치스럽게 살았다.

가톨릭성경,19 “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영어NIV,19 “There was a rich man who was dressed in purple and fine linen and lived in luxury every day.

영어NASB,19 “Now there was a rich man, and he habitually dressed in purple and fine linen, joyously living in splendor every day.

영어MSG,19 “There once was a rich man, expensively dressed in the latest fashions, wasting his days in conspicuous consumption.

영어NRSV,19 “There was a rich man who was dressed in purple and fine linen and who feasted sumptuously every day.

헬라어신약Stephanos,19 ανθρωπος δε τις ην πλουσιος και ενεδιδυσκετο πορφυραν και βυσσον ευφραινομενος καθ ημεραν λαμπρως

라틴어Vulgate,19 homo quidam erat dives et induebatur purpura et bysso et epulabatur cotidie splendide

히브리어Modern,19 איש עשיר היה והוא לבוש ארגמן ושש ויתעגג וישמח יום יום׃

성 경: [눅16:19]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한 부자가…연락(宴樂)하는데 – 이 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의 의복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이었는데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던 매우 비싼 옷이었으며 고운 베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더 비쌌다. 또한 그는 매일 잔치를 벌여 세상 연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사실 부자가 누리는 부(富) 자체가 죄일 수는 없다. 다만 넘치는 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가난한 거지 나사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에 부자의 잘못이있다. 일반적으로 부자는 자신의 부귀가 스스로의 뛰어난 노력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라 믿으며 가난한 자들의 가난을 무능과 게으른 탓이라고 돌려버리기 쉽다. 따라서 부자는 점점더 특권 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만큼 어렵다고 경계하신 예수의 말씀은(18:25) 재물의 강한 부정적 흡인력을 경계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부자들의 이러한 냉혈성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프토코스 데 티스 오노마티 라자로스 에베블레토 프로스 톤 퓔로나 아우투 헤일코메노스

개역개정,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새번역,20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우리말성경,20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상처투성이 몸으로 있었다.

가톨릭성경,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영어NIV,20 At his gate was laid a beggar named Lazarus, covered with sores

영어NASB,20 “And a poor man named Lazarus was laid at his gate, covered with sores,

영어MSG,20 A poor man named Lazarus, covered with sores, had been dumped on his doorstep.

영어NRSV,20 And at his gate lay a poor man named Lazarus, covered with sores,

헬라어신약Stephanos,20 πτωχος δε τις ην ονοματι λαζαρος ος εβεβλητο προς τον πυλωνα αυτου ηλκωμενος

라틴어Vulgate,20 et erat quidam mendicus nomine Lazarus qui iacebat ad ianuam eius ulceribus plenus

히브리어Modern,20 ואיש אביון ושמו לעזר משכב פתח שער ביתו והוא מלא אבעבעות׃

성 경: [눅16:20]

주제1: [부(富)에 관한 안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나사로 – 이는 히브리어 ‘엘리에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이다. 예수의 비유들 속에서 등장 인물에 이름을 붙인 경우는 이곳 한 군데 뿐이다. 이는 가난한 사람의 경건을 암시하기도 하나 그가 지금은 고통 중에 있으나 죽은 후에는 평안을 누리게 됨을 암시하기도 한다. 한편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종의 이름과 일치하는가 하면 나사로는 요 11장에 나오는 인물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요, 예수께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린 자의 이름과 같다.

󰃨 헌데를 앓으며 – 나사로는 몸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자(*, 에베블레토. ‘던져져 있는’)이며 피부병을 앓는, 거지이다. 그의 병이 ‘궤양’ 혹은 ‘종기’라고도 하지만 문둥병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사로가 문둥병 환자라고 한다면 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 대문 – ‘퓔로나'(*)는 보통의 대문과는 달리 장식이 된 높은 솟을 대문과 같은 것으로서 그 부자의 집의 호화스러움과 사치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카이 에피뒤몬 코르타스데나이 아포 톤 핖톤톤 아포 테스 트라페제스 투 플루시우 알라 카이 호이 퀴네스 에르코메노이 에펠레이콘 타 헬케 아우투

개역개정,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새번역,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우리말성경,21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다. 그런데 심지어는 개들마저 와서 그 상처를 핥았다.

가톨릭성경,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영어NIV,21 and longing to eat what fell from the rich man’s table. Even the dogs came and licked his sores.

영어NASB,21 and longing to be fed with the crumbs which were falling from the rich man’s table; besides, even the dogs were coming and licking his sores.

영어MSG,21 All he lived for was to get a meal from scraps off the rich man’s table. His best friends were the dogs who came and licked his sores.

영어NRSV,21 who longed to satisfy his hunger with what fell from the rich man’s table; even the dogs would come and lick his sores.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επιθυμων χορτασθηναι απο των ψιχιων των πιπτοντων απο της τραπεζης του πλουσιου αλλα και οι κυνες ερχομενοι απελειχον τα ελκη αυτου

라틴어Vulgate,21 cupiens saturari de micis quae cadebant de mensa divitis sed et canes veniebant et lingebant ulcera eius

히브리어Modern,21 ויתאו לשבע מן הפרורים הנפלים מעל שלחן העשיר וגם הכלבים באו וילקו אבעבעותיו׃

성 경: [눅16:21]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 대개의 유대인들의 경우 일단 그릇에서 바닥에 떨어진 빵조각은 먹어서는 안 되며 도로 접시에 담지도 않는데 이는 전염병을 염려해서 생긴 습관이다. 오히려 그들은 찌꺼기를 식탁 아래로 버린다(S.Kraub). 여기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던져지다’의 의미이다. 즉 부자의 식탁에 앉은 자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땅 바닥에 던진 것을 뜻한다.

󰃨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 여기서 개란 사람들이 집 안에서 기르는 개인 ‘퀴나리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납게 거리를 쏘다니는 개의 뜻인 ‘퀴온'(*)이다. 이러한 개에게 시달리는 사람이란 고대 유대교의 인과 응보(因果應報)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벌을 받고 있는 죄인을 의미한다. 리펠드(Liefeld)에 의하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는 것은 나사로가 ‘개’에게까지 모욕을 당한 것을 뜻한다고 한다. 한편 몇몇 학자들은(Vincent, Geldenhuys, Alford) 개들만이 나사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헌데를 핥아주었다고 해석한다.

에게네토 데 아포다네인 톤 프토콘 카이 아페네크데나이 아우톤 휘포 톤 앙겔론 에이스 톤 콜폰 아브라암 아페다넨 데 카이 호 플루시오스 카이 에타페

개역개정,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새번역,22 그러다가,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고, 그 부자도 죽어서 묻히었다.

우리말성경,22 나중에 그 거지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갔다. 그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다.

가톨릭성경,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영어NIV,22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영어NASB,22 “Now the poor man died and was carried away by the angels to Abraham’s bosom; and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영어MSG,22 “Then he died, this poor man, and was taken up by the angels to the lap of Abraham.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영어NRSV,22 The poor man died and was carried away by the angels to be with Abraham.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γενετο δε αποθανειν τον πτωχον και απενεχθηναι αυτον υπο των αγγελων εις τον κολπον του αβρααμ απεθανεν δε και ο πλουσιος και εταφη

라틴어Vulgate,22 factum est autem ut moreretur mendicus et portaretur ab angelis in sinum Abrahae mortuus est autem et dives et sepultus est in inferno

히브리어Modern,22 ויהי כאשר מת האביון ויובל על ידי המלאכים אל חיק אברהם וימת גם העשיר ויקבר׃

성 경: [눅16:22]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천사들에게 받들려 –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고 인도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는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천사의 역할을 보여주는 표현이다(행 27:23;히 1:14). 한편 후기 유대교 사상에 의하면 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을 선한 천사들이 받들어 모셔가고, 악한 자가 죽으면 악귀들이 데려간다고 한다. 아마도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을 부자의 죽음과는 달리 거지인 나사로는 장례식도 없이 공동 묘지와 같은 곳에 버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들의 영혼이 도달하게 된 장소는 전혀 반대였다.

󰃨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막 12:26;행 7:32)이시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약 2 :23)으로서 낙원에 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문은 간접적이나마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부분이다. 인간이 죽은 후 머무는 처소에 대하여 성경이 결정적인 확증을 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 여러 곳의 종합적 고찰을 통해(단 7:10;마 25:31,46;롬 14:10;고전 15:44;히 9:27) 대략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수 있다. 즉, 사후에 인간의 육체는 무덤에서 부패하나 영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낙원과 음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영은 낙원에, 불신자들의 영혼은 음부에 가는데 낙원은 이 세상에 비해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인 반면, 음부는 이 세상에 비해 고통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종국적으로 도래할 완전한 천국과 지옥에 비하면 그야말로 그림자에 불과하다(23:43;고후 12:4;계 2:7;6:9-11; 7:9,10;20:13).

카이 엔 토 하데 에파라스 투스 옾달무스 아우투 휘파르콘 엔 바사노이스 호라 아브라암 아포 마크로덴 카이 라자론 엔 토이스 콜포이스 아우투

개역개정,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새번역,23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 ㉧그, ‘하데스’

우리말성경,23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 보니 저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다.

가톨릭성경,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영어NIV,23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영어NASB,23 “In Hades he lifted up his eyes, being in torment, and saw Abraham far away and Lazarus in his bosom.

영어MSG,23 In hell and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in the distance and Lazarus in his lap.

영어NRSV,23 In Hades, where he was being tormented,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εν τω αδη επαρας τους οφθαλμους αυτου υπαρχων εν βασανοις ορα τον αβρααμ απο μακροθεν και λαζαρον εν τοις κολποι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23 elevans oculos suos cum esset in tormentis videbat Abraham a longe et Lazarum in sinu eius

히브리어Modern,23 ובהיותו במכאבות בשאול וישא את עיניו וירא את אברהם מרחוק ואת לעזר בחיקו׃

성 경: [눅16:23]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고통 중에 – 24절에는 그가 ‘불꽃’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지옥의 상태가 종종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당하는 고통 상태로 묘사된다(막 9:43). 이 불로 인해 당하는 고통이 문자 그대로인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거지 나사로의 축복된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철저한 결핍과 소외의 상태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의인들이 풍성하고 사랑 가득한 교제의 축복을 누리는데 반해, 악인들은 그 마음 속에 있는 엄청난 탐욕과는 정반대로 결핍 가운데서 목말라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부자의 돈을 매개로 찾아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말자 더 큰 결핍과 소외에 직면케 된 것이다.

󰃨 눈을 들어…보고 – 예레미야스(Jeremias)는 말하기를 ‘의인들과 악인들이 저 세상에서 서로 마주 본다고 하는 것은 후기 유대교에 잘 알려진 표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3:28에 의하면 저주받은 자들이 축복받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은 최후심판 이후에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께서는 장차 지옥에서 당할 끔찍한 고통의 장면을 어느 정도 앞당겨 보여줌으로써 경고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카이 아우토스 포네사스 에이펜 파테르 아브라암 엘레에손 메 카이 펨프손 라자론 히나 밮세 토 아크론 투 닼튀루 아우투 휘다토스 카이 카탚슄세 텐 글로싼 무 호티 오뒤노마이 엔 테 플로기 타우테

개역개정,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새번역,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우리말성경,24 그가 아브라함에게 외쳤다. ‘조상 아브라함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 그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 찍어서 제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지금 이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성경,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영어NIV,24 So he called to him, ‘Father Abraham, have pity on me and send Lazarus to dip the tip of his finger in water and cool my tongue, because I am in agony in this fire.’

영어NASB,24 “And he cried out and said, ‘Father Abraham, have mercy on me, and send Lazarus so that he may dip the tip of his finger in water and cool off my tongue, for I am in agony in this flame.’

영어MSG,24 He called out, ‘Father Abraham, mercy! Have mercy! Send Lazarus to dip his finger in water to cool my tongue. I’m in agony in this fire.’

영어NRSV,24 He called out, ‘Father Abraham, have mercy on me, and send Lazarus to dip the tip of his finger in water and cool my tongue; for I am in agony in these flames.’

헬라어신약Stephanos,24 και αυτος φωνησας ειπεν πατερ αβρααμ ελεησον με και πεμψον λαζαρον ινα βαψη το ακρον του δακτυλου αυτου υδατος και καταψυξη την γλωσσαν μου οτι οδυνωμαι εν τη φλογι ταυτη

라틴어Vulgate,24 et ipse clamans dixit pater Abraham miserere mei et mitte Lazarum ut intinguat extremum digiti sui in aqua ut refrigeret linguam meam quia crucior in hac flamma

히브리어Modern,24 ויצעק ויאמר אבי אברהם חנני ושלח נא את לעזר ויטבל את קצה אצבעו במים למען קרר את לשוני כי עניתי במוקד הזה׃

성 경: [눅16:24]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요 8:39). 이 부자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처럼(마 3:9) 혈통적 특권에 의지하여 긍횰을 얻기를 간구한다.

󰃨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 21절에서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표현과 대조가 된다. 후기 유대 사상에 의하면 의인들이 있는 곳에는 생수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상태가 저 세상에서는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 고민하나이다 – ‘오뒤나오'(*)의 원래 뜻은 ‘괴로움을 겪다’, ‘고통당하다’이다. 이 말은 ‘고통’, ‘근심’, ‘비탄’의 뜻인 ‘오뒤네'(*)에서 온 것으로, 고틔 으로 인해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 극심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는 육체적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영적 절망과 소외감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에이펜 데 아브라암 테크논 므네스데티 호티 아펠라베스 타 아가다 수 엔 테 조에 수 카이 라자로스 호모이오스 타 카카 뉜 데 호데 파라칼레이타이 쉬 데 오뒤나사이

개역개정,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새번역,25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우리말성경,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얘야, 네가 살아 있을 때를 기억해 보아라. 네가 온갖 좋은 것을 다 받는 동안 나사로는 온갖 나쁜 것만 다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가톨릭성경,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영어NIV,25 “But Abraham replied, ‘Son, remember that in your lifetime you received your good things, while Lazarus received bad things, but now he is comforted here and you are in agony.

영어NASB,25 “But Abraham said, ‘Child, remember that during your life you received your good things, and likewise Lazarus bad things; but now he is being comforted here, and you are in agony.

영어MSG,25 “But Abraham said, ‘Child, remember that in your lifetime you got the good things and Lazarus the bad things. It’s not like that here. Here he’s consoled and you’re tormented.

영어NRSV,25 But Abraham said, ‘Child, remember that during your lifetime you received your good things, and Lazarus in like manner evil things; but now he is comforted here, and you are in agony.

헬라어신약Stephanos,25 ειπεν δε αβρααμ τεκνον μνησθητι οτι απελαβες συ τα αγαθα σου εν τη ζωη σου και λαζαρος ομοιως τα κακα νυν δε οδε παρακαλειται συ δε οδυνασαι

라틴어Vulgate,25 et dixit illi Abraham fili recordare quia recepisti bona in vita tua et Lazarus similiter mala nunc autem hic consolatur tu vero cruciaris

히브리어Modern,25 ויאמר אברהם בני זכר כי לקחת טובך בחייך וגם לעזר לקח את הרעות ועתה הוא ינחם ואתה תצטער׃

성 경: [눅16:25]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얘 – ‘테크논'(*)은 일반적 으로 부모가 자녀를 부르는 호칭으로 남자 아이일 경우 ‘아들아’하는 말이며 여자 아이일 경우 ‘딸아’라는 말과 같다. 아브라함은 그를 ‘아들아’라고 부름으로써 그 자손됨을 시인(是認)하였지만, 다음에 나오는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자신의 자손 즉 선택된 민족이라고 하는 유대인만의 특권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가치로는 인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네 좋은 것…고난 – ‘네 좋은 것'(your good things,NLV)의 ‘네’라고 하는 소유 대명사는 12:21에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자기를 위하여’라는 의미와 유사하다. 그러나 나사로가 받은 고난(bad thing,NLV)앞에는 소유 대명사가 없음으로, 부자가 받은 ‘좋은 것’은 자신의 재물로 누린 안락인 반면 나사로는 자신의 잘못에 의해서 받은 고난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사회의 구조적인 악 또는 가난 등에 의해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라는 정죄를 받았던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자였음을 암시한다.

󰃨 위로를 받고…고민을 받느니라 – ‘위로를 받고’의 원어 ‘파라칼레오'(*)는 ‘옆으로 혹은 자기가 있는 쪽으로 부르다’의 뜻이 있다. 이는 고통이나 슬픔을 당한 사람 옆에서 그를 격려,고무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의미한다. 한편 본 구절이, 지상에서의 부유함이 저 세상에서는 고난을, 지상에서의 가난함이 저 세상에서는 위로를 받는다는 단순한 인과 응보론적 논리를 가르치거나 부는 지옥을, 가난은 낙원을 예비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탐욕과 이기심과 허영을 위해 자기 자신의 재물을 사용하는 사람보다는 가난하여 다른 사람을 돕지는 못했으나 그의 이름 ‘나사로'(하나님의 도우시는 자)에서 그 경건성을 추측할 수 있는 거지가 더욱더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자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수 있다. 한편 스탤톤(Stanton)에 의하면 ‘그 부자는 재물만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무관심한 죄 때문에 정죄 받았다’고 한다. 즉 여기서 무조건 정죄되고 있는 것은 바로 재물의 남용, 과소비와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무관심과 외면이다. 이 비유는 그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었던 냉혹한 태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카이 엔 파시 투토이스 메탘쉬 헤몬 카이 휘몬 카스마 메가 에스테맄타이 호포스 호이 델론테스 디아베나이 엔덴 프로스 휘마스 메 뒤논타이 메데 에케이덴 프로스 헤마스 디아페로신

개역개정,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새번역,26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우리말성경,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어 여기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고 거기서도 우리 쪽으로 건너올 수가 없다.’

가톨릭성경,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영어NIV,26 And besides all this, between us and you a great chasm has been fixed, so that those who want to go from here to you cannot, nor can anyone cross over from there to us.’

영어NASB,26 ‘And besides all this, between us and you there is a great chasm fixed, so that those who wish to come over from here to you will not be able, and that none may cross over from there to us.’

영어MSG,26 Besides, in all these matters there is a huge chasm set between us so that no one can go from us to you even if he wanted to, nor can anyone cross over from you to us.’

영어NRSV,26 Besides all this, between you and us a great chasm has been fixed, so that those who might want to pass from here to you cannot do so, and no one can cross from there to us.’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επι πασιν τουτοις μεταξυ ημων και υμων χασμα μεγα εστηρικται οπως οι θελοντες διαβηναι εντευθεν προς υμας μη δυνωνται μηδε οι εκειθεν προς ημας διαπερωσιν

라틴어Vulgate,26 et in his omnibus inter nos et vos chasma magnum firmatum est ut hii qui volunt hinc transire ad vos non possint neque inde huc transmeare

히브리어Modern,26 ומלבד כל זאת שוחה גדולה מפסקת בינינו וביניכם לבלתי יוכלו עבור החפצים ללכת מפה אליכם ולבלתי יעברו משם אלינו׃

성 경: [눅16:26]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큰 구렁이 끼어 있어 – 정확한 의미는 ‘큰 구렁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서’이다. ‘큰구렁’의 원어 ‘카스마아(*)는 ‘벌어진 틈’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은 팔레스틴의 사막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형으로서 장마철외에는 전혀 물이 없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말인 ‘와디’나 ‘협곡’을 가리킨다. 이 큰 구렁에 대한 아브라함의 언급은 하나님의 결정이 결코 변경될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1) 이 땅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죽고 나면 더 이상 그 같은 기회가 없게 된다는 것과(2) 죽음에 의해 결정된 각자의 처소는 어느 누구의 권세의 능력으로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에서는 ‘연옥'(purgatory)이란 교리를 만들어 지상이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 가있는 자를 위해 미사나 헌금, 각종 교회 봉사를 행할 때 그는 점차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김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성경에 위배되는 사상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벧전3:18-20).

에이펜 데 에로토 세 운 파테르 히나 펨프세스 아우톤 에이스 톤 오이콘 투 파트로스 무

개역개정,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새번역,27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우리말성경,27 부자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발 부탁입니다. 나사로를 저희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가톨릭성경,27 부자가 말하였다. ‘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영어NIV,27 “He answered, ‘Then I beg you, father, send Lazarus to my father’s house,

영어NASB,27 “And he said, ‘Then I beg you, father, that you send him to my father’s house–

영어MSG,27 “The rich man said, ‘Then let me ask you, Father: Send him to the house of my father

영어NRSV,27 He said, ‘Then, father, I beg you to send him to my father’s house–

헬라어신약Stephanos,27 ειπεν δε ερωτω ουν σε πατερ ινα πεμψης αυτον εις τον οικον του πατρος μου

라틴어Vulgate,27 et ait rogo ergo te pater ut mittas eum in domum patris mei

히브리어Modern,27 ויאמר אם כן אבי שאל אני מאתך כי תשלח אתו אל בית אבי׃

성 경: [눅16:27]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나사로를…보내소서 – 유대인들 중에는 죽은 사람을 퉁해서(물론 그 방법은 꿈이든지 환상일 수 있다) 산 사람들에게 전갈을 보낼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그 예를 구약의 사울이 엔돌에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본 사실에서 제시하기도 한다(삼상 28:8-19). 그러나 사람이 죽게되면 그 영혼은 즉시 지상의 세게와 다른 차원의 영적 세계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한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볼 때(19-31절;23:43;고후5:1) 사울의 경우는 사단의 기만에 속은 예였다. 한편 여기서 부자는 나사로를 여전히 그의 종 정도로 생각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게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현세에서의 신분 차이가 저 세상에서도 여전히 효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말이다.

에코 가르 펜테 아델푸스 호포스 디아마르튀레타이 아우토이스 히나 메 카이 아우토이 엘도신 에이스 톤 토폰 투톤 테스 바사누

개역개정,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새번역,28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말성경,28 제게 다섯 형제가 있으니 그들이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도록 나사로가 가서 경고하게 해 주십시오.’

가톨릭성경,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영어NIV,28 for I have five brothers. Let him warn them, so that they will not also come to this place of torment.’

영어NASB,28 for I have five brothers–in order that he may warn them, so that they will not also come to this place of torment.’

영어MSG,28 where I have five brothers, so he can tell them the score and warn them so they won’t end up here in this place of torment.’

영어NRSV,28 for I have five brothers–that he may warn them, so that they will not also come into this place of torment.’

헬라어신약Stephanos,28 εχω γαρ πεντε αδελφους οπως διαμαρτυρηται αυτοις ινα μη και αυτοι ελθωσιν εις τον τοπον τουτον της βασανου

라틴어Vulgate,28 habeo enim quinque fratres ut testetur illis ne et ipsi veniant in locum hunc tormentorum

히브리어Modern,28 כי יש לי חמשה אחים למען יעיד בהם פן יבאו גם הם אל מקום המעצבה הזה׃

성 경: [눅16:28]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증거하게 하여 – ‘증거하다’의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는 ‘자세하게 모든 것을 증언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확언이나 맹세 또는 경고 등을 의미한다. 이는 죽고나서 음부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심판의 엄정함과 무서움을 깨닫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만 나사로를 보내주도록 요청한 것은 여전히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낸다.

레게이 데 아브라암 에쿠시 모위세아 카이 투스 프로페타스 아쿠사토산 아우톤

개역개정,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새번역,29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우리말성경,29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29 아브라함이, ‘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영어NIV,29 “Abraham replied,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listen to them.’

영어NASB,29 “But Abraham said,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hear them.’

영어MSG,29 “Abraham answered,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to tell them the score. Let them listen to them.’

영어NRSV,29 Abraham replied, ‘They have Moses and the prophets; they should listen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9 λεγει αυτω αβρααμ εχουσιν μωσεα και τους προφητας ακουσατωσαν αυτων

라틴어Vulgate,29 et ait illi Abraham habent Mosen et prophetas audiant illos

히브리어Modern,29 ויאמר אברהם יש להם משה והנביאים אליהם ישמעון׃

성 경: [눅16:29]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모세와 선지자들…그들에게 들을지니라 – ‘들을지니라’의 원어 ‘아쿠오'(*)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이해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들은 바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은 그들의 말씀을 듣고 암송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의미이다. 한편 부자는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그의 다섯 형제에게 나타난다면 그들이 나사로를 하나님의 사자로서 확실히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끊임없이 강조한 모세와 선지자들을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설령 죽었다 살아난 자가 경험담을 이야기해준다고 해도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은 그 완악한 심령 가운데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아이러니(irony)를 주목해 보라. 예수는 그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을 때조차도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셨다.

호 데 에이펜 우키 파테르 아브라암 알 에안 티스 아포 네크론 포류데 프로스 아우투스 메타노에수신

개역개정,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새번역,30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30 부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조상 아브라함이여, 누군가 죽었던 사람이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30 부자가 다시 ‘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영어NIV,30 “‘No, father Abraham,’ he said, ‘but if someone from the dead goes to them, they will repent.’

영어NASB,30 “But he said, ‘No, father Abraham, but if someone goes to them from the dead, they will repent!’

영어MSG,30 “‘I know, Father Abraham,’ he said, ‘but they’re not listening. If someone came back to them from the dead, they would change their ways.’

영어NRSV,30 He said, ‘No, father Abraham; but if someone goes to them from the dead, they will repent.’

헬라어신약Stephanos,30 ο δε ειπεν ουχι πατερ αβρααμ αλλ εαν τις απο νεκρων πορευθη προς αυτους μετανοησουσιν

라틴어Vulgate,30 at ille dixit non pater Abraham sed si quis ex mortuis ierit ad eos paenitentiam agent

히브리어Modern,30 ויאמר לא כן אבי אברהם אך אם ילך אליהם אחד מן המתים אז ישובו׃

성 경: [눅16:30]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죽은 자…회개하리이다 – 이 부자의 생각은 오늘날 일반인들의 생각과 같다.즉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불신자들도 믿음을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기적 자체에만 연연하는 자는 그 기적이 드러내고자 하는 참된 진리에는 오히려 무관심하다. 더욱이 초자연적 기적이 계속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은 곧 자신의 세속적인 삶으로 쉽게 복귀하고 만다.

에이펜 데 아우토 에이 모위세오스 카이 톤 프로페톤 우크 아쿠우신 욷 에안 티스 에크 네크론 아나스테 페이스데손타이

개역개정,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새번역,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성경,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살아난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가톨릭성경,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영어NIV,31 “He said to him, ‘If they do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they will not be convinced even if someone rises from the dead.'”

영어NASB,31 “But he said to him, ‘If they do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they will not be persuaded even if someone rises from the dead.'”

영어MSG,31 “Abraham replied, ‘If they won’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they’re not going to be convinced by someone who rises from the dead.'”

영어NRSV,31 He said to him, ‘If they do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convinced even if someone rises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31 ειπεν δε αυτω ει μωσεως και των προφητων ουκ ακουουσιν ουδε εαν τις εκ νεκρων αναστη πεισ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31 ait autem illi si Mosen et prophetas non audiunt neque si quis ex mortuis resurrexerit credent

히브리어Modern,31 ויאמר אליו אם לא ישמעו אל משה ואל הנביאים גם כי יקום אחד מן המתים לא יאמינו׃

성 경: [눅16:31]

주제1: [부(富)에 관한 인자의 교훈]

주제2: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은 이중의 폐단을 제시하며 부자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하나는 현재적 사실로 그들이 현재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글에서 지시하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는다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미래의 가능성, 즉 요11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죽음에서 부활한 나사로를 보고서도 회개치 않은 것처럼, 누군가가 살아 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재물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사용하는 참신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 말은 이 비유 뿐만 아니라 본장 전체의 결론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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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16장

예수님은 욕심과 자만에 쌓인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잘 감화를 받을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향하신다(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사실 요한의 때까지이다. 유대인에게만 한정된 구약의 통치는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였다. 이때까지는 너희들이 의와 구원을 독점한 것처럼 보였고 또 너희는 이것으로 우쭐하였으며, 그리고 이 때문에 율법과 선지자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았지만, 세례 요한이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파한 후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신약 시대의 통치에 의하면 사람이 율법에 능통하냐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누구든 복음 왕국에서는 평등한 것이다. 이제는 누구도 출신이 좋다고 남보다 특권을 누릴 수 있다거나 또 통치자이나 바리새인이 그 나라로 이끌어 줄 때까지 기다리자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약의 통치는 구원이 유대인들의 것이었을 때의 유대인의 통치 제도처럼 민족을 단위 하는 정치적 통치 기구의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의 부주의와 사람들의 아첨에 현혹되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천심 해야하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였다.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에 부와 세상의 재물에 대한 약속이 많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멸시하여 말씀하신다고 비웃었다. 하나님의 일군들 중 위대한 많은 사람들, 예로써 아브라함이나 다윗 같은 사람들도 부자였지 않는가? 라고 그들은 힐난했다. 그리스도는 대답하셨다.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 나라의 전파가 새로운 방향 전환을 취하고 있음이 전파되기 시작한다.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박해받는 이들이 지금은 복되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존경하는 백성들에게 보답으로 값싸고 쉬우며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허용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전파되면서 백성들의 눈은 열리고, 전에처럼 바리새인들을 우러르지 않을 때에, 전에 훈련받은 대로의 신앙 생활의 무관심을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로 거룩한 폭력을 강행한다.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는 고통을 당해야 하고, 세태(世態)와 역행하여 싸워야 하고, 반대길로 가는 사람들과 대항하여 강행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자.그렇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율법을 무효화하려는 어떤 시도로 반대하신다(17절).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 보다,” 땅의 기초와 하늘의 기둥이, 즉 그렇게도 굳게 세워져 있는 “하늘과 땅이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덕적인 법은 확고하고 불변의 것이다. 그 일점이라도 빠뜨릴 수는 없다. 율법이 부과하는 의무는 여전히 의무이며, 율법이 금하는 죄는 역시 죄이다. 진실로 율법의 명령은 복음에 의해서 설명되고 강화된다. 또한 더욱 영적으로 나타난다. 의식적인 법은 복음 안에서 완성되어지고 불분명한 곳은 복음으로 채워진다. “율법의 일획도 어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설령 율법이 복음 안에서 그 법으로서의 힘은 잃었더라도, 그 모습은 하나의 형으로써 찬란히 빛나며 복음 안에 뚜렷이 판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전에 율법은 더 큰 해악을 막기 위해 눈감아 주는 몇몇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런 잘못을 사실상 허용치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율법에 해를 끼치는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왜냐하면 이로써 복음은 율법을 율법의 근본 의도에 합치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 5장 32절, 14장 9절의 이혼에 대한 사례에서 살펴보았었다. 그리스도는 이혼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은 인간의 타락한 욕망과 정열을 밑둥째 치시며, 없애고 뿌리 뽑으려고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이 허용되면 더욱 맹렬히 줄기차게 뻗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허용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그를 섬기기 위해 포기하고 우리들이 세속에서 얻은 재물을 그를 섬기는 데 사용하는 것밖엔 없다(13절)..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두 주인이라면 하나님과 “재물”의 경우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에 달라붙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멸시하게 된다. 그는 신앙 생활의 모든 겉치레를 이용하여 세속 이익과 계획에 사용하고 하나님의 소유들을 세상을 섬기고 찾는 데에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상대적으로 그는 세상을 “미워하고”(하나님과 세상이 경쟁하게 될 때) 그것을 “멸시”할 것이며, 세상의 사업과 그 성공을 어떻게든 신앙생활의 확장에 건설적으로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재물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구원의 사업을 이루는 데에 도웁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간단하다. “너희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둘의 목적은 분명히 갈라지기 때문에 그 섬김은 절대로 화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했다면, 세상 섬기는 것을 버리고 영구히 버릴 것을 선서해야만 하는 것이다.다음에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어떤 대접을 들었는가와 그리스도가 그들을 비난한 것을 본다.바리새인들은 사악하게도 예수님을 비웃었다(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직접 면박할 수는 없었고, “그를 비웃었는지라,” 이점을 잘 생각해 보자.죄를 낳는 “탐욕”의 열매로써의 “죄.” 즉 그들의 “부정.” 다음을 명심하자. 경건 생활에 대한 지식도 많고 체험도 많은, 입에 발린 신앙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멸망한다. 이것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적대하여 심정을 굳게 하는 것은 없다. 이 욕심 많은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유혹하는 “장본인”인 불타는 욕심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evxemukth,rizon auvto,n -즉 그들은 예수님께 코를 들고 킁킁거리며 비웃었다. 즉 예수님께 콧방귀를 뀌었다.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극렬한 비난과 혐오의 표시였다.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긴다”(렘 6:10). 그들은 세상의 보통의 결과, 방법에 예수님이 거꾸로 말씀하시되, 그들이 굳게 붙들기로 작정한 죄에서 그들을 돌이키려하므로 비웃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말씀을 희롱하는 것은 보통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그것이 농담으로 그렇게 웃어넘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주의 고통 당하심”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님은 죄인들의 “반대”만 아니라, 그들의 “멸시”도 참아내셨다. 그들은 매일 “예수님을 조소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말씀하셨기에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셨다. 이것은 그들의 설교가 부당하게 “조소받는” 충직한 목사들에겐 낙담시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업신여김’을 당했고, 그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자가 스승보다 크지 못하다.”예수님은 정당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예수님을 “조소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예수님은 “수치를 무시하시는” 방법을 아셨다) 경건의 능력과는 멀면서, 경건의 모양과 냄새만 피우며 스스로를 그들이 속이기 때문이었다(15절). 여기엔그들의 “그럴 듯한 겉모양, 아니 차라리 그것은 “장려한 겉모양”이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무엇을 권면 하시는가. 즉 이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와 즐기는 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을 편안히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청지기가 빚진 자들을 친구로 만든 것처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지혜를 가지고 돈을 사용하여 단순히 현재만을 보지 않고 장래의 유익을 찾는다. 그러길래 이자를 놓든지 땅을 사든지 여기 저기 자본을 대는 것이다. 우리도 그들을 배워 돈을 유용하게 사용하여 장차 내세에서의 더 나음을 도모해야 한다. 그들은 단지 이 땅 위에서의 미래에 더 나아지는 것을 바라지만 말이다. 그러나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져라. 우리가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더구나 우리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무엇이든지 “우리 주님의 재산”을 가진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빚진 자”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들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 나쁜 일이 되기는커녕 우리 자신들을 위한 좋은 방책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그분께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세상의 것들은 “불의의 재물”이다. 즉 졸렬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벌었다는 면에서 뿐이 아니라, 그것에 의지를 하고 만족과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속을 것이기 때문에 나쁜 “재화”란 뜻이다. 부란 사라져 가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기대를 거는 사람은 실망하게 된다.이 “불의한 재물”은 행복을 가져오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도움이 되도록 “이용할 수도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비록 우리가 그것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과 “친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돈 자체를 목적 삼기 위해서가 아니가 그것으로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으며, 천사와 성도들을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도,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이같이 앞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또 재물을 선한 목적으로 쓰려고 재물과 가까이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죽음에 당도해서는 우리는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즉 o]tan evkli,phte-즉 네가 빛을 잃게 될 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죽음은 우리를 소멸케 한다. 상인은 “파산자가 될 때, 이젠 끝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 조만간에 이처럼 실패해야만 한다. 죽음은 상점 문을 닫고 손에 도장을 친다. 이 세상에서 받던 평안과 즐기던 것들 모두 다 “우리를 저버릴 것이다.” 살아있는 육신도 우리를 내동댕이칠 것이다.”우리가 허무하게 죽을 때, 하늘의 영원히 거할 곳에 들어갈는지 스스로 분명히 확신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하늘의 “거주지”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영원한 손으로” “영속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고후 5:1).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자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먼저 가셔서, 지금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시다. 즉 아브라함의 품은 그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고 “천사의 무리”가 그들을 그리로 데려가면 “천사들의 합창”이 거기서 그들을 영접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가난하게 살다가 영광의 나라로 먼저 간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그들을 맞이해 줄 것이다.이것이 이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써야 하는 마땅한 이유인데, 즉 그렇게 함으로 그것들을 다가오는 영원, “찾아오는 그 때”의 좋은 기초로, 안전한 기반으로, “좋은 약정으로 저축해” 두고자 함이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을 보면 잘 설명이 되어 있다.경건과 자선의 일에 위와 같은 일을 많이 할 것을 여러 말씀으로 설득하심.”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분의 영적인 은혜의 선물들”인 현재와 미래의 평안함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여기서 이 둘을 직접적으로 비기지는 않으시지만 그렇지만 보여 주시기를 이 세상 것들을 충실하게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구실이 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들을 불성실하게 사용할 때는 틀림없이, 우리를 영광으로 옮기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몰수”시키는 것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10-14절에서 말씀하신다.이 세상의 부는 “아주 작지만,” 은혜와 영광은 “더욱 크다.” 우리가 작은 것에 불(不)충성하고, 이 세상 것들은 주어진 목적을 벗어난 다른 목적에 쓴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들을 받을 때도 거꾸로 그러하고, 받아야 소용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거절될 것이란 점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 자기의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더욱 고상하며 가치 있는 지혜와 은혜의 재주, 또한 영적인 은사, 그리고 하늘의 열심을 가지며 역시 하나님을 섬기며 선한 일을 힘 쓸 것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가지고 묻어 놓는 사람은, 영적인 은사 “다섯 달란트”를 가져도 절대로 증진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턱없이 인색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우리보다 더 잘 간파하시고 그들에 대한 그의 은혜를 보류하신다.세상 재물은 “헛되고” “불확실하다.” 그것들은 “불의한 재물”이다. 그것은 재빨리 도망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려면 급하게 손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진정한 재산”인 영적인 부를 어떻게 위탁받기를 기대하겠는가?(11절) 이것에 대해 확신을 갖자. “진실로” 부한 사람, “놀라운” 부자인 사람은, 신앙으로 부한 사람, “하나님께 대해” 부자인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에서, 하늘에 대한 진정한 열심에서 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의 재화를 하늘에 쌓아 두고 하늘에서 몫을 받을 생각을 하고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마음에 두자. 그리고서 다른 재화가 우리에게 들어온다면, 영적인 바탕에서 그것들을 사용하여서, 그것들을 잘 이용함으로 “참다운 부”를 더욱 견고히 잡을 수 있고, 하나님께로서 “더 많은 은총”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보시기에 선한 사람에게” 즉 열린 마음으로 자비로운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전 2:26). 바꾸어 말하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사람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부”를 주신다.이 세상의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들은 ta. allo,tria -즉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과 영혼의 본성과 이익(흥미)에 낯선 것들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것,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는 우리들보다 앞선 것이며 우세하다. 그 권리는 하나님에게 남아 있고 우리는 다만 사용자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재물들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가지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한다. “늘어가는 재산을 가진 소유자는” “눈으로 지켜본다는 것” 이외에 무슨 선한 게 있는가? 오히려 “재산은 쓸 때 불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화를 곧 누구인지는 모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이며 영원한 부는 “우리 자신의 것”이며(그것들은 소유되는 즉시 영혼으로 들어간다) “떨어지지 않는다.”

이 “청지기”의 “불성실”. 그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했다.” 착복 횡령했고, 잘못 투자했으며 또는 부주의하게 관리하여 손실과 손해를 입혔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주인에게 고발되었다”(1절). 그런데 우리들도 똑같은 고소를 당하고 있음을 알자. “우리들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맡겨 주신 것들을 마땅히 증진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 오히려 목적에 어긋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자신을 돌이며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청지기직의 “박탈”. 주인은 “그를 불러서” 말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나는 네가 잘 행하기를 바랬는데” 그는 청지기가 자기를 실망시킨 것을 유감스럽게 말하며 할 수없이 그를 해고시킨다. 즉 그는 그 말을 듣고 속이 상했고, 청지기는 부인할 수가 없었기에, 응당한 책임을 물어 곧 해고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2절). 이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짜여진 것이다.우리는 모두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의 “청지기직”을 벗어나게끔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금 즐기고 있는 것들을 즐기지 말아야 한다. 죽음은 곧 찾아와 청지기직을 우리로부터 “벗길” 것이며, 우리가 지금 가진 선행의 능력과 기회를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자리와 우리가 가진 것들을 차지할 것이다.죽음에 이르러서 우리의 청지기직 해고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화를 낭비했고 그래서 우리의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래야 마땅하며, 불평할 근거가 하등 없는 것이다.청지기직을 벗게 될 그날에 우리는 주님께 그것에 대해, “보고를 드려야”만 한다. 즉 “죽음 후엔 심판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해고와 보고의 양면으로 경고되며 자주 이것들을 심사숙고해야만 한다.그의 “각성”. 이렇게 되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할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불(不)충성으로 좋은 자리에서 어리석게 쫓겨나기 전에 생각했더라면 좋았을 테지만, 늦게라도 “생각한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조만간에 청지기직을 반드시 그만 두게 되리라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그 다음엔 어떻게 할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살아야만 하는데 어떻게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그는 노동을 해서 생계를 유지할 만한 정도의 열심히 자기에게 없는 것을 알았다. “땅을 팔 수도 없다. 노동으로 먹고 살 수는 없구나.” 왜 땅을 팔 수 없다는 것인가? 그가 나이가 많거나 절름발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그는 “게으른” 것이다. “그가 할 수 없다”는 것은 “할 뜻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가 일을 잘 하지 못한 것은 자연적인 능력 부족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족했던 것이었다. 만약에 주인이 그를 청지기에서 해고시키고 노동에 종사시켜 그 위에 감독자를 두었더라면 그는 땅파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팔 수가 없었다.” 바로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일로도 우리 영혼의 생명을 얻을 수는 없으며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우리 영혼을 위한 목적에 맞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그는 구걸로 자기의 빵을 벌도록 “겸비”함을 갖추지 못한 것을 알았다.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3절). 앞의 것이 나태라면 이것은 그의 교만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함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 청지기는 빵을 구걸하는 것보다 주인을 속이는 것에 더욱 부끄러움을 가졌었다.그래서 그는 결심하기를 주인에게 빚진 자들과 친하고, 또는 소작료가 늦고 있는 고용주들과 사귀리라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빚진 문서를 넘겨주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4절). 내 주인은 나를 쫓아낸다. 내가 빚진 자들과 친하고 그들에게 여러 번 좋게 대해왔는데, 한 번 더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나를 집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최대한으로 잘해 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는 한, 적어도 내가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들 집에 머물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다니며 신세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빚진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방법은 그들이 주인에게 빚진 중에서 상당한 몫을 잘라버리고 실제보다 매우 적게 매기는 식이었다. 그에 따라서, “기름 백 말”을 빚진 자를 불러(그와 같은 필수품으로 빚을 갚았었다) “네 증서를 가져오라”고 말하고, “빨리 앉아 50이라고 쓰라” 일렀다(6절). 그렇게 해서 그는 빚을 반감해 주었다. 다음을 살펴보자. 그는 그 일을 행할 때에 급했다. “빨리 앉아라. 그리고 들키거나 의심받지 않도록 고쳐 써라.” 그는 또 “밀 백석”을 빚진 자를 불러 증서에서 5분지 일을 감해 주어, “80석”이라고 쓰도록 명했다(7절). 아마도 그는 장차 받을 친절을 예상해서 다소간 차이를 두면서 감해 주는 방식으로 다른 빚진 자들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 세상에 속한 재물은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생각해 보자.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에게도 역시 그렇다. 그들은 재물을 관리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그리하여 맡겨진 사람들이 “주인인 자기를 속일 수도” 있는 권한은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자신의 눈으로 감찰하는 게 귀찮기 때문이다. 또 신뢰하여 맡겨진 사람들 가운데에 얼마나 많은 배신이 발견되는가를 생각해 보자.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나님은 신실하시지만 모든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 이다.” 이 청지기는 부정직한 것이 판명되었지만,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잘못 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것을 고치는 법은 참으로 드물다.청지기의 각성에 대한 주인의 인정(人情).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8절). 이 말씀 가운데 “주인”을 “그의 주인,” 그 종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주인이 이 속임수를 보고 분노할 수밖에 없을텐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종이 자신을 위한 교묘한 꾀와 방책을 세웠음을 귀하게 여겼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위의 칭찬의 말씀을 “우리주님(Our Lord)”의 말씀으로 봄이 옳다고 본다. 즉 위의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며 또 현재에 주어진 기회를 잘 선용할 줄 알며 앞날의 불행을 대비한 대책을 세울 줄 아는 사람을 귀히 여기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주인에게 “거짓되게” 행했기 때문에 그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 아니고,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지혜롭게” 행했기 때문에 칭찬하셨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서는 그 청지기가 주인을 위해서도 잘했고 빚진 자들에게는 마땅히 할 바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차용자들에게 “계약을 맺을 때 참으로 박하게 맺었었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빚을 갚을 수 없었으며 그가 고집 세게 인색하였으므로 “빚은 자꾸만 밀리고,” 그래서 차용인과 그 가족들이 파산하게 될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떠나려는 마당에 이르러서 그는 이것을 생각하고,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의로움과 자비로움을, 단순히 그들의 밀린 빚을 덜어 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앞날을 위해 그 빚을 감해 주려는 생각으로 베풀었다. “얼마나 빚졌느뇨?” 한 것은 “현재 얼마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느냐? 오너라. 내가 네게 꼭 갚아야 하는 것 이하로는 안 되겠지만, 좀 가벼운 계약으로 풀어 주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금까지 “오직 주인을 위한” 사람이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빚진 자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가 “주인의 신용”을 잃었을 때에 “그들의 호의”라도 얻을 수 있을까해서이다. 그들의 빚을 감해 준다는 것은 지속하는 친절일 수도 있으며, 단순히 감해 준다는 것 이상의 약속이 될 수도 있다. 이 생에서의 안락한 생존을 위해 이 청지기의 이와 같은 예비를 생각할 때 내세를 위한 우리의 준비 없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생을 선택하고 여기서 몫을 가지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영혼과 영원을 관심하여 “자기 시대에서” 복음을 즐기는 “빛의 아들들”보다 “자기들의 당대를 위해선 더욱 현명하며” 세상적 이익과 모험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하고 더욱 신중히 고려한다. 다음을 살펴보자.우리는 이 세속적 일에 관심하는 세상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의 영혼에 관심하는 일에 “본받아야” 한다. 그들의 원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용하고, 가장 필요한 것을 즉시 실행하며, 겨울을 위해 여름과 가을철에 저장하고, 좋은 계약을 닿는 대로 맺고 “신실한 사람”은 신용하고 “불성실한 사람”은 믿지 않는다. 우리가 영적인 일에서 이처럼 현명하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빛의 자녀들은 보통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 “진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진짜 현명”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 세대에서”만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고를 들으면서도 장래를 위하여 예비하지 못한다면 예고를 듣고 준비할 줄 아는 그들이 장래 일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여기서 늘” 살 것처럼 또 “이 생후의 내세는”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청지기직에 있을 때 “내세”를 준비해야 하는 것을 열심히 구하지 않는다. “빛의 자녀들”이라 하지만 우리는 앞에 놓인 “다른 세계”를 보지 않을 수 없는데, 당연히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최선의 노력과 애정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독교가 목적하는 것이 신적인 신비개념으로 우리를 위안시키거나 신적인 자비개념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그렇지 않다. 복음에 나타난 이 양자의 신적인 계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실제로 실행함에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진 또 할 수 있는 것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선과 선행을 베푸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고무시키려 함이다. 여기서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많은 은혜의 청지기”임을 상기시켜서,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사실 우리는 여러 경우에 불(不)충성 했었고, 주님의 은총을 백안시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재물들을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 있는 태도인 것이다. 또한 비유는 처음 말해질 때의 의도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 가진 것을 자비와 선행에 투자하면서 죽음과 무덤 저편 세상에서 벌을 면하고 상을 받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보다는 세상 사람들이 이생에서의 일시적인 이익을 위해 즉 세상과 벗하고 다른 세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쓰는 것처럼, 우리가 미래의 영원한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자선과 경건한 일에 우리의 부를 열심과 근면으로 쓰는 것이 정말 지혜 있는 태도이다. 이제 자세히 살펴보자.

16:19

부자와 나사로(누가복음 16:19-31)

탕자의 비유가 우리 앞에 복음의 은총을 내어놓아 우리 모두를 격려해 준 것처럼 이 비유는 우리 앞에 “닥쳐 올 화”를 내놓아 우리의 경성을 촉구한다. 죄에 단단히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이것으로는 깨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세속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설교를 비웃었다. 그런데 이 비유는 그런 희롱자들을 심각하게 만들려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도는 우리를 가난과 고통에 화해시키고 또 세속과 육정의 유혹에 대항하여 무장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얘기의 막을 열고 저 세상에서 위의 양자의 종말을 살펴보게 되면, 이 비유는 위의 두 가지 의도를 매우 잘 추구함을 보게 된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다른 비유와는 다르다. 다른 비유들은 영적인 일들을 세상사(事)에서 끌어와 표현하고 있다. 즉 씨뿌리는 자와 씨의 얘기(염소와 양의 얘기는 제외하고), 탕자 등. 이것만을 제외하고서는 전부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적인 일 자체”가 이생과 내생에서의 선악의 상태에 대한 얘기와 표현으로써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인 사실로써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사에 진실로 존재하는 “사실성의 문제”이다. 즉 불쌍하고 신앙 깊은 사람들이 천대받고 소외당하다가 죽음으로 그 불행을 벗어나 천국에 가서 축복과 기쁨을 누린다. 그것은 전생의 슬픔이 있었기에 더욱 기쁜 일이다. 그런데 부한 쾌락주의자들은 사치와 향락 속에 살며 불쌍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다가 죽어, 참을 수 없는 지옥의 고통에로 간다. 그런데 그것은 전생에 누리던 쾌락적인 생활이 있었기에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운 데다가,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을 길조차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일까? 그렇다면 이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내용은 무엇일까? 아브라함과 부자와의 담론의 사실은 욥기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담론처럼 얘기를 더욱 효과 있게 하기 위한 도입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구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세을 알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이 “저세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이 얘기에서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시고 계신다. 이 서사문(앞으로는 이 비유를 이렇게 부르겠다)에서 우리는 다음을 고찰해 보자.

Ⅰ. 이 세상에서의 “사악한 부자”와 독실한 빈자”의 다른 생활 상태가 묘사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흔히 옛날의 유대인들도 번영을 참다운 교회, 선한 인간, 하늘로부터 은총 받는 사람의 표시로 보았다. 그래서 “가난한”를 거의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경우를 통하여 바로 이 오해를 시정하신다. 여기서도 전적으로 그러하시다. 우선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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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인간, 행복의 절정에서 영원한 불행에 빠질 사람(19절). “한 부자가 있었다.” 라틴말로 보면 Dives-즉 한 부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틸롯슨(Tillotson) 감독이 지적한 대로, 이 얘기의 가난한 사람도 가진 이름을 그는 갖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서사문에서 어떤 특정한 부자의 이름을 부른다면, 남에게 미움을 살 수 있고, 나쁜 감정을 일으키거나 사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지적하기를, 그리스도는 부자의 이름을 불러 주는 영광을 주지 않으려 하셨다. 그렇지만, 이 부자가 자기의 땅에 자기 이름을 붙였다면, 이 얘기에도 보존되어 있는, 거지의 이름만큼이나 오래 갈 것이지만, 이 부자의 이름은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이 부자에 대해서 다음을 보게 된다.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다. 그것이 “치장”이었다. “쾌락”을 위해 “고운 베옷”을 입었으며, 의심할 바 없이 매일 세탁했다. 낮에 입는 베옷과 밤에 입는 베옷을 또한 그는 “거드름”을 피우기 위해 “자색 옷”을 입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왕자들이 입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선 헤롯을 보고 얘기 하셨으리란 추측들을 하게 한다. 그는 언제나 밖에 나갈 때는 장엄하게 차려 입었었다.그는 “날마다” “사치스럽고” 즐겁게 “지냈다.” 구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산해진미로 차려놓은 식탁, 요리 접시로 그득한 보조 식탁, 제복을 입고 시중드는 종들, 물론 식탁엔 초대받은 손님들, 이런 것들이 자기의 사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리라 그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무슨 해될 것이 있단 말인가? 재산이 넉넉하여 할 수 있다면 부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풍성한 식탁을 차린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또한 그가 자기 재산을 사기나 압제나 강탈로 모았다는 얘기도 없고, 자신이 술 취하고 또 남들을 술 취하게 했다는 말도 없다. 그러나그리스도는 여기서 사람들이 세상의 큰 재산과 허영과 만족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밑에 놓여 있고 멸망한다고 알려 주신다. 우리는 잘사는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것을 주시도록 그를 사랑하시는지, 그렇게 많은 것을 주시기 ”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추리할 수 없다. 행복은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풍요와 쾌락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며 많은 사람에게 사치와 육정, 하나님과 저 생(生)에로의 “치명적”인 유혹이다. 이 부자는 큰 재산과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육신에 매달리고, 그 편안과 쾌락을 좇음은 많은 영혼을 파멸케 하며, 영혼의 이익을 해친다. 고기를 먹고 좋은 옷을 입음은 사실 타당한 것이나, 때때로 그것들이 교만과 사치와 재료와 연료가 되어 죄로 이끄는 것도 사실이다.자기와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열면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매우 노하시게 하며 영혼에게 저주가 된다. 이 부자의 죄는 그의 옷이나 음식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었다.여기 독실한 사람. 역경과 고난의 깊음 가운데 있으나 영원히 행복할 사람(20절)이 있다. 본문에는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있었다”고 했다. 신앙이 매우 깊고, 큰 고난 가운데 있었던 이 이름의 거지는 당시 선량한 사람들 가운데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거지에게는 엘르아살이나 나사로라는 이름이 흔히 붙여지곤 했었다. 어떤 이들은 엘르아살이란 이름이 가난한 사람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엘르아살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뜻하는 이름이었고, 또 이름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불쌍한 사람은 외부적으로 볼 때 가장 불행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그의 몸은 욥처럼 “종기로 뒤덮였다.” 육신의 병과 약함은 큰 고통이다. 그러나 종기는 환자에게는 “더욱 괴로운” 것이며 또 그 주위의 사람에게는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이다.그는 먹고 살기위해 구걸을 할 수밖에 없었고, 부잣집 문간에서 얻을 수 있는 상 부스러기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처투성이요 절름발이었기에 혼자 힘으로 다닐 수 없었으나 몇몇 동정적인 손길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서 옮겨졌고, “부잣집 대문가에 놓여졌다.” 생각해 보자.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마땅하다. “한 페니”를 꾸어 줄 수 없는 사람은, “손 하나”라도 빌려주어야 마땅하다. 도움을 베풀 힘이 없는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데려다 주거나 찾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사로는 먹고 살아갈 게 없었고, 찾아 갈 친척도 없었다. 더구나 종교 기관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았다. 나사로같이 독실한 사람이 필요한 양식의 결핍으로 죽게 되도록 고생한다는 것은 이때의 유대 교회의 타락의 한 예였다. 다음을 살펴보자.부자의 식탁에 거는 나사로의 기대. “그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했다”(21절). 나사로는 부자의 식탁으로부터 한 접시의 음식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는 당연히 훌륭한 한 상을 바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상 밑으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부자가 먹다 남긴, 아니 개를 주려고 남긴 고기 찌끼라도 감사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간청을 한다.” 그리고 그들이 얻는 것들에 만족해야만 한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 주는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 나사로의 곤경과 그 성질. 그는 “가난하였다.” 그러나 “영적으로 가난하였다.” 즉 만족스러운 가난이었다. 그는 부자의 대문 곁에서 불평하고 소리지르며, 시끄럽게 누워 있지 않고, 조용히 또 얌전하게 “부스러기로 배불리기를” 바라면서 누워 있었다. 이 비참한 한 인간은 선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었다. 하나님의 성도나 종들 중의 귀한 사람들의 운명이 이 세상에서 큰 고난받는 것은 흔히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에 반해서 사악한 사람들은 선영하고 유복하다. 시편 73편 7, 10, 14절을 보라. 집안에는 호화롭게 지내는 진노의 자식이요, 지옥의 상속자가 앉아 있고, 문간에는 배고파 죽는, 사랑의 자식이요, 천국의 상속자가 누워 있다. 한 인간의 영적인 상태가 그 순간의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인가?

둘째, 나사로에 대한 부자의 기분(성미). 우리는 여기서 부자가 나사로를 학대했거나, 문간에 있지 못하게 했거나 어떤 해를 끼쳤다는 얘기를 들을 수 없지만 그를 경시하고 아무런 관심도 없고 돌보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진정한” 자선을 받아야 할 대상이 있었다. 그의 외모는 참으로 가련한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 부자의 문간에 앉아 있었다. 이 불쌍한 사람은 착한 성품과 선한 행위로 칭찬 받을 만한 모든 것을 갖추었었다. 그에게는 “하찮은” 일이라도 “큰” 친절이 되련만 부자는 이것을 무시해 버렸다. 그는 이 거지를 데려다 헛간에라도 거하게 하라고 지시하지도 않고, 다만 거기에 그렇게 내버려두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억누르거나 짓밟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들을 구조하거나 구원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는 주님의 불(不)충성한 종이라고 밝혀질 것이다. 그가 가장 무서운 운명에 처하는 이유는 “나는 굶주렸다. 그러나 너는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읽고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부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궁핍과 비참함에 자주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을까 참으로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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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부터 받는 대우.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절). 이 부자는 한 떼의 하운드, 아마도 이 종류. 혹은 다른 종류의 개일지도 모르나, 오락 삼아 혹은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르고 있었다. 나사로가 살기 위해 필요한 음식도 없을 때, 이 개들은 배부르게 먹여지고 있었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개는 기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은 내세에 책임을 질 것이 많을 것이다. 곤경에 처해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준다면 필요하고 또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재물을 오락과 어리석은 일에 소모해 버리는 많은 부자들의 몰인정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그들의 책망을 더욱 중하게 할 것이다. 개나 말은 배불리 먹이면서 이웃집 가난한 식구들은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화내시게 하며, 인륜을 어기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 개들이 “와서”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나사로의 불행을 가중시켰다고 볼 수 있다. 나사로의 상처는 “피투성이”였다. 그것이 개들이 와서 핥도록 자극시켰다. 마치 나봇과 아합의 일처럼(왕상 21:19) 또한 시편 68편 23절에서 보듯이, “원수의 피에 개들의 혀를 잠그듯” 하는 것이다. 개들은 마치 나사로가 시체가 되어 그들을 물리칠 힘이 없는 듯이 그를 공격했고, 개들이 그렇게 못하도록 말리는 예절을 가진 종이 한 사람도 없었다. 개들도 집주인처럼 인간의 핏덩어리를 맛있게 즐기면서 사치스럽게 지내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둘째, 이렇게도 볼 수 있는데, 비참한 지경에 있는 나사로에게 위로가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본문에

a,lla, kai,라 했는데 이 말은 주인은 나사로에게 “냉정” 했지만, “그러나” 개들은 “와서 헌데를 핥아 줌”으로 나사로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고, 편하게 했다고 하겠다. 개들이 상처를 “빨아먹다”라고는 하지 않고 “핥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상처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었다. 개들은 주인보다는 친절했던 것이다.

Ⅱ. 다음엔, 이 “독실한 가난한 사람”과 그 “악한 부자”가 “죽은 후,” “내세”에서 “다른 상태”에 가 있다. 이제까지는 악한 사람이 유리한 삶을 살아 왔었다. 그러나 Exitus acta probat-즉 끝을 보기 위해 조금만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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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죽었다(22절).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죽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믿음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공동의 운명이다. 거기서 그들은 함께 만난다. 한 사람은 “평안한 가운데”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영혼의 비통함을 안고” 죽으나, 이 둘이 “일반적으로 흙 속에 눕는 것이다”(욥 21:26). 죽음은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차별이 없이 닥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성도는 죽어 고통을 마감으로 영원한 즐거움에 들어갈 것이나, 죄인은 죽어 영원한 파멸에 처하게 될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을 준비하여야 한다. 죽음은 둘 다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Mors sceptra ligonibus oequat-즉 죽음은 제왕의 홀과 농부의 삽을 섞어 놓는다. aequo pulsat pede pauperum tabernas, Regumque turres-즉 죽음은 같은 걸음으로, 공평한 운명으로 오막살이를 노크하듯 왕궁을 노크한다.거지가 “먼저 죽었다.” 하나님은 때때로, 아직 죄인들이 번창하는 때, 독실한 사람들을 먼저 세상에서 불러 가신다. 그의 불행을 빠르게 마감하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다른 피난처나 쉴 곳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곤한 자가 쉼을 구하는 무덤 속에” 그는 “숨은 것이다.”부자는 “죽어” “장사되었다.” 나사로의 매장에 대해선 아무 말도 없다. 아무 데나 구덩이를 파고 어떤 의식도 없이 시신을 집어쳐 넣었을 것이다. 그는 “짐승의 시체처럼 땅 속에 묻혔다.” 아니 개가 상처를 핥도록 내버려두었던 그들이니 그들의 개가 그의 뼈를 뜯지 않도록 땅에 묻기라도 했다면 큰 호의를 베푼 것이라고 간주해야 하리라.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가졌다. 유해가 정장으로 안치되고, 무덤까지 애도객이 줄을 지으며 묘 비석이 세워졌다. 아마도 그와 그의 관대한 인생, 그가 차려서 많은 사람들이 즐기며 칭찬하던 좋은 연회등을 찬양하는 연설도 행해졌을 것이었다. 악한 자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수고도 없이 “무덤으로 메어가고,” 가능하다면, “골짜기의 흙덩어리를 달게 여기게” 된다고 말해진다(욥 21:32, 33). 장례식이란 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가?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천사의 호위를 받고 천사들 가운데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렇게도 크고 장엄한 의식으로 무덤에 들어간 부자의 영광을 능가하고 그 영혼에는 얼마나 큰 영예인가! 고찰해 보자.그의 영혼은 몸과는 떨어진 상태에서 존재했다. 영혼은 “죽지” 않았고, 즉 몸과 함께 “잠든다.” 그의 영혼의 촛불은 그와 함께 꺼지지 않았고, 살아 움직이며, 무엇이 되어지며 어떻게 되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영혼은 내세에로 즉 영들의 세계로 옮겨갔다.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그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옮겨졌다”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인간의 영은 위로 향해 올라간다.천사들은 영혼을 보살폈다. 영혼은 “천사들에 의해 옮겨졌다.” 천사들은 구원받을 자들이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에 그들을 지도하는 영이다. 또한 그들의 지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로의 여행을 “손으로 잘 보살피는” 책임을 가지고 있고, 또 미지의 안전치 못한 땅에서 안내와 보호자가 된다. 사람의 영혼은 정화되지 못한 영혼과는 달리 이 땅에 얽매여 있지 않고 이 세상에 의해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자신 탄력이 있는 덕성을 가져서, 그것으로 인해 육체를 벗어나자마자 곧 “하늘로 솟구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 자신이 그러하는 것을 신뢰하지 않으시고, 그러기에 그들을 자신에게는 데리고 올 특별한 사자를 보내시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천사라도 충분할 것 같지만 그러나 엘리야에게 많은 천사를 보내셨듯이 많은 천사를 보내신다. 애굽의 왕 그의 마차를 왕들로 끌게 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영광이 되는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힘입어 하늘로 오른다. 거기에 천사들이 호위를 함으로 더욱 위엄과 예절이 따른다. 성도들은 안전할 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집에 오게 되는 것이다. 부자의 상여를 메고 나갔던 상여꾼들은 아마도 일류급의 사람들이었겠지만 나사로의 상여를 운반한 사람들과 비길 수 있을까? 천사들은 누더기진 상처가 “몸”에 있다고 해서 나사로의 몸을 만지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의 “영혼”을 꺼려하지도 않았다. 그 “영혼”은 “흠 없고 점 없이 다른 아무 이상 없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었다. 한 선한 사람은 죽으면서 말했다. “자 축복의 천사여, 이제 오시오, 그리고 당신의 일을 행하시오.”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유대인들은 의인이 죽어 누리는 행복을 세 가지고 표현했다. 즉, “에덴 동산으로 간다.” “영광의 보좌 아래 있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다.” 세 번째 것이 예수님께서 이 얘기에 사용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신실한 자의 조상”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의 영혼은 그에게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비로운 아버지같이 그 영혼들을 “품에 안는다.” 또한 그는 그들이 첫 번 나아옴을 환영하며, 이 세상의 슬픔과 피로로부터 나아오는 사람들을 깨끗이 씻겨 주신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옮겨졌다. 즉 그와 함께 잔치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손님은 잔치에서 다른 사람의 가슴에 기대는 것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의 성도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한자리에 앉는다.”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부한 사람이었으나 불쌍한 나사로를 가슴에 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부한 성도나 가난한 성도나 같이 만난다. 이 불쌍한 나사로는, 땅 위의 부잣집에선 문간 안에도 못 들어갔으나 하늘의 궁전에서는 거실 침실로 안내되어졌다. 그리고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뉘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개의 무리와 함께 처해 있으라고” 부자들로부터 꾸중듣던 사람이었다.”부자가 죽고 매장된 후” 그에 대한 다음 소식은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었다”는 것이다(23절).부자는 처지는 이제 매우 비참하다. 분리되어진 영혼들의 상태로 “그는 지옥에 떨어졌고 즉 하데스에 있다.” 거기서 그는 “극심한 불행”과 “극도의 고뇌”에 처해 있다. 신실한 영혼들이 “육체의 짐을 벗어놓자마자 곧 환희와 경사스러움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사악하고 깨끗이 못한 영혼들은 죽음으로 육체의 쾌락에서 떨어지자마자 곧 끝없고 치료 불가능한 비참과 고통에고 들어가게 된다. 더구나 그들의 비참과 고통은 그들의 부활시에는 더욱 증가되고 가장 극도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이 “부자”는 완전히 그 자신을 세상 쾌락에 바쳤고, 온통 그것으로 “채웠으며,” 자기 몫을 그것들로 “탕진해 버렸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영적인 세계”의 즐거움엔 부적당했다. 부자의 마음과 같은 속세적인 마음엔 그런 것들이 아무런 즐거움이 될 수 없었으며, 아무런 맛도 볼 수가 없고 따라서 전적으로 그런 것들과는 무관했다. 이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냉정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와는 단절된 상태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정이 없는 엄한 재판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전에 즐기던 것들을 상실한다는 벌”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벌”까지 받게 되었다.그의 비참은 나사로가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 더욱 가중되어졌다. 그는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고통 중에 있는” 것은 그 영혼이었다. 또 들려진 것은 마음의 눈이었다. 그는 이제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 정도로 깜짝 놀랐다. 아니 멀리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를 생시에 보듯 확실히 분명하게 쳐다보았다. 저주받은 자들의 비참함을 더욱 증가시키는 것은 이미 본적이 있다(13:28). “너희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쫓겨나리라.”그는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다. 아브라함을 쳐다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를 멀리서 본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그의 가까이에는 악마와 저주받은 동료들과, 무시무시한 광경,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멀리 아브라함을 쳐다본 것이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고통을 더하는 것뿐임을 명심하자.그는 “아브라함 품의 나사로를” 보았다. 그가 그렇게도 꾸짖고 멸시했으며 쳐다 볼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던 바로 그 나사로가, 천국에서 우대 받고 이제는 시새움을 받게 된 것이다. 나사로를 쳐다보자 그의 마음엔 과거에 그를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대했던 행동이 생각났고, 나사로가 행복에 처한 것을 보게 되자, 자기의 불행이 더욱 통렬해짐을 느꼈다.

Ⅲ.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부자와 아브라함 사이에 오고 간 얘기. 이것은 부자와 아브라함이 떨어져 있으며 동시에 이 둘은 이 현세에세도 떨어져 있다. 영광의 성도와 저주받은 죄인 사이에 어떤 대화나 대담이 있지도 않고, 있을 것도 아니지만, 이 양자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표현하는 대화로, 특별히 애처롭게 보이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을, 여기서처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다. 또한 “어린 양 앞에서”(계 14:10) 고통받는 죄인들을 보았고, “벌레가 죽지 않는”(사 66:23) 곳에서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언약을 범한” 사람들을 굽어보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여기서의 이 같은 대화는 그렇게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안들 것이다. 이제는 그 대화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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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현재의 고통을 감해달라고 애원함(24절). 아브라함을 멀리 보자 “그는 외쳤다.” 큰 소리로 불렀다. 아주 급한 경우에 있거나 고통과 아픔 중에 있는 사람이 비명과 함께 청원하여, 등정을 억지로 자아내는 것처럼 소리쳤다. 큰 소리로 “명령하던” 자가 이제는 큰 소리로, 나사로가 문간에서 하던 것보다 더 큰 소리로, “구걸하게” 된 것이다. 술 먹고 떠들며 흥청대던 때의 노래가 이제는 모두 슬픈 탄식으로 변했다. 여기서 살펴보자.그가 아브라함에게 붙인 칭호. “아버지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며, 육체로 보아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람들일 지옥에는 많다. 또 이름과 입으로만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후손이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마도 이 부자는 그의 현세적인 환락에 처해 있었을 때는 아브라함과 그 얘기를 우습게 생각하고 놀렸을 것이다. 마치 후세에 종교를 경멸하던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지금은 아브라함께 존경의 칭호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하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을 가벼이 보지만, 억지로라도 그들을 가까이하고 친해지기를 요구하는 그날이 옴을 명심하자. 여기서의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심판이 위임되어 있고, 아브라함이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지금 가볍게 보는 자들은 얼마 안 있어 그분께 “주여 주여”하고 하소연할 것이다.그의 현재의 통탄할 처지를 아브라함에게 표현함. “내가 불꽃 가운데에서 고민하나이다.” 그가 고통을 하소연하는 것은 영혼의 고민이었다. 불꽃이 곧 가책 받는 양심에 달라붙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스스로를 책망하고 비난하는 마음의 무서움의 불꽃이 그의 영혼에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불꽃으로 고통받는 것보다 육신에 더욱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저주받은 영혼의 비참과 고뇌는 표현된다.이 비참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에게 요청함.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것을 열심히 청할 그날이 옴을 명심하자. 오! “자비를! 자비를!” 하고 긍휼히 여기는 시대가 끝나면 부르짖겠지만, 더 이상 긍휼은 베풀어지지 않는다. 나사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나사로가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한다. 그가 그런 긍휼을 바란 이유는 “나사로가 자기보다 좋은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구걸한 특별한 은총은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여기서 그는 특별히 그의 “혀”의 고통을 하소연한다. 마치 다른 어느 몸의 부분보다 죄에 보응하는 벌로써 특별히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혀”는 말하는 기관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고통 당함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항해서 말하고, 저주와 맹세와 하나님 모독과 모든 “각박한 말들” “불결한 말들”을 했던 그 말들을 생각나게 된다. 이제 그의 말들에 의해서 “그는 저주받고,” 따라서 그의 혀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혀는 “맛보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혀를 고통 당하면 그것으로 육욕의 즐김의 무질서한 기호를 생각할 것이다. 과거에 그것을 “혀 밑에서 굴렸었다.”그는 “그의 혀를 서늘하게 해 줄 한 방울의 물”을 원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나사로가 누워있는 당신의 품으로 보내 주소서”라고 하지 않았다. 정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하늘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라지도” 않고, “바랄” 수도 없다. 또한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이 비참에서 저를 구해 주소서. 나를 이 구덩이에서 꺼내 주소서”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상황에 “완전히 절망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그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 그의 혀를 잠시라도 식혀 줄 “한 방울의 물”을 요구했다.그는 물을 나사로가 가져오기를 바랐다. 나는 때때로 그가 여기서 나사로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만약에 나사로가 손에 닿을 수 있 곳에 다다르면, 다시는 아브라함의 품에 못들어 가도록 막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서 분노를 품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도 분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무리 저주받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비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부자는 나사로를 존경함을 보여 주기 위해 즉 나사로를 기쁨으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이러한 요청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부자는 나사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왜냐하면 부자는 그를 “알았고,” 나사로가 구면인 자기를 위해서 이 선한 일을 기꺼이 해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서 악한 영혼들의 고통을 묘사하는 플라톤(Platon)의 말을 인용해서 그들은 자기들이 “살인했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 해달라고” 끊임없이 지껄이면서” 찾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 그들로부터의 친절을 기쁘게 받을 날이 온다는 것을 명심하자.이 요청에 아브라함이 준 응답. 간단히 말해서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부자의 혀를 “서늘하게 해 줄 한 방울의 물”을 허락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자. 지옥에서 저주받은 사람들은 어떤 조그마한 형벌의 감소나 경감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주어진 기회의 날을 잘 이용하면, 자비로운 주님께로부터 충만하고 영속하는 만족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주어진 것을 가벼이 여기면, 지옥에 떨어져 한 방울의 물을 기대해도 헛되게 될 것이다. 얼마나 정확하게 이 부자는 자업자득하는가를 보자. 부스러기 하나를 거절한 그는 한 방울의 물을 거절당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구하라. 구할 것이요”를 생각나게 한다. 만약 우리가 때를 다 지난 다음에, 구한다면 그때는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단지, 좀 안 되긴 했지만 “네 고통을 경감해 줄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거기에다가 지옥에 있는 모든 것이 고통이 되겠지만 고통을 더하게 하고, 불꽃을 더 뜨겁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얘기했다.그는 부자를 친절하고 예절 있는 명칭으로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선 단지 그의 요구를 거절하는 정도를 크게 하는 것뿐이다. 즉 그로부터 아버지의 연민의 정을 막아 버린다. 부자는 전에는 아들이었으나 반역적이었다. 이제는 내버려져 의절되어진 자식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라고 “간청”하는 것에 의지를 두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잘 보살피자. 우리가 지옥에서 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리고 영원히 거기서 있을 것같이 보이는 사람을 아브라함은 “아들”이라고 부른다.그는 부자에게 그들이 “살았을 때에” 나사로의 사정과 그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상기시킨다. “아들아, 생각해 보아라.” 이것은 참으로 가시같이 찌르는 말이다. 저주받은 영혼의 기억은 이제는 의식에 고문을 가할 것이며, 양심은 깨어 일어나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죄인들은 그것을 참지 못한다. “아들아, 생각해 보아라”는 말은 부자에게 있어서 가뜩이나 굉장한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죄인들에게 “기억할 것”이 요청된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하려하지도 않는다. 다만 피할 길만 찾는다. “아들아, 너의 창조주를, 구원주를, 기억하여라. 너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아라”는 말씀이 지금도 울리고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이 “지난 일을 상기시키는 말”에 귀를 막고 기억할 수 있는 일도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므로 결국 영원히 계속되는 비참한 지경에서 “아들아 기억해 보아라” 하는 말소리를 또 듣게 되며 그때는 그 말을 듣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귀에 이러한 소리가 들릴 때, 얼마나 무서운 울림이 될 것인가. “아들아 기억해 보아라. 네가 이런 곳에 오지 말도록 수많은 교훈을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도록 좋은 기회를 주었는데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자가 여기서 명심하도록 얘기되어진 것은 다음과 같다.”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그것을 “오용했다”가 아니라,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네게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주셨나를 기억해 보아라. 얼마나 너에게 선을 베푸시기를 즐겨하셨나를 생각해 보아라.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아니 물 한 방울이라도 빚진 게 전부이다. 너는 하나님께 그것들을 받았다는 영수증도 드리지 않았고, 그것들을 인하여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하물며 감사의 보답이나 진보시키려는 노력은 더욱 없었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이 묻혀져 버리는 무덤이었고, 씨뿌려져도 수확이 없는 들이었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다. 너는 그것들을 받아서 마치 그것이 네 것인 양 써버렸다.” 너는 그것들에 대해서 전혀 책임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은 네 눈으로 보아, 네 몫으로 삼아 스스로 즐기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써, 네가 선택하여 사용하는 필수품이었다. 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가장 비싸고 좋은 옷을 입고, 이 모든 것들이 네가 행복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너의 상이요, 위안이요,” 네가 “동의하여 바란” “상급”이었다. 너는 그것들을 가졌었다. 너는 “살아 있었을 때에 이 좋은 것을 받았고,” 내생에서 더 좋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너의 “좋은” 때는 다 지나가 버렸다. 이제는 너의 “악한 것들의” 때, 네가 행한 악한 행위의 보상의 때인 것이다. 네가 너에게 주어지도록 바랄 수 있는 “자비의 잔에서 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이미 마셔버렸고 오직 남은 것은 단지 순수한 그대로의 진노의 잔”뿐인 것이다.”나사로가 받은 고난을 기억해 보아라. 너는 지금 그를 부러워하고 있으나 그가 살았을 때에 받은 불행과 비참의 양을 생각해 보아라. 너는 네 악한 것에 비하여 지나치리 만큼 최대의 좋은 것을 가졌었고, 그는 선한 사람으로서는 격에 맞지 않는 최악의 것들을 가졌었다. 그는 좋지 못한 것들을 받았다. 그는 인내로 그것들을 참고, 욥과 같이[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은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받았다. 그는 그것들을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마련된 약으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 약은 효력을 발생했다.” 악한 사람들은 이 생에서 단지 “좋은 것들”만을 가지고 있다가, 죽을 때는 그 좋은 것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것처럼, 신실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단지 악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가 죽음에 이르러서, 그것들과는 영원히 관계없게 된다. 이것들을 마음속에 불러일으킴으로 해서, 아브라함은 그의 양심을 깨워서 그가 “좋은 것”을 즐기고 나사로가 “나쁜 것”에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가 나사로에게 어떻게 대했었나를 기억나게 한다. 그래서 그때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나사로가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살아 있을 당시 만년에 나사로가 부자가 되고, 부자가 가난해졌더라면, 나사로는 부자를 구원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그는 전에 불친절을 가지고 지금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상과 보복의 미래의 그날에는, 지금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받을 만한 이상으로 좋게 대접받는 사람들은 그가 “하는 일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보답 받을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현재의 축복과 그의 비참을 인식시킨다. “그러나 지금은” 상은 바뀌어졌고 이제는 그렇게 영원히 살아야 한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25절). 부자는 “고민을 받는다”는 것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을 당연한 값으로 여기고 있었다. 또한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품안에 있는 나사로가 그렇게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를 다른 하나와 비교하여서, 부자가 “하나님의 의로우심,” 즉 “그의 백성을 고생시키는 사람들에게 벌”을, “고생 받는 사람에게는 쉼”을 주시는 그것을 알아차리게 한다(살후 1:6, 7). 다음을 자세히 살펴보자.천국은 “위로”요, 지옥은 “고통”이다. 천국은 “기쁨”이요, 지옥은 “통곡”이요, 완벽한 아픔이다.영혼은 육신을 떠나자마자 천국이나 지옥으로, 위로 받든지 아니면 고통받으러 즉시 떠나게 된다. 잠을 자거나 연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천국은 이 세상에서 많고, 큰 재앙을 거쳐가는 사람에게 진정한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은총 속에 살던 사람에게는 그리 위로가 크지 않을 것이다(아마도 그들의 영혼은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고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잠들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제 그들은 위로를 받는다. 그들의 모든 눈물은 씻기어지고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고 할 것이다. 천국엔 영원한 위안이 있다. 반면에 지옥은, 세상 연락과 쾌락을 즐기다 가는 사람에게는 진짜 지옥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고통은 더욱 크고 마치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보지도 아니하던”(신 28:56) 자에게 닥치는 덧없는 재앙과 같을 것이다.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도움을 입어 어떤 구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것임을 알려 주었다. 왜냐하면(26절) “이뿐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다.” 건널 수 없는 “큰 균열이” 있기 때문에, 영광의 성도와 저주받은 죄인 사이엔 연락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천국은 가장 친절한 성도라도 한 때 그들의 친구였던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해, 죽어 저주받은 무리에게로 방문할 수가 없다.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여도 할 수 없다(26절). 너에게 물을 날라주기 위해 아버지의 영광을 얼굴을 늘 쳐다보는 것을 그만 둘 수 없고, 보좌를 위한 일을 쉴 수 없다. 그 일은 그들의 일이 아닌 것이다.”지옥의 가장 용감한 죄인이라도 그 옥(獄)을 힘으로 벗어날 수는 없으며, 그 큰 구렁이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거기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26절). 자비의 문은 닫혔고 그 다리도 거두어졌기에 그것을 바랄 수도 없다. 또한 집행 유예나 보석 석방으로 출감하는 것도 없다. 아니 단 한 시간도 안 된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연과 은총의 상태엔 틈이 없어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즉 죄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죄 가운데서 죽으면, 파멸의 구렁텅이에 스스로 빠지고 다시는 나올 수 없다. 그곳은 “마실 물도 없고” 또한 “거기서는 헤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령과 계획은 이 구렁을 고정시켜 놓아, 아무도 그것을 메울 수 없다. 이것은 불쌍한 사람들을 절망에 처하게 한다. 또한 그의 상태의 여하한 변화나, 최소한의 구제도 때가 늦었다. 그러한 구제는 “이 세상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었으나, 이제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게 되었다. 저주받은 죄인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는 선언에 의해 묶여버린 것이다. 다시는 굴려낼 수 없는 하나의 돌이 구렁이의 문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행한 다른 요청. 그는 입이 막혔다. 아브라함이 물 한 방울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저주받은 죄인들은 그들이 받은 선고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그것을 대항해서 항의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비참을 가볍게 할 수 없다. 그가 “혀를 서늘하게 해 줄” 한 방울의 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하기를 “목말라 혀를 깨물었을” 것으로 안다. 마치 하나님의 분노의 “잔”이 쏟아진 것처럼(계 16:10), 우리가 지금 상상하기로는 그가 발했을 비명과 외침은 무시무시했으리라. 그러나 말할 기회가 있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남겨 두고 온 친척들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다. 자 이것을 살펴보자.그는 나사로가 심부름으로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지기”를 간청한다. “아버지여 그러면 구합니다”(27절). 그는 아버지를 다시 불러서 아주 끈질기게 요청한다. “간청하오니 이 일은 거절하지 마소서.” 그가 땅 위에 살 때는 간청하면 응낙받았을 것이나, 지금은 헛일이다. “처음 요청한 것은 거절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만은 거절하지 않을 정도로 동정심이 많을 줄 확신합니다.” 즉 “여기엔 큰 구렁이 끼어있어 한 번 들어오면 다시는 나갈 수 없으니, 그러므로 나사로를 보내어 그들이 여기로 오지 못하도록 하소서.” 바꾸어 말하면 “당신들과 나 사이엔 큰 구렁이 있지만, 당신들과 그들 사이엔 그런 구렁이 없으니 나사로를 그리로 보내소서. 나사로를 나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려보내소서. 그는 예전에 거기 여러 번 있었고, 거기서 상부스러기를 여러 번 거절당했었기 때문에, 집에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압니다. 나사로는 내가 거기 다섯 형제를 둔 것을 알고, 그가 나타내면 그 형제들은 나사로를 알 것입니다. 또 그가 정직한 사람인줄 알기에 그가 말하는 것을 존중할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그들에게 증거하게 하소. 내가 어떤 처지에 있고, 사치와 육욕으로 스스로를 이런 처지에 전락하도록 만들었고, 가난한 이에게 무심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알려 주게 하소서. 그들은 내 전철을 따르지 않고, 내가 가는 길도 따라오지 않으며,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도록 그런 것들을 떠나도록 일러주게 하소서(28절).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다섯 형제”만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자식이 없음”을 추측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지식들에 대하여 언급했을 것이다. 그가 부양할 자식까지 두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몰인정한 자인가 함을 실감하게 된다. 이제 부자는 자기 형제들의 죄된 생활을 고쳐 주려 한다. 그는 “내가 그들에게 증거하도록 나를 그들에게 보내 주소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이에 “큰 구렁”이 있음을 안다. 또 그에게 그처럼 좋은 허락이 내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나갈 수 있다면 형제들이 “정신”을 잃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를 보내소서. 그의 얘기는 덜 무섭겠으나, 그러나 충분히 그들을 죄에서 놀라 돌이킬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그가 지금 그들의 파멸을 막고자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 대한 배려였다. 또한 그는 그들의 성미, 유혹, 무식, 불(不)신앙, 무사려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이 달려나가고 있는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그들을 건져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들이 그에게 그 “고통의 현장”에 온다면, 그들을 그곳으로 오도록 가르쳐 준 사람이 자기인데 나사로를 보았을 때 더욱 큰 괴로움을 느꼈던 것처럼 그들을 본다면 더욱 괴로움이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죄짓는 동무와 함께 비참한 지경에 빠지게 되면, 한 다발에 묶여 불에 던지운 독초들처럼, 그들은 서로 서로 불행이 된다.아브라함은 이 호의도 역시 거절한다. 지옥에서는 어떤 요청도 허락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올린 부자와 같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그런 자들은 부자의 기도가 헛되이 끝나고 만 것을 본삼아 그 같은 기도를 하지 말도록 해야 하리라.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언에 맡겼다. 그것이 일반적인 신복과 회개의 수단인 것이다. 그들은 쓰여진 말씀인 성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읽고 듣는다. “그들로 예언의 그 확실한 말씀을 잘 알아듣도록 하여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 평범한 은혜의 방법을 거부하시지 않을 것이다”고 아브라함은 말한다. 여기에 그들의 특권이 있다. “저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29절) 이것이 그들의 의무인데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들로 신앙을 삼고, 그것이 그들을 이 고통의 장소에 빠지지 않게 막는 데 충분할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구약 성서의 모세 율법서와 “예언서”에, 이 세상이 가면 다음 세상이 있고, 선악간에 상벌이 있다는 상태가 있다는 것을 공평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확신시키는 증거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바로 이것이 부자가 형제들에게 확신시켜 주어야 할 것이었고, 그러기에 그들은 모세의 선지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다.그는 요청을 더한다(30절).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이것을 조금만 더 얘기하게 하소서.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들을 존중한다면 충분하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고, 그리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그들이 회개 하리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더욱 분명한 확신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에 익숙해 왔기에 별로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것이요,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그들을 회개시킬 것이며, 악한 습관과 잘못된 생활을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자.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뽑으셔서 인정하신 것보다는 다른 확신의 방법을 더 낫게 생각하기가 쉽다.아브라함은 결론적인 이유로써 이것을 부인하심을 계속 주장하신다(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다면 그들이 주는 증거와 경고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다. 기적에 의해서 확증되는 공적인 계시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면 그들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적인 증거도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할 것이다.”시련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직접 오는 사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얘기하신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顯現)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계명을 받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증거한다 할지라도, 성서에 있는 이상으로 말할 수 없고, 또 그 이상 권위를 가질 수도 없다.성경을 의심한다면, 하물며 모든 일에 속이고 기만당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바 이유가 많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 경우를 의심하는 사람은 다른 경우도 분명히 그렇다.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함을 부수고 타락하게 만드는 힘은 “죽은 자로부터” 증거를 듣는 사람도 분명히 부셔뜨릴 것이다. 그리고 설령 죄인이 그러한 증언에 처음엔 놀랄지라도 그 놀람이 가라앉으면, 그는 곧 더욱 굳어진 마음이 될 것이다.성서는 하나님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또한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다른 어떤 길을 요청한다면 뻔뻔스러운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요청한 것이 거절되고 젖혀놓아진다 해도 그것 말고 다른 어떤 길을 우리에게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거나 기대할 근거도 있지 않다. 여기서 우리 구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 안에서 곧 증명되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그다음에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어도”(아마도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나사로를 부르신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죽이기로 모의했었고, 그를 살린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어도” 절대로 그에게 설득 당하지도 않았다. 유두고가 살게 되었을 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었지 그를 물어보려 하지 않았다(행 20:10, 11). 그러므로 우리는 환상과 귀신을 바라지 말자. 또한 “죽은 자”도 찾지 말자. 다만 “율법과 증언”만 구하자(사 8:19, 20). 그것만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다.”

누가복음 16장 본문 및 주석 정리, 불의한 청지기 그리고 부자와 나사로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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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개역개정성경 본문 및 주석

정직하지 않은 종의 비유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청지기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지를 관리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청지기는 무능력하였고 정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 부자는 청지기를 해고함으로써 그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으며 그가 일한 것에 대한 기록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6절 : 그의 주인이 소유한 양 대신에 청지기가 쓰라고 말한 세 가지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청지기는 자신이 가진 권위로 가격을 더 낮추었습니다. 둘째, 청지기는 율법에 따라서 빚에서 이자를 제거하였습니다(레 25:36-37, 신 15:7-8, 23:20-21). 셋째, 청지기는 주인의 돈이 아니라 자신의 돈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수고비를 제하였습니다.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8절 : 주인은 청지기가 관대하게 행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청지기가 실제보다 적게 쓰게 함으로써 주인의 것을 도둑질하고 정직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물건의 숫자를 세는데 있어서 청지기가 매우 영리했다는 사실을 놓고서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6-7절). 그리고 주인이 실제로 청지기를 칭찬했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주인이 실제로 도둑질 당한 것이 없었고, 청지기가 빚진 자들에게 실제보다 줄여 주었다는 것은 율법에 따른 행동이었고 청지기 자신의 수수료를 낮추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0절 : 작은 이기심은 결국 큰 이기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관대함은 타인의 큰 관대함을 받게 합니다.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재물(맘몬), 참된 것 : 11절은 10절의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적절하게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히 더 가치 있는 영적 문제들을 다루지 못합니다.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6절 :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계획의 기초적인 경계를 가르쳐 주십니다. 약속된 시간은 율법과 선지자에서 세례요한까지 연장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은 전파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 “는 말은 또한 “모든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어올 수 있도록 요구된다”라고 번역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긴급함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7절 :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내용은, 율법의 모든 계명들이 영원토록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즉, 하나님의 약속의 목표는 실현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간음함 :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신성함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의 율법의 도덕적인 요구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부자와 거지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자색 옷 : 자색 옷은 달팽이에게서 추출한 특수한 염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당시에는 매우 비싼 제품이었습니다.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0-21절 : 개들은 죽은 동물을 비롯하여 쓰레기를 먹었기 때문에, 개들이 나사로의 상처를 핥아서 나사로를 감영시키고 율법적으로 부정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아브라함의 품 : 죽은 자들에게 있어서 축복된 장소였습니다. 유대교에서도 또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천사들이 호위한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죽은 자들이 즉각적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알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3절 : 19-21절의 운명의 반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자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나사로는 평안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 음부 “가 죽은 자들이 모이는 곳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 16편 10절이나 시편 86편 13절에서는 음부를 “스올”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신약에서는 부정적인 문맥에서 하데스가 언급되어지곤 합니다(눅 10:15, 마 11:23, 16:18). 음부는 불의하게 살다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게헨나’는 최후의 심판이 있는 곳입니다(마 5:22, 눅 12:5 참조).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괴로워하나이다 : 부자는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심판에 대한 경험을 표현하는 ‘갈증’이라는 이미지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사 5:13, 65:13, 호 2:3).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살았을 때 : 부자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한 기준이 이제 죽어서 자신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그는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연민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 그에게도 누군가가 연민을 주지 않습니다.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큰 구렁텅이 : 이처럼 세부적으로 묘사한 것은 불의한 사람이 일단 죽으면 결코 의인들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7-28절 : 부자는 형제들이 자신과 같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늘로부터 사절단(천사)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 말은, 자신의 형제들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의 표현인지 혹은 자신이 억울하다고 표현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 아브라함은 부자의 형제들이 이전부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구약성경에서는 재물을 나누어 주고 가난한 자를 돌봐야만 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신 14:28-29, 사 3:14-15, 미6:10-11).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듣지 아니하면 :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부활을 목격하여도 결코 듣지 않을 것입니다. 부자가 하늘의 사절단(천사)을 요청한 것이 이 비유에서는 거부되었지만, 실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부활하신 것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통해서, 31절의 내용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NKJV Study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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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헬라어 주석강해]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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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6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리게 됩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자르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청지기가 주인의 것을 가지고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명예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고대 근동은 명예를 중요시하던 시대입니다. 명예를 돈과 바꿀 수가 없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들에게 명예가 없으면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가지고 탕감해 줌으로써 주인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님도 이 세대들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고 세상의 사람들이 영광을 올리게 하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8)

1절은 엘레겐 데 카이 프로스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안드로포스 티스 엔 플루시오스 호스 에이켄 오이코노몬 카이 후토스 디에블레데 아우토 호스 디아스코르피존 타 휘파르콘타 아우투입니다.

눅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16:1

어떤 부자 – 현장에 관리를 둔 대지주(大地主)이거나 (Jeremias) 혹은 당시 갈릴리에 흔하였던 부자 지주(Grundmann)를 가리킨다고 본다. 아무튼 사람들이 그에게 빚진 정도를 보아 그는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 한편 부자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에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알포드(Alford)에 의하면 ‘그 부자’는 이 세상의 아들을, 메이어(Meyer)는 맘몬(돈의 신)을, 올스하우젠(Olshausen)은 마귀를,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로마인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든 간에, 본 비유의 초점은 위기의 때를 맞아 지혜롭게 재물을 융통한 청지기에 맞춰져 있다.

청지기 – 이 말은 맡은 재산을 관리하도록 위탁을 받은 ‘고용인’이나 ‘대리인’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말이다. KJV에는 ‘간사’ 혹은 ‘급사’, ‘집사’의 뜻인 ‘스튜어드'(steward)로 번역한다. 청지기는 주인의 종일 수도 있으며(창 39:4-6) 또한 자유인으로서 주인과 고용 계약을 맺은 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와 같이 그들은 맡은 일의 성격상 재산을 관리하는 동안 부정(不正)을 저지를 가능성이 항상 있었다. 한편 이 청지기가 누구를 상징하는가 하는 것도 그의 주인인 ‘어떤 부자’에 관한 의견과도 같이 다양하다. 알포드(Alford)에 의하면 청지기는 모든 제자들 즉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한편 바리새인 혹은 가룟 유다 심지어는 본디오 빌라도를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떤 부자’와 마찬가지로 이’청지기’ 또한 개별적으로 특정 사람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다만 예수는 당시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었던 본 비유와 같은 전체적 상황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교훈하고자 하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허비한다 – 헬라어 ‘디아스코르피조’는 돈이나 재물 등을 마구 탕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 청지기는 횡령 혹은 부실 경영을 통해 주인의 재산을 축내었으리라 보인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고대 근동 사람들은 부기(簿記)나, 규정된 회계 감사 등을 몰랐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유에 나오는 셈(account), 증서(statements) 등의 용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도 이미 장부(帳簿)등은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디아스코르피조는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을 사용했다. 주인의 돈을 자기의 돈처럼 마구 썼다는 것을 말한다.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인 척 생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절은 카이 포네사스 아우톤 에이펜 아우토 티 투토 아쿠오 페리 수 아포도스 톤 로곤 테스 오이코노미아스 수 우 가르 뒤네세 에티 오이코노메인입니다.

눅 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16:2

이 말이 어찜이뇨 – 헬라어 ‘티 투토’에 대해서는 (1) ‘이것이 무슨 말인가?’, (2)’ 왜 내가 이것을 듣게 되었는가?’등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단순히 주인이 듣게 된 내용의 사실성 여부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들은 내용의 일부 혹은 전부를 사실로 여기고 ‘왜 그러한 잘못을 행했는가’라고 질책하는 말이기 때문에 (2)의 해석이 보다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네 보던 일을 셈하라 – ‘보던 일’의 헬라어는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말씀’, ‘이성’, ‘사건’ 등의 뜻도 있지만 본절에서는 ‘계산'(account)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재산 목록과 장부 및 각종 문서를 작성, 보관하는 일까지 책임 맡고 있는 관리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셈하다’의 뜻인 ‘아포디도미’는 단순히 계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산해서) ‘넘겨주다’, (증서를) ‘양도하다'(render,KJV)는 의미까지도 내포된 말이다. 그러므로 본절 전체는 ‘네가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사무를 청산(淸算)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는 의미가 된다. 아포디도미의 문법은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2인칭이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모든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서 직접 명령하여 보고하라는 의미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마지막 때가 되면 셈을 하라고 명령하실 것이다.

3절은 에이펜 데 엔 헤아우토 호 오이코노모스 티 포이에소 호티 호 퀴리오스 무 아파이레이타이 텐 오이코노미안 아프 에무 스카프테인 우크 이스퀴오 에파이테인 아이스퀴노마이입니다.

눅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16:3

땅을 파자니 – ‘파다’의 원어 ‘스카프토’는 일반적으로 정신노동과반대되는 의미에서의 육체노동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육체노동 중에서도 농사짓는 것을 의미한다.

빌어 먹자니 – ‘에피이테오’는 ‘위를(위에)’이라는 뜻의 ‘에피’와 ‘요청하다’는 뜻의 ‘아이테오’의 합성어로서 ‘구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삶의 위기의식을 느낀 청지기의 독백은 무엇을 해도 절망적이기만 한 급박한 상태를 나타낸다.

한편 그 청지기는 비록 부정을 저질렀지만 신속한 판단과 빈틈없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즉 자신의 처지와 능력을 파악하고 즉시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결단한 것이다. 결국 이 같은 결단은 곧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항상 우리가 잊지 말고 생각해야 할 바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우리 인간은 자신의 삶에 주어진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회피하거나 스스로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신 있고 결단력 있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사실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특징짓는다면 그것은 결단(決斷)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해고된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4절은 에그논 티 포이에소 히나 호탄 메타스타도 테스 오이코노미아스 덱손타이 메 에이스 투스 오이쿠스 아우톤입니다.

눅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16:4

직분을 빼앗긴 후에 – 이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흥청망청 써 버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 주인은 그를 해고하게 되고 그는 난처한 상황에서 살길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빼앗긴 단어가 메티스테미 동사다. 가정법 과거 수동태 단수 1인칭이다. 가정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주인에게 청지기 직분을 빼앗길 수도 있고 빼앗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자기 것인 양 주인의 것을 함부로 사용했기 때문에 해고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수동태는 자신이 청지기로 누리고 있는 것은 주인의 은혜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남용하였다.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지식과 지혜와 재물과 재능을 자신의 것인 양 남용하고 교만하면 결국 빼앗기게 된다.

즉 우리는 자신이 부여받은 힘과 지혜와 재물 등 모든 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이며 자신의 능력에 의해 스스로 획득한 것인양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하며 우리 인간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창 1:28-31; 욥 1:21).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낭비라는 삶은 곧 이것들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교만한 소행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대하여 청지기 의식(stewardship)을 가지고 겸손한 자세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19:13; 마 25:14, 15; 고전 6:20; 벧전 4:10).

5절은 카이 프로스칼레사메노스 헤나 헤카스톤 톤 크레오데일레톤 투 퀴리우 헤아우투 엘레겐 토 프로토 포손 오페일레이스 토 퀴리오 무입니다.

눅 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16:5

빚진 자 – 여기서 주인과 빚진 자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예레미야스(Jeremias)에 의하면 빚진 자들은 아마도 토지 수확의 일정량을 소작료로서 지불해야 될 소작인들이거나 또는 채무 증서를 쓰고 곡물을 받은 도매상인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런데 청지기나 빚진 자들이 이미 전에 서명한 ‘증서’를 위조(僞造)할 수 있었다고(6, 7절)한다면 아마도 이 빚진 자들은 청지기와만 계약을 맺은 것 같다.

6절은 호 데 에이펜 헤카톤 바투스 엘라이우 카이 에이펜 아우토 덱사이 수 토 그람마 카이 카디사스 타케오스 그라프손 펜테콘타입니다.

눅 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16:6

기름 백 말 – 빚을 기록한 증서는 헌금이 아닌 물품으로 적혀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자의 실제적인 양을 숨기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W.L.Liefeld). 본문에서 빚진 자들의 빚진 수량은 대단히 많았는데 예컨대, 밀 백말은 약 백 에이커(acre)의 땅에서 산출되는 양이라고 한다.

요세푸스(Josphus)에 의하면 ‘말’의 뜻인 헬라어 ‘바토스’는 대략 23리터에 해당된다. 따라서 기름 백 말은 약 2,300 리터에 달한다. 팔레스틴에서 감람나무 한그루의 평균 수확량은 올리브 열매로 120Kg, 기름으로는 25리터가 된다.

그러므로 기름 백말은 감람나무 약 92그루의 소산에 해당하며, 돈으로 환산하는 경우에는 천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증서를 가지고…쓰라 – ‘증서’의 뜻인 헬라어 ‘그람마는 ‘문서’, ‘글’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 절에서는 ‘채무 증서’를 가리킨다. 본문의 청지기는 채무자들에 의해 작성된 임대차 계약서나 채무 증서 또는 약정서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증서를 채무자들로 하여금 자필로 다시 고쳐 쓰게 하거나, 새로 쓰게 함으로써 속임수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한편, 율법에 의하면 이자로 받는 행위가 불법으로 되어 있으나(출 22:25; 25:36, 37; 신 15:7, 8; 23:19, 20)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경우가 흔했다. 따라서 본문의 청지기 또한 주인 몰래 이자를 착복해 오다가 궁지에 몰리자 그 이자 부분만큼 탕감해줌으로써, 빚진 자에게 선심을 쓰는 한편 주인에게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7절은 에페이타 헤테로 에이펜 수 데 포손 오페일레이스 호 데 에이펜 헤카톤 코루스 시투 카이 레게이 아우토 덱사이 수 토 그람마 카이 그라프손 오그도에콘타입니다.

눅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16:7

밀 백 석 – ‘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로스'(히브리어 ‘코르’에서 온 마른 곡식을 재는 단위)는 약 27,500Kg으로 42헥타르 정도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수확량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밀 1 코르의 표준 가격은 금 25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따라서 밀 백석은 2,500 데나리온에 해당된다.

팔십 – 기름을 백 말 정도 빌린 자에게 그 절반인 오십 말로 공재(控除) 해 준 것에 비해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5분의 1 정도인 20석 만을 공제해 주었는데 이는 두 물품의 상품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밀이 기름보다 훨씬 비쌌다. 빚진 자들이 각각 삭감받은 수량 즉 기름 50말, 밀 20석을 돈으로 환산하면 모두 각각 5백 데나리온 정도가 된다. 오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금액은 1 데나리온이 임금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노동자 한 사람이 약 16개월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네 증서를 가지고 – 청지기는 주인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채무자들이 직접 자필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은 청지기가 임대차 계약이나 채무자들과의 계약을 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청지기는 채무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각각 절반에서 1/5 정도로 부채를 탕감(蕩減) 해 주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다른 채무자들에게도 이러한 수준에서 빚을 탕감해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빚을 탕감해준 데에는 그 채무자들이 청지기가 쫓겨난 후 그에게 받은 은혜로 인하여 그의 생계(livelihood)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저의가 숨어 있다.

8절은 카이 에페네센 호 퀴리오스 톤 오이코노몬 테스 아디키아스 호티 프로니모스 에포이에센 호티 호이 휘오이 투 아이오노스 투투 프로니모테로이 휘페르 투스 휘우스 투 포토스 에이스 텐 게네안 텐 헤아우톤 에이신입니다.

눅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16:8

이 세대의… 더 지혜로움이니라 –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자신들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더욱 지혜롭다는 뜻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처리 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욱 지혜롭고, 단결이 잘 되며, 열성을 다한다는 의미이다.

때때로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그들의 유대(紐帶) 관계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배울 것이 많다.

즉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反目) 하며 자신들만이 진리에 선 것 것처럼 타인을 멸시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하지만 본절의 목적은 불신자들이 지혜롭게 행한 것보다 성도들은 더욱 지혜롭게 행하여야 한다는 데 있지 결코 불신자들의 부정직과 사기술을 칭찬한 데 있지 않다(롬 2:6-8). 세상 사람들도 이렇게 지혜롭게 주인의 명예와 이름을 높이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하나님께 받은 재물과 재능을 가지고 세상에서 주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할 것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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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가복음 16장 1~13절

이번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찜찜해 보일 정도로 이상하게 들립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이 세상에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개의치 말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이야기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주인을 속인 불의한 청지기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체 본문의 구성도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비상시를 대비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작은 일에 충실해야 큰일에도 충실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서학자들도 이 구절을 신약성서에서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목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소위 ‘난해구절’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본문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어떤 부자와 청지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이 부자는 부재지주입니다. 부재지주는 모든 행정적인 일을 청지기에게 일임하고, 청지기가 지주와 똑같은 권위로 땅을 관리했습니다. 지주는 일 년에 한두 번이나, 또는 한 번도 오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의 지주는 청지기가 자신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나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제 지주는 이 청지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런 결정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나쁜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게 과연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를 더 알아봐야 하고요. 설령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더 좋은 청지기를 구할 수 없다면 함부로 해고할 수도 없습니다. 성서는 이에 관해서 별로 자세한 언급 없이 지주가 청지기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청지기는 사정이 아주 딱하게 되었습니다. 실직자는 우선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급선무입니다. 그렇지만 나쁜 소문으로 해고당한 청지기를 다른 부자가 불러줄 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전공을 살릴 수 없다면 이제 막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본문에 보면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는 하소연이 나옵니다. 청지기 생활을 너무 오래 한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이미 늙은 탓인지 이 청지기는 막노동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방법은 빌어먹는 것이지만 이 청지기는 창피해서 그 일만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청지기는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자기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을 미리 만들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빚진 사람을 불러들였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기름 백말을 빚졌습니다. 청지기는 그 사람에게 계약문서에 오십 말로 바꿔 적게 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밀 백 섬을 빚졌습니다. 문서에 팔십 섬으로 바꿔 적게 했습니다. 주인을 속인 겁니다. 그런데 청지기의 이런 행동을 보고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 때문에 해고당한 청지기가 또 다시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는데 주인은 그를 칭찬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예수님은 이 비유 끝에 다음과 같이 결론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b절) 이런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우리도 세상에서 손해 일절 보지 않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잔머리를 얄팍하게 굴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 살아서 되느냐, 믿는 집 아이들이 믿지 않는 집 아이들보다 공부를 못해서 되겠느냐 하는 생각이 제법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도록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설교도 많습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드릴 때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해달라”는 주문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저의 두 딸이 공부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곧 그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기는 합니다. 여러분들도 비슷하게 생각한 생각으로 사시겠지요.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사는 게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인지 늘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우리도 이 세상의 이기적인 요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지 모릅니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주인에게 손해를 끼친 청지기를 칭찬하는 본문을 근거로 자신의 그런 삶을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겁니다.

청지기의 행동

이 본문은 난해구절이래서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2000년 당시에는 당연했던 상거래 관습들이 이 이야기 안에 들어오기도 했고, 누가복음 공동체만의 어떤 특별한 신앙적인 문제가 개입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 본문을 기록한 누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주인을 속인 청지기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어떤 속사정이 있는 건 아닐는지요. 우리는 이런 모든 문제를 자세하게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원칙대로, 또는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본문을 원칙대로, 단순하게 보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있게 읽어야겠지요.

계약문서를 새로 작성한 청지기의 행동에서 어떤 윤리적 기준을 찾으려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신앙적인 원칙을 제공합니다. 문서를 위조한 것은 분명히 비윤리적인 행동이지만 그게 본문의 핵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따지고 들어가면 그의 문서위조는 범죄행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당시는 지주와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거래의 이자가 통상 50~100%나 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고리대금이지요. 그건 유대교의 율법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죄입니다. 청지기는 그 당시에 관행처럼 시행된 과도한 이자를 제자리로 돌린 것뿐입니다. 주인에게 이익이 줄어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법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청지기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청지기 자리를 쫓겨나게 될 경우에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은 이들이 자기를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청지기는 자기의 형편에서 최선으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는 9절 이하에 나오는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설명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비유와 설명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약간 다릅니다. 겉으로는 약간이지만 실제로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비유에서 청지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를 집으로 맞아줄 것만을 기대했지만, 이 설명에서는 영원한 집으로 맞아준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집은 일상이지만 영원한 집은 종교적 차원입니다.

재물에 관한 설명에서도 역시 이런 차이가 드러납니다. 청지기는 세속적인 재물을 이용해서 자기의 미래를 준비했는데, 예수님은 여기에 덧붙여 참된 재물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루터 성서번역을 따르면 이 두 재물이 극과 극으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재물은 ‘불의한 맘몬’(ungerechte Mammon)으로, 참된 재물은 ‘진정한 것’(das wahre Gut)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처세술을 말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청지기가 모든 걸 잃었을 때에 자기를 맞아줄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한 것처럼 제자들도 모든 걸 잃었을 때에 받아주실 분에게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를 잃는 것은 곧 제자들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죽음에서 우리는 모든 걸 잃습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노력한 모든 대상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이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줄 분은 오직 그분밖에 없습니다.

죽음 이후가 뭐 그리 중요하냐, 살아있을 때 멋지게 사는 게 중요하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 원하신다면 그렇게 멋지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청지기가 청지기 자리를 곧 놓아야하듯이 우리도 삶 자체를 곧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제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리가 곧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세요. 젊음과 건강은 우리가 이 세상을 멋지게 사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지만 그게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는 생각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여잡고 있는 그런 것들이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맞아주지 못합니다. 그런 것에 모든 걸 걸어두는 사람은 결국 훨씬 큰 절망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성서는 자기집중, 자기연민, 업적주의를 죄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참된 생명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재물

최소한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분들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저의 설명에 동의하실 겁니다. 그러나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거나(9절) 세속의 재물에 충실해야 한다는 구절(11절)은 동의하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제가 앞에서 루터 번역을 인용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재물을 불의한 맘몬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은 맘몬이고, 맘몬은 불의합니다. 재물이 사람보다 높이 평가되는 세상이 어떻게 불의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지나가야 할 재물이 군주처럼 받들림 받는 세상이 어떻게 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악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재물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재물은 소비될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재물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은 곧 재물을 재물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나가야할 재물을 영원한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재물을 충실하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이 재물은 단지 돈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건강과 외모도 역시 영원한 게 아니라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그것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돈도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삶에 잠시 머물면서 수단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들이 목적으로 둔갑되었다는 사실이 심각한 거지요. 성서는 그런 것을 가리켜 우상숭배이며, 바알숭배이고, 맘모니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것들은 제 위치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 비유에서 가리키고 있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우리를 영접할 친구, 즉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은 부자에게 해고통지를 받은 청지기처럼 온전히 거기에 투자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된 관계에 집중한다는 말은 우리가 자주 들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은 예배를 잘 드리고, 성경을 잘 읽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경건한 생활은 아주 소중하지만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삶의 결과이며 태도입니다. 근원적으로 훨씬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의 청지기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지켜주거나 맞아주지 못할 바로 그 순간에 관한 생각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그 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모든 영혼을 기울이게 마련입니다. 그런 자세로 예배도 드리고 사람과의 관계도 맺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이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걸 잃게 될 순간을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비교적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좀 모자라면 가족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취미생활도 있습니다. 나름으로 이 세상에서 즐거운 일들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그게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그 순간을 우리가 준비하고 있나요? 우리의 영혼을 바로 그 순간으로 채우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영성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그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고 말입니다. 여기서 재물을 단순히 돈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취하려는 모든 열망을 가리킵니다. 그런 열망의 노예가 된 사람은 모든 것을 잃게 될 순간에 우리를 맞아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열망을 멋진 삶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성서는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온전히 집중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리를 놓아야 할 오늘 본문의 청지기와 같습니다. 그는 자기가 모든 걸 잃을 때 맞아줄 친구에게 온 영혼을 기울였습니다. 그 친구인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십니다. 그분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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