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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5일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창세기 26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http://sungminch.com
어제의 잘못을 오늘 반복하고
선대의 실수를 다시 범하는
연약한 인생의 한계를
우리는 넘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우리를 지켜보시며
나보다 더 마음 아파하시고
나를 여전히 붙잡아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이
오늘도 나를 살게 합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서!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6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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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 – 이삭의 온유 – 새벽기도 설교 | 동탄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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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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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5.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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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 – 이삭의 온유 – 새벽기도 설교
오늘 본문은 이삭의 온유한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에 가지 말 것을 지시하시고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머물러 있을 경우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축복과 동일한 축복을 그에게도 베푸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 이삭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6-11절에 이삭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임한 직후에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이므로 자칫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아내 리브가를 탐함으로 큰 죄를 짓게 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에는 사탄의 죄의 유혹 역시 강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교훈해 줍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베드로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열쇠를 받는 축복을 받은 직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리라 말씀하셨을 때 십자가 죽음을 만류하다가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마 16:16-23).
베드로는 육신의 정욕으로 가득차서 주님의 고난은 외면하고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자들 가운데 죄의 유혹을 받아 교만해져서 잘못된 길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더욱 자신을 돌아보고 겸비하여, 죄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 가운데 적용시켜나가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12절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였다’ 고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그 땅이란 블레셋의 그랄 땅을 의미합니다.
이삭의 직업은 본래 목축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삭은 목축과 함께 농사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삭에게 있어서 농사는 비교적 생소하고 매우 서투른 분야였을 것입니다.
그는 곁눈질로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농사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던 첫해에 백배나 되는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 땅 지역에서 뿌린 씨의 50배를 거둘 때 대풍년이라고 말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삭이 놀라운 수확을 거둔 것은 그가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한 데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에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백배의 열매를 거두게 하고 결과적으로 창대하고 왕성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13,14절).
이러한 복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삭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자 14절 이하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이삭의 우물을 메우고 이삭에게 그랄에서 떠날 것을 요구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한 것은 이방인이 자기들 땅에 거하면서 자기들보다 더 부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엄청난 시험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힘들여 파놓은 우물과 잘 개간해 놓은 토지를 놔두고 빈털터리로 떠나야 하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이처럼 시험은 일반적으로 성도가 잘될 때 임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일이 잘 될 때 시험이 임하면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앙의 회의를 갖기 쉽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성도들이 시험을 당하여 믿음에서 떠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을 받을 때 인내와 믿음으로 시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 주시는 것이요, 또한 더 큰 축복을 베푸시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삭이 시험을 만나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몇 번이고 옮겨 다니며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22-24절).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시험을 만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인 사탄만을 기쁘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인내함으로 시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놀라운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6절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왔다고 말씀하는데,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28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삭을 박해하고 추방했던 아비멜렉이, 그것도 일국의 왕이 지금 일개 부족장에 불과한 이삭을 찾아와 평화 조약 체결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비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이기게 될 것을 보여 줍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착한 일을 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하는 삶을 사는데도 불구하고 복음 때문에 박해와 멸시를 당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의 이 세상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들이 소망을 잃지 않고 선행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소망을 가슴 깊이 품고 있기에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올 수 있도록 참음으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이삭은 아비멜렉으로부터 억울하게 박해를 받고 추방당했지만 온유함을 잃지 않고 인내함으로 결국 아비멜렉을 평화의 자리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화평을 위한 노력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의 박해에 대해 얼마나 온유하고 있습니까?
또한 이웃과의 화평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이삭을 본받아 온유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쟁을 그리스도 예수의 온유로 화평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창 26)
제목: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본문: 창세기 26장
설교자: 이병권
오늘 본문 26장은 주인공인 이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주인공이 되는 것도 잠시, 그의 이야기는 26장에서 시작됨과 동시에 26장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인 26장을 제외하면 이삭은 늘 조연으로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로 등장하든지, 아니면 야곱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겁니다. 사실 26장에서 잠깐 주인공처럼 나오지만, 사실 앞뒤 큰 문맥에서 보면 이삭의 이야기는 야곱의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부록과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창세기의 저자는 왜 야곱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그 중간에 잠시 이삭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이삭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1) 이삭이 거하던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흉년을 피해 그랄 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아마도 이삭은 그랄에 잠시 머무르다가 상황을 봐서 애굽에까지 내려가려고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 하나님이 이삭에게 그 땅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흉년 때문에 먹을 것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계속해서 약속의 땅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흉년이 든 가나안 땅에 있는 것보다는 나일 강이 흐르고 있는 애굽으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특별한 섭리와 뜻을 이루기 위해 이삭과 그의 가족을 그 땅에 계속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명령에 대한 약속과 그가 순종했을 때 얻게 될 복을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3-5)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 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하셨던 약속을 이삭에게 다시 말씀하시며 약속을 재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이삭에게도 약속하십니다. 땅에 대해 약속하시고, 자손에 대해 약속하시고, 복에 대해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이삭의 하나님이 되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한 세대를 넘어서 그 다음 세대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면 그 약속을 끝까지 잊지 않으십니다. 비록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이 있다하더라도 그 약속이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5절에서 하나님이 이삭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는 근거가 아브라함의 순종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5절에 나오는 ‘내 명령, 내 계명, 내 율례, 내 법도’라는 말은 율법을 가리키는 당시 독자들에게 친숙한 용어들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 율법에 순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시내 산에서 구체적으로 제도화되어서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에게 율법에 포함된 원리를 부분적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들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이미 가인과 아벨의 때에 제사를 드렸고, 노아 때에는 짐승들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들로 구분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할례에 대한 규례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부분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율법을 계시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훗날 모세는 이것을 모아서, 새로 받은 계시와 함께 정리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실한 삶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하나의 모델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고(15:6), 훗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부르기도 하십니다(사41:8).
아무튼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에 그대로 머무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삭에게 말씀하셨고, 이삭은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렇게 그랄에 거주하게 된 이삭은 우리에게 익숙한 일을 합니다.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7)
아브라함이 두 번이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삭도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을 속입니다. 아름다운 아내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부전자전인 것처럼 아버지가 했던 일을 아들이 따라서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건과 지금 이삭의 사건에서 닮은 점이 몇 가지 있는데, 둘 다 그랄이라는 지역에 있을 때 있었던 일이고, 둘 다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했고, 결국 둘 다 아비멜렉으로부터 책망을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책망한 아비멜렉과 이삭을 책망한 아비멜렉이 같은 사람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 두 아비멜렉은 다른 사람일 것입니다. 아비멜렉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나의 아버지는 왕’이란 뜻인데,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 즉위한 왕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성경에서 애굽의 왕을 모두 ‘바로’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비멜렉’도 그 지역의 왕을 부르는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삭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잘못을 범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 지역에 거하는 동안 많은 부를 쌓게 됩니다. 그는 많은 가축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농사를 해서 100배의 수확을 올립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애굽으로 가지 않아도, 흉년이 든 땅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많은 곡식을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은 이삭의 순종에 대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하나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 축복은 말씀에 순종한 이삭에게 허락하신 보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특히 이삭이 애굽으로 갈려고 했던 이유가 흉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농작물을 넘치게 수확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이삭의 재산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시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삭에게 임한 하나님의 축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가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삭이 사용하는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처럼, 사람들의 심보가 참 고약합니다. 그리고 이삭에게 떠나 주기를 노골적으로 요구합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16)
그들은 이삭을 시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갑니다. 그곳에 거하며 아버지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다시 팝니다. 그리고 판 우물들은 아브라함이 부르던 이름으로 부릅니다. 한 번은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서 우물을 파다가 물이 스스로 솟아나는 샘 줄기를 찾아냈습니다. 19절에 ‘샘 근원’이라고 하는데, ‘콸콸 솟는 샘 줄기’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수고하지 않아도 물이 솟아나는 우물은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삭이 이 우물을 얻었는데, 그 지역의 목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이삭의 우물이 자신들 것이라고 우깁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이삭은 다른 우물을 찾아 떠납니다. 이삭은 떠나면서 우물의 이름을 다툼이라는 뜻인 ‘에섹’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삭이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랄의 목자들은 두 번째 우물에 대해서도 시비를 겁니다.
마치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이웃 나라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죄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하기도 하고 욕심 때문에 그릇된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떻게 합니까? 이삭은 그들에게 다시 우물을 내어줍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우물의 이름을 대적함이라는 뜻의 ‘싯나’라고 지었습니다. 이 우물들의 이름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에게 받은 대우와 그들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삭은 또 다시 우물을 팝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우물의 이름을 넓은 지역이라는 뜻의 ‘르호봇’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번성할 수 있는 넓은 땅을 찾게 되었다고 기뻐합니다. 이삭이 이렇게 말합니다. “…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22)
이삭은 우물을 얻은 그 지역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번성하리로다’라는 말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1:28)는 말씀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이삭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삭에게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다툼이 있었고 이삭은 계속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우물을 파고 또 파고 또 팠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면, 주변의 모든 적대적인 것들이 사라지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그렇게 어려움이 전혀 없는 환경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환경을 바꾸어 주실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분은 환경은 그냥 두시고 우리를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짜 복입니다.
이삭은 다시 거처를 옮깁니다. 이번에는 브엘세바로 갑니다. 브엘세바는 옛적에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곳입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 도착한 날 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24)
하나님이 이삭에게,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을 다시 확인해 주시면서 이삭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이삭은 그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처럼 이삭도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이삭에게 아비멜렉과 그의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아비멜렉은 이삭이 그랄에 거할 때 그의 번성함을 보고 그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계속해서 부와 세력이 커져가는 이삭을 보며, 그냥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의 선조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것처럼 자신도 이삭과 언약 맺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28-29)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계심을 그들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세력이 커진 것 때문만이 아니라,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그들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우리의 삶을 볼 때는 어떨까요?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이 나의 삶을 보고 어떤 결론을 내릴까?’라는 질문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삭은 자신을 찾아온 아비멜렉을 위해서 잔치를 베풉니다. 이들은 함께 먹고 마심으로 계약을 맺었고 확증하기 위해 맹세를 합니다. 이삭이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그가 더 높은 자로서 계약을 맺었다는 뜻입니다. 이삭은 당시 가나안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아비멜렉 보다 더 힘이 있는 자로서 그와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아비멜렉 일행이 돌아간 날, 이삭의 종들은 새 우물을 찾았는데 이삭은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우물의 이름을 ‘세바’라고 합니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계약을 맺었던 것을 기념한 이름입니다. 이삭이 이 우물을 브엘세바라 부르는 것은 이미 아버지 시대 때부터 불렸던 이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이렇게 이삭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나고, 26장 마지막에는 에서의 이야기가 짧게 등장합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의 두 딸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 일이 부모에게 근심이 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이것은 앞으로의 일을 예고하며 에서가 하나님이 택하신 믿음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그는 가나안 족속으로 아내를 맞이하였고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야곱과 에서가 비교되는 점이고, 앞으로 있을 갈등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26장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을 연결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삭의 생애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요? 그런데 창세기의 저자는 그 많은 일들 중에서 오늘 본문의 내용들만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들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아브라함과 관련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이삭에게도 나타나셔서 명령하시고 약속하셨음을 기록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이 두 번이 있는데, 모두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말씀을 떠올릴 수 있는 비슷한 내용입니다. 또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비슷한 실수를 했고 같은 아비멜렉이라는 왕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말씀을 듣고서 아브라함처럼 예배했으며, 아브라함처럼 이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복을 누리며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동일하게 이삭에게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의 저자는 이삭의 이야기를 아브라함과 병행해서 기록합니다. 그래서 26장 시작부터 아브라함의 이름이 나오고 계속 그 이름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제 이삭에게도 연장되었으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처럼 이삭을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삭도 그의 아버지처럼 실수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비멜렉으로부터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인정을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할 수 있고,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두려움이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주저하게 하며, 엉뚱한 일을 하게 만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물론, 이삭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그 말씀하신 대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도 동일하게 섬기고 있고, 우리도 그분을 따르고 있으며, 그분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서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믿음 안에서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기억하고 그분의 변하지 않는 말씀을 신뢰할 때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에 대한 믿음은 두려움 없이 그분과 동행하게 만들지만, 두려움으로 포기하는 것은 그분이 허락하시는 축복을 놓치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날마다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6장 설교 | [하루 한 장] 창세기26장_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166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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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월 25일. 창세기 26장. > 매일말씀묵상
창세기 26장. 비록 연약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1. 26장은 아브라함의 복이 정말로 이삭에게로 전해진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심지어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닮아 있습니다.
2. 아브라함 때와 같이 흉년이 들어서 이삭은 그랄(블레셋)로 옮겼습니다(1). 그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 것을 지시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2~5). 그리고 철저하게 이삭의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5). 이삭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순종했습니다 (6). 하지만 이삭은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불순종했습니다 .
3.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7). 비록 아비멜렉 왕이 리브가를 취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비멜렉은 자기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다고 책망합니다. 비록 이삭은 아비멜렉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이삭을 놀랍도록 축복하십니다. 오히려 이삭은 농사하여 백배의 수익을 얻었고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12~14).
4. 하지만 거부가 된 이삭은 그곳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사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 네가 우리보다 강성한즉 ’ 떠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16). 이삭은 떠나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 사후에 메웠던 우물들을 다시 팠습니다. 그렇게 우물을 얻지만, 그랄 목자들과의 다툼에서 두 차례를 양보하고 옮기지만 그는 계속해서 우물을 얻게 됩니다. 마침내 방해를 받지 않는 우물을 얻게 되자 이삭은 ‘방(room)’을 의미하는 르호봇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22).
5. 이삭은 거기서 브엘세바로 옮겨갑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언약을 맺었던 곳입니다(21:22~34).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약속하시고 자손이 번성케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4). 이삭은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장막을 치며 거기서도 우물을 얻었습니다(25). 아비멜렉이 다시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과 더불어 이삭을 찾아와서 평화언약을 맺을 것을 제안합니다(26). 그들은 “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 고 고백합니다 (28).
6.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하나님이 경외함이 없는 땅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실수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려움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도 여전히 주인이시며 , 모든 권세들이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지키시며, 심지어 그 백성이 미련하고 완악하고 연약하더라도 , 끝까지 책임지시며 지키신다는 것을 아브라함에 이어 , 이삭에게도 보여주고 계시는 것 입니다.
7. 아내를 지키시고 재산을 많게 해주신 것으로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우물을 양보하였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새로운 우물을 찾게 하신 것에서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본문은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 이 증거는 이삭 뿐만 아니라, 그 땅의 아비멜렉과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8. 야곱도 비열한 방법으로 장자권을 얻으려고 하였고, 이삭도 거짓말을 하여서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삶을 주관하시고 은혜와 복을 주시며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약하고 미련하고 완악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실 것입니다 . 여러분은 이 본문을 통해서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이 불신세상,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사는 모습은 과연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을 명확하게 세상에 보여주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비록 연약하고 믿음이 없어 날마다 세상을 두려워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염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이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끼시고 돌보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히 여기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실수하는 것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창 26:1-11)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ZD1ARfLLJ8o?t=2115
2020년 7월 26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20 ✦
“실수하는 것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창세기 26장 1~11절)
[ 들어가는 말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만들어낸 것 같기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신력 있는 신문에도 나왔으니까 아마 사실인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당시 일본 총리였던 모리 총리가 백악관을 방문하여 미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때 일본 외무성 간부들은 영어를 거의 못하는 모리 총리를 위해 미리 사전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총리께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먼저 다가가 ‘How are you?’(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며 악수를 청하시면, 클린턴 대통령은 통상적인 영어로 ‘I’m fine. Thank you. And you?’(저는 잘 지냅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은 어떠세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Me, too.’(저도 잘 지냅니다.)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통역이 맡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나 막상 클린턴 대통령을 만난 모리 총리가 굉장히 당황했는지 아니면 말을 잊어버렸는지, ‘How are you?’라고 해야 할 것을 난데없이 ‘Who are you?’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발음이 안 좋아서 미국식 영어로 ‘하우(how)’라고 해야 되는 것을 ‘호우’라고 했기 때문에 그게 ‘후(who)’라고 들렸다는 ‘썰’도 있습니다.
어쨌든 “Who are you?”라고 해서 다들 깜짝 놀라며 긴장하고 있는데 클린턴 대통령이 유머기질을 발휘해서 “Oh, I am Hilary’s husband.”(나는 힐러리의 남편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모리 총리가 전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Me, too!”라고 했다는 겁니다.
영어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취업을 위해 회사에서 면접을 하는데, 영어 면접 시간이 되어 면접관이 영어로 질문했습니다. “아 유 레디(Are you ready)?”(준비되셨습니까?) 그러자 지원자가 황급히 대답했습니다. “No, I’m a boy.” ‘레디(ready)’를 ‘레이디(lady)’로 착각한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이 다 웃으며 뒤집어졌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 면접자는 너무나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졌는데,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재빨리 한마디를 또 던졌습니다. “Oh, I’m sorry. I’m not a boy. I’m a gentleman.” 그러자 모든 사람에게서 한 번 더 폭소가 터져 나오고 다들 또 다시 뒤집어졌습니다. 하지만 순간의 재치를 인정받은 그는 무사히 합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역시 얼굴이 두꺼워야(?)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실수가 뭔지를 모르거나, 실수를 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물론 되도록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겠지만, 실수 그 자체가 아주 큰일인 것은 아닙니다. 정말 큰일은, 자기가 저지른 실수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하고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흉년이 들자 이삭이 가나안 땅을 떠나 남쪽의 그랄 땅에 가서 경험한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을 12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리로 간 것도 잘못이지만 거기서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는데,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그 이후 아브라함은 똑같은 실수를 다시 저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 그랄 땅에서 자기 아내 사라를 또 다시 누이라고 했다가 아비멜렉에게 빼앗겼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삭은 실수에 있어서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같이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실패로부터 배운 것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진정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이삭이 가나안 땅에 잘 살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칩니다. 흉년이 든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1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던 것이 이집트에 내려갔던 12장의 사건을 말합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이 그랄 땅에 온 것은 흉년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비가 아무 때나 내리지 않고, 보통 1년에 두 번 내립니다. 유명한 비가 두 번 있는데 ‘이른 비’와 ‘늦은 비’라고 부릅니다. ‘이른 비’는 가을에 내리는 비이고, ‘늦은 비’는 봄에 내리는 비입니다. 우기가 되면서 ‘이른 비’가 내리고, 우기를 마칠 때쯤 되어 ‘늦은 비’가 내리면서 건기가 시작됩니다.
이 두 차례의 비가 오지 않으면 흉년이 듭니다. 그래서 이삭은 흉년을 피해서 그랄 왕 아비멜렉로 갈 것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2절)
이전에 아브라함 때는 안 그러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가지 말라고 아예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을 보면, 아마도 이삭은 원래 애굽으로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는 나일 강이 있기 때문에, 흉년이 들어도 버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풍성함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풍성하고 좋은 애굽으로 가지 말고 이 땅에 그냥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곳에 살라고 하셨으면 어떻게 해주셔야 합니까? 살 수 있는 환경을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 살라고 하시면서 죽게 만드시면 어떡합니까? 적어도 흉년 때문에 가나안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막아 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들어서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는 이삭에게, 그리고 그에게 속한 수많은 사람들과 짐승들이 있는 이삭에게,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여기를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순종을 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기는 좋은 곳이고 살 수 있는 곳인데 가지 말고 여기 죽을 곳에 있으라고 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기근은 신들이 노해서 징계한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실제로도 하나님은 흉년, 기근, 지진 등 자연재해를 통해 사람들을 징계하기도 하셨습니다. 특히 당시 세상 사람들의 악한 죄를 그런 방식으로 징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가운데 이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거기 같이 있습니다. 지금 이 어려운 상황 속에 하나님의 사람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복의 근원이라면, 그런 어려움을 피하게 해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다 고통을 당해도 이삭 만큼은 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상황마다 그것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의 고통에 대해 믿는 사람들이 침묵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기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분명히 알려줍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롬 12:15, 새번역)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저 사람들은 고통당하고 재앙을 당했지만 나는 괜찮으니까 괜찮은 거지.’ 하며 살기를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즘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참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요즘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이 안타까운 게, 서로 편이 갈라져서 너무 많이 싸우고 있습니다. 미국도 편이 갈려서 싸우고 있지만 한국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과 그의 죽음을 놓고도 굉장히 갈라져서 싸우고 있습니다. 또 소위 ‘검언 유착’ 또는 ‘권언 유착’ 사건도 있고, 또 부동산 값을 잡아야 한다고 갈등이 있습니다. 서로 편이 갈라져서 싸우는 모습들을 보면서 숨이 막혔습니다.
대개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대개는 어느 한 쪽으로 마음이 갈 겁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저 사람 저거 잘못했네.’라고 하거나, 아니면 ‘왜 저 사람을 저렇게 만느나?’라고 하면서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저는 지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가 보일 첫 번째 반응이 무엇이여야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를 지적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어느 한 편에 붙어서 이쪽이 맞고 저쪽이 틀리다고 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도 정치적인 성향을 나름대로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쪽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저쪽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지지자가 다 다릅니다. 그게 나쁜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성향이 모든 것을 보는 판단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성추행 사건이나 죽음이 벌어졌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반응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에 우셨습니까? 너무 안타까워서 ‘어떻게 이럴 수밖에 없었는가?’ 하셨습니까? 돌아가신 분은 이미 끝났습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에 의해 끝났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사람들, 유가족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보셨습니까? 피해자를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해보셨습니까? 아니면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면서 계속 그런 데 휩쓸리고 계십니까?
판단을 아예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안타까워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우리는 잘 모르지만 기도하는 겁니다. 너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안타까움이 하나님께서 지금 이런 상황을 보시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며 마음을 함께 할 때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도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우리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또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직장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고, 나 자신이나 내 자녀의 진로 문제가 안 풀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아무 문제 없이 복만 받고 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벌어지는 현상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걸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끝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우리의 끝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결국 성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도 지금 벌어지는 현상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 지켜주시는 주님이시고,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에도 지켜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의 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가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그런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함께 고통을 당하는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기 원하십니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번에 코로나19 사태가 벌어지면서, 우리도 형편이 어렵지만 그래도 같이 마음을 모아서 ‘이웃사랑기금’도 조성하고 어려운 지체들과 이웃들을 돌아보자고 했는데,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단순히 돈만 내는 게 아니라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판단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종 판단은 결국 하나님이 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따라 울기도 웃기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환경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상황을 뛰어넘는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가나안 땅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인가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3-4절)
하나님은 여기서 네 가지의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첫째, ‘기근이 있지만 계속 이곳에서 견디고 있으면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 그러니까 진정한 복은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은 많이 벌었는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지 않으신다면 그게 복이겠습니까?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겠다.’라고 하시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입니다.
세 번째는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해줄 것이다.’
네 번째는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4)입니다.
이삭이 계속 이 땅에 머물고 있으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해주신 엄청난 복이 이어질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지금 이삭에게도 약속하시는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진정한 복, 참된 복입니다.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진정한 복, 하늘의 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가짜 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행해집니다. 여러분, 가짜 복을 추구하면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기서 진정한 복을 이삭에게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그 진정한 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더 많이 모아서 더 큰 거부가 되라거나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고,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데 살고…
그런데 오직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현재의 생활을 절제하며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하고 싶은 일이 아무리 많아도 내일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모든 욕망을 절제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일을 다 책임져주겠다고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질을 모으거나 강한 물리적 힘을 가지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행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로 관심이 뭐냐 하면, 정말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주로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모으려 하고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데, 많은 것을 모으고 높이 올라갔을 때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실패하고 타락하는 사람보다 성공하고 타락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입니다. 성공하고도 타락하지 않으면, 더 좋아지지는 않지만 타락만 안 해도 굉장한 사람입니다. 성공하고 어떤 위치에 올라갔을 때 ‘야,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러냐?’라고 하지만, 나도 그 위치에 갔을 때 과연 내가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장담하지 못합니다. 놀랍게도 성공하고 타락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넉넉하게 살고 성공해서 살면 당연히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진정한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도구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지, 그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사니까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진정한 복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땅에서 다 없어지는 것이면 진정한 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되는 것이 진정한 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과 매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1센트도 못 가져간다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그토록 추구하며 삽니다. 하지만 아무리 높아봐야 그런 것을 못 가져갑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도 계속 함께 해주시는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동행하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에 대해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이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나머지는 모두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안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비결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2. 실수하는 사람을 변화시켜서 쓰시는 하나님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겪었던 어려움은,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데 지금 주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네 신을 섬기며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세상에서 함께 섞여 삽니다. 그래서 경험하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사실 그들과 생각이 일치하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주일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는 못하지만, 이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예배의 중요성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주일에 일하게 하거나, 직장에서 파티를 해도 주일에 합니다. 가족 모임이나 결혼식도 주일에 하는 경우가 많고, 요즘은 고등학교나 대학교 등 학교들이 하필 졸업식을 주일에 합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하는 데도 있지만 주일에 하는 데가 가장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에 가야 하기 때문에 빠져야 한다고 하면 이해를 못 합니다. ‘매주 교회 가면서 한 번쯤 빠져도 되지, 뭘 그러냐?’라고 합니다.
이삭이 살고 있던 환경은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가하고 죽음의 위협을 가하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애굽으로 가지 않고 그랄 땅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이 굉장히 불안했습니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6-7절)
이삭이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아내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을 죽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고대에는 여성을 인격으로 생각하지 않고 물건 취급을 해서, 누구든지 힘센 사람이 차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관심을 둔 여자가 어떤 사람의 누이라면 일단 빼앗고 난 다음 그 오라비와 협상을 하면 되지만, 아내이면 협상이 안 되니까 아예 남편을 죽여 버리고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곳에 오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새로운 곳에 이사를 가면 아내를 빼앗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는 무법천지였습니다. 무슨 경찰이 있습니까, 군대가 있습니까? 힘센 사람이 법이었습니다. 이삭은 그러한 가나안 땅의 풍조가 두려웠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는데, 이삭은 거기서 교훈을 얻지 못한 겁니다. 애굽에서 또 이 그랄 땅에서, 하나님은 두 번이나 아내를 빼앗겼던 아브라함을 지켜주시고 도로 찾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그 두 사건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분명히 그 사건들에 대해 이삭에게 말해주면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막상 자기가 그 상황이 되고 보니까 이전에 분명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할 때 신앙에 대해 분명히 이야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모임이 있는데 ‘왜 어제 모임에 안 왔습니까?’라고 하면, ‘교회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그것이 제겐 아주 중요합니다.’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못 갔습니다.’라고 둘러댑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없고, 괜히 이상하게 보이기 싫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산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너무 사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 10:28)
사람도 우리 몸을 죽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둘 다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7절 끝에 이삭의 문제점이 나와 있습니다.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의 문제도 ‘두려움’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도 두려움 때문에 두 번이나 그런 일을 당했는데, 이삭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웠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두려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결국 사람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나머지는 다 따라옵니다.
이처럼 이삭이 거짓말로 속였지만, 결국 이삭과 리브가의 관계가 한 사건을 통해 밝혀지게 됩니다.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8절)
왜 이삭은 아비멜렉이 창으로 볼 수 있게 껴안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더워서 창문을 열어놓았을 수도 있고, 아비멜렉이 리브가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몰래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관계가 수상해서 정보원을 보내어 보고를 들은 것을 직접 보았다고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삭과 리브가가 부부라는 사실을 아비멜렉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9-11절)
여기 보면 이삭이 자기 문제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9절 중간에 “내 생각에”라고 합니다. 이게 문제의 근원입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렇게 했다.’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내 생각에 이렇게 했다.’라고 합니다. 내 생각으로 하면 항상 이렇게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남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이 죽을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아주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무서운 벌이 자기들에게 내렸을지 모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실 그의 이런 말은 위선입니다. 실제로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남의 아내를 많이 훔쳐오거나 빼앗아오고 그래서 남편들을 죽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적어도 법적으로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죽을죄인 줄 알면서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도 무엇이 죄인지를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러다 뭔가 일이 터지면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고 느낍니다.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은 항상 불안합니다. 왜 불안합니까? 본능적으로 자기를 심판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 나가는 말 ]여러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셨으면, 이삭은 믿음으로 그 사실을 붙들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내 귀에 들리고 있다면 절대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살라고 하셨다면 이삭은 그것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마치 망하는 길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내 귀에 들이고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내 귀에 들리지 않고 계속 세상의 소리만 들리고 있다면 큰일입니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현재의 형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있으면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 사태 때문에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없을 때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지만, 아직 이삭의 신앙은 이론적이었습니다. 실전에 닥치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훈련으로 주신 것이 흉년이라는 상황입니다.
여러분, 내 앞에 혹시 어려운 문제, 풀리지 않는 문제가 가로막고 있다면 그 해결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냥 가나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 머물라고 하십니다. 상황이 어려워도 믿음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약속을 붙들며 살라고 하십니다. 다른 데로 자꾸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해주셨으면, 약속해주셨으면, 거기에서 절대 굶어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며, 참된 복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서 새로 살아야 했을 때처럼 우리도 불안하고 막막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랄 땅에서도 이삭과 함께 하셨고 그를 보호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삭이 실수했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보호해주셨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하다 실수했지만,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우리도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날마다 놀라운 복을 경험하고 나누어주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창세기 26장 하나님 말씀] “르호봇의 축복”(창 26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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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26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르호봇의 축복이라는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온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우물을 팠는데 모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나오게 된 겁니다. 우리도 이 시간 르호봇과 같은 우물을 파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르호봇의 축복 ”(창 26 : 12-22)
하나님의 축복은 순종할 때에 임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받은 인물을 보면 모두 순종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노아, 이삭, 요셉, 다윗, 사무엘, 다니엘, 등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두 순종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서도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순종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삭이 축복을 받은 것은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생각과 달라도 따라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나의 생각에 맞으면 따라가도 아니면 하지 않는 이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처럼 복을 받아야 합니다. 순종은 나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명령하실 때 하면 됩니다.
창 26:12-14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순종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을 말씀을 잘 듣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삭은 그랄 땅에 가뭄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그 해에 백 배의 복을 받게 됩니다. 이삭이 복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순종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다면 복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그곳에 함께 살고 있었던 블레셋 민족들은 복을 받지 못했는데 어떻게 이삭만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이슬에 있습니다. 가뭄이 들어도 밤에는 이슬이 내리면 땅이 촉촉하게 젖게 됩니다.
신 28:1-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임한다고 말씀합니다.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까지도 복을 받게 됩니다. 이삭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였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이삭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상의 사람들이 시기하고 부러울 정도로 축복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큰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에섹’의 우물을 양보해야 한다.
‘에섹’이란 말은 “다툼”이란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삭은 가뭄이 들어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 우물은 세상의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 놓았던 우물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여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우물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재산을 남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 우물을 팠는데 그랄 목자들이 와서 자신의 것들이라 우기는 바람에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과 서로 싸우면서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싸우지 않았습니다. 양보를 한 것입니다. 이삭은 그랄 목자들과 싸우지 않고 자신이 판 우물을 양보했습니다.
잠 20: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잠언서에 보면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며 미련한 사람은 다툼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이삭은 다툼을 하지 않고 양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어떻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하고 멍청한 것처럼 느껴지는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서 보면 하나님이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잠 28:2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탐심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다투게 됩니다.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다 보면 다툼이 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양보하면 풍족하게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부부와의 다툼을 피해야 합니다. 다툼은 가정을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가정이 평안할 때 사업도 잘 됩니다. 가정이 시끄러우면 사업도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부부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서로 믿음도 맞아야 합니다.
잠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하나님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허물도 감싸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툼도 사라지게 됩니다.
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른 덕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한 가정이 있는 반면에 육선이 집에 가득해도 다투는 가정이 있습니다. 먹을 양식이 풍족해도 다투는 가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지는 못해도 작은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양보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고 화목한 가정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투지 않고 양보할 때에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싯나’의 우물을 포기하라
‘싯나’는 “대적함”이라는 뜻이다.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팠는데 또 따라와서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고 이삭의 목자들과 싸우는 것이다. 이삭은 또 우물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목자들이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삭은 또 우물을 포기하고 목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내가 한 번 참지 두 번 참냐! 너 오늘 잘 걸렸다.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그래 내가 울고 싶었는데 뺨을 때려주는구나! 넌 오늘 끝장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투지 않으려고 했고 싸우지 않으려고 양보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삭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도 억울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까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책임을 집니다.
이삭이 위대한 것이 사람으로서 하기 힘든 것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삭의 순종의 인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닌 것은 빨리 포기하고 돌아설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인생에 성공할 수 습니다. 이삭이 자신의 것이라고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싸움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내가 억울하게 상황이 꼬이는 것 같지만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하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이라면 설령 이것이 나에게 유익이 있다 하더라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뒤 전이고 자신의 유익만 위하여 싸운다면 예수님의 영광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세상의 법정에서 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양보하고 포기하면 빨리 끝나고 손해도 덜 볼 것인데, 자신의 고집과 자존심 때문에 세상의 사람들과 싸워서 이겼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닐 것입니다. 나의 작은 유익은 있을지 모르나 다른 큰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큰 것에 소망을 두고 바랄 볼 줄 아는 믿음의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나님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투는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면 하나님이 책임을 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더 큰 축복으로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가 양보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나의 정욕을 십자가에서 못 박았습니다. 나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축복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 축복이 무엇입니까? 르호봇의 복입니다.
‘르호봇’의 우물을 성취하라
‘르호봇’은 “장소가 넓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작은 우물을 포기하고 양보하니까 더 넓은 것으로 축복하시고 우물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넓은 장소라는 ‘르호봇’의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두 개의 우물을 양보하고 포기하니 르호봇이라는 큰 축복으로 주시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억울하고 양보하면 끝날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을 갚아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억울함과 분함은 잠시 잠깐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억울함과 분노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 생각나지 않게 됩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좋은 날을 보게 하십니다. 야베스도 고생을 하면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이런 야베스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복에 복을 더하여 주셔서 자신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지켜 주시고 도와주셔서 자신을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베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기도해 놓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때에 응답이 오게 됩니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이제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영적인 지경을 넓혀나가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넓혀나가고, 인격이 갖추어지고, 기도가 넓혀지는 그런 축복을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을 해야 합니다.
또 아울러 육적인 지경들이 넓혀져 나가야 합니다. 사업의 지경이 넓혀지고, 부동산이 넓혀지고, 물질의 축복이 넓혀지는 이런 축복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이 윤택해지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한 주간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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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2설교 / 창세기26장23-33절 / 너는여호와께복을받은자니라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6장 23-33절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은 분명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그러나 구약을 통해서는 그것을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통해 내다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통해 내다보게 하시지만 그것에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분이 진정으로 주고자 하는 복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외적이고 물질저인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히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관련해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통해 때로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잃게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성도는 주어질 때 주신 이가 하나님이신 줄 알고 감사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거두어 가실 때 거두어 가시는 이가 하나님이줄 알아야 하고, 그때도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입니다. 본래는 그랄의 평원에서 지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으로 인하여 그랄의 골짜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땅 백성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그렇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랄 골짜기에 와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우물을 파기만 하면 그랄 사람들이 와서 다투고 대적하는 일이 있었던 겁니다. 이때 이삭은 저들의 다툼과 대적에 대하여 다투거나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우물을 팠는데,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의 갈등 이후 평안히 안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곳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였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왜 그가 르호봇을 떠나 브엘세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이후 본문을 통해 추측해 보자면 르호봇에서도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산 인생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나그네로서 살게 하셨습니다. 어느 곳에 머물러 평안히 지내게도 하셨지만 거기서 영구히 살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론에서도 말했지만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안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르호봇에서는 다투거나 대적하는 일이 없었지만 , 그렇다고 해서 그곳이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하신 것 입니다.
좀 더 넓게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가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길 때가 있겠지만 400년 후, 즉 아브라함의 자손 4대만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오게 되어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창15:1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안식처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지상의 삶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삶 속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지,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전세 혹은 월세로 삽니다. 반면 자기 집을 가지고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안에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의 경우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집이 없으면 집이 있기를 바라고, 집이 있다면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을 샀다고 해서 평안함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불편한 일들이 있고, 때로는 어려움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왜 그러한 일들이 있는가? 지상의 삶은 결코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불편한 삶, 어려운 사람, 고난이 동반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진정한 안식이 없다는 것을 알리시면서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은 언제나 하늘을 향해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이 어떤 일로 인해 브엘세바로 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브엘세바로 옮기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데, 24절입니다. “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 즉 하나님께서는 르호봇에서 평안하게 안식하게 하셨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영원한 안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두려워할 만한 일을 만나게 하셨던 것 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워할 만한 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 말은 창세기 15장 1 절의 말씀을 상기 시키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기서 ‘이 후’란 어떤 일 이후 입니까? 아브라함이 당시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연합군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물리쳤지만 강대국이기에 다시금 정비하여 아브리함을 치러 올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의 방패로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삭에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동일합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었다면 동일하게 너에게도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 조금 더 설명하자면 두려워할 만한 일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할 만한 일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너를 지키고 보호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를 능히 지키시고 보호하실 수 있는 분이시란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아무리 강대국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그런 강대국이 연합을 이루어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다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 란 말씀은 ‘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생각하셔서 ’ 란 의미 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있으셨고,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동일한 약속을 이삭에게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남달라서 아브라함을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달리 말하면 하나님 자신이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반드시 지키시기 위해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할 것이라는 겁니다 .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은 이미 같은 장인 창세기 26장 3 절과 4 절을 통해 말씀하셨던 부분 입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것은 사실입니다. 창세기 26장 8절에 의하면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거주하였기 때문에 오래 전에 말씀하셨던 것은 잊어버렸다는 차원에서 다시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인간에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있을 때 그 두려움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 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처럼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로 인해 그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마13:22 참조).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 이삭을 찾아가시고 이전에 말씀하셨던 바를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실 뿐입니다 . 세상의 염려, 두려워할 만한 일로 인하여 말씀이 막힌 것처럼 있기 때문에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했다가 상황이 나빠지니까 처음에 말씀하셨던 것과 다른 말씀을 하시지도 않습니다. 약속하신 말씀에 대하여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말씀하셨던 바와 다른 말씀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미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살피셔야 합니다.
간혹 보면 매번 똑같은 말씀이 어떻게 힘이 되고 어떻게 위로가 되느냐는 식의 말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말씀에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할 때 말씀에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런데도 말씀에 힘을 받지 못하고 말씀에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나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다가도 세상의 어려움이 있으면 그 어려움 때문에 말씀을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겁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 66권으로 기록된 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힘이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위로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 밖에서 힘과 능력과 위로를 찾으시면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많은 부분 다윗이 기록을 하였는데, 다윗의 경우 얼마나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까? 충신인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시기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움 받았지만 이스라엘 모든 나라의 왕으로 세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 세움 받고 난 뒤 아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의 인생 전반을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런 모든 어려움 속에서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고,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시고, 하나님이 나의 위로임을 누누이 고백합니다. 다윗에게만 그런 하나님으로 계십니까?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그런 힘과 위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까? 하나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동일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의 여러 가지 어려움, 환난을 잘 활용하셔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훈련을 잘 해야지, 이 훈련을 하지 않고 쉽게만 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과의 갈등 왜 없겠습니까? 나와 저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갈등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좋아하는 취양도 다릅니다. 생각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맞춰가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 말씀 안에서 변화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애써야 합니다.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결코 영광의 교회가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24절을 보시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상 우리는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시편 3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나는 한명이지만 나를 잡기 위해서, 나를 해하기 위해서 천만인이 진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5절에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진쳐서 두려워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누워 자고 깰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다윗을 붙드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시편 2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4절에 의하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어느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이 위하시는 사람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저들만의 고백이 아니라 성도의 고백임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까? 본래는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선 자체이신 하나님과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아들까지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셨습니다. 때문에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친히 우리의 힘이 되시겠다,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요, 방패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혹 두려움이 찾아온다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5절로 오시면 약속의 말씀을 다시금 받은 이삭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 하나님 편에서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고 , 그 말씀 앞에서 이삭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렸다 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린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모든 말씀 앞에서 우리의 자세는 이러해야 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겠다 , 우리의 위로가 되시겠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 혹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책망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책망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 왜 그렇습니까? 책망하신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말씀이라 할지라도 , 기록된 이 성경 66 권의 모든 말씀 앞에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 복음 앞에서만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실 때만이 아니라 거두어 가실 때도 동일합니다. 우리를 높이실 때만이 아니라 우리를 낮추실 때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세여야 합니다.
실제로 이삭을 보시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브엘세바에서 장막을 쳤는데 , 그곳에서도 종들이 우물을 팠다 고 되어 있습니다. 물 때문에 계속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브엘세바로 왔지만 여전이 물이 부족합니다 . 어려움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포기했는가 ?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먼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우물을 팠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렸다는 것이요, 특별히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우선시 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염려로 있어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을 하지 못할 정도라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성도는 내일을 염려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런 방향으로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 세상의 근심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에 맡겨 놓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일 염려를 왜 오늘 가지고 와서 염려하겠습니까? 한 날의 괴로움도 족하다고 하시는데, 앞으로 되어질, 그러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염려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간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26절 이하는 이비멜렉 왕이 이삭을 찾아와서 언약을 맺고자 하는 내용인데, 우선 26절에 보시면 “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아비멜렉이라는 말은 왕의 이름이 아니라 칭호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아비멜렉과 지금 여기에 나오고 있는 아비멜렉은 다른 인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군대 장관 비골도 나오는데, 이것 역시 이름이 아니라 군대 장관의 명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삭에게로 와서 언약을 맺고자 하는데,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왕의 언약을 살핀 바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22 절 에 보면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청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23 절 에 의하면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간단히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후대하면서 살자 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맹세가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왔을 때 지켜졌는가? 한편으로는 지켰다 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그랄 땅, 곧 블레셋 왕에게 찾아왔을 때 그를 받아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지켜지지 않았다 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우선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이삭이 거부가 되었을 때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결국 쫓아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당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부당하게 쫓아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26장 18절에 보면 아브라함 사후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메웠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후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쳤지만 가는 곳마다 시비를 걸고 다투고 대적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 역시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과의 맹세를 잘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이삭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 그러니까 이삭이 저들의 악에 대하여 선으로 나타내었지만, 선으로 나타내었다고 해서 그들의 악함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닌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나를 쫓아낸 것은 너희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지 내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란 것 입니다. 한 마디로 부당하게 쫓겨났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너희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데,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성도의 경우 무조건 당하는 쪽으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들의 죄에 대하여 드러내야 할 때는 드러내야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신앙인도 가능하다면, 그들의 원수들이 침해 행위의 목적을 회상케 하고, 그들의 강포와 협잡과 불의한 행위를 자제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평을 털어놓는 일은 합당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이 자기들에게 닥쳐오는 모든 침해를 묵묵히 소화시키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복수심과 복수 행각을 삼가기를 요구하시는 것뿐이다.”
왜 성도는 저들의 악에 대하여 인내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우리의 본성에는 복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반드시 복수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수심만 없다면, 악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교정할 목적으로만 있다면 때에 따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부적절한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의 복수심을 가진 말이라면, 그래서 그 말로 인하여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래서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허물을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신중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부당하게 대했는데 이제 너희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삭에게 아비멜렉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을 보시면 “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 아브라함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비멜렉 왕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과도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 실제로 함께 하심을 이방인 왕이 보았다 고 말할 정도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신 외적인 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이삭의 삶의 자세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5:16). 이삭의 삶의 자세가 저들이 볼 때도 귀감이 될 정도인 것입니다. 물론 실수한 것도 있었지만 그 실수 한 부분 외에 그의 삶의 자세는 이방인에게조차 귀감이 될 정도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에게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에 두려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왕이 한 가정의 가장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이삭을 부른 것이 아니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친히 언약을 맺자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의 경우 여전히 남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남의 땅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삭에게 힘이 없었는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피했습니다. 물러났습니다. 악에 대하여 선으로 갚고자 했습니다. 그런 이삭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비멜렉 마음에 두려움을 주셨고, 친히 찾아와 언약을 맺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아비멜렉의 자세를 통해 인간의 간사함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시기로 인하여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번성함 앞에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에도 만만치 않았지만 더 이상 견줄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사람이요, 이중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언약을 맺기 위해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교만으로 똘똘 뭉쳐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이런 본성이 없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은 제거되었지만 이 땅에서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면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이기에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전적으로 이기지는 못합니다. 이 땅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이삭이 악에 대하여 선으로 이긴 것처럼 우리 역시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더불어 주의 은혜를 따라 선한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29절을 보시면 “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 지금 아비멜렉은 이삭이 블레셋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두려움을 주셨고, 그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심으로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찾아와 언약을 맺고자 하는데 , 쉽게 말하면 네가 우리를 해하지 말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다 .
그러나 앞서 있었던 사건을 보면 분명 이삭은 쫓겨나듯 나갔습니다 . 이삭이 거짓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는 분명 호의를 베푼 것이 있었지만,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을 때는 그 복으로 인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없어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가장을 합니다. 잘못을 시인하기보다는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런 저런 변명을 댑니다. 분명한 사실로 있지만 사실을 사실로 대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진리로 여기지 않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블레셋 왕의 말이 정당하지 않을지라도 일일이 다 따지지 않습니다 . 오히려 블레셋 왕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 30절과 31절을 보시면 “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이후 다시금 찾아와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뿌리치면 안 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을 때 우리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경감시켜서는 안 됩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잘못한 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찾아 왔을 때는 그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찾아와서 화해의 손길을 내놓는 것으로 인하여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죄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를 향해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이웃의 죄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이런 자세가 사도 바울이 경고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그런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고후6:14).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불신자들과 짝을 이루어 그들의 사슬로 묶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불의와 불법에 동참하게 되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언약 체결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해주는 방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는 말씀에 합당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32절과 33절을 보시면 “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 어딜 가나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우물을 주셨지만, 블레셋 왕과 언약을 체결하는 그 가운데서도 물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주십니다. 이곳을 ‘세바’라 하였는데 아브라함 때 블레셋 왕과 언약을 맺은 브엘세바를 상기시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조차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 블레셋 왕과의 언약 이후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 있는데(창21:33), 이삭 역시 동일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 있고자 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맹세는 사람과 했지만 이삭이 의지하고자 한 것은 우물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그 복을 이방인이 알 수 있도록 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왕조차 평화를 위해 손을 내밀 정도가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서 이삭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성취해 나가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왕이 그 복을 함께 누리는 자로 있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아브라함 때도 그렇지만 언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그들이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네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에 우리를 해하지 말라는 측면에서 언약을 맺었을 뿐입니다. 반대로 약해지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언약을 깨어질 수 있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 맺은 언약을 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약자가 강자에게 언약을 맺자고 한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절대적인 분께서 그렇지 못한 자와 체결하신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맞잡은 손을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언약을 체결하시면 그 언약을 깨뜨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두렵게도 하시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의 힘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위로 역시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만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처럼 악에 대하여 선을 나타내는 열매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016/08/19(금) “창세기 26:1-22” / 작성: 이창호
본문 창세기 26장 1-22절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가 창세기에 첫 등장하여 보여준 일은 참으로 놀라왔습니다(창 22장).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단에 눕혀놓고, 칼을 들어 찔러 죽이려 할 그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버지에게 대항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 누워있었습니다. 하나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도 대단했지만,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이삭도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장인 25장에서는 이삭은 결혼했지만 임신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계서는 이 부부에게 쌍둥이 형제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삭 부부가 자녀들을 키우면서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를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다는 구절을 접하면서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26장은 이삭이라는 인물이 공식적으로는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작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있었던 흉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왔지만 기근으로 인해 애굽까지 갔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때와 같이 심한 흉년을 이삭이 맞이했는데 그도 이 흉년을 피해 이동하던 중 블레셋 영토인 그랄에 이르렀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가는 길에 그랄에 들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절) 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가 이곳 약속의 땅, 즉 가나안 땅에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3-4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대해 책임을 지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기에 그 후손들에게 이 땅과 후손을 주겠고 그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의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죄로부터 사면되는 복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다시 그 아들 이삭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께서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언약을 주셨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던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정착합니다. 그런데 그랄에 정착하면서 이삭은 그랄 사람들에게 리브가를 아내가 아닌 누이로 소개합니다. 이유는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7절) 고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청소년기 그는 제물로 바쳐지는 죽음도 불사했던 이삭이었습니다. 또 지금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계획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 바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랄에 정착하는 믿음의 소유자였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처럼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면 두려움에 휩싸여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비멜렉 왕이 이삭에게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10절) 라고 말할 정도이니, 이삭은 지금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부인 리브가를 만민들 앞에 내놓는 파렴치한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이 모습을 바라보는 부인 리브가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그대로 방치해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아비멜렉 왕이 보게 되고, 이에 왕이 이삭을 불러 자초지정을 물어 자칫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할 뻔했다고 꾸짖고, 백성들에게 리브가를 범하지 말 것을 공포하였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선대에도 동일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20장). 약 70년 전에 아브라함이 그랄에 거류할 때 부인 사라를 누이라 속였고, 이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갔으나, 하나님께서 현몽하셔서 사라를 가까이 하면 죽일 것이라고 하셨기에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아들 아비멜렉이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같은 조치를 취했습니다. 신앙인으로 우리가 보는 세계관은 일반인들과 다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아브라함을 위해서 그리고 이삭을 위해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과 비신앙인과의 차이점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현상만을 보면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두려워하고 좌절하기 보다는 미래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데 있습니다. 두려움을 피해가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는 것이 용기라고 하면, 진정한 용기는 나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닐까요!
두 번째는 콩 심은데 팥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삭의 모습은 20장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저 역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 자녀들의 모습에서 과거 저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잘난 모습이 아니라 못난 모습이 나타나기에 참으로 아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이 더 조심스럽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야 제가 되돌리려고 해도 되돌릴 수 없지만, 오늘이라도 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면 분명 제 자녀들도 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요성경공부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아이들을 위해 늘 하는 기도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 제 아이들로 하여금 저와 같이 후회하는 전철을 밟게 하지 마시고, 설사 그들이 제 전철을 답습한다면, 저처럼 오랫동안 방황하지 않고 속히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브라함과 동일한 언약을 주시는 이유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6절)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 역시 목숨이 두려워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속였던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나약한 신앙인으로 주저앉아있지 않았습니다. 나약한 인간으로서 아브라함은 인생의 굴곡에서 넘어졌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난 그는 하나님을 믿되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자신을 던졌고,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삭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12절 이하에 나타나는 이삭은 신앙인이되 나약한 과거의 모습이 아닌 인내하며 감사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삭은 그랄 땅에 거주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를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 때에 파 놓은 모든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리고 떠나라고 할 때 그는 과거 아브라함과 당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맺은 언약을 내세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이 흙으로 메운 우물들은 아브라함이 선대 아비멜렉 왕에게 양과 소를 주고 구입하고 일곱 암양 새끼로 증거를 삼은 우물이었기에 얼마든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이 귀한 곳이고 따라서 우물에 대해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정식으로 왕으로부터 소유권을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들의 요청대로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옮겨서 우물을 파고, 이 우물에 대해 그랄 목자들이 시비를 걸자 양보하여 또 다른 우물을 파지만 또 분쟁이 생기자 미련 없이 그곳을 양보하고 더 이상 그들이 시비를 걸지 않을 때까지 다른 우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더 이상 우물로 인한 분쟁이 없자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우물의 이름이 다툼을 의미하는 “에섹”, 대적함을 의미하는 “싯나라”라고 할 정도로 분쟁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판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22절)
이삭은 새로 판 우물에서 분쟁이 더 이상 없자 그곳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부르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넓게 하셨다“ 라고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라는 고백을 통해 과거 목숨이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만큼 나약했던 신앙인이었던 이삭이 시기와 질투로 자신에게 시비를 걸고 대적해올지라도 그들이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을 때까지 양보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3절) 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닌 신앙인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갈 때, 억울하게 시비와 다툼을 겪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 주실 것을 믿고 세상의 훼방과 간섭에도 좌절하지 않고 새 우물을 찾아 파던 이삭과 같은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르호봇”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삭의 삶을 통해 우리 각자가 깨달은 바를 우리의 일상에 그대로 접목시키는 여러 교우님들의 매일이 르호봇의 감사와 고백이 넘쳐나는 복된 시간들로 가득 채워질 줄 믿습니다.
기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삭의 삶을 통해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두려움에 낙담하고 좌절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내 삶을 자녀들이 그대로 답습한다는 사실 앞에서 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바른 신앙인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시기와 질투로 분쟁과 다툼을 행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르호봇”을 예비해두셨을 믿고 인내하며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지혜와 인내와 사랑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본문의 이삭과 앞장에서의 아브라함과 공통점은?
2.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어떤 언약을 하셨나요?
3.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언약하신 이유는?
4. 이삭은 왜 우물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나요 ?
5. 르호봇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작성: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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