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 천하 유아 독존 | 부처님오신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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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첫 번째 구절의 의미는 자기가 세상에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라는 거예요. 두 번째 구절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내가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는 데서 끝나면 안되고 주인노릇 못하고 괴로움에 빠져있는 중생들이 많으니 다른 사람도 행복해지도록 도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 뜻을 잘 새겨서 작지만 실천하는 불자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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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독존 – 나무위키

상기의 1항목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불교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나만 잘났다’라는 의도로 한 선언이 아니지만, 직역하면 그렇게 해석되므로 일상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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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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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인도 부파 중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문헌과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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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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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정말 붓다의 독선 …

쇼코는 “지혜와 선정, 지계와 선근에서 자기만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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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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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독존의 참 뜻은 무엇인지요? – 불교신문

문 :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탄생하셨을 때 사방 일곱 걸음을 걷고는’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하셨다는데, 이때의 ‘유아독존’이라는 표현은 다른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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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bulgyo.com

Date Published: 6/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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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유아독존 뜻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 네이버 블로그

천상천하 유아독존 뜻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 세상(우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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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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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 다음블로그

「천상천하유아독존(上天下唯我獨尊) –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이 말은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외쳤다고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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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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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유아독존 – 뉴스프리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만 부처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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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freezone.co.kr

Date Published: 2/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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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에서 무아 (無我)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의미입니다. 불가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비견할 수 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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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seoulbar.or.kr

Date Published: 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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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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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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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5.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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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디가 니까야』, 『맛지마 니까야』 등 초기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곧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다시 태어남은 없다.”(DN14경, MN123경). 또 한역 『장아함경(長阿含經)』을 보면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천상천하 유아위존 요도중생 생로병사[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대정장 T1, 4중). 이는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존귀하다. 요컨대 나는 중생들을 생로병사에서 건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인도 부파 중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문헌과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도 나온다. 이는 앞의 초기 경전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부처의 이 탄생게는 선종의 공안의 하나로 정착되었으며,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선문염송(禪門拈頌)』에는 두 번째 공안으로 제시되어 있다. 선문염송 2칙 세존주행(世尊周行)은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태어나셨을 때 일곱 걸음 두루 걷고서 사방을 둘러본 후,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할 뿐이다.’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염 ‘내가 당시에 그 광경을 보았다면, 한 방에 때려죽이고 개에게 먹이로 주어서 천하의 태평을 도모했을 것이다.’」”(『정선 공안집』 1). 간화라는 수행법을 세운 후 선종에서는 붓다의 탄생게도 화두로 삼아 자신의 깨달음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을 혜심은 선문염송 편집에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백성호의 현문우답]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정말 붓다의 독선일까?

[백성호의 현문우답] 붓다를 만나다(2)

마야데비 사원 안은 다소 어두컴컴했다. 기원후 4세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쯤이다. 당시 돌을 깎아서 부조를 하나 만들었다. 사라수 나무의 가지를 붙들고 아기를 낳고 있는 왕비 마야의 모습이다. 나는 조각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붓다가 입멸한지 800년 후에 누군가 이 조각을 깎았다. 그건 붓다의 법을 품고서 석굴암을 깎고, 석가탑을 깎던 신라의 석공과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짧지 않은 세월이다. 돌은 닳고 닳아 있었다. 옷이나 장신구의 세밀한 모양새는 이미 바람과 세월에 깎여버린 상태였다. 그래도 윤곽은 뚜렷이 보였다. 조각 속 마야 부인은 오른손으로 나무를 붙들고 있었다. 그 나무의 이름이 사라수(沙羅樹)다. 왕비는 당시 아무런 고통 없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아소카(Asoka)’라고 부른다. 우리 말로 풀면 ‘무우수(無憂樹)’다. ‘걱정이 없는 나무’란 뜻이다.

나는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우리의 삶에도 나무가 자란다. 그 나무의 이름은 ‘유우수(有憂樹)’다. 우리는 늘 ‘걱정의 나무’를 붙들고 살아간다. 나는 궁금했다. 걱정의 나무는 왜 자꾸 자라는 걸까. 아무도 원치 않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걱정은 언제 생겨날까. 답은 ‘어긋남’이다. 자신의 기대와 자신의 삶이 어긋날 때, 나무가 자란다. ‘아이가 대학에 합격해야 할 텐데’ ‘이번 프로젝트를 꼭 성사시켜야 할 텐데’ 하는 나의 기대와 눈앞의 현실이 헛돌 때 말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터이다. 불교는 그걸 ‘번뇌’라고 부른다.

그래서일까. 왕비 마야가 잡았다는 나무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 나무의 이름이 ‘무우수(無憂樹)’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무겁고 수고로운 짐을 진 자들아, 내게로 와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32절)라고 말했다. 룸비니의 아소카 나무도 그런 희망을 건넨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로운 날들을 버티고 있는 우리에게 ‘걱정이 없는 삶, 걱정이 없는 나라’를 제시한다.

사원 안 부조 앞에 서서 그 나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왕비와 머리 위의 나무와 태어나는 아기가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 나는 무우수 일화가 왕자가 앞으로 체득할 ‘깨달음의 나라’를 암시한다고 본다. 걱정이 없는 자리, 번뇌를 여읜 자리. 실제 역사 속에서 출산 중인 왕비가 그 나무를 잡았든, 잡지 않았든 상관없이 말이다.

출산 장면을 담은 부조 옆 땅바닥에는 표식이 하나 있었다. 유리관을 덮어서 보호 중인 ‘마커 스톤(Marker stone)’이었다. 인도인 현지 가이드는 “여기가 붓다가 태어난 정확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붉은 벽돌이 깔린 바닥에서 5m 더 아래에 돌 표식이 하나 있었다.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왕조는 마우리아다.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이 아소카(기원전 273~232년)다. 이 표식은 아소카왕이 만든 것이라 전해진다. 실제 기원전 249년에 아소카왕이 이곳을 찾아와 참배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니 ‘마커 스톤’은 무려 2200여 년 전에 표시한 자국이다.

당시 한반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부족 연맹체적인 고조선 사회였다. 청동기와 철기 문화가 보급되고, 100년이 더 지나면 북만주에 부여,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가 형성될 시기였다. 이들 부족국가들은 대부분 하늘에 제를 지내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룸비니에서 태어난 아기 왕자는 놀라운 광경을 연출했다. 나자마자 동ㆍ서ㆍ남ㆍ북 사방을 둘러본 뒤,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발을 뗐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서 연꽃이 올라와 받쳤다. 뿐만 아니다. 아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한문으로 옮기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다.

사람들은 따진다. “아니, 어떻게 갓난 아기가 걸을 수가 있나. 그것도 일곱 걸음씩이나.” 지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니. 자기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건가.” “이건 너무나 독선적이다. ‘둘이 아님(不二)’을 설파한 붓다가 어떻게 이렇게 오만한 선언을 할 수가 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비판한다.

심지어 법정 스님이 번역했다는 일본의 저명한 불교문학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비슷하게 풀이한다. 쇼코는 “지혜와 선정, 지계와 선근에서 자기만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러한 뜻을 가리킨다”고 풀이했다.

마야데비 사원 안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 아기 왕자가 둘러봤던 사방(四方)이다. 그건 막힘 없이 ‘툭!’ 터져 있는 우주다.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독선적 선언’이라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쇼코처럼 “남들이 닿지 못하는 붓다의 경지가 최고”라는 풀이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만이 최고’ ‘붓다만이 진리’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나는 마야데비 사원을 나왔다. 룸비니의 바깥 풍경이 아름다웠다. 물음이 올라왔다. “실제 갓 태어난 아기가 일곱 걸음을 걸었을까?” “옹알이만 하는 신생아가 입을 열고 ‘천상천하’를 외쳤을까?” 물론 아니다. 과학적으로도, 의학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일화는 그저 지어낸 허구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더 깊은 상징과 울림이 도사리고 있다. 그 상징이 바로 이 일화의 존재 이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사람들은 대부분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달리 본다. 핵심은 ‘독존’이 아니라 ‘유아(唯我)’이다. 그럼 왜 ‘오직 나만이(唯我)’라고 했을까. 거기서 말하는 ‘나’는 대체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다.

아기 붓다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나머지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왜 하늘 위와 하늘 아래일까. 우주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이 우주를 관통하는 걸까. 다름 아닌 ‘붓다의 정체성’이다. 그렇게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인공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아(唯我)’이다. 그러니 ‘유아(唯我)’의 나(我)는 작은 나가 아니다. 큰 나다. 이 우주를 관통하는 오직 하나의 나다.

한국 선(禪)불교에서는 그렇게 큰 나를 ‘꽃’에 비유한다. 경허의 선맥을 잇는 만공(滿空ㆍ1871~1946) 선사는 그걸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불렀다. ‘세계는 한 송이 꽃/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만공은 그렇게 노래했다. 붓다는 우리에게 그 꽃을 보라고 말한다. 나와 우주를 동시에 관통하는 관통하는 한 송이 꽃 말이다.

붓다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예수에게도 그런 어록이 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6절) 이 대목을 인용할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예수만이 유일한 문이다. 다른 곳에는 문이 없다. 예수를 통해야만 하늘 나라에 갈 수가 있다. 그러니 오직 예수다. 천상천하 오로지 예수만이 존귀하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보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 나는 궁금하다. 그런 예수는 오히려 ‘작은 예수’가 아닐까. 그건 유대인의 핏줄과 유대인의 육신을 갖고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의 겉모습만 알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나’는 ‘신의 속성’이다. 그건 이 우주를 관통하며 ‘없이 계신 하느님’이다.

그러니 붓다가 말한 ‘나’도, 예수가 설한 ‘나’도 작은 나가 아니다. 큰 나다. 작은 눈을 가진 우리가, 작은 가슴을 가진 우리가 자꾸만 그 구절을 작게 볼 따름이다.

인도는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다. 인도인은 무려 3000년 전에 벽돌을 구워서 집을 지었다. 집은 물론이고 거대한 규모의 계획도시까지 건설했다.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 유적이 대표적이다. 계획도시 한가운데 도로가 나 있고, 커다란 수로도 설치돼 있었다. 인도는 그런 문명의 나라였다.

룸비니 동산에는 탑(스투파)들이 많이 서 있었다. 벽돌을 구워서 쌓은 탑이다. 지금은 탑의 밑둥만 둥그렇게 남아 있다. 그게 2200년 전에 세운 탑들이다. 한반도의 고조선 시대에 인도는 벽돌을 구워 탑을 세우고 건축을 했다. 그런 탑들의 둘레에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동산에 바람이 불었다. 시원했다. 사원 맞은편의 아름드리 보리수가 마구 흔들렸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긴 숱한 순례객들. 룸비니의 붓다는 그들을 향해 묻는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무엇이 홀로 존귀한가?”“무엇이 숨 쉬고, 무엇이 노래하고, 무엇이 생각하고 있는가?” 그 물음이 걱정의 나무에 물을 주고, 걱정의 나무를 키우며, 걱정의 나무를 붙들고 사는 우리의 가슴에 표창처럼 날아와 꽂혔다.

룸비니=백성호 기자 [email protected]

※페이스북 페이지 ‘백성호의 현문우답’ 주소 : www.facebook.com/wisdomofsilence

유아독존의 참 뜻은 무엇인지요?

문 :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탄생하셨을 때 사방 일곱 걸음을 걷고는‘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하셨다는데, 이때의 ‘유아독존’이라는 표현은 다른 종교의 유일신과 같은 개념이 아닌지요? 그리고 아만에 가득 찬 사람을 표현할 때도 “유아독존적이다”고 표현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모든 생명은 부처와 같은 절대 존재’

그것 깨우쳐 주려는 것이 부처님 원력

답 : 질문한 내용은 에 나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구절의 앞부분입니다. 이 전체문장은 “천상에서나 땅에서나 나 홀로 존귀하다. 온 세상이 모두 고통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는 뜻이 됩니다. 문장의 표현을 일반적 지식으로 해석하면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절대적인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고통에 빠진 모든 생명들을 내가 구원해서 편안케 해 주겠노라’하고 풀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에는 마치 부처님이 스스로를 신격화 한 것처럼 느껴지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만만 가득한 듯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린 마음으로 이 문장을 해석하면 전혀 다른 뜻이 됩니다.

‘천상천하’에서 천상(天上)은 신 중심의 세상입니다. 당시 인도는 바라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신들이 주관하는 세상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타파하셨습니다. 내 삶의 주체는 신(神)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지요. 또한 땅(天下)에서는 개개인의 존엄성이 인정된 것이 아니라 바라문들이 정해버린 타고난 신분과 운명의 굴레만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신분과 운명의 굴레도 타파해 버립니다. 나의 진짜 모습은 신분과 운명에 갇힌 부자유의‘나’가 아니라 절대자유의‘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나’는 모든 존재들 본체로서의‘나’인 것이고, 육체적 감정적으로 제한된 한 개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당연히 싯다르타만을 가리킨 것도 아닙니다. 이 ‘나’를 가리키는 불교용어는 진여.불성.자성.본각.한 물건.이것 등 매우 많습니다. 싯다르타는 바로 이‘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로부터 붓다.여래.세존.석가모니 등으로 존칭되는 것이지요. 석가모니부처님은 일체의 허상을 깨뜨려버리고 스스로가 본래 자유라는 것과 세상이 본래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임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 스스로가 석가모니부처님처럼 깨닫지를 못하고 스스로가 만드는 허깨비 같은 망상으로 인해 고통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모든 생명이 당신처럼 깨달음에 이르러 편안해지길 바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삶은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깨닫도록 처방하고 치료하는데 바쳐집니다. 이것이 문장 뒷부분 말씀의 뜻입니다.

경에서 표현한 바로는 싯다르타가 사방 일곱 걸음을 걷고 난 뒤에 위의 구절을 말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여섯 걸음까지는 아직도 어리석음의 세계에서 헤매는 육도윤회를 상징하는 것이며, 일곱 번째 걸음은 깨달음을 상징합니다. 일곱 걸음을 걷고 난 뒤에 말씀하셨다는 것은 곧 깨달은 뒤의 가르침과 자비를 함축하는 내용임을 뜻합니다. 그러니 ‘갓난아기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은 이 문장의 상징성을 모르거나 모른 체하는 것일 뿐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볼 때에만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불교의 언어는 그 말을 해석하는 사람의 정신적인 경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단순한 말장난으로 삶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송강스님 / 개화사 주지

[불교신문 2429호/ 5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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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유아독존 뜻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천상천하(天上天下) 뜻

하늘 천, 위 상, 하늘 천, 아래 하

하늘 위와 아래의 뜻으로

이 세상(우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아독존(唯我獨尊) 뜻

오직 유, 나 아, 홀로 독, 높을 존

오직 나만이 홀로 높은 존재다.

나 자신의 존재가 가장 존귀하고

높은 존엄성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오직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 또는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원래의 의미와 조금은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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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천상천하유아독존(上天下唯我獨尊) –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이 말은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나자마자 외쳤다고 하는 ‘탄생게(誕生偈)’이다. 그런데 이 말이 경전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 다음은 <전등록(傳燈錄)>의 기록이다.

「석가모니불초생 일수지천 일수지지 주생칠보 목고사방왈 천상천하유아독존(釋迦牟尼佛初生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行七步 目顧四方曰 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모니불이 태어나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일곱 걸음을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고 했다.

• 다음은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의 이록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오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吾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고통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고 했다.

• 다음은 <서응경(瑞應經)>의 기록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하가락자(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何可樂者)」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괴로움뿐인데 무엇이 즐겁겠는가라고 했다.

• 다음은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의 기록이다.

「천상천하 유아최승(天上天下 唯我最勝)」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즉,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그리고 온 세상이 모두 고통 속에 잠겨 있으니 내가 모두 편안케 하리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진동을 하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천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자에게 경배했으며, 태자가 걸었던 발자국 마다 연꽃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연못 속에서 두 마리의 용이 올라와 그 입으로 따뜻한 물을 뿜어 갓 태어난 아기의 몸을 씻겨주었다고 한다.

헌데 부처님께서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셨다는 이 말은 자신만이 높고 존귀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얼핏 생각하면, 이 말이 퍽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며 오만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이 거룩한 가르침이 간혹 절대자적 성향이나 자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스님들 중에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의 깊은 뜻을 제쳐두고 부처님의 자화자찬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우주 가운데 자기보다 존귀한 것이 없다는 그런 교만한 의미의 말이 아니다. 하심(下心)을 강조하신 부처님이 중생을 외면한 채 오직 당신만이 존귀하다고 하실 리가 없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뜻의 이 말은 부처만이 가장 존귀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불성이 있고, 그래서 각자가 부처처럼 귀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지상에 있는 모든 이, 모든 사람사람이 각기 모두 존귀하다는 말이다.

즉, ‘유아독존’의 ‘나’는 부처님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개개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모든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상징하고 있다.

• ‘유아독존(唯我獨尊)’ – ‘유아독존’은 천하에 자기만큼 잘난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거나 또는 그런 아집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이는 다시 말해 ‘너’와 ‘나’의 구분이 생기기 이전의 마음 상태, 즉 절대적 진리와 사랑의 모습을 말한다. 위대한 영적 소명은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동일한 실체와 존재가 되는 것, 남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오신 참뜻이 바로 이처럼 모든 중생이 부처의 본성을 가진 평등한 존재임을 선언하신 데 있다.

그리하여 혜민 스님도 이 말이 “‘나만 존귀하다’라는 뜻이 아니다. ‘유아독존’이라는 말 안에는 너와 나의 구분이 생기기 전의 마음자리, 즉 절대적 진리와 사랑의 모습을 감추어 놓고 있다.”고 풀이했다.

즉, 유아독존의 ‘오직 나’라는 것은 싯다르타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귀하게도 불성을 지닌 모든 개개인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온 뜻은 각자의 존귀함을 깨우쳐 고통 속에 헤매는 중생을 구제하고 인간 본래의 성품인 ‘참된 나(眞我)’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강력히 개인의 구원을 선포하는 말이라 하겠다.

또 한편으로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일곱 걸음을 걸었다거나 말을 했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대승불교 권에서 부처님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미화하고, 교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지어낸 신화이다. 갓난아기가 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 후대의 각색일 뿐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기독교의 세계관은 장엄하다. 부처님의 제자들도 교조의 첫 한마디에 불교의 핵심을 집약한 말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따라서 이 신화가 상징하는 의미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일은 내가 이처럼 위대하니 나를 추종하라거나 나를 따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불법의 수승함을 선포한 것이다. 불법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진리라는 말이다. 나아가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극화하기 위해 지어낸 멋진 픽션이다.

• ‘독존(獨尊)’—독존은 홀로 존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어머니 뱃속에서 탄생할 때에도 혼자 태어났고(獨生). 세상을 하직할 때에도 혼자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나’만이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나’만의 존재를 강조한 것이다. 오로지 혼자인 ‘나’ 자신이다. ‘나’는 우주의 근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한다. 이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대상은 신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 나 자신이다. 나를 꿋꿋이 지키고 중심을 잡되 내 욕심과 남의 욕심이 부딪치면 내 욕심을 버릴 줄 아는 넓은 아량을 지니라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도 천하를 얻고도 너 자신을 잃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있다. 이처럼 철학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원래 의미에 더욱 접근한다.

가족적인 의미로는 나와 배우자와 자손들을 광범위하게 의미를 확장하지만 철학적인 의미는 오로지 ‘나’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태양계를 포함한 자연을 대우주라(大宇宙) 한다면 내 몸과 영혼의 나는 소우주(小宇宙)라 할 수 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속에 소우주인 나는 오로지 홀로 있는(獨存)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석존 자신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정(有情), 그 유정 개개가 모두 가장 존귀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온 세상에서 ‘나 자신’ – ‘개개인 각자 자신’이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생명존중의 선언이다. 이것은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나’란 에고(Ego)의 ‘나’라고 할 ‘갇힌 나’가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이 나 자신임을 ‘깨달은 나’이다. 거기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나도 당신도 생물도 무생물도 모두가 자기로서 존귀하고, 자기 자신으로서의 세상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나’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불교의 지고한 가치인 ’본래부처(本來佛, 本來是佛)‘란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최초의 그리고 최상의 경구이기도 하다.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마음의 눈을 띄울 수 있는 말이다. ‘나’란 부처님 본인만이 아니라 개별자 전체를 아우른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과 연결되는 맥락이다.

나아가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는 말은 각자의 생명은 그 자체로 부처로 존재함으로 존귀한 것이다. 아울러 누구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므로 바로 다음 구절인 ‘삼계개고 오당안지(三界皆苦 吾當安之-온 세상 모든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겠다)’가 가능해진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부처임을 자각하게 되면, 과거의 치욕과 현재의 절망과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평화의 첫걸음은 나 자신에 대한 긍정에서만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적 원리는 연기설(緣起說), 즉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데, 오로지 ‘나’만이 최고라는 그런 독선적 의미의 선언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의 ‘아(我)’는 싯다르타 태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 나아가 모든 유정들이 다 저마다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생명에는 귀천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탄생선언은 곧 모든 유정들이 다 저마다 존귀한 존재로 태어난다는 생명선언(生命宣言)이자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人權宣言)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모든 존재를 연기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연기적 존재란 ‘조건이 형성되면 생겨났다가 조건이 소멸하면 함께 소멸하는 존재양식’을 말한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 즉 유정들도 연기적으로 존재하며, 연기적으로 소멸하게 돼있다. 이와 같은 변화의 틀 속에서 생명이 태어나면 그 순간 그 생명체는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내가 존귀한 것을 느끼는 순간 ‘나’ 아닌 다른 생명체의 존귀함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존귀한 생명이라 해도 무명(無明)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괴로움에 휩싸여 자신의 존귀함을 잊고 악행과 악업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때문에 불교에서 수행하고 정진하는 모든 과정이 아상(我相)을 버리는 마음을 닦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아상을 쉬고 나를 버리려면 하심(下心)해야 한다. 하심이란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며, 나를 낮추고 남을 존중하고 부처님처럼 떠받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버린다고 나의 존재감, 나의 실존성마저 버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노자(老子)는 ‘지혜’와 ‘총명’을 구분했다. 그에 의하면, ‘지혜’란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 선함과 악함, 장단점을 가늠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 이 지혜는 세상의 잣대이고 기준이 된다. 따라서 부처님답게 사는 데에는 지혜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총명은 다르다. 총명은 영리하다는 말이다. 영리함에는 자기이익이 앞선다. 영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기고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지혜를 사용한다. 이런 식으로 사는 자의 몸과 마음은 늘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지옥도ㆍ아귀도ㆍ축생도ㆍ아수라도ㆍ인간도ㆍ천상도 등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벗어났음을 뜻하는 말이다. 즉, 육도를 벗어난 열반을 뜻한다. 더불어 우리 모두 해탈하자는 말이다. 모두가 실유불성(悉有佛性)이니 해탈할 수 있는 지혜로움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이지적으로 추론된 진리가 아니라 직관으로 자증한 자명의 진리였다. 또한 붓다는 당시 인도 사람들이 존숭하고 있던 <우파니샤드>ㆍ<바가바드기타> 등 바라문 경전과 자신에 앞서 존재했던 종교 및 철학의 권위자들을 끌어와 자신의 교설을 보증하지도 않았는데, 이 또한 같은 이치 때문이었다. 즉, 붓다는 자신의 설법 내용을 증명하거나 보증하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보다 더 권위 있는 책이나 사람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 김정빈 <경>

따라서 싯다르타가 탄생게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자의식을 강조한 말이었다. 브라만을 비롯한 어느 종교나 철학에도 없는 자신만의 자명하고 자증한 법문임을 강조한 말이다.

본래불(本來佛) 입장에서 보면, 수행해서 다시 부처되려고 하는 이분법적인 어리석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본래부처인데 다시 부처 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해야 할 까닭이 없다. 본래부처에 담긴 뜻을 간추려 보면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째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천하에 제일 귀한 존재임을 뜻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온 우주 그 어디 그 무엇도 내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는 있지 않다. 내 생명은 천하의 그 무엇으로도 비교하거나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둘째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천하에 제일 주체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그 누구, 그 무엇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죽으나 사나 자기 삶은 자기 스스로 살아야 하는 매우 주체적인 존재인 것이다.

셋째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천하에 제일 완성된 존재임을 뜻한다. 즉, 생명의 존재인 나는 자유자재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단히 완성된 존재인 것이다.

넷째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천하에 제일 창조적인 존재임을 뜻한다. 자신의 행위대로 그 삶이 창조된다. 스스로 중생의 삶을 살면 중생의 삶이 되고, 부처의 삶을 살면 부처의 삶을 이루는 매우 창조적인 존재인 것이다.

다섯째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천하에 제일 고마운 존재임을 뜻한다. 연꽃은 연못에 의지해 생명을 갖고, 연못은 연꽃에 의지해 생명을 갖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의지처요, 뿌리요, 모체인 것이다.

청화스님은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아상실(自我喪失)’입니다. 자아의 본바탕에 대해서 보다 확실한 인식을 가져야 해요. 저는 자아의 본질, 즉 참 나(眞我)에 대해서 부처님처럼 확실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분이 없다고 믿고 있어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자아의 존엄성, 바꾸어 말하면 불성(佛性)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면, 그것을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 혼자만 유아독존(唯我獨尊)이고, 일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알아요. 그러나 불성(佛性)이라는 인간성의 본질, 우주의 본질까지 체험한 이들은 누구나 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즉 가장 위대한 영역에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성의 존엄성이 확립된다는 말이지요. 만약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유아독존(唯我獨尊)이고, 여느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면 인간성이 존엄하다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서 우리는 참다운 자기, 즉 진아(眞我)는 자비로운 것으로 보나, 지혜로운 것으로 보나, 공덕으로 보나 완전무결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성은 존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전통적으로 인도는 ‘카스트(caste)‘라는 4단계의 신분계급에 얽매여 있었다. 종교 지도자급인 최고 신분의 ’브라만(Brahman)‘과 그 아래로 무사ㆍ정치인계급인 ’크샤트리아(Ksatriya)‘, 또 그 아래로는 농민ㆍ상인계급에 속하는 ’바이샤(vaisya)‘, 그리고 맨 밑바닥 노예계급으로 ’수드라(vaisya)‘가 있어, 사성제도(四姓制度)라고 한다. 그 외에 찬달라(candala) 혹은 달리트(dalit)라 해서 사성제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이 있어서, 그 계급성은 대대로 유전되는 것이었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는가에 따라 귀함과 천함, 높고 낮음이 정해지며,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인간도 아닌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만 했고, 이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런 안타까운 중생을 향해 부처님이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하늘 아래 내가 가장 존귀하다‘함이라 외쳤다. 이는 곧 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듯 너 또한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세상 모든 만물은 평등하고 모두가 똑같이 귀중한 존재라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이는 모든 생명 각자가 스스로 존귀하다는 것을 깨우치는 경책이며, 질투심과 열등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전하는 격려의 말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당당함과 여유로움은 훗날 중국 당나라시대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에 의해 무위진인(無位眞人)이란 개념으로 표출됐다.

정해진 ‘자리가 없는 참사람’ ‘위치에 얽혀있지 않은 사람’이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사람, 신분과 환경에 개의치 않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자유자재한 사람을 무위진인이라 했다. 물론 내가 존재한다는 건 기쁨보다 슬픔일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하늘 위 하늘 아래나 홀로 우뚝 서 있다는 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조건이면서, 한편으로는 절대적 고독을 뜻하기도 한다.

누구도 나를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대신 죽어줄 수도 없다. 혼자서 이끌어가야 하는 인생은 필연적으로 외롭고 고되며 혼란스럽다. 누군가 나의 아픔을 위로해줄 수는 있어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잘났다고 뻐길수록 실제로는 못난 인간이기 십상이다. 독존을 꿈꿀수록 독존의 현실만 뚜렷해진다. 이웃과 마음을 나눈다지만, 몸에 소속된 마음은 응당 자기의 몸을 위해 복무하게 마련이다. 부처님은 이러한 실존적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던 사람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 살아가야 하느냐”는 아난의 탄식에,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믿어라.”고 다독였다.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하라고 하셨다.

또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 한 것은 이 세상이 온통 고통에 신음하고 있으니 마땅히 그들을 편안하게 하리라라는 뜻으로 구세대비(救世大悲), 곧 세상을 구제하려는 큰 자비심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라 하겠다. 일대사이연(一大事因緣)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이 ‘탄생게(誕生偈)’를 살펴보면 미혹의 세상을 깨달음의 세상으로, 고통의 세상을 대자유의 세상으로 전환하기 위해 불교는 존재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고, 불교의 목적이며, 부처님의 참된 의미라고 말할 수 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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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 유아독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만 부처인가요? 아닙니다. 저도 부처이고 우리 모두 부처입니다. 그래서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해야 하지요.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란 말은 ‘곳곳이 부처요, 일 일마다 부처님께 불공 드리듯이 잘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곧 부처이니 그야말로 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니까요.

초기 불교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곧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다시 태어남은 없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을 두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은 모든 사람이 부처라면, 그야말로 나도 불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아상(我相)’에 붙잡힌 ‘나’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진아(眞我)’를 가리키는 말씀이지요.

원불교 교조(敎祖) 소태산 부처님은 “남에게 존대를 받으려면 먼저 남을 존대하고 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다른 사람도 나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우받으려면 먼저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해 주어야 하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이 세상에 자신보다 더 귀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 절 부처를 내가 잘 위해야 남이 위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잘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자신을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찌 남으로부터 훌륭한 대접을 받겠습니까? 자신에게 갊아 있는 부처를 발견하여 정성 들여 불공하면, 세상에 이루지 못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 보기를 초개(草芥)같이 알면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원수같이 안다.’라고 하였습니다. 나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도 그만큼 소중한 것이지요.

여기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금산 권도갑 교무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 덕화만발 카페 <금산 마음공부 방>의 주인이시지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소중한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This is me!’ 내가 부처입니다. 이게 바로 나입니다. 노래 제목이 ‘This is me!’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의 OST 곡입니다. 어둠에 익숙해진 서커스 단원들이 ‘광대’라는 멸시와 편견을 뛰어넘어, 용감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노래가 바로 “This is me! 이게 나야!”입니다.

남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 이상 숨지 않고, 나 자신을 멋진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부끄러움과 상처도 모두 씻어버리고, 나 자신이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을 허물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나 자신을 믿고,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가자는 노래입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을 살다 보면, 눈물이 날 때가 있고, 고갤 떨굴 때가 있습니다. 힘에 겨워 지칠 때,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이 눈물과 아픔도 다 이겨내고 보면, 내가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멋진 부처 아닌가요? 조금은 늦더라도, 중간에 크고 작은 어려움이 나를 가로막더라도 내가 부처라는 확신만 있다면, 우리는 당당히 부처님의 세계에서 살 수 있습니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맹구우목(盲龜遇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께서 ‘베살리’의 원숭이 연못 옆 중각강당에 있을 때에 ‘아난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난다야,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 한 마리가 살고 있다.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았는데, 그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쉰다.

그러나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그냥 물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때 눈먼 거북이가 과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다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래도 눈먼 거북이는 넓은 바다를 떠다니다 보면 서로 어긋나더라도 혹시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중생이 ‘육도윤회(六道輪回)의 과정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저 거북이가 나무판자를 만나기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저 중생들은 선(善)을 행하지 않고 서로서로 죽이거나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헤쳐서 한량없는 악업을 짓기 때문이니라.”

정말 그렇지 않은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렵게 인간으로 태어나 역겁난우(歷劫難遇) 덕화만발을 만난 우리입니다. 맑고 밝고 훈훈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부처가 되는 것이니까요!

단기 4355년, 불기 2566년, 서기 2022년, 원기 107년 6월 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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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에서 무아 (無我)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석가모니의 탄생 설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걸었다는 것도 기이하지만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쳤다는 것도 기이하기만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든 후세에 첨가된 것이든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의미입니다. 불가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비견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만이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선포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럴듯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친 석가모니가 29세에 출가하여 6년간의 고행과 명상 끝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대각(大覺), 정각(正覺)을 얻습니다. 성불(成佛)한 석가모니는 이때부터 무아(無我)를 설하기 시작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천상천하유아독존,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무아를 외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천상천하유아독존과 무아가 서로 대비되는 개념으로 읽혀집니다.

무아(無我)는 멸아(滅我)의 과정을 거쳐 아상(我相)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상태는 어떨까요? 이 세상에 오직 나만 존귀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며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나라고 하는 아상이 극에 달한 상태가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상태인 것입니다.

세상은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부추깁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자기 인생의 왕이 되어 살고 있고 또 그렇게 되고자 합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된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의 모습 아닐까요?

‘아니요. 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잘 받아들입니다. 나는 겸손하며 천상천하유아독존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라며 반박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분 역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상태에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 사람의 생각이 옳다는 스스로의 판단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결국 옳고 그름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 주체는 바로 자신인 것입니다.

무아의 경지는 어떻습니까? 내가 없는 상태입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내 생각, 가치관, 주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진리를 발견하였고 진리 앞에서 자신의 모든 생각, 가치관을 날려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은 이 땅에 태어난 석가모니가 인간 존재의 실상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들은 모두 스스로 선악을 판단합니다. 자기 판단과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부인(自己 否認)을 설합니다. 자기 부인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앞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출애굽 2세대에게 간곡하게 명령합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 (所見) 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12장 8절입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광야에서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상태에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무아의 상태에 살고 계십니까? 강정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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