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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5장 주석 – 요한서신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요한일서 제 5장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 ‘믿는 자’에 해당 하는 헬라어 ‘피스튜온'(* )은 현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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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사랑과 믿음 (요한 1서 5:1-5) Ⅰ. 우리가 앞 장 결론 부분에서 주장한 바 대로 사도 요한은 두 가지 관점 즉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과 첫째로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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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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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요한일서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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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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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번 –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일 5:1-21절)(5절)
설교 –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 : 요일 5:1-21절 (5절) 사도 요한은 1-4장까지에서 사랑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요한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독생자를 내어주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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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주석, 요한일서 05장 – HANGL C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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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일서 5장 주석
요한일서 제 5장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 ‘믿는 자’에 해당
하는 헬라어 ‘피스튜온'(* )은 현재형이고 ‘난 자’에 해당하는 헬라
어 ‘게겐네타이'(* )는 완료 시상이다. 양자의 헬라어 시상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인 것이다(Smalley, Stott, Barker).
‘믿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4:15; 요9:22)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본문은 4:21의
반복이다. ‘내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겐네산타'(* )는 ‘낳
다’러눈 의미의 동사 ‘겐나오'(* )의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아버지’라
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낳으시고 자녀삼아 주셨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셨
다. 요한이 이같이 하나님을 ‘내신 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을 가족 관계로
유비(類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게서 난 자’로 번역된 헬라어 ‘게겐네
메논'(* )은 단수형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
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나(Augustine)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법상 단수로도 집합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전체를 지칭할
수 있으며, 문맥상 본문이 믿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
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한
다. 요한은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
분리적 관계성을 강조한다(4:19,20).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본서는 전반적으로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
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본절에서는 그 표현이 반대 형태로 되어 있
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역설적 표현의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로써’가
앞절에 설정된 원리를 가리키며, ‘우리가…사랑하는 줄을’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한
다’로 해석한다(Marshall, Dodd). 그러나 ‘이로써’가 앞절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이유
는 없다. ‘이로써’는 본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에 근거함을 나타낸다(4:8,16,19, Smalley).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불가
분리의 관계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형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증된다.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 하나님
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순종과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는다. 모
든 계명 중 가장 우월한 계명이 사랑 계명인 바 그 안에 하나님의 계명이 내포되어 있
으며(Smalley) 그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그
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예수께서 모범을 보
이신 것이다(요14:31; 15:10).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무거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이아
이'(* )는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는 무거운 또는 가벼운 율법이
라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마23:23, Smalley, Schnackenburg).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셨
고(4:19)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셨으며
(Dodd)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
문에(Calvin)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
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
메논'(* )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
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
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
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 )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
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
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
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
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
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
)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
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
(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1절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라는 표현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
이신 예수 안에 계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Marshall).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된다. 한편 ‘이
기는 자’의 헬라어 ‘니콘'(* )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4절의 ‘니카'(*
, ‘이기느니라’)와 같은 시상이다. 이는 투쟁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겨나가고 있
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5:6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 본문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옆구리를 창에 찔렸을 때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
한다고 주장한다(Augustine, Williams) (2)혹자는 요4장과 6장을 근거로 하여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ullmann, Westcott, Luther, Calvin). (3)혹자는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와 연관하여 물은 정결케하는 것이며 피는 희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Plummer, Candlish). (4)혹자는 물은 예수께서 받으신 요한의 물 세례요 피는 십자
가의 대속의 보혈이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Alford, Meyer, Barker, Stott,
Marshall).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요한 당시에 케린투스
(Cerinthus)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임
하셨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
체를 입고 오셔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을 분명하게 설
파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심을 강조하고 있
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상반절의 반복으로 영지
주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강조한다. 본절 상반절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디'(* , ‘…을 통하여’)를 사용한 반면에 본문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엔'(* , ‘…안에서’)을 사용한다. 본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
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 안에서 그리고 피 안에서 임하신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위치나 장소를 나타내는 두개의 전치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더욱 강도하고 있다(Marshall, Smalley).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 개역성경에는 본절이 앞절과 분리되어 또 하나의 절
로 기술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절이 앞절에 포함되어 있다. ‘증거하는 이’
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마르튀룬'(* )은 현재 분사로 성령께
서 지속적으로 증거하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
체로 오셨음을 믿게 하는 성령께서 믿는 자안에 내주하셔서 지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신다(2:20,27; 4:1-6, Stott). 또한 성령은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임하심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보이셨다(요1:32).
성령은 진리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요14:6)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셨다(요15:26; 16:13).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
이 본문에서 성령께서 진리이심을 선언한 것은 진리이신 성령만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
스도를 올바로 증거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Johnson).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 ‘성령과 물과 피’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과 물과 피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세 가지 등급으로 생각하
여 예언자와 세례요한, 그리고 요한 일서의 저자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Bengel). 그러나 성령을 예언자와만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발살이며 피를 요한 일
서의 저자와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2)혹자는 세 가지 증거
들이 세례(요3:5-8), 성만찬(요6:54-56), 그리고 성령을 받음(요20:22)의 ‘신비적인
사건들’에 각각 상응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그러나 이 주장은 상당히 작위적이
다. 이 견해는 정당성을 주장키 위해 본절의 세 가지 증거들의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더욱이 근거로 제시된 참고 성경 구절들도 예수를 증거한다는 개념과는 무관한 것들이
다. (3)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기독교 초기에 존재한 ‘기름 부음과 세례와 주의 만
찬’이라는 예배 의식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Manson, Nauck).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 이전에 기름 부음을 실행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4)혹자는 물과 피를 세
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전의 상징으로 보아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된다는 견해를 주장한다(Dodd, Bultmann, Law, Westcott, Barker). 세례와 성만찬
즉 이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여 증거한다. (5)혹자는 ‘물과 피’를 6절
과 같은 의미로 보아 물은 예수의 세례를 상징하고 피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상징하며, ‘성령’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의 머리 위로 강
림하셨고(요1:32),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흘리사 그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요19:30)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증거하심을 가리킨다고 주
장한다(요7:39; 20:22, Smalley).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
성을 지닌다.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 요한은 본문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같은 결과를 향
하여 함께 작용함으로써 한 점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세 가지 증거들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
함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 시대 율법에 의하면 증인이 둘 이상이라야 어떤 사실이 입
증되었다(신19:15). 요한이 이러한 율법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을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다(Stott).
=====5: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 율법에 의
하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증거하는 일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신19:15). 죄악되
고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증거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면 더욱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선포되며 물과 피를 통하여 역사 속에 선포된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면(裏面)에
서 세 가지 증거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
호티 하우테 에스틴 헤마르튀리아 투 데우, 호티 메마르튀레켄 페리 투휘우 아우투).
– 본문은 두 개의 ‘호티'(* , ‘왜냐하면’)로 구성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
여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 하나님의 증거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세 가지 증거들,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증거하신’에 해
당하는 헬라어 ‘메마르튀레켄'(* )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
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유효함을 나타낸
다. 즉,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의 아들
임을 확증하셨으며(마3:16,17; 요1:33,34)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증언하셨다(요12:28-30). 이러한 역사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
람들에게 증언되고 있으며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의 내증으로 실현되고 있다
(Stott, Barker).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
정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절). 그 결과 믿는 자들은 자
기 자신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소유하게 된다. 이 증거는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
하여 증거하시는 내적 증거를 의미한다(8절, Brooke, Law, Williams). 이러한 내적 증
거는 외적 증거인 ‘물과 피’와 조화를 이루어 믿는 자들의 믿음을 근원이 됨과 동시에
결과가 된다(Stott).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음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
시며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한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
님께서 아들에 관해 이렇게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
님이 하신 증거를 거짓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것
이다. 요한은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극단적으로 확증한
다. 한편 본절은 롬1:19,20을 상기시킨다. 우주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들은 도무지 자기의 불신앙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5: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 ‘영생’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이 생명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가(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현시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신 예수와의
관계성 속에서 믿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과 유일
하시며 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고의 생활이다(요17:3,
Smalley). 이러한 영생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
육신하신 인간이심을 증거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 들일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그러기에 이 결과인 영생을 알고 소유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며, 예수께
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주신’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에도켄'(* )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보정 과
거 능동태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 구속
사역을 행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이미 주셨으며, 영생을 주신 사실은 불변한다는 의
미를 함축한다.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과 아들의 불가 분리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
에 한 인간이신 예수 안에 현시되어서 그 아들이 행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즉 ‘물과
피’의 증거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생명임에
도 불구하고(요14:6) 요한이 예수와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고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여기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
(* )은 ‘에코'(* , ‘가지다’)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이다. 요이1:9에
서는 같은 뜻의 현재 동사 ‘에케이'(* , ‘가지다’)가 ‘모시다’란 말로 번역
된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란 현재 아들을 마음 속에 모신 자를 가리킨
다. 아들이 생명 자체이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11절; 1:2; 요11:25; 14:6)
아들을 모신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높은 수준의 영적,
도덕적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서 아들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아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며(3:24) 완전하게 하며(4:12) 영원한
삶을 영위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
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
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절 상반절에서는 ‘아들’
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
며(Bengel, Plummer) 혹자는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
님께서 영생을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ooke,
Marshall).
=====5:13
이것을 쓴 것은. – ‘이것을’의 헬라어 ‘타우타'(* )는 문자적으로 ‘이
러한 것들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우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1-1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혹자는 본서 전체
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malley, William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
하다. 왜냐하면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20:31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타우타’가 다양한 주제를 가리키는 복수로서 1-12절까지 언급된 영
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 )는 서신체 부정 과거로 비록 요한이 현재 본서를 기록한
다 할지라도 본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로 기록되어 있다.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히나'(*
,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서 본절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임을 나타낸다. 본절
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요20:3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
신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이 요한 일서의 본론이고 14-21절은 후대의 삽입
이라고 주장한다(Bultmann). 본절이 요한 일서의 전체적 결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성을 가지나 결론적 언급이 꼭 이 편지의 맨 마지막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본절은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끝맺기 위한 결론적 언급의 서두로 간
주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 여기서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 )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
음을 암시한다(Brooke).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아'(* )는
본서에서 네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과(2:28
;4:17),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3:21,22). 본절에
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구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메
다'(* )는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
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
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요15:7, Marshall).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 본문은 14절의 반복이다.
14절의 간구와 응답은 구체적 현실성이 강조된 반면에 본절의 경우는 일반적 원리성이
강조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는 죄악된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간
구는 당연히 제외되며 앞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올바른 기도를 가
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요11:42) 믿
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신다.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테카멘'(* )은 직설법 완료형으로서 기도자의 객관적 기도 사실
과 그 결과를 강조한다.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간구는 이미 그 결과를 얻은 것
이다. 기도의 가시적인 응답이 미래에 나타날지라도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였
다(Plummer, Brooke, Dodd). 한편 본절은 ‘안즉…아느니라'(*
, 오이다멘…오이다멘)로 되어 있어 지도자가 갖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초래하여 기도자의 확신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시사한다(Stott).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
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 본절에 나타난 ‘사망에 이르지 아니
한 죄…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살인이나 간음 혹
은 우상 숭배와 같은 특별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그
러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로 분류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이 견해는 적합하지 않다(Stott). (2)혹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배교나
적그리스도 혹은 거짓 교사들의 죄와 같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부합
되지 않는 죄를 가리키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믿는 자들이 유혹에 넘어가 범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Smalley, Johnson,
Alford, Clarke). 이 견해는 이제까지 요한이 언급한 문맥과 일치한다. 이 두 번째 견
해에 대해 혹자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게
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반론을
제기한다(Stott). 그러나 이 반론 역시 문맥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즉 지속되는 불의
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배교를 하도록 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기에 요한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며 우상을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며(18,21절)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배교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히6:4-6, 10:26-31). 한편 요한은
앞에서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진술한 바와 같이 본절에서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범죄한 형제를 위한 기도는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직접 제공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행위로
(3:17)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이다(Johnson). 이러한 중재 기도를 통해서 범죄
한 형제는 죄의 고백의 필요성과 서로의 용서의 필요성을 확인하며 행하게 된다(요20:
23). 이러한 중재 기도의 권면과는 달리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 즉 배교의 죄를 범
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금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는다.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 여기서 ‘불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키아'(*
)는 ‘옳지 못한 행실’을 의미한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
르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본문을 진술한 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인간적으로 구분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죄들의 경중을 마음
대로 구분함으로써 ‘죄 자체의 심각성’이 축소되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5:18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본문에 대한 해석
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앞절과 관련시켜서 믿는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Calvin). (2)혹자는 ‘범죄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
라어 ‘우크 하마르타네이'(* )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믿는 자는 계속 반복되는 범죄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Stott). 두 가지 견해는 나름
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우리가 아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멘'(*
)은 18-20절에 걸쳐 세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오이다멘’은 지식으리 활
동 상황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 ‘알다’)와 달리 주로 지식의 상태
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절에서 영적 지식의 확실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
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본
절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 호겐
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상반절의
‘난자'(* , 게겐네메노스)는 완료 분사형인 반면에 본문의
‘나신 자'(* , 겐네데이스)는 부정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2)’나신 자’를 예수 그리스도
로 보아야만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은 신약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17:12; 벧전1:5; 유1:24).
요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악과 사단의 영향력에서 보전하실 것임을 선언
하고 있다(요17:12,15).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 본
절은 하나님과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
미한다. 비록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게 속하여 사단이 만
지지도 못할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
게 하신 것과. –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며(1:1,2)
‘참된 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Smalley, Stott, Brooke).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로서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요14:6) 하나님을 바
로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
에게 참된 자되신 하나님의 실재를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 본문은 본절 상
반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고 있
음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시는 중보자가 되신다. 그 결
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은 참된 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게 되며 예수 그
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수께서 하나
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17:2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는 문자적으로 ‘이 사람’을 의미한다. ‘후토스’가 가리키는 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Smalley,
Brooke). (2)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uther, Calvin, Marshall,
Hass, Schnackenburg, Brow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녀서 어느 하나를
지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토스’는 문맥상 그리스도를 가리키
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Johnson).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는 참 하나님
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
육신을 부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한 것에 대한 요한의 결론적인 공격이다. 한편 그리스
도께서 ‘영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서 서두에 언급된 것으로(1:1,2; 요11:25;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수신자들
이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결론적 진술이다
(Smalley).
=====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
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
서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
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우상에서 멀
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요한일서 주석 끝===========================
메튜 헨리 주석, 요한일서 05장
5:1 사랑과 믿음 (요한 1서 5:1-5) Ⅰ. 우리가 앞 장 결론 부분에서 주장한 바 대로 사도 요한은 두 가지 관점 즉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과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과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언급한 다음 셋째로 아래와 같이 부언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의 뚜렷한 관계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다. 우리의 믿는 형제와 동료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1절)라고 하였다. 1. 믿는 형제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묘사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다시 말해서 그가 메시야 되심과 그의 본성과 사명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 모든 세상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중의 머리되심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모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및 왕들의 머리가 되심을 믿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영원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온전한 준비와 성장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보호와 지도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이다.
2. 또한 그는 혈통으로 말미암아 권위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다”(1절). 이에 대한 믿음의 본질과 이에 따라 이룩되는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기가 넘치게 된다. 하나님의 양자 됨은 육신의 혈통에 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비록 본래 이방의 죄인들일지라도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이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의 아들을 사랑해야 하며, 아버지의 형상을 이어받은 그들에게 있어서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닮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본적으로 사랑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믿는 형제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묘사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다시 말해서 그가 메시야 되심과 그의 본성과 사명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 모든 세상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 중의 머리되심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모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및 왕들의 머리가 되심을 믿는 자들이다. 또한 그들은 영원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온전한 준비와 성장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보호와 지도에 자신을 맡기는 자들이다.또한 그는 혈통으로 말미암아 권위 있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다”(1절). 이에 대한 믿음의 본질과 이에 따라 이룩되는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기가 넘치게 된다. 하나님의 양자 됨은 육신의 혈통에 의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나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비록 본래 이방의 죄인들일지라도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이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다.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의 아들을 사랑해야 하며, 아버지의 형상을 이어받은 그들에게 있어서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닮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먼저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본적으로 사랑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자들”을 사랑해야 한다. Ⅱ. 사도 요한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 중생한 자들에게 베푸는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 혹은 참된 복음적인 성격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준다. 진실성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세속적인 조건 즉 그들이 부하다든가 학식이 많고 우리에게 친절하며, 우리 교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동하는 은혜가 임하며 그의 형상과 모습이 그들에게 나타나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사랑을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 것임이 본서에 나타나고 있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와 주 예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의 사랑이다.
2. 다음으로 하나님의 대한 사랑의 진실성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경건한 복종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2절)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이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진실되게 그리고 복음적인 입장에서 사랑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한 영혼으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3절).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니” 이로써 그의 계명이 쉽고 기쁜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지키기로 결심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 내가 주의 율례를 사랑하나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사랑과 성령으로 내 믿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
3. 중상의 결과와 효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이 세상을 지혜롭게 영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4절).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을 위하며 결과적으로 다른 하나의 세계를 위해 태어난 자이다. 또한 보다 높고 나은 세계를 향한 성품과 성향을 지닌 자이다. 그는 무기를 공급받음으로 이로써 세상을 물리치고 정복할 수 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4절). 믿음은 승리의 근본이요 세상을 이기는 수단과 도구며 영적인 갑옷이요 크나큰 무기가 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믿음 안에서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
(2) 믿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에서 또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며,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철퇴시킨다.
(3)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성결케 하며 세상이 우리를 뒤엎고 정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4)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이 세상의 불평과 아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이끌어낸다.
(5) 믿음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거하는 자마다 더 크고 은혜로우신 성령 안에 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6) 믿음은 이 세상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다. 중생한 자들에게 베푸는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 혹은 참된 복음적인 성격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준다. 진실성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세속적인 조건 즉 그들이 부하다든가 학식이 많고 우리에게 친절하며, 우리 교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들 안에 하나님의 생동하는 은혜가 임하며 그의 형상과 모습이 그들에게 나타나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사랑을 받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어떠한 것임이 본서에 나타나고 있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와 주 예수의 택함을 받은 자로서의 사랑이다.다음으로 하나님의 대한 사랑의 진실성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경건한 복종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2절) 하나님께 대한 우리들의 사랑의 진실성이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진실되게 그리고 복음적인 입장에서 사랑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한 영혼으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그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3절).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것이니” 이로써 그의 계명이 쉽고 기쁜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지키기로 결심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오! 내가 주의 율례를 사랑하나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사랑과 성령으로 내 믿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중상의 결과와 효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이 세상을 지혜롭게 영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4절).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하나님을 위하며 결과적으로 다른 하나의 세계를 위해 태어난 자이다. 또한 보다 높고 나은 세계를 향한 성품과 성향을 지닌 자이다. 그는 무기를 공급받음으로 이로써 세상을 물리치고 정복할 수 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4절). 믿음은 승리의 근본이요 세상을 이기는 수단과 도구며 영적인 갑옷이요 크나큰 무기가 된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믿음 안에서 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믿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에서 또한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며,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철퇴시킨다.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성결케 하며 세상이 우리를 뒤엎고 정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킨다.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이 세상의 불평과 아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이끌어낸다.믿음은 복음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거하는 자마다 더 크고 은혜로우신 성령 안에 거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믿음은 이 세상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다. Ⅲ.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의 참된 정복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정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딛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세상은 하늘나라로 가는 노정을 가로막고 있으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이로써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또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하늘나라로, 그리고 그곳에서 기쁨이 충만하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오셨음을 믿는다. 이렇게 믿는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겨야만 한다. 1. 그 이유는 이 세상이란 그의 영혼과 경건함과 구원 그리고 축복에 대한 맹렬한 대적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2.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내는 일이 구세주의 사명 중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3. 그는 지상에서 주 예수의 생애와 교훈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부인되고 정복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다.
4. 그는 주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이 세상을 정복하셨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도 주 예수의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주님의 승리의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5. 그는 세상에 대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르침과 지도를 받는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4).
6.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산 소망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벧전 1:3).
7. 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어서 그곳에서 그의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장소를 예비하고 계심을 믿는다(요 14:2).
8. 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며 세상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들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실 것임을 알고 있다(요 14:3).
9. 그는 이 세상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이 세상을 넘어서 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영과 성향에 사로 잡혀 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2)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의 개종자들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부여한다. 기독교의 계시는 세상을 정복하며 가장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복되고 영원한 세상을 얻는데 가장 큰 수단이 된다. 이러한 계시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반격적인 이 세상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전쟁과 다툼이 어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이 세상의 길이나 기질과 본질과는 정반대의 거룩한 원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이 전달되어지고 두루 퍼지는데 있어서 세상의 영의 능력을 능가하며 또한 이에 거스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 세상은 그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또한 지금도 아니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과 구분되어 있으며 천국과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원받은 무리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이 세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구원받을 모든 무리들이 그와 함께 항상 거할 수 있도록 또한 만일 이생뿐이라면 그들은 종국에 가서 가장 비참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믿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하늘로 올라가심 같이 그들의 처소를 하늘나라에 예비하기 위해 승천하심을 그들에게 확신시키셨다. 그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영원한 축복의 세계는 가장 명확히 드러났다. 또한 이 세상의 공격과 시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이 자신의 화살로 자신을 죽이며 자신의 무기로 자신을 겨냥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반대와 대적과 핍박은 우리들이 세상을 정복하며 무리로 하여금 보다 높은 영원한 세계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들은 각계 각층의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힘입어 이 세상을 이기며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정복하고 놀라운 승리의 기쁨을 맞이하는 영웅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후에 이를 내세가 없으므로 슬퍼하는 일이 없다. 그는 다만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또한 예민한 영적인 감각으로 열심히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나간다.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외에 누가 이렇게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이 세상이란 그의 영혼과 경건함과 구원 그리고 축복에 대한 맹렬한 대적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내는 일이 구세주의 사명 중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갈 1:4)라고 바울은 말하였다.그는 지상에서 주 예수의 생애와 교훈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부인되고 정복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다.그는 주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 이 세상을 정복하셨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도 주 예수의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주님의 승리의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그는 세상에 대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르침과 지도를 받는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4).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산 소망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벧전 1:3).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어서 그곳에서 그의 신실한 성도들을 위하여 장소를 예비하고 계심을 믿는다(요 14:2).그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며 세상을 심판하시고 믿는 자들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실 것임을 알고 있다(요 14:3).그는 이 세상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이 세상을 넘어서 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영과 성향에 사로 잡혀 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2)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그의 개종자들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부여한다. 기독교의 계시는 세상을 정복하며 가장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복되고 영원한 세상을 얻는데 가장 큰 수단이 된다. 이러한 계시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과 반격적인 이 세상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전쟁과 다툼이 어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이 세상의 길이나 기질과 본질과는 정반대의 거룩한 원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이 전달되어지고 두루 퍼지는데 있어서 세상의 영의 능력을 능가하며 또한 이에 거스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 세상은 그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또한 지금도 아니다. 그의 나라는 이 세상과 구분되어 있으며 천국과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원받은 무리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은 이 세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구원받을 모든 무리들이 그와 함께 항상 거할 수 있도록 또한 만일 이생뿐이라면 그들은 종국에 가서 가장 비참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음을 믿도록 하기 위해 그가 하늘로 올라가심 같이 그들의 처소를 하늘나라에 예비하기 위해 승천하심을 그들에게 확신시키셨다. 그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영원한 축복의 세계는 가장 명확히 드러났다. 또한 이 세상의 공격과 시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를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이 자신의 화살로 자신을 죽이며 자신의 무기로 자신을 겨냥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반대와 대적과 핍박은 우리들이 세상을 정복하며 무리로 하여금 보다 높은 영원한 세계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우리들은 각계 각층의 천군 천사들의 도움을 힘입어 이 세상을 이기며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을 정복하고 놀라운 승리의 기쁨을 맞이하는 영웅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후에 이를 내세가 없으므로 슬퍼하는 일이 없다. 그는 다만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며 또한 예민한 영적인 감각으로 열심히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나간다.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외에 누가 이렇게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을까?
5:6 하늘과 땅의 증거 (요한 1서 5:6-9) 신자의 믿음은 이와 같이 강하고 승리적인 것이므로 그 믿음은 튼튼한 기초에서야 하며, 주 예수의 거룩한 사명과 권위 그리고 직무에 대한 뚜렷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고조되어야 한다. 즉 예수는 그가 올 때에 신임장을 가지고 오셨으며, 그 신임장은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Ⅰ. 그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은밀하게 오신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 당당하게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오셨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이다.” 그는 우리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이 사명을 보다 확실히 수행하기 위해 “물과 피로서” 임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임한 자가 없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임하셨다. 다시 말하거니와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서 임하셨다”(6절). 이 세상을 위한 가장 참된 구세주의 증거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로 임하셨다.” 그가 우리를 고치며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물과 피로 임하신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이 구원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셔야만 했던 사실은 아래와 같은 사실들로 나타난다. 1.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부패된 상태에 있다.
(1) 우리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잠재하고 있는 죄의 힘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져 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내적인 불결로부터 정결함을 얻기 위한 신령한 물이 필요하다. 즉 이 신령한 물이 피의 영혼과 힘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선 그에 의하여 중생에 이르게 하는 씻김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이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너희 발을 씻겨 줌이 없이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이러한 사실을 주님이 넌지시 암시해 주셨다.
(2) 우리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죄의 행위와 힘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며 그의 귀하고 은혜스러우며, 아름다운 면전으로부터 영원히 쫓김을 당했다. 따라서 우리들은 속죄의 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다”(히 9:22)는 것이 하늘나라 법정의 법이요 판결문이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피를 가지고 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
2. 정결케 하는 두 가지의 방법은 옛날 의식에서 나타났다. 사람과 물건은 물과 피로써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임이니라”(히 9:10)한 말씀이 있다. 또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3) 하신 말씀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히 9:22) 하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불결함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는 두 가지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군사들의 창에 찔려 그의 옆구리에서는 즉시 물과 피가 흘렀다. 사랑하는 사도는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만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실에 어떤 신비한 요소가 있는 것으로 기록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도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4, 35)고 말하고 있다. 이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필수적이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물로써 우리의 영혼이 빛 가운데서 천국과 성도의 신분에 합당하도록 씻기어지고 정결함을 받게 된다.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의 율법은 존귀하게 되며 그의 용서하시는 탁월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가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은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 26)고 하셨다.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룸으로 의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되었다. 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성령이 우리의 성품을 깨끗케 하는 내적인 세척을 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함이라”(14절). 물과 아울러 피는 거룩하신 구속자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에 가장 필요 불가결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물과 피는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모든 것을 확고히 하고 온전케 하실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죄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물과 피로써 임한 그는 온전한 구주이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무엇을 가지고 임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신임장을 아래와 같은 증거로써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부패된 상태에 있다.우리는 우리의 본성 안에 잠재하고 있는 죄의 힘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져 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내적인 불결로부터 정결함을 얻기 위한 신령한 물이 필요하다. 즉 이 신령한 물이 피의 영혼과 힘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선 그에 의하여 중생에 이르게 하는 씻김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의 역사가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이를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너희 발을 씻겨 줌이 없이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 이러한 사실을 주님이 넌지시 암시해 주셨다.우리들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죄의 행위와 힘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었으며 그의 귀하고 은혜스러우며, 아름다운 면전으로부터 영원히 쫓김을 당했다. 따라서 우리들은 속죄의 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다”(히 9:22)는 것이 하늘나라 법정의 법이요 판결문이다. 그러므로 구세주는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 피를 가지고 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었다.정결케 하는 두 가지의 방법은 옛날 의식에서 나타났다. 사람과 물건은 물과 피로써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임이니라”(히 9:10)한 말씀이 있다. 또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3) 하신 말씀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히 9:22) 하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이중적인 불결함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는 두 가지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군사들의 창에 찔려 그의 옆구리에서는 즉시 물과 피가 흘렀다. 사랑하는 사도는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만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사실에 어떤 신비한 요소가 있는 것으로 기록해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도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4, 35)고 말하고 있다. 이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필수적이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물로써 우리의 영혼이 빛 가운데서 천국과 성도의 신분에 합당하도록 씻기어지고 정결함을 받게 된다.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며 그의 율법은 존귀하게 되며 그의 용서하시는 탁월성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바울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가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은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 26)고 하셨다.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룸으로 의로운 존재로 나타나게 되었다. 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성령이 우리의 성품을 깨끗케 하는 내적인 세척을 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 아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함이라”(14절). 물과 아울러 피는 거룩하신 구속자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에 가장 필요 불가결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 물과 피는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모든 것을 확고히 하고 온전케 하실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죄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물과 피로써 임한 그는 온전한 구주이시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무엇을 가지고 임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신임장을 아래와 같은 증거로써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Ⅱ.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케 이루시는 성령이시다(6절). 세상의 구주로서의 사명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지원할 수 있고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지속적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거룩한 능력이 그와 그의 복음과 그의 종들에게 함께 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왔으며, 무슨 권위로써 보냄을 받았는지를 세상에 알려 줄 수 있다는 것도 당연하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리스도 자신의 예언에 의하면 “내가 사람들에 의하여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릴지라도 그는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인데 이는 그가 내 것을 받아 위하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나의 사명을 그대로 이어받지는 않으실 것이다. 즉 그는 너희를 위하여 죽으시고 또한 다시 살아나시는 일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의 일을 이어받아 나의 일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수행할 것이며 나의 임무와 진리 그리고 주장을 취하여 이를 너희와 너희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나타내 보이게 될 것이다”(요 16:14). 여기서 또한 사도는 이 증인(성령)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점을 부연하고 있다. 즉 “성령은 진리이다”(6절). 그는 하나님의 영이시오, 거짓말할 수 없는 분이다. 어떤 사본은 “그리스도는 진리니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증거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증거하는 자가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그 시대의 진리요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나 한 두 개의 사본이 원본의 의미를 변케 하는 일은 합당치 못하다.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이 가장 합당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를 고수하고 있다. “성령은 진리니라.” 그는 참으로 진리의 영이시다(요 14:17). 그는 진리의 영이시며 모든 뜻을 나타낼 만한 증거자로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권위에 대해 하늘로부터 나타난 모든 증인들 중 한 증인이 되신다. “이는 하늘에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니 이들 셋은 하나이니라. 성령의 증거가 참된 서임을 7절에서 가장 적절히 표현되고 있다. 만일 성령이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말씀과 함께” 땅의 증인이 되신다면 그는 참되시고 그 자신이 진리이심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1. 우리들은 7절에 관한 분분한 논쟁에 접하게 된다. 대부분의 옛 헬라어 사본에는 7절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 점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없다. 어느 사본에 이 구절이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에 대해서는 비평가들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비평가들이 참고하고 있는 사본의 통일성과 진가를 우리들에게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류 투성이의 고전 헬라어 신약 성경과 같이 어떤 사본들은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므로 이로써 비평가들은 바른 독송(讀誦)을 시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본 수집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라. 거기에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본과 그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합리적인 추론이 있다.
(1) 만일 우리가 7절을 빼고 8절을 대신 놓게 된다면 6절의 내용 즉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오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라고 한 내용과 “증거하는 이는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하고 하신 말씀과는 너무나 동일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본문만큼 세 가지 증거하는 자들에 대한 서론으로써 합당하지 못한 것이 된다.
(2) 많은 사본들이 “땅 위에”라고 하는 특수한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 즉 “증거하는 이가 땅 위에 셋이니”라고 했다. 이 구절은 다른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몇몇 증거에 대해서는 현저히 어울리지 않는 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분문에 의혹을 품고 있는 자들에 의하면 7절이 누락되어 있는 대부분의 책 중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이유로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6절을 예로 든다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말씀과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한 구절은 만일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오류가 없이 참되시고 진리 자체가 되시는 분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자 할 때 지상에 있는 모든 증거를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했음을 상상하는 길이 없이는 이 구절은 “증거하는 이가 땅 위에 셋이니”라는 말씀과는 자연스럽고도 적당하게 연결될 수 없다.
(3) 헬라어 원전에서 7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어떤 사본은 e]n eivsin-즉 하나이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다른 사본은 “한편이라” 혹은 “같으니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8절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evu th/gh/-즉 땅에(on earth) 대신 e,pi, th/g gh,j-즉 땅 위에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단순히 일반적인 라틴어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권위만이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신뢰케 하는 바 어떤 헬라의 권위 있는 문서에 의존하고 있는 듯싶다.
(4) 7절은 사도 요한의 서체와 신학에 가장 잘 일치되고 있다.
[1] 사도 요한은 “아버지”란 칭호를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그는 유일한 하나님을 암시하거나 아들로부터 거룩하신 위(位, porson)를 구본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리니 그가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리라.”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 11:3). [2] “말씀”이란 칭호는 이 사도에게는 가장 특이한 것(꼭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지라도)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본서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세례의 형식이나 교회의 일반적인 용어로 보아 “말씀”보다 “아들”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며 합당했을 것이다. 터툴리안(Tertullian)과 씨프리안(Cyprian)이 구절을 언급할 때에 “아들”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말씀”이란 말을 피하고 “아들”이란 말을 씀으로 본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씨프리안의 표현은 파컨더스(Facundus)의 인용문에서 명확히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즉 “칼타고의 감독이요, 순교자인 성·씨프리안은 삼위일체에 대해 기술한 서한문과 다른 저서 가운데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사도 요한의 증거를 언급했다. 사도 요한이 주께서 이르시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고 하셨음을 말하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언급한 다음 이 셋은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이들이 하나라고 하는 말은 다른 곳에는 없고 7절에만 나타나 있다. 기억에 의존하든가 혹은 말보다도 사건을 이름보다도 인물을 중요시하던(일반적인 또는 논쟁적 토론에서) 씨프리안은 제 2위를 “말씀”이란 칭호 대신에 “아들”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씨프리안은 성령과 물과 피는 요한이 하나라고 말한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을 의미했다고 하는 파컨더스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요한의 의견에 만족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씨프리안은 모두 명칭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가 기술한 명칭의 순서도 바꾸어 놓았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씨프라안이 두 번째로 놓은 피(아들)란 명칭을 사도는 맨 나중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7절에 관한 분분한 논쟁에 접하게 된다. 대부분의 옛 헬라어 사본에는 7절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 점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없다. 어느 사본에 이 구절이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에 대해서는 비평가들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비평가들이 참고하고 있는 사본의 통일성과 진가를 우리들에게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오류 투성이의 고전 헬라어 신약 성경과 같이 어떤 사본들은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르므로 이로써 비평가들은 바른 독송(讀誦)을 시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본 수집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라. 거기에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사본과 그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합리적인 추론이 있다.만일 우리가 7절을 빼고 8절을 대신 놓게 된다면 6절의 내용 즉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오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라고 한 내용과 “증거하는 이는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하고 하신 말씀과는 너무나 동일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본문만큼 세 가지 증거하는 자들에 대한 서론으로써 합당하지 못한 것이 된다.많은 사본들이 “땅 위에”라고 하는 특수한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 즉 “증거하는 이가 땅 위에 셋이니”라고 했다. 이 구절은 다른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몇몇 증거에 대해서는 현저히 어울리지 않는 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분문에 의혹을 품고 있는 자들에 의하면 7절이 누락되어 있는 대부분의 책 중에는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동일한 이유로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6절을 예로 든다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말씀과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한 구절은 만일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오류가 없이 참되시고 진리 자체가 되시는 분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자 할 때 지상에 있는 모든 증거를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했음을 상상하는 길이 없이는 이 구절은 “증거하는 이가 땅 위에 셋이니”라는 말씀과는 자연스럽고도 적당하게 연결될 수 없다.헬라어 원전에서 7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어떤 사본은 e]n eivsin-즉 하나이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 다른 사본은 “한편이라” 혹은 “같으니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8절의 경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evu th/gh/-즉 땅에(on earth) 대신 e,pi, th/g gh,j-즉 땅 위에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단순히 일반적인 라틴어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권위만이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신뢰케 하는 바 어떤 헬라의 권위 있는 문서에 의존하고 있는 듯싶다.7절은 사도 요한의 서체와 신학에 가장 잘 일치되고 있다.사도 요한은 “아버지”란 칭호를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그는 유일한 하나님을 암시하거나 아들로부터 거룩하신 위(位, porson)를 구본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리니 그가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리라.”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 11:3).”말씀”이란 칭호는 이 사도에게는 가장 특이한 것(꼭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지라도)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본서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세례의 형식이나 교회의 일반적인 용어로 보아 “말씀”보다 “아들”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며 합당했을 것이다. 터툴리안(Tertullian)과 씨프리안(Cyprian)이 구절을 언급할 때에 “아들”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말씀”이란 말을 피하고 “아들”이란 말을 씀으로 본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씨프리안의 표현은 파컨더스(Facundus)의 인용문에서 명확히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즉 “칼타고의 감독이요, 순교자인 성·씨프리안은 삼위일체에 대해 기술한 서한문과 다른 저서 가운데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사도 요한의 증거를 언급했다. 사도 요한이 주께서 이르시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고 하셨음을 말하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언급한 다음 이 셋은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이들이 하나라고 하는 말은 다른 곳에는 없고 7절에만 나타나 있다. 기억에 의존하든가 혹은 말보다도 사건을 이름보다도 인물을 중요시하던(일반적인 또는 논쟁적 토론에서) 씨프리안은 제 2위를 “말씀”이란 칭호 대신에 “아들”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씨프리안은 성령과 물과 피는 요한이 하나라고 말한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을 의미했다고 하는 파컨더스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요한의 의견에 만족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씨프리안은 모두 명칭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가 기술한 명칭의 순서도 바꾸어 놓았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씨프라안이 두 번째로 놓은 피(아들)란 명칭을 사도는 맨 나중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아들”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로써 사도는 아들 자신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씨프리안은 생각했음을 추론해야 한다. 그 아들은 물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으나, “아들”의 옆구리에서 흐른 물로써 사도 요한은 성령의 위(person)를 나타내려 했고, 6절에서는 진리로 나타나 있으며, 복음에서는 진리의 영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바 성령으로서 사도는 “아버지”의 위(person)를 나타내고 있음을 추론해야 한다. 실은 사도 요한은 “아들”과 “성령”이 연관되어질 경우 자신이 이러한 명칭을 사용한 곳이 아무데도 없다. 우리는 칼타고의 교부가 사도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던 충분한 증명을 요구하게 된다. 사도를 이렇게 이해하는 그는 역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땅 위에서 세 증거자들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셋째, 씨프리안은 세 증거자들이 되고 이 셋은 하나임을 주장하고 있음을 파컨더스는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만들은 8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7절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 말들은 땅 위에 있는 성령과 룰과 피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에 대해 언급되어지고 있다. 씨프리안과 동시대의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Debaptismo haere ticorum의 저자가 헬라어 사본과 고전 번역물과 일치하고 있는 요한의 말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한이 그의 서신 가운데서 우리 주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는 물과 피로써 임하였는데, 물로만 아니라 물과 피로써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요, 이 셋은 같다.” 만일 모든 헬라어 사본과 고전 번역물이 성령과 물과 피에 관해 언급하고 in unum sunt -즉 그들이 같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면 씨프리안 당시의 사본(copies)에 나타난 다양성 즉 그들은 하나(they are one, unum sunt)라고 쓰여져 있다고 씨프리안이 말한 것은 헬라어 사본이나 고전 번역물에 속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씨프리안의 말은 7절에 대한 확고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원문의 고안자가 하늘의 둘째 증거자이신 “말씀”에 대해 사도적인 명칭을 명확히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암시처럼 보여진다. [3] 이 사도는 구세주의 옆구리에서 흐른 물과 피의 역사를 유일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구세주의 약속과 구세주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증거하고 그의 복음서(요 14:16, 17-26; 15:26; 16:7-15)에 나타난 대로 불신적인 세계에서 그의 의로운 자들에게 확신시키고자 성령이 오시리라는 예언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의 복음서나 그가 인용한 용어로 보아 가장 타당한 것이다.(5) 사본의 가필자가 7절을 고안해서 삽입하기보다는 본문을 베낀 사람이 한눈을 팔거나 혹은 필기를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7절이 그 책장 맨 윗부분에서나 또는 가장 아랫부분에서 말살되거나 훼손되기가 더 쉬운 일이었다. 창피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필경사는 대단히 대담하고도 뻔뻔스러운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고, 거룩한 책에 당돌하게 첨가를 기도한 자도 또한 불경한 자임이 틀림없다.
(6)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하여 그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를 밝혀 주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증거를 말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 9절에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데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증거를 생략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상에서의 세 가지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증거가 되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참되시며 온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증인이 될 수 없다. 원본에 있어서 삼위일체 반대론자들은 성령이나 물과 피가 하나님 자신이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으로는 주 예수의 진리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의 증거와 그의 성직수임의 신성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근거와 구주께서 가지고 오신 신임장과 간략히 요약된 설명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철회하고, 있지만 부분은 이에 대한 모든 뜻을 내포하고 있다.
2. 이러한 합리적 근거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가 진리 되심을 증거하는 바 성령을 말한 다음, 성령은 하늘에 계시고 그는 진실하실 뿐 아니라, 진리 자체가 되심을 나타내 보여주는 또 다른 자들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면서, 성령도 진리이심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는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신데 이 셋이 하나이니라”(7절).
(1) 사명과 자격에 있어서 주 예수의 진실성과 권위를 세상에 증거하고 보증하는 바 거룩하신 삼위되신 자들을 나타내고 있다.
[1] 맨 첫 번 순으로 “아버지”가 계시다. 즉 그는 주 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는 동안의 사명을 확증하고 있다. 이 사도는 구세주의 옆구리에서 흐른 물과 피의 역사를 유일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구세주의 약속과 구세주를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증거하고 그의 복음서(요 14:16, 17-26; 15:26; 16:7-15)에 나타난 대로 불신적인 세계에서 그의 의로운 자들에게 확신시키고자 성령이 오시리라는 예언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자로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의 복음서나 그가 인용한 용어로 보아 가장 타당한 것이다.사본의 가필자가 7절을 고안해서 삽입하기보다는 본문을 베낀 사람이 한눈을 팔거나 혹은 필기를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7절이 그 책장 맨 윗부분에서나 또는 가장 아랫부분에서 말살되거나 훼손되기가 더 쉬운 일이었다. 창피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필경사는 대단히 대담하고도 뻔뻔스러운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고, 거룩한 책에 당돌하게 첨가를 기도한 자도 또한 불경한 자임이 틀림없다.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하여 그를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의 근거를 밝혀 주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증거를 말하고 있는 사도 요한이 9절에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데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최고의 증거를 생략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지상에서의 세 가지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증거가 되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참되시며 온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증인이 될 수 없다. 원본에 있어서 삼위일체 반대론자들은 성령이나 물과 피가 하나님 자신이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판단으로는 주 예수의 진리를 뒷받침하는 몇 가지의 증거와 그의 성직수임의 신성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근거와 구주께서 가지고 오신 신임장과 간략히 요약된 설명이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철회하고, 있지만 부분은 이에 대한 모든 뜻을 내포하고 있다.이러한 합리적 근거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가 진리 되심을 증거하는 바 성령을 말한 다음, 성령은 하늘에 계시고 그는 진실하실 뿐 아니라, 진리 자체가 되심을 나타내 보여주는 또 다른 자들이 있음을 확신시켜 주면서, 성령도 진리이심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는 셋이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신데 이 셋이 하나이니라”(7절).사명과 자격에 있어서 주 예수의 진실성과 권위를 세상에 증거하고 보증하는 바 거룩하신 삼위되신 자들을 나타내고 있다.맨 첫 번 순으로 “아버지”가 계시다. 즉 그는 주 그리스도가 세상에 있는 동안의 사명을 확증하고 있다. 첫째, 세례 받으실 때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선포하심으로 증거하고 있다(마 3:17). 둘째, 변화산상에서 그의 신분을 확증하고 있다(마 17:5). 셋째, 신비한 능력과 사명을 부여하심으로 증거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 38). 넷째, 그의 죽음에서 증거를 나타내셨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켜보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다섯째,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증거하셨다. 곧 “그는 세상에 의를 확증하실 것이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10; 롬 1:4). [2] 두번째 증거자는 말씀인데 이로써 그는 세상이 있기 전에 존재하였고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아버지와 함께 하신 참된 하나님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가장 높은 품격을 의미하는 신비한 이름이다.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해야만 했다. 이로써 그가 우리를 구속하시고 증거하셨다. 두번째 증거자는 말씀인데 이로써 그는 세상이 있기 전에 존재하였고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아버지와 함께 하신 참된 하나님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가장 높은 품격을 의미하는 신비한 이름이다.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해야만 했다. 이로써 그가 우리를 구속하시고 증거하셨다. 첫째, 그가 행하신 놀라운 역사로 나타내셨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둘째, 변화산상에서 그에게 임한 영광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셋째,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나타났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3] 세번째로 증거하는 자는 성신 혹은 성령이시다. 이 이름은 거룩함의 소유자 또는 거룩의 본체이신 자에 대해 가장 적합하고도 신성한 이름이다. 거룩하신 성령께 그의 확증과 유일한 증거를 나타내신 자에 대해 그는 참되시고 미쁘신 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성도의 세계의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께 참되시고 미쁘신 일을 행하셨다.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말할 수 있다. 세번째로 증거하는 자는 성신 혹은 성령이시다. 이 이름은 거룩함의 소유자 또는 거룩의 본체이신 자에 대해 가장 적합하고도 신성한 이름이다. 거룩하신 성령께 그의 확증과 유일한 증거를 나타내신 자에 대해 그는 참되시고 미쁘신 자임에 틀림없다. 그는 성도의 세계의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께 참되시고 미쁘신 일을 행하셨다. 아래와 같은 예를 들어 말할 수 있다. 첫째, 동정녀의 몸을 통해 흠이 없는 인간을 출산케 하심에서 나타난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둘째,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의 뚜렷한 임재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써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 셋째, 지옥과 어둠의 영들에 대한 효과적인 정복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셨느니라”(마 12:28). 넷째,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세계에 전파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을 그들에게 주기 위해 사도들 위에 임한 뚜렷하고 강력한 임재로 증거하셨다. “사도와 같이 모이라.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요 1:4, 5). 다섯째, 휘트비(Dr. Whtby) 박사가 그의 저서 <신약 성서 주석> 제2권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200년 동안 제자들과 교회에 의하여, 또한 그들 위에 임한 놀라운 은사와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과 사랑을 증거하는 가운데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하늘에 있는 증거자들이며 또한 하늘로부터 증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증거하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자들로서 좀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 거룩한 존재와 본질 면에서 하나가 된다. 만일 “아버지”와 하나이라면 그들은 한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2) 서로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이상에서 말한 하늘에 있는 세 증거자에 반해 아래 말씀대로 땅 위에 세 증거자가 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경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8절).
[1] 이 증거하는 이들 중에 첫째가 성령(the spirit)이다. 이 성령은 하늘에 계시는 성신(holy ghost)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도 요한이 말한 바에 의하면) 성령(spirit)으로 난 자는 영(spirit)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 3:6).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제자들도 육으로 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부패된 육신적 성향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다. 이 육신적 성향은 억제되어지고 또한 분쇄되어야만 할 것이다. 옛 정욕과 죄악은 제거되어야 하며, 참된 제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중생과 새로운 변혁은 주님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된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확실한 최초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하늘에서 비롯된 어떤 놀라운 징조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승리이다. 교회의 중생과 새로워지는 변혁은 이 성령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점진적인 성화와 이 세상에서의 승리, 평화, 사랑, 기쁨과 빛 가운데 성도의 유산으로 합당한 바를 이루게 되는 모든 은혜에 속하는 것이다. [2] 둘째 증거자는 물이다. 이것 앞에서 구원의 방편으로 언급되어진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구세주 자신에 대한 증거자로 또한 그의 정결케 함과 정결케 하는 능력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세상에서의 그의 자신의 성품과 행위의 정결함을 의미한다. “그는 거룩하며 흠이 없고 티가 없었다.” 서로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이상에서 말한 하늘에 있는 세 증거자에 반해 아래 말씀대로 땅 위에 세 증거자가 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경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8절).이 증거하는 이들 중에 첫째가 성령(the spirit)이다. 이 성령은 하늘에 계시는 성신(holy ghost)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도 요한이 말한 바에 의하면) 성령(spirit)으로 난 자는 영(spirit)이라고 말할 수 있다(요 3:6).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제자들도 육으로 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부패된 육신적 성향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났다. 이 육신적 성향은 억제되어지고 또한 분쇄되어야만 할 것이다. 옛 정욕과 죄악은 제거되어야 하며, 참된 제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중생과 새로운 변혁은 주님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된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확실한 최초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지며 또한 하늘에서 비롯된 어떤 놀라운 징조에 의해 시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승리이다. 교회의 중생과 새로워지는 변혁은 이 성령에 속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의 점진적인 성화와 이 세상에서의 승리, 평화, 사랑, 기쁨과 빛 가운데 성도의 유산으로 합당한 바를 이루게 되는 모든 은혜에 속하는 것이다.둘째 증거자는 물이다. 이것 앞에서 구원의 방편으로 언급되어진 것과 같이 여기에서도 구세주 자신에 대한 증거자로 또한 그의 정결케 함과 정결케 하는 능력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세상에서의 그의 자신의 성품과 행위의 정결함을 의미한다. “그는 거룩하며 흠이 없고 티가 없었다.” 둘째, 구세주에 대해 증거한 세례 요한의 세례의 증거는 구세주에 대해 사람들을 예비시키고 그에 대해 언급해 주었다(막 1:4, 7, 8). 셋째, 사람들이 깨끗케 되고 씻김을 받는 그의 교훈의 정결함을 나타낸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넷째, 그의 제자들의 정결함과 경건함을 뜻한다. 그의 몸은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이룬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다섯째,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고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하신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물로 베푸는 바 세례를 명하는 것을 알 수 있다. [3] 셋째로 증거하는 이는 피다. 즉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고 이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몸값이었다. 이로써 셋째로 증거하는 이는 피다. 즉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고 이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몸값이었다. 이로써 첫째,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심으로” 구약시대의 희생제는 이미 끝이 났음을 증거하고 있다. 둘째, 그의 모든 예언과 봉사와 교훈의 참됨을 확증해 주고 있다(요 8:37.) 셋째,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0, 31) 하신 말씀대로 피는 하나님께 대한 비교할 수 있는 사랑과 자비와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세상 죄를 속함으로 희생의 죄물이 되심을 보여주었다. 넷째, 피로써 우리를 위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자를 속이지 않는다(요 14:13-15). 다섯째, 이는 주 예수의 어떤 세속적인 유익과 미득에 사심이 없음을 나타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여섯째, 주 예수를 위하여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을 각오할 의무를 부여한다. 속이는 자는 자기편으로 개종자들을 유인하여 주 예수께서 행한 바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 하리라”(요 16:2). 그는 그의 종들을 불러 그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도록 하신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오직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3). 이 말씀은 그나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일곱째, 그의 피로 말미암아 얻어진 유익은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세주란 사실을 나타내 보여준다. 여덟째, 이 피의 유익은 그가 말한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나타나고 증명되어졌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이러한 것은 모두 땅 위에서의 증거가 또한 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자에 대한 다양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확증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을 훼방하는 자라는 판단을 받고 종국에는 죄사함을 얻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됨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세 증거하는 자들은 (전자의 세 증거와는 다른) 피차간 서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며 하늘로부터 나타난 세 증거자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적합치 못하다. Ⅲ. 사도는 정정당당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9절)고 결론짓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앞에서 말한 바에 근거를 두고 하나의 추측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증거하신 바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확실히 이 증거는 틀림없는 증거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직접적인 증거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그는 자신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하셨다.2. 그의 증거의 권위와 신빙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증거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사건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이러한 증거는 모든 재판소나 모든 나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큰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진리 자체이며 최상의 권위와 가장 순수한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
3. 이러한 기준의 적용은 현재에도 가능하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정거이기 때문에 또한 아버지의 증거뿐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증거이며,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증거하셨다. “거짓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의 아들이심과, 사명에 있어서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고 회복시킬 아들이 되심을 세상에 충분한 확증으로 나타내셨다. 곧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거룩한 근본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가는 유일한 길이요, 수단이 된다. 앞에서 말한 바에 근거를 두고 하나의 추측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증거하신 바 “하나님의 증거가 있다.” 확실히 이 증거는 틀림없는 증거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직접적인 증거이었음을 암시한다. 즉 그는 자신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하셨다.그의 증거의 권위와 신빙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증거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사건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이러한 증거는 모든 재판소나 모든 나라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큰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진리 자체이며 최상의 권위와 가장 순수한 진실성을 지니고 있다.이러한 기준의 적용은 현재에도 가능하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정거이기 때문에 또한 아버지의 증거뿐 아니라, 말씀과 성령의 증거이며, 이로써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증거하셨다. “거짓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의 아들이심과, 사명에 있어서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시키고 회복시킬 아들이 되심을 세상에 충분한 확증으로 나타내셨다. 곧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거룩한 근본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가는 유일한 길이요, 수단이 된다.
5:10 믿는 자의 특권(1) (요한 1서 5:10-13) 이상의 말씀 가운데서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Ⅰ.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안전성.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기 위해 그에게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자로서 “그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다”(10절). 그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바 외적인 확증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어떠한 것들을 이루어 놓았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발견할 수 있었는가를 말할 수 있다. 1. 그는 자기의 죄와 죄된 행위 그리고 참혹함을 깊이 통찰하며 자기 안에 이러한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2.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우월성과 아름다움과 사명 그리고 그의 영적은 궁핍과 불쌍한 환경에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적합한 구세주가 되심을 알았다.
3. 그는 죄와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속하기 위해 또한 그를 용서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이러한 구세주로 준비하고 보내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보고 감사하게 된다.
4. 그는 그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교만을 꺾기도 하시며, 한편 치유하며, 생기 있게도 하며, 위로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5. 그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발견과 증거가 됨과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불을 키고 그 사랑을 더욱 일깨워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게 하는 최적의 능력있는 수단이 됨을 알게 된다.
6. 1절의 말씀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자이다. 그는 새로운 마음과 성품, 새로운 사랑과 성향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되며, 그는 이미 이전의 사람이 아니다.
7.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서 자신과 죄와 육신과 세상의 보이지 않는 악한 힘과 더불어 투쟁을 하게 된다.
8.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진 소망과 능력으로 세상을 경멸하며, 극복해 가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음을 안다.
9. 그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또한 그의 중재를 통해 그의 이름으로 드려진 기도로써 하늘에 계신 중보자의 관심사가 무엇임을 알게 된다.
10. 그는 새로운 소망에 대해 거듭나고, 하나님과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신뢰하는데 있어서 거듭나며, 양심의 두려움과 죽음과 지옥의 공포로부터 유쾌한 승리를 이룩하는 데에 거듭나며, 간구함으로 그의 생이 부요해지며 구속의 날까지 보장을 받음으로 생명과 영생에 대한 만족할 만한 기대에 있어서 새로 거듭나게 또한 다. 이러한 확신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즉 그는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이루어지게 되며 그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신 혹은 완전하신 형상을 향해 자라게 된다. 그는 자기의 죄와 죄된 행위 그리고 참혹함을 깊이 통찰하며 자기 안에 이러한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우월성과 아름다움과 사명 그리고 그의 영적은 궁핍과 불쌍한 환경에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적합한 구세주가 되심을 알았다.그는 죄와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속하기 위해 또한 그를 용서하고 하나님과의 화평의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이러한 구세주로 준비하고 보내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보고 감사하게 된다.그는 그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교만을 꺾기도 하시며, 한편 치유하며, 생기 있게도 하며, 위로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의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그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발견과 증거가 됨과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불을 키고 그 사랑을 더욱 일깨워 요원의 불길을 일으키게 하는 최적의 능력있는 수단이 됨을 알게 된다.1절의 말씀대로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자이다. 그는 새로운 마음과 성품, 새로운 사랑과 성향 그리고 기쁨을 소유하게 되며, 그는 이미 이전의 사람이 아니다.그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교훈 가운데서 자신과 죄와 육신과 세상의 보이지 않는 악한 힘과 더불어 투쟁을 하게 된다.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진 소망과 능력으로 세상을 경멸하며, 극복해 가면서 좀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음을 안다.그는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또한 그의 중재를 통해 그의 이름으로 드려진 기도로써 하늘에 계신 중보자의 관심사가 무엇임을 알게 된다.그는 새로운 소망에 대해 거듭나고, 하나님과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신뢰하는데 있어서 거듭나며, 양심의 두려움과 죽음과 지옥의 공포로부터 유쾌한 승리를 이룩하는 데에 거듭나며, 간구함으로 그의 생이 부요해지며 구속의 날까지 보장을 받음으로 생명과 영생에 대한 만족할 만한 기대에 있어서 새로 거듭나게 또한 다. 이러한 확신은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즉 그는 자신 안에 증거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가 그 안에 이루어지게 되며 그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온전하심과 완전하신 혹은 완전하신 형상을 향해 자라게 된다. Ⅱ. 믿지 않는 자의 죄와 불신하는 죄의 악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거짓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10절). 하나님이 나타내신 바 많은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았다고 믿어야 하며, 혹은 모든 증거가 그에 대해 말하며 확증해 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속이기 위해 또는 이 세상을 죄와 비참함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각처에 순수하고 거룩하며 더렵혀지지 아니한 기관으로 종교를 고안하도록 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되리 만큼 인간에게 허용되었으나 아직도 기만과 거짓으로 차 있고, 그들에게 그의 성령과 능력을 주어 이 세상에 그 기만과 거짓을 나타내도록 강요하는 것임을 믿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 아버지를 거짓의 장본인이요 교사자로 만드는 것이다. Ⅲ.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모든 거룩한 증거의 본질과 핵심과 내용.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11절). 이것이 복음의 총체이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여섯 증거자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증거의 총체와 요약이 된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영생을 계획하셨다. 그는 영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마련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과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특권과 명분을 허락 하셨다.
2. “이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 아들은 생명이시다. 영원한 생명이 그 자신의 본질과 그 몸 안에 존재한다(요 1:4; 요일 1:2). 그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영적이며 영광된 생명의 샘이 되신다(골 3:4). 그로부터 이생과 내세에 있어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다. 이로써 아래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12절). 아들과 연합되어 있는 자는 생명과 연합되어 있는 자다. 아들에 대해 명분을 가지고 있는 자는 생명과 영생에 대해서도 명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존귀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허락하셨다. 또한 이러한 존귀를 우리도 그에게 돌려야 함이 마땅하다. 아들 앞에 나아가 입을 맞추자 그리하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2절). 그는 율법의 저주 아래 머물게 된다(요 3:36). 즉 생명 자체가 되시며 생명의 소유자가 되시고 생명의 길이 되시는 아들을 거역한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바를 믿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끝없는 죽음의 자리로 넘기도록 자극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영생을 계획하셨다. 그는 영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마련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과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의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특권과 명분을 허락 하셨다.”이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 아들은 생명이시다. 영원한 생명이 그 자신의 본질과 그 몸 안에 존재한다(요 1:4; 요일 1:2). 그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우리의 영적이며 영광된 생명의 샘이 되신다(골 3:4). 그로부터 이생과 내세에 있어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다. 이로써 아래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12절). 아들과 연합되어 있는 자는 생명과 연합되어 있는 자다. 아들에 대해 명분을 가지고 있는 자는 생명과 영생에 대해서도 명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존귀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허락하셨다. 또한 이러한 존귀를 우리도 그에게 돌려야 함이 마땅하다. 아들 앞에 나아가 입을 맞추자 그리하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12절). 그는 율법의 저주 아래 머물게 된다(요 3:36). 즉 생명 자체가 되시며 생명의 소유자가 되시고 생명의 길이 되시는 아들을 거역한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바를 믿지 않는 이상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끝없는 죽음의 자리로 넘기도록 자극한다. Ⅳ. 사도가 믿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목적과 이유, 1. 성도들의 기쁨과 위로를 위해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13절). 이 모든 확증과 증거 위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서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하늘로부터 응답되어질 수 있는 증거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하늘에 있는 세 증거자의 보장을 받아야만 한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들은 영생을 복음의 언약 안에서 얻는다. 그들 안에 있는 영생의 첫 열매에서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그들의 주와 머리되시는 그 안에서 얻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과 영생을 기대하는 가운데 생기를 얻고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 많은 것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2. 믿는 자들의 신앙의 확신과 진보를 위해 전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13절). 그리고 믿는 일을 계속하게 하려 함이다. 믿는 자는 인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일을 떠나는 것은 영생을 포기하는 것이며, 멸망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그들을 고무시키고 격려하기 위하여 믿음에 대한 확신과 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기쁨과 위로를 위해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13절). 이 모든 확증과 증거 위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서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은 하늘로부터 응답되어질 수 있는 증거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세상은 하늘에 있는 세 증거자의 보장을 받아야만 한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그들은 영생을 복음의 언약 안에서 얻는다. 그들 안에 있는 영생의 첫 열매에서 그리고 하늘에 계시는 그들의 주와 머리되시는 그 안에서 얻는 것이다.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과 영생을 기대하는 가운데 생기를 얻고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 많은 것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믿는 자들의 신앙의 확신과 진보를 위해 전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함이라”(13절). 그리고 믿는 일을 계속하게 하려 함이다. 믿는 자는 인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일을 떠나는 것은 영생을 포기하는 것이며, 멸망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그들을 고무시키고 격려하기 위하여 믿음에 대한 확신과 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5:14 사망에 이르는 죄 (요한 1서 5:14-17)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따르는 특권, 다시 말해서 기도의 응답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14절). 주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간구와 요구를 가지고 어떤 형편 중에라도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응답된다. 우리의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뚜렷한 뜻과 일치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위배되거나 그의 소유요, 그에게 속해 있는 우리 자신의 선함에 상반되는 것을 구하는 일은 합당치 않다. 그리고 믿음의 기도는 하늘에 응답되어진다는 담력을 얻어야 한다. Ⅱ. 이러한 특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는 줄을 또한 아느니라”(15절). 구원과 자비와 축복은 경건한 자가 바라는 바 가장 큰 것이다. 그의 간구가 들려지고 응답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 간구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기쁜 일이다.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허용된 것처럼 그는 불쌍히 여김을 받고, 용서와 권유, 성결과 도움 그리고 구원을 얻게 된다. Ⅲ.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기도에 대한 지시.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할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16절). 여기에서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뉘우치고 회개하며 구원을 얻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믿는 형제들로 하여금 신실하며 그들의 죄를 사함 받고 악과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구원함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존함을 받도록 위해 기도해야 한다.
2. 흉악한 죄와 일반적인 죄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며”(16절),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7절).
(1)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 죄에 대한 시비와 율법적인 판단으로는 모든 죄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
(2)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이 죄는 분명히 생활과 양립하는 신적 혹은 인간적 제정에 따른 모든 죄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제정 안에서는 세속적 혹은 육체적인 생활로 양립되고, 신적인 제정 안에서는 육체적 또는 영적이며 복음적인 생활과 양립하는 모든 죄를 포함한다.
[1] 인간의 의로운 제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바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 즉 죽음의 신판에 이르지 않는 여러 가지 다양한 불의와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과는 정반대 되는 죄가 있는데, 의로운 제정에 따라 죽음에 이르는, 혹은 법률상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죄가 있는데, 이러한 죄를 우리는 치명적인 죄악이라고 부른다. [2] 다음으로 신적인 제정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가 있다. 더구나 육체적인, 혹은 영적이며 복음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뉘우치고 회개하며 구원을 얻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믿는 형제들로 하여금 신실하며 그들의 죄를 사함 받고 악과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구원함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존함을 받도록 위해 기도해야 한다.흉악한 죄와 일반적인 죄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며”(16절),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7절).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 죄에 대한 시비와 율법적인 판단으로는 모든 죄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이 죄는 분명히 생활과 양립하는 신적 혹은 인간적 제정에 따른 모든 죄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제정 안에서는 세속적 혹은 육체적인 생활로 양립되고, 신적인 제정 안에서는 육체적 또는 영적이며 복음적인 생활과 양립하는 모든 죄를 포함한다.인간의 의로운 제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바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다. 즉 죽음의 신판에 이르지 않는 여러 가지 다양한 불의와 이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과는 정반대 되는 죄가 있는데, 의로운 제정에 따라 죽음에 이르는, 혹은 법률상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죄가 있는데, 이러한 죄를 우리는 치명적인 죄악이라고 부른다.다음으로 신적인 제정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가 있다. 더구나 육체적인, 혹은 영적이며 복음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첫째, 육체적인 죽음이다. 이러한 육체적인 죄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와 같이 위선적인 죄를 말할 수도 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죄짓는 성도에게 말한 바와 같이, 믿는 형제에 대한 죄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정죄함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 중 육체적인 죽음에 이를 자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바 이러한 죄는 육체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신적인 죄의 형벌은 그리스도의 지체의 보다 많은 보이는 죄를 직접으로 또한 단호하게 죽음으로 위협하지 않고 다만 모종의 복음적인 징벌을 가하고 있다. 즉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 하신 말씀과 같다. 징벌과 채찍을 어떻게 가할까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복음적인 준엄함에 의한다. 또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도 때로는 불가피함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둘째, 신적인 제정에 따라 영적이며 복음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는 죄가 있는데 이러한 죄는 영적이며 복음적인 생활과 일치하지 못하며, 영적인 삶과 또한 보다 높은 세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복음적인 진리와도 일치하지 못한다. 이러한 죄는 전혀 뉘우치지 못하며 믿지 못하는 죄이다. 끝까지 뉘우치지 못하며 불신앙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서 증거하신 바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고 기독교의 진리의 빛과 그 뚜렷한 명확성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이 되므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은 영원한 죽음을 동반하는 죄들이다. Ⅳ. 그 밖의 다른 종류의 죄에 대한 기도의 지시는 이와 같이 구분 될 수 있다. 기도는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될 수 있다. 간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을 허락하실 수 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합당한다고 생각될 때에 그의 제정과 섭리에 따라 생명을 취하기도 하신다.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앞에서 언급한 바)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그의 영혼과 육체의 생명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 죽음에 이르는 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도가 허용되지 아니한다. 아마도 바울의 표현은 죽을죄를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너희에게 약속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기도에는 보장이 없다는 정도의 의사를 표현했을 것이다. 1. 인류의 보편적인 안전과 유익을 위해 인과응보의 법칙은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범죄한 형제들도 공의의 심판(근본적으로 신성한)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에 맡겨야 한다.2. 복음적인 형벌의 제거(어느 면에서 이렇게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와 죽음의 방지(이 죽음은 어느 특별한 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를 위해 단순히 조건적 혹은 감정적인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데, 복음적인 형벌의 제거는 특별히 이러한 죽음의 방치를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뜻과 영광으로 이룩된다는 조건부에서 행해질 수 있다.
3. 회개치 아니하고 믿지 않는 상태에 있는 한 이러한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없으며, 계속 이러한 죄에 머물러 있는 한 죄의 용서를 기대하는 바 생명 혹은 영혼을 위한 어떠한 긍휼도 베풀어지기 위해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위해,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이 풍성해지기 위해, 또한 이로써 다른 믿는 이들을 위해 이루게 하는 긍휼함을 얻기 위해 기도할 수 있다.
4. 성령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의 행위를 행했거나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전적인 배도의 행위를 행했을 경우 전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있으리라”(히 10:27). 이러한 종국이 곧 죽음에 이르는 죄로써 사도 요한이 중점적으로 표현하려는 죄인 것 같다.
5. 사도 요한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7절). 그러나 만약 모든 불의가 죽음에 이른다면(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모든 불의를 행하였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이상) 우리 모두는 단호하게 죽음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모든 불의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이상(일반적으로 말해서 믿는 형제들이 삶에 대한 권리를 소유함으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음이 틀림없다. 일반적인 견해에서 볼 경우, 용서받을 죄는 없을지라도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할 죄, 즉 용서받을 죄가 있다. 만약 용서받을 죄가 없다고 하면 의로움이나 의로운 상태의 지속은 있을 수 없다. 복음의 제정이나 언약은 죄의 행위를 가볍게 하고 변축하며 철회할 수도 있다. 인류의 보편적인 안전과 유익을 위해 인과응보의 법칙은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범죄한 형제들도 공의의 심판(근본적으로 신성한)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에 맡겨야 한다.복음적인 형벌의 제거(어느 면에서 이렇게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와 죽음의 방지(이 죽음은 어느 특별한 죄의 경우에 있어서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를 위해 단순히 조건적 혹은 감정적인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데, 복음적인 형벌의 제거는 특별히 이러한 죽음의 방치를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뜻과 영광으로 이룩된다는 조건부에서 행해질 수 있다.회개치 아니하고 믿지 않는 상태에 있는 한 이러한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없으며, 계속 이러한 죄에 머물러 있는 한 죄의 용서를 기대하는 바 생명 혹은 영혼을 위한 어떠한 긍휼도 베풀어지기 위해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위해,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이 풍성해지기 위해, 또한 이로써 다른 믿는 이들을 위해 이루게 하는 긍휼함을 얻기 위해 기도할 수 있다.성령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의 행위를 행했거나 기독교 신앙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전적인 배도의 행위를 행했을 경우 전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있으리라”(히 10:27). 이러한 종국이 곧 죽음에 이르는 죄로써 사도 요한이 중점적으로 표현하려는 죄인 것 같다.사도 요한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7절). 그러나 만약 모든 불의가 죽음에 이른다면(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모든 불의를 행하였고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지 못한 이상) 우리 모두는 단호하게 죽음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모든 불의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이상(일반적으로 말해서 믿는 형제들이 삶에 대한 권리를 소유함으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음이 틀림없다. 일반적인 견해에서 볼 경우, 용서받을 죄는 없을지라도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할 죄, 즉 용서받을 죄가 있다. 만약 용서받을 죄가 없다고 하면 의로움이나 의로운 상태의 지속은 있을 수 없다. 복음의 제정이나 언약은 죄의 행위를 가볍게 하고 변축하며 철회할 수도 있다.
5:18 믿는 자의 특권(2) (요한 1서 5:18-21) 여기에서 우리는 아래의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Ⅰ. 건전한 신자의 특권과 우월성에 대한 재언급. 1.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로부터, 또한 죄의 전적인 지배와 죄된 행위로부터 구원함을 받는다.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다. 1절)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18절) 범죄하는 자들이 행하는 바(3:6, 7 에서 언급한 대로) 마음과 심령에 넘치는 죄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죄의 행위를 범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을 모면할 수 없는 죄와 그리고 확실히 죄의 삯으로 죄인을 넘기워 버릴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된다. 곧 새로운 성품, 거룩한 성령의 안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를 받게 된다.
2. 믿는 자들은 마귀의 파괴적인 도전에 대비할 힘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18절). 이는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중생한 자의 의무나 혹은 행위에 대한 서술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중생한 자들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능력으로써 악한 자들의 치명적인 타격과 비난에 대해 대비하게 된다. 악한 자는 그에 대해 대비하게 된다. 악한 자는 그들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독약을 주입시키며, 그의 독소 해독제인 중생의 원리를 제거하거나, 복음의 제정에 따라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할 죄로 그들을 유도하지도 못할 것이다. 악한 자는 믿는 자들보다 어떤 악한 행위로 이끌어 가는데 우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중생함이 마귀의 위치와 저주 아래로 그들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의도인 것 같다.
3. 믿는 자들은 세상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편과 그의 이권에 서게 된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19절)라고 하신 말씀에서 나타난다. 인류는 두 개의 크나큰 파당과 통치령으로 나뉘인다. 곧 하나님께 속하든지, 악한 것 또는 악한 자에게 속하든지 하게 된다. 신자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들은 그의 것이요, 그로부터 왔으며, 그에게 속해 있고, 그를 위해 있는 자들이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 32:9) 하신 말씀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 백성의 권리와 기회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나머지의 세상은 악에 처해 있고 악한 자의 입안과 창자 안에 들어 있다. 개별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실 하늘과 공중에는 많은 악한 자들과 악한 영들이 있는데 그들은 악한 본성과 계략과 원리에 함께 연합되어 있으며, 그들은 한 우두머리 아래 연합되어 있다. 마귀의 왕국에는 마귀들 중에 한 동의자가 있다. 악한 세상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그는 세상에서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이 세상의 신”이라고 일컬어진다. 자신의 파멸과 영원한 저주를 모면해야 할 것을 알고 있는 영특한 영이 전능자와 그의 비위를 가차없이 거스리고 있음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악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이 세상에서 악한 자의 지배를 멸하시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하는 이들의 왕국에 이르도록 하시기를 기원하자.
4. 믿는 자들은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은 자들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20절).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의 세상에 임하셨고 우리가 그를 보았으며 이미 나타난 증거에 따라 그를 알게 되었다. 그가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었다(요 1:18 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지각에 내적인 광명을 주사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면, 이로써 우리는 참 하나님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이방의 신들보다 성결과 능력과 완전에 있어서 보다 우월하신 분이시다. 그는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모든 우월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부요함을 지니고 계신다. 모세의 말에 의하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과 특별한 계약으로 우리의 족장들을 택하신 자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애굽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내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거룩한 말씀을 주시고, 이방인들도 불러 개종케 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계획과 역사에 의해, 그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그리고 그의 위엄과 심판에 의해, 우리는 오직 그만이 완전한 존재로서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5.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복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아들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고, 두 분의 사랑과 보호 가운데 있으며, 두 분과의 계약과 동맹 관계 안에 있으며,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두 분과의 영적인 합일관계에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랍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동시에 참되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생명이 되신다(요 1:1; 요일 1:2). 두 분이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참되신 하나님 곧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아래와 같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로부터, 또한 죄의 전적인 지배와 죄된 행위로부터 구원함을 받는다. 즉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다. 1절)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18절) 범죄하는 자들이 행하는 바(3:6, 7 에서 언급한 대로) 마음과 심령에 넘치는 죄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죄의 행위를 범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을 모면할 수 없는 죄와 그리고 확실히 죄의 삯으로 죄인을 넘기워 버릴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된다. 곧 새로운 성품, 거룩한 성령의 안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를 받게 된다.믿는 자들은 마귀의 파괴적인 도전에 대비할 힘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18절). 이는 악한 자가 그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히 중생한 자의 의무나 혹은 행위에 대한 서술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중생한 자들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능력으로써 악한 자들의 치명적인 타격과 비난에 대해 대비하게 된다. 악한 자는 그에 대해 대비하게 된다. 악한 자는 그들의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독약을 주입시키며, 그의 독소 해독제인 중생의 원리를 제거하거나, 복음의 제정에 따라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할 죄로 그들을 유도하지도 못할 것이다. 악한 자는 믿는 자들보다 어떤 악한 행위로 이끌어 가는데 우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중생함이 마귀의 위치와 저주 아래로 그들을 이끌어 가고자 하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하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의도인 것 같다.믿는 자들은 세상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편과 그의 이권에 서게 된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19절)라고 하신 말씀에서 나타난다. 인류는 두 개의 크나큰 파당과 통치령으로 나뉘인다. 곧 하나님께 속하든지, 악한 것 또는 악한 자에게 속하든지 하게 된다. 신자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들은 그의 것이요, 그로부터 왔으며, 그에게 속해 있고, 그를 위해 있는 자들이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 32:9) 하신 말씀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옛 이스라엘 백성의 권리와 기회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나머지의 세상은 악에 처해 있고 악한 자의 입안과 창자 안에 들어 있다. 개별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실 하늘과 공중에는 많은 악한 자들과 악한 영들이 있는데 그들은 악한 본성과 계략과 원리에 함께 연합되어 있으며, 그들은 한 우두머리 아래 연합되어 있다. 마귀의 왕국에는 마귀들 중에 한 동의자가 있다. 악한 세상에는 우두머리가 있다. 그는 세상에서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이 세상의 신”이라고 일컬어진다. 자신의 파멸과 영원한 저주를 모면해야 할 것을 알고 있는 영특한 영이 전능자와 그의 비위를 가차없이 거스리고 있음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악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이 세상에서 악한 자의 지배를 멸하시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하는 이들의 왕국에 이르도록 하시기를 기원하자.믿는 자들은 진실로 영원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은 자들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20절).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의 세상에 임하셨고 우리가 그를 보았으며 이미 나타난 증거에 따라 그를 알게 되었다. 그가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었다(요 1:18 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지각에 내적인 광명을 주사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면, 이로써 우리는 참 하나님의 영광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이방의 신들보다 성결과 능력과 완전에 있어서 보다 우월하신 분이시다. 그는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모든 우월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부요함을 지니고 계신다. 모세의 말에 의하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자신과 특별한 계약으로 우리의 족장들을 택하신 자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애굽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내신 하나님, 곧 우리에게 거룩한 말씀을 주시고, 이방인들도 불러 개종케 하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계획과 역사에 의해, 그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 그리고 그의 위엄과 심판에 의해, 우리는 오직 그만이 완전한 존재로서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복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아들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고, 두 분의 사랑과 보호 가운데 있으며, 두 분과의 계약과 동맹 관계 안에 있으며,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두 분과의 영적인 합일관계에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놀랍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동시에 참되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생명이 되신다(요 1:1; 요일 1:2). 두 분이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참되신 하나님 곧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아래와 같다. Ⅱ. 사도 요한의 결론적 권고.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21절).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도전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당신의 빛과 사랑으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이교도적인 세상의 거짓 신을 떠나라. 그들은 당신의 주인이요, 당신의 섬기고 있는 하나님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다. 어떤 물체나 형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라. 하나님은 영이시며 이러한 천박한 행위로는 기뻐하시기 않는다.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적인 이웃과 상종하지 말라.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이요, 항상 그들로부터 멀리하기를 당신에게 요구하신다.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기에 합당한 마음의 왕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육신을 제어하고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당신을 창조하신 자요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당신을 구속하신 자요, 당신에게 복음을 전해 주신 자요, 당신의 죄를 용서하신 자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당신에게 영생을 부여하신 자다. 믿음으로 그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자.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멀리 하려는 모든 것에 반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속 순종하라.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께 영광과 권세가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헬라어 요한일서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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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 호 피스튜온 호티 예수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 에크 투 데우 게겐네타이 카이 파스 호 아가폰 톤 겐네산타 아가파 카이 톤 게겐네메논 엨스 아우투
개역개정,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새번역,1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 ㉠또는 ‘메시아’
우리말성경,1 누구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에게서 나신 분도 사랑합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영어NIV,1 Everyon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 and everyone who loves the father loves his child as well.
영어NASB,1 Whoever believes that Jesus is the Christ is born of God; and whoever loves the Father loves the child born of Him.
영어MSG,1 Every person who believes that Jesus is, in fact, the Messiah, is God-begotten. If we love the One who conceives the child, we’ll surely love the child who was conceived.
영어NRSV,1 Everyon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Christ has been born of God, and everyone who loves the parent loves the child.
헬라어신약Stephanos,1 πας ο πιστευων οτι ιησους εστιν ο χριστος εκ του θεου γεγεννηται και πας ο αγαπων τον γεννησαντα αγαπα και τον γεγεννημενον εξ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omnis qui credit quoniam Iesus est Christus ex Deo natus est et omnis qui diligit eum qui genuit diligit eum qui natus est ex eo
히브리어Modern,1 כל המאמין כי ישוע הוא המשיח הנה זה ילד מאלהים וכל האהב את מולידו יאהב גם את הנולד מאתו׃
성 경: [요일5: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 ‘믿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형이고 ‘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겐네타이'(*)는 완료 시상이다. 양자의 헬라어 시상에 의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먼저요 믿음은 그 다음이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 혹은 증거인 것이다(Smalley, Stott, Barker). ‘믿음’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4:15; 요9:22)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가를 분별하는 시금석이다.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본문은 4:21의 반복이다. ‘내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겐네산타'(*)는 ‘낳다’러눈 의미의 동사 ‘겐나오'(*)의 부정 과거 분사형으로서 ‘아버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낳으시고 자녀삼아 주셨으며 친히 아버지가 되셨다. 요한이 이같이 하나님을 ‘내신 이’로 표현한 것은 하나님과 신자들을 가족 관계로 유비(類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게서 난 자’로 번역된 헬라어 ‘게겐네메논'(*)은 단수형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나(Augustine)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문법상 단수로도 집합적인 의미의 그리스도인 전체를 지칭할 수 있으며, 문맥상 본문이 믿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를 사랑한다. 요한은 본절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 분리적 관계성을 강조한다(4:19,20).
엔 투토 기노스코멘 호티 아가포멘 타 테크나 투 데우 호탄 톤 데온 아가포멘 카이 타스 엔톨라스 아우투 포이오멘
개역개정,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새번역,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말성경,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압니다.
가톨릭성경,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어NIV,2 This is how we know that we love the children of God: by loving God and carrying out his commands.
영어NASB,2 By this we know that we love the children of God, when we love God and observe His commandments.
영어MSG,2 The reality test on whether or not we love God’s children is this: Do we love God? Do we keep his commands?
영어NRSV,2 By this we know that we love the children of God, when we love God and obey his commandments.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ν τουτω γινωσκομεν οτι αγαπωμεν τα τεκνα του θεου οταν τον θεον αγαπωμεν και τας εντολας αυτου τηρωμεν
라틴어Vulgate,2 in hoc cognoscimus quoniam diligimus natos Dei cum Deum diligamus et mandata eius faciamus
히브리어Modern,2 בזאת נדע כי נאהב את בני האלהים באהבתנו את האלהים ובשמרנו את מצותיו׃
성 경: [요일5:2]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 본서는 전반적으로 형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본절에서는 그 표현이 반대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에 나타난 역설적 표현의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로써’가 앞절에 설정된 원리를 가리키며, ‘우리가…사랑하는 줄을’을 ‘우리가 사랑해야만 한다’로 해석한다(Marshall, Dodd). 그러나 ‘이로써’가 앞절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이유는 없다. ‘이로써’는 본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형제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근거함을 나타낸다(4:8,16,19, Smalley).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불가 분리의 관계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 형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입증된다.
하우테 가르 에스틴 헤 아가페 투 데우 히나 타스 엔톨라스 아우투 테로멘 카이 하이 엔톨라이 아우투 바레이아이 우크 에이신
개역개정,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새번역,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우리말성경,3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부담스런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영어NIV,3 This is love for God: to obey his commands. And his commands are not burdensome,
영어NASB,3 For this is the love of God, that we keep His commandments; and His commandments are not burdensome.
영어MSG,3 The proof that we love God comes when we keep his commandments and they are not at all troublesome.
영어NRSV,3 For the love of God is this, that we obey his commandments. And his commandments are not burdensome,
헬라어신약Stephanos,3 αυτη γαρ εστιν η αγαπη του θεου ινα τας εντολας αυτου τηρωμεν και αι εντολαι αυτου βαρειαι ουκ εισιν
라틴어Vulgate,3 haec est enim caritas Dei ut mandata eius custodiamus et mandata eius gravia non sunt
히브리어Modern,3 כי זאת אהבת אלהים היא אשר נשמר את מצותיו ומצותיו אינן כבדות׃
성 경: [요일5:3]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순종과 불가 분리의 관계를 맺는다. 모든 계명 중 가장 우월한 계명이 사랑 계명인 바 그 안에 하나님의 계명이 내포되어 있으며(Smalley) 그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이미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요14:31; 15:10).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무거운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레이아이'(*)는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주장하는 무거운 또는 가벼운 율법이라는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마23:23, Smalley, Schnackenburg).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주장한 율법과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었던 반면에(마23:4; 눅11:46) 그리스도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벼운 것이다(마11:30). 하나님께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셨고(4:19)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주셨으며(Dodd) 설사 그 계명을 만족시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에(Calvin) 하나님의 계명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므로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호티 판 토 게겐네메논 에크 투 데우 니카 톤 코스몬 카이 하우테 에스틴 헤 니케 헤 니케사사 톤 코스몬 헤 피스티스 헤몬
개역개정,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새번역,4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말성경,4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가톨릭성경,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영어NIV,4 for everyone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even our faith.
영어NASB,4 For whatever is born of God overcomes the world; and this is the victory that has overcome the world– our faith.
영어MSG,4 Every God-begotten person conquers the world’s ways. The conquering power that brings the world to its knees is our faith.
영어NRSV,4 for whatever is born of God conquers the world. And this is the victory that conquers the world, our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4 οτι παν το γεγεννημενον εκ του θεου νικα τον κοσμον και αυτη εστιν η νικη η νικησασα τον κοσμον η πιστις ημων
라틴어Vulgate,4 quoniam omne quod natum est ex Deo vincit mundum et haec est victoria quae vincit mundum fides nostra
히브리어Modern,4 כי כל הנולד מאת האלהים מנצח את העולם ואמונתנו הנצחון המנצח את העולם׃
성 경: [요일5:4]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 여기서 ‘난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 토 게겐네메논'(*)은 중성이다. 계속 남성 명사를 사용하다가 갑자기 중성 명사로 바꾸어 쓴 것은 이 말씀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인간적 욕망을 가리킨다(2:15-17, Smalley).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악에 대해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승리한다(18-20절; 2:13,14). ‘이기느니라’의 헬라어 ‘니카'(*)는 현재 직설법으로서 계속해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투쟁 속에서 이러한 계속적인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요16:33; 19:30).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삶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요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그 이김은 우리의 거싱 되고 우리는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게 된다(롬8:37). 여기서 ‘이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사사'(*)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 한 개인의 회심과 같은 개별적인 경험을 표현할 때나 공동체의 역사에서 특별한 한 순간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시제이다(Brooke). 본절에서 사용된 ‘니케사사’는 과거에 성취된 명확한 승리와 상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신 세상에 대한 승리를 그리스도인이 공유하는 것을 시사한다(Haas, Smalley).
티스 데 에스틴 호 니콘 톤 코스몬 에이 메 호 피스튜온 호티 예수스 에스틴 호 휘오스 투 데우
개역개정,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새번역,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우리말성경,5 세상을 이긴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가톨릭성경,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영어NIV,5 Who is it that overcomes the world? Only h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영어NASB,5 And who is the one who overcomes the world, but h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영어MSG,5 The person who wins out over the world’s ways is simply the one who believes Jesus is the Son of God.
영어NRSV,5 Who is it that conquers the world but the one who believe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5 τις εστιν ο νικων τον κοσμον ει μη ο πιστευων οτι ιησους εστιν ο υιος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5 quis est qui vincit mundum nisi qui credit quoniam Iesus est Filius Dei
히브리어Modern,5 מי הוא זה המנצח את העולם אם לא המאמין בישוע שהוא בן האלהים׃
성 경: [요일5:5]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1절의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이라는 표현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 계시되어 있음을 시사한다(Marshall).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세상을 능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된다. 한편 ‘이기는 자’의 헬라어 ‘니콘'(*)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4절의 ‘니카'(*, ‘이기느니라’)와 같은 시상이다. 이는 투쟁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겨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후토스 에스틴 호 엘돈 디 휘다토스 카이 하이마토스 예수스 크리스토스 우크 엔 토 휘다티 모논 알 엔 토 휘다티 카이 엔 토 하이마티 카이 토 프뉴마 에스틴 토 마르튀룬 호티 토 프뉴마 에스틴 헤 알레데이아
개역개정,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새번역,6 그는 물과 피를 거쳐서 오신 분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다만 물로써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셨습니다. 성령은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우리말성경,6 그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은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물과 피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십니다.
가톨릭성경,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영어NIV,6 This is the one who came by water and blood–Jesus Christ. He did not come by water only, but by water and blood. And it is the Spirit who testifies, because the Spirit is the truth.
영어NASB,6 This is the one who came by water and blood, Jesus Christ; not with the water only, but with the water and with the blood.
영어MSG,6 Jesus–the Divine Christ! He experienced a life-giving birth and a death-killing death. Not only birth from the womb, but baptismal birth of his ministry and sacrificial death. And all the while the Spirit is confirming the truth, the reality of God’s presence at Jesus’ baptism and crucifixion, bringing those occasions alive for us.
영어NRSV,6 This is the one who came by water and blood, Jesus Christ, not with the water only but with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 Spirit is the one that testifies, for the Spirit is the truth.
헬라어신약Stephanos,6 ουτος εστιν ο ελθων δι υδατος και αιματος ιησους ο χριστος ουκ εν τω υδατι μονον αλλ εν τω υδατι και τω αιματι και το πνευμα εστιν το μαρτυρουν οτι το πνευμα εστιν η αληθεια
라틴어Vulgate,6 hic est qui venit per aquam et sanguinem Iesus Christus non in aqua solum sed in aqua et sanguine et Spiritus est qui testificatur quoniam Christus est veritas
히브리어Modern,6 זה הוא אשר בא במים ובדם ישוע המשיח לא במים לבד כי אם במים ובדם והרוח הוא המעיד כי הרוח הוא האמת׃
성 경: [요일5:6]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 본문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옆구리를 창에 찔렸을 때 흘리신 물과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Augustine, Williams) (2)혹자는 요4장과 6장을 근거로 하여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Cullmann, Westcott, Luther, Calvin). (3)혹자는 구약 시대의 희생제사와 연관하여 물은 정결케하는 것이며 피는 희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Plummer, Candlish). (4)혹자는 물은 예수께서 받으신 요한의 물 세례요 피는 십자가의 대속의 보혈이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Alford, Meyer, Barker, Stott, Marshall).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요한 당시에 케린투스(Cerinthus)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은 천상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에게 임하셨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였다. 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것을 분명하게 설파함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 본문은 앞서 언급된 상반절의 반복으로 영지주의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강조한다. 본절 상반절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디'(*, ‘…을 통하여’)를 사용한 반면에 본문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할 때는 ‘엔'(*, ‘…안에서’)을 사용한다. 본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께서는 물과 피를 통하여 임하셨을 뿐만 아니라 물 안에서 그리고 피 안에서 임하신 자이다’라는 의미이다. 요한은 위치나 장소를 나타내는 두개의 전치사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더욱 강도하고 있다(Marshall, Smalley).
호티 트레이스 에이신 호이 마르튀룬테스
개역개정,7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새번역,7 ㉡증언하시는 이가 셋인데, / ㉡몇몇 사본에는 ‘하늘에서 증언하시는 세 분이 계십니다.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십니다. 이 셋은 하나입니다. 8. 땅에서 증언하는 셋이 있습니다. 곧 영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우리말성경,7 증거하시는 이가 셋인데
가톨릭성경,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영어NIV,7 For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영어NASB,7 And it is the Spirit who bears witness, because the Spirit is the truth.
영어MSG,7 A triple testimony:
영어NRSV,7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헬라어신약Stephanos,7 οτι τρεις εισιν οι μαρτυρουντες εν τω ουρανω ο πατηρ ο λογος και το αγιον πνευμα και ουτοι οι τρεις εν εισιν
라틴어Vulgate,7 quia tres sunt qui testimonium dant
히브리어Modern,7 כי שלשה המה המעידים בשמים האב הדבר ורוח הקדש ושלשתם אחד המה׃
성 경: [요일5:7]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 개역성경에는 본절이 앞절과 분리되어 또 하나의 절로 기술되어 있으나 헬라어 본문에서는 본절이 앞절에 포함되어 있다. ‘증거하는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마르튀룬'(*)은 현재 분사로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증거하심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로 오셨음을 믿게 하는 성령께서 믿는 자안에 내주하셔서 지속적으로 예수에 대해 증거하신다(2:20,27; 4:1-6, Stott). 또한 성령은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임하심으로 객관적인 증거를 보이셨다(요1:32).
성령은 진리니라. – 예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요14:6) 성령을 가리켜 진리의 성령이라고 증거하셨다(요15:26; 16:13).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본문에서 성령께서 진리이심을 선언한 것은 진리이신 성령만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증거할 수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Johnson).
토 프뉴마 카이 토 휘도르 카이 토 하이마 카이 호이 트레이스 에이스 토 헨 에이신
개역개정,8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새번역,8 곧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은 일치합니다.
우리말성경,8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이 셋이 서로 일치합니다.
가톨릭성경,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영어NIV,8 the Spirit,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 three are in agreement.
영어NASB,8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 three are in agreement.
영어MSG,8 the Spirit, the Baptism, the Crucifixion. And the three in perfect agreement.
영어NRSV,8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τρεις εισιν οι μαρτυρουντες εν τη γη το πνευμα και το υδωρ και το αιμα και οι τρεις εις το εν εισιν
라틴어Vulgate,8 Spiritus et aqua et sanguis et tres unum sunt
히브리어Modern,8 ושלשה המה המעידים בארץ הרוח המים והדם ושלשתם לאחת המה׃
성 경: [요일5:8]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 ‘성령과 물과 피’에 대한 견해는 다섯 가지이다 (1)혹자는 성령과 물과 피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세 가지 등급으로 생각하여 예언자와 세례요한, 그리고 요한 일서의 저자인 자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engel). 그러나 성령을 예언자와만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발살이며 피를 요한 일서의 저자와 연결시키는 것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논리이다. (2)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세례(요3:5-8), 성만찬(요6:54-56), 그리고 성령을 받음(요20:22)의 ‘신비적인 사건들’에 각각 상응한다고 주장한다(Windisch). 그러나 이 주장은 상당히 작위적이다. 이 견해는 정당성을 주장키 위해 본절의 세 가지 증거들의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더욱이 근거로 제시된 참고 성경 구절들도 예수를 증거한다는 개념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3)혹자는 세 가지 증거들이 기독교 초기에 존재한 ‘기름 부음과 세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예배 의식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Manson, Nauck).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세례 이전에 기름 부음을 실행했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다. (4)혹자는 물과 피를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성례전의 상징으로 보아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된다는 견해를 주장한다(Dodd, Bultmann, Law, Westcott, Barker). 세례와 성만찬 즉 이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여 증거한다. (5)혹자는 ‘물과 피’를 6절과 같은 의미로 보아 물은 예수의 세례를 상징하고 피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상징하며, ‘성령’은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의 머리 위로 강림하셨고(요1:32),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의 피를 흘리사 그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요19:30) 영광을 받으신 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증거하심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요7:39; 20:22, Smalley). 이러한 견해들 중 마지막 두 견해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 요한은 본문에서 성령과 물과 피가 같은 결과를 향하여 함께 작용함으로써 한 점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세 가지 증거들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함을 시사한다. 한편 구약 시대 율법에 의하면 증인이 둘 이상이라야 어떤 사실이 입증되었다(신19:15). 요한이 이러한 율법을 염두에 두고 세 가지 증거를 제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Stott).
에이 텐 마르튀리안 톤 안드로폰 람바노멘 헤 마르튀리아 투 데우 메이존 에스틴 호티 하우테 에스틴 헤 마르튀리아 투 데우 호티 메마르튀레켄 페리 투 휘우 아우투
개역개정,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새번역,9 우리가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이거늘, 하나님의 증언은 더욱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9 우리가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이는데 더 큰 하나님의 증거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해 이미 증언하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영어NIV,9 We accept man’s testimony, but God’s testimony is greater because it is the testimony of God, which he has given about his Son.
영어NASB,9 If we receive the witness of men, the witness of God is greater; for the witness of God is this, that He has borne witness concerning His Son.
영어MSG,9 If we take human testimony at face value, how much more should we be reassured when God gives testimony as he does here, testifying concerning his Son.
영어NRSV,9 If we receive human testimony, the testimony of God is greater; for this is the testimony of God that he has testified to his Son.
헬라어신약Stephanos,9 ει την μαρτυριαν των ανθρωπων λαμβανομεν η μαρτυρια του θεου μειζων εστιν οτι αυτη εστιν η μαρτυρια του θεου ην μεμαρτυρηκεν περι του υιου αυτου
라틴어Vulgate,9 si testimonium hominum accipimus testimonium Dei maius est quoniam hoc est testimonium Dei quod maius est quia testificatus est de Filio suo
히브리어Modern,9 אם נקבל עדות בני אדם הנה עדות האלהים גדולה ממנה כי זאת היא עדות האלהים אשר העיד על בנו׃
성 경: [요일5:9]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 율법에 의하면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증거하는 일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신19:15).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증거일지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면 더욱 크고 완전한 하나님의 증거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선포되며 물과 피를 통하여 역사 속에 선포된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면(裏面)에서 세 가지 증거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장 근원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호티 하우테 에스틴 헤마르튀리아 투 데우, 호티 메마르튀레켄 페리 투휘우 아우투). – 본문은 두 개의 ‘호티'(*, ‘왜냐하면’)로 구성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나타낸다. 그 하나님의 증거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세 가지 증거들, 즉 성령과 물과 피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증거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마르튀레켄'(*)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신 것이 지속적으로 유효함을 나타낸다. 즉,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자신의 아들임을 확증하셨으며(마3:16,17; 요1:33,34)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증언하셨다(요12:28-30). 이러한 역사적 증언은 성령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사람들에게 증언되고 있으며 두 가지 성례전 가운데 성령의 내증으로 실현되고 있다(Stott, Barker).
호 피스튜온 에이스 톤 휘온 투 데우 에케이 텐 마르튀리안 엔 헤아우토 호 메 피스튜온 토 데오 프슈스텐 페포이에켄 아우톤 호티 우 페피스튜켄 에이스 텐 마르튀리안 헨 메마르튀레켄 호 데오스 페리 투 휘우 아우투
개역개정,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새번역,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들을’
우리말성경,10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자기 안에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대해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어NIV,10 Anyone who believes in the Son of God has this testimony in his heart. Anyone who does not believe God has made him out to be a liar, because he has not believed the testimony God has given about his Son.
영어NASB,10 The one who believes in the Son of God has the witness in himself; the one who does not believe God has made Him a liar, because he has not believed in the witness that God has borne concerning His Son.
영어MSG,10 Whoever believes in the Son of God inwardly confirms God’s testimony. Whoever refuses to believe in effect calls God a liar, refusing to believe God’s own testimony regarding his Son.
영어NRSV,10 Those who believe in the Son of God have the testimony in their hearts. Those who do not believe in God have made him a liar by not believing in the testimony that God has given concerning his Son.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 πιστευων εις τον υιον του θεου εχει την μαρτυριαν εν εαυτω ο μη πιστευων τω θεω ψευστην πεποιηκεν αυτον οτι ου πεπιστευκεν εις την μαρτυριαν ην μεμαρτυρηκεν ο θεος περι του υιου αυτου
라틴어Vulgate,10 qui credit in Filio Dei habet testimonium Dei in se qui non credit Filio mendacem facit eum quoniam non credidit in testimonio quod testificatus est Deus de Filio suo
히브리어Modern,10 המאמין בבן האלהים יש לו העדות בנפשו ואשר לא יאמין לאלהים לכזב שמהו יען לא האמין בעדות אשר העיד האלהים על בנו׃
성 경: [요일5:10]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세상을 이기는 믿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절). 그 결과 믿는 자들은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소유하게 된다. 이 증거는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하여 증거하시는 내적 증거를 의미한다(8절, Brooke, Law, Williams). 이러한 내적 증거는 외적 증거인 ‘물과 피’와 조화를 이루어 믿는 자들의 믿음을 근원이 됨과 동시에 결과가 된다(Stott).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란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믿지 않음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한 인간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해 이렇게 증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증거를 거짓으로 만들며,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주장을 극단적으로 확증한다. 한편 본절은 롬1:19,20을 상기시킨다. 우주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들은 도무지 자기의 불신앙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카이 하우테 에스틴 헤 마르튀리아 호티 조엔 아이오니오 에도켄 헤민 호 데오스 카이 하우테 헤 조에 엔 토 휘오 아우투 에스틴
개역개정,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새번역,11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1 또한 그 증거는 바로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이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NIV,11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영어NASB,11 And the witness is this, that God has given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영어MSG,11 This is the testimony in essence: God gave us eternal life; the life is in his Son.
영어NRSV,11 And this is the testimony: God gave us eternal life, and this life is in his Son.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αυτη εστιν η μαρτυρια οτι ζωην αιωνιον εδωκεν ημιν ο θεος και αυτη η ζωη εν τω υιω αυτ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11 et hoc est testimonium quoniam vitam aeternam dedit nobis Deus et haec vita in Filio eius est
히브리어Modern,11 וזאת היא העדות כי חיי עולמים נתן לנו האלהים והחיים האלה בבנו המה׃
성 경: [요일5:1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 ‘영생’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이 생명은 본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가(1: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현시된 것이다. 이것은 아들이신 예수와의 관계성 속에서 믿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과 유일하시며 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지고의 생활이다(요17:3, Smalley). 이러한 영생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실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인간이심을 증거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 들일 때 이루어지는 결과이다. 그러기에 이 결과인 영생을 알고 소유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증거가 참되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편 ‘주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은 유일회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보정 과거 능동태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통해 구속 사역을 행하신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실제성과 역사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이미 주셨으며, 영생을 주신 사실은 불변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 본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과 아들의 불가 분리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한 인간이신 예수 안에 현시되어서 그 아들이 행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즉 ‘물과 피’의 증거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곧 생명임에도 불구하고(요14:6) 요한이 예수와 생명을 동일시하지 않고 생명이 아들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셨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하다.
호 에콘 톤 휘온 에케이 텐 조엔 호 메 에콘 톤 휘온 투 데우 텐 조엔 우크 에케이
개역개정,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새번역,12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말성경,12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생명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영어NIV,12 He who has the Son has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영어NASB,12 He who has the Son has the life; he who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the life.
영어MSG,12 So, whoever has the Son, has life; whoever rejects the Son, rejects life.
영어NRSV,12 Whoever has the Son has life; whoever does not have the Son of God does not have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 εχων τον υιον εχει την ζωην ο μη εχων τον υιον του θεου την ζωην ουκ εχει
라틴어Vulgate,12 qui habet Filium habet vitam qui non habet Filium Dei vitam non habet
히브리어Modern,12 אשר יש לו הבן יש לו החיים ואשר אין לו בן האלהים אין לו החיים׃
성 경: [요일5:12]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 여기서 ‘있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콘'(*)은 ‘에코'(*, ‘가지다’)에서 파생된 현재 분사이다. 요이1:9에서는 같은 뜻의 현재 동사 ‘에케이'(*, ‘가지다’)가 ‘모시다’란 말로 번역된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 아들이 있는 자란 현재 아들을 마음 속에 모신 자를 가리킨다. 아들이 생명 자체이며 아들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11절; 1:2; 요11:25; 14:6) 아들을 모신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며 아들의 말씀에 순종하여 높은 수준의 영적, 도덕적 삶을 영위함과 동시에 그러한 삶 속에서 아들의 인격을 닮아가게 된다. 아들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삶을 영위하며(3:24) 완전하게 하며(4:12) 영원한 삶을 영위케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생명을 주셨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어떤 길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다(요14:6; 행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를 마음 속에 모시지 못한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한편, 본절 상반절에서는 ‘아들’이라하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점에 주목하여 ‘하나님의’란 말이 추가된 것에 대해 혹자는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Bengel, Plummer) 혹자는 영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영생을 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Brooke, Marshall).
타우타 에그랖사 휘민 히나 에이데테 호티 조엔 에케테 아이오니온 토이스 피스튜우신 에이스 토 오노마 투 휘우 투 데우
개역개정,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3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가톨릭성경,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어NIV,13 I write these things to you who believe in the name of the Son of God so that you may know that you have eternal life.
영어NASB,13 These things I have written to you who believe in the name of the Son of God, in order that you may know that you have eternal life.
영어MSG,13 My purpose in writing is simply this: that you who believe in God’s Son will know beyond the shadow of a doubt that you have eternal life, the reality and not the illusion.
영어NRSV,13 I write these things to you who believe in the name of the Son of God, so that you may know that you have eternal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13 ταυτα εγραψα υμιν τοις πιστευουσιν εις το ονομα του υιου του θεου ινα ειδητε οτι ζωην εχετε αιωνιον και ινα πιστευητε εις το ονομα του υιου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13 haec scripsi vobis ut sciatis quoniam vitam habetis aeternam qui creditis in nomine Filii Dei
히브리어Modern,13 זאת כתבתי אליכם המאמינים בשם בן האלהים למען תדעון שיש לכם חיי עולם ולמען תאמינו בשם בן האלהים׃
성 경: [요일5:13]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이것을 쓴 것은. – ‘이것을’의 헬라어 ‘타우타'(*)는 문자적으로 ‘이러한 것들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타우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1-1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ooke, Schnackenburg). 혹자는 본서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malley, William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인 요20:31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타우타’가 다양한 주제를 가리키는 복수로서 1-12절까지 언급된 영생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만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는 서신체 부정 과거로 비록 요한이 현재 본서를 기록한다 할지라도 본서를 받아보는 수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행위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로 기록되어 있다.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본문은 ‘히나'(*,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서 본절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임을 나타낸다. 본절에 나타난 기록 목적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요20:3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영접한 모든 이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이 요한 일서의 본론이고 14-21절은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한다(Bultmann). 본절이 요한 일서의 전체적 결론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타당성을 가지나 결론적 언급이 꼭 이 편지의 맨 마지막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에 본절은 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끝맺기 위한 결론적 언급의 서두로 간주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Johnson).
카이 하우테 에스틴 헤 파르레시아 헨 에코멘 프로스 아우톤 호티 에안 티 아이토메다 카타 토 델레마 아우투 아쿠에이 헤몬
개역개정,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새번역,14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담대함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4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갖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4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어NIV,14 This is the confidence we have in approaching God: that 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he hears us.
영어NASB,14 And this is the confidence which we have before Him, that, 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He hears us.
영어MSG,14 And how bold and free we then become in his presence, freely asking according to his will, sure that he’s listening.
영어NRSV,14 And this is the boldness we have in him, that 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he hears us.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αυτη εστιν η παρρησια ην εχομεν προς αυτον οτι εαν τι αιτωμεθα κατα το θελημα αυτου ακουει ημων
라틴어Vulgate,14 et haec est fiducia quam habemus ad eum quia quodcumque petierimus secundum voluntatem eius audit nos
히브리어Modern,14 וזה הוא בטחוננו אליו אשר אם נשאל דבר כפי רצונו ישמענו׃
성 경: [요일5:14]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 여기서 ‘향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암시한다(Brooke).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본서에서 네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과(2:28 ;4:17),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3:21,22). 본절에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구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토메다'(*)는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요15:7, Marshall).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카이 에안 오이다멘 호티 아쿠에이 헤몬 호 에안 아이토메다 오이다멘 호티 에코멘 타 아이테마타 하 에테카멘 앞 아우투
개역개정,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새번역,15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들은 우리가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말성경,15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을 알면 우리는 우리가 구한 것들을 그분으로부터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가톨릭성경,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영어NIV,15 And if we know that he hears us–whatever we ask–we know that we have what we asked of him.
영어NASB,15 And if we know that He hears us in whatever we ask, we know that we have the requests which we have asked from Him.
영어MSG,15 And if we’re confident that he’s listening, we know that what we’ve asked for is as good as ours.
영어NRSV,15 And if we know that he hears us in whatever we ask, we know that we have obtained the requests made of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αν οιδαμεν οτι ακουει ημων ο αν αιτωμεθα οιδαμεν οτι εχομεν τα αιτηματα α ητηκαμεν παρ αυτου
라틴어Vulgate,15 et scimus quoniam audit nos quicquid petierimus scimus quoniam habemus petitiones quas postulavimus ab eo
히브리어Modern,15 ומדעתנו כי ישמענו לכל אשר נשאל נדע גם זאת כי נשיג את המשאלות אשר שאלנו ממנו׃
성 경: [요일5:15]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 본문은 14절의 반복이다. 14절의 간구와 응답은 구체적 현실성이 강조된 반면에 본절의 경우는 일반적 원리성이 강조된다. ‘무엇이든지’라는 말씀에는 죄악된 인간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간구는 당연히 제외되며 앞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올바른 기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것처럼(요11:42) 믿는 자들의 기도도 들어주신다.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 ‘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테카멘'(*)은 직설법 완료형으로서 기도자의 객관적 기도 사실과 그 결과를 강조한다.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진정한 간구는 이미 그 결과를 얻은 것이다. 기도의 가시적인 응답이 미래에 나타날지라도 그 기도는 이미 효력을 발생하였다(Plummer, Brooke, Dodd). 한편 본절은 ‘안즉…아느니라'(*, 오이다멘…오이다멘)로 되어 있어 지도자가 갖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은 기도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초래하여 기도자의 확신이 더욱더 확실하게 됨을 시사한다(Stott).
에안 티스 이데 톤 아델폰 아우투 하마르타논타 하마르티안 메 프로스 다나톤 하이테세이 카이 도세이 아우토 조엔 토이스 하마르타누신 메 프로스 다나톤 에스틴 하마르티안 프로스 다나톤 우 페리 에케이네스 레고 히나 에로테세
개역개정,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새번역,16 누구든지 ㉣어떤 교우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아니면,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죽을 죄는 짓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 죄가 있습니다. 이 죄를 두고 간구하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 ㉣그, ‘자기의 형제’
우리말성경,16 누구든지 자기의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지은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죄도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죄에 대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톨릭성경,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NIV,16 If anyone sees his brother commit a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he should pray and God will give him life. I refer to those whose sin does not lead to death. There is a sin that leads to death. I am not saying that he should pray about that.
영어NASB,16 If anyone sees his brother committing a sin not leading to death, he shall ask and God will for him give life to those who commit sin not leading to death. There is a sin leading to death; I do not say that he should make request for this.
영어MSG,16 For instance, if we see a Christian believer sinning (clearly I’m not talking about those who make a practice of sin in a way that is “fatal,” leading to eternal death), we ask for God’s help and he gladly gives it, gives life to the sinner whose sin is not fatal. There is such a thing as a fatal sin, and I’m not urging you to pray about that.
영어NRSV,16 If you see your brother or sister committing what is not a mortal sin, you will ask, and God will give life to such a one–to those whose sin is not mortal. There is sin that is mortal; I do not say that you should pray about that.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αν τις ιδη τον αδελφον αυτου αμαρτανοντα αμαρτιαν μη προς θανατον αιτησει και δωσει αυτω ζωην τοις αμαρτανουσιν μη προς θανατον εστιν αμαρτια προς θανατον ου περι εκεινης λεγω ινα ερωτηση
라틴어Vulgate,16 qui scit fratrem suum peccare peccatum non ad mortem petet et dabit ei vitam peccantibus non ad mortem est peccatum ad mortem non pro illo dico ut roget
히브리어Modern,16 איש כי יראה את אחיו חוטא חטאת אשר לא למות שאל ישאל בעדו ויתן לו חיים לכל אשר חטאו לא למות הן יש חטא למות על זה לא אמר לשאל בעדו׃
성 경: [요일5:16]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 본절에 나타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살인이나 간음 혹은 우상 숭배와 같은 특별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주장한다(Tertullian). 그러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죄를 사망에 이르는 죄로 분류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기에 이 견해는 적합하지 않다(Stott). (2)혹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배교나 적그리스도 혹은 거짓 교사들의 죄와 같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부합되지 않는 죄를 가리키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믿는 자들이 유혹에 넘어가 범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Marshall, Smalley, Johnson, Alford, Clarke). 이 견해는 이제까지 요한이 언급한 문맥과 일치한다. 이 두 번째 견해에 대해 혹자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게서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보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 반론을 제기한다(Stott). 그러나 이 반론 역시 문맥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즉 지속되는 불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배교를 하도록 하는 가능성을 내포하기에 요한은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며 우상을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며(18,21절) 초대 교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배교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히6:4-6, 10:26-31). 한편 요한은 앞에서 기도와 응답에 대해서 진술한 바와 같이 본절에서도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범죄한 형제를 위한 기도는 굶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직접 제공하는 것과 같은 사랑의 행위로(3:17)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이다(Johnson). 이러한 중재 기도를 통해서 범죄한 형제는 죄의 고백의 필요성과 서로의 용서의 필요성을 확인하며 행하게 된다(요20: 23). 이러한 중재 기도의 권면과는 달리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 즉 배교의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금하지도 않고 권하지도 않는다.
파사 아디키아 하마르티아 에스틴 카이 에스틴 하마르티아 우 프로스 다나톤
개역개정,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새번역,17 불의한 것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7 불의는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영어NIV,17 All wrongdoing is sin, and there is sin that does not lead to death.
영어NASB,17 All unrighteousness is sin, and there is a sin not leading to death.
영어MSG,17 Everything we do wrong is sin, but not all sin is fatal.
영어NRSV,17 All wrongdoing is sin, but there is sin that is not mortal.
헬라어신약Stephanos,17 πασα αδικια αμαρτια εστιν και εστιν αμαρτια ου προς θανατον
라틴어Vulgate,17 omnis iniquitas peccatum est et est peccatum non ad mortem
히브리어Modern,17 כל מעשה שלא כמשפט חטא היא ויש חטא שלא למות׃
성 경: [요일5:17]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모든 불의가 죄로되. – 여기서 ‘불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디키아'(*)는 ‘옳지 못한 행실’을 의미한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의 문제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본문을 진술한 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인간적으로 구분하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죄들의 경중을 마음대로 구분함으로써 ‘죄 자체의 심각성’이 축소되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 듯하다.
오이다멘 호티 파스 호 게겐네메노스 에크 투 데우 우크 하마르타네이 알 호 겐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 테레이 아우톤 카이 호 포네로스 우크 핲테타이 아우투
개역개정,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새번역,18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주시므로, 악마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우리말성경,18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므로 악한 자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가톨릭성경,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영어NIV,18 We know that anyone born of God does not continue to sin; the one who was born of God keeps him safe, and the evil one cannot harm him.
영어NASB,18 We know that no one who is born of God sins; but He who was born of God keeps him and the evil one does not touch him.
영어MSG,18 We know that none of the God-begotten makes a practice of sin–fatal sin. The God-begotten are also the God-protected. The Evil One can’t lay a hand on them.
영어NRSV,18 We know that those who are born of God do not sin, but the one who was born of God protects them, and the evil one does not touch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8 οιδαμεν οτι πας ο γεγεννημενος εκ του θεου ουχ αμαρτανει αλλ ο γεννηθεις εκ του θεου τηρει εαυτον και ο πονηρος ουχ απτετα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8 scimus quoniam omnis qui natus est ex Deo non peccat sed generatio Dei conservat eum et malignus non tangit eum
히브리어Modern,18 ידענו כי כל הנולד מאת האלהים לא יחטא כי אשר ילד מאת האלהים ישמר את נפשו והרע לא יגע בו׃
성 경: [요일5:18]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하나님게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 본문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앞절과 관련시켜서 믿는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Calvin). (2)혹자는 ‘범죄치 아니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하마르타네이'(*)가 현재에도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는 현재시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믿는 자는 계속 반복되는 범죄나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Stott).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우리가 아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다멘'(*)은 18-20절에 걸쳐 세 번 사용되고 있다. 이 ‘오이다멘’은 지식으리 활동 상황을 나타내는 ‘기노스코'(*, ‘알다’)와 달리 주로 지식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절에서 영적 지식의 확실성을 한층 더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본절의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호겐네데이스 에크 투 데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1)상반절의 ‘난자'(*, 게겐네메노스)는 완료 분사형인 반면에 본문의 ‘나신 자'(*, 겐네데이스)는 부정 과거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2)’나신 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만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개념은 신약성경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요17:12; 벧전1:5; 유1:24). 요한도 역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악과 사단의 영향력에서 보전하실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요17:12,15).
오이다멘 호티 에크 투 데우 에스멘 카이 호 코스모스 홀로스 엔 토 포네로 케이타이
개역개정,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새번역,19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9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나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영어NIV,19 We know that we are children of God, and that the whole world is under the control of the evil one.
영어NASB,19 We know that we are of God, and the whole world lies in the power of the evil one.
영어MSG,19 We know that we are held firm by God; it’s only the people of the world who continue in the grip of the Evil One.
영어NRSV,19 We know that we are God’s children, and that the whole world lies under the power of the evil one.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ιδαμεν οτι εκ του θεου εσμεν και ο κοσμος ολος εν τω πονηρω κειται
라틴어Vulgate,19 scimus quoniam ex Deo sumus et mundus totus in maligno positus est
히브리어Modern,19 ידענו כי מאלהים אנחנו וכל העולם ברע הוא׃
성 경: [요일5:19]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 본절은 하나님과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한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하는 사단의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비록 사단의 세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사단이 만지지도 못할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오이다멘 데 호티 호 휘오스 투 데우 헤케이 카이 데도켄 헤민 디아노이안 히나 기노스코멘 톤 알레디논 카이 에스멘 엔 토 알레디노 엔 토 휘오 아우투 예수 크리스토 후토스 에스틴 호 알레디노스 데오스 카이 조에 아이오니오스
개역개정,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새번역,20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우리말성경,20 또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셔서 참되신 분을 알게 하시고 또 우리가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가톨릭성경,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영어NIV,20 We know also that the Son of God has come and has given us understanding, so that we may know him who is true. And we are in him who is true–even in his Son Jesus Christ. He is the true God and eternal life.
영어NASB,20 And we know that the Son of God has come, and has given us understanding, in order that we might know Him who is true, and we are in Him who is true, in His Son Jesus Christ. This is the true God and eternal life.
영어MSG,20 And we know that the Son of God came so we could recognize and understand the truth of God–what a gift!–and we are living in the Truth itself, in God’s Son, Jesus Christ. This Jesus is both True God and Real Life.
영어NRSV,20 And we know that the Son of God has come and has given us understanding so that we may know him who is true; and we are in him who is true, in his Son Jesus Christ. He is the true God and eternal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ιδαμεν δε οτι ο υιος του θεου ηκει και δεδωκεν ημιν διανοιαν ινα γινωσκωμεν τον αληθινον και εσμεν εν τω αληθινω εν τω υιω αυτου ιησου χριστω ουτος εστιν ο αληθινος θεος και η ζωη αιωνιος
라틴어Vulgate,20 et scimus quoniam Filius Dei venit et dedit nobis sensum ut cognoscamus verum Deum et simus in vero Filio eius hic est verus Deus et vita aeterna
히브리어Modern,20 וידענו כי בא בן אלהים ויתן לנו בינה לדעת את האמתי ובאמתי אנחנו בבנו ישוע המשיח זה הוא האל האמתי וחיי העולם׃
성 경: [요일5:20]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며(1:1,2) ‘참된 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Smalley, Stott, Brooke).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로서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요14:6)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참된 자되신 하나님의 실재를 깨닫도록 인도하셨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 본문은 본절 상반절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시는 중보자가 되신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은 참된 자이신 하나님 안에 있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예수께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17:2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는 문자적으로 ‘이 사람’을 의미한다. ‘후토스’가 가리키는 자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Stott, Smalley, Brooke). (2)혹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uther, Calvin, Marshall, Hass, Schnackenburg, Brown).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녀서 어느 하나를 지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토스’는 문맥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Johnson).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계시하는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한 것에 대한 요한의 결론적인 공격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영생’이라는 사실은 이미 본서 서두에 언급된 것으로(1:1,2; 요11:25; 14:6)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아서 수신자들이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요한의 결론적 진술이다(Smalley).
테크니아 퓔랔사테 헤아우타 아포 톤 에이돌론
개역개정,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새번역,21 자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은 우상을 멀리하십시오. ㉤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절 끝에 ‘아멘’이 있음
우리말성경,21 자녀들이여, 우상들로부터 여러분 자신을 지키십시오.
가톨릭성경,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영어NIV,21 Dear children, keep yourselves from idols.
영어NASB,21 Little children, guard yourselves from idols.
영어MSG,21 Dear children, be on guard against all clever facsimiles.
영어NRSV,21 Little children, keep yourselves from idols.
헬라어신약Stephanos,21 τεκνια φυλαξατε εαυτους απο των ειδωλων αμην
라틴어Vulgate,21 (없음)
히브리어Modern,21 בני השמרו לכם מן האלילים אמן׃
성 경: [요일5:21]
주제1: [성도의 확신]
주제2: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요한 서신 전체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우상 숭배란 용어 자체가 본서에서는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 자체가 당시의 이단 종파인 영지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음을 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우상 숭배는 영지주의 사상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말은 영지주의의 위험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파격적인 결론을 통해서 수신자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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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강해설교] “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요일 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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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일서 5장 강해설교 중에서 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모두가 믿음을 지키면서 세상의 환난과 핍박을 이겨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믿음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인 우리도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난 우리는 세상의 환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이 시간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 (요한일서 5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요일 5:1-21
요절: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주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 승리하자.
오늘은 요한일서 5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요한일서의 결론은 하나님 믿음과 형제 사랑이 세상을 이긴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는 것이 세상을 이긴다 (요일 5:1-5)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분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분을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왜냐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1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 즉 중생했다는 증거입니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합니다. 성경에 증거 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사 9:6; 미 5:2; 요 20:30-31). 또 우리를 중생케 하신 분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분에게서 난 자들로 곧 중생한 성도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백성, 천국 백성 된 한 식구이며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2~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진정한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 지킬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1:29-30).
4~5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굳게 믿는 자는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요일 3:9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분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라고 말하였고, 또 요일 4:4에서는 “자녀들아, 여러분들은 하나님께로서 나왔고 또 적그리스도를 이기었나니 이는 여러분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영께서 계시고 또한 그의 생명 원리가 심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 주셨습니다. 히 2: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으로써 마귀와 그 세력들은 성도들 앞에 완전히, 영원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귀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와 그 은혜 안에 다 내포되어 있습니다.
찬송 357장(통 39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후)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2. 온 인류 마귀 궤휼로 큰 죄에 빠지니 진리로 띠를 띠고서 늘 기도 드리세
참 믿고 의지하면서 겁 없이 나갈 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3. 끝까지 이긴 자에게 흰 옷을 입히고 또 영생 복을 주시니 참 기쁜 일일세
이 어둔 세상 지나서 저 천성 가도록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2.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요일 5:6-10절)
6 이것은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라.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시라.”
7 왜냐하면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분은 셋이시니, 아버지, 말씀, 성신이시라. 이 세 분은 한 분이시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8. 땅에서 증거하는 것은 셋이니 영과 물과 피라. 이 셋은 하나이라.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6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초대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계통의 이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이셨습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되어 인간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요 1:1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말대로,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물은 죄씻음을, 피는 속죄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 둘은 세례[침례]와 성찬의 의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씻음을 위해 속죄제물로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를 증거하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성령님은 진리 자체이십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13-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은 여러분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여러분에게 알리시리라. 그분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알리겠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7절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분은 셋이시니, 아버지, 말씀, 성신이시라. 이 세 분은 한 분이시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이렇게 중요한 구절이 개혁자들의 성경은 말할 것 없고 초대교회 사도적인 전통인 다수사본, 안디옥 사본, 비잔틴 사본, 개혁자들(루터, 칼빈, 쯔빙글리, 낙스), TR(Textus Receptus)의 성경에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성경의 대본인 알렉산드리아 계의 소수 사본에서는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라고 만 되어 있습니다(네슬판, 개역, 개역 개정, 현대역). 아버지, 말씀, 성신께서 삼위일체 (세 신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인격체)이심을 이 구절만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개혁자들의 성경대로 바로 번역되어 있는가 아니면 네슬판처럼 가톨릭 전통에 번역되었는가 점검하는 척도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8절에서는 7절의 보충으로 “땅에서 증거하는 것은 셋이니 영과 물과 피라. 이 셋은 하나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역이나 개역개정에서는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부족한 번역입니다.
땅에서 증거하는 영과 물과 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또한 그 셋의 증거는 하나입니다. 그 셋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의 요지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9절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매일 신문의 뉴스들이 그러하며 법정의 판결도 많은 부분 사람의 진실한 증거에 의존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할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사람들의 증거를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실상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들입니다.
10절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영생을 주심(요일 5:11-13)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증거의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과 또 하나는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첫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잘 지켰더라면 그는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의 경고하신 대로 죽었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시 49:12). 그러나 인간 속에는 여전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강렬한 소원이 있습니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3:11).
영생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생명 자체이신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인간에게 줄 수 없습니다. 딛 1:2,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생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중심입니다.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증거의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 6:35,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47-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빵이로라.” 요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4:6,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4. 기도의 응답 (요일 5:14-17)
14 그분을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분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분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4절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으나, 그 말씀 듣기를 좋아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15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그분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도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또 우리의 간구의 응답을 믿고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효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그가 들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6~17절에 보면 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며, 다른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요한은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죄의 값은 죽음인데(롬 6:23)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영생을 얻은 후에 실수로나 연약성 때문에 범하는 죄를 가리킬 것입니다.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고 말했으면서 여기에서는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생한 자가 계속 죄 가운데서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이며 중생한 자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그는 그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그는 그 실수 때문에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회개하고 영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가질 수 없는 죄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은 죄입니다. 그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대적하며 양심의 감동을 극도로 억압하는 죄로 생각됩니다. 교회 안에 이런 죄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종종 이단자들 속에서 이런 유의 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단은 실수나 무지나 연약의 죄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이론적으로 다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고 순전히 고의적입니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의 뱀처럼 확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과 배교의 죄는 너무 크고 두려운 것이어서 실상 그런 자들을 형제로 여길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제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5. 바른 지식과 삶(요일 5:18-21)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났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아멘.”
18절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범죄치 않는다는 것, 즉 죄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이 진리는 요일 3:6, 9-10에서 이미 말씀한 바입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계속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계속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중생한 성도는 계속 범죄할 수 없습니다. 중생한 자는 그 영혼 속에 범죄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져 있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새로워졌기 때문에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생한 자 속에 심긴 새 생명은 하나님만 향하고 의(義)만 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입니다.
20절에 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은 중생의 방편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믿는 것이 중생의 증거요 그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21절 요한은 끝으로 성도가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근본적 요소입니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돈이나 육신의 쾌락, 인간의 지식과 과학, 아니 인간 자체를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이고 가치 있게 여긴다. 이것들은 다 우상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문을 통해 중생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알게 되었습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일이며 이렇게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하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가 중생한 자로서 자신을 죄로부터 또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죄를 정복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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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요한일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2월 4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2장: 형제를 사랑함은 빛 안에 사는 증거 3장: 형제를 사랑함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4장: 형제를 사랑함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5장: 형제를 사랑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 서론 요한일서의 저자 는 사도 요한이다(1:1). 이 점에 대하여 초대교회의 증거는 일치한다.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목격자로 소개한다. 특히, 본서에는 ‘말씀, 빛, 영생, 사랑, 새 계명, 거한다, 생명을 바친다, 죄를 없이하다, 마귀의 행위, 세상을 이기다, 살인자, 죽음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가다, 보혜사, 물과 피, 세상의 구주, 하나님의 독생자, 증거하다’ 등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과 같거나 비슷한 단어들이 많다. 2세기의 폴리갑은 본 서신을 인용하였고, 또 2세기의 파피아스와 이레니우스,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 등은 본 서신을 사도 요한의 글로 인용하였다. 초대교회의 전통은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의 저자를 사도 요한이라고 본다. 본 서신의 저작 연대 는 요한복음을 썼을 주후 85-90년경이거나 그보다 약간 후일 것이다. 초대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그의 생애의 후년에 에베소에 거주하며 사역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주의 제자 요한은 이 믿음을 전파하고 또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게린두스에 의해 사람들 가운데 유포되었고 이전에 오랫동안 소위 ‘지식’의 분파라고 잘못 불리었던 니골라당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유포된 오류를 제거하고 그들을 논파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1) 요한일서의 특징적 주제 는 형제 사랑이다. 이와 함께,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미혹의 영을 분별할 것과 중생(重生)한 자가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사도 바울 서신들에서는 칭의(稱義)의 교리가 강조되었으나, 사도 요한의 서신에서는 중생(重生)의 교리가 강조되었다.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1-4절, 사도의 전하는 내용과 목적 [1-2절] 태초부터 있는[계셨던]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된 자니라. 사도 요한의 사역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르시고 세우신 모든 사도들의 사역이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라고 증거하였다. ‘태초’는 우주의 시작의 때를 가리킨다. ‘있는’이라는 원어( 엔 , 미완료과거)는 ‘계셨던’이라는 뜻이다. ‘태초부터 계셨던 자’라는 말은 우주가 시작될 때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자, 우주가 시작되기 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던 자, 곧 신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은 영원한 신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1-4)고 증거했다. 거기서도 ‘계시니라’는 원어( 엔 h
, 미완료과거)는 본문의 ‘있는’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 로고스 lovgo” )이라고 불리는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 증거되는 분이시다. 우주의 시작 때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때 존재하고 계셨을 수 없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으로 불리신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그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다. 사도 요한은 2절에서 그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된 자니라’라고 표현하였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특히 죄로 인하여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참 생명이 되시는 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친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말씀하셨고(요 6:48), 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 14:6). 또 요한은 본 서신 끝부분에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했다(요일 5:20). 예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사도 요한이 전한 예수님에 대한 내용은 믿을 만한가? 이에 관해 요한은 자신이 그에 대한 목격자임을 고백한다. 그는 1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고, 2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했고, 3절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사도 요한은 자신이 전하는 분에 대하여 그의 신적인 능력과 영광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았고 들었다고 반복하여 증거한 것이다. 이런 증인의 증거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은 바로 이런 목격자들의 증언들의 기록이다.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확실함이 있다. 기독교 복음은 목격자들의 증언들에 근거하였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 증언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를 위해 복음 진리의 확실성을 증거한다. [3-4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너희의](전통본문) 2)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목적은 전하는 자들과 받는 자들이 서로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성도의 교제가 전도의 목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교제의 회이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교제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확장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참된 교제는 이 세상에 매우 복된 일이다. 그것은 천국에서도 나눌 교제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의 교제가 단지 육신적 교제가 아님을 증거한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우리의 영적 교제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그를 알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렇다면, 전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9에서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 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과 감사와 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그 말씀에 근거해 권면하는 교제이다. 사도 요한은 덧붙여 그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피차간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을 주고 받음으로써 피차 기쁨이 충만케 된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는 그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곧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했다(빌 4:4). 우리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며, 우리가 성경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받을 때 우리의 기쁨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시다. 그는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분, 곧 신적 존재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아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이시다. 그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며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셋째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나타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이다. 그는 본래 영광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과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들의 구속(救贖)을 이루셨다. 넷째로, 사도들은 그를 보았고 들었고 만졌고 체험하였다. 그들은 그의 전하신 말씀들을 들었고 그의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고, 특히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목격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을 증거했다. 기독교는 결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다섯째로, 구원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었다. 그러나 구주 예수께서 구속하신 자들, 곧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였다. 여섯째로, 성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이다. 그것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교제가 아니고 믿음과 소망 안에서의 교제이다. 일곱째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기쁨의 충만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넘치게 주신다(요 15:11; 16:24). 5-10절, 빛 가운데 행하라 [5절]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은 특히 지식과 의와 진실을 가리킨다. 무지와 불의와 거짓은 어두움이다. 하나님께는 지식과 의와 진실이 충만하시다. [6-7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전통본문) 3) 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함을 보인다. 빛 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은 빛 가운데 살아야 한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이라는 원어( 엔 토 스코테이 페리파토멘 )는 ‘어두움 가운데 계속, 반복하여 행하면’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빛이 오면 어두움이 물러간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어두움 가운데, 즉 불의와 악과 거짓 가운데 계속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행하면, 즉 우리가 의롭고 진실하게 살고자 애쓰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시편 15:1-5에는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邊利)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사도 요한은 또 우리가 빛 가운데 즉 의와 진실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원어(현재시제)는 주께서 믿는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또 날마다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릴 것이다. 주께서는,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2). [8-10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며 또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죄악성이 있기 때문에, 만일 누가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는 자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버리기를 결심함으로써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시면 언제든지 죄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또 종종 떨어졌던 존재라는 것을 겸손하게,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신자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빛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 죄의 인정과 고백은 진실함에서만 가능하며 우리는 죄의 고백과 죄씻음을 통해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앞에 고백하는 것을 원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한다면, 그는 약속에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사 1:18).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이미 선언하셨기 때문이다(롬 3:23). 또 우리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었고 지금도 종종 넘어지며 또 우리 속에 죄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히 인정하고 고백하고 버리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빛은 지식과 의와 진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 즉 지식과 의와 진실이 있는 교제이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진리의 지식을 사모하며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빛 가운데 있을 때, 즉 진리의 지식과 의와 진실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신다. 셋째로, 우리가 죄 없다거나 범죄치 않았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장: 형제를 사랑함은 빛 안에 사는 증거 1-6절,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1절] 나의 자녀들( 테크니아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 요한은 본 서신에서 교인들을 ‘자녀들아’라고 자주 불렀다(2:1, 12, 28; 3:7; 4:4; 5:21). 그의 말투는 그의 나이가 많았고 교인들에 대한 사랑도 많았음을 보인다. 그는 본 서신에서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도 여러 번 불렀다(2:7; 3:2; 4:1, 7, 11). 그는 본절에서 본 서신을 쓰는 목적을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가 교훈과 책망을 받아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딤후 3:16).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 안 짓는 삶을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하므로,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서’라는 원어 ( 프로스 톤 파테라 )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며, ‘대언자’라는 원어( 파라클레토스 )는 ‘변호자’라는 뜻이다. 범죄하는 문제는 성도의 현실적 문제이며 그 대책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것의 계속적 적용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에게 효험이 있고 그는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화목제물’이라는 원어( 힐라스모스 )는 ‘유화(宥和)제물’ (propitiation), 즉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거시키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3:25에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힐라스테리온 )[유화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유화’라는 것이 성경적 속죄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유화제물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유화제물이 되셨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물론, 여기에 ‘세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세상의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성도들을 위해 계속 변호하시는 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3-4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도 요한은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로서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할 것과 그 첫 번째 증거로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었다(1:5-10). 이제 그는 주의 계명을 행하는 일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면 주를 아는 자임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의 계명은 곧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주신 십계명의 요약과도 같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자라고 간주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인가, 모르는 자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같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곧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가운데서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그의 자녀이다. [5-6절]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을 가리킨다면, 그 사랑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할 때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되고 우리의 구원을 확증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우리의 계명 순종을 통해 온전케 된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돈이나 육신적 쾌락을 사랑했으나,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할 때 온전케 된다는 뜻일 것이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하셨다(요 14:21, 23).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주 안에 있음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주와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의 생각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며 또 주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장). 그러나 그는 또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정말 주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주의 행하시는 대로 죄를 멀리하고 서로 사랑함을 실천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 짓지 않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죄 짓지 않는 삶은 사도 요한이 본 서신을 쓴 목적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도 구원, 곧 칭의(稱義)와 성화(聖化)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죄 안 짓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도 육신의 죄성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마귀의 시험과 세상과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시며 유화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의 십자가 대속의 의(義)를 의지하며 그의 보혈의 샘에서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음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지금도 우리의 죄를 씻는 효력이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지난 죄를 다 씻으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현재의 부족과 연약도 씻어주신다. 셋째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 안에 거하는 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일 것이며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힘써 지켜야 한다 . 7-17절, 빛 안에 사는 증거 [7-8절] 사랑하는 자들아[형제들아](전통사본), 4)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처음부터](전통사본) 5)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도 요한은 자신이 말한 계명은 그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 곧 십계명을 가리킨다고 말한 후, 또 새 계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새 계명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나 우리들에게나 참된 것, 곧 진리이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고 그때에 무지와 죄악이 우리를 지배했었으나, 이제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왔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가 우리에게 찾아 왔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었다.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9-11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 스칸달론 )[걸림돌,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형제를 미워한다’는 원어( 미손 )(현재분사)는 형제를 계속 미워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 구원을 받았다, 빛 가운데 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요 그의 확신은 헛된 확신이다. 그는 구원받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고백과 구원의 확신은 형제를 사랑하는 그의 삶을 통해 확증되어야 한다. 형제 사랑은 빛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왔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이다. 그는 자기 속에 걸림돌 혹은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다. 반면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람이 어두운 밤에 산 속을 헤맨다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다. 어두움 가운데, 즉 무지와 죄악들 가운데 사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한 곳 지옥뿐이다. 만일 그가 그의 갈 곳이 지옥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12-14절]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얻었음](원문)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교인들을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로 세 부류로 구별하여 말했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라 구별한 것이라기보다 그들의 성화의 정도를 따라 구별한 것이라고 보인다. 첫째로, 자녀들 혹은 아이들은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요한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상태이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둘째로, 아비들은 믿은 지 오래된 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연령도 많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자들이다. 참 믿음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이다. 주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생활의 여정은 바로 그 하나님을 알고 그와 교제하며 그를 더 깊이 아는 과정이다. 셋째로, 청년들은 믿음이 강하여 주를 위하여 일할 만한 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다고 표현된다. 악한 자는 사탄을 가리킨다. 청년들이 사탄을 이긴 방법은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엡 6:17).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자라가며 강해져서 사탄과 악령들의 음모와 장난과 방해를 다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복음 전도와 참된 교회 건립은 영적 전쟁이며 거기에는 영적으로 강한 용사들, 전사들이 많이 요구된다.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38; 신 6:4-5).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 전심전력하여 사랑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돈이나 집이나 땅은 우리가 감사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거기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 아내, 자녀들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을 사랑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한다.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실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것들이며,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즉 음란한 욕망으로 더러워져 있다. 또 그것들은 안목의 정욕 즉 눈으로 보는 육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신적 아름다움은 실상 그렇게 가치가 있지 못하다(잠 31:30). 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생의 자랑 즉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명예나 권세 등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헛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헛되고 죄악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17절]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참으로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고 만다. 또 이 세상과 함께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되다고 증거하였다(전 1:2; 12:8).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성경말씀을 다 믿고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형제를 사랑함은 빛과 어두움을 분별하는 잣대가 된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온 자이지만, 사랑치 않는 자는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자이다. 그렇다면 형제 사랑은 구원받음과 구원받지 못함을 분별하는 기준도 된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온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피 흘려 사신 영혼, 곧 주 예수님 믿는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르고 미워하는 자는 확실히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걸림돌이 없는 자이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나, 그 증거가 된다. 셋째로, 교회에는 주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준비되어 사탄과 악령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인 청년들, 좋은 군사들이 필요하다. 특히 이단 사설이 많은 말세에 충성된 전사들이 많이 필요하다. 넷째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구약 성경말씀을 다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며 특히 주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8-29절, 이단들을 조심하라 [18절]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은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 종말 징조의 하나이었다(마 24:5). 종말 징조는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있었다. 그것은 천주교 교황이 바른 진리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보았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이 더욱 많이 이루어짐을 본다. 많은 교회들이 배교하였고 이단종파들이 득세하고 또 온 세계는 제1,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참혹한 핵전쟁이 될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를 가지고 있다.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단들은 처음에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어느 날 교회를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처음부터 참된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 속에는 참 신자뿐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도 섞여 있다. 그것은 열두 제자들 중 가룟 유다가 들어있었던 것과 같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이었다(요 6:64). [20-21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이 진리를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편지한다고 말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 논하며 이단을 배격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2-23절]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없느니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6) 이단들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한다. 그들은 특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즉 그의 신성(神性)과 속죄사역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음란하고 탐욕적이며 교만하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이단은 천주교회이다. 천주교회는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마리아를 신적 존재로 추앙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성경만 믿지 않고 교황의 무오성(無誤性)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함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부정한다. 오늘날 더 심각한 이단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대속 사역, 그의 부활, 그의 승천과 재림을 부인한다. 그것은 실로 적그리스도 사상이다. 또 성경 교훈을 넘어 은사 체험을 강조하는 은사주의도 이단이다. 역사상 교회는 전체적으로 부패하여 배교적이게 되기도 하였다. 구약시대에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아합 때 그러했다.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천주교회가 그러했다. 오늘날 교회 상황도 비슷하다. 경건한 선조들이 가졌던 성경적 신앙은 오늘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낡은 것으로 간주되고, 천주교회, 자유주의 신학, 은사주의의 배교에 대한 책망은 사랑 없는 극단적 입장이라고 배척을 받는다. [24절]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 ‘처음부터 들은 것’은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내용이다.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한다.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는 말씀은 그 진리를 믿고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깨닫고 굳게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옛신앙이며 보수신앙이다. 우리는 19세기 중엽 이후에 일어난 각종 이단종파들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연합운동과 은사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의 바른 진리를 믿고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적 연합이 성도의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다. [25절]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이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를 믿음으로 얻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은 우리에게 영생을 준다. 우리는 영생을 이미 받았고(요 5:24) 현재 충만히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장차 충만히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26-27절]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사도 요한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을 미혹케 하는 이단들을 조심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영생의 복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 불신앙은 결국 사람을 죄 가운데서 멸망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에게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 성령께서는 완전하고 참된 교사이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간 교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인간 교사들을 주셨다(고전 12:28; 엡 4:11). 그러나 우리는 가장 좋은 교사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배우고 깨닫고 확신할 수 있다. 또 그의 진리는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다. 주께서는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며(요 14:26)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요 16:13).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들은 교회가 처음부터 배운 내용과 일치한다. 성령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라는 말씀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라는 말씀과 동일하다. 신약성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통해 듣고 배운 복음 진리,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그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하며,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표시가 된다. [28-29절]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한다.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믿음과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렇게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주께서 재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고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림 소망은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의 부활과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거기에 있다.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생활의 목표는 바로 주의 재림의 날에 그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우리가 주의 의로우심을 안다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도 알 것이다. 여기에 중생(重生)의 증거가 있다. 여기에 신앙과 행위의 일치도 있다. 중생한 자는 바른 신앙, 역사적 기독교 신앙, 옛신앙을 가질 뿐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말세의 한 징조로서 나타나는 이단들을 조심해야 한다. 이단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다. 이단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단번에 대속하신 죽음임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음란하고 탐욕적이고 교만하다. 우리는 이런 이단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분별해야 하고, 각종 이단종파들을 분별해야 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분별해야 하고, 또 은사주의를 분별해야 한다. 둘째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이다(20, 27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마다(고전 12:3), 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마다(롬 8:15)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신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 안에 거하신다(롬 8:9; 엡 1:13).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 그는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며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케 하신다. 셋째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해야 한다. 사람이 중생하고 구원을 받았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한다.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믿고 또 그의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써 주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3장: 형제를 사랑함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1-10절, 죄를 짓지 말라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7)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전에 죄인이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으나,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으로 구원을 받아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이 복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얻은 의도, 하나님의 자녀 됨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의 장래 영광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주께서 나타내심이 될 때 즉 그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와 같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모습을 보듯이, 우리도 그와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했다(빌 3:20-21).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성도들은 주의 재림과 그때 이루어질 영광스런 몸의 변화를 소망한다. 로마서 8:23,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성도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라면 죄를 짓지 말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천국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 [4-5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죄는 불법, 곧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죄 없으신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하마르타네이 )[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하마르타논 )[계속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계속 범죄치 않아야 한다. 원문에 ‘범죄하지,’ ‘범죄하는’이라는 말은 현재시제로서 계속적 행위를 나타낸다 (NIV) . 구원받은 성도는 계속 범죄하거나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만일 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주께서 주신 구원의 새 생명은 거룩한 성향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실제로 행동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7-8절]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에크 투 디아볼루 에스틴 )[마귀에게서 난 자이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누구에게든지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성도를 미혹케 하며 범죄케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의로우시며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로우나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 ‘마귀에게 속한다’는 말은 ‘마귀에게서 난 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죄를 짓는 자의 근원을 나타낸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사람을 범죄케 한 자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서 난 자이며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창 3:15).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셨다.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 )[계속 죄를 짓지 않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짓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원어도 현재시제로 계속적 행위를 나타낸다 (NIV) . 중생한 자도 때때로 실수하고 범죄할 수 있지만, 계속 죄를 짓거나 죄 가운데 거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중생한 성도가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짓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씨’는 새 생명을 가리킨다. 중생할 때 심어지는 이 생명은 범죄할 수 없는 생명이요 의만을 행하려는 생명이다. 중생한 영혼 속에는 이 생명의 씨가 심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한 영혼은 그 지배적 성향에 거룩한 변화가 있다. 전에는 무지와 부도덕이 그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과 도덕성이 그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도 때때로 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법적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또 실제적으로도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러므로’라는 원어( 엔 투토 )는 ‘이 점에서’라는 뜻이다. ‘이 점’이란 성도가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점을 가리킨다.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사느냐 아니면 즉시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느냐 하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드러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의를 행치 않거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 점의 실천 여부에서 분명히 구별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 몸의 영광스런 변화를 소망한다.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의 몸과 같은 몸을 입을 것이다. 우리는 그 영광스런 몸을 가지고 천국에서 영생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2-43,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둘째로,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 5절,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천국은 죄가 전혀 없는 곳이며 그런 사람들만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 백성일진대,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중생한 성도의 표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9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중생한 성도의 표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 표는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11-24절, 형제를 사랑함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11-12절]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한은 아담의 아들 가인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가인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을 행치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표가 된다. 의인과 악인은 그 행위로 드러난다. [13-15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세상 사람들이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사망 아래 있다는 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구원받은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일 것이며, 우리는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가 아니고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구원을 받은 자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함은 구원과 새 생명의 증표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지만, 형제를 사랑함이 없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살인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다. 침략 전쟁이나 폭탄 테러는 살인의 죄악이다. 현대의 매우 심각한 죄의 하나인 낙태도 태아 살해이다. 그러나 이런 죄악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가족 친척이나 친구 동료나 교우를 미워하는 것은 똑같이 살인의 죄악이다. 모든 살인한 자는 영생을 소유한 자가 아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 사랑의 본은 예수님이시고 형제 사랑의 목표는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이다. 예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그는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15:13). 그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확증한다. 그것은 가장 큰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17-18절]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은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돈 있는 자가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주의 교훈대로 형제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기를 원한다면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는 것은 큰 일이 아닐 것이다. 목숨은 돈보다 더 귀하다. 야고보도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약 2:15-17). [19절]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로써’라는 말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라는 뜻이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된다. 그는 앞에서도 진리에 대해 자주 말했다. 진리를 행함에 대해(1:6), 진리가 우리 속에 있음에 대해(1:8; 2:4), 진리를 앎에 대해(2:21) 말하였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형제를 사랑함은 성도가 진리에 속한 증거이다.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주 앞에서 굳세게 된다. ‘굳세게 하다’는 원어( 페이도 peivqw )는 ‘확신케 하다, 평안케 하다’는 뜻이다 (BDAG) .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또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해 확신케 하고 그 진리와 그 구원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 두려움을 가진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우리는 두려움 대신에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20-22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보냐 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는 이유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으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히 10:19). 그러나 우리는 범죄하면서 담력을 가질 수는 없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더욱 담력을 얻는 것이다. 잠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했다(잠 28:1). 순종의 또 하나의 결과는 기도의 응답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시면서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다(마 7:12). 이것은, 우리가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뜻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하신 것이다. 우리는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계명은 두 마디로 요약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고(막 1:14-15), 사도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행 16:31). 둘째는 주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24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영적 연합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포도나무 비유에서 그는 참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그 가지라고 비유하시면서 우리가 주 안에 거하면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고 그러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5). 우리는 중생할 때 주님과 영적으로 한 몸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었다. 그러나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즉 그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심을 받아 중생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고 주 안에 거하게 된다.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롬 8:9; 갈 4:6)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주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연합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더욱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실제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확인되고 확증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의와 선을 행하고 형제를 사랑함을 실천하는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받은 그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며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간 표, 즉 구원의 표를 가진 자이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일진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의 형제 사랑의 목표는 주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신 바와 같이 우리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며 한 구체적 실천 방법은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와 이웃을 돌아보며 구제하는 행위이다. 셋째로,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마음에 평안과 담대함을 얻으며, 하나님께 한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우리가 주 안에 거하는 자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4장: 형제를 사랑함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11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에이 에크 투 데우 에스틴 )[하나님께로서 나왔나](NASB, NIV)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영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과 교훈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람의 사상과 가르침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지 시험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상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 사상이나 따라간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넘어가는 자가 될 것이다. [2-3절]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하나님께로서 난] 것이요, 예수를[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8)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여부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라는 말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일, 즉 성육신(成肉身)을 말한다(요 1:1, 14).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독특한 인격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는 영은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로서 나오지 않은 영이며,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성육신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며 단지 그 교리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거짓된 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근본교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거짓 목사들은 주의 예언하신 대로 사도 요한 당시에 벌써 세상에 왔다(마 24:5, 11, 24). 이미 말세가 시작되었다. [4절]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하나님께로서 났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은 중생(重生)하였다는 뜻이다. 또 중생한 저들은 저 거짓 목사들에게 미혹되지 않았고 그들을 배격하고 이겼다.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 계신 이, 즉 성령께서 세상에 있는 이, 즉 사탄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거짓 사도요 거짓의 역군이라고 말했다(고후 11:4, 13-15). 또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다(갈 1:6-8). 오늘날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적그리스도의 영 즉 이단들이 많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신천지 등 많은 사이비 이단 종파들과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목사들과 성경 교훈을 넘어서는 은사주의자들 등이 그러하다. [5-6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저 거짓 교사들은 세상에서 나왔고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온 혹은 세상에 속한 말을 하며 세상 사람들이 저희 말을 듣는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니기도 하며 예배에 참석하기도 하며 또 심지어 세례를 받았을 수도 있고 교회의 직분을 가졌을 수도 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으므로 바른 교훈, 역사적 기독교를 듣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심지 않으신 자들은 그의 교훈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5: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신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 곧 주의 사도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중생한 자들이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우리의 말 곧 바른 말,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듣는다. 이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구별된다. 진리의 영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복음 진리의 말씀, 곧 전통적 정통 교리를 듣고 믿고 인정하고 고백하지만, 미혹의 영은 우리의 바른 말과 바른 교리를 듣지 않고 인정치 않고 고백하지 않는 것이다. [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이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육신적 사랑이 아니고 거룩한 사랑을 가리킨다. 미움과 싸움은 마귀에게서 나온 성질이다.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중생(重生)한 표가 된다. [9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에서 밝히 나타났다. 하나님께는 독생자가 계시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독생하신 아들(獨生子)] 9) 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적 관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사람의 본질을 취해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의미 즉 성육신(成肉身)의 의미일 뿐 아니라, 또한 속죄제물로 내어주셨다는 의미이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지만, 성육신하신 그가 속죄제물로 죽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아담의 자손인 온 인류의 영혼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었으나(엡 2:1),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죄씻음과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 힐라스몬 )[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실에서 우리는 참 사랑을 발견한다.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셨다. 그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게 하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성경의 속죄 개념에는 유화(宥和)라는 개념이 있다. 죄인은 속죄가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다.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이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의 뿌리깊은 죄악성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마 18:23-35).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큰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과 이웃들의 부족과 실수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거짓 목사들이 많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영을 분별하는 기준은 바른 교리이다. 특히 성육신의 교리는 매우 기본적인 교리이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또 바른 교리에서 볼 때, 교회연합운동이나 타협적 복음주의나, 은사주의도 매우 잘못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 죄를 위한 유화제물로 세상에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 깨달아야 한다. 유화제물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힌다는 뜻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이 지극히 높고 깊고 넓은 사랑을 우리는 조금이라도 깨닫기를 원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벌레와 같은 우리를 위해 자기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의 부족을 덮어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12-21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 [12-13절]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물질적 형체를 갖지 않으신 영이시므로(요 4:24)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딤전 6:16).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놀라운 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은 큰 불행이며,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큰 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로 그의 선한 품성과 그의 능력과 평안을 누리게 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게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이런 복된 하나님과의 연합을 체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이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칭의(稱義)로 이루어지는 것뿐 아니고 또한 성화(聖化)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칭의가 구원이지만, 그것이 성화의 과정에서 더 구원답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은 3:24에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느끼며 체험하게 되고 또 그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더욱 잘 행하게 된다. [14-16절]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기독교 복음의 확실성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직접 보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에 있다(눅 24:46-48; 요 21:24; 행 5:32).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죄인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 진리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신자의 참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는 하나님과 정신적으로 일체가 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은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요 믿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시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도는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다시 반복하기를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그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참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함의 실천은 참 신앙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증거 즉 하나님과의 연합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17절] 이로써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로써’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써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온전케 되었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이 법적인 구원인 칭의(稱義)뿐 아니라 새 생활로 나타나는 성화(聖化)를 통해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 세상에서는 성화까지가 하나님의 뜻이다. 영화(榮化)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이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요일 3:2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사랑 안에 담대함이 있다. 이 담대함은 또한 심판날에 가질 담대함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왜 이런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세상에서 고난 당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형제를 사랑하면, 그가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은 이 소망의 담대함, 미래의 영광의 확신을 가질 것이다. [18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어린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 품안에서 평안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기가 다른 이에게 가면 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형벌’이라는 원어( 콜라시스 )는 ‘고통’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이 본문에 더 적절해 보인다 (KJV) .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은 자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며, 그때 그는 두려움과 고통이 없고 평안과 기쁨이 넘칠 것이다. [19절] 우리가 [그를] 10)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실상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0).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깨달은 자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것이다. [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기본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이 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들 곧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보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절]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절의 ‘이 계명’은 주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요 13:34).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를 믿는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요한복음 14:21에 보면, 주께서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나타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적 연합의 증거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른 신앙고백이 있고 서로 사랑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령을 통해, 즉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느끼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였는가?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둘째로,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또 계속 그러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야 하고 또 그의 명령대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미움은 구원받지 못한 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서로 사랑함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할 때 담대함을 얻고 모든 두려움을 버리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가 칭의(稱義)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 있음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때 우리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고 또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두려움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믿음과 순종은 우리 마음에 큰 평안과 담대함을 줄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증거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을 포함하며 그의 계명의 내용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명령을 실천해야 하며 그의 명령을 실천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지 않는 자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비록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그의 말은 거짓말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함이 없이 그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5장: 형제를 사랑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 1-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중생(重生)한 자이다. 성경에 증거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적 구주이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단지 훌륭한 선생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신적 인격일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선지자 미가도 메시아의 신성(神性)을 예언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영원부터니라].”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요한복음의 목적을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그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중생(重生)한 자라고 말한다. 즉 중생의 증거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중생의 증거를 회개와 믿음이라고 말한다. 회개와 믿음은 같이 간다. 회개는 하나님 없이 살던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믿고 그가 보내신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참으로 주를 믿는 자는 죄를 버리고 그를 믿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중생의 증거이다.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영접한] 자 곧 그[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의 여러 구절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여러 구절들(요 3:16, 36; 5:24; 6:40 등)은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중생의 증거임을 전제하거나 포함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중생해야 영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본절은 우리를 중생케 하신 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들 곧 중생한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요 13:34). 우리는 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세상에서 육신의 형제들을 사랑하며 형제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그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듯이, 영적 형제들 간에도 그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육신의 가족보다 더 사랑스런 자들이다. 육신의 부모님이 낳으신 형제들도 귀하나 그들은 백년 동안 형제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낳으신 형제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원한 형제들이다. [2-3절]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11)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것임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며 그의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된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할 것이다. 그의 계명들은 결코 무겁지 않다. 우리가 중생치 않았을 때 즉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기가 심히 무거웠으나,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심겨졌고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계셔서 역사하시므로 우리는 비록 연약함이 있어 때때로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지키며 또 지킬 수 있다. 마태복음 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4-5절] 대저[이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이김이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운 짐이 아닌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악되고 이기적인 세상이며 세상은 자기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으로 가득하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이긴다는 뜻이다. 즉 죄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속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그의 생명 원리가 심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주셨다. 로마서 6:14, 18,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믿음, 곧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부활을 소망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귀와 그 세력들은 성도들 앞에 완전히, 영원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 귀한 사실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와 그 은혜 안에 다 들어 있다. 죄는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의는 생명과 영원한 복과 영광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2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다. 믿음의 결과는 기쁨과 확신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중생의 표를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었다면 우리는 중생의 표를 가진 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가 중생케 하신 다른 형제 자매들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이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악된 세상, 이기적인 세상, 자기 사랑,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계명 순종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우리는 은혜로 얻은 얻은 의와 거룩 안에서 의와 거룩을 실천할 수 있다. 6-10절,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 [6절]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피와 물을 흘리셨다. 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초대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부정하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해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요 1:1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후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표현은 물과 피라는 말이 그의 인성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또한 상징적 의미도 가짐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러면 물은 죄씻음을, 피는 속죄사역을 가리킬 것이다. 이 둘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의 의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 씻음을 위해 속죄제물로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그의 속죄사역은 우리의 죄 씻음의 근거가 되었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7절]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즉 성령께서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을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참되시며 그가 증거하시는 내용도 참되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요 15:26), 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6: 13-14). 오늘날도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신다. [8절]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12) 성령과 물과 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또한 그 셋의 증거는 하나이다. 그 셋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증거의 요지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9절]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이는]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그의 증거임이니라]. 우리는 날마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세상을 살고 있다. 우리는 매일 신문의 뉴스들을 믿는다. 또 법정의 판결도 많은 부분 사람의 진실한 증언들에 의존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할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진실한 증거가 믿을 만하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더 확실하고 믿을 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에 관하여 그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증거하셨다. 그는 친 음성으로 자기 아들에 관해 두 번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실상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들이다. 또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 속에서 자기 아들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해 그리고 그의 속죄사역에 대해 증거하셨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도 또 그의 물과 피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과 속죄사역을 증거한다. [10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다. ‘증거가 있다’는 원어( 에케이 텐 마르튀리안 )는 ‘그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고 본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였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거짓말하지 않으시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증거를 믿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큰 잘못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과 속죄사역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로 오신 자이시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다. 그의 몸 속에는 물과 피가 있으셨다. 그는 죄가 없으신 중보자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 피로 친히 우리를 위한 속죄를 이루셨다. 우리는 신적 구주 예수님과 그의 속죄사역을 믿고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성령의 증거를 믿어야 한다. 성령의 증거는 사도들을 통해 주신 증거이며 또 그들의 증언들인 신약성경의 증거이다. 우리는 그 증거들을 다 믿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하나님의 증거를 우리 속에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 증거, 즉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해 증거하신 그 증거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증거들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기 때문이다. 11-13절, 영생을 주심 [11-13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증거하신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사람은 본래 영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첫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잘 지켰더라면 그는 영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의 경고하신 대로 죽었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시 49:12). 그러나 사람 속에는 여전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은 강렬한 소원이 있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했다(전 3:11).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사람에게 영생을 줄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기를 약속하셨다.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증거하였다. 디도서 1:2,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생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중심 주제이다.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이다. 그것은 병약하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이다(고전 15:42-44). 영생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복된 선물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하신 영생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사도 요한은 본 서신 1:1-2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심을 증거하였고 또 5:20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하였다. 영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서도 드러나 있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47-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영원한 생명이시지만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대속(代贖) 제물이 되셨고 그 대속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결과는 영생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잘 증거했다.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썼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영생을 얻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 된다는 것은 특히 요한복음에 풍성히 증거되어 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2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의 교훈은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고 그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우리는 영생의 가치를 깨닫고 어리석게 그것을 세상의 것들과 바꾸지 말자. 영생과 바꿀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또 우리는 이 영생을 감사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확신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에 절대 복종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이 영생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14-17절, 기도의 응답 [14절]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경의 어떤 한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힘써야 한다. 성경말씀 읽기와 듣기를 거부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다. 잠언 28:9는,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했다. 여호수아 7장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큰 성 여리고를 정복한 후 작은 성 아이에서 실패한 이유를 기록하였다. 그것은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여리고 정복 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노략한 물건 중에서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과 50세겔 무게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서 취하여 장막 안에 감추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가 있었을 때, 그리고 그 죄를 찾아내어 권징하여 제거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고 아이성 전투는 실패하였던 것이다. 사무엘하 21:1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3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다윗의 통치 시대에 이스라엘 땅에 3년 기근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울 시대에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죄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전쟁 때에 기브온 사람들과 맹세로 약속하며 그들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맹세와 약속을 저버리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고 그 죄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는 3년 기근의 재앙이 임했던 것이다. 죄는 평안 대신 재앙을 가져온다. 이사야 1:15-16은,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고 말하였고, 이사야 59:1-2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7에서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교훈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성경말씀 읽기와 듣기를 좋아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받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거슬러 범죄하면 우리는 기도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버리면 기도 응답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무엇을 기도해야 하며, 그때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순종은 평안의 길이다. 이사야 48:17-18은,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라고 말한다. [15절]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서 그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도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간구의 응답을 믿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의 효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 것을 그가 들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한다.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받는 줄로](전통본문)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6-17절]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죄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며, 또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사도 요한은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라고 말한다. 죄의 값은 죽음인데(롬 6:23)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소유한 후 실수로나 연약성 때문에 범하는 죄를 가리킬 것이다. 사도가 앞에서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고 말했으면서 여기에서는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생한 자가 계속 죄 가운데서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이며 중생한 자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그는 그 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다. 그는 그 실수 때문에 구원과 영생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회개하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범해서는 안 되는 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은 죄라고 본다. 그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성령의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대적하며 양심의 감동을 극도로 억압하는 죄로 생각된다. 교회 안에 이런 죄를 짓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종종 이단자들 속에서 이런 유의 죄를 볼 수 있다. 이단은 실수나 무지나 연약의 죄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이론적으로 다 아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고 고의적이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진리를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은 인류 역사의 초기에 에덴 동산에서의 뱀처럼 확신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대적한다. 이런 이단과 배교의 죄는 너무 크고 두려운 것이어서 실상 그런 자들을 형제로 여길 수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구원의 가망이 없어 보인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서 그의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는 것도 믿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어떤 형제가 범죄하는 일을 볼 때 그가 돌이켜 회개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대항하는 이단자와 배교자를 위해 기도할 자신이 없지만, 주를 진실히 믿는 형제에 대해서는, 비록 그에게 실수와 연약이 있을지라도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의 회개와 구원과 성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18-21절, 바른 지식과 삶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원문에는 ‘우리는 아노라’는 말( 오이다멘 )이 18, 19, 20절에 각각 한 번씩 모두 세 번 반복하여 나온다. 첫째로, 본절에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 즉 죄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 진리는 본 서신 3:6, 9-10에서 이미 말씀한 바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계속]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계속]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계속]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원문의 현재시제, NIV ). 중생한 성도들은 계속 범죄할 수 없다. 중생한 자는 그 영혼 속에 범죄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가 심어져 있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새로워졌기 때문에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중생한 자들 속에 심긴 새 생명은 하나님만 향하고 의(義)만 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의 성향이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는 구절은 전통사본 13) 의 원문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라고 되어 있다 (KJV).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고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 되고 항상 자신을 지키며 범죄치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딤전 5:22; 약 1:27).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한 것들이 많다. 중생한 자에게도 죄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여러 죄악들을 열거하며 그것들을 버려야 할 것을 말했고, 고린도후서 7:1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중생한 자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므로 악한 자 곧 사탄이 그를 만지지도 못할 것이다.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121: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19절]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하나님께로서 났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안다. 중생(重生, 거듭남)은 우리의 영혼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어두운 세계에서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다. 중생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홀로 행하시는 구원 사역이다. 그때 사람은 하나님을 돕거나 협력하지 못한다. 중생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이사야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救贖)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로마서 1:5-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그러나 우리는 온 세상이 악한 자, 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관자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이 세상에 활동하게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탄을 이 세상 임금이라고 부르셨다. 요한복음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4:3-4에서,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2:2에서는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말했다. 지금 세상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들이 많이 있다. [20절]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사실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심을 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요(요 1:1) 크신 하나님이시며(딛 2:13) 참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요일 5:20). 또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시며 또 친히 영생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요한복음 10:27-28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그 안에 있다. [21절]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아멘.] 14) 사도의 마지막 교훈이다. 성도가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근본이다. 우상이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우상숭배는 가장 근본적이고 큰 죄악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에서 모든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 현대인은 돈과 육신의 쾌락, 지식과 과학, 아니 인간 자체를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이고 가치 있게 여긴다. 이런 것들, 돈이나 육신의 쾌락이나 지식과 과학과 인간 자체는 다 우상이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하며 모든 우상, 즉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한다. 중생한 성도들은 우상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런 것들을 사랑하고 큰 가치를 둔다면, 우리는 범죄하는 것이고 그런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몇 가지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첫째,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하지 않는다. 우리가 중생한 자라면 우리는 자신을 지켜 범죄치 않아야 한다. 둘째, 중생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다.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자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셋째, 우리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고 그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며 우리는 그를 믿으며 그를 사랑하며 그를 끝까지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야고보서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우리는 특히 돈과 쾌락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미주 1) 이단 반박 , 3. 11. 1. 2) Byz A C vg cl cop bo arm 등이 그러함. 3) Byz A vg cl ww cop bo 등에 있음. 4) Byz에 있음. 그러나 א A B C 등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5) Byz에 있음. 그러나 א A B C latt syr cop Clement lat 등에는 없음. 6) Byz vg ms cop bo-ms 등은 생략함. 그러나 א A B C lat syr cop Origen, Cyprian 등에는 있음. 7) Byz vg ms 등은 생략함. 8) Byz (א vg ms syr p arm) eth Origen lat 1/3 (Cyprian) 등에 있음. 9) Byz A it a b e ff2 vg syr c arm Irenaeus lat 1/3 등이 그러함. 10) Byz 등; ‘하나님을’–א 048 vg cl syr p cop bo arm 등. 11) 원문에 ‘하나님의 사랑’( hJ ajgavph tou’ Qeou’ )은 직역하면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KJV, NASB) ,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도 번역된다 (NIV) . 12) KJV는 한글성경의 7절이 6절에 있고 7절과 8절 처음에는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 있으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셋은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서”라는 말이 있다. 이 본문은 서방교회(로마 천주교회)의 전통적 성경이었던 라틴어 벌게잇역 (Vg) 과 헬라어 전수사본 (TR) 에 있다. 이 구절이 사도 요한의 글이라면, 그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놀라운 증거의 말씀이다. 8절에 “또한 이 셋이”라는 표현은 앞에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의 증거는 매우 약하며 그 신빙성도 약하다. 헬라어 사본들에는 14세기 소문자 사본 하나(629)와 16세기의 소문자 사본 둘(61, 918), 그리고 18세기 소문자 사본 하나(2318)에만 있다. 기타 증거들은 7세기의 it l q vg cl arm mss l AD 와 3세기의 Cyprian 등이 있다. 전통적 헬라어 다수사본들(Byz), 몇 개의 고대사본들(א B A 048 vid ), 고대역본들(vg ww st syr p cop sa bo arm mss eth geo), 및 Clement lat (Origen lat ) Lect 등은 이 구절을 생략하고 있다. 13) Byz א syr p arm Origen 등이 그러함. 14) Byz vg cl 에 있음. א A B vg ww st syr p cop sa bo arm geo는 생략함.
박윤선 주석, 요한일서 05장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
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 여기서 거듭난 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말해준다. (1)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이것은 일찌기 예수님이 말씀
하신대로이다.(요6:45).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작은 지남침을 따라서 목적지로
바로 간다. 그와 같이 우리는 영생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중생에 의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게 된 것이다.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씨 와 같이 작아 보이
지만 그 중생된 자로 하여금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게 해준다. (2) 그들
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다른 신자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은 일체이다. 약2:15-26; 요일4:20참조.
요일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과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은
서로 같은 것이다. (요14:21). 그리고 이 계명들을 지키는 데서 영적 형제애가 생
산된다.(요13:34, 15:12). 그러므로 이 세가지 는 일체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가 주목하는 것은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신비적인 영적 교제만이 아니고
사랑으로 계명들을 지키는 구체적 생활이라는 것이다.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은 하
나님께 대하여 영적교제만위주하고 율법지키기를 중요시 아니하는 경향이 있다. 우
리는 여기 계명들이란 말이 복수로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야 된다. 롬13:8-10참조.
요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
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 하나님을 사랑한다 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구체적
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그의계명을 지킴으로실현된다.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가 그 밖에 다른 것으로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
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명심할 것은 (1) 계명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의 명령이므로 그를 믿어 순종하는 태도로써 그것을 지킬 것이며 (2) 계명지키는 일을
사랑에 속한 일로 알고 희생적으로 또는 기쁨으로 지켜야 할 것이다. 그의 계명
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이 말씀에 대하여는 마11:28-30을참조하라. 하나님의
계명이 왜 하나님의 자녀에게 무거운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다음 귀절이 밝혔으니
곧,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세상을 이기는 신앙이 있기때문이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기 대저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그 이유는 이라고 개역되
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 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우리의 소유
로 삼는 생활이다. (요16:33). 그것은 우리로서는 부전승으로 승리한 셈이다. 그뿐 아
니라 그리스도이 승리를 참으로 믿는 자는 자신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하나님
의 능력으로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방향으로 장성해 간다. 세상 이란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며 대적하는 죄와 및 세속주의를 의미한다.
요일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 여기 믿는 자 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구주이심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요일 5: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물과 피로 임하신 그리
스도의 속죄를 믿게 하시려고 오순절에 강림하신 때부터 증거활동을 하고 계시다.
요15:26참조.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님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시고 또 우리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러므로 그 성령님은 진리의
신이라고 불리운다. (요16:13-14)
요일 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 귀
절에 대하여 사본상 차이가 있으나 여기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신임받는 사본들의
지시를 받고 있다. 여기서는 위의 6-7절의 말씀을 종합하여 말씀한다. 곧, 인류를
속죄하여 주신 이를 우리의 구주하고 증거하는 것이 셋 이고 이 셋 은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이 속죄자 자격을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일체이다. 우리가 위의 사귀를 받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아
버지와 말씀과 성령 의 증거는 어떤 것인가? 아버지 의 증거는 성경에 많이 있
으니. 사7:14,9:6; 마3:17,17:5; 요5:37,39,12:28 참조. 말씀의 증거는 성경 자체의
증거요, 성령의 증거는 그의 능력과 감회와 기타 모든 신령한 활동으로 나타난 것이
다. (마3:16,12:28; 눅1:35,41,2:27)
요일 5: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
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믿는 자는 그 속에 성령님이 내재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대하여 마음속깊이 증
거를 받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
니. 하나님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항상 증거하셨는데 그 증거야말로 그가 범죄
한 인간에게 주신 모든 말씀의 초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것은
모든 죄악의 대표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하나님이 증거는 성경 말씀이니. 요5:30-47을
참조하라.
요일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
라.- 여기 아들이 있는 자란 말은 하나님의 아들을 소유한 자를 의마한다. 생명이 있
고 로 번역된 헬라 원어는 현제사니만큼, 현세에서부터 영생을 소유함을 가리킨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곧,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다른 구주가 없고
아무런 영생의 길도 없다는 뜻이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여기 이른바 하나님께로서 난 자 는 중생된 자를 가리킨다. 이 문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혀 범죄하는 일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상습적으로 기탄없이 범죄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뿐이다. 하나님께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나신 자 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저를 지키시매 그리스도께서 그 신자들을 지키심에 대하여는 성경의 다른 귀절들도 말한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악한 자 는 마귀를 가리킨다. 저를 만지지도 못 함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지켜 주시는 한도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요한일서 5장.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얻는다는 말씀의 의미
요한일서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명확하게 분석하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에 맞춰 내용들을 살펴봅니다. 내용들이 가설을 입증해 준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절하고 상식적인 가설을 세워서 요한일서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가설을 전제하면서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크게 부딪히거나 충돌이 없다면, 그 가설은 좀 더 근거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그런 방식을 통해서 좀 더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모든 구절과 단어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길을 잃기 때문이죠. 큰 맥락과 흐름을 봐야 합니다. 근사한 표현이 있는 구절이라고 해도 그것이 전체적 논리의 맥락이 아니라, 어느 한 부분의 강조이거나 부연설명이라면 그 구절에 크게 집착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리1. 내용 정리… 굵직한 맥락 중심으로]1. 논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다.
또한 나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논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권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3절)
이것을 행하는 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는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12절)
2. 요한이 이 글을 쓰는 목적
1) 이 글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2) 너희들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데, 누구든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너의 필요를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구하라는 것이다.)
3)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3. 마지막 정리(확신하고 너 자신을 지속적으로 지키라)
1)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 거대한 이단의 폭풍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견딘 것은 하나님의 지키심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19절)
2)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그 안에 있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3)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정리2. 본문의 재구성]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계명인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사랑하라)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이긴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사랑이 불가능하고 어렵기만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요한일서를 마무리하면서 주는 몇 가지 당부가 있다.
1. 이단에 휩쓸리지 않고 잘 견딘 너희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임이 확인된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서 난 자들을 모든 악에서 지켜주셨다. 너희 안에 영생이 있음을 확실히 알아라.
2. 범죄한 자 중에 사망에 이르지 않을 정도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구하라. 도가 심한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변방에서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하며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시리라.
3.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이단을 경계하라)
[정리3. 묵상 및 적용]1. 서신서는 교리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목회를 위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교리적인 부분과 내용이 있지만, 그것은 교리를 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 상황에 맞게 어떤 부분을 강조하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목회적 가르침은 교리와는 차이가 있다. 교리를 우리가 가지는 진리를 명확하게 하고, 다른 이론을 파하기 위한 가르침이지만, 목회적 가르침이란 성도를 신앙안에서 굳건하게 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주기 위함이 더 크다. 이것을 혼돈하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일에서 길을 잃고 만다.
로마서가 복음의 교리에 초점 맞춰저 있다면(물론 로마서도 목회적인 목적을 가지고 썼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교리적인 부분이 강한 내용에서도 중가중간 목회적인 요소를 고려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목회적 가르침에 집중한다), 요한일서는 목회적인 가르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본다.
이것을 잘 구분해서 읽는 것도 성경을 잘 읽어 낼 수 있는 중요한 팁이다.
2. 요일 5:14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라는 내용의 의미.
이 구절은 기도할 때 믿음을 가지고, 구한 것을 얻은 줄로 확신하라고 강조할 때 자주 언급되는 본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기도의 내용은 개인적인 간구라기 보다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한 자’에 대한 기도를 말한다. 이들에 대해서 구하면 하나님께서 구한 바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일이나 어떤 물건과 성취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사람을 얻고자 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잃어버릴 뻔한 사람에 대한 기도, 포기해 버릴 수있는 사람에 대한 기도, 다시 기회가 있는 사람에 대한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로 <중보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잃어버릴 위치에 있는 사람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줄로 믿고 또한 기도한 것은 얻은 주로 믿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마 18:15-20 에도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한 교정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그 절차를 다루고 나서, 기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너희 중에 두 세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또한 같은 맥락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에 대한 기도, 특히, 죄인과 연약한 자에 대한 기도는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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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요일 5:1~5)
제목 : 세상을 이기는 자는 누구인가?
본문 : 요한일서 5장 1절~5절
설교자 : 조 정 의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스포츠 경기(육상, 씨름)로 묘사한다(엡 6:12; 딤후 2:5). 종종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하는 팀이 엄청난 상대 팀과 싸우는 경우, 기대를 별로 하지 않으면서도 점점 지는 모습을 보이면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씨름도 매우 유사하다. 우리 대적은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권세자, 통치자 마귀와 귀신들이고, 그들은 우리 육신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철저히 공략한다. 당신은 이기고 있다고 느끼는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아니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할 만큼 크게 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세상은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성경을 반대하고 거스르는 길로 빠르게 흘러간다. 말세에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과 돈과 쾌락과 죄를 사랑한다. 그에 맞서 싸우는 그리스도인은 종종 마귀나 세상은커녕 개인의 삶이나 가정, 교회에 일어난 죄와 싸우는 데도 힘에 부친다. 전혀 이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계속 넘어지고 퇴보하는 것 같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다(5절).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다. 어떻게 최후 승리를 확신하는 것일까? 어떤 자가 이기는 자일까?
1. 이기는 자는 주를 믿는 자다(1, 4-5)
“이기는 자”(명: nike)라는 말을 자주 하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시다. 요한은 부활의 주를 만나 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님의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교회마다 “이기는 자”에게 약속을 주셨다.
①에베소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②서머나 교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③버가모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④두아디라 교회: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
⑤사데 교회: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⑥빌라델비아 교회: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
⑦라오디게아 교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여기서 이기는 것이 오롯이 우리에게 달린 일이라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요한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1절). 4절과 5절을 이어서 보라.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1절과 4-5절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자마다)
동사의 시제를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언뜻 보면 우리의 믿음이 선행하고 그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영적 출생(거듭남)이 오며, 그 결과 승리를 얻는 것처럼 본문이 읽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믿는 자”의 ‘믿다’ 동사 시제는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믿는 행위를 가리킨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에서 ‘나다’ 동사 시제는 완료형이다. 과거 한 시점에 시작되어 계속해서 그 결과가 영향을 미치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올바른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신 자,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따라 거듭난 자는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해서 믿고 고백한다. 바로 그런 자가 세상을 이기는 자다.
선행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역시 그렇다. 자기 노력과 열심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곧 하나님이 낳으신 것이다(요 3:8). ‘원하는 자,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롬 9:16; 참고. 요 1:13).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것이다(약 1:18).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본문에서도 요한은 맹목적으로 믿는 믿음을 말하지 않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을 말했다(1, 5절). 예수님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모두 다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반드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다. 스스로 혹은 남이 만든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승리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음으로 연합한, 그래서 영원히 사귐을 갖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셔서 반드시 그들을 이기기 때문이다(요일 4:4).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고(요 16:33), 바울은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확신했다(롬 16:20).
그리스도인은 싸움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계시록 20장과 21장을 보면 마귀와 그 수하들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될 것이고(계 20:10), 사망과 음부, 마귀와 세상을 좇던 자들(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 역시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0:14-15).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친밀한 사귐 곧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인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
그러므로 당신의 믿음을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두라. 지고 있다고 느껴질 때, 도저히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우리 힘이 아니라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을 확신하라(롬 8:37).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고전 15:57). 지는 것처럼 느껴져도 절대 지지하는 팀을 바꾸지 말라. 결국엔 하나님 편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풍성한 은혜로 당신을 하나님 자녀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이 당신이 끝까지 믿고 따를 분이다.
2. 이기는 자는 사랑하는 자다(1-3)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참된 믿음, 산 믿음은 그에 따른 ‘행함’을 맺는다(약 2:26).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께 믿음을 둔 자가 이기는 자이고, 그 믿음이 참되면 당연히 그에 따른 열매가 나타난다. 성경은 그 모든 행함을 요약하여 ‘사랑’이라 부른다.
1-3절까지 사랑은 두 가지 대상을 향해 나타나는데, 먼저 성도를 향한 사랑이다(수평).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3절에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주목한다(수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절). 2절에선 형제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서로 별개의 행함이 아니라 단단히 결합된 행함이라는 걸 보여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2절).
여기서도 논리적인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앞서 우리의 믿음(신앙)이 새로운 출생을 가져오고 그 결과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시고 그 결과 하나님께 둔 믿음을 지속적으로 갖게 하신다고 배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이 승리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참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열매다.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사랑이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가 사랑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사랑은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과 더불어 맺고 있는 영생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느끼게 해준다. 이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자라는 걸 계속해서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이를 분명히 한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1절).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낳으신 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 곧 형제, 자매를 사랑한다. 베드로는 이를 가리켜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벧전 1:22). 영적으로 태어난 자는 영적인 형제, 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된다(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요한은 그래서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했다(3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또 주시기 때문이다(빌 4:13).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무겁지 않은 명령인가?
실제로 느끼기엔 그렇지 않을 수 있어도, 몇 가지 면에서 확실히 그렇다. 첫째, 유대인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만든 여러 가지 규칙과 전통은 사람을 옭아매고 결국 아무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지옥 자식이 되게 하지만(마 23:15),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형제자매 사랑은 이미 온전히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법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법이 아니라 자유롭게 하는 법이다(갈 5:1). 그래서 훨씬 가볍다.
둘째, 우리가 성도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이다(마 11:30).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성도를 기쁨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사랑과 순종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한다’ 말하면서 불순종하는 자를 악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고(요 14: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본문에서 요한도 아멘으로 화답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3절).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다(2절).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라. 그래서 사랑하기 쉬운 형제자매, 어려운 형제자매 모두를 뜨겁게 사랑하라(벧전 1:22; 4:8). 그러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뜨겁게 사랑하실 것이다.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거처를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다(요 14:23). 무슨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과 영생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이로써 우리는 마귀와 세상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모든 자가 불못에 던져질 때,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자가 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3. 적용
앞에서 다룬 믿음 그리고 사랑이 우리가 승리한다는 소망을 보게 한다. 그러면 실제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시작하신 사랑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기는 자답게 살 수 있을까?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이기는 법을 이렇게 제시했다.
절제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향해 공격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규모 없고 무절제한 삶, 게으른 삶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상 적으로 성공한 자도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남들 다 알고 남들 다 하는 일을 과감히 버리고 관심 두지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한다.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는 이들도 그러는데 썩지 아니할 것을 얻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절제해야겠는가? 모든 뉴스, TV 프로그램, 유튜브, 화제의 인물, 정치 경제적 이슈, 돈 많이 쉽게 버는 법, 예뻐지고 잘생겨지는 법 등을 알 필요는 없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더욱 알아가는 일, 그래서 하나님 자녀를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라.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라.
기도하라. J. C. 라일은 기도를 가리켜 믿음의 호흡이라고 말했다. 우리 믿음이 숨을 쉬려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오직 하나님께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신뢰하며 아뢰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믿음이 점점 연약해지고 거의 없는 것처럼 희미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런 믿음으로 마귀와 세상을 대적하며 산다면 우리는 이기는 자가 아니라 평생 패배자처럼 힘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가 성공적인 설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런 설교는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 거룩을 불러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이기는 자로 살려는 것은 그 자신의 심령 속에 비밀스러운 무신론을 간직하고 강화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구원에 이르는 열매가 나타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어떤 면에서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더 많은 절제와 더 많은 기도를 요구한다. 더 많이 절제하여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키우는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사랑을 기도와 절제로 더욱더 굳건하게 만들어 승리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가 적은 무리, 힘없는 패배자처럼 여겨질지라도, 결국엔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들과 딸로 승리의 보좌에 함께 앉아 다스리며 영생을 풍성히 누리게 되길, 이기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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