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6편 강해 | [하루 한 장] 시편6편_여호와여 돌아와 나를 1156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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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30 [하루 한 장]“여호와여 돌아와 나를” (시6편)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http://sungminch.com
시편 6편은 다윗의 심정을 담은
참회시이자 탄원시입니다
특히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이 노래는 가장 낮은 음으로
남성들의 합창으로 불립니다
겉으로는 당당하고 위엄있으나
그 속에는 수많은 부담감과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남성들의 마음을 노래하는
이 시편에서 다윗은 홀로
괴로워하는 죄와 연약함의
문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모세의 기도를 인용해서
여호와여 돌아와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기에
다윗은 이 기도가 분명히 주께
응답되었음을 확신합니다
이처럼 말씀대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생활에 중요합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했기에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신 말씀대로 기도하면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올해도 [하루 한 장]을 통해
말씀을 붙잡고 진실한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구했던
모든 기도가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지혜 가운데
모두 응답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하나님은
주의 말씀 의지하여 기도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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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월) “시편 6:1-10” / 작성: 정인철

시편 6편을 살펴봄에 있어 먼저 표제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시편 6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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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6편 강해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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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2.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pRYI1pPSySw

2018/04/30(월) “시편 6:1-10” / 작성: 정인철

본문 시편 6편 1-10절

찬송가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시편 6편을 살펴봄에 있어 먼저 표제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시편 6편의 표제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입니다. 여덟째 줄에 맞추었다는 것은 낮은 음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였음을 의미합니다. 낮은 음의 노래는 탄원을 담은 노래에 어울립니다. 결국 이 표제는 다윗의 시이며, 찬양대 인도자의 지휘를 받는 시로, 강력한 탄원을 이 시에 담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표제에서 시편 6편이 탄원이라고 말하지만, 초대교회시대로부터 이 시는 다른 6개의 시(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와 더불어 참회시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을 따라, 현대의 많은 학자들도 참회시로 구분합니다. 그것은 이 시의 기자인 다윗이 자신의 힘든 상황에 대한 탄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탄원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깨닫고 참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참회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이 시에는 참회의 관점이 녹아져 있고, 그래서 이 시는 참회시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탄식

오늘 말씀에서 다윗은 절망적인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말합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는 먼저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슨 사정 때문인지, 어떤 병인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다윗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곤경으로 인해 육체가 쇠약해졌습니다. 먼저 그는 육신에 대하여 수척(瘦瘠)해졌다고 말합니다. 수와 척, 두 글자 모두 여위다 혹은 마르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별히 척은 병상에 드러누운 모양을 보여주는 병질엄(疒)과 등마루 척(脊)자가 합하여 뼈와 관련된 어떤 고통으로 인해 병상에 누워있는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뼈 속의 진액까지도 모두 말라가는 너무나도 힘든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수척함은 단순히 핼쑥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말라감을 포함해, 살아갈 힘과 희망마저 모두 잃은 절망적인 상태를 말할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기자는 수척해짐과 함께 뼈가 떨린다고 말합니다. 뼈가 떨리는 정도의 고통이 얼마인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경험해 본적이 거의 없는 정도의 고통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절박한 상황은 이러한 육신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이 더 있습니다. 3절입니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뼈를 넘어, 이제 영혼도 떨린다고 말합니다. 은유적으로 사용된 영혼이 떨린다는 표현은 영혼의 괴로움에 대한 것입니다. 육신의 고통이 이제 마음과 영혼까지 무너져 내리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이 너무도 극심해서 이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져,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단절될까 두려워하고 있음을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표현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야 했는가에 대해서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1절에서 주의 분노와 주의 진노가 그를 책망하고 징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유추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딱 어떤 죄에 대한 것이라 말하기는 너무 조심스럽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던 죄의 특징정도를 생각해본다면, 자기의 욕심에 기인한 죄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은 본인이 왜 이러한 고통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에 자신이 있어야 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다른 한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지하여 호소합니다. 4절입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기인하여 자신을 건져달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은 히브리어로는 헤세드, 긍휼을 의미하기도 하고, 언약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언약, 계약은 관계가 틀어졌다고 해서 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은 하나님이 다윗을 미워한다한들 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의 계약에 의거, 자비의 언약에 의거해서 내게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져 구원하소서라고 절실히 요청한 것입니다. 그의 간청의 이유는 죽은 후에는 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스올에서는 주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5절에서 말합니다. 즉, 죽으면 돌릴 수 없기에, 살아 있는 지금 구원해달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 고통으로 인하여, 참 많이도 울었습니다. 울다 지쳐 쓰러지고, 그렇게 쓰러져 누운 잠자리는 멈추지 않는 눈물로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울다 울다 결국 눈까지 잘 안보여 어두워졌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고통이 참으로 심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원과 승리에 대한 확신

고통의 벽 앞에 눈물밖에 흘릴 수 없었던 다윗이 8절부터는 반전의 고백을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곤고한 상태에 있었던 시인의 탄원이 확신의 어조를 통해 분위기를 바꿉니다. 지금껏 울다보니 다윗은 눈이 잘 안보였고, 이제는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려움과 낙담은 새로운 확신과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이유에 대해 9절을 통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고 내 기도를 받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확신이 있는 다윗은 이제 이런 승리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10절입니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의 완전한 확신은 선지자를 통해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주 가능성이 없는 해석은 아니지만, 성경은 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입증할만한 증거를 내어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환경이 당장 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혹시 지금이 아니라면, 죽음 이후에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다윗은 자신의 욕심에서 출발된 죄로 인하여, 주의 분노와 진노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육신과 영혼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의 탄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 그리고 언약적 사랑에 기인하여 참회합니다. 그리고 그 참회의 끝은 구원의 확신으로 승화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러합니다. 우리도 욕심을 가까이 하면 할수록 주변의 사람과 상황, 그 뿐 아니라 하나님마저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욕심을 넘어서지 못해 죄로 이어지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나 욕심으로부터 우리가 한발자국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주변의 사람과 상황이 더 잘 보이게 되고, 무엇보다 그 욕심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산다는 것은 별세를 묵상하며, 자신의 욕심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의와 절제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사람으로, 섬기고 나누는 역설의 진리를 입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종국에는 물거품처럼 사라질 욕망을 따라 황제의 도시를 좇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 있는 우리의 자리가 다윗이 말하는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자리라 할지라도, 참회하고 기도함으로 고난을 구원의 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믿음을 갖는다면, 종래에는 나를 괴롭혔던 모든 원수들이 우리 각자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면서 물러가는 역사를 모두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고난의 자리 앞에서 탄원을 넘어 참회함으로 확신을 갖는 믿음, 곧 참회하고 기도함으로 고난을 도리어 구원의 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원수를 꺽으심으로 우리의 앞에서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면서 물러가는 역사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믿음 갖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의 삶 속에서 욕심을 버리고, 의와 절제의 삶을 살아가며,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겨진 사람으로, 이땅에 섬기고 나누는 역설의 진리를 입증하는 한 날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러한 하루의 색종이들이 모여, 하나님이 그려가시는 아름다운 모자이크판 인생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참회라는 관점에서 본문은 천천히 다시 묵상해 봅시다.

2. 우리 삶 속에 기도조차 나오지 않아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던 고난의 자리, 눈물의 자리가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그러한 극심한 고난 중에 하나님마저 보지 못하는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실지 묵상해 봅시다.

4. 기자의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과 같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갈 나만의 확신에 찬 믿음의 고백을 묵상해 봅시다.

5. 지금 주변에 고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누군가가 있는지, 역설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정인철)

paul lee

스펄젼의 시편 6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는 맨 처음 나오는 “참회의 시”로 알려져 있다. (다른 여섯 편의 참회의 시는 32, 38, 51, 102, 130, 143편이 있다.) 이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참회하는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여기에는 슬픔(3, 6, 7절)과 부끄러움(2, 4절), 그리고 죄에 대한 미움(8절)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설 때 분명하게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오, 성령님이여! 우리 안에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을 주소서.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이다. 스미닛은 제8음으로서 한 옥타브를 말하는 듯하다(참고. 대상 15: 21).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베이스나 테너를 지칭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시의 탄식하는 어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고대의 음악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도 “셀라”의 의미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도 이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학자들도 시편에서 아직도 많은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시편들이 고대에 쓰였다는 것을 증거하며, 다윗 왕이 이 시를 기록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구성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1-7절심한 어려움 중에 시편 기자가 간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8-10절첫째 부분과는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어조를 바꾸어 단음을 버리고 장엄한 곡을 취한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선언한다.

[강 해]

1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첫번째 부분을 읽어 보았다. 이제 한 절, 한 절씩 살펴보도록 하자.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시편 기자는 그가 당연히 견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견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곡식을 추수할 때 바람을 일으켜 깨끗한 알곡을 모으지만, 영혼은 견책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다.” 우리를 징계하여 영혼을 부요케 하는 그 존귀한 손을 떠나가도록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이 견책을 그만두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견책은 축복이 위장을 하고 오는 것인데, 이것을 놓칠 수는 없다. 그는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라고 기도했다. 주여, 주께서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처럼 나를 대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이 낙담하여 절망할까 하나이다.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렘 10:24). 내가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나이다. 내가 징계의 회초리 앞에서 몸을 움츠리지만, 이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나이다. 그러나 오, 내 하나님이여,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당신의 회초리가 변하여 칼이 되며, 당신이 나를 칠 때에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징계를 온전히 거두어 들이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노 가운데서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사랑 가운데서 징계하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2, 3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당연히 멸망당해야 하오나, 당신의 자비로 내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선함, 우리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말고, 우리가 보잘것없다는 것을 말하며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라:”여호와여, 나는 연약하나이다. 나를 부수지 마시고 내게 힘을 주소서. 나는 연약한 그릇이오니, 내게 진노하지 마소서. 나는 시들어가는 가련한 꽃과도 같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자비롭게 대하시고, 나를 꺾지 마소서. 나는 연약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교만한 마음이 꺾였다. 그래서 자신이 율법을 지킬 힘이 없고 연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슬픔으로 인해서 연약해졌고, 약속을 부여잡기에도 너무 연약해져 있다:”나는 수척하였사오니.” 원문은 이런 의미이다:”나는 고개를 숙인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뿌리 뽑힌 나무가 시들어 가는 것과 같다. 아!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영광에는 흠이 갔고, 우리의 아름다움은 시들어 가는 꽃과도 같았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고통을 받던 병에서 잠시 동안 진정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고 병의 근원을 고쳐 달라는 기도이다. 뼈가 ‘떨린다’는 말은 히브리 표현을 따르자면 뼈가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는 이처럼 공포에 휩싸여 그의 뼈조차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의 골격을 유지해 주는 뼈가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내 뼈가 떨리나이다.” 아! 우리의 영혼이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아래에는 지옥의 불꽃이 타오르고, 위에는 진노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주위에는 위험과 의심이 둘러싸고 있다면, 머리털이 서고 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 뼈가 떨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 외부로 나타난 표이기도 하다. 시편 기자는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영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내 영혼이 평안하고, 단지 뼈만 떨리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고통을 당한다면, 이는 정말 깊은 고통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다윗은 이 말을 짤막하게 외쳤다. 말로 그의 심정을 다 표현할 수 없고, 슬픔이 그에게서 모든 위로를 다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소망을 품고 있다. 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래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친 것이다. 회개하는 영혼이 가장 바라는 바는 은혜로운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소망이다.

칼빈은 종종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쳤다. 그가 괴로운 삶을 사는 동안 겪었던 그 고통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천년 왕국의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외칠 말이다:”오, 여호와여! 그분이 타시는 말은 왜 이렇게 오지 않나이까?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자들이 아직 용서함을 받기 전에는 일 분이 한 시간 같고, 한 시간이 일 년 같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은혜의 해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영혼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외친다:”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으므로 고난과 비극이 생겼다. 이제 그분께서 돌아오신다면 다윗은 고난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어떤 손을 부여잡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왼손을 붙잡지 않았다. 자비를 행하시는 그분의 오른손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많아서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이 간청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하나님은 이 간청을 결코 거절하실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의지한다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분께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이 1-4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는지 주의해서 살펴보라. 그는 다섯 번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분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변치 않으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에 나타나 있다. 그분의 이름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이제 다윗은 사망의 위험에 빠져 있다. 이 사망은 일시적인 사망을 말하고, 또한 영원한 사망을 말할 수도 있다. 5절을 읽어 보라.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무덤은, 그것이 교회에 있다 해도, 침묵의 장소이다. 무덤 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흙에 덮인 육체는 그저 침묵할 뿐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리시면 내가 찬양하리이다. 내가 죽는다면, 이 육신으로 드리는 찬양을 일시 중단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나이다. 그리고 내가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한다면, 나는 결코 당신께 감사의 노래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지옥의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어찌 감사의 노래가 울리리이까. 내가 영원한 저주를 받아도 여호와는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찬양하는 인생 중에서 한 사람이 궐이 날 것입니다.”

아! 두려움으로 떠는 성도들이 있는가? 우리 여호와께서 당신을 도우사 다윗처럼 간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죄인이 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자들은 복을 받고, 용서를 받는 자들도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6, 7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시편 기자는 그의 길고 긴 고통을 토해 낸다. 그는 탄식하다가 마침내 목이 상하기까지 했다. 그는 진력을 다하여 노동을 하듯이, 부르짖으며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탄식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할 수는 없다. 그렇다! 성도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 탄식해야만, 구원의 날에 기쁨의 소리로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밤이란 만물이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고, 내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도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면, 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흐르는 눈물이 너무 많아 내 침상으로 물 위에 뜨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실제로 일어났다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묘사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 심판을 생각하며 현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노인의 눈이 해가 바뀌면서 어두워지듯이, 그의 눈이 눈물로 충혈되고 어두워졌다고 다윗은 말한다. 죄책감은 이처럼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 고통을 받게 한다. 아일랜드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발작을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손이 다윗을 누르시니 다윗이 노쇠해지고,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낄 때에 땅에 엎드려 우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아!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 시의 표현은 억지로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처럼 슬픈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현인 것이다.

8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8절. 지금까지 시편 기자는 슬픔 가운데 울며 탄식했다. 그러나 이제는 울음을 그치고 당당히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두려워 떠는 성도들이여, 수금을 들어라

슬픔을 떨치고 노래를 불러라.

슬퍼하고 탄식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라. 그러나 슬픔의 시간은 짧게 하라. 네가 빠진 구덩이에서 일어나라. 이제 그만 일어나라. 네 베옷과 재를 떨쳐 버리라. 밤에 울었을지라도, 낮에는 기쁨이 찾아오리라.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다윗은 평안을 찾았다.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집에서 악인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악한 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그와 충분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라. 너와 아무 상관도 하고 싶지 않다.” 참회하는 자는 생활에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성전이 파멸된 것을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채찍을 들고서 마음의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쫓아내고, 돈을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어 버려야 한다. 용서받은 죄인은 구세주의 피를 흘리게 했던 죄를 미워해야 한다. 은혜와 죄는 이웃이 될 수 없다. 둘 중에서 하나는 이사를 가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인의 아름다운 사상이 들어 있다. 또한 번역에도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흐느낌에도 목소리가 있는가? 흐느낌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언어로 의미를 전달하는가? 흐느낌은 이 땅 어느 곳에서든나, 그리고 하늘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야만인이든 종이든 자유자이든, 모든 사람이 흐느껴 울 때에는 거기에 의미가 담겨 있다. 흐느낌은 슬픔을 표현하는 유창한 언어이다. 그는 유창한 변사이다. 그의 말은 어떤 통역도 필요없이 누구나 이해한다. 우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눈물이 표현해 내다니! 이는 정말 감미로운 일이 아닌가! 눈물은 액체로 만들어진 기도라고 생각하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을 때, 흐느낌은 이 모든 장애물을 치운다. 그리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직통으로 나아가 간구하는 기도를 방울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말로 간구할 수 없을 때, 내가 흐느껴 울리이다. 당신은 내 울음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성령께서는 시편 기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주셨다. 이것은 성도들이 때때로 누리는 특권이다.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다가 그의 골방에서 뛰어 나와 이렇게 소리쳤다:”우리가 이겼네! 우리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환상적인 꿈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확신을 주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는다 해도 우리는 그 실재를 알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기자는 과거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해 격려를 받는다. 이전에는 “들으셨음이여”라고 과거의 체험을 말했으나, 여기서 더 나아가 “받으시리로다”라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 논리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고 이와 같은 논리를 모방하라.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이것은 원수들을 저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보아야 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물러갈 것이다.” 그들이 사망과 죽음을 당할 것은 확실하고, 이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칠 것이다. 로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복수의 신은 그 발을 양털로 감쌌다.” 복수는 그 원수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서 갑자가 후려쳐서 넘어뜨린다. 이 구절이 저주를 말한다면, 구약 시대의 언어와 신약 시대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그들을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바른 길로 걷게 하신다.

이 시도 앞의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자와 악인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오, 여호와여!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까지 당신의 백성 중에 속하게 하소서.

[주해와 설명들]

시 6편 전체. 다윗은 질병과 원수들의 박해로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시편에서 그가 받은 고난에 대해 살펴보면, 그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아프거나 핍박을 받을 때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신이 지은 죄를 기억했다. 이 시도 그가 병들었을 때 기록했으나, 8절 이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그의 영혼이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 큰 강에 합류하면 그 특성이 변하는 것처럼, 다윗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이처럼 그 특성이 바뀌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신체적 질병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으나, 이제는 영혼의 위독한 상태와 두려움 아래서 슬픔을 표시한다. 이와 같은 시는 시 38편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리처드 길핀(Richard Gilpin, 1677).

1절.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순종하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 첫째는 말로 그들을 견책하시고, 둘째는 매로 그들을 징계하신다. 그분은 먼저 말씀으로 견책하시는데,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분의 종을 보내셔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잘못을 범한 아들을 먼저 말로 견책하듯이, 하나님도 먼저 말씀으로 책망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하나님은 선한 아버지처럼 채찍으로 그들을 징계하신다. 우리 구세주께서도 동산에서 세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말씀으로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경계를 받지 않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경계하여 깨우고자 하셨으나 실패한 것을, 이제 유다와 그의 무리들이 그들을 깨우러 왔다고 했다. -아치볼드 심슨(Archibald Symson, 1638).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그는 하나님의 견책과 징계를 모두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옳은 일이 아니다. 견책과 징계가 없다면, 이는 그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해로운 것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죄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분노이다. 다윗은 분과 진노 대신에 아버지의 온유한 견책을 바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런 견책과 징계를 기꺼이 받고자 한다. -존 칼빈(1509-1564).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여호와의 분노라고?

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폭풍과 같은 그분의 분노를 어찌 견딘단 말인가!

그분의 심판을 피해 어디로 도망을 가랴

십자가로 도망하라!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화목이 죄인을 둘러 보호하리라

태양을 가리던 검은 구름이 떠나가듯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얼굴에서 떠나리라.

-작자미상.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나를 율법을 따라 심판하지 마소서.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실 때 분노하신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호 11:9; 참조. 마 3:11).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진노하겠다고 하셨으나, 이제는 진노하지 않으며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악인을 심판하신다. 그분은 이것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실행에 옮기신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을 실행하실 때에 이 진노가 나타난다. -리처드 스톡(Richard Stock, 1641).

1절.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당신께서 내리시는 징계의 채찍을 받을 때에도

내 안에 생명과 평강을 지키게 하소서!

나를 죽이지 마시고, 내 죄를 죽이사

당신은 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내게 베푸실 영광을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알게 하소서!

마지막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외치게 하소서

“오, 주여! 오소서, 주를 신뢰하나이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2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했으나, 다윗은 하늘과 땅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를 치신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 치료를 받고자 한다. 그는 아담처럼 숲으로 피신하지 않았고, 사울처럼 영매자에게 가지 않았으며, 요나처럼 다시스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로 피했다.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피한 것이다. 분노한 필립 왕에게서 유죄 판결을 받은 여인은,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필립 왕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덕스러운 성품인 공의에서 또 다른 덕스러운 성품인 자비에 호소하는 것이다. 인간의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상고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어디로, 그리고 누구에게 상고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분의 자비로운 심판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마지막 상고의 장소이다. “내게는 하늘에서도 주밖에, 땅에서도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나이다.”······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대할 때에 그랬던 것처럼, 다윗은 자비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얻었다. “내가 자비를 얻었으니, 이제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나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는가? 자비를 구하라. 이 샘에서 다른 모든 좋은 것이 흘러나온다. -아치볼드 심슨.

2절.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다윗이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어떻게 말하는지 주의해 보라. 그는 “내가 수척하였사오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들어서 하나님을 움직이려 했다. 이것은 사람을 움직이기에는 약한 논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논리이다. 병든 자가 의사에게 와서 그가 치명적으로 아프다는 것을 호소하면, 의사는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서 당신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자가 재판관에게 가서 그가 당한 모든 일을 말하고 조언을 구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상인에게 가서 무엇인가 사기를 원한다면, 그 상인은 돈을 요구하거나 보증서를 요구할 것이다. 또한 왕이 신하들의 충성을 원하다면, 무엇인가 그들에게 보상할 것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겠는가? 우리의 가난과 눈물, 비참함과 무가치함을 고백한다면, 그분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우리가 비극적인 일을 당해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꿰뚫는 화살과도 같아서, 그분은 우리가 곤란한 환경에 처한 것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실 것이다. 걸인들은 신체적으로 연약하고 다친 부분을 노출하여 사람들에게서 동정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비극적인 상황을 주께 알리자. 그리하면 우리의 상처를 보시고, 자비를 베풀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다. -아치볼드 심슨.

2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온 것은 그의 병이 깊고, 그가 당한 사고가 컸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깊은 병에 걸리고 큰 사고를 당했기에 “나의 뼈가 떨리오니······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두번째 간구를 드린다:”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존 던.

2절. “나의 뼈가 떨리오니.”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우리의 신체에서 가장 강하고 둔감한 부분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하실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의 뼈가 떨렸다. -데이비드 딕슨.

2절. “나의 뼈가 떨리오니.” “뼈”는 시편에서 자주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조사해 보면, 세 가지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 “뼈”는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육체를 말한다:”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시 22:16, 17). (2) 이 단어는 때로 그분의 신비스런 몸, 즉 교회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것은 믿음 안에 굳게 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들, 핍박이나 시련이나 어떤 혹독한 압제로도 쓰러뜨릴 수 없는 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시 35:10). (3) 어떤 구절에서는 “뼈”가 성도의 영혼이나 속사람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그것은 바로 시편 6:2에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 갖게 되는 불굴의 용기, 영혼의 힘과 강건함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어거스틴, 암브로스, 크리소스톰(Augustine, Ambrose, Chrysostom, Parochial Lectures on the Psalms<1855>에서 던웰이 인용함).

3절. “나의 영혼.” 죄의 친구는 고통의 친구이다. 죄인의 영혼은 죄에 대한 뜻을 품는 자요, 몸은 이를 행하는 자이다. 죄의 뜻을 품는 자와 행하는 자, 원인 제공자와 도구는 모두 심판을 받는다. -존 던.

3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기에서 세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십자가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이 이르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할 시간을 정한다거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제한하려는 생각을 품지 말고 잠잠히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30년이 차기까지 애굽에서 지내야 했다. 요셉은 구원받기까지 정해진 시간, 3년 반을 감옥에서 지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70년을 지내야 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언제 금식하고, 언제 식사를 조절하며, 언제 휴식을 취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고난과 영광의 시간을 아시고 정해 주신다.

둘째,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조급해 한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영을 거스리며, 하나님과 변론하고 다투게 된다. 이것은 욥과 요나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다윗도 그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여호와께서 성도들을 구원하시는게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시는 큰 이유가 있다. 우리가 죄중에 탐닉하고 있을 때, 그분은 선지자들과 종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오, 바보들아, 이 어리석은 짓을 어느 때까지 계속하겠느냐?” 그때에 우리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한 날이 일 년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해도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평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분이 외치실 때 우리가 듣지 않았다면, 이제 우리가 부르짖어도 그분이 들으려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아치볼드 심슨.

3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라고 묻는다. 원수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신원하는 기도는 우리의 임의로 한다거나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지시적인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처럼, 신원하는 기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도이며,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기도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분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는 그분의 뜻을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촉진시키는 기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고치고자 하시는 것을 저항하지 말고,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분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도 바로 이것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분이 우리를 고치시는 것은 우리로 그분께 순복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분의 손 아래서 겸허하고,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말하자:”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미 7:9). 이때에 그분은 만족하사 죽음의 천사에게 말했듯이 심판의 천사들에게 “이제 됐으니 그만하라”고 말씀하시고, 칼을 거두시듯이 채찍을 거두실 것이다. -존 던.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다윗은 멀리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가까이 있는 것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을 포위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는 이 시의 서두에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행하지 마실 것을 기도했다:”나를 견책하지 마소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이렇게 작은 것을 부탁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한 가지 간구를 드리며, 하나님을 움직여 마침내 하나님을 이겼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응답을 받자, 이제는 더 가까이 나아가 신원하는 기도에서 요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행하지 마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무엇인가 행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하나님은 선례를 따라 행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비밀을 알았다. 하나님은 자신보다 먼저 계셨던 선임자의 선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임자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신의 선례를 따르는 것도 아니다.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선례를 따라 행하신다. 예전에 행하신 것처럼 지금도 행하시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무엇인가 받았던 자에게는 더 주신다. 그분은 자신의 것을 달라는 자를 기뻐하시고, 하나님 자신과 겨루는 자에게 지기를 기뻐하신다. 그분은 이전에 행했던 대로 행하시며, 자신의 본을 따라 그대로 행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이전보다 더 좋은 것을 주기를 기뻐하신다. 이후의 자비는 이전의 자비보다 더 크다. 그래서 다윗은 후에 드리는 요청하는 기도에서 전에 드렸던 신원하는 기도보다 더 큰 것을 간구한다:”여호와여, 돌아오소서. 내 영혼을 건지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존 던.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나와 화목하소서. 내가 여호와와 화목하기 전, 내가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에 주께서 내 생명을 취하신다면, 당신에게 이것이 무슨 영광이 되겠나이까? 주께서 나를 살리시고, 내가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여 주님의 은총을 얻는 것이 당신께 무한히 더 영광스럽지 않겠나이까? 그렇게 해 주시면, 내가 살아서 당신의 자비와 은혜를 찬양하고 높이리이다. 이처럼 큰 죄인을 사하시는 당신의 자비는 무한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고백하며 당신께 순종하리이다. 내게 이런 변화를 일으키신 당신의 은총을 내 삶을 통해 보이리이다. 주께서 나를 죽이시면 죄인을 보수하시는 당신의 공의로운 심판은 드러나지만, 주의 은총과 자비를 찬양하고 높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헨리 해먼드(Henry Hammond, D.D., 1659).

6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다윗은 담대한 사람이다. 그러한 다윗이 이처럼 낙담한 것은 정말 놀라운 변화이다. 그는 불굴의 정신과 배짱으로 골리앗을 치고, 사자와 곰을 잡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그는 흐느끼고, 탄식하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다윗의 대적이 사람들과 짐승일 때, 그는 정복자였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이 되었을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6절.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비가 이슬보다 더 낫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이슬을 내려 주시고, 참회하는 심령을 주셨다면 이것으로 족하다. 다윗처럼 눈물을 강처럼 흘려보내지 못해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눈물이 흐르는 샘이 없어도, 예레미야처럼 우리 머리를 샘으로 삼아 주야로 눈물 흘리며 울지 못해도, 베드로처럼 심하게 통곡하지 못해도, 우리가 슬퍼하지 못함을 슬퍼하며 울지 못함을 운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일 우리가 양심의 가책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이 참회가 외식이 아니라 참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신다. 도마가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십자가의 못자국을 만졌을 때 그분은 도마를 환영하셨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그리스도의 옷깃을 만졌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도마를 환영하듯 그 여인을 환영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회개의 양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회개가 참된 것인가를 보신다.

6절. “내 침상.” 그가 죄를 범했던 장소가 바로 그가 회개하는 장소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던 장소를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찔림을 받고, 거기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게 된다. 아담은 동산에서 죄를 범했고, 그리스도는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셨다. “침상에서 너 자신을 돌아보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네가 침상에 누워 악을 꾀했다면, 그곳에서 회개하고 침상을 하나님의 전으로 만들라. 죄로 더럽힌 장소마다 네 눈물로 성결케 하라. 아가서의 여인이 신랑을 찾았듯이 우리의 침상에서 그리스도를 구하자:”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아 3:1). -아치볼드 심슨.

6절. “내 요를 적시나이다.” 다윗은 눈물로 침상을 씻을 뿐 아니라 가득 적셨다. 목자장의 충성스러운 양들은 씻는 장소로 가며, 모두 쌍태를 낳으며 새끼를 낳지 못하는 양은 하나도 없다(아 4:2). 야곱의 양 떼들도 물통 곁에서 새끼를 배고서 강하고 얼룩 무늬를 한 양을 출산했다. 다윗도 길 잃은 양처럼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의 침상으로 씻는 장소를 만들고 참회의 열매를 맺었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놋으로 만들어진 큰 솥이 있었는데, 여기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씻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눈물을 모아서 물을 삼고, 그의 침상으로 솥을 만들며, 그의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삼아, 그 자신의 육체를 씻어 살아 있는 제물로 드렸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다. 히브리어로는 단순히 적시는 것이 아니라 수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제사장이 성전에서 거룩한 의식을 행하고 봉사한 다음에는 그의 몸을 깨끗게 하기 위해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이처럼, 다윗은 그의 침상에서 씻고 수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참회와 슬픔의 바다에서 눈물로 침상을 띄웠던 것이다. -토머스 플레이피어(Thomas Playfere, 1604).

6절. “내 요를 적시나이다.” 우리의 침상을 밤마다 눈물로 적시자. 가끔 한번씩 바람을 통하게 하여 요를 깨끗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 이렇게 하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죄란 이제 금방 꺼진 냄새나는 촛불과 같다. 그것은 곧 다시 불이 붙을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면 상처가 되겠지만, 개가 그 상처를 핥고 온전해지듯이 곧 회복되고 말 것이다. 죄란 조금만 용납해도 금방 그 수가 늘어나는 히드라뱀의 머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룻동안 무슨 죄를 지었든지, 밤에 흘리는 눈물로 이것을 다 씻어 버리자. -토머스 애덤즈.

6, 7절. 영혼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러 모로 상처를 받고 낙담하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 그의 육체가 성하지 못하다고 했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욥 6:4). 마음의 슬픔은 사람을 나약하게 하고, 그 행하는 것을 느리고 약하게 한다. 그리고 상처받은 몸은 일반적으로 쇠퇴하고 약해진다. 그러므로 헤만은 이렇게 말했다:”내 영이 심히 곤고하니, 내가 무덤으로 가는도다.” 사람의 내적 고민과 고통은 불 앞의 양초가 녹아 내리듯, 육체의 힘을 소진시킨다. 슬픔은 영혼을 어둡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아름다웠던 모든 추억을 잊어버리게 하고, 마음에 검은 구름을 드리워서 촛불을 약하게 만든다. 이처럼 곤고한 처지가 되면 사람은 그 안색이 창백해지고, 마치 강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처럼 파랗게 질리며 의기소침해진다. 그가 하는 행동은 느릿느릿하고, 기운찬 것도 명랑한 것도 없어지고 만다. 기쁜 마음은 양약처럼 좋으나, 상한 심령은 뼈를 마르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고백이 나온다:”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욥 16:16; 30:17, 19). 육체의 약함이 영혼의 고통을 낳기도 한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아무런 치료책도 없을 때에 우리 영혼도 생기를 잃어 가는 것이다. 다윗은 종종 병상에 누웠고, 분노하는 원수들을 대하기도 했다. 시편에서 다윗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외적인 고통이 그로 하여금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시 6:1, 2, 5, 6).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가 되었다는 엄청난 생각에 그는 슬퍼한다. 작은 시냇물도 큰 강과 합류하게 되면 그 이름과 특성이 바뀐다. 이처럼 고통을 처음 당할 때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이 길어지고 심해지며 피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회의를 품게 된다. 오랫동안 육체가 약해져 있으면 영혼이 고통에 대해 더욱 민감해지고 불안정하게 된다. -토머스 로저스(Thomas Rogers, Trouble of Mind).

7절.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두 개의 눈을 주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눈에 불을 켜고 지옥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들의 마음이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어두워진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보응하셨다. 하나님은 질병을 보내셔서 마귀를 섬기기 위해 사용하던 두 눈을 어둡게 하시고, 그들의 정욕으로 육체의 필요한 것을 채우게 하셨다.

7절.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해적들은 빈 배를 보면 그냥 지나친다. 그러나 배가 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들은 필히 공격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공격할 가치를 느끼지 않고 지나쳐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그를 경외함, 그리고 이와 같은 영적인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존 트랩.

8절. “다 나를 떠나라.” 이제 네 갈 길을 가도 좋다. 너는 내가 사망하는 것을 보고자 하지만, 이것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시고, 내가 눈물로 기도하던 그것을 은혜스럽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토머스 윌콕스.

8절.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성도들이 악한 자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은 책망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성도들이 친구들을 조심스럽지 않게 선택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공중의 새도, 들의 짐승들도 이질적인 무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새나 짐승들도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세상의 자연인과 중생한 사람, 죄와 은혜,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루이스 스터클리(Lewis Stuckley, Gospel Glass, 1667).

8절. “내 곡성.” 흐느껴 울면 소리가 난다. 물결 위에서는 음악이 더 멀리, 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퍼져 나가듯이, 눈물과 함께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더 크게 울리고, 눈물이 없을 때보다 더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린다. 안티파트로스(Antipater)가 알렉산더에게 알렉산더의 어머니가 잘못한 것을 탄핵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자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다:”내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이 어머니의 모든 결점을 씻어 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참회하는 눈물은 물리칠 수 없는 대사이며, 은혜의 보좌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법이 없다. -스펜서, Things Old and New.

8절. “행악하는 너희.” 악인들은 이렇게 불리운다. 그들은 자유롭게 죄를 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심령을 가진 자들이며, 악을 행할 때는 철저하게 행한다. 그들은 미끼를 조금씩 먹는 것이 아니라(선한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한다), 이것을 탐욕스럽게 삼켜 버린다. 그들은 온전히 죄악 가운데서 지내면서 죄를 온전히 범한다. 그들은 일을 삼고 죄를 범하기에 “행악자”라고 불린다. -조셉 캐릴.

8절.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천성이 울 줄 모르는 사람이야.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바위에 가서 물을 짜 내는 것이 더 쉬울 거야”라고 한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울 줄 모른다면, 마음속으로는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는가? 지성이 있는 울음이 가장 좋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슬퍼할 수도 있다. 밖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마음 가득히 눈물이 고일 수 있다. 하나님은 겉으로 흐느껴 우는 것보다는 참회하는 마음을 더 좋아하신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가 있다면, 난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다:”내가······네 눈물을 보았노라”(사 38:5). 다윗의 눈물은 하나님의 귀에 음악처럼 들렸다:”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참회하는 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진주와 같아서 천사들도 보기를 즐겨 한다. -토머스 왓슨.

8절.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말로 하는 소리보다도 우리의 태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눈물에서 나오는 소리를 더 잘 들으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탄식과 눈물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이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구절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말로 하지 못하고 흘리는 단순한 눈물이 하나님의 귀에는 더 크게 들린다고 했다. 지하에 있는 수맥의 물이 지표로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물을 보시듯이, 사람의 눈물이 얼굴 밖으로 나오기 전에 하나님은 마음속에 있는 눈물을 보신다. 사람이 슬퍼하나 눈물을 흘리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슬퍼하는 영혼 속에 흐르는 눈물의 소리를 들으신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에 있는 슬픔을 쏟아 내면 이는 하나님을 향해 창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열린 창을 통해서 마른 눈동자 저편에 젖어 있는 마음을 보신다. 잘못을 뉘우치는 자녀가 잘못을 깨달으면 말로 잘못한 것을 분명히 표현하기 전에 이미 부모가 기뻐한다. 참회하는 죄인이 처음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후에 이 죄인이 분명한 언어로 참회하고 기도를 드리게 된다. 다윗은 그가 잘못한 것을 분명히 말로 표현했으며,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을 안 다윗은 이처럼 확신 가운데 감사했다:”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절). -존 던.

8절. “다 나를 떠나라.” 이 구절에서 갑자가 어조가 바뀐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기도는 영혼의 거머리와도 같아서 영혼의 독을 빨아 낸다.” 또 다른 사람은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죄와 비극을 몰아낸다”고 했다. 베르나르(Bernard)는 이렇게 말했다:”기도는 절망 가운데 있는 나를 찾아와 내가 승리하고 죄 사함을 확신한 것을 보고서 떠나간다.” 다윗은 이들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다윗에게 모욕을 주었던 원수들에게 이 얼마나 통쾌한 말인가! 물러가라! 이리 나와라! 사라져라! 이러한 말들은 마귀나 개들에게나 하는 말이며, 도엑이나 시므이에게 적합한 말이다. 또한 다윗의 자손이 심판하러 다시 오실 때, 그분의 원수들에게 하실 말씀이다. -존 트랩.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시편 기자는 세 번이나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셨다는 확신을 표현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했던 것처럼(고후 12:8)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많이 기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셨다(마 26:39, 42, 44).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강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그로 인해 넘치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존 길(John Gill, D.D., 1697-1771).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이 구절이 원수들에 대한 저주와 악담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원수들을 치료하고 불쌍히 여기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게 어떤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언적 열정으로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셨으며 앞으로도 들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그들에게 무거운 심판이 정녕 임할 것이다. 그들은 분명 징계를 받을 것이나 그 결과는 분명치 않다. 그분의 징계를 받고서 원수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할 것인지, 아니면 더욱 완고하게 할 것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이어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 대해 “심히 떪이여”라고 했다. 그는 원수들도 자신이 당했던 것을 당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나의 뼈가 떨리오니”라고 했으며, 그의 영혼에 대해서도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다윗이 이처럼 ‘떨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원수에게 같은 것을 경험하라고 하는 것은 악의에 찬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폭풍이 분 뒤에 풍랑이 남아 있는 바다와도 같다. 큰 위험은 지나갔으나, 파도는 아직도 거칠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서도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폭풍 중에서나 평안한 가운데에서도 위험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고 괴로움을 당하며 거룩한 마음으로 떤다면, 폭풍은 지나가고 하나님의 진노는 끝난 것이다. 거룩한 마음으로 떨었던 영혼은 양심의 안식을 누리고, 그 영혼이 평온함을 누리게 된다. -존 던.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시편 기자의 탄식이 나타나는 시는 이렇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성도들로 앞을 바라보고, 그의 전쟁이 끝나는 그날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도록 교훈한다. 그날이 되면 죄와 슬픔은 사라질 것이며, 의인을 대적하던 원수들에게 영원한 혼란이 갑자기 덮칠 것이다. 그날이 되면 참회하는 성도들의 베옷은 영광스러운 의복으로 바뀌고, 그가 흘리던 눈물은 방울방울 그의 관에 빛나는 보석이 될 것이다. 그날이 되면 한숨과 탄식에 이어 하늘의 노래가 천사들의 하프와 함께 울릴 것이며, 믿음의 눈은 전능하신 그분을 뵈올 것이다. -조지 혼.

[설교힌트]

1절. 고난받는 영혼을 위한 설교. (1) 하나님의 두 가지 손길-① 설교.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 자신이 겪는 가벼운 시련, 성령께서 우리 양심에 엄중히 경고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되는 견책. ② 징계. 이것은 먼저 임하는 견책으로도 성도들이 고쳐지지 않으면 두번째로 임하는 것이다. 고통, 재산의 손실, 가족의 죽음, 또는 다른 시련들이 여기에 속한다. (2)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는 방법은 겸손, 고백, 회심, 여호와에 대한 믿음 등등.

1절. 성도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분노이다. 이것은 마음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왜 그런가?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무엇인가?

2절 상반절. 하나님의 치료. (1) 이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뼈가 떨리오니.” (2)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3) 여기에 따르는 것은 무엇인가?

3절. 다음의 질문을 통해 풍부한 주제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이 어느 때까지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가?

4절.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이 기도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임박한 위험을 당해서, 응답하신다는 보증을 가지고서, 모든 자비를 구하며 드리는 기도이다.

4절. 징계받는 성도의 기도. (1) 그의 상태-그의 영혼은 자유롭지 못하고 위험에 처해 있음이 분명하다. (2) 그의 소망-여호와께서 돌아오시는 것에 소망이 달려 있다. (3) 그의 간구-오직 자비만 구할 뿐이다.

5절.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주를 섬기는 일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5절. 우리가 생존하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의무.

6절. 성도의 눈물-질, 양, 영향력, 완화시키는 것, 마지막 결과.

7절. 흐느끼는 소리. 이것은 무엇인가?

8절. 사함받은 죄인은 나쁜 친구들을 멀리한다.

9절. 과거의 응답은 현재의 믿음에 대한 기초가 된다. 그분은 이전에 행하셨던 일을 이후에 다시 행하실 것이다.

10절. 악인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 예수.코리아

메모 :

시편 6편 & 성경주석

<시편 6편 서론>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

시 6편은 일곱 편의 통회 시편 중 첫 번째 것으로 몹시 개인적인 시이다. 루터는 이 시를 “육체와 영혼의 건강을 위한 회개의 시”라고 불렀다. 이 시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조롱당할 때 자신이 느꼈던 육체의 고통과 영혼의 고민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거의 죽음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열렬히 기도하며 또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를 건져내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 3편에서처럼 이 시에서도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가 나타나는데, 깊은 슬픔이 8~10절에서 갑자기 환희로 바뀌는 것이 그것이다.

* 영장으로 ~한 노래 :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영장”은 “합창대 지휘자를 따라”로 해석한다. 시 6편은 합창대 지휘자를 따라 현악 스미닛(하프, 8개의 현을 가진 악기)에 맞춘 노래이다.

<시편 6편 개역한글>

1.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8.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편 성경주석>

6:1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고대에는 재난과 질병이 종종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여겨졌다. 시인은 고뇌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벌을 내리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이 견책을 받아 마땅하긴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 견책이 진노의 견책이 아닌 자비의 견책이 되기를 간청한다(참조 렘 10:24). 하나님의 태도와 행위가 사람의 언어로 묘사된 경우들을 구약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도 그 같은 실례들 중 하나이다(참조 시 2:4 주석). 히브리어에서는 1절의 마지막 단어가 “이-”(ee)라는 긴 소리로 끝을 맺는다. 이 음은 시편 전반에 걸쳐서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여러 절의 끄트머리에 많이 나온다. 이 시에 회개의 어조(참조 74쪽)를 불어넣는 닮은 음들이 이어지는데 이것을 유음(類音)현상이라 한다.

6:2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문자적으로 “내가 시들었사오니.” 이 동사는 식물의 시듦을 묘사할 때 자주 쓰인다(사 16:8; 사 24:4, 7; 욜 1:12).

6:2 나를 고치소서.

어떤 병인지는 언급되지 않지만, 이는 육체적 질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직접적인 호소이다. 그의 뼈들이 “떨리”고 있다. 이 말은 그의 몸의 뼈대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몸 전체가 고통을 겪고 있다.

6:3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마음의 고뇌는 육신의 고통보다도 훨씬 더 심하다. 시인은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불쾌히 여기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마음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다. 그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사무치는 절규를 쏟아내는데,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에 희망을 걸고 그 희망의 빛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모색하던 중 문득 자신이 처한 곤경이 인간적 관점에서는 절망적인 것임을 깨닫고 “내가 놓임을 받기까지 얼마나 더 고난을 받아야 하나이까”(참조 욥 7:2~4)라고 부르짖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그 질병 가운데 버리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의 고난은 하늘에서 누릴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가 있다(참조 롬 8:18; 고후 4:17, 18).

6:4 여호와여 돌아와.

시인은 이제 자신의 구원을 위해 간청한다. “나의 영혼”은 인칭 대명사 “나”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다. 그는 하나님의 품성의 속성들 중 하나인 그의 자비에 호소한다(참조 출 34:6; 민 14:18; 시 86:15).

6:5 기억함이 없사오니.

이 절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의식이 있는 어떤 중간 상태가 존재한다는 가르침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참조 시 88:10; 146:4; 사 38:18).

6:6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혹은 밤마다)” 고통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표현하기 위해 6절과 7절에서 심한 과장법을 사용한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깊은 정신적 고뇌도 그를 완전히 지치게 만든 요인이 된 듯하다. 만일 이 시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한 고민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자식이 저지른 비열한 배은망덕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아들을 잃어버린 한 아버지의 고뇌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삼하 18:33; 19:1~4에 나오는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애가를 참조하라).

다윗의 생생한 표현을 우가릿(참조 68, 69쪽) 종교시 중 하나에서 발췌한 다음의 구절과 비교해 보라. “그는 저녁에 침상을 끌어안고 눈물로 잠을 이룬다.”

6:7 내 모든 대적.

압살롬과 그의 부하들을 일컫는 듯하다.

6:8 나를 떠나라.

고난에서 구원으로의 전환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마치 태양이 순간적으로 달 없는 밤의 어둠을 파열하듯이 빛은 돌연히 어둠을 깨뜨린다. 믿음은 언제나 승리한다. 시인은 믿음으로 원수들이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한다. 이것이 행동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참조 사 65:24).

6:8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하나님은 비탄에 찬 외침에 귀를 기울이시며 또한 그것을 영혼의 진실한 기도로 여기신다. 기도의 핵심은 말이 아니다. 눈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헌신한 영혼이 확신과 기쁨에 대한 생각을 되풀이함으로 힘에 힘을 더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여기서 8절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6:9 받으시리로다.

하나님이 이미 시인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에 그는 앞으로도 하나님이 들으실 것을 알고 아무 두려움 없이 쉼을 누린다.

6:10 떪이여.

히브리어 바할(bahal). 2절과 3절에서 “떨다”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 시인은 자기의 원수들, 곧 하나님의 원수들이 자신들이 세운 계획 때문에 낭패를 당하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악인들의 음모가 허사로 돌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6:10 홀연히.

악인들의 계획이 좌절되는 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시인은 자기의 원수들이 좌절감 속에서 물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시 6편은 치유불능인 것처럼 보이는 심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뇌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특별한 위로를 가져다준다.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킨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여호와여 돌아오소서.(시편 6편)

이미지 출처 – Google 이미지 검색

제목 :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본문 : 시편 6편

1.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말씀 :

오늘 본문은 시편 6편의 말씀이다.

개역 한글 성경의 표제에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있다.

이것을 개역 개정 성경에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라고 번역하였다.

영장은 인도자나 지휘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미닛’은 음악 용어로 ‘제8번째’를 가리킨다.

아마도 여덟 개의 줄을 가진 현악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시편에는 일곱 편의 대표적 참회시가 있다.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 등이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6편이 이에 속하는데 다윗의 회개시이다.

다윗의 회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혹은 간접적인 징계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깐 징계로 받은 육체의 질병이나 심리적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 6편을 통해 자신의 범죄를 철저하게 회개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시편 6편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던 것에 대한 회개라는 주장이 있고, 시편 3편과 같은 배경으로 압살롬 반란 때 고백 된 시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시편 6편은 지금 깊은 병 가운데 있는 다윗이 드리는 기도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영혼까지 떨리는 고통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자신을 고쳐주시기를 기도한다.

본문 1~3절.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바라보는 다윗의 이해이다.

시편 6편에는 죄에 대한 고백이나 회개의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윗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단지 자신의 질병과 고난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자신의 질병과 고난을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물론 현대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모든 질병과 고난이 무조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본문은 구약시대이다.

어제 말씀에서 언급했듯이 지금과 똑같은 기준을 제시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질병과 건강의 문제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문제가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달려있다고 다윗은 믿고 있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함께하고자 하는 다윗의 진지한 신앙으로 보아야 한다.

실제 다윗은 그런 개념으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철저하게 인생의 주관자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다윗은 자신이 죽음 직전의 상황에 있다고 느끼고 있다.

본문 4, 5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죽으면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호소하며 떠나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돌아와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4절에 사용된 ‘돌아와’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 성경에는 ‘슈브’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관계회복’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러니깐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에게로 돌아와 달라는 간구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지금 질병으로 인해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졌음을 느끼고 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된 이유를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죄에 대한 징계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의 용서하심을 간구한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만지신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다윗의 원초적인 믿음의 고백이다.

다윗의 고백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간절했던지 그는 질병 가운데에서 탄식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는 탄식함으로 지치고, 밤마다 눈물로 침상과 요를 적신다고 고백한다.

본문 6절.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여기서 ‘침상을 띄우며’라는 표현은 히브리 원어로 ‘싸하’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그 뜻은 ‘수영하다’, ‘침수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윗이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렸던지 눈물에 침상이 푹 젖어서, 침상에서 수영할 정도, 침대가 침수될 정도라는 것이다.

다윗이 그만큼 간절하게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간구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육체의 질병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대적들이었다.

본문 7절 말씀.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어려움을 더 어렵게 만들고, 고통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고통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질병에 대해서 이런저런 자기 말을 쏟아내며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윗은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종종 있다.

욥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의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바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바로 내 안의 근심과 더불어 나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 친척, 친구일 때가 너무나 많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하고 담대해야 한다.

내가 잘못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맞다면….

내 속에서 나 스스로를 책망하는 비난의 소리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소리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나의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들리는 책망의 소리로 인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에 대한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본문 8~10절까지를 읽어 보겠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편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시인의 확신으로 마치고 있다.

하나님은 믿음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다.

아무리 힘든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모든 문제의 해결을 하나님께 구할 때,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분석력으로는 나에게 일어나는 문제의 근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문제의 근원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그저 온갖 증상들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슬퍼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주관자 되심을 기억하고 고백하여야 한다.

또한,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

죄로 인한 육체의 고통과 죄의 회개로 인한 육체의 고통은 구분되어야 한다.

시인은 후자의 고통을 말해주고 있다.

죄로 인한 고통이 있다면 먼저 죄를 해결해야 한다.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죄는 더욱 깊어져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될 뿐이다.

하지만 죄를 회개하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고통이라면, 우리는 그 고통을 기쁨으로 감당하여야 한다.

우리를 십자가 앞에 서게 하여 우리를 낫게 하는 고통이다.

그 고통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사랑하는 한마음 신앙공동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고통을 허락하셨지만, 고통으로 인해 다윗을 더욱 간절하게 하셨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간구할 수 있는 깨달음을 주셨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소망을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때로는 내가 나에게 실망할 수 있다.

어떤 때는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매몰찬 비난을 받을 때도 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변함없으신 주님은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

내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구할 때, 지금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기를 소망한다.

나의 고통으로 인해 나를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기억하는 믿음의 한마음 패밀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간구한다.

히브리어 시편 6편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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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메낯체아흐 비네기노트 알 하쉐미니트 미즈모르 레다위드)

아도나이 알 베아페카 토키헤니 웨알 바하마테카 테얏세레니

개역개정,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새번역,1 주님, 분노하며 나를 책망하지 마십시오. 진노하며 나를 꾸짖지 마십시오.

우리말성경,1 여호와여, 주의 노여움으로 나를 꾸짖지 마시고 주의 분노로 나를 벌하지 마소서.

가톨릭성경,1 주님, 당신의 진노로 저를 벌하지 마소서. 당신의 분노로 저를 징벌하지 마소서.

영어NIV,1 For the director of music. With stringed instruments. According to sheminith. A psalm of David. O LORD, do not rebuke me in your anger or discipline me in your wrath.

영어NASB,1 {For the choir director; with stringed instruments, upon an eight-stringed lyre.} (A Psalm of David.) O LORD, do not rebuke me in Your anger, Nor chasten me in Your wrath.

영어MSG,1 A David psalm. Please, GOD, no more yelling, no more trips to the woodshed.

영어NRSV,1 To the leader: with stringed instruments; according to The Sheminith. A Psalm of David. O LORD, do not rebuke me in your anger, or discipline me in your wrath.

헬라어구약Septuagint,1 εις το τελος εν υμνοις υπερ της ογδοης ψαλμος τω δαυιδ

라틴어Vulgate,1 in finem in carminibus pro octava psalmus David

히브리어구약BHS,1 לַמְנַצֵּחַ בִּנְגִינֹות עַל־הַשְּׁמִינִית מִזְמֹור לְדָוִד׃

히브리어구약BHS,1 יְהוָה אַל־בְּאַפְּךָ תֹוכִיחֵנִי וְאַל־בַּחֲמָתְךָ תְיַסְּרֵנִי׃

성 경: [시6:1-10]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본서는 7개 회개의 시(6, 32, 38, 51, 102, 130, 143편) 중 한 편이다. 이 시에는 시인의 극한 고통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 극한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과오를 처절하리만큼 철저하게 회개하고 있다. ‘영장’이란 말에 대해서는 4편의 서문을 참조하라. 한편, ‘스미닛’은 아마도 ‘8현금’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여덟 번째 줄의 높이로’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Kraus).

성 경: [시6:1]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이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다윗이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하에 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그는 괴로워하고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 주께서 분을 내신다는 다윗의 표현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생으로부터 떠나시고 그를 버리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여기서 ‘견책하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카흐'(*)는 ‘심판하다’, ‘판단하다’는 뜻이다. 이 심판의 결과로 그는 지금 영혼과 육체에 있어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2, 3절). 이처럼 주께서 다윗을 심판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율법)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 주의 진노는 가공하리만큼 무서운 것이다. 주의 진노 앞에 땅이 혼들리며 산이 무너지며 아무도 그것을 진정시킬 자가 없다(욥 9:5;렘 10:10). 이와같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다윗은 두려워 떨고 있다. 다윗은 병행 대구법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엄했음을 보여준다.

한네니 아도나이 키 우멜랄 아니 레파에니 아도나이 키 니브할루 아차마이

개역개정,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새번역,2 주님, 내 기력이 쇠하였으니,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 뼈가 마디마다 떨립니다. 주님, 나를 고쳐 주십시오.

우리말성경,2 여호와여, 내가 쇠약하오니 나를 가엾게 여기소서. 여호와여, 내 뼈들이 고통당하고 있으니 나를 고쳐 주소서.

가톨릭성경,2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는 쇠약한 몸입니다. 저를 고쳐 주소서, 주님, 제 뼈들이 떨고 있습니다.

영어NIV,2 Be merciful to me, LORD, for I am faint; O LORD, heal me, for my bones are in agony.

영어NASB,2 Be gracious to me, O LORD, for I am pining away; Heal me, O LORD, for my bones are dismayed.

영어MSG,2 Treat me nice for a change; I’m so starved for affection. Can’t you see I’m black and blue, beat up badly in bones

영어NRSV,2 Be gracious to me, O LORD, for I am languishing; O LORD, heal me, for my bones are shaking with terror.

헬라어구약Septuagint,2 κυριε μη τω θυμω σου ελεγξης με μηδε τη οργη σου παιδευσης με

라틴어Vulgate,2 Domine ne in furore tuo arguas me neque in ira tua corripias me

히브리어구약BHS,2 חָנֵּנִי יְהוָה כִּי אֻמְלַל אָנִי רְפָאֵנִי יְהוָה כִּי נִבְהֲלוּ עֲצָמָי׃

성 경: [시6:2]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 육신의 병에 걸렸음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구약에서 죄와 질병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에 있다(32:1ff.;38:2ff.; 39:8, 11).

󰃨 긍휼히 여기소서 – 다윗은 이 질병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태에서 여호와의 긍휼에 호소하고 있다. 이 긍휼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조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구한 것이 아니고 다만 자신의 영육간의 고통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구한 것이다(Craigie).

󰃨 나의 뼈가 떨리오니 – ‘떨리오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발루'(*)는 문자적으로 ‘부숴지다'(go to pieces)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은 다윗의 고통이 죽음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나를 고치소서 – 죄악으로 인한 질병은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출 15:26;왕하 5:7). 따라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웨나프쉬 니베할라 메오드 웨아트 웨앝타 아도나이 아드 마타이

개역개정,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새번역,3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립니다. 주님께서는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우리말성경,3 내 영혼이 몹시 떨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언제까지입니까?

가톨릭성경,3 제 영혼이 몹시도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 당신께서는 언제까지나 …… ?

영어NIV,3 My soul is in anguish. How long, O LORD, how long?

영어NASB,3 And my soul is greatly dismayed; But You, O LORD– how long?

영어MSG,3 and soul? GOD, how long will it take for you to let up?

영어NRSV,3 My soul also is struck with terror, while you, O LORD–how long?

헬라어구약Septuagint,3 ελεησον με κυριε οτι ασθενης ειμι ιασαι με κυριε οτι εταραχθη τα οστα μου

라틴어Vulgate,3 miserere mei Domine quoniam infirmus sum sana me Domine quoniam conturbata sunt ossa mea

히브리어구약BHS,3 וְנַפְשִׁי נִבְהֲלָה מְאֹד [כ= וְאַתְּ] [ק= וְאַתָּה] יְהוָה עַד־מָתָי׃

성 경: [시6:3]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이다. 이 용어는 인간 자신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지만(Kraus), 여기서는 2절의 ‘뼈'(육체)와 대조적인 개념으로 인간의 영혼을 의미한다(Craigie).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병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권태, 의욕 상실, 무력감, 열등 의식, 죄 의식 등이 영혼의 질병에 포함될 것이다(22:14;31:10;38:3; 102:3, Rawlinson).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 질병이 참을 수 없는 한도에까지 이르자 다윗은 절규하고 있다. 여기서 ‘어느 때’란 곧 하나님의 긍휼이 그에게 임하는 때이다(Rawlinson, Craigie).

슈바 아도나이 할레차 나프쉬 호쉬에니 레마안 하스데카

개역개정,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새번역,4 돌아와 주십시오, 주님. 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 주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우리말성경,4 여호와여, 돌아오셔서 나를 구하소서. 주의 신실하신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가톨릭성경,4 돌아오소서, 주님, 제 목숨을 건져 주소서. 당신의 자애로 저를 구원하소서.

영어NIV,4 Turn, O LORD, and deliver me; save me because of your unfailing love.

영어NASB,4 Return, O LORD, rescue my soul; Save me because of Your lovingkindness.

영어MSG,4 Break in, GOD, and break up this fight; if you love me at all, get me out of here.

영어NRSV,4 Turn, O LORD, save my life; deliver me for the sake of your steadfast love.

헬라어구약Septuagint,4 και η ψυχη μου εταραχθη σφοδρα και συ κυριε εως ποτε

라틴어Vulgate,4 et anima mea turbata est valde et tu Domine usquequo

히브리어구약BHS,4 שׁוּבָה יְהוָה חַלְּצָה נַפְשִׁי הֹושִׁיעֵנִי לְמַעַן חַסְדֶּךָ׃

성 경: [시6:4]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여호와여 돌아와 – 이 말은 질병 중에 있는 다윗이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Lange, Perowne).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다윗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계신다는 생각은 그의 질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 여기서 ‘영혼'(*, 네페쉬)은 ‘생명’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이 영육간에 강건해지기를 간구한 표현이다.

󰃨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 여기서 ‘인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이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5:7 주석을 참조하라.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근거하여 구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국가적인 구원이든 개인적인 구원이든 항상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에 근거하여 성취되었다(Craigie).

키 엔 밤마웨트 지크레카 비쉐올 미 요데 라크

개역개정,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새번역,5 죽어서는, 아무도 주님을 찬양하지 못합니다. ㉠스올에서, 누가 주님께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 ㉠또는 ‘무덤’ 또는 ‘죽음’

우리말성경,5 죽으면 아무도 주를 기억할 수 없으니 누가 무덤에서 주를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성경,5 죽으면 아무도 당신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저승에서 누가 당신을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영어NIV,5 No one remembers you when he is dead. Who praises you from the grave?

영어NASB,5 For there is no mention of You in death; In Sheol who will give You thanks?

영어MSG,5 I’m no good to you dead, am I? I can’t sing in your choir if I’m buried in some tomb!

영어NRSV,5 For in death there is no remembrance of you; in Sheol who can give you praise?

헬라어구약Septuagint,5 επιστρεψον κυριε ρυσαι την ψυχην μου σωσον με ενεκεν του ελεους σου

라틴어Vulgate,5 convertere Domine eripe animam meam salvum me fac propter misericordiam tuam

히브리어구약BHS,5 כִּי אֵין בַּמָּוֶת זִכְרֶךָ בִּשְׁאֹול מִי יֹודֶה־לָּךְ׃

성 경: [시6:5]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 다윗은 마지막 원수인 사망에서 구원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사후(死後) 개념은 신약 시대와 같이 분명하지 않았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사후에 의인과 악인이 구분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확실하게 신학적으로 정립하지는 못했다. 다만 인생이 사후에 음부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이 음부는 일종의 ‘지하의 세계'(underworld)로 인식 되었다. 이곳에 들어간 사자(死者)들은 무의식 상태에 있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음부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하 12:15-25 강해. ‘구약의 사후(死後) 개념 – 음부(陰府)’를 참조하라.

야가티 베아네하티 아세헤 베콜 라일라 밑타티 베디메아티 아르시 아메세

개역개정,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새번역,6 나는 탄식만 하다가 지치고 말았습니다. 밤마다 짓는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내 잠자리를 적십니다.

우리말성경,6 나는 신음하다 지쳐 버렸습니다. 내가 밤새도록 울어 눈물로 침대를 적셨으며 내 이불도 푹 젖었습니다.

가톨릭성경,6 저는 탄식으로 기진하고 밤마다 울음으로 잠자리를 적시며 눈물로 제 침상을 물들입니다.

영어NIV,6 I am worn out from groaning; all night long I flood my bed with weeping and drench my couch with tears.

영어NASB,6 I am weary with my sighing; Every night I make my bed swim, I dissolve my couch with my tears.

영어MSG,6 I’m tired of all this–so tired. My bed has been floating forty days and nights On the flood of my tears. My mattress is soaked, soggy with tears.

영어NRSV,6 I am weary with my moaning; every night I flood my bed with tears; I drench my couch with my weeping.

헬라어구약Septuagint,6 οτι ουκ εστιν εν τω θανατω ο μνημονευων σου εν δε τω αδη τις εξομολογησεται σοι

라틴어Vulgate,6 quoniam non est in morte qui memor sit tui in inferno autem quis confitebitur tibi

히브리어구약BHS,6 יָגַעְתִּי בְּאַנְחָתִי אַשְׂחֶה בְכָל־לַיְלָה מִטָּתִי בְּדִמְעָתִי עַרְשִׂי אַמְסֶה׃

성 경: [시6:6]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 이는 탄식함으로 완전히 탈진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다윗이 죄로 인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했는지를 보여준다.

󰃨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 이 ‘눈물’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나오는 눈물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 계신다는 슬픔으로 인해 나오는 눈물이었다(Craigie). 따라서 이 많은 눈물은 그의 육체적, 영적인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Kraus).

아쉐솨 미카아스 에니 아테카 베콜 초레라이

개역개정,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새번역,7 사무친 울화로, 내 눈은 시력까지 흐려지고, 대적들 등쌀에 하도 울어서 눈이 침침합니다.

우리말성경,7 내 눈은 슬픔으로 희미해지고 내 모든 적들 때문에 약해졌습니다.

가톨릭성경,7 저의 눈은 시름으로 멀어지고 저의 모든 적들 때문에 어두워집니다.

영어NIV,7 My eyes grow weak with sorrow; they fail because of all my foes.

영어NASB,7 My eye has wasted away with grief; It has become old because of all my adversaries.

영어MSG,7 The sockets of my eyes are black holes; nearly blind, I squint and grope.

영어NRSV,7 My eyes waste away because of grief; they grow weak because of all my foes.

헬라어구약Septuagint,7 εκοπιασα εν τω στεναγμω μου λουσω καθ’ εκαστην νυκτα την κλινην μου εν δακρυσιν μου την στρωμνην μου βρεξω

라틴어Vulgate,7 laboravi in gemitu meo lavabo per singulas noctes lectum meum in lacrimis meis stratum meum rigabo

히브리어구약BHS,7 עָשְׁשָׁה מִכַּעַס עֵינִי עָתְקָה בְּכָל־צֹורְרָי׃

성 경: [시6:7]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 눈이…쇠하며…어두웠나이다 – 건강을 측정하는 척도가 된다. 모세는 죽기 전에 그의 눈이 쇠하지 아니하였는데(신 34:7), 이는 그가 12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다윗이 극도로 쇠약해진 자신의 건강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근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아스'(*)는 ‘분개’, ‘성냄’을 의미하는 말이다(Rawlinson, Lange, TWOT). 따라서 근심은 ‘분개’로 개역되어야 합당하다. 그렇다면 다윗을 분개하게 했던 그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 대답은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 언급된 ‘대적’이란 병자인 다윗을 적대시하는 모든 상황을 지시하는 말이다. 즉, 구약 시대에 병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죄인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사람들은 병자를 적대시하였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적대시하였다(욥 30:1-15). 다윗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대적으로 인하여 분개하게 되었고, 또한 이로 인해 그 눈이 어둡게 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이다(Craigie).

수루 밈멘니 콜 포알레 아웬 키 솨마 아도나이 콜 비케이

개역개정,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새번역,8 악한 일을 하는 자들아, 모두 다 내게서 물러가거라. 주님께서 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주셨다.

우리말성경,8 너희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아, 내게서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부짖음을 들으셨도다.

가톨릭성경,8 내게서 모두 물러들 가라, 나쁜 짓 하는 자들아. 주님께서 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신다.

영어NIV,8 Away from me, all you who do evil, for the LORD has heard my weeping.

영어NASB,8 Depart from me, all you who do iniquity, For the LORD has heard the voice of my weeping.

영어MSG,8 Get out of here, you Devil’s crew: at last GOD has heard my sobs.

영어NRSV,8 Depart from me, all you workers of evil, for the LORD has heard the sound of my weeping.

헬라어구약Septuagint,8 εταραχθη απο θυμου ο οφθαλμος μου επαλαιωθην εν πασιν τοις εχθροις μου

라틴어Vulgate,8 turbatus est a furore oculus meus inveteravi inter omnes inimicos meos

히브리어구약BHS,8 סוּרוּ מִמֶּנִּי כָּל־פֹּעֲלֵי אָוֶן כִּי־שָׁמַע יְהוָה קֹול בִּכְיִי׃

성 경: [시6:8]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본 구절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기도가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즉, 지금까지 자신의 고통을 애절하게 호소해 온 다윗이 본 구절에서부터는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큰 고통 중에서 분개와 실망을 극복할수 있는 믿음을 회복한 듯하다(Perowne).

󰃨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 ‘행악하는 너희’는 7절의 ‘내 모든 대적’을 지시하는 말이다. 다윗이 이렇게 담대히 외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시금 돌아오셨음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의 질병은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신 결과였다. 하나님께서 떠나심으로 그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적대시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큰 슬픔과 비애 속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돌아오셨으므로 그는 이 모든 대적에게서 자유롭게 될 수 있었다(Craigie).

솨마 아도나이 테힌나티 아도나이 테필라티 잌카흐

개역개정,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새번역,9 주님께서 내 탄원을 들어 주셨다. 주님께서 내 기도를 받아 주셨다.

우리말성경,9 여호와께서 내 간청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리니

가톨릭성경,9 주님께서 나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받아들이신다.

영어NIV,9 The LORD has heard my cry for mercy; the LORD accepts my prayer.

영어NASB,9 The LORD has heard my supplication, The LORD receives my prayer.

영어MSG,9 My requests have all been granted, my prayers are answered.

영어NRSV,9 The LORD has heard my supplication; the LORD accepts my prayer.

헬라어구약Septuagint,9 αποστητε απ’ εμου παντες οι εργαζομενοι την ανομιαν οτι εισηκουσεν κυριος της φωνης του κλαυθμου μου

라틴어Vulgate,9 discedite a me omnes qui operamini iniquitatem quoniam exaudivit Dominus vocem fletus mei

히브리어구약BHS,9 שָׁמַע יְהוָה תְּחִנָּתִי יְהוָה תְּפִלָּתִי יִקָּח׃

성 경: [시6:9]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 본절에 사용된 두 동사는 시제가 서로 다르다. 앞의 ‘들으셨음이여’는 완료형이며 ‘받으시리로다’는 미완료형이다. 이 시제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큰 근심 중에 간구했던 다윗이 지금은 확신 중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고통 중에 간구하는 다윗에게 돌아와 그를 다시금 받아주셨다. 그러므로 다윗의 기도가 이미 응답된 것이다(완료). 그러나 지금까지 악화된 다윗의 건강과 그의 명예는 앞으로 회복될 것이다(미완료). 즉, 그의 심령은 이미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나 그의 육체는 아직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곧 하나님의 응답이 그의 육체에까지 미칠 것을 다윗은 확신하고 있다(Craigie).

예보슈 웨입바할루 메오드 콜 오예바이 야슈부 예보슈 라가

개역개정,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새번역,10 내 원수가 모두 수치를 당하고, 벌벌 떠는구나. 낙담하며, 황급히 물러가는구나.

우리말성경,10 내 모든 적들이 두려워하며 부끄러움을 당한 후 곧 물러가리라.

가톨릭성경,10 내 원수들은 모두 부끄러워 몹시 떨리라. 부끄러워하며 순식간에 물러가리라.

영어NIV,10 All my enemies will be ashamed and dismayed; they will turn back in sudden disgrace.

영어NASB,10 All my enemies shall be ashamed and greatly dismayed; They shall turn back, they shall suddenly be ashamed.

영어MSG,10 Cowards, my enemies disappear. Disgraced, they turn tail and run.

영어NRSV,10 All my enemies shall be ashamed and struck with terror; they shall turn back, and in a moment be put to shame.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εισηκουσεν κυριος της δεησεως μου κυριος την προσευχην μου προσεδεξατο

라틴어Vulgate,10 exaudivit Dominus deprecationem meam Dominus orationem meam suscepit

히브리어구약BHS,10 יֵבֹשׁוּ וְיִבָּהֲלוּ מְאֹד כָּל־אֹיְבָי יָשֻׁבוּ יֵבֹשׁוּ רָגַע׃

성 경: [시6:10]

주제1: [참회의 기도]

주제2: [자비를 구하는 기도]

󰃨 내 모든 원수가…심히 떪이여 – 여기서 ‘떪이여’는 3절의 ‘심히 떨리나이다’라는 말과 같다. 처음에는 다윗이 떨었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돌아온 이후에는 그의 모든 원수가 떨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윗은 남을 비방하는 자는 결국 그 비방의 대상이 된다는 진리를 확신하고 있다(마 7:1, 2).

󰃨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 본절의 ‘물러가리로다'(*, 슈브)는 4절의 ‘돌아와’와 깊은 연관이 있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돌아오셨을 때 그의 대적은 물러가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인생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질 때 이 대적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윗은 이 구절에서 인생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을 때에만 모든 대적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개역개정,11 (없음)

새번역,11 (없음)

우리말성경,11 (없음)

가톨릭성경,11 (없음)

영어NIV,11 (없음)

영어NASB,11 (없음)

영어MSG,11 (없음)

영어NRSV,11 (없음)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αισχυνθειησαν και ταραχθειησαν σφοδρα παντες οι εχθροι μου αποστραφειησαν και καταισχυνθειησαν σφοδρα δια ταχους

라틴어Vulgate,11 erubescant et conturbentur vehementer omnes inimici mei convertantur et erubescant valde veloc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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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에서 승리로(시 6편)

주제: 탄식에서 승리로

본문: 시편 6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6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꼭 알아야 하는 미래의 질병 10가지’라는 책을 보면, 세계보건기구에서는 2020년이 되면 모든 연령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질병이 ‘우울증’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모든 연령의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질병으로 ‘마음의 감기’라고도 합니다. 평균적으로 20대 후반에 많이 나타나고 여성이 남성보다 2배가 많다고 하며 50세가 넘으면 그 비율이 비슷해진다고 합니다. 남자들이 보통 그것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남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우울증의 증상은 슬프다고 느끼고 희망이 없다고 여기며, 무기력, 죄책감, 자책, 식욕과 흥미의 감소, 불면 등입니다. 그 정도가 심하면 최종적으로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슬픔, 무기력, 자책 등의 우울증의 증상들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에는 그런 내용을 여러 번 찾아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6편도 그런 상황으로 시작합니다.

시편 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할 때 기록한 시라고 보기도 하고(시3),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회개하며 쓴 시라고 보기도 합니다(시51). 또 어떤 학자는 사울을 피해서 도망할 때 기록한 시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 것은, 이 시를 아무리 읽어봐도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황 자체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 상황에서 다윗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상황

다윗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1). 그는 하나님이 분노와 진노로 자신을 책망하고 징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 받는 것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시 94: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 3:12).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악인을 벌하시는 것과 같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다윗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 그렇게 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다윗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2), “나의 뼈가 떨리오니”(2),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3). “수척하였다”(2)는 것은 물이 없어서 말라가는 식물처럼 죽어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4). 다윗은 자신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뼈가 떨린다”(2)에서 뼈는 단순히 신체기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시 35:9-10),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뼈는 단단하고 몸 중에 가장 강한 부분입니다. “뼈가 떨린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강하고 단단한 부분조차도 두려워 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두렵고 놀라서 평정심을 잃어버린 상태가 “떨린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영적인 어려움과 육적인 어려움을 동시에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곧이어 “내 영혼도 매우 떨린다”(3)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며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가뭄 중에 꽃처럼, 뿌리 뽑힌 풀처럼 고통스럽게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4). 다윗이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나 계신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멀리 떠나 계신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이대로 그냥 죽어버린다면 다시는 하나님께 예배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5). 그는 계속되는 탄식에 피곤해하고 있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6). 이런 어려움을 경험해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몸이 힘들어 쉬고 싶은데 너무 슬퍼서 잠도 이루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윗의 어려움은 이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다윗의 대적들이 그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7). 다윗의 대적은 이 상황을 보며 그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욥이 고통 받고 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정죄했던 것과 같습니다. 다윗의 대적은 그를 죄인으로 정죄하며 조롱했을 것입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대체 어디 계시냐고 했을지 모릅니다.

학자들은 다윗의 고통이 육적인 것인지, 영적인 것인지로 논쟁하고, 그것이 다윗의 죄로 인한 것인지, 억울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로 다툽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 스스로가 그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난받는 이유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와 같은 어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욥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욥기를 가지고 있어 그 일의 전말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도 하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욥이 깨달은 것은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날 때, 이것이 어떤 목적으로 인한 어려움인지, 이것이 나의 죄 때문은 아닌지,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도 알지 못합니다. 계속되는 어려움으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경험하는데 대적은 조롱을 하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기도하기도 힘들고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며, 어쩌면 나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저 일시적으로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극도로 낙심하여 침체에 빠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교회에 가는 것도, 성경을 읽는 것도 부담스럽습니다. 신령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나 자신이 수치스러워집니다.

어떤 분은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이고 어떤 분은 앞으로 이런 경험을 하실지 모릅니다. 이런 영적인 침체는 유명한 마틴 루터나 칼빈도 경험한 것이고, 저명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도 고백한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선지자 엘리야가 그러했고, 다윗과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에서 심히 고민하셨습니다.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죄를 범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이나 불신이 일어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7절을 다시 읽으며 그 해답을 찾기를 원합니다.

다윗의 기도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1-4). 다윗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5차례나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둠의 수렁에서 하나님을 절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참 뻔한 답인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런 상황에 처하면 하나님보다는 주변의 가까운 친구를 찾아갑니다. 나를 위로해주고 내 어려움을 공감해줄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 상황에서 도피하거나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잠을 자거나 여행을 가거나, 어떤 사람은 병원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극심한 무기력을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진단하여 약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들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환경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명령은 시대나 문화, 성별, 나이를 뛰어넘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먼저 찾는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찾으면서 구한 것은 무엇일까요? 다윗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1-3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2). 다윗은 이 고통을 멈춰달라고 말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라고 말하거나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말했습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왜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이것은 은혜를 입은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습니다(4-5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4).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신실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8).

“(왜냐하면)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5). 5절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은 그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위대한 일들을 잊지 않고 하나하나 나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다윗은 이 땅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도 죽음을 앞두고 생명을 연장해주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8-19).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이 땅에서는 주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하며 후대에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은 사람처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믿는 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해서 그분을 경험하고 예배하기 위한 간구였습니다.

다윗은 이런 간구를 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토해내고 있습니다(6-7절). 하나님 앞에서 강한 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영육 간에 쇠약하다고 말하고 있고, 탄식하며 피곤하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근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졌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습니다. 자신의 상황, 감정, 생각을 숨김없이 하나님께 쏟아내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정직하게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다윗의 확신

8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은 좀 갑작스럽습니다. 이전까지 고통 속에 탄식하던 그가 돌연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어떤 성경학자는 다윗이 7절까지 써놓고 다른 사람이 덧붙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학자는 다윗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이후에 나머지를 기록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다윗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큰 확신 가운데 말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8-9).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10). 여기 2번 등장하는 “부끄러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 문화에서도 수치와 치욕을 죽기보다 부끄럽게 여겼는데, 다윗 시대의 고대 근동의 문화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공적으로 어떤 수치를 당하면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기고 있을 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에게 공의로운 심판(부끄러움)이 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3절에서 ‘다윗’이 심히 떨었다면 이제 10절에서는 ‘그의 대적들’이 떨게 됩니다. 또한 3절에서 이 고통이 ‘어느 때까지 계속되겠냐’고 물었는데, 이제 10절에서는 ‘갑자기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4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돌아오소서’라고 했던 단어가 동일하게 10절에서 ‘물러가리로다’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공의로 심판하시면 의인은 의인 대접을 받을 것이고, 악인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두 미래형의 말들입니다. 상황이 아직 해결된 것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리라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어려움을 당합니다. 짙은 어두움에 사로잡혀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영적인 침체, 낙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걱정, 고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전쟁에서 일시적인 패배자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오늘 시편 6편을 기록한 다윗은 시편 23편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시편 23편 4-6절을 시편 6편의 구절들과 비교해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23:4-6).

이것은 참 많이 다른 내용이지만 같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야도 놀라운 영적인 승리를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광야에서 죽기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나의 그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실하심에 의지하여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영광 돌릴 길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탄식이 아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편 6편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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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편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

유대인들은 매주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시편 6편 1-3절 말씀을 인용한다. 고난 속에서 용서와 회복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구조 분석

1-3절 회개

4-5절 간구

6-7절 탄식

8-10절 확신(반전)

[개정 개정]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강해

1-3절 회개

시편 기자는 주의 분노와 진노를 받고 있다.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고 있다.(1절) 시인은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한다. 저자의 고백을 통해 본다면 저자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그 죄 값을 받고 있다. 어떠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고백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고통이 하나님께로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떠나 생각하기 힘들다. 우리는 종종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해석은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 사실 자체보다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1절은 전형적인 히브리 시의 특징을 보여준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반복과 병행은 자신의 감정을 강조하려는 목적이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고 고쳐 달라고 간구한다.(2절) 저자는 병에 걸렸을 것이다. 구약에서 죄로 인한 징계는 종종 질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난자를 누구의 죄인지 토론하기도 했다.(요 9:2) 저자는 병의 원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았기에 영혼까지 떨린다고 고백한다.(3절) 그는 육신적 질병을 넘어 영혼의 고통까지 당하고 있다.

2절 역시 1절의 구조와 완전히 동일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성경에서 뼈는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또는 몸 전체를 버티게 하는 중심이 된다. 요셉의 유언에 의하면 뼈는 인간의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이다.

창세기 2장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여호수아 24장 32절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욥기 4장 14절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인용된 구절에 의하면 뼈는 사람의 전체를 지탱하게 하는 기본이며,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뼈는 곧 그 사람의 본질이자 전부이다.

4-5절 간구

간구가 이어진다. 첫 번째 간구는 ‘영혼’을 건져 달라는 것이며, ‘주의 사랑’으로 구원해 다라고 간구한다.(4절) 구원해 달라는 이유를 사망과 스올에서 주님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5절) 이러한 간구는 약간의 억지스러움이 느껴지지만, 솔직하고 정직한 기도다. 즉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나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기 위함인데 나를 죽이시면 어떻게 하나님을 뜻을 이룰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간구는 억지주장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뜻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스올은 망각의 장소이다. 스올에 빠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 철저히 타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며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진다. 욥기에서 스올은 변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욥기 7장 9절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6-7절 탄식

6-7절에서는 간구의 이유를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고백함으로 강화시킨다.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신다.(6절) 사실이 아닌 문학적 기법이며 과장법이다.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수사학적 서술이다. 얼마의 눈물을 흘려야 침상을 띄울 수 있을까? 그만큼 많은 양의 눈물을 흘린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탄식의 깊이 너무 깊다. 그의 슬픔은 헤아릴 수 없다.

7절에서는 근심으로 눈이 쇠하여졌고, 원수로 인해 어두워졌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근심하면 안력이 낮아져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욥기 17:7에서도 동일하게 고백한다. 쇠함과 어두움은 다른 표현, 같은 뜻이다. 근심과 대적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은 눈의 쇠함과 잘 어울린다. 우리도 내일이 암담할 때 ‘내일이 어둡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가. 현재 그는 큰 낙심 중에 있다.

8-10절 확신(반전)

8-10절까지는 반전이 일어난다. 본문 상으로만 보면 단지 몇 절만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지만, 실제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탄식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라고 소리친다. 마치 두 천사가 롯에 빨리 소돔에서 떠나라는 말과 같고, 계시록에서 천사들이 바벨론에서 떠나라는 말처럼 들린다. 선과 악은 공존할 수 없다. 서로 분리되고 떠나야 한다.

이러한 확신은 기도에서 온다.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잃어버린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 결국 찬송가 가사처럼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가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라고 고백하게 된다. 9절에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다고 선언한다. 이런 담대함은 믿음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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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위한 단상] 시편 6편 1절 – 10절 철저한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3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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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 시편 6편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시이다.

2. 다윗은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받는 하나님의 심판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다(1-7절).

3. 회개 후에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자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임을 다윗은 확신한다(8-10절).

4. 심각한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은 늦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자비의 또다른 표현이다. 즉시 돌아서서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돌아가는 것이 범죄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다.

2020/12/26 – [메시지성경읽기/19 시편메시지성경읽기] – 구원을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 – 시편 6편, 메시지 성경 묵상 읽기

찬송가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찬337장.ppt

시편 6:1-10, 개역개정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철저한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은 다윗이 지은 시들 가운데,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지금 당하는 심판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주시길 간구하는 시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지금 현재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에 두려워 하고 몸과 영혼이 모두 떨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고 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윗은 징계로 아프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 부모님께 혼이 났지만, 그래도 돌아서서 부모의 사랑을 기대하며 엄마 아빠의 품에 안기는 것과 같은 장면입니다. 잘못했다고 영원히 자식을 버리거나 두고 두고 꾸짖는 부모는 없습니다. 잘못했다고 뉘우치면 부모는 그대로 다시 자식을 받아 줍니다.

그처럼,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서 자신을 이 고통 속에서 건지시고 구원해 주시길 간청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며 용서해 주시길 간구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이 철저하게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철저한 회개는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밤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그 눈물로 인해 눈이 짓물러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마치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와 간음한 후 낳은 아들이 죽을 것이라는 나단 선지자의 경고에, 금식하고 방에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던 다윗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이 철저한 회개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에 대한 용서를 간구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질 수 밖에 없지만, 죄를 회개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4장 8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라고 권면합니다. 범죄로 얼룩진 손을 깨끗이 하고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했던 두 마음을 성결하게 하여 오직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할 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도 가까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돌아 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시는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는 그 때, 본문의 8절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 9절 말씀처럼 기도를 받으시며 10절처럼 원수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오늘 이 새벽에, 내 마음에 여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죄의 모습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철저히 회개하고, 다윗처럼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했던 어제가 끝나고 오늘을 시작하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아가오니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리고 이 새벽에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사, 오늘 하루를 이끌어 주시고 책임져 주시며 보호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주기도

1. 죄의 모습이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는 마음 주옵소서. 가족 중에, 주변 사람들 중에도 범죄한 이들이 회개하게 하소서.

2. 우리 나라, 민족이 회개하게 하옵소서. 다시 주님께 정결한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3. 동성애 문화와 물질만능주의 문화,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악한 일들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겸손히 섬기는 이 땅 되게 하옵소서.

4. 우리 자녀들이 말씀 가운데 정결하게 자라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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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편_역경 가운데 드리는 기도

“역경 가운데 드리는 기도”(시 6:1-10)

시편 6편은 역경 가운데 드리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우리가 계획한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여러 책을 통하여 배운 규칙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전쟁과 같아서 항상 뜻하지 않는 변수가 발생하게 되고, 문제와 역경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 역경은 우리가 때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인하여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역경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를 느꼈을 때 과거의 믿음의 선진들은 어떤 방법으로 역경을 극복하였을까요? 성경을 읽을 때 구약시대나 신약시대, 그리고 성경기록시대 이후인 교회시대를 보아도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약속을 의지하여 인내하며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구약시대에 아주 위대한 믿음의 인물 가운데 한 분이었던 다윗의 시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을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의 핍박으로 인하여 여러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후에도 당시 군부의 실권자였던 그의 누이의 아들 요압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고, 그의 아들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윗 당시의 역사를 배경으로 쓴 그의 시들은 그 상황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였으며,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시편은 다윗이 어떤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 시를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편적으로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역경에서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였으며,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의 표제어에서도 이 시가 슬프고 무거운 분위기라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시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라고 하였는데, 이 표제을 보면 시의 저자가 다윗이며, 모든 청중들이 함께 부르도록 지은 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현악 스미닛’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여덟 번째’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현악에서 저음을 내는 악상기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의 표제 자체가 톤이 깔린 저음임으로 시의 분위기가 무겁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본문 6편의 주제는 「역경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는 다윗이 받았던 고통의 심각함에 대하여, 두 번째로는 이 상황에서의 다윗의 기도에 대해서, 세 번째로는 다윗의 확신과 하나님의 응답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다윗의 고통(1-3절)

다윗은 이 시에서 어떤 문제로 그에게 고통(苦痛)이 찾아왔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당하는 고통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攝理)」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다윗은 자신의 고통이 주님의 “견책”이나 “징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견책”이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법정적인 용어로 죄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말입니다. 그리고 “징계”는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 다윗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 그가 지금 당하는 고통은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책임을 화를 내면서 묻지 말고, 적절하게 바로잡으시고 가르쳐 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은 지금 자신이 당하는 역경의 이유가 죄(罪)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단순히 이유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으로, 혹시라도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역경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고 가르치려는 목적이 있다면 화를 내지 말고 너무 심하게 하지 말아 달라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의 저자인 다윗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상황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 표현에서 다윗은 “뼈가 떨린다”라든지, “영혼이 떨린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 “뼈”는 신체적이고 외적인 것으로, “영혼”은 내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둘 다 합하여 한 인격적인 존재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결합되어 한 인격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에서는 신체의 부위를 통하여 그 신체가 가지고 있는 기능을 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뼈는 몸 전체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뼈가 떨린다”는 것은 몸 전체가 지탱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영혼”은 그 “생명”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혼이 떨린다”는 생명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린다”는 표현은 다윗이 지금 극심한 고통으로 큰 두려움 가운데 있고 생명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다윗이 이 시에서 뼈가 떨리게 하고, 영혼을 떨리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건이 될 수도 있고, 압살롬이 모반을 일으켜 쫓기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큰 질병에 걸려 고통 가운데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을 현대적인 상황에 적용하면 육신의 질병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또는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사업상의 문제일 수도 있고, 자녀들의 문제로 인하여 곤경 가운데 있는 경우도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가 잘 아는 중국의 고사성어로 바꾸면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의 상황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사면초가의 상태가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본문 3절 하반 절에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한탄하였습니다. 이 말은 언제까지 이 고통스러운 상태가 계속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상황을 간섭해 주시지 않는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2. 다윗의 기도(4-7절)

다윗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일을 했습니까? 하나님께 엎드리어 기도했습니다. 본문 4-7절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본문 4-7절에서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직면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미 그가 당하고 있는 고통의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며, 언제 주님께서 그 존재를 나타내시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인지를 탄식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간절한 기도로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다윗이 “돌아와”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계시거나,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돌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돌아와 주셔서 그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개입해 주셔서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너무 힘들어서 말하기를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 역경을 감당하지 못하여 죽으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하면서 그 상황을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여기에 “곤핍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탈진하다” 또는 “피곤하다”는 뜻입니다. 그의 고통으로 인하여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어 밤마다 눈물로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울어야 그 눈물로 침대를 둥둥 뜨게 만들며, 깔고 자는 요를 적시게 될까요? 그래서 이 표현은 시적인 메타포(metaphor)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당하고 있는 고통으로 인하여 크게 고통스러워하고 눈물로 지새우는 밤이 많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그에게 임한 고통이 너무 심하여 모든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는데, 여기의 “눈이 쇠한다”라는 뜻은 히브리어 관용구인데 온 몸의 기력이 떨어져 간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은 “근심을 인하여”라고 하였고, 그 댓귀로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다윗의 이 표현은 이 세상에서 살 때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심이 많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면 기력이 떨어지고 실제로 눈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기도로 자기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우며, 그 상황이 긴박한지를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3. 다윗의 믿음과 하나님의 응답(8-10절)

다윗은 즉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 8-10절을 보십시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이 세 번째 연에서 지금까지의 톤과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윗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자들을 가리켜 “행악하는 자”라고 하였고, 이들은 자기에게서 다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시고,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의 시제를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라는 말과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라는 말을 서로 비교해 보십시오.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문법으로는 완료형과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으나, 영어식으로 바꾸면 현재완료형과 미래직설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고 계시기 때문에 조만간에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기도가 완전히 응답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리라는 강한 확신(確信)을 가지고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생명의 위협이나 파산상태에 놓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기도한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다윗은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문제로 인하여 뼈가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무서운 상태, 생명 자체가 위협을 받는 사면초가의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문제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의 고통이 너무 심하여 밤마다 눈물로 그의 침대를 띄워 그 요가 젖을 정도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부분적이지만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성도의 생명선이요 희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마인드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윗과 같이 하나님 성전에 나아서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 다음 주일부터 우리 교회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여러분 개인의 생존문제가 달린 문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의 문제이거나 경제적인 문제이거나, 자녀들의 문제이거나 진로의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생존문제와 아이들의 영혼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달려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세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지은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 “당신과 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가?’가 아니라 ‘내가 진실로 기도하느냐 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능력을 맡겨주셨는가에 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기도는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한다면 그 모든 답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 질병을 치유해 주시기도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물론 때때로 기도하여도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도 낙심하지 말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한동대학교 교수로 있는 한홍 목사님이 쓰신 「거인들의 발자국」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위기관리능력은 기도하는 무릎일 것이다. 당신도 위기가 닥칠 때 그 분 앞에 엎드려 성실하게 기도하면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지혜와 명철과 힘과 지원을 공급받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살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하게 기도하는 도리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경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항상 좋도로록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존 뉴톤(John Newton) 목사님은 쓴 「영적 도움을 위하여」라는 책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고통도 없고 문제도 없다면 완전한 천국을 소망하는 욕망을 상실하게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고통을 주신다. 그리고 그 고통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살 때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당할 때 고통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수시로 다가오는 고통을 부정적으로 보지 마십시오. 대로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치료하시기 위한 약으로 사용하시기도 하고, 더 크고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믿음을 훈련하시는 기회로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사에서 고통과 시험이나 역경을 당할 때 그것은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고 다윗처럼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보여주시며 모든 문제들을 풀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도 자라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아무리 큰 역경이 있다고 할지라도 다윗처럼 솔직하게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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