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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
사사기. 제 1 장.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아도니 베섹을 잡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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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사사기 1 · 10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이었더라 · 11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10/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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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1장) – 네이버 블로그
1장부터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지적한 대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혼잡해있는지를, 순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서부터 얼마나 멀어져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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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0.5: 반쪽짜리 순종(사사기 1장) – 유평교회
본문: 사사기 1장 설교자: 이병권. 오늘 살펴볼 사사기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잘못된 제자도, 절반의 제자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2/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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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7월 18일. 사사기 1장. – 하늘품은교회
사사기 1장. 어두움의 그림자. 1. 사사기 1장은 여호수아서에서 이미 소개된 내용들을 포함하여,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의 상황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10/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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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장 본문 설명
사사기 1장에 많은 지파들의 실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 지파 역시 예루살렘과 헤브론과 드빌을 정복했지만 가나안 땅 정복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
Source: gyusikjung.blogspot.com
Date Published: 4/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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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장 1절-10절, 승리를 향하여 –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사사기 1장 1절-10절, 승리를 향하여. 사사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불완전한 사사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시작 …
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7/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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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장 – 홀리바이블, 성경읽고 승리하는 인생살기
사사기 1장. 삿1장을 천천히 읽으세요. 요약: 여호수아 사후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게 되었다. 유다 자손은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과 …
Source: oldandnewtestament.tistory.com
Date Published: 5/20/2021
View: 8134
20211102 불완전한 승리 (사사기 1장 11-21절)
20211102 불완전한 승리 (사사기 1장 11-21절) …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
Source: cpcgl.org
Date Published: 9/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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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사기 1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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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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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
유다와 시므온 지파가 아도니 베섹을 잡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과 헤브론을 치다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옷니엘이 드빌을 치다(수 15:13-19)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3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4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15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승리 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 17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 곳을 1)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18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0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벧엘을 치다 22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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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 3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지라 그들이 베섹에서 일만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7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8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 9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한 가나안 사람과 싸웠고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이었더라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2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3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한고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4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15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17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18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와 아스글론과 그 경내와 에그론과 그 경내를 취하였고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20 무리가 모세의 명한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22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곳의 이름이더라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사사기 강해(1장)
<사사기 1장>
사사기1:1~10 끝나지 않은 전쟁
맥락적으로 여호수아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여호수아서는 약간 불편한 대화로 끝난다. 세겜 땅에서 한 여호수아의 고별설교의 요지는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수24:15)”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쌓아두었던,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그들의 답변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이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답변에 감복하지 않고 “너희가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19절)”라고 말한다.
여호수아서에는 뚜렷하게 보이는 지도자가 있었다. 눈에 띄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뚜렷하게 눈에 보였던 지도자가 사라진다(삿1:1). 사사기로 넘어오면서 이스라엘의 대표성을 가질 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하나님은 사사라는 독특한 지위를 설정하셔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방식으로 경영하신다. 사사란 “쇼페팀(재판관)”이라는 말이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을 경영했는데 사사기는 백성들이 직접 하나님과 소통하는 툴로 바뀐다. 이것이 사사기 전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경영하시고자 하는 방법의 수단의 전환이다.
여호수아 시대보다는 사사시대가 영적으로 좋은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저주에 가까운 흑암의 역사가 사사시대다. 아이러니하다.
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확실하게 이루어질 일에 사용하는 미래완료형시제를 썼다. 여호수아 때는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인데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싸울 땅이 남아 있는 게 문제다.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인데, 땅을 점령하는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불순종의 흔적을 문자의 속살에서 들추어낼 수 있다.
분명 이들은 하나님께 여쭙기까지 했다. 기도하고 종교적 형식은 갖추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대답은 “유다”였다. 그럼 유다만 올라가면 된다. 그런데 유다는 지근거리에 있던 시므온 족속과 연합을 꾀한다(3절). 이번에 함께 올라가서 싸우면 시므온 지파가 전쟁할 때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이에 시므온 지파가 선뜻 응한다. 두 지파는 밀접한 관계다. 유다와 시므온은 한 어머니 레아의 아들들이고,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영토 안에서 자신들의 기업을 물려받았다.
인간적 측면에서는 아름다운 형제애를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주관, 명령적 관점에서 볼 문제다. 시므온을 왜 불렀을까? 하나가 더 합해지면 힘이 커져서 승리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을 힘의 논리로 이해한 것이다.
이게 교회 일하는 사람들의 함정이다. 더 많이 모이고 세력을 키우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더 능률적이고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나님의 원리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 가나안 전쟁은 사람의 수나 크기에 승패가 달려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는 전쟁이다. 그걸 드러내시기 위해 사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사기는 실패의 연속이다. 인간의 능력과 자발적인 의지로 하나님께 의존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시키는 것이다.
유다지파가 선봉에 세워지는 이유는 유다지파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시리라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사기의 주제도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엎어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면서 그 실패와 성공 자체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향시키고자 하는 초점은 딱 하나다.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것이다. 이게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넘어짐과 일어섬이 우리 관심이 되지 않아야 하고, 넘어짐과 일어섬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붙드는 눈이 열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는 존재들이다. 여호수아서도 불편하게 끝난다. “너희는 못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백성들의 본심의 실체를 드러낸다. 실제로 사사기 시대 하나님이 직접 경영하시고 통치하시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삐딱선을 탄다.
사사기 1장에는 두 개의 선명한 사건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4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
5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
6 아도니 베섹에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
대적을 만 명을 죽인 것이다. 아도니 베섹은 베섹지역을 통치하는 통치자의 통칭이다. 아도니 베섹과 같이 가나안 땅에 있는 각각의 도시와 성읍마다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아도니 베섹은 “베제크의 주인”을 뜻한다. 그를 잡아 죽이지는 않고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랐다.
왜 이런 상세한 표현을 했을까? 이는 가나안 문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지 수 년의 세월이 흘러 자기들도 모르게 가나안 문화에 물들어 있다. 가나안 문화 방식의 전쟁 패턴에 따라서 전쟁을 한다. 하나님은 손가락 발가락 자르라고 명하시지 않고 진멸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안 죽였다.
7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70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이게 가나안 방식이라는 말이다.
7절 하반절에 보면 사망이라는 결론은 같았지만 아도니 베섹이 자연사를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이지 않았다. 왜? 하나님이 명령한 전쟁의 원리를 안 따른 것이다. 베섹의 지도자를 끌고 승리의 전리품 삼아서 그들의 전쟁의 결과에 대한 영광을 자기들이 취했던 것이다. 잔인한 영광의 탈취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른 이유도 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무서운 섞임이 있다.
질서와 원리를 따르자면 죽였어야 한다. 그런데 자연사할 때까지 그들의 승리를 맛보고 누리는 데 써먹는다. 은밀하고 교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한다. 인간의 본성에 누구에게나 있다. 입으로는 은혜로운 표현으로 “다 주님이 하셨다”고 말은 해도, 한 명이 더 있으면 안심이 되고, 눈에 보이는 통계가 있으면 그게 우리를 지지해주는 것 같다. 다 속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 전리품 삼아서 그 영광을 자기들이 짜릿하게 누리는 것이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넘겨주어서 얻은 승리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모든 영광을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께 돌려야 맞는다.
1장부터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지적한 대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혼잡해있는지를, 순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에서부터 얼마나 멀어져 가는지를 말해준다.
10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
일부러 해설을 달아놓았다. 중후장대한 거인족들이 사는 지역이다. 그 지역을 유다백성들이 승리한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과정 속에 인간의 허물과 약점이 노출되고, 반면교사 삼아야 할 내용이 있지만 하나님은 언약하신 대로 유다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신다. 이게 우리 구원이다.
삿1:11-21 절반의 승리
위 사건과 대조적으로 갈렙의 딸 악사가 등장한다. 전쟁의 승리를 거머쥔 옷니엘과 결혼한다.
이 사건은 역사적 순서도 아니고 사건별 순서도 아니다. 이미 여호수아서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측면에서 삽입하여 기록한 일이다. 사사시대의 일이 아니라 여호수아 시대의 일이다. 수15장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11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세벨이라
갈렙은 여호수아와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담대히 올라가 기럇세벨을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기럇세벨은 험한 곳이고 대적이 강력한 곳이다. 딸을 주는 풍습은 원래 이스라엘 문화가 아니고 이방 문화다. 가나안에서도 이런 풍습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이어 내려오고 있었다. ‘모하르’라고 한다.
옷니엘이 나서서 전쟁에 이겼다.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면 조카가 된다. 옷니엘이 향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가 되어 40년을 통치한다. 옷니엘이 가장 1등급 최상의 인물이다. 사사들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못한 사람이 나온다. 옷니엘이 사사로 있던 시절은 굉장히 평안했다. 대체로 하나님 앞에 곧은 신앙을 가지고 선하게 살았던 인생의 기록들이 3장부터 본격적으로 나온다.
그런데 시집가는 딸이 차비를 차리고 출발하려다가 갑자기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 앞에 넙죽 큰절을 하였다. 당시 풍습으로는 이런 경우가 없다. 돌발적인 행동에 놀란 갈렙이 “무슨 일이냐?” 묻자 악사는 품고 있던 본심을 여과 없이 이야기한다. 이들이 가야할 곳은 남방 네게브 사막지역이다. 풀도 드물고 숲도 없다. 살기가 팍팍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살려면 제일 필요한 게 물이다. 거기로 시집을 가는데 가장 필요하니까 “복을 주옵소서”하고 밭을 구하고 샘을 구한다. 아버지가 밭과 아랫샘, 윗샘을 냉큼 준다. 풍성하게 인생이 이어져간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처리하고 별로 안 중요한 것 같은 내용은 동작, 태도까지 자세히 소개했다. 이 기록은 사시시대 기록도 아니고 여호수아 때 기록을 인용해서 기록했다. 드러내고자 한 메시지가 뭔가?
6 아도니 베섹이 도망할 때 쫓아가서 잡아 엄지손가락 발가락 잘라 옛적에 70명의 왕들이 내 상 아래 주워 먹더니
유다지파가 전쟁에 가서 승리했고 그 결과가 아도니 베섹 통치자를 체포하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 평생 전리품으로 수치를 보이고 결국 거기서 죽게 된다. 오늘 이야기와 어떤 관련이 있나? 의도적인 비교를 위해서 기자가 설치를 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공동체와 대적한 자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신체 훼손을 당하고, 평생 죽을 때까지 조롱당하다가 죽어가는 그림이 그의 종말이다.
또 하나는 옷니엘에게 시집가는 악사 이야기다. 아버지께로부터 복의 근원이 되면서 생명 같은 아래샘 윗샘을 물려받는 은총을 경험한다. 극명한 결과를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된다.
사사기 1장에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성경 기자가 일부러 두 사건을 걸쳐놓은 이유가 뭔가? 스토리가 복잡하게 엮어져 있으나 하고 싶은 말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께 붙어 있고 쓰러져도 은혜의 자리로 넘어지는 자는 복을 얻으나 하나님의 공동체와 떨어져 대적하는 자의 결말은 굉장히 비참하다는 것이다.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 이건 정서적인 문제가 아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수단과 과정은 굉장히 잘못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쪽으로 넘어질 줄 아는 복을 입은 존재다. 갈렙의 딸 악사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를 그려주고 있다. 아도니베섹은 공동체의 대적자 첫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 결과는 비참하다.
신앙생활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후 모세의 장인 겐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이방인이고 모세를 돕고 후대하여 모세의 가문의 사람으로 들어오기를 즐거워한다.
16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거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
이 이야기도 시간별 역사별 이야기가 아닌데 기자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이다.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는 “당신이 우리의 백성이 될 것이다” 모세가 예언한 것이 먼 훗날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얼마나 고상한가, 잘 사나, 못 나사가 아니다. 넘어져도 은혜의 자리로 넘어질 줄 아나, 하나님의 공동체와 항상 대적의 자리에 있는가 하는 싸움이다. 그게 야곱이 결국 깨닫고 누렸던 자기고백이었다.
사사기 1장에서 두 사건을 극명하게 대조해 놓은 이유가 이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이 이 같은 복을 주실 것이고 명을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때는 이 같은 종말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이 첫 장에다가 아이콘처럼 설치를 해 놓았다.
1장에 두 개의 이야기로 선명하게 설명하고 이후로부터 마지막장까지 전부 백성들의 전쟁 이야기를 설치하고 있는데 그게 전부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싸움이다. 이기고 지고에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느냐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느냐 계속 설명하신다.
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본심을 숨긴 기록이다. 사실은 쫓아내지 않은 것이다.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산지주민은 중후장대한 거인족을 말한다. 난공불락의 대적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내쫓았다. “아니하였더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다. 이게 속내에 감추어진 본심이다.
화려한 가나안 문화와 철기문명의 발달에 이스라엘이 충격을 받으면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노역을 시키면서 그들의 철기문명을 습득하기 원했다. 하나님의 명령적 차원이 아닌 효율과 실리가 가장 중요한 관심이었다. 수사적으로는 “환경이 그래서, 연약해서, 부족해서…” 이런 핑계를 대면서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습관과 중독에 묶인 오랜 죄악들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 죄악이 주는 단맛, 거기서 얻어지는 결과물들이 주는 이익의 단맛이 쏠쏠하다. 그래서 쉽게 끊어내지 못한다.
12지파가 한 지파도 예외 없이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이게 사사기의 거듭되는 실패의 역사이다. 승리로 시작했던 유다지파가 굉장히 허약한 지파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사사기를 통해서 백성들이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고 바라도록 모든 이야기가 만들어져 간다.
1장의 선명한 대조는 사사기 전체의 굵은 메시지가 된다. 아도니 베섹의 스토리와 악사가 결국에 누리게 되는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이 뭘 이야기하고 싶으신 걸까? 사사기를 통해서 2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착하게 된다.
전쟁사가 소개되지만 어떤 페이지를 들추든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더라도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되겠다.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쪽으로 넘어질 줄 아는 백성이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쪽으로 넘어지는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순종의 자리에 있느냐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이 첫 장에 보여줌으로써 향후 모든 사사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연약함, 넘어짐에 대한 결말 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안에 어떤 끊어내고 진멸시켜야 할 아말렉과 같은 죄의 문제가 내가 쫓아내지 않는 건가? 못하는 건가 정직하게 자기 심령을 살펴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삿1:22-36 승리보다 많은 패배
요셉가문 이야기이다.
22 요셉가문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니라
23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복된 수식어로 전쟁이야기가 시작된다. ‘벧엘’의 원래 이름은 ‘루스’다. 루스는 ‘분리되다’는 뜻이다. 분리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공동체가 될 수 없다. ‘루스’는 지명 자체는 ‘분리되어지는 곳’이다. ‘벧엘’은 ‘베이트’+‘엘’ 두 개의 단어로 구성된 합성어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 루스라는 곳에 요셉 지파(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점령하기 위해 올라가는데 조그만 일을 만나게 된다.
24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어떤 사건과 모티브가 유사하지 않은가?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내 라합의 집에 이르렀는데 라합이 두 정탐꾼을 숨겨줌으로써 라합과 그 가족이 구원을 얻었다는 내용이 여호수아서 서두에 소개된다. 사사기의 사건에서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 한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정탐꾼들이 성읍의 한 사람에게 성읍 입구를 물으면서 가르쳐 주면 후에 이 땅을 점령하러 들어올 때 선대하겠다고 약속한다.
구도는 유사하지만 반대의 경우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선대한다고 하면서 이 사람을 자기 족속의 공동체나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들어오게 하지 않고 그냥 놓아 보낸다. 양자간에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는 헷 사람 땅에 가서 성을 건축하고 이름을 루스라고 했다. 가나안 원주민을 이야기한다. 루스는 요셉 가문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빼앗긴 성인데 자기가 살던 그 성 이름을 따서 헷 족속 땅에 성읍을 건축하고 루스라고 이름을 짓는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안 들어오고 딴 살림을 차린 것이다.
이는 가나안의 신과 문화를 보존하고 유지한다. 요셉 지파의 굉장한 실수다. 그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삼지 않으면 멸절 시켰어야 옳았다. 전쟁의 결과가 선명하게 정복을 한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양새로 결론을 내고 만다. 그 성안에서 자기들의 신과 문명과 문화를 다시 형성한다. 요셉 가문의 완성되지 않은 승리다. 지금부터 모든 지파가 똑같은 실수를 한다.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죄는 굉장한 집요성과 고집이 있다. 원문에 고집이라고 써 있는데 고집을 부린 끝에 결국 꺾어냈다는 말이다. 상대가 집요한 걸 말한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중독과 죄성이 걸려 있는 문제는 결국 숲을 이루어낸다. 별 거 아닌 줄 알고 방치하는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에 살금살금 자라난다. 나중에는 나도 감당 안 되고 제어 안 되는 거대한 숲이 되고 만다. 그때는 허용하고 용납해야 한다.
교회 안에 이런 식의 세속의 물결이 굉장히 많이 들어와 있다. 20-30년 전만 해도 어림없었던 세속의 문화가 살금살금 들어와 이제는 둥지를 틀고 뽑아내면 전부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어 손도 못 대는 이런 것들이 많다.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처음에는 “못했다”, 나중에는 “않았다” 둘 다 성경에 써 있으니 둘 다 맞는다. 못했다는 말도 맞지만 그건 인간의 해석이다. 쫓아내지 않은 게 결론적으로 맞다. 그건 하나님의 해석이다.
왜 못 좇아냈나? 그들의 연약한 불신앙 때문이다. 원래 가나안 땅이라는 공간은 아브라함 때부터 신명기를 넘어서 모세를 통해 여호수아에게 “반드시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하고 약속해서 들어간 땅이다.
가나안 삶의 스타일은 총칼로 크기와 힘으로 이겨서 쟁취하는 땅이 아니다. 힘과 힘의 전선이 아니다. 순종으로 가는 공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연습하는 공간이다. 약속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 넘어가게 되어 있다. 밟으면 철병거든 아낙자손이든 다 넘어오게 되어 있다. 연약함 때문에 크기 앞에 압도를 당했고 세력 앞에 압도당해서 못한 것이다.
“않았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가나안 족속들을 노역을 시켰는데 그들이 창출하는 노동력의 단맛이 컸고, 그들이 갖고 있던 문화를 남겨두어야 이익이고 실익이고 효과적이라서 그냥 두었기 때문이다. 노예해방을 지주계급들이 오랜 세월 반대했던 이유는 노동력이 사라졌을 때의 경제적 손실과 불편함을 귀족들이 감당 못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실익 때문에 극렬하게 반대한 것이다. 교묘한 것들이 얽혀 쫓아내지 “못했고”, “않았고” 이렇게 된 것이다.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전부 “쫓아내지 못하고”로 되어 있다. 27~36절에 “쫓아내지 못했다”고 6번이나 나온다.
34절에 단 지파의 치욕이 나온다.
34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요셉가문이 단지파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몰아낸 게 아니라 볼모로 노역을 시킨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에 가나안 문화가 혼잡하게 섞여갔다.
개혁을 해야 한다. 개혁은 세상적인 정의를 부르짖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모든 비본질적인 것들을 잘라내는 것이 개혁이다. 매일매일 영육간에 이 혼잡해서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자꾸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과수원에서 농부들이 정기적으로 가치치기를 안 해 주면 뿌리로부터 올라오던 양분이 가야될 과일로 가지 않고 쓸데없는 잔 가지로 가기 때문에 가지치기를 안 해준 나무열매는 양분을 충실히 못 먹어서 조막만하다. 가지치기를 열심히 해 준 과일은 양분이 한 군데로만 가기 때문에 달고 크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성이 있어 그대로 두면 잡초화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돈 있고 시간이 남으면 죄짓는 것밖에 없다. 돈이 있고 시간 남아서 선한 생각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잡초가 계속 자란다. 그것을 경건의 시간과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시간에 계속 뽑아주고 잘라줘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만 드러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분만 의지하는 훈련이 매일 일어나야 한다.
사사기는 계속되는 실패의 연속을 보여준다. 가나안의 삶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연습을 하는 공간이다. 내 안에 일어나는 가나안 족속의 섞임과 유혹과 그들의 매력적인 문명을 계속 쫓아내는 싸움이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기도 없이 은혜 없이 이루어질 일은 하나도 없다.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하신다는 말이 아니고 “이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다.
제자도 0.5: 반쪽짜리 순종(사사기 1장)
제목: 제자도 0.5: 반쪽짜리 순종
본문: 사사기 1장
설교자: 이병권
오늘 살펴볼 사사기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잘못된 제자도, 절반의 제자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제자도 0.5”입니다. 온전한 제자도가 아닌 부족한 제자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가 그 땅을 분배받은 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에”라고 시작하는데, 사사기도 동일하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다른 점은 너무도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문제의 핵심이 됩니다. 그것은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가 있었지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 지도자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모든 땅을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자신을 인도해줄 사람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불안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이끌어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질문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 이 말씀에서 “우리 가운데”라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우리를 위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워야 합니까?’
이 말은 단순히 먼저 싸우고 나중에 싸우는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의 부재에서 느끼는 불안감 속에서 누가 우리를 위해 앞서가며 본을 보여줄 것인지, 가 그 역할을 할 것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2) 하나님은 유다에게 그 임무를 맡기십니다. 여기 유다는 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를 말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이 모두 그러합니다. 개인이 아니라 그 자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옛적에도 야곱의 아들 중에서 유다가 리더 역할을 했었는데, 지금도 동일하게 유다 자손에게 그 역할이 주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지명하시고, 그에게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내가 승리를 보장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전쟁에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합니까?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3) 우리는 여기서 ‘0.5’ 온전하지 못한 제자도, 반쪽짜리 순종을 봅니다. 유다는 말씀대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함께 갑니다.
혹시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이게 왜 반쪽짜리 순종이지? 형제가 힘을 합쳐서 함께 싸우러 나가는데 더 좋은 일 아닌가?‘ 유다의 선택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인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온전한 순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지명하셨고 승리를 약속하시며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나아가기보다 현실적인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협력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그 일을 맡기셨고 할 수 있는 자원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두에 서있는 유다는 온전한 순종보다 상식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상식으로 따지면, 양을 잡아서 자기 문에 피를 바르는 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 성 주변을 도는 것이 상식적인 일입니까? 바다가 열리고, 강이 갈라져서 마른 땅으로 건너는 일이 상식으로 따질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의 상식으로 따지면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선입견을 가지고 상식으로 판단하면,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기보다 내 생각대로 적당히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식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상식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합니다.
한편으로 저는 유다를 이해합니다. 저도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다른 교회로부터 말씀 부탁을 받으면 두려워서 그냥 거절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서 고민합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왜 두려워하는 걸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면 하나님이 이길 힘도 주시고 감당하게 하실 텐데 무엇이 두려운 걸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으로 반쪽짜리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온전한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겁니다.
유다는 시므온과 함께 싸우러 올라갑니다. 유다의 반쪽짜리 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주실까요? 이어지는 본문은 유다가 치른 전쟁과 그 결과를 보고합니다.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4) 비록 유다가 반쪽짜리 순종을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유다에게 큰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승리한 유다는 그곳의 왕인 아도니 베섹을 잡아서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그가 행한 악을 그대로 갚아줍니다. 그래서 아도니 베섹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7)
아도니 베섹은 비참한 최후를 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한 대로 갚으셨고 그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번째 반쪽짜리 순종을 봅니다. 아도니 베섹은 자신이 당한 일이 하나님의 갚으심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다가 한 일이 정당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는 왜 왕을 포로로 잡아서 엄지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랐을까요? 하나님이 그것을 명령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유다는 지금 가나안 족속이 하는 일을 따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새 가나안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을 흉내 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타락과 그 땅에 가득한 죄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심과 동시에 가나안의 악을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속하셨던 명령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을 모두 진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왕을 사로잡았고 가나안이 하는 일을 따라 합니다. 이스라엘이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못하든지 관계없이 이렇게 조금씩 가나안의 생활방식, 가나안의 죄악이 이스라엘에게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조금씩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반쪽짜리 순종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요? 알게 모르게 내 삶에 들어와 있는 세상의 가치들, 세속적인 것들,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 때로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것이 좋은 줄 알고 따라 합니다.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이 매겨놓은 가치 기준에 따라 나도 똑같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나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애쓰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조금 더 가지기 위해 삶의 우선순위가 무너집니다. 이 땅에서 조금 더 안락하게 살기 위해서 더 가치 있는 것을 포기합니다. 남들처럼 사느라, 남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느라, 남들 흉내 내느라 내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놓치고 정신없이 사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아이들이 정말 잘합니다. 그냥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고, TV에 나오는 것을 보고 따라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이 따라하는 많은 것들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쁜 것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얼마나 잘 배우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아이들에게 그것이 왜 나쁜지, 왜 잘못된 것인지 알려주고 바른 것을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그럴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을 따라하며 주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고, 집은 살 수 있지만 가정은 살 수 없고, 책은 살 수 있지만 지혜는 살 수 없고, 쾌락은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고, 동료는 살 수 있지만 친구는 살 수 없고, 안락한 삶은 살 수 있지만 영원한 삶은 살 수 없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가지려고 합니까? 무엇을 추구하고 계십니까? 세상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입니까? 아니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성경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혹시 돈을 위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가지려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중요한 것을 내팽개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에 세상의 가치를 집어넣으면 온전한 순종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세상의 성공을 부러워하고 그것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 말씀을 기쁨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문화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거짓 속삭임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속아 넘어가서 반쪽짜리 순종을 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쪽이라도 하는 게 어디야? 아예 안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 반쪽짜리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반쪽짜리는 점점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순종으로 끝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틈을 보이지 마십시오. 틈을 보이면 불순종의 유혹 앞에 우리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유다는 반쪽짜리 순종을 하지만 승리합니다. 또 승리합니다. 여러 지역을 정복하고 가나안 족속을 쫓아냅니다. 별문제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반쪽짜리 순종은 결국 그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19)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승승장구했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아니라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골짜기 주민들은 쫓아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철 병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승리는 여기서 멈춥니다. 불순종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정복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멈춥니다. 더 싸울 수 있는데 더 할 수 있는데 더 뛸 수 있는데 더 헌신할 수 있는데 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수준을 낮추고 안주하는 겁니다. 불편하니까 수고스러우니까 힘이 드니까 주저앉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핑계될지 모릅니다. ‘재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잖아요!’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저들에게는 철병거가 있지만, 너에게는 내가 있지 않느냐?
갈수록 더 악해지고 더 하나님을 대적하고 더 진리에서 멀어지고 있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살면서 세상과 주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고 세상에서 적당히 즐기면서 주일에는 교회 나와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으로, 반쪽짜리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반쪽짜리로는 안 됩니다. 반쪽짜리로는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유다처럼 결국 곁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불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는 실패합니다. 그럼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은 어떨까요? 유다와 다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좀 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어지는 말씀에는 지파들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는데 계속 반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결같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베냐민, 므낫세, 에브라임,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모두가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들이 정말 못한 걸까요? 쫓아낼 수 없어서, 할 수 없어서 그런 걸까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2:2)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순종을 안 합니다. 할 수 있는데 안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냥 타협합니다. 그냥 편의를 선택합니다. 그냥 상식대로 행동합니다. 그냥 두려움에 포기합니다. 그냥 넘어가버립니다. 그냥 세상을 따라 삽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순종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사기의 제일 마지막, 사사기의 결론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왕이 없었던 이스라엘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욕심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정말 왕이 없었을까요? 사실, 이스라엘에는 그 어떤 나라도 가질 수 없는 왕, 모든 왕들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왕을 왕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왕이 없는 이스라엘은 결국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가 왕이 되어서 점점 더 타락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사기 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합니다. 내가 왕이 되어서, 내가 주인 되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욕심대로 세상의 헛된 것을 좇는 삶, 그런 삶의 끝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가 그와 같은 길을 가야할까요? 반쪽짜리 순종을 버리고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의 안락과 편함과 안전과 유익과 즐거움을 조금만 뒤로 미룰 수 있지 않습니까? 정말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영원한 것을 위해서 조금 더 참을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갈수록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순종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 유혹에 대해서 우리는 처음부터 불순종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대놓고 불순종할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처음은 반쪽짜리 순종으로, 적당한 순종으로, 손해 보지 않는 순종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계속 노출되다 보니 점점 다른 길로 빠지게 되는 겁니다. 뭔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다시 돌이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타성에 젖어서 그 수준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수많은 이유와 그럴듯한 변명으로 나의 삶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금 생각해보십시오.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엄마, 엄마는 무엇을 위해 살아요?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주겠습니까? 혹은 자녀가 ‘아빠, 아빠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면 좋겠어요?’ 묻는다면 뭐라고 말해주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주님을 따르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자녀가 그 대답을 듣고 아빠를 보면서 ‘아! 그렇구나! 나도 아빠처럼 그렇게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아빠는 말만 그렇게 하는구나!’ 라고 생각할까요?
내가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는 내 입술이 아니라 내 삶이 말해줍니다. 입술로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정답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물질적인 풍요와 눈에 보이는 만족이라면, 주님을 위한 수고와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은 어리석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릅니다. 나라는 우상에게 넘어가지 마십시오. 비록 내가 힘들고 수고스러울 수 있지만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반쪽짜리로 안 됩니다. 불편하더라도, 두려움이 있더라도 멈추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라 가지 말고 말씀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한 사람의 고백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주님을 위해 수고했던,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유석경 자매의 고백입니다. 원인모를 두통으로 병원을 찾은 그녀는 이 땅에서 자신의 삶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선택합니다. 남은 삶을 병원에서 보내기보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로 선택합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며 안타까워하며 질문합니다. ‘괜찮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냐고’ 그런 질문에 대해서 자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을 신뢰할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나의 주인 되시는 그분을 신뢰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신뢰함으로 온전한 순종을 선택할 뿐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힘든 상황들, 무거운 짐들, 힘겨운 삶의 무게, 우리 주님께서 모두 아십니다. 그러니 그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십시오.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했던 자매의 고백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쁘고,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하고,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 고백이 매일의 삶에서 순종을 선택하는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매일말씀묵상. 7월 18일. 사사기 1장. > 매일말씀묵상
사사기 1장. 어두움의 그림자.
1. 사사기 1 장은 여호수아서에서 이미 소개된 내용들을 포함하여 ,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의 상황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 이제 분배 받은 기업에서 각 지파는 남아있는 가나안 족속을 내보내야 하는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누가 먼저 올라가 싸워야하는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2. 시간적으로 점검하고 읽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 1:1 에 ‘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 라고 사사기를 시작함으로써 사사시대라는 이스라엘의 역사 시대를 분명히 하고 있으면서도, 이하에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여호수아의 생전에 일어난 일 입니다. 나중에 2:8 절에서 여호수아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언급 함으로써, 이 서론이 여호수아의 죽음을 전후하여 일어나는 상황들이며, 더 나아가 사사시대의 초기 상황이 얼마나 어둠의 그림자들로 덮이고 있었는가 를 보여주고자 의도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수아가 죽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너무나도 낯선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 이전에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사람 모세가 있었고(신34:10), 모세의 사후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권위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도 여호수아도, 더 이상 그들 가운데 없습니다.
4. 이런 시대를 내다보고 모세와 여호수아는 그토록 하나님의 율법의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강조했었습니다 .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사시대 약 400년의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으로 대변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삿21:25).
5. 1 절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물은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유다를 먼저 가라고 하셨고 , 유다는 자기의 기업 내에서 기업을 얻은 시므온에게 함께 갈 것을 청하고 , 베섹의 아도니 베섹과 싸워 승리합니다 (2~7). 이것 역시 가나안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아도니 베섹은 잔인하고 포악한 왕이었습니다(7).
6. 예루살렘과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서 그리고 헤브론에서 유다는 승리했습니다. 헤브론을 얻은 유다 지파의 갈렙과 옷니엘의 이야기(11~15)는 사실 여호수아 15:13~19에 이미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시므온과 함께 스밧을 치고 특별히 블레셋의 땅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을 쳐서 취하였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9).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된 일 입니다.
7. 추가적으로 우리는 사사기의 기자가 겐 사람을 주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16). 모세의 장인이 겐 사람인데, 이들이 유다와 함께 거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겐 사람은 가나안의 죄악이 관영한 족속이 아니었기에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8. 19 절부터 반전이 시작되는데 , 여기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 유다 지파가 자기 기업 가운데 쫓아내지 못하여 남게 된 가나안 족속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철병거를 가진 족속들이었습니다(19). 베냐민 지파에게는 여부스 족속이 쫓아내지 못한 족속이었습니다(21).
9. 요셉 족속은 벧엘(루스)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도움을 준 사람과 그 가족을 살려주어 그 가족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여 루스라고 이름을 지은 이야기를 전해주는데(24~26), 이 이야기는 라합의 이야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소개되는 것 같습니다. 라합이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이었으나, 이 사람을 살려준 것은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임의로 자기들이 결정한 사항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은 믿음으로 쫓아내지 못한 족속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요셉 지파 중 므낫세는 벧스안, 다아낙, 돌, 이블르암, 므깃도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고, 에브라임은 게셀의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납달리 지파는 벧세메스, 벧아낫의 거민들을 허용했고, 단 지파는 수치스럽게도 오히려 아모리 사람들에게 밀려서 산지로 쫓겨나 골짜기를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34). 이것이 나중에 단 지파가 북쪽으로 이동하게 된 경위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정복전쟁의 이야기는 유다의 승리로 시작해서 단의 수치스러운 굴욕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 사사기의 첫 이야기에는 희망적인 기대감보다는 ,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합니다 .
11. 여호수아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가 이스라엘 앞에서 사라지자 ,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맙니다 .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은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사람을 의지했지, 정작 하나님은 의지하고 신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영적인 지도자나 목회자에게 충성을 하고, 의존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또한 목회자도 그런 성도들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물론 성도는 목회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자신에게 충성된 성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저 다리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계속하여 양육하고 가르치는 일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과 성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도의 말씀을 통한 성숙입니다 . 말씀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자기의 옳은 소견대로 살 뿐입니다. 더 이상 믿음의 싸움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으로 성숙하여 하나님 안에 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패배와 절망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죄를 남겨두고 믿음의 싸움을 하지 않아서,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가나안 족속들이 남아있으며, 얼마나 많은 죄악을 방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여. 다시 말씀을 가까이하고, 다시 믿음의 싸움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의 군사로 살게 하옵소서. 무기력한 패잔병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손해보고 상처 입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이러한 삶을 위해 더욱 말씀의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사기 1장 1절-10절, 승리를 향하여 – 매일성경큐티 새벽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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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비결
사사기 1장 1절-10절, 승리를 향하여
사사기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불완전한 사사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시작하는 매일성경의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묵상하고, 그들이 승리를 얻게 된 비결에 대해 새벽설교로 전합니다.
사사기 1장 1절-10절, 승리를 향하여
새찬송가 347장, 허락하신 새 땅에
삶의 위기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사단이 넘어 뜨리려고 항상 공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고통을 주려고 합니다. 욥과 같은 의인까지도 사단은 넘어 뜨리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삶의 위기가 자주 찾아 옵니다. 때로는 사단의 시험으로, 때로는 나의 죄악으로 위기를 맞이합니다. 이 삶의 위기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위기의 순간을 이겨낼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위기 – 여호수아의 사망, 지도자의 부재
이스라엘을 이끌며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이끌었던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새로운 지도자가 세워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습니다.
어떻게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을 정복해 나갈 수 있을까요? 지도자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가나안 정복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사망으로 인하여 지도자가 없었으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 하나님께 기도하다
여호수아의 사망으로 인하여 위기 상황에 놓인 이스라엘, 특히 유다 백성들은 어떤 해결 방법을 찾았습니까?
사사기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이스라엘이 선택한 방법은 “하나님께 묻는 것” 즉 “기도”였습니다. 지도자가 없고 해야 할 일은 남아 있는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지도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단지 하나님의 대리인일 뿐,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도로 물었던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방법을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우던 장면을 기억해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골짜기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벌였으며, 모세는 언덕 위에서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갈 때는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모세의 손이 올라갈 때는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습니다. 즉, 기도가 승리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해 나갑시다.
나와 함께 올라가서 – 유다와 시므온의 동역
하나님께 기도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 주변을 정복하기 위해 올라가라고 명령하시며 가나안 땅을 넘겨 주시겠다고 2절에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유다가 택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사사기 1:3,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에게 함께 싸우자고 요청합니다. 유다 지파는 혼자가 아니라 동역할 때 남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음을 알았기에 시므온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혼자 싸울 수도 있지만, 유다는 믿음의 동지인 시므온과의 동역의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소아시아 여러 지역들을 다녔지만, 그는 혼자 다니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바나바와 함께 복음을 전하였고, 또 실라나 누가나 마가와도 함께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함께 복음을 전할 때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의 복음이 선포되어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혼자도 가능하지만 함께 할 때 더 큰 기적과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도 우리 교회의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함께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승리 – 중부 지역과 남부 지역의 강력한 국가들 정복
비록 여호수아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지도자가 없었지만, 이스라엘은 남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 최고의 해결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먼저 진정한 지도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가 올라가서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던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올라가자며 동역을 제안합니다. 그 결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정복하고 예루살렘과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헤브론의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하였습니다. 강력한 국가들이었지만 기도와 동역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위기의 순간이 있습니까? 강력한 적들이 우리 앞에 서 있습니까? 믿음의 시련과 어려움 속에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능력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동역하여 위기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갑시다. 이 새벽에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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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1장
사사기 1장
삿1장을 천천히 읽으세요.
요약: 여호수아 사후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게 되었다. 유다 자손은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과 싸웠고, 예루살렘 헤브론 드빌 등을 쳤다. 또한 유다는 시므온과 함께 스밧의 가나안 족속을 쳐서 진멸하여 호르마라 불렀으며,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 지역을 점령했다. 유다는 골짜기에 거주하는 주민을,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그 외에 여러 이스라엘 자손들도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 급기야 아모리 족속은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로 내려옴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사기는
① 여호수아 사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를 떠나게 된 이유를 알려준다.
② 범죄와 회개 그리고 회복이 반복되는 것을 통해, 인간과 하나님의 대비되는 성품을 보게 된다.
③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그 엔트로피가 증가- 상황이 악화되는 것 – 하는 경향으로 치닫게 된다.
④ 여호와께서 기업을 주시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받은 자의 몫임을 교훈한다.
유다 자손이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치다 (1~21절)
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니라(2절). ▶ 여호수아 사후에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을 인도할 지도자가 없는 환경이었다. 공식적으로 정복 전쟁과 땅 분배는 종결되었지만, 각 지파 별로 여전히 가나안 족속과 투쟁하며 자신들의 기업을 확장하고 유지하며 지켜나갈 책무가 있었다. 지도자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은 직접 여호와께 여쭈어야 했다. “여쭈어”는 (히)샤알/샤엘 인데, 문의하다, 요청하다, 간구하다, 기도하다 라는 뜻이다. 전에는 지도자를 통해서 여호와의 명령을 전달받으면 됐지만 이제는 그 방법이 사라졌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직접 여호와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여쭙는 방식은 다른 게 아니라 여호와께 기도하는 것이다. ※ 여호와께 기도했으므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 ▶▶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여쭘에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하시며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을 때에, 가나안 땅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미정복 지역으로 남아 있었는데(수13:1),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을 천천히 쫓아내시고 이스라엘 자손도 그들을 쫓아내는 조건으로(출23:30~31), 이스라엘 자손에게 분배되었다(수13:6). 이 분배된 땅 중에서 아직 정복되지 못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과 싸워야 한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여호와께서 이미 넘겨주셨기에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여 나가면 승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다.
②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하니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3절) 유다가 올라가매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시니 그들이 베섹에서 만 명을 죽이고(4절)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 그와 싸워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죽이니(5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6절) 아도니 베섹이 이르되 옛적에 칠십 명의 왕들이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리고 내 상 아래에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히)엘로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7절). ▶ 시므온과 유다는 같은 어머니인 레아의 후손이었고, 시므온 자손이 제비 뽑은 기업이 유다 자손의 기업 안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두 지파는 가까웠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치러 함께 올라가자는 유다 자손의 제안을 시므온 자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 베섹에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 만(萬) 명을 죽였다고 했는데, 만(萬)으로 쓰인 단어는 (히)‘엘레프’인데, 이는 일천/천(千)을 의미한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히)엘레프-이요 다윗은 만만-(히)레바바-이로다 한지라”(삼상18:7).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바이블은 그래서 만 명을 ‘ten military units’로 번역했다. ▶▶▶ ‘아도니 베섹’은 베섹의 주인 이라는 뜻이므로, 애굽 왕 바로 처럼 직책 명으로 쓰인 게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70인역 등은 여호수아가 쳤던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수10:1)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는데, 여호수아 당시의 아도니세덱은 여호수아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에(수10:23~24) 같은 인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베섹과 예루살렘은 같은 곳이 아니므로, 베섹 왕 아도니 베섹과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은 같은 왕이 아니라고 하겠다. 아도니 베섹은 자신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렸을 때, 전능한 신(들)이 그리했다고 생각했겠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선과 악 공히 뿌린 대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 아니겠는가!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합2:8).
③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8절) 그 후에 유다 자손이 내려가서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9절)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10절)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11절)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12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13절)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14절)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15절). ▶ 여호수아 당시에 예루살렘 왕은 정복되었고(수12:10), 갈렙에 의해 헤브론이, 옷니엘에 의해 드빌이 정복되었다(수15:17). 여기에 나오는 갈렙과 옷니엘의 이야기를 여호수아서를 회상하고 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썼다면 회상이 맞겠지만,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기록한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회상이라고 하는 건 맞지 않다. 사사기가 기록된 방식 그대로 보면 된다. 여호수아서를 보고 본 장을 본다면 시간적으로 뒤죽박죽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사기를 기록한 자나 이를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옷니엘은 첫 번째 사사가 되었기에 그를 등장시키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④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유다 자손이 아니라 다른 족속 예를 들면 아말렉 등으로 보기도 한다- 중에 거주하니라(16절). ▶ 겐 족속(the Kenite)은 아브라함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속이다(창15:19). 모세의 장인은 겐 족속 중 미디안 제사장이었는데(출3:1), 미디안은 아브라함과 후처 그두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므로(창25:2), 미디안 족속이 겐 족속에서 나왔다고 보기 힘들다. 이드로(르우엘)은 미디안 족속이라 할 수 없고, 미디안 땅에 살면서 제사장까지 하게 된 인물이라고 하겠다. 다만, 창15장에서 언급되는 겐 족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을 기준으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후일 특별히 선택된 겐 족속은 이스라엘 특히 유다 지파에 동화되고 분화되어 갔다.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 곧 디랏 종족과 시므앗 종족과 수갓 종족이니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더라”(대상2:55). ▶▶ 아랏은 네겝 지방에 있던 가나안 족속의 성읍이었다(민21:1). 이제 네겝은 유다 자손의 기업이 되었으므로 모세의 장인 자손들이 유다 자손과 함께 아랏 남쪽에 있는 유다 황무지에서 살게 되었다. 그 까닭은 아마도 그들이 목축을 전업으로 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는 또한 일시적 동거가 아니라 정착이었다(삼상27:10 참조).
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 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17절)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히)라카드, 취하다(take)-(18절)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19절)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20절)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21절). ▶ 유다 지파가 블레셋 지역인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을 점령했다고 했는데,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보인다(3:3 참조). 공동번역은 그래서 18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가자와 그 일대, 아스클론과 그 일대, 에크론과 그 일대는 차지하지 못하였다.” ▶▶ 19절부터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중대한 잘못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 모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유다 지파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때 산지 주민을 쫓아냈다고 했는데, 골짜기(평지) 주민은 철 병거가 있어서 쫓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셔도 철 병거 때문에 쫓아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들은 철 병거가 두려워 여호와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고 쫓아낼 생각도 안 했다는 말이 된다. 갈렙은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지 않았던가! ※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지 말고 여호와만 바라봐야 한다. 베냐민 자손도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함께 섞여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다 (22~36절)
① 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22절) 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23절) 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24절)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25절)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26절). ▶ 벧엘 정탐꾼들이 그 성읍의 거주민에게 보여달라고 한 ‘성읍의 입구’는 몰래 침입할 수 있는 입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탐꾼을 숨겨준 여리고 성의 라합처럼, 입구를 알려준 사람과 그의 가족은 살게 되었다.
②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27절)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28절).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29절). 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30절). 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31절)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32절). 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33절). ▶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던지, 않았던지 간에 결과는 같았다. 그것은 위에서 본대로 이스라엘의 타락이었다. 28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강성해졌어도 의도적으로 그들을 쫓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켰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힘)을 사용하지 않은 것도 큰 문제라고 하겠다. 쫓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킨 사실은 어떤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족속을 부리는 입장에 있기에 오히려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좋은 영향을 받았을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듯이, 결국 가나안 족속의 우상 숭배 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게 만들었다. 이게 사사기에서 얻는 중요한 교훈이다. ※ 전체 밀가루 반죽에 1%의 누룩이 들었어도 밀가루 반죽 전부에 누룩이 퍼진다.
③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34절)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35절)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36절). ▶ 단 자손은 야곱과 모세가 축복한 대로 살지 못했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49:17),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신33:22). 단 자손은 아모리 족속의 위세에 눌려, 조상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받아누리지 못했다. 단순히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다. 여전히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1:19, 22). 원수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해, 시쳇말로 ‘간을 본다’. 그래서 만만할 것 같으면 억누르고, 그렇지 않으면 손을 뗀다. 아모리 족속은 단 자손을 만만히 보다가 결국 결심하고 그들을 억누르며 여러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어울려 살다보니, 강성해졌어도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노역을 시키며 어울려 살게 되었다. 그 결과는 이스라엘의 가나안화였다.
(헤레스 산, 아얄론, 사알빔의 위치/ 성경역사,지리학,고고학 아틀라스 p188, 이레서원)
[문제1-1] 다음 중 삿1장의 내용과 다른 것은?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쭌 방법은 제비 뽑기였다.
②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다.
③ 여호와께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유다에게 넘겨주셔서 베섹에서 만 명을 죽였다.
④ 아도니 베섹이 도망가다 붙잡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이 잘렸다.
⑤ 유다는 예루살렘 헤브론 드빌 스밧을 쳤고, 가사 등을 점령했다.
[문제1-2] 다음 중 삿1장의 내용 중 틀린 것은?① 갈렙은 헤브론에서 아낙의 세 아들들을 쫓아냈고, 유다 자손은 그들을 죽였다.
②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거주했다.
③ 요셉 가문은 벧엘을 쳐서 정복했다.
④ 단 자손은 아모리 족속을 쳐서 쫓아냈다.
⑤ 명시적으로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킨 지파는 서쪽 므낫세, 스불론, 납달리 등이다.
핵심 한 줄
⒜ 하나님께 여쭙는 것은 기도(간구)하는 것이다.
⒝ 여호와께 구하면 함께 해 주신다.
⒞ 하나님께서는 뿌린 대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 쫓아내지 못한 것과 않은 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사용해야 할 때 반드시 써야 한다.
⒡ 원수가 얕잡아 보게 하면 안 된다.
암송 구절
1절
2절
7절
10절
17절
19절
21절
22절
28절
34절
정답
[문제1-1] ① [문제1-2] ④Copyright © 2016 by Paul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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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2 불완전한 승리 (사사기 1장 11-21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시므온 지파와 연합한 유다 지파는 파죽지세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됩니다. 70명의 왕을 상대로 무패를 자랑하는 적군 아도니 베섹을 이기고, 헤브론에 살고 있는 거인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여호수아는 죽었지만,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유다지파 출신 갈렙은 아직 살아 있었습니다. 빠르게 가나안 정복을 해 가던 갈렙은 누구든지 기럇 세벨이란 성을 정복하면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이 용감하게 성을 정복하여 악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갈렙의 사위가 된 ‘옷니엘’이란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가 여호수아 이후 첫 ‘사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는 갈렙과 옷니엘과 같은 용맹한 리더들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을 빠르게 정복해 갔습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삿 1:19)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여기보니 유다 지파가 산지 거민들과 싸울 때는 이들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산지 거민들을 쫒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골짜기 거민들과 싸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눈 앞에 철 병거를 두려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대 문헌에 따르면 인류가 철을 생산하여 사용한 것은 히타이트 민족에서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들 중 일부가 가나안 땅에 이주하여 이 땅에는 일찍부터 막강한 무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직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철기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사울이 다스리던 왕정시대에도 철로 된 농기구나 무기를 다루려면 블레셋의 기술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사사시대에 사용한 무기들은 철병기 앞에 엿가락 꺾이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습니다.
19절을 보면 유다지파가 골짜기 거민들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가 상대방은 철병거로 최신 무기를 사용하고, 유다 지파는 그러하지 못한 것으로 비춰집니다. 그러나 사실 훗날 사사 드보라와 바락은 철병거 9백승을 가진 야빈 왕을 상대로도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즉 이 전쟁의 진짜 패배 원인은 유다 지파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칼과 창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 얼마나 더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가?’ 중요한 것입니다. 골리앗은 큰 칼과 베틀 채 같은 창을 가지고 나왔지만, 어린 목동 다윗은 손에 막대기 하나 들고 물 맷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했습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은 전쟁의 승리가 칼과 창과 같은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유다지파가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 거민들과 싸웠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다면, 그들은 충분히 이 거민들을 무찌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철병거를 가진 적이란 사실에 미리 겁을 먹고 하나님도 의지하지 않은 불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분배 받은 땅을 열심으로 정복해 가던 유다 지파였지만,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 거민들은 쫓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하나도 남김없이 무찌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지파는 철병거에 겁을 먹고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 정복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19절을 다시 보면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글 성경으로 보면 이것이 ‘내 능력이 안 되어서’, ‘상대방이 너무 강력해서 못 쫓아냈다’는 식의 해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이것은 능력이 없어서 쫓아내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는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철병거와 싸울 용기와 믿음이 없어서 고의적으로 그들과의 싸움을 회피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다 지파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2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삿 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여기 말씀을 보면, 베냐민 자손들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여부스 족속은 예루살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자들입니다. 지형상 정복하기 매우 까다로운 곳입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도 이들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이곳 주민들의 땅은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회피하는 직무유기였습니다. 이 때 정복하지 못한 여부스 족속은 계속 이스라엘 땅에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이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훗날 다윗이 왕이 되어서 비로소 이 땅을 완전하게 정복하게 됩니다.
비록 유다 지파는 초반에 열심으로 땅을 정복했지만, 적을 두려워한 나머지 철병기를 가지고 있는 골짜기 거민들은 남겨 두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도 공격하기 어려운 산악지대에 사는 여부스 거민들은 남겨 두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전쟁에 동행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혹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90% 순종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99%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마음을 쏟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과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동일하게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자기 만족의 수준에서 사명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사명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온전히 완성하는 오늘 이 하루 그리고 우리의 남은 생애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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