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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3. 12 (금) [하루 한 장]“보았고 전하노니” (요일1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요한일서 1장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에베소를 목회할 때
소아시아 전역의 성도들에게
전한 첫 번째 편지입니다
당시엔 영지주의가 만연해있어서
예수님이 실제 몸으로는 오시지
않다는 거짓 신앙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요한은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 사건을 직접 보고
듣고 체험했던 당사자로서
급하게 펜을 들어 예수님은 진짜
실제로 오셨고 사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증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선민인 자신을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죽은 예수가
구원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위대한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우리도 그런 오류를 범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진 않습니까?
신앙은 세상적 성공이 아니라
주님을 알고 사귀며 누리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기쁨을 얻고 주님과
참된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갑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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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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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1장 주석 – 요한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요한일서 제 1장 =====1:1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 였음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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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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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요한일서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 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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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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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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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1장 주석
요한일서 제 1장
=====1:1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
였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전부터 선재하셨으며(요
10:30; 13:3)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Smalley,
Barker).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
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
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
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
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
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
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 )는 ‘말씀
의 내용'(행 5:20 ;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
6:35, 48 : 4:10, 11 ; 계 21:6 ;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
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
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들은 바요’
( ,아케코아멘)와 ‘본 바요'( ,헤오라카멘)는 완료시제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
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히
1:1, 2).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 20:29). 한
편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 )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
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Stott, Smalley).
=====1:2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
타나는 접소사 ‘카이'( , )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
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 3:19-24, Smalley).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
)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
신 바’는 예수위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산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
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C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 )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
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
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
다(Barker, Wilder).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
니. – 본절에서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귐’이다(Stott, Barker, Smalley, Wilder). 요한이 본절에서 ‘사귐’
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행위로써 표현되어야 한다는 자
신의 사상과 연결된다(2:3). ‘사귐’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노니아'(
)는 문자적으로 ‘공동 소유’, ‘협동’을 뜻하나 본절에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그리
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공동자금을 모금한 ‘서로 나눔’의 의미
(롬 15:27 ; 고전 9:23 ; 고후 13:13) 둘 다를 함축한다(Smalley, Barker).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 본문은 1절 전반
부부터 암시되어 온 예수의 이름을 명백하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본문에서 그리스
도인의 ‘사귐’의 본질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임을 분명
히 제시함으로 그 사귐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영원한
생명이시며 동시에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임을
시사한다(2:1 ; 3:23 ; 4:2 ; 5:6, 20, Smalley, Wilder).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는 수신자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예수의 인성이나 신성을 경시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내포한다(고전 1:9, Smalley, Stott).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 본문은 요 15:11을 반
영한다.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
께 하는 사귐의 결과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Smalley, Stott).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현재에는 하나님과 그리스
도와의 불완전하므로 기쁨 또한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사귐 가운데 누리는 완
전치 못한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인 사귐과 기쁨의 표징이며 보증이다. 그
러기에 이 기쁨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헌신적인 사귐 가운데 기쁨을 누
려야만 하는 것이다.
=====1:5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요한이 염두에 둔 영지주의자들의 그
릇된 주장이 6, 8절에 이어 세번째로 소개된다. 본절에서 요한은 보다 보편적인 진리
를 통해 도전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
경을 통해 인간 전체가 범죄하였으며 죄에 신음하고 있음을 선언하셨다( 시 14:3 ; 사
53:6 ; 요 2:24, 25 ; 룸 3:2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언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며(렘 31:34 ; 엡
4:32)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요 16:8 ; 롬 8:1, Smalley). 한편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선포된 말씀과 구약성경의 모든 증거가 이
들 이단적 경향을 가진 자들에게 수용될 여지가 없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죄를 부인하
는 것은 구원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말씀과 빛 가운데 살 수 없게 하며 하나님께
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를 바랄 수 없게 함을 시사한다(Barker).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
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앙겔리아'(
)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된것으로 2, 3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이 선포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 소식에 대해 ‘저에게서 듣고’라고 표현함으로 생명의 말
씀이 역사적인 예수의 생과 가르침 가운데 들려진 복음임을 강조한다(Smalley). 이 소
식의 내용이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빛’은 진
리와 의로움울 상징하는 것으로(시 27:1 ; 36:9 ; 119:130 ; 사 5:20 ; 미 7:8b ; 말
4:2).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라(요일 4:8)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본
성을 나타낸다. 요한은 자주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서(요 1:4 ; 8:12 ; 9:5 ; 12:35,
36) 하나님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생활, 즉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덕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6, 8, 10
절 ; 2:4, 6, 9 ; 눅 16:8; 요 8:12 ; 엡 5:8-14, Houlden, Wilder, Barker).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
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5절)는 말씀을 전제
로 하여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적 사
상에 빠져 물질 세계를 악한것으로 배척함으로써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로
인해 그들의 행위는 방종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사귐
이 있다는, 하나님의 본성과 선하심에 모순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헌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진리인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그릇되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Smalley). 그리스고 안
에서 생명을 부여하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
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된 삶을 상징하는 어둠과 분리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근거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절대적인 장애가 되기 때
문이다(Smalley, Stott). 한편 ‘행하면’의 헬라어 ‘페리파토멘'( )
은 문자적으로 ‘동행한다’라는 의미로 구약 성경에서 유래된 표현이다(2:6, 11 ; 창
17:1 ; 왕상 2:4 ; 왕하 20:3 ; 요 8:12 ; 요이 1:4). 이것은 ‘말하는 것’과 깊은 연
관성을 가지는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의 일부이며, 계속해서 최
상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함을 내포한다(Barker). 그러기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때는 진리 안에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빛 가운데의 삶을 동반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귐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요한은 계속해서 빛과
어두움위 이미지를 대조하고 있다. 어두움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차단해 버
리기 때문에 ‘빛 안에 거함’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필수 요건이 된다. 그런데 그
‘빛’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시다
(Smalley, Wilder).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이 당신과의 사귐을 가능케 하심으로 이루
어지는 결과에 대해 두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 하나님이 빛이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거하
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은 단순히 그 차원에 머
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진보하여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귐을 성취한다. 이것은 그
리스도인 상호간의 사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함을 암시한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피’는 십자가
에서 죽으신 예수위 대속의 사역을 가리킨다. 또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락된 성품까지 깨끗하게 하심을 의미한다(Barker,
Stott, Smalley). 이러한 두 가지 결과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비롯된 것이다
(Smalley).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
요. –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사귐
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이다. ‘죄없다 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안
우크 에코멘'( )은 죄가 자신들
에게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것을 암시한다(Low,
Brooke, Barker, Smalley). 죄가 부재함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스스로를
기만하며 속이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예수께서 거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거부할때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
실것이요.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 )는 복
수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죄들’을 가리키며, ‘자백’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
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시 32:1-5 ; 잠 28:13,
Stott). 한편 ‘시하시며’의 헬라어 ‘아페'( )는 빛의 탕감이나 ‘허물의 제
거’, ‘책임의 해제’ 등과 같은 의미이며 ‘깨끗하게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
( )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 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
한 묘사는 사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며,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
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Stott, Smalley).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를 자백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
시는 근거를 나타낸다. ‘미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
)는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설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약속하셨으며(렘
32:34 ; 미 7:19, 20)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신설한 분이다(시 89편 ; 롬 3:25
; 고전 10:13; 딤후 2:13 ; 히 10:23 ; 11 : 11). 그러므로 미쁘신 당신의 성품대로
죄를 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카셔서 죄를 자백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한편
‘의로우사’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스'( )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Ross). (2) 혹자는 언
약 혹은 약속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3) 혹자는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한다
고 주장한다(Dodd). (4) 혹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지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
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고백한 죄인들을 사죄하신다(Barker).
헬라어 요한일서 1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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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새번역,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
우리말성경,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고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우리가 주목했고 손으로 만져 본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영어NIV,1 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at and our hands have touched–this we proclaim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영어NASB,1 What was from the beginning, what we have heard, what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at we beheld and our hands handled, concerning the Word of Life–
영어MSG,1 From the very first day, we were there, taking it all in–we heard it with our own ears, saw it with our own eyes, verified it with our own hands.
영어NRSV,1 We declare to you what was from the beginning, what we have heard, what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at we have looked at and touched with our hands, concerning the word of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1 ο ην απ αρχης ο ακηκοαμεν ο εωρακαμεν τοις οφθαλμοις ημων ο εθεασαμεθα και αι χειρες ημων εψηλαφησαν περι του λογου της ζωης
라틴어Vulgate,1 quod fuit ab initio quod audivimus quod vidimus oculis nostris quod perspeximus et manus nostrae temptaverunt de verbo vitae
히브리어Modern,1 את אשר היה מראש אשר שמענו ובעינינו ראינו אשר הבטנו ואשר מששו ידינו על דבר החיים׃
성 경: [요일1:1]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태초부터 있는. – 이것은 1:1과 병행된 표현으로 생명의 말씀이 영원 전에 선재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하나로 영원전부터 선재하셨으며(요 10:30; 13:3) 복음이 하나님께 속하여 태초부터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Smalley, Barker).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헬라어 본문상 본절은 주절이 문장의 맨 끝에 오는 일종의 도치문으로 네 개의 관계절, 즉 ‘태초부터 있던 것’, ‘우리가 들었던 것’, ‘우리가 눈으로 보았던 것’, ‘우리가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것’이 ‘생명의 말씀’을 수식하고 있다. 요한은 이러한 매우 복잡한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적절히 언어화시키고 있다(Barker). 본문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Stott, Smalley, Westcott, Dodd). 첫째로, 영원하시고 인격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현을 의미한다. 즉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 1:1). 둘째로, 복음을 의미한다. ‘생명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스'(*)는 ‘말씀의 내용'(행 5:20; 빌 2:16)을 의미하기도 하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요 8:12; 6:35, 48:4:10, 11; 계 21:6; 22:1)을 가리킨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에 대한 본질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Smalley, Houlden, Westcott, Marshall).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 ‘들은 바요'(*, 아케코아멘)와 ‘본 바요'(*, 헤오라카멘)는 완료시제이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으며 그것을 사도들이 예수께서 설교하셨을 때 듣고, 예수께서 사역하셨을 때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음을 의미한다(히 1:1,2). 이 ‘듣고’와 ‘본’은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연결된다(요 10:27; 20:29). 한편 ‘만진 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라페산'(*)은 부정과거 시제로 과거 한때 직접 만져서 느낀 것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러한 관계절, 즉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표현을 통해서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역사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으며 그의 사역과 설교를 통해 자신 안에 실현될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강조한다(Stott, Smalley).
카이 헤 조에 에파네로데 카이 헤오라카멘 카이 마르튀루멘 카이 아팡겔로멘 휘민 테 조엔 텐 아이오니온 헤티스 엔 프로스 톤 파테라 카이 에파네로데 헤민
개역개정,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새번역,2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말성경,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 앞에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증거하고 전파합니다.
가톨릭성경,2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영어NIV,2 The life appeared; we have seen it and testify to it, and we proclaim to you the eternal life,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has appeared to us.
영어NASB,2 and the life was manifested, and we have seen and bear witness and proclaim to you the eternal life,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was manifested to us–
영어MSG,2 The Word of Life appeared right before our eyes; we saw it happen! And now we’re telling you in most sober prose that what we witnessed was, incredibly, this: The infinite Life of God himself took shape before us.
영어NRSV,2 this life was revealed, and we have seen it and testify to it, and declare to you the eternal life that was with the Father and was revealed to us–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η ζωη εφανερωθη και εωρακαμεν και μαρτυρουμεν και απαγγελλομεν υμιν την ζωην την αιωνιον ητις ην προς τον πατερα και εφανερωθη ημιν
라틴어Vulgate,2 et vita manifestata est et vidimus et testamur et adnuntiamus vobis vitam aeternam quae erat apud Patrem et apparuit nobis
히브리어Modern,2 והחיים נגלו ונרא ומעידים אנחנו ומודיעים לכם את חיי העולם אשר היו עם האב ונגלו לנו׃
성 경: [요일1:2]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본절은 일종의 삽입어구로 앞절의 내용을 확대시킨 것이다. 헬라어 본절 처음에 나타나는 접소사 ‘카이'(*, 그리고)는 이어지는 3, 4절을 소개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으며, 본서 내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법이다(2:27; 3:19-24, Smalley).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 ‘생명’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헤 조에'(*)는 1절에서처럼 예수 자신의 존재와 그의 복음을 가리킨다(Westcott). 한편 ‘나타내신 바’는 예수위 지상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산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이 역사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시지 않는한 인간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Stott, Smalley).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고 너희에게 전하노니. – 본문은 세동사, 즉 ‘보았고’, ‘증거하고’, ‘전하노니’를 통하여 경험의 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CSmalley). ‘보았고’의 헬라어 ‘헤오라카멘'(*)은 그 진의와 중요성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살펴본다’는 의미로서 요한의 개인적 경험을 시사하며, ‘증거하여’는 요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개인적으로 전할 뿐만 아니라 사도로서 공적으로 선포하였음을 나타낸다(Law, Brooke).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 헬라어 본문에는 바로 앞에 ‘영원한 생명'(*, 텐 조엔 텐 아이오니온)이 자리잡고 있어서 본절 처음에 나타난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와 같은 의미의 반복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보다 발전된 표현으로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각시키고 동시에 생명의 결정적인 근원으로 ‘아버지와 함께’를 제시한다(Smalley). 이러한 사실로 보아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길이가 영원함을 뜻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생명이 갖고 있는 신적인 성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Barker, Wilder).
호 헤오라카멘 카이 아케코아멘 아팡겔로멘 카이 휘민 히나 카이 휘메이스 코이노니안 에케테 멛 헤몬 카이 헤 코이노니아 데 헤 헤메테라 메타 투 파트로스 카이 메타 투 휘우 아우투 예수 크리스투
개역개정,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새번역,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우리말성경,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파합니다. 이는 여러분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귐입니다.
가톨릭성경,3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영어NIV,3 We proclaim to you what we have seen and heard, so that you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영어NASB,3 what we have seen and heard we proclaim to you also, that you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indeed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영어MSG,3 We saw it, we heard it, and now we’re telling you so you can experience it along with us, this experience of communion with the Father and his Son, Jesus Christ.
영어NRSV,3 we declare to you what we have seen and heard so that you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truly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3 ο εωρακαμεν και ακηκοαμεν απαγγελλομεν υμιν ινα και υμεις κοινωνιαν εχητε μεθ ημων και η κοινωνια δε η ημετερα μετα του πατρος και μετα του υιου αυτου ιησ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3 quod vidimus et audivimus adnuntiamus et vobis ut et vos societatem habeatis nobiscum et societas nostra sit cum Patre et cum Filio eius Iesu Christo
히브리어Modern,3 את אשר ראינו ושמענו נודיעה לכם למען תתחברו לנו גם אתם והתחברותנו היא עם האב ועם בנו ישוע המשיח׃
성 경: [요일1:3]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 본절에서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사귐’이다(Stott, Barker, Smalley, Wilder). 요한이 본절에서 ‘사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행위로써 표현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사상과 연결된다(2:3). ‘사귐’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코이노니아'(*)는 문자적으로 ‘공동 소유’, ‘협동’을 뜻하나 본절에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공동자금을 모금한 ‘서로 나눔’의 의미(롬 15:27; 고전 9:23; 고후 13:13) 둘 다를 함축한다(Smalley, Barker).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 본문은 1절 전반부부터 암시되어 온 예수의 이름을 명백하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은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본질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임을 분명히 제시함으로 그 사귐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영원한 생명이시며 동시에 온전히 하나님과 하나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임을 시사한다(2:1; 3:23; 4:2; 5:6, 20, Smalley, Wilder).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는 수신자들 사이에 퍼져 있었던 예수의 인성이나 신성을 경시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경고를 내포한다(고전 1:9, Smalley, Stott).
카이 타우타 그라포멘 헤메이스 히나 헤 카라 헤몬 에 페플레로메네
개역개정,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4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여러분의’
우리말성경,4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가득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영어NIV,4 We write this to make our joy complete.
영어NASB,4 And these things we write, so that our joy may be made complete.
영어MSG,4 Our motive for writing is simply this: We want you to enjoy this, too. Your joy will double our joy!
영어NRSV,4 We are writing these things so that our joy may be complete.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ταυτα γραφομεν υμιν ινα η χαρα ημων η πεπληρωμενη
라틴어Vulgate,4 et haec scribimus vobis ut gaudium nostrum sit plenum
히브리어Modern,4 ואת זאת כתבים אנחנו לכם למען תהיה שמחתכם שלמה׃
성 경: [요일1:4]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생명의 말씀]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 – 본문은 요 15:11을 반영한다.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는 사귐의 결과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 Smalley, Stott). 이러한 기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현재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불완전하므로 기쁨 또한 불완전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사귐 가운데 누리는 완전치 못한 기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인 사귐과 기쁨의 표징이며 보증이다. 그러기에 이 기쁨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헌신적인 사귐 가운데 기쁨을 누려야만 하는 것이다.
카이 에스틴 하우테 헤 앙겔리아 헨 아케코아멘 앞 아우투 카이 아낭겔로멘 휘민 호티 호 데오스 포스 에스틴 카이 스코티아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 우데미아
개역개정,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새번역,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빛이시니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가톨릭성경,5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영어NIV,5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declare to you: God is light;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영어NASB,5 And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announce to you, that God is light, and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영어MSG,5 This, in essence, is the message we heard from Christ and are passing on to you: God is light, pure light; there’s not a trace of darkness in him.
영어NRSV,5 This is the message we have heard from him and proclaim to you, that God is light and in him there is no darkness at all.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αυτη εστιν η επαγγελια ην ακηκοαμεν απ αυτου και αναγγελλομεν υμιν οτι ο θεος φως εστιν και σκοτια εν αυτω ουκ εστιν ουδεμια
라틴어Vulgate,5 et haec est adnuntiatio quam audivimus ab eo et adnuntiamus vobis quoniam Deus lux est et tenebrae in eo non sunt ullae
히브리어Modern,5 וזאת היא השמועה אשר שמענו ממנו ונגד לכם כי האלהים אור הוא וכל חשך אין בו׃
성 경: [요일1:5]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소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앙겔리아'(*)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된 것으로 2, 3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이 선포한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 요한은 이 소식에 대해 ‘저에게서 듣고’라고 표현함으로 생명의 말씀이 역사적인 예수의 생과 가르침 가운데 들려진 복음임을 강조한다(Smalley). 이 소식의 내용이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빛’은 진리와 의로움울 상징하는 것으로(시 27:1; 36:9; 119:130; 사 5:20; 미 7:8b; 말 4:2).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랑이시라(요일 4:8)는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낸다. 요한은 자주 ‘빛과 어둠’을 대조시켜서(요 1:4; 8:12; 9:5; 12:35, 36) 하나님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생활, 즉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도록 도덕적인 요청을 하고 있다(6,8,10절; 2:4,6,9;눅16:8; 요 8:12; 엡 5:8-14, Houlden, Wilder, Barker).
에안 에이포멘 호티 코이노니안 에코멘 멭 아우투 카이 엔 토 스코테이 페리파토멘 프슈도메다 카이 우 포이우멘 텐 알레데이안
개역개정,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새번역,6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어둠 가운데 행한다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이며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NIV,6 If we claim to have fellowship with him yet walk in the darkness, we lie and do not live by the truth.
영어NASB,6 If we say that we have fellowship with Him and yet walk in the darkness, we lie and do not practice the truth;
영어MSG,6 If we claim that we experience a shared life with him and continue to stumble around in the dark, we’re obviously lying through our teeth–we’re not living what we claim.
영어NRSV,6 If we say that we have fellowship with him while we are walking in darkness, we lie and do not do what is true;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αν ειπωμεν οτι κοινωνιαν εχομεν μετ αυτου και εν τω σκοτει περιπατωμεν ψευδομεθα και ου ποιουμεν την αληθειαν
라틴어Vulgate,6 si dixerimus quoniam societatem habemus cum eo et in tenebris ambulamus mentimur et non facimus veritatem
히브리어Modern,6 אם נאמר כי יש לנו התחברות עמו ונתהלך בחשך הננו כזבים ופעלתנו איננה אמת׃
성 경: [요일1:6]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5절)는 말씀을 전제로 하여 영지주의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원론적 사상에 빠져 물질 세계를 악한 것으로 배척함으로써 죄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로 인해 그들의 행위는 방종을 면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영적인 사귐이 있다는, 하나님의 본성과 선하심에 모순되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러헌 주장은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진리인 ‘하나님은 빛이시라’를 그릇되게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Smalley). 그리스고 안에서 생명을 부여하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된 삶을 상징하는 어둠과 분리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둠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근거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절대적인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Smalley, Stott). 한편 ‘행하면’의 헬라어 ‘페리파토멘'(*)은 문자적으로 ‘동행한다’라는 의미로 구약 성경에서 유래된 표현이다(2:6, 11; 창 17:1; 왕상 2:4; 왕하 20:3; 요 8:12; 요이 1:4). 이것은 ‘말하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바, ‘진리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의 일부이며, 계속해서 최상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함을 내포한다(Barker). 그러기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할때는 진리 안에서 행함이 뒤따라야 하며 빛 가운데의 삶을 동반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귐과 전혀 관계없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에안 데 엔 토 포티 페리파토멘 호스 아우토스 에스틴 엔 토 포티 코이노니안 에코멘 멭 알렐론 카이 토 하이마 예수 투 휘우 아우투 카다리제이 헤마스 아포 파세스 하마르티아스
개역개정,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새번역,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우리말성경,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에게는 서로 사귐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가톨릭성경,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영어NIV,7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영어NASB,7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Himself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cleanses us from all sin.
영어MSG,7 But if we walk in the light, God himself being the light, we also experience a shared life with one another, as the sacrificed blood of Jesus, God’s Son, purges all our sin.
영어NRSV,7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himself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cleanses us from all sin.
헬라어신약Stephanos,7 εαν δε εν τω φωτι περιπατωμεν ως αυτος εστιν εν τω φωτι κοινωνιαν εχομεν μετ αλληλων και το αιμα ιησου χριστου του υιου αυτου καθαριζει ημας απο πασης αμαρτιας
라틴어Vulgate,7 si autem in luce ambulemus sicut et ipse est in luce societatem habemus ad invicem et sanguis Iesu Filii eius mundat nos ab omni peccato
히브리어Modern,7 אך אם באור נלך כאשר הוא באור הנה נתחברנו יחד ודם ישוע המשיח בנו יטהרנו מכל חטא׃
성 경: [요일1:7]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요한은 계속해서 빛과 어두움위 이미지를 대조하고 있다. 어두움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빛 안에 거함’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위한 필수 요건이 된다. 그런데 그 ‘빛’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시다(Smalley, Wilder).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이 당신과의 사귐을 가능케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에 대해 두 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 하나님이 빛이시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은 단순히 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진보하여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귐을 성취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귐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전제로 함을 암시한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피’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위 대속의 사역을 가리킨다. 또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는 단순히 죄를 용서하는 것뿐만 아니라 타락된 성품까지 깨끗하게 하심을 의미한다(Barker, Stott, Smalley). 이러한 두 가지 결과는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비롯된 것이다(Smalley).
에안 에이포멘 호티 하마르티안 우크 에코멘 헤아우투스 플라노멘 카이 헤 알레데이아 우크 에스틴 엔 헤민
개역개정,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새번역,8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안에 없습니다.
가톨릭성경,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영어NIV,8 If we claim to be without sin, we deceive ourselves and the truth is not in us.
영어NASB,8 If we say that we have no sin, we are deceiving ourselves, and the truth is not in us.
영어MSG,8 If we claim that we’re free of sin, we’re only fooling ourselves. A claim like that is errant nonsense.
영어NRSV,8 If we say that we have no sin, we deceive ourselves, and the truth is not in us.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αν ειπωμεν οτι αμαρτιαν ουκ εχομεν εαυτους πλανωμεν και η αληθεια ουκ εστιν εν ημιν
라틴어Vulgate,8 si dixerimus quoniam peccatum non habemus ipsi nos seducimus et veritas in nobis non est
히브리어Modern,8 אם נאמר כי אין בנו חטא הננו מתעים את נפשתינו והאמת אין בנו׃
성 경: [요일1:8]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요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서도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이다. ‘죄없다 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안우크 에코멘'(*)은 죄가 자신들에게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실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것을 암시한다(Low, Brooke, Barker, Smalley). 죄가 부재함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스스로를 기만하며 속이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가 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이신 예수께서 거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 혐오감을 느껴 거부할때 빛 가운데 거하게 되며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된다.
에안 호몰로고멘 타스 하마르티아스 헤몬 피스토스 에스틴 카이 디카이오스 히나 아페 헤민 타스 하마르티아스 카이 카다리세 헤마스 아포 파세스 아디키아스
개역개정,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새번역,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말성경,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가톨릭성경,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영어NIV,9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and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purify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영어NASB,9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righteous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영어MSG,9 On the other hand, if we admit our sins–make a clean breast of them–he won’t let us down; he’ll be true to himself. He’ll forgive our sins and purge us of all wrongdoing.
영어NRSV,9 If we confess our sins, he who is faithful and just will forgive us our sins and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9 εαν ομολογωμεν τας αμαρτιας ημων πιστος εστιν και δικαιος ινα αφη ημιν τας αμαρτιας και καθαριση ημας απο πασης αδικιας
라틴어Vulgate,9 si confiteamur peccata nostra fidelis est et iustus ut remittat nobis peccata et emundet nos ab omni iniquitate
히브리어Modern,9 ואם נתודה את חטאתינו נאמן הוא וצדיק לסלח לנו את חטאתינו ולטהרנו מכל עון׃
성 경: [요일1:9]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는 복수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죄들’을 가리키며, ‘자백’은 구체적으로 죄를 깊이 생각하고 뉘우치며 진실하게 고백함으로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시 32:1-5; 잠 28:13, Stott). 한편 ‘시하시며’의 헬라어 ‘아페'(*)는 빛의 탕감이나 ‘허물의 제거’, ‘책임의 해제’ 등과 같은 의미이며 ‘깨끗하게 하실’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리세'(*)는 죄로 오염된 상태를 정화 시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묘사는 사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이며,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Stott, Smalley).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 본문은 하나님께서 죄를 자백한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근거를 나타낸다. ‘미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약속을 잘 지키시는 ‘신설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죄사함을 약속하셨으며(렘 32:34; 미 7:19, 20)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신설한 분이다(시 89편; 롬 3:25; 고전 10:13; 딤후 2:13; 히 10:23; 11:11). 그러므로 미쁘신 당신의 성품대로 죄를 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카셔서 죄를 자백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한편 ‘의로우사’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스'(*)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 혹자는 십자가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tott, Ross). (2) 혹자는 언약 혹은 약속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3) 혹자는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Dodd). (4) 혹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와 지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고백한 죄인들을 사죄하신다(Barker).
에안 에이포멘 호티 우크 헤마르테카멘 프슈스텐 포이우멘 아우톤 카이 호 로고스 아우투 우크 에스틴 엔 헤민
개역개정,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새번역,10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말성경,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가톨릭성경,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영어NIV,10 If we claim we have not sinned, we make him out to be a liar and his word has no place in our lives.
영어NASB,10 If we say that we have not sinned, we make Him a liar, and His word is not in us.
영어MSG,10 If we claim that we’ve never sinned, we out-and-out contradict God–make a liar out of him. A claim like that only shows off our ignorance of God.
영어NRSV,10 If we say that we have not sinned, we make him a liar, and his word is not in u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αν ειπωμεν οτι ουχ ημαρτηκαμεν ψευστην ποιουμεν αυτον και ο λογος αυτου ουκ εστιν εν ημιν
라틴어Vulgate,10 si dixerimus quoniam non peccavimus mendacem facimus eum et verbum eius non est in nobis
히브리어Modern,10 ואם נאמר כי לא חטאנו לכזב נשימנו ודברו אין בנו׃
성 경: [요일1:10]
주제1: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
주제2: [빛이신 하나님]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요한이 염두에 둔 영지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이 6, 8절에 이어 세번째로 소개된다. 본절에서 요한은 보다 보편적인 진리를 통해 도전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인간 전체가 범죄하였으며 죄에 신음하고 있음을 선언하셨다( 시 14:3; 사 53:6; 요 2:24, 25; 룸 3:2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언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는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며(렘 31:34; 엡 4:32)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요 16:8; 롬 8:1, Smalley). 한편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선포된 말씀과 구약성경의 모든 증거가 이들 이단적 경향을 가진 자들에게 수용될 여지가 없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죄를 부인하는 것은 구원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말씀과 빛 가운데 살 수 없게 하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를 바랄 수 없게 함을 시사한다(B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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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1장 주석 서론
요한일서 서론
요한일서는 저자와 수신자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이것은 이 서신의 저자가 교회 가운데 잘 알려진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편지를 읽는 사람들이 그 편지가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런 위치에 있는 자로서 유력한 사람은 사도 요한일 것이다. 교회 전통은 이 편지의 저자를 요한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이 편지의 문체(文體)도 요한을 저자로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서와 요한복음이 동일한 저자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보내어졌을까?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주후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하여 교회가 흩어질 때, 요한은 에베소에 이르러 그 곳에서 소아시아에 있던 여러 교회들을 돌보며 생을 마쳤다고 한다. 따라서 이 편지는 요한이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때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위하여 쓴 것으로 추측된다.
이 편지는 성도들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당시 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이단 사상은 영지주의였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이원론을 주장함으로 주님의 완전한 인성과 신성의 연합을 부인했다. 이로서 그들은 주님의 성육신을 전적으로 부인하였다. 이것은 곧 성육신에 기초하여 세워진 교회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하나님께서 부패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취하신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또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계시하시는 유일한 은혜의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성육신 교리가 부정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준비 해 주신 구원의 길도 그리고 성육신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모두 허구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경건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도 상실하게 된다.
실제로 영지주의에 따랐던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가 우려했던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그들은 성육신을 부인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인간 예수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성육신 사건에 대하여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들어가 거하였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영은 그로부터 떠났다고 말했다. 그들의 이단 사상을 우리는 가현설이고 한다. 그들의 이단 사상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어떤 사랑도 찾을 수 없고 구속의 은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육신을 부정하고서는 그리스도교가 성립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은 바른 교리적 기초 위에 있을 때 이루어지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교리적 오류에 빠졌을 때 교회가 무너졌고 그리고 도덕적 부패가 따라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잘못 된 교리에 기초한 영지주의는 사람들을 경건의 삶으로부터 떠나게 했고, 또한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했다. 그들은 육체는 악한 것이고 영은 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생활과는 관계없이 그들이 알고 있는 비전(秘傳)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는 방종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영적으로는 기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통하여 교회를 영지주의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육신에 대한 바른 교리를 교훈 했고 또한 이 교리를 믿는 사람들 속에 나타나는 경건한 삶의 모습을 말해 줌으로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거짓 신앙과 참된 신앙을 분별하여 참된 신앙에 굳게 서도록 하였다.
요한 일서의 기록 연대는 대략 AD85-90년으로 추측한다.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 후 교회가 회당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기관으로 존재하게 된 시기이며 또한 요한복음이 기록된 조금 뒤의 시기이다.
요한일서는 인도자가 성도들에게 주는 권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서는 특별한 주제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서술된 편지가 아니고 사도가 성도들에게 주기 원하는 교훈들을 순서 없이 쓴 편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서는 각 장을 순서적으로 개괄하기보다는 서신 전체에 흩어져 있는 주제에 따라 개괄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특별히 본 서신은 교회를 영지 주의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영지주의의 거짓 주장에 대한 반박이 편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본서의 중요한 주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성,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 등이다.
첫째, 요한일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으로서 태초부터 존재해 오셨고 성육신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참여하셨다. 요한은 본서를 통하여 자신이 직접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바 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임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비역사성을 말하고 있는 이단을 반박했다. 그리스도교는 공상적인 종교가 아니라 사실에 기초한 종교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 위엄, 은혜, 사랑 등이 모두 역사 가운데 실재한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도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교와도 상관없는 자들이다.
둘째, 요한 일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공동체로서 사랑과 거룩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 공동체의 중심은 빛 되신 하나님이심으로 이 공동체는 어둠이 함께 할 수 없다. 여기 요한은 “빛”이라는 말을 “어둠”과 대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어둠이 미움이라면 빛은 사랑이고 어둠이 더러움이라면 빛은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빛 되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사랑과 거룩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구성원들 모두는 하나님과 사귐을 통하여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와 개인으로 계속 성장 해 간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사귐은 공동체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을 결여하고 있는 공동체는 세상에서 구별된 공동체로서 성장할 수 있는 생명력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요한일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나타나는 특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1:5,6)” 요한이 서신 전체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어둠 가운데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 이것으로서 한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 인지 아닌지를 시험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빛 가운데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약함 가운데 있기 세상에 사는 동안 언제나 죄의 유혹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듭나지 않은 자와 구별되는 것은 우리 속에 거룩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 죄를 범할지라도 결코 죄를 즐길 수는 없다.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거룩한 속성을 지니고 사는 것을 요한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빛 가운데 거하고 있는 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는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 여기 빛 가운데 거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나타나는 특성은 소극적으로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이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었을 때는 자백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할 때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인은 죄 가운데 거할지라도 양심에 어떠한 가책도 받지 않음으로 더욱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거리낌 없이 거짓 영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특성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요한일서를 통하여 교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마치 교리는 집의 기초와도 같아서 어느 교리 위에 믿음의 집을 세우느냐에 따라 바른 믿음이 될 수도 있고 거짓 믿음이 될 수도 있으며 또한 믿음이 견고해 지기도 하며 연약해 지기도 한다. 사도요한은 교리의 중요함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4:5-6)” 요한은 이 편지를 씀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분별하며 살도록 했다. 특별히 요한복음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함으로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며 요한일서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자들이 바른 교리에 기초하여 확신 가운데 살도록 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021. 5. 14.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요한 일서 1장 강해 설교문] 빛 되신 하나님과의 사귐(요일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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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알쓸잡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요한 일서 1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빛 되신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제 목: 빛 되신 하나님과의 사귐
성 경: 요일 1:5-7
사도 요한이 직접 보고 듣고 만진 다된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에게 빛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소식도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자들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그 사귐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빛이시라(1:5)
요한복음 1장 4-5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였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이시며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구름이 끼지 않은 화창한 날을 연상해 보십시오. 빛 그 자체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빛이요 어두움이 전혀 없습니다. 빛은 진리이며 진리는 어두움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4절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할” 고 했습니다. 전등이 전류를 받아 빛을 비추듯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도 진리를 통해 빛을 나타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이란 우리가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는 모든 열매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등이 빛에 속합니다.
이와 반대로 로마서 1장 29절 이하에서 말하는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등의 육신의 일과,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서 말하는 음행과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의 육체의 일은 어두움에 속합니다. 어두움은 세상에 속한 것이므로 결코 빛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행하는 자는 빛을 멀리하고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어두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는 어두움을 멀리하고 항상 빛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1:6)
빛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은 육적인 사귐이 아니라 영적인 사귐이며 진리의 사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당연히 빛 가운데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적인 사귐이 있을 때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말씀을 듣고 보고 기도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불법을 행하며 어둠 속에 행한다면 진리를 행치 않는 것이니 거짓말하는 자가 됩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 이하에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계시록 22장 15절에는 ” 거짓말을 놓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라고 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이나 거짓말을 하는 자는 내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즉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하시며 어두움 가운데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는 1장 6절 이외에도 거짓말하는 자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2장 4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노라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를 거짓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치 않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면 믿는다고 하면서 주일을 지키지 않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가 도적질 하는 자인 것입니다.
2장 20절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4장 20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거짓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해 주옵시고’라고 예배 때마다 기도합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습관처럼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를 행치 않는 것이라 하였으니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명심하여 거짓말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겠습니다.
3. 빛 가운데 행하면(1:7)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게 됩니다. 빛은 진리이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모든 사람에게 원죄와 자범죄가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면 하나님과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데는 “빛 가운데 행하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아마도 초신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난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 깨끗이 씻음 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빛 가운데 행하지 못해도 빛 가운데 살려고 노력하는 행함을 보시고 빛 가운데 행하는 자라고 인정하십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떠한 사귐을 가지며 예수의 피는 어떻게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6장 53절 이하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하신 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여기서 피는 생명을, 살은 진리를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으면 진리가 윌 속에 들어와 영양분으로 소화 흡수되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면 그 보혈의 피가 어두움에 행하던 우리의 죄악들을 배설물로 쏟아버리게 하므로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영생을 얻게 합니다.
이와 같이 죄악이 배설물로 배출되고 우리는 차츰 영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예수님과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다 하는 것이요, 이러한 사귐을 통해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흔히 자꾸 깨어지고 영이 새로워지니 믿음이 장성하여 가며 성령 충만하여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고 깨어 기도하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니 하나님께 더 사랑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피를 마셔본 자만이 참 생명을 얻어 소망과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씻어 주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말씀을 먹고 양식 삼아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듣고 알아 지식으로 많이 쌓아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행하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을 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며, 빛 가운데 행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로부터 듣고 우리에게 전하는 소식은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얻어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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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주일설교말씀] 보혈의 능력으로(요일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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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일서 1장 주일설교말씀 중에서 보혈의 능력으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난 우리는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를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나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피가 능력이며 죽었던 영혼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까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보혈의 능력으로 (In the power of Blood)!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요일 1:1-10
요절: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일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일 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오늘은 보혈의 복음에 대해 말씀으로 은혜를 나눕니다. 사도 요한이 믿음의 형제가 된 동족 유대인들에게 보낸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한 본문을 교독했습니다. 요한 일서는 가장 쉽고 명백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어서 예수님을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처음 읽으라고 권유하는 책입니다. 어떤 이는 요한 일서를 다 외우기도 합니다. 너무 좋은 말씀입니다. 현재 우리가 읽는 개역이나 개역개정 그리고 현대 역 영어성경에서 삼위일체를 가장 명확하게 전하고 있는 요일 5:7의 말씀을 삭제하거나 왜곡되게 전하는데 개혁자들의 성경에 있는 대로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요일 5:7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세 분이 계심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또한 이 셋은 하나이시니라. 8 땅에서 증거 하는 이도 셋이 있으니 영과 물과 피라 이 셋도 하나로 일치하느니라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7절에서 킹 제임스 성경에서 아버지(the Father), 말씀(the Word), 그리고 성령(the Holy Ghost) 세 분이 한분(Trinity를 “삼위일체”란 표현보다 “삼위 일신”이 더욱 정확함, 몸體를 사용하면 세분의 하나님처럼 들리나 三位一神하면 “세 위를 가지신 유일하신 하나님”(Tri-Union God) 임.) 모두 대문자로 사용하고 있으며
8절에서는 하나님의 삼위가 짝을 이루어 하늘의 삼위일신을 증거 하는 것으로 영(the spirit), 물(the water), 피(the blood)도 셋이 하나로 일치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영과 진리로(worship God in spirit and in truth, 요 4:24) 드려야 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며(be born of water and of the Spirit, 요 3:5),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ye were redeemed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벧전 1:18-19). 이 중요한 삼위 일신과 구원의 서정을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성경에서는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바른 성경번역이냐 아니냐를 검사할 때 요일 5:7-8을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며 고통당하실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사도입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자신도 순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the beloved disciple)에게 이르시되 “너는 살아있는 순교자가 되어라” 즉 매일매일의 삶이 순교라고 일러주신 사도 요한은 106세까지 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밧모섬에서 1년 6개월 감옥 생활하면서 받은 말씀이 요한계시록인데 오늘날 터키인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목회서신입니다. 재림 신앙이 주제가 되는데 다음 주일 재림 신앙을 묵상합니다.
요일 1:1 태초부터 계시던 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여기에 태초부터(from the beginning, apo arches ἀπ᾿ ἀρχῆς)는 영원무궁토록 계시는 하나님께 속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창세기 1:1의 태초는 창조 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bereshit, “in the beginning”). 즉 창조가 시작된 시간을 말한다(벧후 3:4). “한 처음에” “시작할 때에”로 번역할 수 있으나 태초(太初)가 처음 시간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의 태초에(ein arche)는 하나님의 무궁한 시간을 뜻하며(시 90:2), 창 1:1의 창조 시간보다 훨씬 오래된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말씀이 곧 성육화(incarnation)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는데, 요한은 직접 3년 반 동안 주님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 생생한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막연한 신앙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신앙 간증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요일 1:2 그 생명이 나타내시매 된지라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그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이심이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도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요일 일서에서 증거 하는 목적은 독자들도 삼위 일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Koinonia)는 매주일 예배 마지막 순서 축도문에서 듣는 말로 “성령님의 교통 하심이” 할 때 그 교통이란 말이 바로 교제, 코이노니아입니다. 협동 또는 친교를 뜻하는 그리스어(κοινωνία)를 영국식으로 표기한 낱말인데, 이 단어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 사귐을 말하며 역사적으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협동과 모임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집단이나 존재해야 하는 친교나 모임의 이상적인 상태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친교, 성도 사이의 사귐, 공유, 관계, 교통, 전달, 사회, 동반자을 말합니다. 코이노니아란 말을 많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요일 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모든 현대 역 번역에서 그리스도를 삭제하고 있는데 이는 죄입니다]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빛 되신 하나님 안에 있으면 어두움의 생활에서 해방되며,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코이노니아가 이뤄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아 깨끗하게 됩니다. 보혈은 구원과 용서의 핵심입니다. 이런 행복한 삶이 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죄를 하나님께 모두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죄와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찬송가 250-282장이 보혈의 찬송입니다. 통합찬송가 182-202장이 보혈 찬송입니다. 하루에 보혈 찬송을 반드시 한 장 이상 부릅시다. 재림 찬송과 보혈 찬송은 우리의 잠자는 믿음을 깨우며, 맥 빠진 믿음을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줍니다. 보혈의 찬송을 부르면 예수님의 보혈이 내 심령 가운데 흐르고 우리 교회 강단에 흐르고 우리 가정을 보혈로 적셔 주시면 죽음의 사자도 넘어갑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브라질에서 귀한 사역을 하시는 이한우 총장님(Fatefe)께서는 교회 음악과 신학을 가르치십니다. 이 찬송의 가서를 “보혈을 지나”보다는 “보혈을 통해”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강의하셨습니다. 지나버리면 안 되고 그 보혈을 통해 아버지의 품으로 갑니다. 그래서 지나를 통해로 고쳐서 불러봅시다
“보혈을 통해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통해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통해 하나님 품으로 한걸음 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찬송 265장(통 199장)을 불러봅시다.
1.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후렴>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널 넘어서 가리라
2. 흉악한 죄인 괴수라도 예수는 능히 구원하네
온몸을 피에 담글 때에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3. 심판할 때에 모든 백성 행한 일대로 보응받네
주님의 피로 죄 씻으면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4. 구주의 사랑 크신 은혜 보혈의 능력 의지하세
심판의 불이 내릴 때에 주님의 진노 면하겠네
찬송가 257장(통 189장)은 벧전 1:18-19장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s of a lamb without blemish and without spot.”에서 부른 찬송입니다. 2003년도 7월에 하와이에서 가진 세계 한인 선교사 총 연합회(KWMC)에서 미주 한인교회 100주년 기념성회 시 김홍도 목사님께서 보혈의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이 찬송을 반복해서 부를 때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1. 내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후렴>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2.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오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3.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 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4. 거룩한 천국에 올라간 후에도 넘치는 은혜의 찬송을
기쁘게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268장(통 202장)은 나이스크(Nyskc, 예배회복운동=새벽기도, 성경애독, 개인전도, 성수주일, 일조전납=십일조)의 주제가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보혈의 능력입니다. 일본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이 찬송을 여러 번 반복하여 부를 때 침착하고 냉정한 성도들이 뜨겁게 은혜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1.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후렴>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2.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 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3. 눈보다 더 희게 맑히는 것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부정한 모든 것 맑히시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4. 구주의 복음을 전할 제목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날마다 나에게 찬송 주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신현균 목사님(염천교회, 성민교회)께서 즐겨 부르시던 찬송이 423장(통 213장)인데 합동 찬송가에는 가사가 “먹빛보다 더 검은… 날래게 뛰 원하며…”로 되어 있었습니다. 보혈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얻어 얼마나 기쁜지 강대상에서 춤을 추며 이 찬송을 하신 것이 눈에 선합니다.
1.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마음이
흰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겼네
<후렴>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나아가
주의 은혜 내가 입어 깨끗하게 되었네
2. 모든 의심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져
슬픈 탄식 변하여 기쁜 찬송 되었네
3. 세상 부귀 영화와 즐겨하던 모든 것
주를 믿는 내게는 분토만도 못하다
4. 나의 모든 보배는 저 천국에 쌓였네
나의 평생 자랑은 주의 십자가로다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언약으로 설정하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과만 언약을 맺고 역사하시는데,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구원과 영생의 대상임을 나타내십니다. 언약 신학은 행위 언약, 구속 언약, 은혜 언약 등으로 나타납니다. 언약 신학의 교리는 16세기 교회 개혁을 통하여 교회에 크게 공헌해 온 신학적 공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언약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성경의 권위. 이신득의. 이신칭의. 만인 제사장 등과 더불어 기독교의 루터교. 개혁교. 장로교. 회중교 등의 중심 교리들 가운데 하나로서 교회 개혁이래 교리적. 신앙적 전통이 되어 왔습니다.
1) 행위 언약(Covenant of Works)
행위 언약은 하나님이 전인류를 대표하는 아담과 맺은 언약으로서, 하나님은 그가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영생(永生)을 주기로 약속하시고, 불순종할 경우에는 영사(永死)로서 형벌하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아담이 범죄 하여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으로 이 언약을 행위 언약이라 함은 행위를 조건으로 영생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2)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
구속 언약은 하나님이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으로서, 선택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성자에게 선택한 사람들을 주시어 그들의 머리와 보증이 되게 하시고, 성자는 자원하여 선택한 사람들의 보증으로 그들을 대신하기로 한 언약입니다.
3) 은혜 언약(Covenant of Grace)
은혜 언약은 하나님에게 피택 된 죄인과 맺은 언약으로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영생을 약속하시고, 피택 된 죄인들은 그 약속을 수납하여 구원 영생을 얻는다는 개념에 근거한 신학 체계로 이 언약은 하나님이 피택된 죄인들과 맺은 언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회개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시니라 I am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to repentance(마 9:13)” 마틴 루터와 요한 칼빈이 사용했던 성경대로 읽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에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만 되어 있는데 킹 제임스 성경에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라고 바르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언약적으로 형성되어진 연합(롬5:12-21, 요15:1-11, 엡1:3이하, 롬6:4-8, 엡2:6, 골3:1-4)이며, 또 육체적 연합의 성격도 있습니다(히2:11-17). 그리고 전 포괄적(죽음, 장사, 부활, 승천, 하늘영광 보좌에 이르는 것까지)인 연합이며, 영원한 연합(롬8:31-39), 종말론적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은 이제 그분 안에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효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과 그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실제적으로 또 인격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성도는 죄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고후5:17)
성령님의 사역은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개개인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론(soteriology)은 또한 성령론(Doctrine of Holy Spirit)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령님께서 자연인을 중생케 하시며, 칭의, 성화, 양자 등의 영적 축복들을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을 구별하는 기본적인 성격들 중의 하나는 다른 종교들이 모두 자력(自力) 종교인 반면에 기독교만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음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주어지는 의로움(칭의)을 받게 되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내적 변화를 가리키는 중생, 그리고 우리의 변화된 외적 신분인 양자됨(요1:12, 롬8:14-16),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해지는 성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이 완성되는 영화의 은총을 받게 되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성도는 성경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진리들, 즉, 우주 만물과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신론), 그리고 그분이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이해(인간론), 인간들이 저지른 죄와 그 결과(인죄론), 그 죄로 말미암아 야기된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성취하신 구속 사역(기독론), 그 성취된 구속 사역을 개개인들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구원 역사(구원론),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와 최종적으로 주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확신 있게 거할 때, 성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리의 터전 위에 굳게 서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히브리어 강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 하와(창 3:22-24) [역대하 1장 주일 설교문] 전무후무한 솔로몬 축복(대하 1:1-13)반응형
[설교]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요일 1:1-4)
* 설교 일시 : 2009.03.18 / 설교 장소 :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1장입니다. 요한일서 1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 찾으셨으면 제가 읽겠습니다. (읽는다.)
본문 : 요한일서 1장
1 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2 (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우리가 그것을 보았고 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며 너희에게 보이노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4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저는 “우리와 교제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말씀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도 요한
요한일서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사도 요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사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순교를 당해서 삶을 마감했지만, 사도 요한은 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고 나서 자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요한일서를 기록할 당시 그는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도 풍성한 계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도들이 성경 기록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당시에는 거의 동시대적으로 기록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모든 서신들을 공유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사도 요한은 먼저 세상을 떠난 다른 사도들의 모든 서신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다른 사도들보다 오랜 세월 동안 믿음의 삶을 걸어왔기 때문에 더욱 많은 연륜과 깊은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사람의 체험이나 생각으로부터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임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기록자들의 인간적인 어떠한 특징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일서를 읽으면서 글의 표현 자체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나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요한일서 말씀을 살펴보시면서, 젊은 시절에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직접 보았고, 들었고,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손으로 예수님을 직접 만졌고, 한 평생을 주님을 따라 걸어온 노 사도의 진국과 같은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큰 은혜를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처음부터
요한일서 1장 1절의 말씀을 보시면, “처음”이란 단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요한복음 1장 1절도 “처음”이란 단어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에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태초부터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은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많은 역사를 거쳐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기까지의 과정을 많이 묵상하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구약의 많은 말씀들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어떻게 메시야가 오시는가, 어떻게 주인공이 역사 가운데 등장하는가를 보여주는 계보요 역사이며 예언의 말씀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17장 24절과 25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24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시므로 손으로 만든 전들에 거하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어떠한 섬김이나 도움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분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스스로 만족하시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사람을 만드셨고, 또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을까요?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말씀에서 그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3절에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교제하기 위하여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 무언가 부족하고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시고 받아내시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고 또 부어주고 교제하려고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다른 서신인 요한계시록 4장 11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주여, 주는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그것들이 주를 기쁘게 하려고 존재하며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
사람은 주를 기쁘시게 하려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선하신 분임을 찬양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을 기뻐하셨다면 사람의 운명은 정말 비참했을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무엇인가를 빼앗으면서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면서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인 요한일서 1장 4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과 사람이 교제하게 될 때 하나님께도 기쁨이 있고 사람에게도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지치고, 힘이 들고, 고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환경이 나를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까?
우리의 삶에 기쁨이 충만하지 못한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만나지 못했고 교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모든 문제는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다시 한 번 주님과 만남으로 우리에게 기쁨이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생명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표현하면서 “생명”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2절에서는 “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그리고 뒷부분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며 너희에게 보이노라.”라고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지옥에 갈 우리의 운명이 천국으로 옮겨진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80년, 100년의 짧은 인생이 끝도 없이 길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을 때, 아담은 하나님과 함께 에덴 동산을 걸으면서 아무런 막힘이 없는 교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불러오셨고, 아담이 이름 짓는 것을 지켜보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선과 악의 분별이 없었던 아담은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통치하면서 모든 일들을 하나님과 의논하고 교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되었고,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망이란 단어는 교제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과 분리되어서 더 이상 교제하거나 함께 즐거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망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식사하지 못하도록 분리시키고, 함께 소풍도 가지 못하도록 분리시킵니다. 이러한 교제의 분리가 슬픔을 가져오게 됩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둘째 사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혼이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과 유황이 타는 호수에서 고통을 받으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망이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생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은 바로 교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기 시작하더라”(눅 15:24).
성경에서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키시고자 친히 화해 헌물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대가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서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죄로 인해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가 구원받을 때 단 한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또 누리며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다 쏟으신 것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 같이 요한복음 17장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교제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학자들도 많은 공부를 통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만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한 만큼 우리는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
우리가 성격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느새 친해지고 좋아하게 되듯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서 교제하게 되면 예수님을 좋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어떤 상태에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분께 부담 없이 나아갈 수 있고 교제를 즐길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요즘 그 동안 아무생각 없이 지나쳤던 한 말씀이 자꾸 떠오르고 묵상이 되고 있는데, 그 말씀은 바로 요한복음 16장 12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직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우리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다른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상처주거나 부담스럽게 하거나 괴롭히려고 말하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말들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진리일 수도 있고, 누구나 동의하는 상식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고, 너무나 정당하고 옳은 주장일 수도 있고, 대화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말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로 말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듣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말을 어떻게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생각하지, 듣는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떻게 유익이 되었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만약 이 우주에서 말할 것이 가장 많은 한 사람을 뽑으라면 우리 주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에 아무런 실수도 없으시고, 그분이 진리 자체이시므로 말씀하시는 것마다 진리이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말하는 것을 스스로 절제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잘 깨닫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과하게 먹으면 탈이 납니다. 사랑과 배려가 많으신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가 감당하고 따라 올 수 있는 만큼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자상하게 알려주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4장 40절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제 해질 무렵에 그들이 다 갖가지 질병으로 앓는 자들을 그분께 데려오니 그분께서 그들 모두에게 안수하사 그들을 고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도 예수님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부터 일어나 기도하시고 하루 종일 사람들을 방문하시고 말씀을 외치셨습니다. 이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하고 지치는 해질 무렵 갖가지 질병으로 앓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셔서 그들 모두에게 한 명, 한 명 일일이 안수하셔서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한 번의 말씀선포로 “여기에 모인 모두 나음을 입을지어다!” 하실 수도 있지만, 한 명, 한 명 안수하시면서 대화하시고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하루 일과로 지친 가운데 수요기도회로 모인 우리들 한 명, 한 명과 교제하시고 우리를 고쳐주기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한 명도 빠짐없이 너무나 자상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의 성품
이제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다 같이 요한일서로 돌아와서 요한일서 3장을 보시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과 15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4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줄을 알거니와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 안에 거하느니라.
15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 속에는 영원한 생명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이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주님과의 교제 가운데 있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게 된다면 주님이 나를 향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향해 오래 참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급하게 바꾸고 변화시키려하지 않으시고 아기에게 이유식을 한 숟갈 한 숟갈 떠 넣어주는 엄마처럼 우리를 자상하게 한 걸음씩 이끌어주셨듯이, 우리도 형제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고 인내하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게 된다면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괘씸하게 여기셨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조건을 요구하셨더라면 우리는 너무나 괴로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 거하고, 생명 안에 거하고, 빛 가운데 거하기 때문에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이상하고 어려운 형제일지라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그분의 사랑을 깨닫나니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그러나 누가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동정하는 마음을 닫아 그를 피하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나의 어린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교만하고 더럽고 추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 온 우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로써 마음이 둔하고 어리석은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과 혀로는 사랑한다 말할 수 있지만,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십자가가 없이는 형제들이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아픔 없이 할 수 없고, 손해를 입지 않고는 할 수 없고, 버리는 것이 없이는 할 수 없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버리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 거하고, 빛 가운데 거하며, 생명 안에 거하고, 진리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만이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풍성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시간, 재물, 재능, 자존심, 생명까지도 형제들을 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았고, 날마다 받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참된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절망적이게도 저의 눈물과 노력과 결심으로는 결코 어떠한 사랑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풍성하시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할 때만이 참된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와 교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와 교제
다시 요한일서 1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
사도 요한은 너희가 먼저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는 개인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아울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사람과 교제하면 우리는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형제와 교제하고 있지만, 그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안에 부어진 주님의 빛과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교제할 때 무엇인가를 주장하려 하기 전에 사랑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무엇인가를 고쳐주려 하기 전에 사랑하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 무엇이 옳은가, 무슨 말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많은 일과 의무와 사역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교제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와 만나기 원하시고 매순간 동행하기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만나고 회복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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