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의 정체성 | [믿음더하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15641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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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체성(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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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이형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 국민일보

사도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는데 있어서 정체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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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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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왈드 챔버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 YES24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우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고 또한 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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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3/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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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정체성 (갈 2:20) 90호 – 기독타임즈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절대 믿음과 전적 신뢰를 의미한다. 이 믿음이 세상 사람들과 우리를 뚜렷이 구분하는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정체성이다. 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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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times.co.kr

Date Published: 1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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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목사 설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 크리스천투데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의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제목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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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2/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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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다움인가?) – 두란노몰

정체성은 굉장히 중요한 자기인식이다. 책 속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하나님의 최선책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차선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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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ll.duranno.com

Date Published: 2/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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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체성 회복의 중요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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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njoy.or.kr

Date Published: 8/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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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정체성 1. – 목회칼럼 | 참빛중앙교회

주된 관심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 그리스도와 마음이 일치된 사람, 전인격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 자아 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하는 사람, 저항할 수 없는 제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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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uelightcentral.co.kr

Date Published: 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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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살전5:17) – 썹목사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정체성은 특정한 행위와 직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그에 적합한 행위들을 할 때 부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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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ub2.tistory.com

Date Published: 1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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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교회를 말한다 ①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한다

온 몸으로 진리를 살아내는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까값싼 영광과 번영을 예수 덕분에 이루려고 하는 생각은 얼마나 쓰레기 같은가​ 오대산 거목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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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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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더하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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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그리스도인 의 정체성

  • Author: 믿음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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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2.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eqJvxPUilc

[시온의 소리-이형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수년 전 일간지에 연재됐던 유명 만화가의 만화 일부다.

꼬마 감자가 엄마 감자에게 “엄마, 나 감자 맞아?”라고 물었다. 엄마 감자는 “당근이지!”라고 답했다. 그 길로 꼬마 감자는 가출했다. 엄마 감자가 자기보고 ‘당근’이라고 말하자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기 때문이다. 가출을 했다가 돌아온 꼬마 감자가 할머니 감자에게 다시 물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 경상도 출신의 할머니 감자는 “오이야(오냐)”라고 대답했다. 그 길로 꼬마 감자는 또 다시 집을 나가고….

우리를 웃게 만드는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만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목적과 사명을 지닌 존재인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책임과 권리를 지닌 존재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과 삶의 보람을 잃어버린 채 공동체에 꼭 필요한 존재로서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끼치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으로 택하셨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중략)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뒤에는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며 백성들이 품고 있어야 할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심어주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년 동안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우상을 숭배하며 갖은 죄악에 빠져 살다가 바벨론에서 수십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 다시 그들의 마음에 정체성을 심어주셨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중략)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사 43장)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장)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시시때때로 일깨워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선포하셨다(요 1:12, 3:16, 11:25).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도 말씀하셨다(마 5:13∼14).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간주되었다고 일깨워줬다(갈 2:16). 그리고 이 땅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명자라는 사실을 선포했다(행 1:8). 아울러 우리로 하여금 신앙적, 윤리적, 사회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도전하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점도 깨우쳐줬다(고전 3:16).

사도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는데 있어서 정체성을 강조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요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이웃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과 사도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정체성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로서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거룩함을 드러내자.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자랑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자.

이형원 교수 (침례신학대 신대원장)

오스왈드 챔버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십 대 때 찰스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오스왈드 챔버스는 에든버러(Edinburgh) 대학교에서 예술과 고고학을 공부했지만, 부르심을 받고 더눈(Dunoo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 영국, 일본 등지를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다. 1910년에 거트루드 홉스(Gertrude Hobbs)와 결혼해서 캐스린이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1911년 런…

십 대 때 찰스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오스왈드 챔버스는 에든버러(Edinburgh) 대학교에서 예술과 고고학을 공부했지만, 부르심을 받고 더눈(Dunoon)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미국, 영국, 일본 등지를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다. 1910년에 거트루드 홉스(Gertrude Hobbs)와 결혼해서 캐스린이라는 딸 하나를 두었다. 1911년 런던의 클래펌(Clapham)에 성경대학(The Bible College)을 세우고 그곳에서 강의를 했다. 1915년 10월에 그는 YMCA 소속 목사로 이집트의 자이툰(카이로 근처)으로 가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호주와 뉴질랜드 군대를 위해 목회 사역을 하다가, 맹장이 파열되어 수술을 받은 후에 1917년 11월 15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4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가 기독교 역사에 남긴 흔적은 실로 놀랍다. 특히 「주님은 나의 최고봉」은 출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으면서 기독교의 고전 중의 고전이 되었다. 미국 기독교 역사상 60년 최장기 베스트셀러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얼마 전 미국의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향후 100년 후에도 책꽂이에 꽂혀 있을 책 3권 중에 첫 번째를 차지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며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게 될 모든 삶 가운데 살아 계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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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누구를 위한 삶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선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올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게 될 때에 어떠한 유익들이 생기게 될까요? 즉 정체성을 알게 될 때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1) 정체성을 알게 되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한마디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 목사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목적’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든지 궁극적으로는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역도 선수인 장미란 씨는 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즉 그분은 역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역기를 들 때에 하나님의 영광도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수인 지누션 중에 션과 탤런트 정혜영 씨 부부는 소외된 이웃과 구제 사역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 또는 달란트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정체성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요 달란트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과연 하나님께 받은 나의 은사 혹은 달란트는 무엇인가?”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상 가운데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되면 우리들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정체성을 알게 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알게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삶의 비전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나만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고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그와 같은 사람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범죄의 현장 가운데 빠지게 되는 걸까요? 바로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관점으로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사람을 두들겨 패거나, 쉽게 이성과 물질에 유혹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격언 가운데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기차의 사명은 누가 뭐라 해도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투에 앞서서 그의 형 엘리압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골리앗과의 대결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그의 형 엘리압은 다윗을 향해 비아냥거렸습니다. 즉 ‘너 같은 녀석은 집에 가서 아빠의 양이나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기분 나쁜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소리에 집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사명은 골리앗을 때려 눕히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사명이, 곧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3) 정체성을 알게 되면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안다면 그와 같은 사람은 복잡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왜 사업을 하다가도 업종을 계속적으로 바꾸는 것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경제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 등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사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직업적인 부르심의 사명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사람은 인생을 복잡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분명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은 인생을 단순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의 삶이 복잡하고 여러 가지로 꼬여 있다면, 그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정체성을 알게 되면 시간, 물질, 몸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했다면 우리들은 시간, 물질, 몸을 아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와 같은 삶의 이유와 목적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5) 정체성을 알게 되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을 취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나라(국가)와 사회는 발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창조성과 변혁과 활동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확장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관, 기독교의 노동관은 언제나 창조성과 변혁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적으로 건강한 기독교는 내세만을 강조하지 아니하고 현재 여기에서의 삶 역시도 중요하게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1. – 목회칼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위기는 믿는 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구체적인 삶속에서는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단절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정체성의 위기가 생가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 점점 형식적으로 바뀌어지면서 신앙적인 의무를 지키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의 형식화는 영적 침체 혹은 영적 물러남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로써의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함으로 인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안다면 우리의 행위는 즉시,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이런 속에서 급격하게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하신 일을 깨닫고 즉각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지 못하는 속에서 변화의 분수령이 없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삽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교회생활을 해도 신자로써의 변화를 경험함이 없는 신자들은 여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고도 거듭나지 못한 체-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곧 율법과 은혜를 뒤섞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을 보시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4)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이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언약인 율법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세울 것이란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새 언약이 세워진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성만찬을 통해 새 언약이 주님의 피로 세우신 것을 봅니다.

고대로부터 히브리인들은 언약을 맺을 때, 생물을 반으로 쪼개서 피를 흐리고, 그 사이를 걸어가면서 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창 15:9-21)

피의 언약을 맺으면, 두 사람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하나 됨을 지키며 생명과 사랑과 보호를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도 언약의 일종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제자들과 새 언약을 세우실 때,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까요? 요한복음 6장 56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곧, 주님과 믿는 자들이 하나로 연합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피의 언약을 통하여 우리와 연합하셨고,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이 피의 언약을 맺지 않고서 죽으셨다면 우리에겐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효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마지막 고별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과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모든 믿는 자를 포함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을 보시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믿는 우리도 그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으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 우리도 또한 함께 부활한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난 자가 되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과거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미 장사 지낸바 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누구입니까? 새 생명으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 이것이 곧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을 보시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또한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하십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음 새 피조물이 바로 ‘나’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로 이 고백이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해 줍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고, 그래서 지금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이전의 옛 사람과는 상관없는 새 생명, 새 본성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 안에 심겨진 새 생명으로 기능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우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고 또한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다. 나아가 전인격인 믿음을 갖고 기쁨으로 살아가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을 통해 언제나 있는 곳에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길어내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믿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 이후의 제자로서의 삶은 어떤 것인가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그에 따른 답변과 나아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거듭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위로부터의 거듭남’을 경험해야 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즉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아홉 가지로 요약 했습니다.

주된 관심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 그리스도와 마음이 일치된 사람, 전인격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 자아 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하는 사람,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에 빠진 사람 등이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께 있다. 셋째 ,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자아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한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이 아닌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은 전인격적인 믿음을 소유한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은 기쁨으로 위대한 삶을 살아간다. 여덟째, 그리스도인은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에 빠진다. 아홉째,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길러낸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고 확인 할 수 있을 까요?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셔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들을 믿으면서 종교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아무 질문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고통으로 사기 전까지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믿었던 것들이라도 아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가치 있는 것은 언제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의 경험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씩 다시 우리의 것으로 얻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믿으라’는 것은 지적인 활동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활동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뜻은 ‘맡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맡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삶의 위기를 지났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인격체’께 드립니다. 위기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너무나 얄팍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믿으려고 하지 주님께 맡기려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힘과 열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이를 ‘위로부터의 거듭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에 대한 최종 시험은 현실 속에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시의 사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과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 성경을 접할 때까지 성경은 아직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곧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기까지 성경은 내게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이해하는 비결은 자신의 지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로 인한 변화가 있어야 지적인 이론이 정립될 수 있습니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최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최종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메시지가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성경에 대한 다른 열쇠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처음에 성경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과 마음을 통해 알게 됩니다.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사셨고 주께서 열어주시는 문으로 들어오는 자들마다 주님이 사셨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기꺼이 간구하면 당장 그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그러면 그는 현실적인 경험 속에서 자신의 커다란 변화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여전히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믿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체험해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아나 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 의해 변화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좌우되게 하셨습니다.“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사도 베드로는 ‘설명하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말하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역사를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뇌는 믿음이 아닙니다. 쉽게 속는 것도 믿음이 아니며, 숙명론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식과 모순되지 않으며 지식으로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기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살전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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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살전 5:17)

2017.12.8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이라고 한다. 나이가 많든 적든 학습 기관 소속되어서 무엇인가를 배우면 모두 ‘학생’이라고 불린다. 대학교에는 ‘만학도’라고 해서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신 분이 있다. 적게는 30대 부터 많게는 5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학교에 들어온 이상 학생이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을 ‘구직자’ 혹은 ‘취준생’이라고 한다. 나이가 많든, 적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든, 일자리를 찾는 모든 사람은 다 구직자이다. 만약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없으면서도 일자리를 찾지 않는다면 그건 ‘백수’이다.

무엇이 학생이냐 아니냐를 결정 짓는가? 무엇으로 구직자와 백수를 구분하는가? 하는 일에 달려 있다. 어떤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구분된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말하는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무슨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교에 다니면 학생, 직장에 다니면 직장인, 사업을 운영하면 사장님, 하루종일 집에 붙어 있으면 집순이, 한 가지에 꽂혀서 그것만 파면 덕후라고 한다. 이처럼 정체성은 그 사람이 하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읽기, 기도하기, 전도하기 등,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요구하는 특정한 행위를 할 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을 이번 시리즈 주제에 맞춰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징표이다”

공부 하지 않는 사람을 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다. 물론 학교에 다니까 학생은 학생이다. 하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학생답다’는 소리는 듣기 힘들다. 기도 생활도 똑같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없다.

물론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고백하고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한다면 ‘기독교인’이라고 불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답다’는 말은 듣기 힘들다. 왜냐하면 기도와 그리스도인다움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도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기도를 가장 간단명료하게 정의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뜻을 구하냐면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이다. 감히 우리가 하나님께 말을 걸 수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기도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전화와 같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을 가장 단순하게 정의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비록 아직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닮지는 못했지만, 매일 매일 조금씩 조금씩 그를 닮아가려고 애쓰는(이것을 ‘성화’라고 한다)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결단력이나 의지, 각오나 전략 같은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완전히 분야가 다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닮는 것은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는 영적인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영적인 도움을 주시는 분이 있다. 그게 누구냐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도록 변화 시키신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닮은 모습, 즉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그 아무도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없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그리스도인다울 수도 없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게 바로 기도이다. 기도 할 때 성령님께서 찾아오시고,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

(눅 11:9-10)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13)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자. 정체성은 특정한 행위와 직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은 그에 적합한 행위들을 할 때 부여 된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최종적인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는 방법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다. 기도하기를 멈추는 것은 예수 닮기는 멈추는 것과 같고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이길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뒤집어 말하면 불신자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불신자는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마음도 의지도 열정도 없다. 그래서 불신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불신자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더 뒤집으면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와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불신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실존적 무신론자’라고 한다. 그의 신앙이 실존에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더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기도생활은 따로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곧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도는 곧 그리스도인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기도의 조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하나님께 구하고 또 구했다. 모세 역시 수없이 많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틈만 나면 기도했다. 사무엘, 다윗, 수 많은 선지자들, 사도들 역시 기도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 다 제쳐놓고 예수님만 봐도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새벽에 일찍 이러나 기도하셨다. 새벽예배를 드리신 것이다.

(막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께서는 잠시 일을 멈추시고 따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셔서 기도하셨다.

(눅 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기도 하셨다. 진정한 철야예배를 드리신 것이다.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어찌나 뜨겁게 기도하셨던지 온 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기도를 가르쳐 주셨고, 또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기도 하셨다. 기도팀을 꾸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눅 9:28)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이렇게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말씀을 맺겠다.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기도 없이는 그리스인 답게 살 수 없다. 아니, 사실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이미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이 세상에서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예수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그것도 힘써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 지금 보다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신앙생활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마땅히 해야만 하는 가장 그리스도인 다운 일 중에 하나다. 기도하라. 기도의 사람이 되라. 기도함으로 그리스도인다움을 지켜 나가는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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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교회를 말한다 ①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말한다 – 존재의 울림

온 몸으로 진리를 살아내는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까

값싼 영광과 번영을 예수 덕분에 이루려고 하는 생각은 얼마나 쓰레기 같은가​

▲ 김남준 목사

(열린교회)

오대산 거목들의 숲을 걸었다. 평균 수령이 오백 년을 넘긴 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산을 지켜온 나무들도 수다히 있으리라. 보이지 않는 땅 속 깊은 곳에서 그 뿌리들은 서로 얽혀 큰 산을 움켜쥐고 있었다. 세찬 비바람과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충만한 생명으로 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거목들의 숲을 홀로 거닐다 통곡하였다. 분재와 같은 그리스도인과 민둥산 같은 조국교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아아, 어쩌다가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며 거룩하면서 속되며,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그분이 자녀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옛 성품과 새 성품의 갈등을 보여주지만 시원하지는 않다. 칼빈(J. Calvin)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예수와 함께 한 형제, 상속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대답도 너무 주관적이고 내재적이다. 통합적이고 현실적이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최소한 다음 네 가지 사실을 포함하여야 한다고 본다. 첫째로, 영적인 측면에서 그는 거듭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사람이다. 둘째로,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는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사상적 관점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지성에 벼락을 맞은 사람이다. 셋째로, 성향적인 측면에서 그는 자기사랑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변화된 성향을 마음에 부여받은 사람이다. 비록 잔존하는 죄성과 여전히 갈등하지만 말이다. 넷째로, 생활적인 측면이다. 그는 믿음과 순종으로 언약 생활에 죽도록 헌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종말론적 소망 안에서 세상에서의 노동과 문화변혁에 헌신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무시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한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나쁜 인상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러나 그 고민 끝에 나온 교회의 노력들은 비리로 얼룩진 기업이 경영의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대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대대적으로 이미지 개선 작업에 들어간다. 물의를 일으킨 관련자들을 징계하고, 임원진을 새로 교체한다. 문제가 된 사업은 접거나 축소하고, 광범위한 설문 조사를 실시한다. 또한 자신들이 사회에 선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직원들을 달동네로 보내서 연탄배달을 하게 하거나 무료 급식소를 차리게 한다. 그러고 나서 자신들의 이러한 변화를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알린다.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나는 세상의 비난을 참착해서 자신을 개선하려는 교회의 노력들에 대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를 성경에 물어야 한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존재의 울림이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택하신 족속”이라고 부른다(벧전 2:9).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자. 물론 그 시대가 모든 것에 있어서 완벽한 표준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 위대한 각성이 일어날 때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표준으로 회자되었다. 13세기 가톨릭의 개혁운동의 시대가 그러했고, 16세기 종교개혁의 때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기독교가 보편화 되어 있던 종교개혁 시대보다는 이방문화에 에워싸였던 초대교회 시대와 흡사하지 않는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은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던 시기에 교회를 보살폈던 인물로, 소위 속사도 교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폴리캅의 순교>라는 책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평가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족속들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방인들에게>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스트로마타>라는 글에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을 ‘제3의 족속’이라고 불렀다(6.5.41).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나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족속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영웅전>으로 잘 알려진 고대 로마의 그리스 작가인 플루타르코스는 78편의 수필로 이루어진 <도덕론>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위험한 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해 로마 법정에 피고로 서기도 하였는데, 그들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로마의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고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이 외에도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가운데 “멜리토”라는 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사람들이 당시 그리스도인에게서 받은 독특한 인상이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얼마나 다른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에게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현대교회의 선각자인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가 당시 미국교회의 복음주의에 대해 외친 것은 오늘날 조국교회에서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이름만 복음주의일 뿐, 맛 잃은 소금이며 빛 잃은 등불이다.”

최근에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 어느 고등학생이 형에게 놀러갔다가 근처에 있는 절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 학생은 절을 구경하다가 마당에 나와 있던 한 젊은 스님에게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신가요? 왜 이렇게 이상한 옷을 입고 있습니까?” 스님은 아이를 방 안에 불러 말을 이었다. “인생은 무상한 것이다”라는 주제로, 한동안 문답이 이어졌다. 스님과의 짧은 만남을 마친 학생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부모님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출가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대대로 유교를 신봉하던 부모님은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였다. 그때 일본에 유학을 통해 불교에 다소 식견이 있던 형이 부모를 설득하여 결국 그 고등학생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70세가 넘어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그때의 경험을 책에 담았는데, 그 책에서 그는 어린 학생이었던 자신에게 선문답을 건네던 그 사람이 바로 고(故) 성철 스님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글을 읽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풍경이나 감상하러 절을 찾은 어린 학생의 마음을 움직여 인생에 대한 결단을 내리게 하였을까? 한 시간 남짓한 대화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거의 60년 동안 후회 없이 한 길을 걷게 한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홀로 고민하던 내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 있었다. “존재의 울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히 존재의 울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비기독교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이 던져주는 울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는 <보편교회 교인의 생활방식과 마니교인의 생활방식>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변화된 삶의 방식 뒤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행 20:21).

온 몸으로 진리를 살아내는가?

고통받는 세상의 모순적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윤리적 책임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I. Kant)에 의해 제시된 명제 곧 “하나님은 실천 이성이다”를 맹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문화의 변혁을 위해 부름받았음을 믿지만,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이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악과 분투하고 죄의 질병적 징후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찮게 여기는 현실 도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초월적으로 완성되기까지, 분투하는 전투적 교회의 몸부림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현존의 영광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윤리적인 사회, 그것을 넘어서 이 이상을 따라 살도록 부름받은 족속들이다.

조선시대 선비가 된다는 것은 대의(大義)를 위해 결기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곧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따라 살고 죽을 수 있는 사상에 대한 신념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선비의 학문 탐구가 칼을 옆에 둔 자세로 이루어진 것은 삶 전체를 동반한 진리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사람이 학문을 탐구함에 있어서 4체(四體)를 주장하였다. 곧 온 몸으로 사물을 인식하고(體認), 온 몸으로 관찰하며(體察), 온 몸으로 체득하고(體驗), 온 삶으로의 실천(體行)이 그것이다. 자연계시의 희미한 빛으로도 진리는 온 몸으로 추구하여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오늘날 예수 없이 살던 때의 세속적 영광과 번영을 예수 덕분에 이루어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얼마나 쓰레기 같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따른 삶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사상적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죄를 책망하고 죄인을 회개하게 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무지몽매함을 신앙의 이름으로 가장하여 지성을 무시하는 교회의 풍조를 갈아엎지 않는다면, 교회는 거친 세상의 파도 앞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조국교회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신앙의 피상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현존이 존재의 울림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가 염려하고 있는 교회의 도덕적인 위기 상태를 극복하는 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조국교회에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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