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상 1 장 | 사무엘상 1장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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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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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

사무엘상. 제 1 장. 엘가나의 실로 순례.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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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2/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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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사무엘상 1. 1. 1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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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4/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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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 KLB – 엘가나의 가족 – 에브라임 – Bible Gateway

사무엘상 1. Korean Living Bible · 1 에브라임 산간 지대의 라마다임 – 소빔에 엘가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 그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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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4/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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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31(수) “사무엘상 1:1-28”/ 작성: 김신년

본문 사무엘상 1장 1-28절 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시대적 상황 오늘 부터 시작되는 사무엘상하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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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2/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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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장 & 성경주석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7)라고 외쳤던 룻과 “내게 사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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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2/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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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8월 11일. 사무엘상 1장.

사무엘상 1장. 고통은 우리의 경건과 기도를 성숙하게 합니다. 1. <사무엘상하>는 <열왕기상하>와 연결되어 있는 책입니다. 전후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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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3/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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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제1장 강해: 사무엘의 출생 – 다음블로그

한나의 슬픔에 대한 엘가나의 위로의 말입니다. ‘어찌하여’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울며’ ‘먹지 아니하며’ ‘마음이 아프뇨’라는 말을 사용하여 한나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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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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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역사의 시작 (사무엘상 1장 1-8절)

새역사의 시작 (사무엘상 1장 1-8절). 사무엘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는 인물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구원의 모델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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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ogosgarden.tistory.com

Date Published: 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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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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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무엘 상 1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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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dK4dqCYIGI

사무엘상 1

엘가나의 실로 순례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3 이 사람이 매년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에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의 아내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7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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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19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쌔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017/05/31(수) “사무엘상 1:1-28”/ 작성: 김신년

본문 사무엘상 1장 1-28절

찬송가 450장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시대적 상황

오늘 부터 시작되는 사무엘상하는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세워지는 왕정 정치시대로의 150년간의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성경입니다. 사사이면서 선지자인 사무엘을 통해서 세워진 사울왕과 다윗왕을 통해 이스라엘은 새로운 왕정시대로 진입하였습니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 시대적 정치적 변화속에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어떻게 하나님앞에서 자리매김해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사무엘서를 시작하는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사시시대 말기 영적, 윤리적으로 가장 캄캄한 암흑기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엘가나’라는 레위인의 가정에서 태어날 아기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시키셨습니다.

엘가나 가족의 상황

오늘 본문1-2절입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사무엘의 부친으로 등장하는 엘가나는 레위지파 그핫족속의 사람으로 에브라임 지역 라마다임소빔(약칭으로 라마,19절)에 살고 있었습니다(대상6:34-38).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나’와, ‘브닌나’였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었지만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엘가나는 매년마다 회막이 세워진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는 신실한 레위 사람이었지만 한 여인은 자식이 없고 한 여인은 자식이 있는 그의 가족 상황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긴장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엘가나는 임신하지 못하는 한나를 배려하여 제사를 드리고 나서 먹는 제물의 몫을 그녀에게 두배나 챙겨주지만, 임신하지 못하는 한나는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에게서 심한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음으로 가족안에 심한 갈등이 잠재해 있었습니다. 6절이 두 사람 사이를 “적수”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곧 원수라는 뜻입니다. 원수가 한 집안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엘가나’ 가족의 상황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상황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괴로움속에서 자신의 상황을 주님께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10-11절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마음이 괴로워 하나님께 드리는 이 여인의 기도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엘리제사장은 그녀가 소리없이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술에 취해 술주정을 부리는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심한 마음의 아픔과 탄식속에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서, 그것도 자식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기도를 드리는 여인을 보고서, 그것을 술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당시 제사를 담당하는 종교지도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전혀 없는 엘리 제사장과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는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의 시대에 이 가족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기의 출생

시대적으로는 가장 타락한 사사 시대말기, 가정적으로는 내재된 갈등을 가지고 있고, 영적으로는 기도조차도 술주정으로 인식되던 영적 암흑기속에서 하나님이 계획하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방법은 암흑기의 한 복판에서 한 아기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가정적으로 영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방법은 한 아기를 통해서였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잉태하여 출산케 하신 하나님께, 자신이 서원한대로 어린 사무엘을 회막으로 올려보냅니다. 이제 막 젖을 뗀 아기 사무엘을 회막으로 보내며 말한 한나의 고백입니다. 27-28절입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 한나에게서 태어난 아기, 이 아기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젖을 갖 뗀 아기가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아기 사무엘을 사용하셔서 사사시대를 막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이 아기를 통해서 왕이 세워졌습니다. 이 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가운데 새로운 하나님의 메시지가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드려진 아기를 사용하십니다. 시대를 바꾸는 것은 결국 헌신된 사람을 통해서 입니다. 당시 이렇게 바쳐진 사람, 헌신된 사람을 나실인이라고 호칭하였습니다. 하나님앞에 온전히 드려진 한 아기가 시대를 바꾸고, 가정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민족을 바꾸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드려진 미약한 아기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역사와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대의 나실인

윤리적으로 타락한 우리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찢겨지고 부서진 가족관계속에서 , 영적으로 침체된 한국교회의 상황속에서, 지극히 암울한 상황 한가운데서, 주님을 위해 드려지는 아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위해 구별된 인생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를 위한 나실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위해서 하나님앞에 드려져야할 아기는 누구입니까? 오늘 이 시대를 위해 헌신되어야 할 나실인은 누구입니까?

오늘 이 본문을 대하는 우리 모두도 이 세상에 한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한나처럼 믿음의 어머니에게 태어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결단을 표현할 만큼 충분히 성장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어머니의 결단과 고백이 필요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고백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나의 하루의 삶을 여호와께 드립니다”라는 믿음의 결단과 고백으로 오늘 하루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헌신된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누군가를 찾으신다면 이러한 결단과 고백으로 살아가는 나실인을 주님께서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겠습니까? 수많은 어려움과 갈등이 내재해 있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과 환경속에서 이 시대를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헌신된 나실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주님께 우리의 결단을 올려드리십시다. “주님, 오늘 하루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이번 한 달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내일이면 이제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됩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이번 한 달을 이러한 믿음의 결단과 고백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변화의 도구로, 그리고 하나님 역사의 산 증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기도의 응답으로 받은 사무엘의 일생을 주님께 드렸던 한나의 믿음처럼, 오늘 하루 내 삶을 주님께 드리며 이 아침을 시작합니다. 오늘 이 암울한 시대와 상황속에서도 새로운 변화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하옵소서. 한 아기를 통해서 새로운 왕정시대의 서막이 열렸고, 그를 통해 기름부어진 다윗왕의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듯이,

주님께 구별된 우리의 삶을 통해 오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주님의 역사의 도구로 가정과 회사와 교회와 사회속에서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처한 시대적 상황, 문화적 상황, 가정적 상황, 직장/일터의 상황, 경제적 상황, 관계적 상황은 어떤 상태인가?

2. 나는 내가 겪고 있는 갈등이나, 어려움, 문제의 상황들을 주님께 솔직하게 고백하며 충분한 시간을 주님앞에 보낸 적이 있는가?

3. 지금까지의 여러 위기와 갈등의 순간에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4. 갈등과 어려움의 한복판에서, 혹은 상황적 시대적 요구앞에서 내가 하나님께 결단하고 헌신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작성: 김신년)

사무엘상 1장 & 성경주석

<사무엘상 1장 흐름정리>

사무엘상은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던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에 관한 기록으로 시작된다. 엘가나에게 한나와 브닌나라고 하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한나는 브닌나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자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 자식을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헌신케 할 것을 서원하였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한나는 아들을 낳았고, 자신의 서원대로 그 아들이 젖을 떼자 그를 하나님께 바쳤다.

<사무엘상 1장 줄거리>

1. 아내가 둘인 레위인 엘가나가 매년 실로에서 예배함.

4. 자식이 없어 브닌나에게 학대받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아낌.

9. 한나가 고통 가운데 자식 얻기를 기도함.

12. 엘리가 처음에는 한나를 꾸짖었으나 나중에는 축복함.

19. 한나가 사무엘을 낳은 후 젖 떼기까지 집에 머묾.

24. 서원에 따라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림.

<사무엘상 1장 개역한글>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19.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쌔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사무엘상 1장 성경주석>

1:1 [이제].

(「개역한글판」에는 이 말이 나타나지 않음-역자 주). 보통 “그리고”라고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에서 왔지만 문맥에 따라 “이제”, “그때” 또는 “그러나”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단어가 반드시 이 책이 선행하는 다른 책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에스겔서도 같은 단어로 시작하지만, 아무도 그 책이 기존의 어떤 문서의 연속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1:1 라마다임소빔.

문자적으로 “파수꾼의 두 높은 곳” 또는 “숩 사람의 쌍둥이 고지대.” 1:19과 2:11이 라마다임소빔을 단순히 라마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쌍둥이 성읍을 말하거나 한 성읍의 두 지역을 의미하는 것 같다. 사무엘의 고향인 이 라마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라마다임소빔으로 지목되는 여러 장소를 알려면 본 장의 끝에 있는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1:1 엘가나.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산 자.” 에브라임 지파 지역에 살았던 고핫 족속의 레위인이다(대상 6:33~38; 참조 22~28절; 부조와 선지자, 569). 사무엘이 아론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만들고자 한 여호와의 결정을 그렇게 완강히 반대했던(참조 민 16장) 고라의 후손(대상 6:33~38)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것은 조상의 죄 때문에 자녀가 처벌되어서는 안 되고,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신 24:16)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거이다.

1:2 두 아내.

한나라는 이름은 “은혜로움”을 뜻하고, 반면 브닌나는 “머리숱이 많은 자”라는 의미이다. 세계 역사의 이 시기에는 일부다처제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하나님도 이를 허락했다(참조 신 14:26 주석). 그러나 경제적인 제약 때문에, 부유 계층과 군주들만 일부다처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통치자들은 다른 군주의 후궁으로 공주를 보냄으로써 평화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부다처제는 가정과 왕궁에 평화보다는 종종 음모, 시기, 실패를 초래했다. 신약 시대에는 일부다처에 빠진 남자는 어떤 종교적 직무에도 적합하지 않았다(딤전 3:2, 12).

1:3 올라가서.

실로에 있는 성막에서 불과 1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았기 때문에, 레위인인 엘가나가 매년 정기적으로 3대 절기(출 23:14~17; 참조 레 23:2 주석)에 참석한 것이 당연했는데, 특히 이른 봄에 있는 첫 절기요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에 참석하는 것은 더욱 그랬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상징하는 이 명절은 그의 큰 희생을 통해 영적 속박의 집에서 구원의 길을 마련한 분(고전 5:7)인 유월절 어린양의 위대한 원형인 예수에게로 사람들의 마음을 향하게 하였다. 사사 시대의 다른 많은 레위인과 마찬가지로 그가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요구되지는 않았지만(삿 17:8, 9), 한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엘가나는 이웃들을 격려하고 좋은 모본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희생제물을 가지고 올라갔다. 그가 악한 환경에서 살았을지라도, 그의 영성은 높은 수준에 있었음이 틀림없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부패했을지라도, 엘가나는 신실하게 예배와 희생제물을 드렸다. 그리스도 당시에 안나와 시므온도 그러했다(눅 2:25~38). 오늘날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심은 다른 사람의 행동거지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1:3 엘리의 두 아들.

이처럼 이른 시기에도 친인척을 편애하여 직책에 임명하는 족벌주의가 이스라엘에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각 지파에 흩어져 사는 레위인들이 실직의 공포에 휩싸여 있을 때도, 엘리 가문은 그의 두 아들이 도덕적으로 직무를 이행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계 수단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의 구현의 실패가 늘 불만과 혁명의 요인이 된다.

1:5 갑절.

문자적으로 “두 얼굴의 몫.” 엘가나는 가정의 연합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가족 각 구성원에게 “하나의 몫”을 주었다. 한나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그의 바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나타내기 위해, 마치 한나에게 자식이 하나 있는 것처럼 그에게 갑절의 몫을 주었다(참조 부조와 선지자, 569).

1:6 심히 격동하여.

브닌나의 태도는 부분적으로는 엘가나의 호의적인 관대함에 기인하였다. 하늘에서 있었던 사단의 경우에서처럼, 가정에서나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진 관심에 대한 질투심이 남을 조롱하고 격분시키는 악한 생각을 키워서 수많은 조소의 말을 쏟아 붓게 한다. 그런 조소가 한나의 식욕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축제에 참여하지도 못하게 했다. 한나가 축제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아론이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고 난 후 느꼈던 것처럼(레 10:19),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느꼈기 때문인가? 이 상황에서 그에게 명절의 영적 축복이 더더욱 필요하지 않았을까? 동료를 비웃도록 자신을 방치했던 브닌나가 명절의 축복을 얼마나 많이 누렸을까 하고 질문해 볼 수도 있다. 이 상황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그리스도가 언급한 상황(눅 18:10~14)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세리처럼,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고통을 꾹 참으며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1:9 한나가 일어나니.

한나는 슬픔과 자기 연민 가운데 스스로 완고해지거나 남편이 말을 걸 때 시큰둥하지도 않았으며 칭찬할 만한 수준의 자제력을 보여 주었다. 그는 성소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다.

1:11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한나는 명절을 통해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적 선물을 수용한 후 곧바로 좀 더 구체적인 선물 곧 아들을 달라고 간청하며 그 선물을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하여 되돌려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아마 하나님은 그런 전적인 굴복을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이전에 한나의 태를 열 수도 있었으나, 그랬다면 과연 한나가 이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겠는가?

세상의 지혜자들은, 기도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기도에 대한 실제적인 응답은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므로 기적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다른 방법으로 줄 수 없는 것을, 믿음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525). 왜 그런가? 이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충만케 하며 일을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온전히 굴복하는 것이 하늘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해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를 위한 하늘의 계획 속에 아브라함이 온전히 들어갈 수 있는 시점에 왔을 때, 하나님은 과거의 모든 실패를 축복을 위한 디딤돌로 바꿀 수 있었다. 한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그에게 말하지 않고, 비록 불완전하고 개혁이 필요했지만 제사장이라는 지정된 통로를 사용했다. 하나님은 자손을 얻고자 하는 한나의 자연적인 욕망이 마침내 가장 귀한 선물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열정에 흡수될 것을 아시고, 엘리를 통해 한나의 간청에 응답했다.

1:14 취하여.

성소의 수호자요 율법과 신앙의 최고 권위였던 엘리는 예배하러 온 사람의 심장의 고동보다는 눈에 보이는 상황을 토대로 판단했다. 자신의 아들과 관련된 경험을 기준으로 한나를 평가하고 있었으나, 아직 하나님이 나타낸 계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마음의 동기를 본다는 사실을 성령이 한나의 경험을 통하여 엘리에게 보여 주었다.

1:16 여기지 마옵소서.

한나는 그런 날카로운 꾸지람을 받고도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며 온유한 정신과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그의 오해를 야기한 자신의 슬픔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또한 자신의 결백을 담대하게 단언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고소자들에게 대답할 때 나타낸 것과 동일한 정신이었다.

1:17 평안히 가라.

평안은 적대감이 멈출 때 즉 전적으로 승리하거나 굴복할 때에만 온다. 여호와께 전적으로 굴복한 후 한나는 브닌나의 적대감과 놀림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구주처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엘리는 재빨리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승인하심을 나타냈다. 그리스도는 사랑과 식별의 참된 정신을 보여 주었고, 따라서 그와 동일한 정신을 자기의 부(副) 목자들(undershepherds)에게도 나누어 줄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초장의 가장 미천한 양이 그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나는 외부 환경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에게 맡겼고, 즉시 응답이 왔다.

1:20 사무엘.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셨다”이며, 성경의 다른 인명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무엘”은 여호와에게 드린 한나의 간청에 대한 기념물이며 그의 서원을 상기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허락에 대한 인정을 의미했다. 시간이 이 모든 것의 사실 여부를 드러낼 것이었다. 사무엘은 유년 시절 초기부터 자신이 여호와의 종임을 인식했다.

1:22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어머니는 사무엘을 단지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제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사무엘을 젖먹이 때부터 하나님을 위해 훈련하려고 노력했다. 많은 관심과 기도로 그의 육체적인 필요를 공급했고, 갓난아기 때부터 그의 생각이 만군의 여호와에게 향하도록 지도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위탁된 것을 더 온전히 이루기 위해, 사무엘이 젖을 뗄 때까지 실로를 방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서 어머니의 영향력은 얼마나 멀리 미치는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처럼 포로요 노예일지라도, 가나안 땅에 사는 레위인 가정의 핍박받는 어머니일지라도, 어머니로서 그들의 시간은 값으로 셀 수 없다. 이것을 인식한 한나는 이 땅에서의 시간뿐 아니라 영원한 시간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세상의 약한 것들을 사용하여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죄에 빠져 낙담한 사람들의 쇠퇴한 믿음을 다시 살리는 임무가 많은 경우 여호와의 미천한 여종에게 위탁되었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요게벳의 헌신과, 사무엘이 태어날 때 한나가 가졌던 비전과 마리아가 천사의 기별에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하며 느꼈던 엄숙한 책임감을 명상해 보라.

그러나 어머니의 가장 진지한 배려가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아이는 인생에서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삼손의 경우가 그렇다. 삼손도 자신을 섬겼던 오랜 시간 후에야 그의 생애를 전적인 헌신으로 이끈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그와 같은 헌신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믿음으로 승리한 기라성 같은 사람들 중에 그를 있게 하였다. 사단은 특별한 사업을 위해 하나님이 도구로 쓰기로 작정한 사람조차도 미혹하는 일을 위해 고용하려 든다.

1:22 영영히.

참조 출 12:14; 21:6 주석. 한나는 이 “영영히”라는 말로 사무엘이 평생 나실인이 될 것임을 의미했다(삼상 1:11; 참조 창 49:26; 민 6:2 주석). 키르베트 쿰란(Khirbet Qumra

n) 제4 동굴에서 발견되어 1954년에 출판된 사무엘상의 한 단편은 사무엘이 나실인(Nazirite)이었다고 명확하게 언급한다.

1:23 그 남편 엘가나가…이르되.

엘가나는 아내의 서원에 동의했으며(민 30:6, 7), 삼상 1:21에 의하면 자신도 그 서원에 동참했다(참조 민 30:6 주석).

1:23 여호와께서…이루시기를.

즉 “사무엘에 대한 여호와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은 이미 한나의 기도와 서원을 성취하는 일에서 그분의 역할을 알고 계셨다. 엘가나는 (1) 하나님이 진실로 엘리를 통해 말씀하셨다는 사실(17절)과, (2) 사무엘의 출생은 엘리의 약속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확인한다는 것(20절)과, (3) 그 약속이 사무엘의 평생 사역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을 믿었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많은 것이 남편과 아내의 협력에 의존한다. 엘가나는 아내의 헌신에 깊이 감동하였으며 그녀의 소망에 전심으로 동조하였다. 그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는 바울의 권면에 대한 훌륭한 예증이다. 그는 아내의 서원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그 서원에 자신을 깊이 관련시킴과 동시에, 아내의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선택한 아내의 뜻이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의 태도는 각 사람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개인과 동역하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품성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우주에 보여 주려는 그리스도의 가슴 속에 있는 소망을 예증한다.

1:24 수소 셋.

「70인역」에는 “삼 년 된 수소 한 마리”라고 되어 있다. 25절에 의하면 “그들이 수소 [하나]를 잡”았다. 아브라함은 헌신 제물(consecration sacrifice)로 3년 된 암소를 드렸다(창 15:9). 서원을 실행하기 위해 드린 엘가나의 희생제물(11, 21절)은 수소 한 마리와 그에 따른 소제와 전제로 구성되었다(민 15:9, 10). 엘가나와 한나가 온전한 한 에바의 가루를 가져왔는데, 수소 한 마리에 요구된 양은 가루 한 에바 10분의 3이기 때문에(민 15:8~10), 25절에 언급된 수소 한 마리는 아이 사무엘을 여호와께서 바치는 번제였고, 나머지 수소 두 마리는 각각 가루 한 에바 10분의 3이 필요한 속죄제와 화목제로 드려진 것 같다. 엘가나가 수소 세 마리에 충분한 가루 한 에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삼 년 된 수소 한 마리”라고 되어 있는 「70인역」과 다른 역본들이 잘못된 것임을 암시한다.

1:27 이 아이.

젖 뗄 때의 사무엘의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방에서는 보통 세 살까지 젖을 먹었으며, 일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상속자로 세우며 잔치를 베풀었을 때(참조 창 21:8) 이삭이 5세였을 가능성이 꽤 높다. 사무엘이 태어난 이후 한나가 명절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엘리는 그 사건을 잊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성경절에 의하면, 한나는 처음에 엘리에게 자신의 기도의 내용을 말하지 않고, 이제야 큰 기쁨으로 말하고 있다. 자신의 기쁨에 대해 말하면서, 한나는 “구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단어 샤알(s∨a‘al)에 변화를 주어 동사의 다른 형태를 사용하였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본문은 이렇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개입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가 그분께 요청한 요구를 나에게 주셨고, 그러므로 나 또한 여호와를 위하여 그를 요구하되 그가 살아있는 한 그는 여호와를 위해 요구되었나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드린 자신의 선물이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주신 선물이었음을 기꺼이 인정했다. 그도 다윗과 같이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4)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7)라고 외쳤던 룻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라고 단언한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했던 것도 다 이와 같은 사랑이었다.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소빔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장소가 제안되어 왔다. (1) 에브라임 지역에 위치한 베이트 리마(Beit Rima). 실로에서 서쪽으로 18킬로미터 지점인데, 여기에서 중앙 팔레스타인 산맥이 셰펠라 구릉지로 바뀐다. 또는 더 서쪽으로 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렌티스(Rentis)일 가능성이 있다. (2) 베냐민 지역의 에르-람(er-Ram). 예루살렘에서 북쪽 약 8.8킬로미터 떨어져 세겜으로 가는 도로 상에 있다. (3) 에브라임 지역의 라말라. 예루살렘 북서쪽으로 14.4킬로미터, 실로 남서쪽으로 19.2킬로미터, 벧엘의 남서쪽 2.8킬로미터 지점이다.

실로의 서쪽 17.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베이트 리마(Beit Rima)와 좀 더 서쪽에 위치한 렌티스(Rentis)는 사무엘의 고향이라고 하기에는 사울의 기브아(베냐민 지역에 있는)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삼상 9:1~10:9; 참조 부조와 선지자, 608 609). 사울이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이틀 동안에 집에서 40~48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여행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셋째 날까지 그 산맥 지역의 모든 언덕과 골짜기와 계곡을 자신과 종 둘이서 자세히 수색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셀(수 19:29), 납달리(수 19:36), 시므온(수 19:8), 므낫세 지파(라못 길르앗, 신 4:43; 참조 왕하 8:29; 대하 22:6) 내에 있는 라마이라는 이름의 다른 성읍들은 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욱 가능성이 없다.

비중있는 증거를 볼 때, 베냐민 접경 근처 남부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라말라(Ra- mallah)가 맞는 듯하다. 이 지역에 위치한 한 성읍이 사무엘의 고향에 관해 기존에 알려진 세부적인 모든 사항을 충족시킨다. 삿 4:5에 언급된 라마는 근처에 드보라의 종려나무가 있었고 벧엘에서 멀지 않았다. 이미 말했듯이, 벧엘의 남서쪽 약 2.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라말라는 베냐민 지역의 라마일 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기자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벧엘보다는 베냐민의 라마에 더 근접한 여러 성읍 가운데 하나를 언급했을 것이다.

사무엘상 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사무엘은 라마에서 출생했다(삼상 1:1, 19, 20; 부조와 선지자, 572). 그는 바로 이곳에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사사로 이스라엘을 섬겼고, 초기 선지자 학교 두 개 중 하나를 이곳에 세웠다(삼상 7:17; 8:4; 15:34; 19:18~20; 부조와 선지자, 593 604). 이곳이 분명히 사울이 처음으로 사무엘을 만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그 성읍이다(삼상 9:5, 6, 11, 14, 18; 부조와 선지자, 608 609). 사무엘이 여기서 죽어 묻혔다(삼상 25:1; 28:3).

사무엘의 라마가 또한 “숩 땅”에 있는(삼상 9:5; 참조 부조와 선지자, 608 609) 라마다임소빔으로 언급되었다(삼상 1:1, 19). 숩은 고핫 계통의 레위 자손이며, 사무엘의 5대 조상이다(대상 6:33~38). 고핫 족속의 레위인은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을 포함한 여러 지파의 지역에 있는 성읍을 배정받았다(참조 여호수아 21:4, 5; 대상 6:54~70). 숩(Zuph)의 자손들 곧 숩 사람들(the Zuphites)이 살던 지역은 “숩 땅”(삼상 1:1; 9:5)으로, 그들의 성읍인 라마는 라마다임소빔(Ramathaim-zophim), 곧 문자적으로 “숩 사람의 라마다임”(Ramathaim of the Zuphites)으로 언급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에브라임 산지” 출신이고, 아마 그의 조상 숩처럼 에브라임 사람이었을 것이다(삼상 1:1). 에브라임 사람(Ephrathite)은 베들레헴 거주민(룻 1:2; 삼상 17:12) 혹은 에브라임 지파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지칭한다(왕상 11:26). 엘가나는 분명 후자의 의미에서 에브라임 사람이었다. 에브라임 산지는 단순히 에브라임 지파에 할당된 지역 안에 위치한 산악 지역을 말하며, 따라서 베냐민 지파 내의 산악 지역 어떤 부분도 포함하지 않았다(참조 삿 18:12, 13; 19:13~16; 삼상 9:4). 성경에서 베냐민 땅의 어떤 장소도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후에 여호와가 사무엘에게 사울을,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삼상 9:16)이라고 묘사하였다. 나중에, 사울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떠나 베냐민 지역 기브아에 위치한 그의 집으로 오기 위해 베냐민 지파 경계를 넘었다(삼상 10:2~9; 부조와 선지자, 608 609).

삼상 9:1~10:9에 나타난,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성읍을 베들레헴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은 라헬이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다고 진술한 창 35:16~19과 라헬의 묘실이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것으로 언급한 삼상 10:2에 근거한다. 그러나 라마와 마찬가지로 라헬의 묘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묘실은 벧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는, 24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창 35:16~19). 그러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라고 말한 창 35:16의 히브리어 본문은 문자적으로 “에브랏에서 어느 정도 거리”이며, 따라서 상당한 거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참조 창 35:16 주석).

베들레헴 북서쪽 1.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라헬의 묘실의 전통적인 위치는 베냐민 지파 경계선에서 약 6.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삼상 10:2의 히브리어 본문에 의하면, 라헬의 묘실은 이곳보다 베냐민 경계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고, 심지어 베냐민 지경 내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베냐민의 남쪽 경계가 아니라 북쪽 경계로 이해하면, 창 35:16의 히브리어 본문과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셀사의 위치와도 모두 조화된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소리(렘 31:15; 참조 창 35:16~19)가 “라마에서” 들린다는 예레미야의 언급이 라헬의 묘실이 라마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것은 삼상 10:2에 나와 있는 사울에게 준 사무엘의 지시와도 부합된다. 그러나 베들레헴에 가까운 전통적인 장소는 베냐민의 라마에서 14.4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으며, 에브라임의 라말라에서는 거의 20.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는 예레미야의 언급은 바벨론으로 떠나기 위해 유대 포로들이 라마에 모였던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한 것이다(참조 렘 31:1~17; 40:1). 예레미야의 진술이 마 2:18에서 예언적으로 적용되었다(참조 신 18:15 주석). 이 라마가 라헬의 묘실과 가깝지 않다면,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는 예레미야의 언급은 무의미할 것이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가 사마리아와 에브라임 산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볼 때(렘 31:5, 6), 베냐민과 에브라임 경계 가까이에 있는 라마가 적당하며, 삼상 10:2에 주어진 자료와도 논리적으로 맞는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3권

매일말씀묵상. 8월 11일. 사무엘상 1장. > 매일말씀묵상

사무엘상 1장. 고통은 우리의 경건과 기도를 성숙하게 합니다.

1. <사무엘상하>는 <열왕기상하>와 연결되어 있는 책입니다. 전후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 사무엘과 사울 그리고 다윗입니다 . 이들 세 사람이 사무엘상의 주요 인물들입니다. 사무엘의 출생에서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죽기까지 약 100년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2.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소개되지만 , 아마도 그는 에브라임에 살고 있는 레위인의 후손일 것으로 예측합니다 ( 대상 6).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 그는 레위인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고 , 부유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 그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경건을 유지 하고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상당히 타협하고 있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 사사기 마지막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 사건에서 보았듯이(이 사람도 엘가나와 같이 에브라임에 거하는 레위인이었다), 엘가나도 두 부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다만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이를 얻기 위해서 두 번째 부인 브닌나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3. 아들을 낳지 못했던 한나는 비록 남편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식을 낳은 브닌나로부터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 하지만 이 불임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5, 6). 한나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한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 한나의 경건은 그의 고통으로부터 빚어진 결과였던 것입니다 . 오늘 우리의 고통, 불만족, 아픔, 괴로움,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빚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4. 한나는 실로에 제사 드리러 와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오래도록 하나님께 쏟아놓았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 자식을 드리겠다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제사장 엘리가 기도하는 한나를 술에 취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점은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풍속도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정을 알게 된 엘리는 한나를 축복하고, 한나는 마음에 놀라운 평안을 얻고 돌아가게 됩니다 .

5. “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19).” 기도한 이후에, 제사장의 축복을 받은 이후에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고서 다시 얼굴이 소망으로 빛이 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아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 고향으로 돌아간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게 되고, 그의 젖떼기까지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 서원대로 사무엘을 실로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바치고, 엘리 제사장의 수하에 두게 됩니다.

6. 기도 응답 이후에 그의 서원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응답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바칠 테니 일단 주시라는 욕심으로 구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원대로 아들을 얻었지만, 젖을 뗀 후에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두기 위해 다시 여호와의 집을 찾아갑니다. 단지 아들 욕심으로 하나님께 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출산 이후의 한나의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 기도 응답 그 이후입니다 .

7. 고통은 우리의 기도와 경건을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 한나의 경건 그리고 그녀의 깊은 기도의 삶은 그녀의 말로 다할 수 없는 불임의 고통을 통해서 온 것입니다 . 하나님은 이렇게 한 여인을 준비시켜서 , 한 시대의 인물인 사무엘을 낳게 하셨던 것입니다 . 룻기의 등장인물인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와 마찬가지로, 불경건하고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지키고 살아가는 한 인물로, 사무엘상은 한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인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에 여명을 밝히고 계십니다. 반면에 엘가나라는 인물은 많은 아쉬움을 던집니다 . 레위인으로서 과연 하나님의 법에 따라 거룩하게 살고 있는가 ? 적당한 선에서 경건을 말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 하는 아쉬움 말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혼탁한 영적 흉년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따라 참된 경건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때로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고난과 어려움과 결핍들이 우리로 적당히 타협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유혹할지라도,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함으로 근심하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혼탁한 시대에 우리의 믿음을 빼앗기고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시대에 우리의 믿음이 한나처럼 더욱 빛나는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무엘상 제1장 강해: 사무엘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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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무 엘 서

히브리 원전에 있는 사무엘서는 본래 상, 하권으로 분리되지 않은 한 권의 책이지만, 70인 역에서 상, 하로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 원전이나 70인 역 모두 본 서의 제목을 ‘사무엘의 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무엘서가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스라엘 신정왕국의 건립 및 초기 왕들의 역사에 있어서 사무엘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책의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탈무드에서는 사무엘서의 저자를 사무엘이라고 했지만 삼상 25:1에 사무엘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에, 또 사무엘 사후의 상당 기간의 역사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것을 보면 사무엘서를 사무엘이 기록했다는 근거가 희박해 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 상은 크게 3부분으로 내용을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7장까지 최후의 사사인 사무엘의 출생과 활약상에 대하여 또한 그의 말기에 왕정 체제가 요구되게 된 배경을 기록하고 있으며, 8-15장에서는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에 올바른 신관이 붕괴된 후에 왕권이 상실되어 새로운 왕 다윗이 등장하게 됩니다. 16-3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부름을 받은 다윗은 사울의 핍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 등극을 하게 되고 하나님 뜻에 합한 왕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치세를 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제1장 강해: 사무엘의 출생

사무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공식 태동한 이후 사무엘 때까지 이어져 온 신정체제(Theocracy)가 사울, 다윗을 중심으로 건립된 왕정체제(Monarchy)로 변화되는 과도기적인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상권에서 사무엘은 신정체제에서의 최후의 사사였고, 왕정체제 수립에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여 택한 왕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이 신정왕국이 되도록 산파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8절: 사무엘 가문의 배경입니다. 사무엘은 혈통적으로 레위 자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그가 장차 이스라엘의 영적지도자로 활약하는 데 신분적으로 하자가 없음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사무엘의 부친 엘가나는 레위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외면적으로 경건한 자였습니다. 이는 장차 그의 가정에서 태어날 사무엘이 어릴적부터 하나님의 종으로서 경건하게 준비되고 훈련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에브라임 산지는 팔레스틴 중앙부에 위치한 산간 지대입니다. ‘에브라임 산지’로 불린 잉유는 그곳이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이기 때문입니다(수 17:15). 그러나 그곳의 일부는 베냐민 지파의 영토로 베냐민 지파 사람들도 거주하였습니다(수 18:11). 이런 에브라임 산지는 땅이 매우 비옥하여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의 소출이 풍부하였다고 합니다. ‘라마다임’은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의미하는 두 개의 고지라는 뜻입니다. ‘소빔’은 파수꾼이라는 뜻으로 사무엘의 조상인 숩의 후손들 혹은 그들이 거하는 땅을 의미합니다(대상 6:26, 35). 그러므로 ‘라마다임소빔’은 ‘숩 땅에 있는 고지들’이라는 의미로 사무엘의 조상들이 거했던 장소임을 나타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8km 지점에 있는 도시로 신약에서는 ‘아리마대’로 불렸습니다.(요 19:38). 이곳은 줄여서 ‘라마’로도 종종 불렸는데(19절; 삼상 7:17) 본 절에서 정확히 언급된 것은 당시에 있던 여러 라마(수 18:25; 19:8, 29, 36)와 혼동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엘가나(אלקנה)’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형성하셨다.‘ ’하나님의 소유자‘입니다. ’에브라임 사람‘이라는 것은 엘가나의 출신 지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에브라임 지파의 영토에 거주하던 자임을 나타냅니다. 대상 6:16-28, 33-38에서 보면 그가 레위 지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인들은 기업이 없기 때문에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종교적 직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엘가나의 조상들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직분을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술의 현손이더라.‘ 이 같은 족보는 대상 6장에 나오는 족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를 종합해 보면 사무엘의 아비 엘가나가 레위이었음만은 분명해집니다.

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하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중혼 제도는 성경적인 결혼관에 위배가 됩니다. 창 2:24에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많은 아내를 거느렸던 경우가 있지만, 시대와 인습에 기초해서 묵허된 것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한 남자가 여러 아내를 거느렸을 경우 대개 심각한 갈등과 비극이 따랐던 점에 의해서도 입증이 됩니다.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암흑기인 사사 시대에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 사회 현상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주변의 이방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삿 9:1). 엘가나는 한나가 잉태하지 못하여 아내를 더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도 그 시대의 풍습에 따른 것일 뿐 성경의 원리는 아닙니다. 엘가나의 가정에 일어난 갈등이 이를 증명합니다.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한나(חנה)’는 ‘풍성한 은혜’ ‘사랑스러움’이란 뜻입니다. ‘브닌나’(פננה)는 ‘홍보석’ ‘진주’라는 뜻입니다. 엘가나와 같이 남성들의 이름은 주로 종교적인 의미를 많이 지니고 있는데 반해 여성의 이름은 보석이나 애정과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식을 둔 브닌나와 달리 한나가 무자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그 일로 인해 심적 괴로움과 압박감을 당했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많은 자녀를 거느리는 것을 하나님의 풍성한 복으로(시 127:3, 4), 무자한 것을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3: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이스라엘 남자들은 일 년에 세 차례씩 정기적으로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에 중앙 성소에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도록 의무화 되어 있었습니다(출 23:14-17). 엘가나는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엘가나가 레위인이면서도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결점이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열심은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로’는 예루살렘 북쪽 30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여호수아가 이곳에 성막(tabernacle) 세운이래(수 18;1) 사사 시대 동안 이곳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호와 체바오트: יהוה צבאות)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축약어입니다. 성경 전체에서는 260회 정도 나오는데 여기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지역 신이 아니라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입니다. ’엘리(עלי)‘는 ’존귀한‘ 즉 ’여호와는 존귀하시다‘의 뜻입니다. 엘리의 가계는 구약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의 전승이 있는데 하나는 그가 ’이다말‘의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대상 24:3)과 다른 하나는 이다말과 경쟁 관계에 있는 엘르아살 가문에 속해 있다(출 6:23, 24)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 역사 요세푸스는 엘리를 아론 자손 중 이다말의 후손으로 봅니다. 이처럼 엘리의 뿌리는 불분명 하지만 사무엘의 출생 시기에 자신이 사사 및 대제사장 직무를 맡고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한 것으로 볼 때에 아론의 후손임은 분명하며 상당한 믿음과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자녀들을 올바로 지도하지 못해서 방종의 길로 걷게 하였다는 점입니다(삼상 2:12-17, 21-25).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가 노쇠하자 대신 제사장직을 수행한 두 아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벨리알의 아들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악한 자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삼상 2:12). 이는 곧 저들이 여호와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름없는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삼상 2:17, 22). 엘리 말기에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침략을 당해 대해를 당하고 만 것은(삼상 4장) 결코 이들의 죄악과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제물의 분깃’ 화목 제물 가운데서 제물을 드린 자에게 속한 몫을 말합니다. 그 몫은 여호와께 속한 기름과 간에 덮인 꺼풀과 콩팥(레 3:3-5), 그리고 제사장에게 속한 가슴 및 우편 뒷다리(레 7:34)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였습니다. 화목 제물을 먹는 규례는 첫째 감사제의 경우에는 제사드린 당일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서원제나 자원제의 경우에는 그 이튿날까지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만약 먹다 남은 고기가 생겼을 경우 그것은 불태워 없애야 합니다(레 7:15-18). 이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에 대한 존중 사상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이러한 잔치는 기쁨의 잔치가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는데(신 12:2; 16:11) 신약 시대의 성찬식과 애찬식을 통한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과 우리, 우리 서로간의 교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행 2:46)

5: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갑절(마나 아하트 아파임: מנה אחת אפים)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기본 의미는 ‘특별한 분깃’입니다. 벌게이트 역에서는 ‘슬픔’ ‘안타까움’으로 번역하여 본 절을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녀의 분깃을 줄 때에 슬퍼하였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한나의 무자함에 대하여 위로하고 애정으로 감싸는 엘가나의 애틋함을 나타내주는 구절로 이해하였습니다. ‘70인 역에서는 ’한 분깃‘으로 번역하여 ’하나에게는 한 분깃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즉 한나에 대한 엘가나의 극진한 사랑을 잘 나타내 줍니다. 이는 남편인 그가 아내의 약점과 부족함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감싸주었음을 의미합니다.

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한나의 무자함은 그녀의 육체적 결함이 아니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시기까지 출산을 유보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창 18:9-15; 21:1-7)와 야곱의 아내 라헬과(창 30:1, 2, 22-24), 삼손의 어머니인 마노아의 아내(삿 13:2-5, 24)와 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격동하다(카아스: כעס)’는 ‘성가시게 하다’ ‘괴롭히다’ ‘화나게 하다’는 뜻입니다. 브닌나는 한나가 무자한 것을 하나님의 형벌로 이해하여 그녀를 괴롭히며 마음을 아프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엘가나가 자신보다 한나를 더 사랑한 것에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기도 합니다.(5절) 그러나 브닌나가 어느 때보다 성결하며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그 자리에서까지 한나를 시기하며 괴롭힌 것은 가정적 차원의 불화를 넘어서 하나님 앞에서 망령된 행실을 보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일을 교훈삼아 성도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성도끼리의 다툼이나 미움으로 인하여 시험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브닌나가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한나를 박대한 것이 오히려 남편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를 사랑하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괴롭게 한다면 그 성도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여 함께 웃고 우는 것이야말로 성도의 도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롬 12:15~16).

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한나의 슬픔에 대한 엘가나의 위로의 말입니다. ‘어찌하여’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울며’ ‘먹지 아니하며’ ‘마음이 아프뇨’라는 말을 사용하여 한나에 대한 세심하고도 애틋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고 위로하기는 하지만 아들이 없어 애통하는 한나의 슬픔을 씻어줄 수는 없었습니다. 엘가나가 두 아내를 거느린 것이 결국에는 가정의 화목을 깨고 한 여인에게는 깊은 슬픔과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는 비극을 가져왔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말씀에 청종하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9-18절: 한나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올랐던 남편 엘가나를 따라 하나님의 성소에 이르렀을 때에 브닌나에게 당한 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심히 통고하였습니다. 만약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를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게 됩니다. 한나는 엘리의 오해도 받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당한 일과 그 신앙심을 알게 된 엘리로부터 평안함과 형통함의 축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의 출생이 단순한 인간적 사건이 아니라 위대한 신앙적 사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지만 자신의 사욕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의를 추구하며 기도한 후에는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한나를 돌아보시고 사무엘을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는 한나 개인의 기쁨을 넘어서 이스라엘 최후의 위대한 사사이자 뛰어난 영적 지도자였던 사무엘의 출현을 낳은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우리가 미처 예기치 못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고 역사를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이 때문입니다(눅 18:1-8; 살전 5:17).

9: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화목 제사 후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드린 자가 가족이나 이웃과 더불어 갖는 공동 식사를 마친 후를 가리킵니다. 엘리가 의자에 앉았는데 ‘앉다(야솨브: ישׁב)’는 ‘직무를 행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역시 엘 리가 단순히 성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뜻하기 보다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헤칼 예호와: היכל יהוה)’ 엘리 당시는 아직 성막(Tabernacle)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왕궁’을 뜻하는 ‘헤칼’을 사용한 것은 성막이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하심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시 5:7).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마음이 괴로워서’(마라트 나페쉬: מרת נפשׁ)는 ‘영혼이 괴로워서’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아픔과 슬픔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자함으로 인한 한나의 슬픔은 남편의 위로의 말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여호와 앞에 울며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나의 깊은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재 아니하겠나이다.

‘서원’은 하나님께 대한 변개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민 30:1, 2) 한나의 서원은 아들을 일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뜻합니다. 만일 자식을 주시면 그 자식은 근본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여 그 자식5을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롬 2:1)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만일(임 라오: אם־ראה)’은 성취를 확신하며 간절히 바라는 마음의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지 앞날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의심을 표현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에서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간구하는 한나의 마음 상태를 보여줍니다. 한나는 ‘돌아보시고’ ‘생각하시고’ 잊지 아니하사‘ 3중적 표현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긍휼과 자비를 간구하는 간절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성경에서 머리는 전인격체를 지배하고 좌우하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머리털‘은 그 사람의 힘, 더 나아가서 생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런 머리나 머리텅레 임의로 손을 대지 아니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권위자 하나님께서 계심을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삶과 의지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헌신의 다짐입니다.

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의 기도의 간절함뿐만 아니라 끈질김을 보여줍니다. 기도는 한 번 드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계속해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끈질긴 믿음의 기도가 결국에는 응답받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8:1-8)

13-14: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돌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나의 기도는 온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은 정성스럽고 은밀한 기도였습니다. 이는 흐느껴 울며 애원한 모습과 함께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잘 나타내 줍니다. 엘리는 하나의 이런 모습을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화목제를 드린 후 갖는 공동 식사에서 포도주를 과도하게 마셔 취하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대체로 히브리인들은 말 없는 묵상 기도는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엘리는 경건한 여인 한나를 술 취한 여자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런 엘리의 오해는 한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겠지만 그러나 한나의 믿음은 그것까지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모두 자신의 같은 슬픈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통한 것(솨파크: שׁפך)’은 는 ‘쏟아 놓다’ ‘부르짖다’의 의미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소리 나지 않는 묵상 기도였으나 온 몸과 마음을 다한 전인격적인 기도였음을 나타냅니다. 성도에게 이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눅 22:44).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가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악한 여자(바트 벨리야알: בת־בליעל)로 여기지 마옵소서’ 악한 여자는 ‘벨리알의 딸’(a daughter of Belial, KJV)이라는 뜻입니다. 벨리알은 본래 ‘사악한 자’ ‘악랄한 자’를 뜻하는 일반 명사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불량자(삼상 2:12)’ ‘악인’(나 1:15)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점차 그 뜻이 변하여 신약 시대에는 사단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고후 6;15). 그러므로 한나 자신이 성전에서 술 취해 주정하는 무가치하고 질이 나쁜 여인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애절한 성도의 기도를 술 취했다고 꾸짖은 것은 능히 반격을 당할 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할 수 있는 최대의 존경심을 가지고 ‘나의 주여’라고 엘리를 불렀습니다. 이런 한나의 태도는 술 취함의 오해가 벗겨지는 것은 물론 그의 신앙을 증거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타인으로부터 부당한 오해나 비난을 받았을 때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것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7: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엘리는 자신의 오해를 인정하고 한나의 기도가 응답 받기를 위한 축복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이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대제사장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게 된 것은, 한나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이런 한나의 자세가 친구를 만들고, 대적자를 축복자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엘리가 빌어 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얼굴에 수색이 없다는 것은 평안하다는 뜻인데, 기도가 응답될 것은 전적으로 믿는 믿음에서만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19-28절: 하나의 서원 기도가 응답되어 마침내 위대한 사사이자 동시에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이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수유기가 끝나자 한나는 자신의 서원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 위대한 어머니로서의 한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약속을 망각하고 배은망덕하기 쉽지만, 한나는 그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사무엘은 유년기부터 신앙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들어 쓰시는 가운데, 특히 헌신하는 자들을 통하여 그 뜻을 펼치시며 역사를 진행하시는 것입니다.

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생각하다(자카르: זכר)’는 ‘기억하다’의 뜻으로 어떠한 일을 마음속에 항상 담아 두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8:1; 느 5:19)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잉태케 하신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사무엘’이라는 이름은 ‘혜무아엘(שׁמוה־אל)’ 즉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 사무엘은 한나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아 얻은 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매년제’(제바흐 하야밈: זבח־הימים)는 때를 따라 드리는 제사‘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해미다 지킨 제사로 온 가족이 함께 참여하였습니다(삼상 20:6, 29). 그런데 일 년 삼 차례 지켜야 하는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중 어느 한 절기에 매년 제를 지켰는지 아니면 그 절기들과 별도로 지켰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서원제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공식화하는 제사입니다. 여기에서 정관사 ’ב‘(the)가 붙은 것은 자식을 주시면 일평생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 하나의 서원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민 30:6-8에 의하면 그 남편 엘가나가 서원을 무시할 수도 있었으나 하나의 서원에 동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부부는 영적, 육체적으로 동반자가 되어야 함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벧전 3:7).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한나가 성전에 올라가지 않고 아이를 돌본 것은 그녀의 신앙이 퇴보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자였기 때문에 젖떼기까지 신앙 안에서 양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는 자녀들을 키울 때에 혈육이기 때문에 키우는 것에 앞서 하나님께 바친 하나님의 백성을 키우는 관점에서 대해야 합니다. 즉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들며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생후 3년 동안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레위인들은 25세에서 50세까지 성소에서 봉사하게 되어 있습니다(민 8:24,25). 그러나 한나는 서원한 대로 젖 뗀 후부터 영영히 사무엘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꼭 갚는 것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성도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입니다(렘 44:15).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엘가나는 한나가 서원한 것이 이루어지기를 동의하며 축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엘가나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아내의 뜻을 막지 않고 존중하며 기도로 도와주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4,25: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수소 셋(파림 쉐로솨: פרים שׁלשׁה)’말은 ‘3년 된 수소 한 마리’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25절의 ‘수소(하파르: הפר)’ 단수이므로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24절의 ‘수소’(파림: פרים)가 복수이므로 모순이 됩니다. 그러므로 ‘수소 셋’이란 번역이 맞다고 봅니다. 아마도 엘가나와 한나는 세 마리의 수소 중 한 마리는 서원 제물로, 나머지 수소는 화목 제물(감사 제물)로 드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원한 것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한나의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루 한 에바’ 가루는 번제를 드릴 때 소제물로 함께 드리던 고운 곡식 가루입니다(레 2:1, 2, 13). 에바는 고체의 부패를 재던 단위로 1에바는 약 22리터에 해당합니다.(출 29:40)

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이런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는 독특한 맹세의 방식입니다(삼하 14:19; 왕상 1:29; 왕하 2:2). 이처럼 맹세에 있어 ‘삶(생명)’이 언급되는 것은 맹세의 진정성을 강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한나가 자신이 기도하며 서원한 것과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주셨음을 회상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잇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자식에 대한 모성애를 초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한나의 굳은 신앙적 자세를 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했던 자세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창 22:1-19).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신앙과 헌신을 귀히 보시고 그녀에게 세 아들과 두 딸로 갚아 주신 것입니다(삼상 2:21). ‘그 아이는 거기서~ 경배하니라.’ 여기서 ‘그 아이’는 사무엘이라고 하기보다는 엘가나와 한나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3살이 되도록 신앙 안에서 키웠다면 서툴기는 하겠지만 얼마든지 하나님께 경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새역사의 시작 (사무엘상 1장 1-8절)

새역사의 시작 (사무엘상 1장 1-8절)

사무엘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는 인물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구원의 모델이라고 하는 출애굽 사건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광야생활을 거쳐 드디어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일단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로서 타락하게 되는 과정이 사사기서이다. 사사기서의 주제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그리고 그 왕의 등장을 알리는 성경이 룻기와 사무엘서

룻기는 이방여인이었던 모압여인 룻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불리우는 다윗의 조상이 되는가하는 내용이고 사무엘서는 어떻게 다윗이 세워지냐를 다룬 책입니다.

사무엘은 실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그 처소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부르기도 하고, 모세 이후의 첫 대 선지자로서도 여겨지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왕을 세운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사사에서 선지자로, 왕정국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어찌보면 온 인류의 참 왕이신 예수를 예비했던 세례요한과도 같은 역할이 바로 사무엘 입니다.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부모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절에 보면 사무엘의 부친인 엘가나를 소개합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가 있었는데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었더라.” (1절)

이 족보가 나타내 주는 것은 그가 에브라임에 살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레위 족속인 고핫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다음에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주지만 레위 지파에게는 따로 땅을 나누어 주지 않고 6개의 도피성을 비롯한 전국에 퍼져 살게 하였습니다.

레위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에 거주하지 못하고 전국에 퍼져 있는 레위인은 퍼져 있는 장소에서 이른바 산당의 예배를 집례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서를 보면 알다시피 이러한 산당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고 쉽게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기 일수 였습니다. 그나마 경건한 제사장들은 해마다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재교육도 받으면서 그들의 경건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엘가나도 그런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인 이었지만 실로에서 집례하지 못하고 멀리 에브라임 산지에서 살며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자였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중앙에서 떨어져 변방으로 밀려난 레위인이었습니다.

엘가나는 패역한 시대에 나름 레위인으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코자 한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두가지 큰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1)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사랑하는 아내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해서인지 당시의 문화 때문인지 엘가나는 둘째 아내 브닌나를 두었는데 브닌나는 자녀를 생산한 여자였습니다. 문제는 이 두 여인 사이에서 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으로 불화가 끊이지 않는 것 보다 더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2) 두 번째의 문제는 영적인 공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매년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매년 가는 이 행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유도 있지만 레위인으로서 영적으로 교육받고 무장받고 돌아와 자기 고장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육해야 하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지금 실로의 제사를 맞고 있는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 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로 성전에서 음행을 저지르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패역한 제사장들입니다.

지금 훌륭한 제사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돌아가도 한 해 동안 사람들을 인도하기가 얼마나 고되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를 인도하고 지도하는 자들이 가장 부패하고 패역한 제사장이라면 정말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자들이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은 엘가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불행이었습니다.

엘가나의 두 아내인 한나와 브닌나에게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첫째 아내였지만 자녀가 없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자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식의 의미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업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녀의 영혼을 괴롭히고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나의 이름은 “은총”이라는 뜻인데 자식이 없으니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도 없는 듯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합당한 기업과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어딜 가서도 떳떳하지 못했고 남편이 사랑해도 그것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사람구실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느라 브닌나와 그 자녀의 분깃보다 갑절이나 그녀에게 더 주며 물질적으로 그녀를 위로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허전함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남편이 주는 갑절의 물질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둘째 아내인 브닌나는 자녀를 가진 아내였습니다. 4절에 “그의 모든 자녀에게”라는 표현을 보자면 브닌나는 여러명의 자녀를 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녀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자신이 아닌 한나에게 가 있습니다. 여러명의 자녀를 낳아도 항상 한나가 더 많은 사랑과 보상을 받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 여자에게는 수치 중의 수치 입니다.

한나와 브닌나의 관계를 보고 있자면 마치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열매맺지 못하는 아내…. 두 여인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이 두 여인이 앙숙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채워지지 않는 불행한 삶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면 그나마 평안할 텐데 사랑받지 못하는 브닌나는 “한나를 격붖ㄴ하게 하여 심히 괴롭게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레위인인데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집례하지 못하고 에브라임 산지에 머물고 있는 엘가나… 그나마 한 해의 영적인 무장을 위해 실로로 오면 홉니와 비느하스로 인해 더욱 영적인 침체를 벗어 날 수 없는 엘가나

남편의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은혜를 잃어버린 은혜라는 이름의 여인 한나

자식이 있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한 여인 브닌나…

이들의 모습은 단지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 주는 모습이요, 어찌보면 우리의 삶과도 대치해 볼 수 있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문제를 향한 세사람

세사람은 모두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지닌 문제는 이들의 힘으로는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엘가나 – 가장 큰 문제 : 가정의 불화

이때 엘가나가 한나에게 하는 위로를 보십시오.

(삼상 1: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브닌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한나에게만 내가 니편이니 울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이 한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금 한나의 가장 큰 고통은 브닌나가 자기를 조롱하고 속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와서 그 원인도 묻지 않고 단지 내가 널 사랑하니까 다 참으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나에게도 별로 위로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만약 브닌나가 이 광경을 보면 더욱 브닌나의 속을 뒤짚어 놓는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입니다. 편애는 결국 갈등을 낳습니다. 이삭의 편애가 형제의 우애를 깨뜨리고 야곱의 편애가 오히려 요셉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줍니다.

본문에 비친 브닌나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그녀는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요 탐심이 넘치는 여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가진 것에 분노합니다.

물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남편을 통해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언제나 한나에게 가서 화풀이를 하고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그녀의 질투는 남편의 사랑보다도 한나에게 돌아간 갑절의 물질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러한 시기와 탐심으로 한나를 대하면 대할수록 남편의 사랑은 점점 더 멀어져 갈 것이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하는가?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어찌보면 자기의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전가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녀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탓이요 변명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자기의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뿐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 엘가나에게 탓하지도 않고 브닌나와 맞서서 싸우질 않습니다. 오직 자기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문제를 만난 세명의 인물은 이제 한나에게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브닌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문제를 키우고야 마는 엘가나

모든 문제의 근본이 하나님 앞에 있고 그 해결 역시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그 앞에 엎드리는 한나…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옮겨가는 전환점에 우리는 중요한 두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룻과 한나라는 두 여인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모압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베들레헴으로 와서 결국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한나는 모든 문제 앞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그런 시대에서 자기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며 그 앞에 업드림으로 기도의 어머니, 기도의 사람의 대명사가 됩니다.

어찌보면 구원의 이야기는 잉태치 못하는 자가 잉태하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잉태치 못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하지 못하는 마노아가 순종함으로 삼손을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하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앙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땀흘려도 보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런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를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다가 더 큰 구렁이에 빠지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잉태치 못하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선택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고난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고 또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문제가 닥쳤는데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엘가나와 브닌나가 되지 마시고 한나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https://youtu.be/IisEzxxHH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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