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9 편 | 시편 19편 상위 104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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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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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시편 1 · 시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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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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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시편 19 ·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3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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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6/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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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11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시편 19편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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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8/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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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5(화) “시편 19:1-14”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19:1-14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1-6절) 오늘 본문 시편 19편의 표제어가 <다윗의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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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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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19편) – 숭실교회

시편 19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시편입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C.S. 루이스는 자신의 “시편묵상집”에서 “시편 19편은 모든 시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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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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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 KLB – 여호와의 완전한 계시

여호와의 완전한 계시 – (다윗의 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그의 놀라운 솜씨를 나타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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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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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방법 | 시편 19편 1-14절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던 시인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시인은 자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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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bspbs.tistory.com

Date Published: 10/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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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시편강해(시편19편) – 다음블로그

이 시는 다윗이 기록한 것이며, 성전에서 회중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찬양 책임자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어려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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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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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4월 12일. 시편 19편. – 하늘품은교회

시편 19편.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드러내는 주의 영광을 보라. 1. 19편은 일반계시인 자연과(1~6) 특별계시인 율법이(7~11)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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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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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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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19 편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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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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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1)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2)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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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2018/05/15(화) “시편 19:1-14”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19:1-14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1-6절)

오늘 본문 시편 19편의 표제어가 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 시편을 짓기는 했지만 했지만, 어떤 상황 속에 있을때 지어졌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지은 시가 공동체의 노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다윗의 시편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1-6절은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7-14절은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리며, 그러한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 하늘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 할지라도 우리도 모르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이 지구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동물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종류의 식물이 있는 다 알지 못합니다. 대략적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사실 그 추정도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바다 속에는 사는 동물이 얼마나 되는 지, 바다식물은 얼마나 되는지 역시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미지의 세계가 하늘입니다. 그래도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각 나라의 면적이 얼마나 되는지, 산이 얼마나 높은지는 정확하게 잴 수 있습니다. 또한 바다의 면적과 바다의 깊이도 현대 과학의 힘으로 다 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높이 끝이 어디인지, 하늘의 넓이가 얼마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궁창(우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여준다는 말 외에 더 이상 덧붙일 설명이 별로 없습니다.

2-4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낮이 낮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밤은 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전해주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끝까지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지 못합니다. 사실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아는 것이 지극히 미미합니다. 하지만 자연과학자들의 연구로 어떤 신비한 자연현상을 설명들을 때 정말 놀랍습니다.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하고,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리고, 강물이 흘러가고,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고, 초식동물이 풀을 뜯고,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등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 귀에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역사는 신비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오묘한 역사는 온 땅과 세상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4절 하반절-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다윗은 태양이 진 상태를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쳐주셨다)’고 표현합니다. 태양이 있는 곳을 궁전이나 집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고대에 태양은 숭배대상의 1순위이자 최고의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태양이 머무르는 곳은 왕궁이라 생각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장막(천막)’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태양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도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것에 하나일 뿐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그 태양이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달리기를 기뻐하는 장사와 같다’고 합니다. 남자가 가장 혈기왕성할 때는 결혼할 때입니다. 그래서 신랑일 때가 가장 생기발랄합니다.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어 생물이 생기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침에 떠오르는 모습을 신랑의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태양이 숭배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때에 피조물의 하나로 표현하는 다윗의 신앙은 참 깊습니다.

말씀에 나타난 은혜, 그리고 기도(7-14절)

1-6절이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다면, 7절 부터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나타난 은혜를 노래합니다. 7-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다윗은 각 절마다 2개씩 모두 6개로 하나님의 말씀의 이름과 특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①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도록 인도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지 못하고, 우리의 영혼이 소성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삶에 죽었던 부분이 반드시 살아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②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 사건들마다 그 결과까지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또 우리의 잘못된 삶을 돌이키면 어떻게 회복시켜주시는지를 화면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도 명확하기에 그 사건들을 기억하고 순종해야 할 부분은 끝까지 순종하고, 불순종하고 있는 부분은 돌이키는 삶을 살면 지혜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나중에 그 지혜가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었다고 판명되어서 그 인생이 무너지는 사람의 일을 매일 신문 방송에서 보고 듣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지혜자입니다.

③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정직하다’는 ‘올바르다’의 뜻입니다. 의사의 처방전을 따라서 약을 지어서 먹으면, 머리가 아프던 것이 사라지고, 흘러내리던 콧물이 그칩니다. 그 처방전이 바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의 처방전을 따라서 약을 지어 먹으면 그 효과가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순종하면 그 결과가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지킴에서 오는 기쁨은,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해서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④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

히말라야산맥이나 알프스산맥과 같이 만년설 지역을 선글라스나 눈(眼)을 보호하는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맨눈으로 오르게 되면, 눈(雪)에 반사된 자외선이 눈(眼)을 자극하여 눈을 뜨기 어렵고, 앞이 보이지 않는 설맹(雪盲)현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눈이 더 맑아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의 말씀은 오염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하게 얹으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합니다.

⑤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게 합니다.

8절의 ‘순결함’이 ‘깨끗함’이라고 한다면, ‘정결함’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의 1원칙은 정결함입니다. 제물로 소를 드려야 하는데 가난하여 양을 드릴 수 있고, 양을 드려야 하는데 궁핍하여 비둘기로 대신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양을 드리는 대신 정결하지 않은 양이나, 심지어 훨씬 더 비싸다고 할지라도 정결하지 않은 소로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정결한 제물을 드림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까지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⑥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롭습니다.

이 부분을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의 재판은 진실이고, 모두 다 옳습니다’입니다. 세상의 재판은 옳지 않을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말이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진실을 왜곡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결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말씀)이 이러하기에, 그 말씀이 다윗에게 또한 우리에게 어떠한지 10-1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사람들의 사모는 대상의 1번은 금(순금)으로 표현되는 재물입니다. 재물에 대한 소유욕은 언제나 “지금보다 조금 더”라고 합니다. 일반 범인이 생각하기에는 자기보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욕심을 내는 것을 보면, “뭐가 부족해서 저러지? 나 같으면 욕심을 부리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하거나 말합니다. 그러나 나보다 덜 가진 사람이 나를 보고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불철주야 일하고, 동분서주 뛰어보지만, 소유가 더 많아진다고 해서 인생이 더 달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재물이 인생의 맛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참 맛을 내고, 더 나아가 영원의 맛을 맛보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재물을 깊이 품음으로 인생이 변화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재물은 인생을 변질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많은 재물을 가진 것이 상인줄 알았는데 벌로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인생에 변화하게 하게하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깊은 맛을 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말씀의 유용함에 대해서 깨달은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2-13절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다윗은 자기 스스로는 ‘자기 허물’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고의로 죄를 짓지도, 주장하지도 말게 해 달라’고 고백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짓는 죄, 알고도 짓는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지 우리의 결심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심할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를 그런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온전히 얹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1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청소년기에 14절 하반절로 만들어진 복음성가를 많이 부르고 그렇게 되기를 많이 기도한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이시고, 우리의 구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반석이시고, 구속자이시기에 우리의 입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을 열납하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윗이 크게 여겨지는 것은 단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목동이었을 때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목동이었을 때도 다른 목동이 가지 않았던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었고, 왕이었을 때도 동일하여 다른 왕들과 다른 ‘엑스 호도스’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그곳은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과 믿음의 터전입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읽고 듣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순종한다면, 우리도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을 걷는 것이요, 이 시편 19편은 오늘 우리가 부르는 삶과 믿음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다윗은 하늘과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보고서도 하나님을 노래하고,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깊은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저희도 그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심어주신 가정과 일터,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침저녁으로 읽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나 주일예배 때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서나, 구역성경공부를 통해서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소성되며, 지혜롭게 되며, 마음이 기쁘게 되며, 눈이 밝아지는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더욱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답니다”라는 고백이 흘러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러한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길 없는 길’을 가는 것이거나 ‘세상 속의 길’을 걷지 않고,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옵나니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로 시작되는 다윗의 고백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혹 우주현상이나 자연현상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2. 당신의 일상 가운데서나 삶 속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이나 인도하심을 느끼신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때는 언제였습니까?

3.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의 이름과 특성을 6가지로 표현했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말로 표현해 봅십시오.

4.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심으신 가정과 일터, 삶의 자리에서, ‘엑스 호도스_길 밖의 길’을 걷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2020.05.03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19편)

2020.05.03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19편)

하나님의 영광! (2020. 5. 3. 주일오후예배)

말씀: 시편 19:1-14

시편 19편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시편입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C.S. 루이스는 자신의 “시편묵상집”에서 “시편 19편은 모든 시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편이고, 세상 최고의 서정시”라고 말합니다. 하이든의 고향곡 천지창조가 있는데, 그 고향곡의 성경적 배경이 이 19편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심지어 임마누엘 칸트라는 유명한 철학자는 시편 19편에 비추어서, “나의 영혼을 거룩한 경외심과 끊임없이 솟구치는 경탄으로 채워 주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육적 존재인 우리를 실제로 압도하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의 광경과 지적 매체로서의 우리를 무한히 존엄한 위치로까지 끌어올려 주는 도덕법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경외와 경탄의 대상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의 광경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법,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사실 칸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시편 19편에서 다윗은 인간이 감탄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대상이 있다고 노래하는데요. 첫째는 자연만물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두 대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바꾸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도록, 이 두 대상에 자신을 계시하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만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일반계시라고 말씀하고, 말씀(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특별계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시편 19편이 엄청난 시편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편 19편 말씀은 세 단락으로 구분이 가능합니다. 첫째, 1절에서 6절까지인데요. 자연만물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말씀합니다. 둘째는 7절에서 10절입니다. 말씀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마지막으로 11절에서 14절인데요. 자연만물과 특히 말씀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는 겁니다. 각 단락을 잠시 살피면서,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교훈을 새겨 보겠습니다.

첫째 단락은 자연만물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왜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까요?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만드신 창조자시기 때문에, 자연만물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겁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늘과 궁창은 성경에서 거의 동의어로 쓰입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면 보는 하늘입니다. 그 하늘이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만드신 대상입니다. “영광”의 어원을 보면, “무게가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은유적으로 쓰이면 “중요하다. 위대하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위대하심일까요? 손으로 지으신 일, 그러니까 창조자의 위대하심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보면, 낮과 밤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요. 하늘에서 작열하는 태양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에서 제일 재미있게 읽은 말씀이 3절에서 4절 전반절입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이게 무슨 말씀이냐면요?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만물이 내는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나름도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다윗이 노래하기를 그 소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전 우주만물이 그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위대한 영성가들이 있는데요.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 자연만물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는 모든 자연의 대상이 내는 소리를 듣고 대화를 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타고 있는 불꽃과도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으냐면요? 제가 언젠가 “감탄이 신앙의 일이다.” 그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어놓으신 만물을 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에 감탄하는 겁니다. 지난주에 우리 교회가 약 두 달만에 예배당 예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제가 개인적으로 참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봄 전경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개나리, 벚꽃, 겹벚꽃, 철죽이 연이어 핍니다. 그런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성도님들이 교회 앞마당에 피는 꽃들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목회자들이 보면서 “저 꽃들이 다 피고지기 전에 성도님들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아쉬워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예배를 다시 시작하였을 때, 겹 벚꽃이 한창이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보시고는 감탄을 하셨습니다. 어르신들은 너무도 좋으셔서 예배가 끝나고 함께 사진을 찍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쁘게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솜씨구나!” 그렇게 감탄하는 것이 곧 신앙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만물의 찬양소리를 듣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솜씨를 고백하면서 감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둘째, 단락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겁니다. 자연만물과 말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연만물이 내는 소리는 듣지를 못하잖아요.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말씀은 이해가 가능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압니다. 7절로 9절에 보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리 영혼을 살아나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거지요. 또 지혜롭게 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하게 만듭니다. 또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에게 바른 것을 알게 해주고, 바른 것을 지키게 하니까 기쁜 겁니다. 또 눈을 밝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움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밝은 것을 보게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분이니까, 말씀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니까, 그분의 말씀도 의롭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유익하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뭐라고 고백하냐면요? 10절에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자연만물을 보고는 무엇을 하면 좋겠다고 제가 말씀드렸나요? 네, 감탄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다윗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모하는” 겁니다. “사모한다.”는 말은 “몹시 바라다. 갈망하다. 심지어 탐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탐스럽다.”고 느꼈는데, 거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자. 선악과를 탐내서는 안 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탐을 내자.” 그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부어주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 말씀의 은혜를 주시는 겁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베뢰아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거기에 복음의 역사가 무수하게 일어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나요?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날마다 상고하였다. 연구하고 묵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혜, 복음의 역사를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11절로 14절인데요. 하나님의 자기계시 앞에서, 특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윗이 결단하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11절은 말씀 앞에 선 다윗의 결단입니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므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우선은 말씀을 통해 경고를 받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분노를 산다는 것. 이런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사모하면, 그로부터 경계를 받아서 죄로부터 멀리하게 된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 곧 복이 있는 길. 행복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결단하면서 기도하냐면요? 하나님! 제가 말씀대로 순종하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 첫 번째 기도가 무엇이냐면요? 죄를 짓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것입니다. 12절은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비자범죄라고 하나요? 부지불식간이 짓는 죄가 없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고요. 13절은 고의로 죄를 짓지 않게 해주십시오. 자범죄, 혹은 고범죄입니다. 그 죄를 짓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다윗의 아주 겸손한 고백입니다. 예전에 선배 목사님들이 “죄에 대하여 자신하지 말아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나는 목사니까, 죄를 범하지 않아. 자신 있어.” 혹은 “나는 말씀에 철저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남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지 않아.” 그렇게 자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살다보니까 그 말씀이 참 지혜로운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도 모르게 욕심이 생길 때가 있고요. 분노하여서 사람을 미워할 때가 있고요. 내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싶을 때도 있고요. 그래서 죄에 대하여 자신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인간인 거에요. 다윗은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가장 평화의 시기에 정욕에 끌려서 바세바와 죄를 범하고, 그것을 감추려고 바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 자신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부지불식간이든, 아니면 고의로든, 죄를 범하지 않도록 저를 지켜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겸손한 기도로, 죄에서 멀리하는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두 번째 기도는요. 14절입니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합니다.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합니다. 다윗은 그 많은 말과 그 많은 생각이 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으실만한 말이 되고 생각이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저는 다윗의 이 기도를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다윗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인이었는지,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애쓴 사람이었는지 깊이 깨달았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루에 하는 말들 가운데 예쁘지 않은 말이 많아요. 저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그렇습니다. 쓸 데 없는 소리를 하는 때도 있고요. 남을 흉보는 말도 하고요. 남에게 상처 주는 말도 하고요. 그리고 생각으로는 더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남에게 드러나지를 않잖아요. 그러니까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 생각으로는 나쁜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어요. 겉으로는 괜찮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욕을 할 수도 있어요. 겉으로는 사랑한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미워할 수 있어요. 겉으로는 웃으면서, 생각으로는 기분 나빠할 수 있어요.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면서, 생각으로는 교만할 수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 다윗이 내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 생각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삶의 결단이 담긴 기도인지 몰라요.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이 다윗처럼 우리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말과 생각이 되도록, 애써 보시면 좋겠습니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애써보십시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한 주 되기 바랍니다.

기도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사는 인생 되게 하소서!

–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방법 | 시편 19편 1-14절 | 매일성경 말씀 묵상 큐티

제목: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방법

본문: 시편 19:1-14

<본문>

<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해설>

시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하늘의 천체가 낮과 밤을 이루며 질서 있게 움직이는 모습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낮은 낮에게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합니다. 낮과 밤이 서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합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세상 끝에 이르기까지 온 땅에 가득합니다(시 19:1-4a).

시인은 하나님이 손으로 만드신 하늘에 있는 태양을 보며 하나님의 솜씨를 찬양합니다. 시인은 밤에 태양이 뜨지 않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태양이 휴식할 장막을 치셨다고 표현합니다. 시인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신방에서 나와 환하게 웃는 신랑에 비유하고 서쪽을 향해 힘차게 움직이는 태양의 모습을 장사에 비유합니다. 하늘의 끝에서 끝으로 운행하는 태양의 열기를 누구도 피할 수가 없듯이 하나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시 19:4b-6).

창조 세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대해 노래합니다. 태양의 열기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 모든 사람은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으며 여호와의 율법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여호와의 율법에 순종하는 모든 백성들은 생명과 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여호와의 변치 않고 신실한 율법은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여호와의 한 증거는 우둔한 자가 어리석은 길로 가지 않도록 지혜를 줍니다. 여호와의 정직한 교훈은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여호와의 순결한 계명은 눈을 밝히셔서 가려진 진리를 분명하게 보게 하십니다. 인생이 가야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인 율법은 진실하고 모두 의롭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은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만한 가치가 있고 송이 꿀보다 더 우리를 만족스럽게 합니다(시 19:7-10).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의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던 시인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시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경고를 받아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돌이켜 율법에 순종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고 고의로 죄를 짓지 않게 하셔서 큰 죄과에서 벗어나고 죄가 자신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를 간구합니다(시 19:11-12).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시인이 의지할 신실한 반석이시며, 시인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구속자이십니다. 시인은 그의 마음의 묵상과 말로 올려드린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주시기를 소망합니다(시 19:14).

<메시지>

애굽이나 바벨론과 같은 고대의 제국들은 태양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늘을 경이로움을 느끼고 힘찬 태양의 움직임을 노래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고 돌이켜 바른 길을 걷게 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금과 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을 좇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고 우리에게 위협을 주는 두려운 것들을 섬기려는 충동을 느끼지만 유혹과 두려움을 뛰어넘어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영광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생명과 안식의 복을 풍성히 누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분명하고 풍성하게 깨닫게 합니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피해야 할 것과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분명할 수 있게 하며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백성으로 자라가게 합니다(딤후 3:14-17). 매일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의 유익을 누림으로 순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단 말씀의 가치를 더 풍성히 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펄전시편강해(시편19편)

시편 19편

[개 요]

주제-이 매혹적인 시가 언제 기록되었는가에 대해 특정한 시기를 규명하려는 것은 별 소득이 없는 일이다. 머리말에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기록되었다. 이 시는 다윗이 기록한 것이며, 성전에서 회중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찬양 책임자에게 맡겨졌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았으며 두 가지 위대한 책-자연과 성경-을 공부하는 데 전념했다. 그는 이 두 가지 책에 흠뻑 도취되어서 이 책들을 지으신 저자를 높이며 두 책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한다. 이처럼 신성한 두 책을 양 손에 한 권씩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순과 잘못된 점들을 전력을 다해서 찾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창조에 대한 과학적 탐구 내용은 결코 창세기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모세의 이야기와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자연’과 ‘말씀’을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책으로 알고서 진지하게 읽는 자들은 복이 있다.

구성-이 시는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6절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7-11절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

12-14절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한다.

이처럼 이 시에는 찬양과 기도가 혼합되어 있다. 피조물의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를 노래하는 자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은혜로운 일을 행하실 것을 기도한다.

[강 해]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의 책’은 3부-하늘, 땅, 바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들 중에서 하늘은 가장 영광스럽게 창조되었고, 이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는 다른 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어떤 책이든 첫번째 쪽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책’에서 특별히 첫번째 쪽에 나오는 해와 달과 별들은 자연계의 다른 모든 부분에 빛을 비추므로 자연의 핵심과도 같다. 이것들이 없다면 이 책의 다른 부분은 어둠에 싸여 그 내용을 분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람은 바로 서서 걷도록 창조되었는데, 이것은 하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해와 달과 별들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늘”은 복수형으로 쓰였다. 이것은 하늘이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하늘에 수천 수만 가지 형태의 구름이 있어 물기를 머금은 하늘이 있는가 하면, 부드럽고 온화한 바람과 폭풍이 이는 하늘도 있고, 밝은 대낮의 모든 영광이 담겨 있는 태양의 하늘이 있고, 밤에 여기 저기 별이 보석처럼 빛나는 별의 하늘이 있다. 시편 기자는 아직 하늘의 하늘에 대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늘과 하늘에 있는 구름과 해와 별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피조물의 세계에는 무한한 교훈이 담겨 있다. 그러나 특별히 하늘에 있는 피조물의 세계는 영적 교훈을 충만히 담고 있다.

“선포하고”라는 단어는 선포하는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말한다. 매순간 우리 위에 있는 하늘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능력, 지혜, 선하심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장엄하신 모습을 보고자 하는 자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상상하고 싶으면 끝이 없는 우주 저편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자 하는 자는 그 많은 별들이 자기 궤도를 지키며 질서 있게 달리는 모습을 보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고자 하는 자는 별들과 이 지구가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라.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과 위엄을 알고자 하면 만유인력의 힘과 별들의 크기와 하늘의 밝은 모습을 보라. 하늘은 단순히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하늘과 그곳에 있는 모든 별들을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조종하시는 창조주, 무한한 지성을 가지신 조물주가 계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없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증거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수긍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선포한다. 그리고 이 선포는 순간 순간마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영적 소경으로 보게 하지 못한다. 영적 소경으로 보게 하며, 영적 귀머거리로 듣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면, 저 은하계의 모든 태양들을 가지고도 소경으로 하여금 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궁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다. 이 궁창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들이 충만하다. 하나님의 손이란 가련한 피조물들의 필요를 채워 주고 돌보는 창조주의 영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깊이 헌신된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고귀한 생각들을 말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비유로 들어 표현해야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나는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말하는 것도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의 깃발을 휘날리시며 그곳에 왕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멸시하는가를 보여주신다. 하늘을 바라보고서도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이거나 거짓말쟁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선포하는 ‘자연의 책’을 공부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어떤 성도들은 과학과 계시가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하는 불신자들의 호언장담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참으로 지혜로운 자들은 말씀뿐만 아니라 자연의 계시 속에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열심히 여호와의 행하심을 찾는다. 자연을 정직하게 연구하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매코시(M’Cosh)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 세계에 대한 탐구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통탄할 일입니다. 이 둘은 가장 가까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인데도 마치 상충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말씀을 높이기 위해서 과학이 별 가치가 없는 것처럼 평가절하하는 행동은 개탄할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의 한 쪽을 높이기 위해 다른 한 쪽을 낮추는 것으로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과학과 종교는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무지와 편견과 악을 나타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연 계시와 말씀 계시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 둘은 모두 같은 건물에 속한 두 개의 다른 방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는 밖에 있는 뜰이라면 다른 하나는 안에 있는 뜰이라고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모든 사람이 바라보면서 놀라고 경탄하게 됩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가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찬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성소와 지성소로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둘 사이에 휘장이 있었으나, 이제는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인간이 탐구한 학문을 하나님께 분향으로 올린다면, 다른 쪽에는 피 묻은 속죄소가 있고 우리는 그 앞에서 화목된 자의 사랑을 하나님께 쏟아부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것은 마치 한 날이 못 다한 말을 다음날이 이어서 전하고, 한 밤이 그냥 넘겨 버린 놀라운 이야기를 다음 밤이 전해 주는 것과 같다. 원어의 의미에는 말을 쏟아붓거나 말이 넘쳐 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마치 낮과 밤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노래로 넘치는 샘과도 같은 것이다. 아, 하늘의 샘에서 마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낮과 밤을 죽이거나 침묵하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높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설교하며, 사람들의 판단에 놀라거나 편견을 품지도 않는다. 밤과 낮이 교차하는 것은 침묵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웅변이며, 빛과 어두움이 모두 보이지 않는 그분을 나타낸다.

우리 인생의 낮과 밤에도, 흥망과 성쇠를 반복하면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하자. 우리가 낮의 즐거움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처럼, 또한 ‘밤의 노래’를 주신 그분을 높이자. 우리 모든 인생들은 밤과 낮이 주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밤과 낮을 맞이하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날아가는 것처럼 짧은 시간, 세상에 속한 것들이 변화한다는 속성, 기쁨이나 슬픔이 덧없다는 것, 삶의 귀함,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우리의 무능함,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원. 낮은 우리에게 노동을 명하고, 밤은 우리의 본향을 생각하게 한다. 낮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라고 명하고, 밤은 그분 안에서 안식하라고 우리를 부른다. 낮은 영원한 낮을 바라보게 하고, 밤은 영원한 밤에서 벗어나라고 경고한다.

3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KJV에는 “들리는 소리가 없는 언어는 없으니”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누구나 별들이 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언어가 많으나, 하늘에는 오직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듣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장 야만적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핑계할 수 없다.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하나님을 선포하는 순회 설교자들이다. 이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자를 옳다고 인정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를 책망하는 설교자들이며 사도들이다.

난외에는 또 다른 해석이 나타나 있다:”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자연이 가르치는 소리는 사람의 귀에 대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귀로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림과 같은 말이며, 우리의 눈과 마음에 하는 말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자연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되신다. 그분은 모든 하늘이 합하여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신다. 하늘이란 결국 벙어리 교사에 불과한 것이다. 해와 별도 말씀이 될 수 없으나, 예수께서는 여호와의 형상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4절.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늘의 별들이 엄숙한 침묵 속에서 운행한다 해도, 이것을 묵상하며 바라보는 자들의 귀에 그들은 귀한 교훈을 전달한다. 그들이 들리는 소리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교훈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하늘과 하늘의 별들은 그들의 운행으로 말한다. 자연의 소리는 귀머거리와 벙어리의 언어와도 같다. 그러나 아들은 명백한 언어로 아버지를 나타낸다. 자연의 소리는 “온 땅”에 통한다.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자들은 하늘에서 선포하는 설교자의 교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오른편에서 별처럼 빛나는 사역자들이 전하는 말씀이라도 사람들은 피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잘못했을 때 그를 책망할 나단과 그에게 경고할 요나와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엘리야를 밤하늘에 조용히 빛나는 별들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영혼들에게 하늘의 별들은 더욱 힘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은 북두칠성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며, 밝은 오리온 별자리를 보고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하늘 한가운데서 해는 장막을 치고서, 그 영광스러운 길을 마치 힘있는 군왕처럼 행진한다. 그것은 한 곳에 거주하지 않는다. 마치 여행객이 두루마리처럼 쉽게 치고 또 거둘 수 있는 장막을 가지고 이동하듯이, 해도 그렇게 이동한다. 왕의 대형 천막이 군중들의 여러 천막 사이에 있듯이, 해도 여러 별들 중에서 마치 왕처럼 나타난다.

5절.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신랑은 화려한 복장을 입고서 밖으로 나온다. 그를 보는 모든 사람이 그의 얼굴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을 보게 된다. 떠오르는 태양은 바로 이와 같다.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경주에서 챔피언이 경쾌하게 자신의 트랙을 따라 달리기를 하듯이, 해는 지치지 않고 빠른 속도로 그 정해진 궤도를 달린다. 해에게 이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힘들여 경주를 한다거나 피곤하여 지치는 기색도 없다. 신랑과 같은 해처럼 이 땅에 기쁨을 주는 피조물은 없다.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말이나 독수리나 그 어떤 빠른 존재라도 하늘에서 달리는 경주의 챔피언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해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해의 찬란한 빛도 빛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빌려 온 빛으로 비치는 것이다.

너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아

너보다 위대하신 그분을 인정하라

네가 높은 곳에 올라 정오가 되고

네가 떨어져 석양이 되어도

그분께 찬양을 돌리라.

6절.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해는 한결같이 그 궤도를 달리면서 태양계에 속한 모든 피조물에게 그 빛을 비춘다.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해는 그 위에, 아래에, 주위에, 그 빛을 비추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지구의 내부에는 해가 고대로부터 비추어 온 열기를 담고 있으며, 아직도 땅 속 깊은 곳에서 그 힘을 느끼고 있다. 빛이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도, 열기나 다른 것으로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연계의 하늘과 은혜의 하늘 사이에는 분명히 유사한 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고귀하고 광대하게 은혜를 베푸시며,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 우리는 부지런히 이것을 탐구하고 하나님의 솜씨에 경탄해야 한다. 빛과 그림자는 모두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어느 정도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땅 끝까지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선포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모든 빛과 함께 사람 가운데 거하시며, 해처럼 계시의 중앙에 계신다. 그분은 교회의 신랑으로서 즐거워하시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다. 그분은 땅의 가장 먼 곳까지도 축복하시며 자비의 궤도를 달리신다. 아무리 타락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영혼들은 그분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온기와 축복을 받게 된다. 사망도 그분의 임재를 느끼고 성도들의 몸을 내어줄 것이며, 타락한 이 땅도 태초의 영광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7-9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여섯 가지 이름과 특성, 그리고 효과를 선포한다.

7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시편 기자는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교훈, 성경에서 전반적으로 가르치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교리가 온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일부분만 보았을 뿐이다. 만일 그 일부분이 온전하다면, 성경 전체는 얼마나 온전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모두 보여주는 이 성경이야말로 더욱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경에 계시된 복음은 온전한 것이다. 복음은 죄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는 은혜로운 구원이다. 은혜에는 무엇인가 빠져서 부족한 것이 없으며, 쓸데없이 남아도는 것도 없다. 복음은 그 부분 부분과 전체가 모두 온전하다. 복음에 무엇을 첨가한다는 것은 죄악이며, 이것을 변형한다는 것은 반역이며, 여기서 무엇을 뺀다는 것은 중죄에 해당한다.

“영혼을 소성케 하고.” 이것은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모습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실제적인 효과는 사람으로 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며,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외적인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영혼”이 감동을 받고 새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죄인으로 회개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에 더 가까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성공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에 가까이할수록 우리의 사역은 더욱 성공적으로 될 것이다. 영혼에 힘있게 전달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타락한 영혼을 철학이나 이성으로 고치려고 해 보라. 당신의 모든 노력이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에게 다가가면 곧 변화를 가져온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하나님은 죄를 대적하시고 의를 위해 증거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타락을 경고하시고, 회복하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를 증거하신다. 이 증거는 명백하고 단호하며 결코 잘못될 수 없어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는 너무도 확실하여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 말씀을 무엇으로 공격한다 해도 그 능력을 약하게 할 수는 없다. 이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확고히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우리는 흘러내리는 모래와 같은 사람의 억측과 공론을 버리고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를 의존해야 한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겸손하고 솔직한 마음,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혜를 얻어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에게 숨기신 것들을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 보이신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더욱 지혜로워지고, 말씀에 대해 트집을 잡고 거부하는 자들은 계속해서 어리석은 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 말씀 안에서 교훈을 받게 한다. 우리가 회심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진리의 능력을 체험했다면, 또한 그 확실한 것을 증거해 보여야 한다. 온전한 복음은 우리로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고, 또한 지속적으로 덕을 세우게 한다. 복음으로 교훈을 받은 자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심한다면 복음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진리만이 우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8절.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여호와의 계명이나 교훈은 의에 기초한 것이다. 의사가 올바른 약을 주고 상담가가 적절한 권고를 해 주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하다.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을 이루는지 그 진행 과정을 잘 살펴보라. 하나님께 돌아선 자는 지혜롭게 되고, 이 사람은 또한 행복하게 된다. 진리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 바른 마음에 즐거움을 준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는 은혜는 마음의 기쁨을 가져온다. 땅에 속한 기쁨은 입을 만족케 하고 온 몸의 힘을 빼앗아 가지만, 하늘의 즐거움은 속사람을 만족시키고 우리의 정신적, 영적 능력을 충만케 채운다. 성경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같은 진실된 위로는 세상에는 없다.

기쁨을 얻고 싶으면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라.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말씀에는 오류가 없다. 사람들의 어떤 죄악도 이 말씀을 오염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순수한 포도주와도 같다. “눈을 밝게 하도다.” 성경은, 훌륭한 안과 의사처럼, 슬픔과 죄로 어두워진 눈을 맑고 밝게 해 준다. 해를 바라보면 눈이 멀게 되지만, 계시의 햇빛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깨우침을 받는다. 눈의 깨끗함은 알프스 산맥을 오르는 자에게 설맹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깨끗함은 이와 정반대의 효과를 일으키며, 영혼의 어두움을 고친다. 여기서도 말씀이 하는 일의 진행을 주의해서 보라. 하나님께 돌아선 자는 제자가 되고, 나아가 영혼의 기쁨을 누리며, 그는 곧 분별하는 눈을 갖게 된다. 그는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자신은 누구의 판단도 받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분별한다.

9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진리의 도를 여기서는 그 영적 효과, 즉 내적 경건이나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씻어 내고, 마음을 성결케 하는 것을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사람의 영혼에 있는 모든 거리와 작은 길, 모든 집과 그 안에 있는 구석구석을 다 깨끗하게 하기까지는 만족하지 못한다.

“영원까지 이르고.” 더러움은 사람으로 부패하게 한다. 그러나 정결한 자는 타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때로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될 때도 있지만, 영원히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음에 쓰시면 그분은 빌라도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쓸 것을 썼노라”고 말씀하시며 스스로 쓰신 것을 취소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 종교 의식에 대한 계명도 그 영원한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이 세상 나라들이 혁명으로 흔들리고, 고대의 나라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고 그분의 율법은 변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여호와의 말씀은 모두 다 진실되다. 그 말씀은 부분 부분이 모두 선한 규례이며, 이 부분들이 합쳐진 말씀은 전체적으로 모두 훌륭하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두 공정하고, 이것을 변명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율법에 나타난 여호와의 심판, 그리고 역사가 증거하는 그분의 심판은 진리이다. 그분의 능력을 대적할 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분의 공의를 비난할 자도 없다.

10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성경의 진리는 영혼을 살찌게 한다. 시편 기자는 “금”, “정금,” 그리고 “많은 정금”이라고 하며 말씀의 귀중함을 나타내는 강도를 점진적으로 더해 갔다. 이것은 좋은 것이고, 더 좋은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이기에 수전노가 돈을 탐하는 것보다 더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 보물은 물질적 부(富)보다 더 고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열심히 이것들을 사모하고 추구해야 한다. 사람들은 순수한 금을 좋아한다. 그러나 순수한 진리처럼 순수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쾌락을 포기하고 안일한 삶도 포기하며 생명의 위험도 무릅쓴다.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얻기 위해 이보다 더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트랩은 이렇게 말했다:”나이 든 사람들은 돈을 추구하고, 젊은이들은 쾌락을 추구한다. 나이 든 사람을 위해서 여기에 금이 있다. 정금이 수없이 많다.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여기에 꿀도 있다. 벌집에서 뚝뚝 흘러 떨어지는 꿀이 있다.” 하나님의 증거를 바로 이해하는 데서 솟아 나는 쾌락은 진정 즐거운 것이다. 이 즐거움과 비교하면 이 세상에서 즐기는 쾌락은 한심하고 경멸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자는 가장 감미로운 즐거움을 누린다.

11절.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말씀은 우리의 의무, 우리가 처한 위험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치료책을 제시한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하나님의 폭풍 경보가 주의 깊은 자들에게 경고를 주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파선을 당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교사가 되어야 하고, 우리를 감독하는 감독자가 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죽음의 경고를 울리는 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비망록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양심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왜 이리 소수에 불과한 것인지! 오직 하나님의 종들만이 그분의 경고를 받아들인다. 그들만이 주인의 뜻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중에 즐거움을 누릴 뿐만 아니라 큰 보상을 받는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는 상이 따른다. 이 상은 큰 상이다. 우리는 은혜의 상을 얻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실패한 자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영광스럽게 승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양심의 평안을 누리는 것도 순종하는 자가 누리는 큰 축복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양심의 평안을 누리는 자는 진정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받을 상은 미래에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일을 다 마치고 생을 마감하게 될 때, 우리는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온전한 상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수고를 다 마친 다음에 받게 되는 것이다. 아, 우리는 미래에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이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이 세상에서 그 즐거움을 생각하며 고난 중에서도 참으로 기뻐한다. 우리가 지금 잠시 동안 당하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말씀에 헌신한다면,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을 누릴 때에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백하다. 아무도 자기 허물을 깨달을 자는 없다. 이 구절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탄식하는 말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그의 죄가 얼마나 많고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고 떠는 것이다. 말씀을 가장 잘 아는 자가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자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말씀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에 대해 놀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실수와 죄를 희극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선한 사람은 죄를 비극으로 생각한다. 많은 책들이 책의 마지막에 정오표를 몇 줄 붙여 놓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우리의 영적 상태를 보는 눈이 있다면 우리의 책에는 정오표가 큰 책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은 노년기에 그가 했던 말을 취소하고 철회하는 글들을 썼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우리가 했던 그 모든 잘못들을 고백하는 글을 쓴다면, 도서실을 이루게 될 만큼 많은 책이 될 것이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여호와여, 당신은 내 속에 비밀스럽게 감추어 둔 잘못도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 내 모든 허물과 잘못을 바라본다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오니 내 양심으로도 깨달을 수 없는 죄악들을 찾아 내시고 속죄하는 피로 깨끗하게 씻어 주소서. 우리는 우리 안에 비밀스럽게 숨어 있는 죄악을 심각하게 잡아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명적인 죄를 짓게 될 것이다. 이것들로 인해서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로마 교황이 있는 라테란 대성당에서 열린 회의에서, 참된 성도는 그의 죄를 일년에 한 차례씩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법령을 정했다. 그리고 이 법령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하면서,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사죄의 희망도 없다고 선포했다. 이처럼 어리석은 법령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손가락을 헤아리듯 우리 죄를 그처럼 쉽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우리가 한 시간 동안에 우리의 지은 죄를 단순히 고백하여 용서를 받고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고백할 수 있는 죄 외에도 수없이 많은 죄들이 있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악들이 우리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본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척 달리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하는 죄는 농부가 그의 창고에 모든 열매를 쌓아 두고서 견본만 시장으로 가져오는 것과 같다. 우리가 보고 감지할 수 있는 죄를 숨겨진 죄와 비교해 본다면,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13절.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이 진실되고 겸손한 기도는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억제하지 않으면 가장 악한 죄를 범할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가장 선한 사람에게도 죄의 성향은 있으며, 말을 자갈 물리듯이 성도들을 지키지 않으면 곧 죄를 범하게 된다. 고범죄는 특별히 위험한 죄이다. 모든 죄는 큰 죄이다. 그러나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더 큰 것도 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나, 어떤 죄는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이 그 얼굴을 덮고 있다. 모든 죄악이 우리를 정죄한다고 해서, 크고 작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모든 죄악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지만, 어떤 죄악은 다른 죄악보다 그 죄질이 더 나쁘고 배나 더 악독한 것들이 있다. 고범죄는 모든 죄악 중에서 가장 나쁘고 주된 죄악이다. 이 죄는 모든 악한 것들의 목록을 작성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죄악이다. 유대의 율법에서도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지만 고의로 범하는 이 고범죄는 용서를 받지 못했다:”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민 15:30, 31).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는 주님의 희생에 힘입어 고범죄도 사함을 받고, 이런 죄를 행한 죄인들도 정결함을 받는다. 그러나 고범죄에 대해 사함받지 못하고 죽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 배나 받고 악인들을 위해 파 놓은 구덩이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윗은 이 극악한 죄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그는 사함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생각으로 두려워하며 떨었다. 은밀한 죄는 곧 고범죄로 이어진다. 이 죄는 사망으로 이끄는 통로와 같다. 죄인은 죄를 지을 의도가 없어도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마귀가 자신을 유혹해 주기를 바라면서 죄 가운데 머무는 자는 마침내 최악의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14절.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기도는 감미롭고 영적인 기도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흔히 이 구절로 찬양을 드린다. “내 입의 말”은 마음의 묵상이 따르지 않는다면 조롱하는 말이 되고 만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러나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모두 열납되지 않는다면 이는 아무 소용도 없다. 또한 “주의 앞”에 열납되지 않는다면 사람들 앞에서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를 도우시는 힘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자이신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여호와를 “나의” 구속자로 보지 않는다면,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없고 기도의 방해를 받게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나의 구속자”로 고백하며 시를 마친다. 그분은 나의 가까운 친족이 되신다. 이 시는 하늘을 언급하면서 시작했으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분의 영광으로 끝을 맺는다. 찬송을 받으실 나의 친족, 나의 구속자시여! 이제 당신의 감미로운 사랑과 온유함을 묵상하여 당신 앞에 열납되게 하소서.

[주해와 설명들]

시 19편 전체. 이 시편에서 표현하고 있는 장엄한 광경은 양을 치는 목자가 자연을 바라보면서 묵상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목자는 찬란한 아침과 해가 높이 뜬 정오, 그리고 해가 지평선을 지나 하늘의 모든 영광을 거두어 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 점에서 이 시는 시 8편과 대조를 이룬다. 시 8편은 명백히 밤에 기록된 시이다. 이 두 편의 시는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두 편의 시를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이 두 편의 시는 모두 자연 현상을 바라보며 기록된 찬양의 노래들이다. -존 메이슨 굿(John Mason Good).

시 19편 전체. 플루타크(Plutarch)는 이 세상은 신학교와 같고, 그리스도는 성경이 말하듯이 그분의 행하심과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의사와 같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두 종류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일반인과 문외한들이 읽을 수 있는 책과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있었다. 다윗이 이곳에서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도 두 종류의 책을 가지고 계신다. 첫번째 책은 ‘피조물의 책’인데, 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책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라는 구절은 바로 이 책을 말하는 것이다(1-6절). 두번째 책은 성경을 말한다. 성경은 교회를 위한 책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7절)라는 구절은 바로 이 책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에 나타난 첫번째 책은 ‘목자들의 달력,’ 또는 ‘농부들의 철자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며,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편지와도 같다. 다윗은 이 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비록 하늘과 하늘에 있는 해와 해에서 나오는 빛이 말은 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내는 소리는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즉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한 분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능력이 많으시고 위엄이 있으시다는 것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오직 하나님을 증언할 뿐이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하늘도 이것을 선포하고, 궁창도 이것을 보여주며, 날이 이것을 말하고 밤도 이것을 증언하며, 천둥 소리도 이것을 선포하고, 바람도 세상 끝까지 이것을 전한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태양은 지구보다 166배나 크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가락은 이렇게 큰 태양을 움직이게 하시되 그렇게 긴 궤도를 그처럼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리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에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나게 하셨다. 어느 시인은 이것을 이렇게 감미롭게 노래했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느끼고, 코로는 그 냄새를 맡고

입술로는 맛을 본다네, 그분의 놀라운 덕을

번쩍이는 하늘, 규칙적인 우주의 운행에서

그분은 우리 눈에 자신을 보이시고,

우리 귀에 말씀하신다네.

이처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이것은 하늘이 그 놀라운 구조와 움직임, 그 영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하늘이 선포하는 것은 세 가지 면에서 놀랍다. (1) 하늘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쉬임없이 선포한다(2절). 한 날은 다른 날에게 전하고, 한 밤은 또 다른 밤에게 증거한다. (2) 자연이 사용하는 언어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다(3, 4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3) 이 선포는 세상 어느 곳에서나, 어떤 교구에서나 들리는 설교이다(4절).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자연은 부지런한 목사처럼 항상 설교를 하고, 학식 있는 목사처럼 모든 언어로 설교하며, 보편적인 목사처럼 어느 도시에서나 설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우주의 대학에서 다른 대학의 게으름뱅이들처럼 되지 말자. 그들은 성경의 본문을 주의해서 살피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성경에 대한 그림이나 예화, 그리고 표지만을 볼 뿐이다. 이 자연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입문서와도 같다. 그러나 그분은 교회를 위해서 또 다른 책을 준비하셨다.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 147:19, 20). 이방인들은 그분이 쓰신 입문서를 읽고,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읽는다. 입문서는 좋은 책이나 불완전하다. 사람이 입문서를 공부한 다음에는 다른 것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율법,” 즉 성경은 믿음이나 선한 행실에 대한 모든 교리를 포함하고 있는 정경이다. 이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돌이키고,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주며, 순수하고 의롭고 마음을 즐겁게 한다. -존 보이스(John Boys).

시 19편 전체.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시의 주된 목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천체의 운행에서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시편 기자는 1-7절에서 이 점에 대해 많이 기록하고 있다. 오스틴(Austin)은 크리소스톰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 그는 이 시가 전체적으로 그리스도를 주제로 삼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해의 탁월함과 아름다움에 비교되었고, 해가 궤도를 운행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리는 그분의 사도들이 전파했다고 말하면서, 바울의 말을 언급했다:”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롬 10:18). 또한 복음의 힘은 땅의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태양의 열기와 같아서 영혼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다고 했다. 이런 영해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크리소스톰의 문자적 해석도 잘못되지 않았다. 이 시편은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해 주는 두 가지 책이 있다. 첫번째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책’이다. 자연에 대한 지식으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피조물에도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타나 있다. 사도 바울도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이 나타나 있다고 했다:”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 특히 하늘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해 준다. 1절도 이것을 말한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영광을 보여주는 무대와도 같다. 또 다른 두번째 책은 ‘성경책’이다. 성경에 담긴 지식은 더욱 명백하고 확실하다. 자연을 통해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더듬어 찾지만, 성경은 크리스천들이 보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새롭고, 영적이고, 온전하고, 생기가 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며, 이 빛은 빛 되신 하나님을 아는 분명한 길이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7-12절에서 말씀에 찬사를 돌리고 말씀이 하는 일을 열거한다. 즉 말씀의 온전함, 확실함, 의로움, 순결함, 그리고 진실을 말한 후, 그 효과를 나열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깨닫게 하고, 교훈하고, 기쁘게 하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고, 사람을 경고하며 상을 주는 말씀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다윗이 그처럼 말씀에 찬사를 돌리는 것은 그가 말씀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씀을 체험하고서 이 말씀이 의롭고 거룩하고 순결하며 죄를 발견해 내는 것을 알았다. 이 말씀은 보이는 엄청난 죄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태양 광선이 집 안에서 날아다니는 미세한 먼지까지 찾아내는 것처럼 숨겨진 죄도 찾아낸다. 그래서 영혼 깊숙이 숨겨진 방에 있는 죄까지도 발견하는 것이다. -오바댜 세지윅(Obadiah Sedgwick).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고대의 성도들은 자연의 운행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으며, 그래서 자연을 관찰하는 데서 기쁨을 누렸다. 그들은 사랑하고 경배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신 일들을 발견하는 데서 기쁨을 누렸던 것이다. 그들은 창조주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의 운행 법칙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미 만들어진 우주의 운행에는 별로 간섭할 일이 없으며, 우주 저 밖에 계셔서 그저 가만히 쉬며 행복을 느끼실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교회에도 팽배해 있으며,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대의 유능한 철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이란 하나님께서 일정하게 행하시는 법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자연이 운행하는 것은 자연 법칙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간섭하시고, 자연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하나님의 손을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비록 현대의 철학자들이 이런 결론에 도달했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크리스천들까지도 자연은 자연 법칙을 따라 운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어두움 가운데서 헤매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처음에 자연 법칙을 만드셨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 자연 법칙이 실행되도록 하나님께서 지금도 직접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임재와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성도들은 현대인들과는 전혀 달리 생각했다. 시편 기자가 하늘을 바라볼 때면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그는 온 땅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이기지 못한 심정으로 이렇게 외친 것이다:”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기이하나이다. 주께서는 지혜로 이 모든 것을 지으셨나이다. 땅은 당신의 부요함으로 충만하나이다.” 그가 바라보기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취로 가득했다. 그가 바라보는 언덕, 그리고 언덕과 언덕 사이를 흐르는 골짜기들, 골짜기를 흐르는 물,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들이었다. 천둥과 폭풍이 치면, 그들은 이것이 하늘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로 들었고, 번개가 치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비추시는 것으로 이해했다. 화산의 폭발과 연기가 나는 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이 땅을 보시는 동안 땅이 떨고, 그분이 산을 만지자 연기를 내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에드워드 히치콕(Edward Hitchcock, D.D., LL.D., 1867).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적 능력을 주셨다. 사람은 이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우주에 펼쳐 놓으신 그분의 작품을 연구한다. 그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근거로 하늘을 측량한다. 그는 자신의 신장과 비교하여 이 지구가 얼마나 큰 것인지 측정하고, 이 지구가 운행하는 체제와 지구의 크기를 연구하고, 지구와 가장 가까운 별과의 거리를 측정한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또 다시 다른 별과의 거리를 측정한다. 그러나 사람이 연구해야 할 우주는 무한하다. 전능하신 분이 만드신 이 우주가 얼마나 장엄한 것인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우리 주위에는 피조물의 세계가 모든 방면에 무한히 펼쳐져 있는 듯하다. 우주 어느 곳이나 원의 중심으로 잡을 수는 있으나 원주의 끝이 어디에 이를 것인지는 아무도 정할 수가 없을 만큼 무한하다. 우주가 어떠한 것인지 감히 헤아려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무한한 우주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말씀으로 무에서 창조된 것이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감히 생각해 볼 수도 없다. 창조주 하나님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그것들이 존재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 9).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신 그 능력은 얼마나 위대한가. 이 우주와 비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늘과 거기 있는 달과 별들을 바라보고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느껴 보라. 그분은 진정 위대하신 분이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탕플 슈발리에(Temple Chevallier, The Hulsean Lectures for, 1827).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나는 가끔 밤하늘을 보면서 그 아름다움과 위엄에 매료되곤 한다. 드높은 하늘, 순수한 남빛 고운 색깔로 물든 하늘, 수없이 많은 등불과 같은 별로 치장된 밤하늘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노라면 난 마술에 걸린 듯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세상의 헛된 것들에 얽매여 살다가 좀더 고상한 것을 추구하며 살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느끼곤 했다. 침묵하는 우주 공간이 나에게 비천한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기쁨을 추구하며 살라는 명령을 전하는 것만 같다. 이제부터는 하늘에서 전해 주는 이 도덕적 영향력을 더 풍성하게 받아들여야겠다. 나는 이 별들이 빛을 발하여 자연 세계의 어두움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나를 가르쳐서 나의 지적 어두움을 쫓아낼 것으로 믿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별들이 그저 밤길에 빛을 비춰 주는 횃불과 같고 밤의 두려움을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게,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 이 별들은 지혜로운 상담가들이요 행복으로 이끄는 인도자들이다. 이 별들이 나를 인도하여 그들이 찬양하는 조물주를 알게 한다면, 은빛 나는 빛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는 길을 비춰 준다면, 그들은 진정 지혜로운 상담가이며 나를 인도하는 안내자들이다. -제임스 허비(1713-1758).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사람이 지하에서 예술품과 기계 장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를 다시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하늘과 땅, 그리고 거기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이 이것들을 만들었다고 즉시 선포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거기 있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은 온전하시고, 전지하신 분이며, 어느 곳에나 계셔서 능력으로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는 태양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잘못된 견해는 사라지고, 진실된 것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마련이다. 이런 까닭에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도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키케로(Cicero).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발견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피조물이라도, 그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를 발견하고 찬양하게 된다. 공중에 달린 유리 상자 안에 있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듯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비와 풍성함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준다. 이 세상은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지만,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 준다. -앤소니 버제스(Anthony Burgess, 1656).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택함을 받은 자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라고 부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그 내면에 성령의 계시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고서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프랑스 혁명 기간 중에 혁명가였던 앙드레(Andre)는 농부에게 이렇게 말했다:”너희들이 다니는 교회의 첨탑들을 모두 끌어내리고 말겠다. 이렇게 하면 너희들이 섬기는 미신을 더 이상 추억하지 않겠지.” 그러자 농부가 이렇게 말했다:”하지만 별들을 끌어내릴 수는 없을 걸요.” -존 베이트(John Bate, Cyclopaedia of Moral and Religious Truths, 1865).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지붕처럼 덮은 원형의 하늘

춤추는 듯한 광활한 언덕

이 모든 것을 주의 명령으로 지으셨다니!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것을 모를 수 있는가?

침묵하려는 자, 침묵할 수 있는 자는 침묵하라

그러나 나는 감동어린 말로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내 입술이 군중 가운데서는 당신을 잊는다 해도

당신이 지은 곳

당신의 영광이 있는 곳

이 광야에서는 당신을 잊을 수 없나이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1850).

1절.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빛나는 별

내 깊은 명상의 귀로 그들을 듣는다네

한밤중에도

그분을 찬양하는 별의 노래 소리를 듣는다네

그분이 조용히 고개를 흔들어도

폭풍이 그분의 진노를 전한다네

천둥은 그분의 소리

붉은 섬광은 그분의 공의로운 검이라네

그분이 만지면 산들이 불타네

그분은 땅을 진동케 하고 나라들을 흔드네

이것뿐이 아니라네

세상의 지극히 작은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다네.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

1절.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것들은 당신의 영광스런 작품입니다

선하신 아버지, 전능하신 분

당신의 우주가 이처럼 장엄하고 아름다운데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우십니까!

하늘 위에 계시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당신의 피조물에 희미하게 나타나시고

이것들은 당신의 선하심과 신적 능력을

선포하나이다.

-존 밀턴.

1, 2절. 독자들이 시 19편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여기 1-2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았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으며’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고 있도다’

날은 날에게 말이 ‘샘솟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숨쉬네’.

이 번역은 네 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날이 날에게 쏟아붓는 하나님의 교훈이 샘솟듯 흘러 넘치는 것과 조용한 밤에 들리는 속삭임이 대조되어 있다. -헨리 크레이크(Henry Craik, 1860).

1-4절. 이 땅에 있는 모든 설교자들이 침묵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위에 있는 하늘은 쉬지 않고 그분의 위엄과 영광을 끊임없이 선포할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설교하는 자들이다. 끊기지 않은 사슬처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날에서 날로, 밤에서 밤으로 연속된다. 하나가 메시지를 전하면, 다음이 이어서 또 다시 이것을 선포한다. 한 날이 다른 날이 했던 것처럼 똑같은 장관을 연출하고, 한 밤이 다른 밤이 펼쳤던 경이로움을 다시 펼치는 것이다. 하늘의 태양이 그 영광의 절정에 이르고 다른 모든 자연 세계가 침묵할 때에도, 거룩한 침묵은 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는 그 자체가 웅변이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톨룩.

1-4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만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면, 그 영광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관찰해야 할 것이다. 하늘은 날마다 우리에게 선포한다:”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설교가들이다. 그들은 전 세계에 있으며, 자연의 사도들이다. 그들은 온 세계에 하나님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다. 그들에게서 좋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특별히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이 구절에서 인용했다(롬 10:18). 복음은 태양처럼 그 온기와 빛을 이 세상에 비추는 것이다. 다윗은 “그 줄이 온 땅에 나가고”(4절, KJV직역)라고 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 줄은 조용하지만 명백히 하나님의 재주와 온전함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한 글자나 단어는 줄로 그려진 것이기에, 이 구절에서는 줄이 단어나 문장을 만들고 우리는 이것을 읽으며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줄”이란 길이를 측정하는 줄도 될 수 있고, 글이 쓰여진 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줄”이라고 해석한 히브리어는 “카왐”(!wq)이다. “카”(wq)는 “줄”이며, “카왐”은 “그들의 줄”이라는 뜻이다. “줄”은 현악기에 사용되기에, “카왐”을 “그들의 노래”라고 해석하여 “그 노래가 온 땅에 통하고”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역자 주.) 그러나 70인역에서는 이 구절을 “그 소리”라고 해석했다. 이것은 히브리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거나, 뒤에 나오는 구절-“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과 비슷한 뜻을 갖도록 하기 위한 해석이다. -조셉 캐릴.

1-4절. 해가 그 빛으로 모든 세상을 은혜롭게 위로하듯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도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는 그들이 감사함으로 은혜를 받고, 불순종하여 은혜를 거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로버트 코드레이.

2절. “날은 날에게.” 다음에 나오는 구절-“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은 무슨 뜻인가? 날은 다른 날에게 말한다는 것은 다른 날을 가르친다는 말이다.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날들은 새로운 것을 가르친다. 날은 배우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밤은 묵상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오늘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다음날에 배울 수 있고, 하루 밤에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 밤에 이해할 수 있다. -존 보이스.

2절. “날은 날에게.” 밤과 낮이 규칙적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해 준다. 하늘은 아무런 중단 없이 계속해서 부지런히 운행하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선포한다. -존 리처드슨(John Richardson).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말하고”는 풍성하게 뿜어 낸다는 말이다. “전하니”란 아무런 의혹도 없이 명백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욥 36:2). 복음의 빛이 온전히 비치는 낮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고난의 밤이 되면 지식을 얻고서 아침에 찾아오는 기쁨을 알게 된다. -윌슨.

2절. “지식을 전하니.” 자연계가 교훈하는 내용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지적, 영적 역량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다. 이것은 영국의 위대한 화가의 이야기로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 위해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귀부인이 그 그림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그러나 투너 씨, 당신이 여기에 묘사한 것을 나는 자연에서는 볼 수 없는 걸요.” 그러자 화가는 이렇게 말했다:”아, 부인, 자연에서 이런 것들을 보고 싶지 않으세요?” -C. H. S.(Charles Haddon Spurgeon의 약자임)

3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석양의 모습은 내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장엄한 모습이었다. 모든 땅이 적막감에 싸이고, 사람의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수면 위에는 잔물결도 하나 없었다. 나뭇잎 하나, 풀잎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고, 저편에 있는 바위는 태양의 저녁놀을 반사하고 있었고, 이것은 또한 짧은 석양빛이 비치는 동안 강물에 반사되었다. 나는 이런 광경을 이전에 결코 보지 못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적막함 가운데서, 그리고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계곡의 평온함 속에서도 이 모습은 천둥 소리처럼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으며, 주위에 있는 장엄한 모습, 하늘과 궁창에서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그분의 놀라운 작품은 그분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었고, 내가 서 있는 그 땅이 참으로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다. -존 개즈비(John Gadsby).

4절.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KJV에는 “그 줄이 온 땅에 나가고”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바울은 로마서에서 시편의 이 구절을 인용했다:”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롬 10:18). 그렇다면 왜 “줄”이 “소리”로 바뀌게 되었는가? 무슨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대답으로 구약에서 증거를 찾는 것과 구약을 언급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겠다. 때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믿도록 그들이 전하는 것에 대해 구약에서 증거를 제시해야만 했다. 구약에서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응하게 하려 함이다”라는 투로 구약을 인용하며 증거를 제시할 때가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시편을 인용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경우이다. 그는 로마 사람들에게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는 것을 말하면서, 다윗이 하늘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했던 구절을 언급할 뿐이다. 해와 달과 별들은 빛을 비출 뿐만 아니라 지구 구석 구석까지 비춘다. 바울도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복음 전파와 잘 어울리도록 율법의 제한을 나타내는 “줄” 대신에 “소리”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복음 전파가 전 세계에 퍼지는 것을 나타내는 데는 자연 가운데서 하늘과 거기 있는 해가 가장 적합하다. 해가 비치지 않는 나라는 어느 곳에도 없다. 이처럼 진리의 말씀이 비치지 않은 곳은 아무 곳도 없다. -윌리엄 스트리트(William Streat, The Dividing of the Hoof, 1654).

4절.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1,100년 전에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Venantius Fortunatus)는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바다의 파도를 헤쳐 나갔다네

항구가 있는 섬이면 어느 곳이나

영국의 만까지

아일랜드의 얼어붙은 항구까지.

-존 크래그(John Cragge, 1557).

6절.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다.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열을 받는다. 그 열기는 전도 작용을 통해서 일부가 땅 속으로 들어간다. 또한 대류 작용을 통해서 일부가 대기로 들어가 공기를 따뜻하게 한다. 또 다른 일부는 지구 표면으로부터 반사되어 나간다. 한편 대기는 가스와 증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이 열기를 식히고 햇빛에 그을리지 않게 한다. 이처럼 태양열이 대기를 통과하면서 해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지구 위에 있는 것이나 대기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태양의 온기에서 숨을 수 없다······어떤 동물의 몸은 태양열로 몸의 색깔이 변하기도 한다······사람의 몸에 있는 열기를 잠복성 열기, 또는 유동성 열기라고 하는데, 이는 열기가 고체를 액체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열은 외적 억제 요인이 없다면 가스를 팽창하게 한다. 어떤 가스에 극한 압력을 가하여 지극히 차가운 액체로 만든다. 액체를 담은 용기에 열을 가하면, 이 용기가 더 이상 가스를 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분출하게 된다. 그 예로 물이 끓는 것을 들 수 있다. 어느 액체든지 이처럼 끓는점을 넘어서게 되면 액체가 기체로 변한다. 이러한 예들은 이 지구상에 있는 어떤 것도 태양의 온기에서 숨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에드윈 시드니(Edwin Sidney, A.M., Conversations on the Bible and Science, 1866).

6절.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그리스도의 빛에서 숨은 자는 아무도 없다. 그분이 산의 정상에서만 비추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이 부활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빛을 보지 못했으나 선지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그분은 산 위뿐만 아니라 골짜기에도 빛을 비추신다. 그래서 최소한 우리 나라에서는 어두운 죄의 동굴에서 은신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빛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장막에서 단지 빛만 비추시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분의 빛에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분의 온기에서 피할 자도 없다. 그분은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진리를 보고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녹이셔서 진리를 사랑하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시고 이 열매를 성숙하게 하신다. 그분은 땅에 기는 가장 작은 나무에서부터 가장 높은 나무까지도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전능하신 능력으로 땅에 속한 선물을 모든 사람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모든 것을 치유하시는 능력으로 하늘의 선물을 주시고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분은 하늘로 올라가시면 성령을 보내시고, 하늘의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며, 제자들의 마음에 들어가 거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고, 그들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하늘의 빛들이다. 그리고 이 열기에서 피하여 숨을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열기는 아무리 굳은 마음이라도 녹일 수 있다. 아무리 사악한 자라도 정결케 될 것이다. -줄리어스 찰스 헤어(Julius Charles Hare, M.A., 1841).

7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타락한 사람에게는 율법이란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을 결박하여 사망에 넘기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나 복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고 했다. 그러므로 율법도 피조물에게 구원의 말씀인 듯하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율법이란 ‘행위의 언약’이라고 부르는 말씀의 일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 생명과 구원의 언약에 대한 모든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2). 율법은 죄와 죽음의 법칙이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과 의의 사역을 이룬다. 율법과 복음이 함께 역사하여 영혼을 구원한다. 약을 처방할 때, 한 가지 약만을 섭취하면 독약이 될 것도, 다른 여러 가지 요소와 함께 처방하여 섭취하면 훌륭한 약이 되는 것이 있다. 이처럼 율법이란 복음과 함께 있어서 죄인을 깨우고 놀라게 하며, 그의 의무를 알리고, 그의 죄와 임박한 심판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열게 하고 이끌어 주는 것은 복음인 것이다.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7절. “율법.” 율법이란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는데, 이는 교리나 교훈, 또는 이것들을 질서 있게 배열해 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윗의 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인간의 규례”(삼하 7:19)라고 했다. 헬라어로는 율법을 “노모스”(히 8:10)라고 한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말이며(신 32:4; 말 4:4; 요 1:17; 7:19), 모세의 글을 모두 지칭하는 데에도 이 단어를 쓴다. 창세기의 역사도 율법이라고 했다(갈 4:21, 22; 창 16장). 율법을 시편과 선지서로부터 구분하기도 하지만(눅 16:16; 24:24), 선지자의 글을 율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고전 14:21; 사 28:11), 시편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요 10:24; 15:25; 시 82:6; 35:19). 한 편의 시를 “법”이라고 했으며(시 78:1), 모세의 제물에 대한 율법을 속죄제의 “규례”라고 했다(레 6:25). 어떤 종류의 교훈에 대해서도 “법”이란 용어를 써서 행위의 법 또는 믿음의 법이라고 했다(롬 3:27). -헨리 에인즈워스.

7절. “영혼을 소성케 하고.” 율법은 사람의 감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소성케 하고”라는 말의 히브리 원어는 영혼이 대적으로 인해 낙심되었을 때에 영혼을 새롭게 하고 위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율법은 음식처럼 지친 자를 새롭게 하고, 낙심한 자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윌리엄 월포드(William Walford, 1837).

7절. “영혼을 소성케 하고.” 사람의 마음이란 자유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돌이나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을 때에 이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의 자유 의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 전능자의 손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말씀으로 이 일을 한다. 말씀으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죄를 책망하고, 이 마음을 깨뜨리고, 마음에 소원을 품게 하며,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사람들의 자유 의지를 이끈다.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Clemens Alexandrinus)는 오르페우스(Orpheus)와 암피온(Amphion)의 우화-황홀한 음악으로 새와 짐승과 돌까지 이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말씀의 힘은 더욱 큰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아폴로가 살았다는 헬리콘 산으로 시온 산이 되게 하고, 진리를 거역하던 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돌들을 명하여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누스는 돌을 믿는 이방인들을 돌이라고 했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경박하고 헛된 것을 추구하는 야수, 간교한 뱀, 잔혹한 사자, 탐욕스러운 돼지 같은 마음을 길들여 사람의 마음을 갖게 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성전을 짓는 산 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말씀은 진정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음이 분명하다. -존 스토턴(John Stoughton, Choice Sermons, 1640).

7절.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바울은 에베소서 1:8에서 사람을 지혜롭게 하여 회심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는 표현이나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영혼이 소성케 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은 지혜가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혜가 당신의 머리 속으로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일들이 자꾸 일어난다. 머리로만 지혜를 얻게 되면 결국 어리석은 자로 끝나게 되지만,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그는 지혜를 사랑하게 되고, 그가 지혜를 사랑하게 되면 그 영혼이 소성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여시고 지혜가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면, 어리석은 자가 지혜롭게 된다. -토머스 굿윈.

7, 8절.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의 계명은 사물이나 사건의 성질을 드러나게 하고, 눈이 제 역할을 하게 한다. -리처드 스톡(Richard Stock).

7-9절. 이 세 구절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기록인데, 각 절은 ’10계명’의 수를 따라 열 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쓰여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구절들을 “10단어”라고 부른다. -헨리 에인즈워스.

7-11절. 우리는 본질상 모두 진노를 받을 자식들이다. 우리 영혼은 수많은 병든 자와 눈먼 자들이 거하고 있는 베데스다의 행각과도 같다(요 5장). 성경은 베데스다의 연못과도 같아서, 성령께서 물을 동하게 하실 때에 거기에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을 가지고 있든지 그 안에서 온전하게 고침을 받는다. 광기어린 분을 내며 사자처럼 화를 이기지 못하는 자들도 이 못에 들어가면 양처럼 온순해진다. 절제하지 못하여 소경과 같은 사람도 이 못에 들어가 눈을 씻으면 자신의 어리석음을 곧 보게 된다. 질투의 상처, 냉담의 문둥병, 사치의 전신 마비를 가진 자라도 이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약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질병을 다스리는 만병 통치약과도 같다. 마음이 무거운 자가 있는가?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있는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무지한 자가 있는가?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도 실족하지 않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한다. 다니엘, 디모데, 이들은 나이가 어렸으나 실족하지 않고 담대히 섰다. 또 어린아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는 지혜롭다. 이 세상에서 유명한 철학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해도 어리석은 자로 남아 있게 된다(롬 1:22).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시 119:99)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타락한 성품으로 어떤 존재가 되었든지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를 소성케 하고, 우리로 새 입술로 말하고 새 노래를 여호와께 돌리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고후 5:17). -존 보이스.

8절. “여호와의 교훈.” 많은 비평학자들, 특히 카스텔리오(Castelio)는 이 시에 나오는 율법, 증거, 교훈, 계명, 경외, 규례라는 단어의 독특한 의미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토라”(hrwt, 율법)는 말씀의 계명에 해당한다. “에두트”(twd[, 증거)는 교리적인 부분으로 제한이 되었다. “피쿠딤”(!ydwqp, 교훈)은 책임과 관계된 부분으로 간주했다. “미츠와”(hwxm, 계명)는 하나님의 율법과 교리에 대한 일반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이르아”(hary, 경외)는 종교적인 경외심과 두려움을 가리킨다. “미쉬파팀”(!yfpvm, 규례)은 모세의 율법에서 사회법에 관계되는 것, 특히 사법적 구속력에 대한 것이다. -존 모리슨.

8절.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성도들이 성경은 읽지 않고 세상의 다른 책들을 읽는 것을 보면 얼마나 밉살스러운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일뿐만 아니라 주일에도 어리석은 연애 소설이나 꾸며낸 역사나 음탕한 시를 읽으면서 그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는지! 이 거룩한 성경에서만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데도 세속적인 책을 읽고 즐거워한다니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아! 이런 세속적인 글에서 당신이 찾는 기쁨은 당신의 색욕을 자극하고 악한 생각을 품게 하는 간악한 것이다. 잘해야 이런 것들은 공상이나 하도록 하는 헛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성경은 다윗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롭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것보다 플루타크의 도덕서나 세네카의 편지를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방인들이 기록한 이 도덕책에 귀한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경보다 훨씬 더 못한 것들이다. 이런 책들은 외형적인 문제에 대해 위로를 제시하지만, 내적 두려움을 치유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책들을 읽고서 마음을 기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양심을 평안케 할 수는 없다. 이런 책들은 잠시 기쁨을 줄 수는 있어도 영혼으로 견고하고 확실한 위로를 받게 할 수는 없다. 당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어떤 책이 귀한 것인가를 판단할 귀를 가지고 있다면, 아론의 종이나 다윗의 하프, 여호수아의 나팔, 사도들의 풍금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페트루스 다미아누스(Petrus Damianus)와 함께 이방 변사들과 철학자들과 시인들이 지은 책들은 이전에는 즐거웠지만, 성경이 주는 위로와 비교할 때 이제는 흥미가 없고 눈에 거슬린다고 고백할 것이다. -나다나엘 하디(Nathanael Hardy, D.D., 1618-1670).

10절.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주여, 나로 성경을 가장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크리소스톰은 성경을 정원에, 그리고 성경에 담긴 진리를 정원에 있는 향기로운 꽃에 비교하면서, 이 꽃은 우리 옷에 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달아야 하는 꽃이라고 했다. 다윗은 이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유하게 되는 길(신 28:5; 잠 3:10)과 장수하는 길(시 34:12)과 하늘 나라에 가는 길(히 12:28)을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가장 감미로운 시간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토머스 왓슨.

10절.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송이꿀이란 벌집에 담긴 꿀을 말한다-역자 주.) 사람이 벌집에서 채집한 꿀이나 벌집에 그대로 담겨 있는 꿀이나 그 당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홀(Halle) 박사가 바르바리에 살고 있는 무어 사람들의 식생활에 대해 쓴 글에 의하면, 그들은 아침 식사로 꿀이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특별히 아직도 어린 벌들이 그대로 들어 있는 벌집에 있는 우유빛이 나는 꿀을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시편 기자가 꿀과 송이꿀을 구분해서 표현한 것은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에 맞는 표현이다. -사무엘 버더(Samuel Burder, A.M., Oriental Customs, 1812).

11절.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어떤 유대인이 루터를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한 성실한 친구가 루터에게 그 사람의 초상화를 보내며 경계할 것을 알려 주었다. 루터는 이 초상화를 보고서 그 살인자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이 당신의 평화를 빼앗고 당신의 영혼을 독살하려고 사용하는 욕정의 얼굴을 보여주며 경계한다. -보즈(G. S. Bowes, B.A., Illustrative Gatherings for Preachers and Teachers, 1860).

11절.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이를 지킴으로”라는 표현은 온 주의를 기울여 이것들을 알고 기억하고 지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이다. 그리고 “상,” 즉 보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윌슨.

11절.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누리는 그 기쁨, 안식, 위로, 만족, 웃음이 그토록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어서 수천의 세계와 바꾸라고 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땅에서 받는 선물이 이처럼 감미롭고 영광스러운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어려움 가운데서 행한 그 모든 수고와 헌신을 보상해 주시고 면류관을 씌워 주실 때 그 영광은 얼마나 크겠는가? 광야에서도 받는 상이 이처럼 크다면, 낙원에서 받는 상은 얼마나 크겠는가! -토머스 브룩스(Thomas Brooks).

11절.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모든 꽃에 향기가 있듯이, 모든 선한 행동도 영혼의 향기를 발한다. 카르단(Cardan)이 말했듯이 모든 귀한 돌은 나름대로 탁월한 가치가 있듯이, 사람들이 의롭게 사는 것에 별 가치를 두지 않지만, 의로운 삶이 받을 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의로움으로 받게 될 가장 큰 상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도착해서 받을 것이다. 여기에서 “상”이라고 번역된 말은 “끝”을 말하며, 이것은 일의 ‘끝’이나 그 ‘상’을 말한다. 이것은 마지막이 되기 전에는 얻지 못한다. -존 트랩.

11절. “상이 크니이다.” 상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의 수고에 대한 상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경건한 자가 공의롭지 못하게 박해를 받았듯이, 경건치 못한 자들이 공의로 심판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우리가 받을 상은 우리의 선행으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선행으로 우리는 상을 받게 될 것이고, 이 상은 풍성한 상이 될 것이다. 가장 선한 사람이라도(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무익한 종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요구할 것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요구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이 보상은 앞으로 그들이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네가 왜 상을 받았느냐?”라고 묻기보다는 “네가 왜 상을 받지 못했느냐?”라고 내게 물으시며 풍성하게 보상해 주시는 것이 내게 더 좋을 것이다. -랠프 베닝(Ralph Venning, 1620-1673).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의 책과 말씀의 책을 조감한 다음에 세번째 책, 즉 양심의 책을 조감하기 시작한다. 악한 사람들은 이 책을 덮어 두고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세상이 다 보는 가운데 재판장 앞에서 이 책이 열리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양심의 책에서 무엇을 발견하시는가? 그분은 더럽고 얼룩진 책을 보고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라고 물으신다. 양심의 책에 새겨진 글은 여기 저기 휘갈겨 쓰여진 것으로 “비밀스런 죄”의 목록이 적혀 있는 것이다. 이것들 위에는 또 “고범죄”가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양심의 책 외에도 다른 증거들이 있다. 죄인의 양심은 지은 죄로 인해서 죄책감에 허덕이는데,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죄인은 그가 율법을 범했다는 것을 안다. 그가 비록 현재에는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전 11:9; 이 말은 전도자가 청년에게 역설적으로 하는 말이다)는 말을 따라 행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9, 이 말도 전도자가 자신의 체험을 따라 그에게 하는 말이다)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처럼 양심이 죄를 깨닫게 되면, 경건한 영혼들은 다윗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 용서를 구하게 된다:”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범죄”를 짓지 않게 되기를 간구하고, 만일 이런 죄를 짓고 있다면 그 죄의 “주장”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아담 리틀턴(Adam Littleton).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물었다. 아무도 깨달을 자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베르나르(Bernard)와 함께 이렇게 생각하라:”나도 나를 알고 하나님도 나를 아신다. 나는 나를 일부분만 알 뿐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온전히 아신다.” 당신이 날마다 회개한다고 해도, 바울이 덧붙여 하는 말을 기억하라:”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상태이다. 오직 무한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만이 이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다윗과 함께 이렇게 간구해야 한다:”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리처드 스톡.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어느 누구도 자기 허물의 넓이와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이 질문에서 두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1) 인정, (2) 고백. 그는 사람의 삶이 허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성경도 또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이라고 고백하며 이것을 인정한다.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시 119:176). 또한 이스라엘 집에도 잃은 양이 있다(마 10:6). 나는 특별히 우리의 감각이나 이해, 양심, 판단, 의지, 애정, 소망, 행동,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들면서 우리에게 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겠다. 인간은 전인적으로 그 속성이 뿌리부터 잘못된 나무와 같아서 벌레 먹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전인적으로 조율이 되지 않은 악기와 같아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뿐이다. 우리가 그 허물들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한다 해도, 분명 허물은 허다할 것이다. -로버트 애벗(Robert Abbot, 1646).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사람이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아버지께 고백해야 하고, 지은 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 내용을 전부 신부에게 고백해야 죄 사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교리가 있다. 다윗은 깨달을 자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더욱 고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다윗은 그의 죄악이 많다고 탄식했다:”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 38:4). 아! 이 교리를 따른다면 아무도 온전히 회개할 자가 없다.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죄를 마음 아파하며 그에 대한 보상을 하고 죄를 고백한다고 해도 온전할 수가 없다. 자기의 죄를 모두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죄를 고백하고 보상을 하는 것은 아픈 눈에 소금을 붓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확신한다면, 그들은 이것을 무례하고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간주한다. 아, 고해성사라는 것은 정말 가증스러운 일이다. -존 브래드퍼드(John Bradford, 1510-1555).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허물”이란 자신이 의도하지 않고 별생각 없이 저지른 실수를 말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사람들이 뻔히 알면서 짓는 죄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것은 명백한 죄이다. 이런 죄를 사람들은 범죄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짓거나, 알았다고 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짓는 죄가 있다. 이런 죄를 지을 때는 사람들이 전혀 의식이 없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죄를 지은 다음에 자신이 행한 것을 돌아본다 해도 역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지은 죄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비극이기도 하다.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도 비극이고, 이 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역시 비극이다. 만일 우리가 지은 죄를 다 기억하고 일일이 고백한다면, 우리는 수치와 슬픔으로 마음이 상할 것이고, 또한 우리의 무한한 실수와 죄를 모두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에 감사와 경배를 드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받는 위로이다. 우리가 지은 죄를 일일이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양심의 책을 들여다보면서 지은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 슬퍼하고 참회한다면,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돌아선다면, 우리보다도 우리의 죄를 더 잘 아시고 우리 마음의 진정한 의도와 성향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 비록 다윗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라고 했고, 예레미야도 “만물보다 거짓 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라고 했지만, 우리는 더욱 하늘의 빛을 받고서 우리의 죄를 발견해 나가야겠다. 여호와께서는 이처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다. 우리가 지은 죄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죄들을 더 많이 깨닫는 것이 올바른 일이고 또한 우리에게도 더 유익한 것이다. 당신이 은혜를 받게 되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당신의 죄들을 기억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을 것이다. 당신의 영혼에 은혜가 넘칠수록 더욱 많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죄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새로운 죄가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전에는 죄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죄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와 병을 환자에게 알게 하듯이, 해가 비치면 방안에 있는 먼지를 발견하게 되듯이, 말씀의 빛이 비치면 사람의 죄와 타락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오바댜 세지윅.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자신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의 머리에 있는 머리털의 수와 하늘에 있는 별의 수를 헤아릴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수학 공식으로 계산을 해도, 우리의 죄를 헤아릴 수는 없다. 우리가 천 가지 죄를 헤아리는 동안, 만 가지 죄를 더 저지를 것이다. 이 죄는 날마다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승법으로 더해 간다. 이것을 헤아릴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다. 마치 히드라(헤라클레스가 죽였다는 괴물로서 머리 하나를 자르면 거기서 두 개의 머리가 나온다는 괴물-역자 주)의 머리처럼, 우리가 참회하며 스무 개의 죄를 잘라 버리면 거기서 백 가지 죄가 자라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한한 죄에 대해서 무한한 슬픔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토머스 애덤즈.

12절.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거룩한 사람은 공공연한 죄뿐만 아니라 개인적이고 사적인 죄에서도 씻음받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탄식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축복받은 사도여, 무엇이 당신을 붙잡고 괴롭게 한다는 말인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흠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빌 3:6)? 당신은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행 24:16)? 이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니 무슨 일인가?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성도들이여,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죄는 밖의 죄가 아니라 집 안의 죄이며, 내면의 죄다. 이 죄는 바울이 다른 사람을 향해 짓는 죄가 아니라 바울이 바울 자신을 향해 짓는 죄이다. 이것은 바울의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우는 것이다(롬 7:23). 바로 이 싸움이 바울로 하여금 이렇게 부르짖게 했던 것이다. 리브가는 외국인의 땅에 살면서 외부로부터 오는 불편으로 불안해 하거나 평온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집 안에 있는 문제로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에서가 데려온 헷 족속의 딸로 인해서 그녀는 피곤하고 지쳤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 안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런 죄악이 바울에게 문제의 근원이 되었고,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외치게 되었다. 이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이제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고했다(엡 4:22, 23). 바울은 사람의 외부에 존재하는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면에 숨어 잠재하고 있는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진실된 성도들은 대문 앞만 청소할 것이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방 구석 구석을 쓸고 청소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바는 우리가 밖에 드러난 죄만 깨끗이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숨어 있고 내면의 기질에 담겨 있는 비밀스런 죄들을 깨끗이 씻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이다. -오바댜 세지윅.

12절.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라. 사람이 자기 등뒤에 검은 점이 있으면서도 모르고 지내듯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죄를 가지고 있다. 여호와여, 나를 숨은 허물에서 깨끗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가 아는 문제도 있지 아니한가? 병이 걸렸을 때에 때로는 자연 치유가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의 숨은 허물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 영혼이 병들었다는 것을 우리 마음이 외치고, 우리의 양심이 우리 죄를 보여주기도 한다. 때로는 양약과도 같은 거룩한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발람처럼 볼 수 있으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바로처럼 보려고 하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자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다윗처럼 볼 수도 있고 보려고도 한다······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가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하는 죄가 많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허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죄를 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죄를 아는 자는 참된 고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머스 애덤즈.

12절.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여호와의 율법은 너무도 거룩하여 숨은 허물까지도 사함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 구절은 종교 개혁자들이 고해성사를 주장하는 로마 천주교의 오류를 주장할 때 인용했던 주요 구절이다.) -바르트(T. C. Barth, Bible Manual, 1865).

12절. “숨은 허물.” 다음과 같은 경우의 죄를 “숨은” 죄라고 말할 수 있다. (1) 죄에 색깔을 칠하여 죄가 위장이 되어 있을 때-이 죄가 덕의 허울을 쓰고 나타날 때. 키프리안(Cyprian)은 도나투스(Dona- tus)에게 보내는 두번째 서신에서 이 죄를 다루고 있다. (2) 죄가 세상의 무대에서 숨겨져 있을 때. 이 죄는 굴뚝 속에 있는 불과도 같다. 이것을 사람들이 볼 수는 없지만, 불은 타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서에서 보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스럽게 가증한 짓을 행한다. 그들은 죄악된 사람들이고, 또 사악한 방법으로 죄를 범한다. 그들과 다른 죄인들의 차이는 열린 책과 닫힌 책의 차이와도 같다. 열린 책은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있는 글을 읽을 수 있고, 닫힌 책은 읽을 수 없다. 그러나 닫힌 책 안에는 열린 책과 똑같은 글이 들어 있는 것이다. (3) 사람의 눈으로 이 죄를 볼 수 없을 때. 죄를 짓는 사람들도 자신의 눈으로 이 죄를 보지 못한다. 양심의 눈으로 보면 보이겠지만,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런 말과 행동을 볼 수는 없다. 형제들이여, 사람들이 짓는 죄를 모두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위험한 죄는 영혼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이것이 사람들로 타락하게 하는 뿌리가 된다. 사람의 마음은 악한 것이다. 그가 입으로 할 수 없는 말을 마음으로 말하고, 손으로 행할 수 없는 일들을 마음에서 행한다. 그러므로 죄란 “숨은” 죄이며, 오직 하나님과 양심만이 이것들을 목도할 수 있다. 죄는 초롱 안에 있는 불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 불은 먼저 초롱 안을 비추고, 이어서 창을 통해 빛이 밖으로 나가게 된다. 죄는 또한 종양과도 같다. 이것은 먼저 피부 내부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는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다. 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것은 악성 종양이나 나병과도 같다. 이것들은 먼저 마음속에서 비밀스럽게 활동하다가 마침내 밖으로 뛰쳐나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속의 죄가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은 자궁 안에 아이가 생겼다가 죽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 아이가 사람의 모든 지체를 다 가졌듯이, 마음속에 숨겨진 죄가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어도 분명히 죄다. -오바댜 세지윅.

12절. “숨은 허물.” “숨은 죄”는 알려지고 공개된 죄보다 더욱 위험한 것이다. 마치 속에 상처를 입고 내출혈을 일으킨 사람처럼, 위험이 밖으로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죄가 밖으로 드러난다면 그를 도울 사역자가 있고 친구가 있고 그를 경계하고 인도할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즐기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그가 내면에는 “숨은 죄”를 품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덕스럽고 거룩하게 포장한다면, 그의 영혼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비밀스럽게 죄를 지으면서 그 영혼이 썩어 가는 것이다. 그가 마음으로 죄악된 생각을 하고 방탕하게 군다면 영혼의 힘을 소진하고 타락해 가는 것이다. 비밀스런 유희로 타락의 불을 피우는 것과 같다. 군중이 어깨 동무를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넘어지면 두세 사람이 함께 넘어지는 것처럼, 사람이 그의 마음으로 비밀스런 죄를 짓는다면 이것은 타락의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아서 죄악된 행동을 반복하고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사악한 행동은 죄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더욱 사악하게 하여 더 많은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죄의 근원은 더욱 교활하게 기승을 부리고, 그 결과 이 사람은 더욱 타락하게 된다. 사람이 마음으로 한 가지 죄를 짓도록 허용하면, 다음 죄를 짓게 된다. 악마의 유혹을 따라 한 번 죄를 짓게 되면, 이 마음은 다음에는 스스로 두 가지 죄를 범한다. 사람은 “숨겨진 죄”로 그의 마음에 있는 위선을 거룩한 것처럼 포장한다. 이렇게 해서 더욱 위선자가 되어 가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변명하는 데 기교가 늘어갈수록 그는 더욱 완전한 위선자가 되어 간다. -오바댜 세지윅.

12절. “숨은 허물.” 숨겨야 할 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하라. 후드(Hood) 씨가 지은 시(The Dream of Eugene Aram)는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점을 잘 나타내 준다. 아람 사람이 어떤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를 강에 버렸다. 그 강물은 잉크처럼 검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으며,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던 그곳으로 갔다.

검은 물, 저주받은 연못

나는 불안에 시달리며 광기어린 눈길을 던졌다

수면에 떠오르는 죽은 자의 모습

강물은 이미 말라 있었다.

그는 나뭇잎을 모아서 시체를 덮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면서 그 비밀스런 모습을 태양 아래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울기 시작했다

내가 숨기고자 하는 그 비밀을

땅이 숨겨 주기를 거부하는 것을 알았다

땅과 바다 어느 곳이나

수천 길 깊은 곳에 묻어 버린다 해도.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 자신의 운명을 슬프게 예언했다. 그는 시체를 동굴로 끌고 가서 돌무더기로 쌓아 두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고 그의 악행이 드러나고, 마침내 살인자는 죽음을 당했다.

죄의식이란 그의 손가락이 핏빛으로 물들지 않은 때에도 찾아온다. 숨겨진 죄는 눈을 충혈시키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며, 그 양심으로 녹초가 되어 마침내 구덩이에 던져지게 만든다. 위선의 게임이란 정말 어려운 놀이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놀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은 마침내 파산을 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비참하다. 아!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짓는 자들아, 네 죄가 너를 찾아 나설 것임을 기억하라. 이제 곧 네 모든 죄가 드러날 것이다. 꿈 속에서라도 사람들이 네 죄를 이야기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의 양심을 괴롭게 하여 마침내 스스로 진실을 고백하게 하실 것이다. 숨어 죄를 짓는 자들아! 이 땅에 임할 저주를 미리 맛보고 싶다면 비밀스런 죄를 지속해서 지어라. 숨어 죄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노력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 배고픈 사냥개의 추적을 받는 수사슴이 자신이 지은 죄의 추적을 받는 자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이런 자는 자신의 주위에 거짓의 거미줄을 치고, 날마다 이 거미줄을 더 강하고 더 두텁게 하여 자신을 조이는 것과도 같다. 이런 사람보다는 그물에 걸려서 빠져 나가려고 애써 날개짓을 하는 새가 더 행복하다. 아! 숨겨진 죄악의 비극이여!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스펄전(“Spurgeon’s Sermons,” No. 116., “Secret Sins”).

12절. “숨은 허물.” “쉬가가”(hggv)는 실수로 저지른 죄를 말한다. 이 죄는 다윗이 이 구절에서 말하는 죄와 같다:”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여기서 “허물”은 “쉬기오트”(twygv)라고 한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 죄는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죄는 그가 행할 당시에 죄라고 생각지는 않았으나 죄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가 의도적으로 행한 일이지만, 그 일을 행할 당시에는 죄라고 느끼지 않은 것이다. 죄는 이처럼 사람을 속이기 쉽다. 우리는 정말 혐오스러운 죄를 범하면서도 이것을 행할 당시에는 전혀 죄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양심이 민감하지 못하여 짓는 죄를 말한다. 굳은 마음, 타락한 성품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때에도 인자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알지 못하는 중에 지은 죄를 위해서도 속죄 제물을 바치게 하셨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분의 자비하심이 여기서도 나타난다:”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히 5:2). 구약의 장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휘장을 흔들며 모세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바로 그분의 목소리다:”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레 4:2).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 -앤드류 보나(Andrew A. Bonar, Commentary on Leviticus).

12절.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것이 바리새인의 경건과 참된 경건의 차이다. 바리새인은 외모를 보고 내면을 살피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은 세리를 책망하면서, 자신에게서는 책망할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참으로 경건한 자는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고, 그의 마음 구석 구석과 마음의 상태를 살핀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했다:”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나다나엘 하디.

12절.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사람들은 타락하여 사탄의 공격에 취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사탄이 우리에게 화살을 던질 때마다 우리는 그 공격에 상처를 입는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면 마치 기름통에 불을 던지는 것과도 같이, 우리의 마음은 조그만 불꽃이 튀어도 불이 붙는 지경이 되었다. 물이 아구까지 가득 찬 통처럼, 조금만 흔들어도 물이 쏟아진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진실하다면, 마귀가 우리를 유혹한다 해도 우리의 마음 문을 강제로 열고 쳐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 우리는 스스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못한다. 우리 내부에는 사탄과 동조하는 존재가 있어서, 사탄이 문을 두드리면 곧 문을 열어 주고 그를 영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유혹에도 넘어가 크게 타락하고 만다. 마치 새 술이 가득한 통처럼, 조금만 흔들려도 술이 거품을 내고 쏟아지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지극히 작은 유혹에도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타락한 심성이 발동하고 끓어올라서 우리의 행하는 것과 말하는 것에 불결한 오물들을 쏟아 내는 것이다. -에스겔 홉킨스(Ezekiel Hopkins).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경건한 사람이라도 죄를 지으면서 그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지 않고 그가 행한 길을 편견 없이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죄가 깊이 숨어 있을 때에 이것을 찾느라고 조심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숨어 있는 죄를 찾아낼 것을 명한다. 우리의 마음속에 허물과 욕정이 숨어 있지 않다면 왜 이런 명령을 주셨겠는가? 경건한 자들이 자신의 숨은 죄를 발견했다면, 더욱 아무런 편견 없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시간을 두고서 자신을 점검해 보고 근신해야 한다. 그저 가볍게 지나칠 것이 아니라 진정 열심을 다해서 마치 도적을 찾듯이 찾아내야 한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듯이, 마음속의 어두운 곳들을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처럼 자신을 살펴보고 판단하며, 자신을 키질하고 체로 걸러 내야만 겨가 무엇이고 알곡이 무엇인지, 그리고 쓸데없는 것이 무엇이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앤소니 버제스.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죄는 성장하고 진행하는 속성이 있다. 죄는 약한 죄에서 의도적인 죄로 발전하고, 무지한 중에 죄를 범하다가 뻔뻔스럽게 죄를 짓게 된다. 이것이 죄의 일반적인 진행이다. 엘리야가 보았던 구름은 처음에는 손바닥만 했을 뿐이며, 폭풍을 동반하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 구름은 하늘을 모두 덮어 버렸다. 죄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혼에서 일어나는 죄는 처음에는 작은 안개와도 같아서 거의 분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 이 안개를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마침내 이 안개가 우리의 삶을 덮어 버릴 것이고, 폭풍처럼 노도처럼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죄의 속임수를 잘 알았기에 철저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기도한다. 처음에는 숨어 있는 죄와 작은 죄에서 시작하여 더 엄청나고 지독한 죄를 대항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엄청난 죄도 작은 죄에서 시작하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렇게 철저히 기도하는 것이 고범죄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에스겔 홉킨스.

12, 13절. “숨은 허물······고범죄.” 약점과 고범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경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 천주교도들은 치명적인 죄를 지은 자들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작은 죄라 할지라도 자신이 범한 죄를 모두 다 기억하고 고백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은 중한 죄와 경한 죄를 명백히 구분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양심을 여기에 얽매이게 해서는 안 된다. 중한 죄와 경한 죄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중한 죄가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한 죄를 저지르고서도 다만 자신의 약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죄를 고의로 짓고서도 자신이 약하여 죄를 지었다고 하며 알랑거리고 우쭐대는 자들은 어찌되었든지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지옥으로 갈 것이다.

죄를 행하면서도 그것을 용납하거나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바울은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롬 7:15)고 했다. 죄를 허용하지 않는 자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를 미워하고 저항하면서도 죄를 지을 수가 있다.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 사람이 한번 회심한 다음에는 엄청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엄청난 죄란 고범죄를 말한다. 그래서 다윗은 고범죄에서 씻어 달라고 하지 않고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라고 했다. 그의 기도대로 우리는 고범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그렇다는 말이다. (2) 고범죄보다 좀 약한 죄로는 “숨은 허물”이 있다. 이것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죄는 매일, 또는 거의 매시간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죄에서 씻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매일 용서를 받으라. 하나님은 숨은 허물을 가진 자를 용서해 주신다. 이 허물이 양심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 허물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직 못된 것이다. (3) 우리가 고범죄를 지으면, 그 죄가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그래서 다윗은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13절)라고 했다. 다윗은 이 구절에 이어서 곧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고범죄를 짓지 않고, 그 죄의 주장을 받지 않으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 -리처드 캐플(Richard Capel).

12, 13절. 시편 기자는 죄의 힘과 능력을 알았다. 그는 죄가 그를 주장하는 것에 지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죄의 다스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리고 그의 안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어서 그가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는 그가 이것들을 알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이러한 죄로부터 깨끗해질 것을 간구했다. 여호와께서는 이전에는 죄를 사랑하던 죄인의 마음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죄를 미워하게 할 수 있으시다. 그리고 사람이 죄를 미워하게 되면 죄는 그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죄는 날마다 그 힘이 더욱 약해진다. -나다니엘 빈센트(Nathaniel Vincent, 1695).

13절.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는 “고범죄”에서 온전히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서 만일 그의 마음이 악하여 이렇게 될 수가 없다면, 그 죄가 그를 철저하게 다스리지 못하도록 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토머스 맨턴.

13절.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악한 자에게는 십자가요, 선한 사람에게는 기쁜 일이다. 죄가 손을 내밀면 악한 자들은 여기에 응하여 죄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죄가 손을 내밀 때 의인은 그 손을 하늘로 향한다. 그의 마음이 죄에 끌리는 것을 느낄 때면 그는 “아, 주의 종을 지키소서”라고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막으실 때는, 사랑하는 친구나 연인을 만나지 못하도록 그를 지키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선한 사람을 죄에서 지키실 때는, 그가 미워하는 원수들, 그를 파멸시키고자 하는 원수들에게서 지키시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직도 그의 마음을 통제해야 하실 만큼, 그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재갈먹이시고, 그 결과 그가 죄를 즐기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오바댜 세지윅.

13절.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으로 지켜 주시지 않는다면 그 영혼과 몸이 모두 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우리의 기도나 선한 행위가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다. 우리가 깨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신다. 다윗은 이 세상에서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다:”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7:8, 9).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존해 주실 것을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그리고 그분의 보호를 받으면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해서 ‘눈동자를 보호하심’으로 비유했다. 그는 또한 영적인 보호를 받고자 기도했다. 다윗이 하나님의 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면 마치 야생마처럼 난폭하게 달리며 고범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의 신체에서 특별한 부분을 지켜 주실 것을 기도한다:”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그는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입술과 입을 지켜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보다 더 우리의 마음과 의지와 애정을 지켜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이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제 마음대로 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들이다. -앤소니 버제스.

13절. “주의 종.” 다윗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불렀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오, 하나님이여,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제 당신께 순종하기로 마음을 정했나이다. 나 자신을 주께 드리나이다. 이제 나의 원수들,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원수들을 대항하도록 나를 도우소서. 오, 나의 주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나 자신으로는 스스로를 붙들 수가 없나이다. 당신만이 나의 필요를 채우시나이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분과 가까운 관계에 있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인은 낯선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자녀는 하인보다, 그리고 아내는 자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고,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는 사람일수록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바댜 세지윅.

13절. “고범죄.” 유대교는 모든 죄를 부지중에 지은 죄와 고의로 범한 죄로 구분했다. -벤자민 케니코트(Benjamin Kennicott, D.D., 1718-1783).

13절. “고범죄.” 사람이 죄를 짓다가 거기서 기쁨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자 다시 새로운 죄를 짓고, 이렇게 해서 악한 행동을 반복하고 탐닉하면 마침내 습관이 되고 제2의 천성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그가 행하는 것은 무엇이나 슬픈 일이 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 죄가 당신에게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당신으로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해서 죄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거듭하여 악에 악을 범하게 한다. 이 죄는 사람으로 모든 관심을 죄를 향하도록 하고, 마침내 그의 명예나 운명이나 몸이나 영혼까지 희생하여 죄를 섬길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하여 이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소진하고 영원까지 상실하여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한다. 이것이 죄의 다스림이다. 이렇게 되면 죄는 더욱 악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성도들도 이런 일을 반복하면 지옥 가까운 곳으로 끌려가 하늘 나라에 가는 길에 큰 장애가 된다. -아담 리틀턴.

13절. “고범죄.” 죄를 세 가지로, 즉 알지 못하여 지은 죄, 연약하여 지은 죄, 그리고 고의로 지은 죄로 나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무심코 지은 죄를 네번째 부류로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네번째 부류의 죄를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네번째 죄는 앞의 세 가지 중 하나로 쉽게 분류될 수 있다. 사람이 지은 죄를 어떤 부류로 분류하느냐 하는 근거는 그 사람의 영혼에 달려 있다. 이 영혼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것들은 지적인 이해, 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감각적인 욕망이나 정욕이다. 이러한 기능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분류하기 위해서는 이 죄를 지을 때 어떤 기능이 가장 중요하게 활동하였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이 죄를 분류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첫째, 만일 우리의 지적 이해가 잘못된 것이라면, 이 죄는 연약함이나 의지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겠지만 주로 부지중에 지은 죄로 생각할 수 있다. 둘째, 만일 우리의 욕망에 문제가 있었다면, 우리의 두려움이나 분노, 혹은 욕망이나 기쁨 등이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눈을 어둡게 하고 타락하게 하여 죄를 짓게 한다. 이 죄는 연약함으로 지은 죄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우리의 의지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온전한 지식을 가져서 지적 이해에 문제가 없고, 또 갑작스런 욕망으로 눈이 멀거나 분별력을 잃지 않았는데도 죄를 지었다면 이는 의지의 문제이다. 이런 사람은 악을 행할 의지를 가졌고, 이처럼 자신의 의지로부터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짓는 죄에 무지함이나 연약함이 조금은 섞여 있겠지만, 이런 죄는 고의로 짓는 고범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종류의 죄에 대해서 풍부한 예화가 담겨 있다. 각각의 죄에 대해서 한 가지만 설명을 하겠다. 다윗과 베드로와 바울의 예를 들어 보자. 바울이 지은 죄는 심각한 죄이다. 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고, 그리스도와 교회를 핍박했다. 그의 죄는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고 심각한 죄이다. 그러나 그의 죄는 무지에서 일어난 죄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했다. 그의 죄는 연약함으로 일어난 죄이다. 다윗의 살인죄는 다른 두 사람의 죄보다 더 악한 죄이다. 왜냐하면 그의 죄는 고범죄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회심하기 전, 그가 사울이었을 때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되 그의 전력을 다해서 핍박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했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 사람들을 끌어내어 감옥에 가두되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았고, 먼 곳까지 공문서를 들고 가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을 핍박했다. 그는 분노 가운데 주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살육했다. 그가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향해 증오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다만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이었다. 그가 영적으로 소경이 아니었더라면, 이처럼 말씀에 열심을 품는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었다. 그의 의지가 자신의 판단과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예수의 이름을 대적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었더라면, 그가 이처럼 자신의 의지를 따라 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이해’였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를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사기꾼인 줄 알았고, 기독교는 사탄이 일으킨 사교이며, 모세와 율법에 불명예스러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기독교의 뿌리를 뽑아 버리고자 했다. 그의 판단이 옳은 것이었더라면, 그가 한 행동은 칭찬할 만했다. 그가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율법을 향한 그의 열심이 도리어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이해’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죄는 무지로 인한 죄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도 이것을 고백했다:”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은 이런 죄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이 누구신 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주님과 오랫동안 함께 지냈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너무나도 확신을 했기에 자신이 주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자신의 의무는 무엇인가에 대해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죄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또한 그의 잘못은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가 비록 맹세하고 저주하며 그리스도를 부인했지만, 그가 이것을 고의로 계획을 세워서 한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행한 것이었다. 또한 자신의 입술로 그분을 부인한 후에도 그의 마음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가 주님을 부인하자 닭이 울었고, 이때 자신이 했던 일을 크게 슬퍼하며 울었다. 그가 고집스런 의지로 주님을 부인했다고 볼 수가 없다. 또한 그가 욕망을 따라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아, 그러나 그는 실족했다. 그의 주님이 사람들의 멸시를 받을 때에 갑작스럽게 두려움이 몰려왔다. 주님이 받는 고초를 보면서 그 자신도 그렇게 고초를 겪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떤 이성적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당면한 위험을 어떻게 피하느냐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다. 그때에 이렇게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 죄인지, 죄가 아닌지 따져 볼 겨를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은 ‘연약함’에서 기인한 죄였다.

그러나 다윗이 지은 죄는 이와 달랐다. 우리야의 죽음을 꾀한 것은 베드로나 바울의 죄와는 그 색깔이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도 이방인이 아니었고, 그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야가 결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처럼 무죄한 사람의 피를 의도적으로 흘리는 것은 가장 큰 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죄는 무지에서 연유한 죄가 결코 아니다. 이 죄는 또한 연약함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다. 그는 욕정을 이기지 못해서 밧세바와의 부정을 저질렀지만, 극한 분노에서 우리야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서 생각했고, 차갑고 냉정한 마음으로 신중하게 생각하여 완벽한 방법을 찾아서 그를 죽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일을 완수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결심하고 이 일을 했다. 그러므로 다윗의 죄는 고범죄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 샌더슨(Robert Sanderson, 주교, 1587-1662).

13절. “고범죄.”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로 “고범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실 것을 간구했다. 이 죄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나타나는 죄이다. 이 죄는 마음의 깨달음에 역행하는 패역한 의지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패역한 의지는 주도면밀하게, 의도적으로, 열정적으로 양심의 소리나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을 무시한다. 이러한 죄는 그분의 계명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이며, 순결하신 그분의 심판을 자초하는 죄이다. -알렉산더 크루덴(Alexander Cruden).

13절.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언덕 위의 돌이 구르면 아래로 떨어지듯이, 유혹을 받은 영혼이 구르면 죄를 짓게 된다. 처음에 이것을 막기는 어렵지 않으나, 일단 구르기 시작하면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 멈추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솔터(H. G. Salter).

13절. “큰 죄과.” 모든 죄를 주의 깊게 관찰하라. 그러나 다른 무슨 죄보다도 성령님을 거스르는 죄를 주의하라. 이러한 죄는 바로 위선인데, 이것은 종교 생활에서도 사람의 겉모습만을 중요시하고 자신을 꾸미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죄이다. 또한 자신의 양심이나 빛이나 지식을 거슬러 고의적으로 교만하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러한 죄는 성령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매우 유사한 죄이다. 그러므로 이 죄가 당신을 유혹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라. -로버트 러셀(Robert Russel, 1705).

13절.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어떤 작은 죄라도 이 죄를 용납하면 마침내 죄인을 이기고 그를 주장하게 된다. 결국에는 이런 죄를 범하는 것이 오랜 습관이 되어 그 멍에를 쉽게 벗어 버릴 수 없고, 자신을 폭군과 같은 죄에서 구속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욕쟁이나 주정뱅이에게서 익히 보아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런 죄악들도 처음에는 조금씩 자라서 마침내 사람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마음의 보좌를 차지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죄는 사람을 완전히 장악하기까지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고범죄는 영혼의 상태에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온다. 단 한 번의 고범죄가 그 영혼을 쇠약하게 하고, 육체의 소욕을 맹렬히 추구하게 하여 그를 완전히 주장하게 할 수도 있다. -로버트 샌더슨.

13절.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고범죄를 짓는다는 것은 가장 교만한 짓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먼저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다음에,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라고 기도했다. “고범죄”란 자신의 지식에 반하는 죄를 말한다.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큰 죄과”란 결코 사함받을 수 없는 죄를 말한다. 이러한 범죄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마음속의 빛과 악의가 그 요소들이다. 빛은 없고 악의만 가지고서는 이런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 -토머스 굿윈.

13절.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예수의 피로 평안을 누리는 행복한 영혼들은 성령의 은혜로 보존되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고 그들이 타락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안다. 그래서 죄가 추하다는 것을 과소 평가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죄를 씻기 위해 흘리신 피의 무한한 가치를 평가 절하하지 않기 위해서 죄를 가볍게 치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죄를 짓지 않았으며 완전한 자라고 스스로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의 영이 그들을 이런 잘못으로부터 구출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치셔서 구세주를 바라보게 하시고, 자신의 무모한 혈기나 억제할 수 없는 욕정과 마음속에 있는 죄스러운 색욕에서 지켜 주실 것을 기도하게 하신다. 아무리 신앙이 깊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성자라 해도 그들을 혼자 내버려둔다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고범죄”가 그들을 “주장”하게 된다. 다윗도 잠시 동안 이런 슬픈 일을 체험했다. 그는 과거에 겪었던 그 비참한 체험을 생각하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기도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언약을 따라 약속된 축복이 있다:”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윌리엄 메이슨(William Mason, A Spiritual Treasury for the Children of God, 1719-1791).

14절.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은 다윗의 기도이다. 다윗은 그가 하는 말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원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하는 행동이 사람에게 칭찬을 듣는다고 해도 만족할 수 없었다. -조셉 캐릴.

14절. “내 입의 말.”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실족할 수 있으며, 정직한 성도라도 약하여 쓰러질 수 있다. 그러나 약한 성도라 할지라도 마음의 선함과 신실함이 있다면 이 구절로 자신의 기도를 대신할 수 있다. 이 기도는 위선자나 교활하게 속이는 자는 결코 할 수 없는 기도이다. -토머스 셜록(Thomas Sherlock, 주교, 1676-1761).

14절.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금식하며 기도하리이다. 내 영혼, 배고프고 목마른 내 영혼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을 위해 내 육체를 위한 음식을 금하리이까?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말씀에서 떡과 생명의 물을 얻었나이다. 내 영혼이 이 말씀에서 이것들을 얻었나이다. 그러나 당신이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이렇게 하는 것도 모두 무익한 일입니다. 오, 여호와여, 나를 축복하소서. 내 육체와 영혼이 모두 당신의 것이오니, 이 모두를 축복하소서. 이 모든 것을 주께 드리나이다. 내 육체를 주께 드리나이다. 내 혀로는 당신에 대한 것을 말하리이다. 내 영혼도 주께 드리나이다. 내 마음으로 당신을 묵상하리이다. 당신은 나를 지으실 때에 영혼과 육체를 합해 놓으셨으니, 나도 내 영혼과 육체로 당신을 섬기리이다. 여호와여, 이것들이 합하여 당신에게 죄를 지은 것같이, 또한 당신을 섬기는 데에도 함께 합하리이다. 내 혀도 준비가 되었고, 내 마음도 준비가 되었나이다. 내가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께 말하리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내 말이 무엇이며, 내 생각이 무엇이나이까? 당신은 사람의 생각을 아시나이다. 이 모든 생각은 헛된 것이며, 우리가 하는 말도 이런 생각을 겉으로 표현한 것이오니, 둘 다 모두 악한 것이니이다. 내 마음은 타락한 샘이요, 내 혀는 부정한 시내니이다. 이것을 주께 예물로 드리리이까? 저는 것, 눈먼 것, 이런 것들은 여호와께 가증한 제물입니다. 이처럼 부정한 것을 어찌 주께 드리리이까? 그러나 여호와여, 내가 드리는 예물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나이다. 비틀거리는 말, 헤매는 생각들, 이것들은 주께 드릴 만한 가치가 없나이다. 그러할진대 어찌 악한 생각과 헛된 말을 주께 드리리이까? 그러나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이 이것들입니다. 나를 치료할 수 있나이까? 나를 치료할 자가 있다면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 내가 이제 당신께 간구하나이다. 여호와여, 당신만이 내 혀를 거룩하게 하시고 내 마음을 거룩하게 하셔서, 내 혀로 말하는 것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주께 열납되게 하시나이다. 이것들로 주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이것은 지나친 요구인가? 하나님께서 내 말과 생각이 잘못된 것을 참으시고 벌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시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여호와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내가 잊은 것인가? 그분의 위엄과 영광을 잊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시는 것을 내가 견딜 수 있겠는가? 그 영광스러운 분이 구더기의 말을 만족하시겠는가? 이처럼 비참한 자의 생각을 받으시겠는가?

그러나 여호와여 당신의 종이 소망하는 바를 보소서. 여호와여,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것이 나의 위로가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오시면 내가 당신을 만나리이다. 나는 연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오 여호와여, 당신은 나의 힘이 되셨나이다. 내가 죄의 종이 되었사오나 하나님은 나의 구세주가 되셨나이다. 오 여호와여, 당신은 나의 구세주가 되셨나이다. 아담의 후손에 불과한 나를 당신은 구속하셨나이다. 당신은 나를 반석 위에 세우시고 흔들리지 않게 하시니, 지옥의 권세가 나를 이기지 못하리이다.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위해 이 일을 행하셨나이다. 당신이 나를 위해 이 일을 하셨사오니, 내가 무엇을 자랑하리이까! 나는 당신께 나아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감히 당신께 헌신하며, 당신이 기뻐하실 것을 믿나이다. 나는 담대하게 내 속사람과 겉사람을 모두 당신께 바치나이다. 나는 아담처럼 벌거벗은 몸으로 당신에게서 도망가지 않겠나이다. 내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시니, 나는 의심치 않고 진실된 삶을 살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리이다. 내 모든 고난, 내 모든 죄로 인하여 내가 움츠리지 아니하고 당신께 나아가리니, 당신은 “나의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이니이다. 당신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나는 죄와 심판에서 더 자유로워지리이다.

혼자서는 약하나 하나님과 함께 강하고, 혼자서는 죄로 인해 비참하나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자는 얼마나 복된 자인지! 내 영혼아, 네 말과 생각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 너 자신을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너를 받으실 것을 의심치 말라. 지극히 영광스럽고, 지극히 거룩하신 그분이 너로 만족해 하실 것이다.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라. 네 말과 네 생각을 너를 구속하신 그분 위에, 너의 반석 위에 세우라. 흔들리지 않으리라. 네 말과 생각을 죄에서 자유케 하라. 너의 구세주께서 네 제물을 열납하시리라.

나로 당신 위에 세우게 하소서. 내 지경을 넓혀 주소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아서 레이크(Arthur Lake, 주교, Divine Meditations, 1629).

[설교힌트]

1절. 찰머스(Chalmers)의 천문학 강의는 설교가들에게 이 주제를 다루는 여러 가지 예를 알려 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 지혜, 선하심, 정확하심, 신실하심, 위대하심, 그리고 영광이 하늘에 나타나 있다.

1-5절. 그리스도를 성경의 태양으로 묵상하면서, 하늘과 성경의 계시 사이에 있는 유사점을 살펴보라.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힘을 합하여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이러한 봉사를 하는 기쁨, 유익함, 그리고 고귀함.

2절. 낮과 밤이 들려주는 소리. 낮과 밤에 대한 소고.

3, 4절. 겸손한 삶, 그러나 유창한 삶. 조용하지만 그러나 소리를 전하는 삶.

4절.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4-6절. 의의 태양. (1) 그분의 장막. (2) 신랑으로 나타나심. (3) 챔피언으로서 그분의 기쁨. (4) 그분의 궤도와 영향.

5절. 강한 자로서 누리는 기쁨-능력의 기쁨, 거룩한 삶의 기쁨, 상을 기대하는 기쁨.

6절. 전파되는 복음의 힘.

7절 상반절. 성경. (1) 성경은 무엇인가?-“율법.” (2) 누구의 것인가?-“여호와의.” (3) 그 특성은 어떠한가?-“완전하고.” (4) 그 결과는 무엇인가?-“영혼을 소성케 하고.”

7절 하반절. (1) 학자들. (2) 교과서. (3) 선생님. (4) 진도.

7-9절. 말씀의 여섯 가지 특성. 여러 사람들의 주해를 참조하라.

7절 하반절. 단순한 믿음에 따르는 지혜.

8절 상반절.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의 능력. (1) 의에 기초한 것. (2) 참된 특성. (3) 지속적인 작용.

8절 하반절. 참된 안약.

9절. 참된 종교의 순결성과 영원성. 종교의 기초가 되는 말씀의 진실성과 공의.

10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두 가지 이유-유익과 기쁨.

10절. 성경을 묵상하는 말할 수 없는 기쁨.

11절 상반절. (1) 무엇을 하는가?-“경계를.” (2) 어떻게 하는가?-“이로,” 즉 말씀으로. (3) 누가 하는가?-“주의 종이.” (4) 언제 하는가?-현재(동사의 시제가 현재이다).

12절. “Spurgeon’s Sermons,” No. 116., “Secret Sins.”

12, 13절. 죄의 세 등급-숨은 죄, 고범죄, 용서받지 못할 죄.

13절. “Spurgeon’s Sermons,” No. 135., “Presumptuous Sins.”

13절 하반절. “큰 죄과.” 이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포함하는가?

14절. 거룩한 삶을 위한 기도.

14절. 누구나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기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한다. 다윗도 이런 사람이었다. (1) 다윗의 기도는 그의 겸손을 나타낸다. (2) 그의 기도는 그의 애정을 나타낸다. (3) 그의 기도는 자신의 의무를 알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4) 그는 자신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기도한다. -윌리엄 제이(William Jay).

14절. 마음과 입술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매일말씀묵상. 4월 12일. 시편 19편.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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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편.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드러내는 주의 영광을 보라.

1. 19 편은 일반계시인 자연과 (1~6) 특별계시인 율법이 (7~11)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나타내는지를 노래합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된 다윗은 기도로 시를 마칩니다 (12~14).

2. 하늘과 궁창은 동의어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1). 그는 자연을 의인화하여 날(낮)이 날에게, 밤이 밤에게 말하고 지식을 전한다고 표현합니다(2). 그들이 말하고 전하는 지식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입니다. 다윗은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자연이 만물을 통해 보여주는 것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온 땅에 통하고 세계 끝까지 이르는 소리입니다(4). 다윗은 마치 하박국 선지자가 전한 이상인 “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 ” 을 보는 듯이 말합니다 . 하나님이 해를 위해서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다는 표현은(4) 밤에 해가 빛을 잃고 숨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해는 다시 떠오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거처에 머뭅니다. 해가 장막(텐트)에 머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막을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해의 열기에서 숨은 자가 없다는 표현은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찬양하는 말입니다(6).

3. 그러나 아무리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해도 , 자연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을 분명하게 계시하지 못합니다 .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 다윗은 자연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가진 특별계시인 율법을 예찬합니다 . 율법은 증거(7), 교훈과 계명(8),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법(9)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4. 먼저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하게 합니다 (7a).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어, 영혼을 회복시키고 생명을 주는데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말씀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다른 수단들을 동원하는 태도는 불신앙이고 타락입니다. 둘째로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7). 우둔한 자는 가치관과 신념이 불확실해서 쉽게 잘못된 선택을 하는 미숙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호하지 않고 분별력을 주며 교훈을 줍니다. 성경은 확실합니다(trustworthy). 셋째로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8). 하나님의 말씀이 기쁨을 주는 것은 아첨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직하게 우리 죄악을 칼로 도려냄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진리만을 말씀합니다. 넷째로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 (8). 순결하다는 것은 빛난다는 뜻입니다. 빛나는 계명은 우리 눈에 빛을 주어 참된 지식을 보게 합니다.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릅니다 (9) . 율법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 주를 경외하게 됩니다. 변화를 받고 주를 경외하게 되면 정결하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를 떠난 내적 순결함이고, 잠깐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5. 다윗은 율법의 완전함에 압도당하여 정금보다 사모할만하고 송이 꿀보다 달다고 고백합니다 . 이것은 “성경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율법의 완전함은 자동적 유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경고를 받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유익을 얻습니다(11). 이런 자는 7~9절에 묘사한 모든 유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6. 자연과 율법의 영광을 노래하던 다윗은 갑자기 자신의 부족을 느낀 것 같습니다 . 자신의 허물 , 숨은 허물이 느껴져서 그는 자신을 거기서 벗어나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12). 정결한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어진 인간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는 또 고의로 죄를 짓지 않기를 구합니다 (13). 죄가 자기를 주장하는 것보다 비참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기쁨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주장하셔야 합니다. 끝으로 다윗은 자신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구합니다 . 외면적 삶이 아니라 말과 마음의 묵상이,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정결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의 소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에서 주의 솜씨를 보고 찬송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경고를 받고 순종하여 유익을 얻게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연과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날마다 보고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세계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하여 주시며, 하나님의 광대함을 보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고 뚜렷하게 알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순종함으로,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더 깊이 알아서, 다윗처럼 감격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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