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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4 / 맥추감사주일예배 / 골로새서 3:15-17
[ 제자광성교회 ] 박한수 위임목사님
제1성전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일산로 462 (정발산동 1140번지)
제2성전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하늘마을1로 72 (베스트요양원 옆)
전화번호 : 031-975-4004, FAX : 070-8277-2525
헌금계좌 : 301-0170-1798-71 (농협, 제자광성교회)
홈페이지 : http://www.jejaks.org
※ 새가족 등록을 원하는 분은 사전에 교회에 연락하시고 방문하셔야
예배에 참여하고,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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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세대후원 방법 ]1. 국내용 계좌 : 301-0277-1597-91 (농협,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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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나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제 목 : 나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시편 50편 22~23절 말씀.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 …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10/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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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감사해야 하는가? (2021-07-04 맥추감사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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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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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육하원칙] 누구에게, 왜 감사해야 하는가? –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이동 새몸건강학교/새몸다이어트 … [감사의 육하원칙] 누구에게, 왜 감사해야 하는가? … 상황과 환경에 따라 감사한다. … 잘 이해되지 않는 구절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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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야 하는 이유 (살전 5:18) – 올랜도 새길교회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항상 선을 택하고 항상 기도하고 매사에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이처럼 놀라운 복을 체험하기를 …
Source: www.saegilchurch.net
Date Published: 5/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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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감사해야 하는가? / 골 3:15-17, 시 103:1-2
단칸방에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사는 그 사람이 행복하다 … 그러면, 우리가 왜 감사해야 하는가?
Source: bible0415.blogspot.com
Date Published: 2/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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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감사해야 하는가? —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왜 나는 감사해야 하는가? “세상은 내 덕에 사노니”—월트 디즈니가 각색한 「피노키오」의 한 등장 인물은 그렇게 노래했다. 오늘날 살고 있는 많은 청소년이 받아들인 …
Source: wol.jw.org
Date Published: 4/4/2021
View: 8064
[정인수 목사 칼럼]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 – 기독일보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명한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해야 하는가? 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 …
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1/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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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감사해야 하는가? – 선교교육 연구원(IMER)
나는 지금까지 책 서문에 한결같이 제일 먼저 후원자들께 감사의 표현을 하였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허락하심이지만 그 하나님 …
Source: juanlee.tistory.com
Date Published: 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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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왜 감사해야 하나? (시 50:23) – 기멀전
부엌에서 감사하면 하나님이 요리를 잘되게 하시고, 집안에서 감사하면 부모 자식들이 잘되게 하시고, 장사터에서 감사하면 장사 잘되게 해주시는 것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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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왜 감사해야 하는가
- Author: 제자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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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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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육하원칙] 누구에게, 왜 감사해야 하는가?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더불어함께교회 성도 두 분의
‘인삼과 고구마’라는 연극을 감상했다.
인삼밭에 함께 심겨 있어
자신이 인삼인 줄 알고 있는 고구마!
그녀는 항상 행복하고 감사가 넘쳤다.
인삼도 아니면서 행복해하는 고구마를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던 인삼은
그녀가 만일 자신이 고구마라는 걸 알게 되면
감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고구마에게 그녀가 사실은 인삼이 아니라 고구마라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그녀는 자신이 고구마라는 사실에
여전히 감사하고 기뻐한다.
고구마가 행복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감사는
나의 존재와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행복은 얼마나 감사하는가에 달려 있다.
나는 현재 감사하고 있는가?
감사해야 하는 이유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미국에 살면 추수감사절이 큰 명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이 Thanksgiving Day 인데 대개 일요일까지 쉽니다. 지금은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처럼 추수감사절도 세속화되었지만 원래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는 종교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인간의 큰 약점의 하나는 받은 은혜를 잘 잊는 것입니다. 잊을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푼 자에게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형성된 서구 사회에서 생활해 보면 ‘감사 문화’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극히 작은 것을 놓고도 감사하다는 말이 그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물 한 잔을 남편에게 가져다 주어도 생큐(Thank you) 라고 하고 심지어 내 돈 주고 물건을 사면서도 반드시 ‘생큐’ 라고 말합니다. 내가 물건을 팔아 주었으니까 당연히 내가 감사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대방의 서비스를 받았다고 보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이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기독교는 감사 문화를 일으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대속의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은혜의 사례들을 줄줄이 열거하고 잊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 문화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출되었음에도 하나님의 은택을 자주 망각하고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택을 잊지 말고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거듭해서 말했습니다(참조. 시편 103-107, 136편).
우리들은 과거의 구원도 늘 마음에 담아 두고 감사해야 하지만 오늘 현재 받고 있는 평범하고 작은 은혜까지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광야 세대의 가장 명백한 잘못이 있다면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날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증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많은 거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사십 년간 아무도 광야에서 굶어 죽은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날마다 감사할 수 있는 은혜의 만나들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가 조악한 음식이라고 싫어하였습니다. 사실은 만나가 조악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마음이 조악하였습니다. 만나는 광야 생활에서 필요한 최고의 건강 식품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기적의 음식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어떤 세대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날마다 먹고 40년을 산 자들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광야 세대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날마다 불평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건강보다 입맛이 더 중요하였고 감사보다는 불평이 더 몸에 배여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받는 일용할 양식은 내 입맛에 맞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신령한 손으로 빚어낸 양식이라면 감사해야 합니다. ‘만나’는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의 표시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자는 큰 것에도 당연히 감사합니다. 그런데 큰 것만 감사하면 감사의 소재가 부족합니다. 항상 감사하려면 날마다 내리는 만나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를 쥐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작은 만나를 놓고 깊이 감사하면 우리들이 주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기뻐하십니다. 감사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불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은 은혜들을 업신여기고 감사하지 않으면 불행을 자초합니다. 만나를 감사할 수 없었던 광야 세대가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만나가 조악하다고 불평하며 감사하지 않던 광야 백성들은 모두 조악한 땅에서 조악한 마음을 품고 조악하게 죽었습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것이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고서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덧붙였습니다. 본 절의 “이것”은 단수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일 한 가지만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볼 때에 앞 부분에서 언급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도(살전 5:16-17) 모두 하나님의 뜻에 포함됩니다. 기쁨과 기도가 모든 성도의 특징이어야 하듯이 감사도 항상 넘쳐야 합니다(골 2:7; 3:15, 17; 엡 5:4, 20). 감사하는 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선한 뜻이라면 우리들이 일년에 한번씩 추수감사절을 절기로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의 의미를 잘 알고 날마다 감사하는 삶을 실천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무엇을 놓고 항상 감사해야 할까요? 우리는 자기 일이 잘 될 때에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의 영역과 대상이 제한됩니다. 나에게 크고 좋은 일이 항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항상 집안에 경사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질병에서 낫는 것도 아니고 항상 자식들이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듯이 좋은 일에도 흉한 일이 따르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크고 좋은 일이라고 해도 대부분 일생 동안 손가락으로 헤라릴 정도입니다. 내 일이 잘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사의 일단계 수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비록 내 일이 잘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이 잘 될 때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감사하는 일에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닮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잣대로 본다면 예수님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바울도 자기 일이 잘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당하셨고 갖은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십자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바울은 너무도 심한 고난을 당하여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시려고 사형선고를 내린 것 같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고후 1:8-9). 그럼에도 그는 감사를 가장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성경적인 감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신구약에 나오는 감사의 내용은 몇 가지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시편 136편에는 감사의 소재가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등장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최고성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신 분입니다(2-3절). 둘째,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입니다(4-9절). 셋째, 출애굽의 구원입니다(10-16절). 넷째, 가나안 정복의 승리입니다(17-22절). 다섯째, 최근의 역경과 위험에서 받은 구출입니다(23-24절). 여섯째, 만민에게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입니다(25-26절)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본 시에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후렴이 매 절마다 붙어 나옵니다. 우리들의 시점에서 보면 본 시의 감사 내용은 모두 과거지사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백성에게 변함 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의 성품이 하나님의 모든 선한 구원 행위의 밑바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같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신뢰하며 찬양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평소에 교리적인 내용의 감사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비의 성품에 대한 교리적 내용이 감사의 주된 주제로 나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도 감사의 여러 내용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하고 침체될 수 밖에 없는 거듭된 곤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자주 언급한 감사의 내용은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다른 성도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교인들의 믿음이 세상에 널리 전파되는 것을 감사하였고(롬 1:8), 고린도교회는 구원의 지식과 풍족한 은사와 그들의 재림 신앙을 감사했습니다(고전 1:4-7). 에베소교회와 골로새교회에 대해서는 그들의 믿음과 성도들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엡 1:15-16; 골 1:3-4). 빌립보교회에 대해서도 바울은 항상 감사하였는데 그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했기 때문이었습니다(빌 1:3-5). 데살로니가교회는 환난 가운데서 복음을 받고 우상을 버렸으며 믿음과 사랑이 자라서 믿는 자의 본이 되었으므로 감사하였습니다(살전 1:2-10; 살후 1:3-4).
바울은 항상 다른 성도들의 영적 삶에 대해서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의 감사 기도 중에는 우리들의 경우처럼 먹고 사는 문제와 자기 신변 위주로 일이 잘 되는 것에 대한 감사를 언급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감사거리가 못되어서가 아니라 감사의 우선 순위가 아님을 시사합니다. 바울의 주된 감사 내용은 자신의 복지도 아니고 성도들의 생활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영적 안녕이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감사의 첫 순위를 성경의 실례에 따라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에 대한 교리적인 내용을 앞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의 진리를 잘 깨달아야 하고 복음으로 거듭난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과 자세가 복음에 의해 변화되어야 하고 삶의 방식에 있어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습관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무엇이 정말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고 어떤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인지를 반성하고 복음을 실생활에서 적용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감사 기도에서 자신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빌 1:3; 골 1:3; 살전 1:2)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성도로 하여금 나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의식 중에 끼치는 선한 영향입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 주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감사하는 자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극히 작은 것으로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병이어를 손에 잡고 하늘을 향해 감사하셨듯이, 나의 삶에서 거두어들인 은혜의 조각들을 나의 오병이어로 삼고 하늘에 계신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해 보십시오. 주님의 축도로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양식으로 불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행하는 모든 선행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갚으십니다. 주님은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상을 잃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10:42). 어떤 상일까요?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하나님께서 잘 했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 상은 곧 ‘하나님의 감사’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감사하신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감사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감사를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감사를 하신단 말일까요? 하나님은 어떤 봉사를 받으셔도 감사할 의무가 없습니다. 종이 마땅히 주인을 섬긴 것인데 주인이 감사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을 종 이상으로 대하십니다. 자신을 종의 위치에 두는 것은 우리 편의 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종이 아닌 자식으로 대하십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부모는 자녀들의 효성에 쉽게 감동을 받습니다.
어느 날 병든 종의 치유를 원했던 한 백부장이 예수님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직접 오실 필요가 없으니 그냥 명령만 하시면 자기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전달받은 예수님은 크게 놀라워하시면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 7: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에 큰 감동을 받으시고 병든 종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귀신 들린 딸을 둔 한 가나안 여자의 믿음도 예수님을 놀라게 하였습니다(마 15:28). 그녀는 자신이 이방인이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막 15:27-28). 주님은 이 가나안 여자의 간절한 믿음에 크게 감복되셨습니다. 주님은 큰 감동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해 주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지극히 부족하고 작은 존재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우리가 항상 선을 택하고 항상 기도하고 매사에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이처럼 놀라운 복을 체험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감사하면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나에게 감사하는 사람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편해지며 가까워집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랑의 관계에 필요한 요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께 감동을 안겨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크고 작은 여러 일을 날마다 감사하고 감격해 보십시오. 감사를 모르는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깊지 않고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다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감사의 마음이 넘치지 않는 자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는 삶을 살면 행복합니다. 주님은 항상 선을 택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며 기뻐하는 삶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고난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가장 행복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인생살이의 고통이 있고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가 있으며 가슴을 아프게 하는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않는 감사의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위해 나아갑니까? 우리는 물론 하늘 아버지께 우리들의 필요를 알리고 그분의 돌보심을 의존해야 합니다. 그러나 효자는 자신의 필요보다 부모를 더 생각하는 법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행하는 희생과 사랑을 자식이 깨닫고 언급할 때에 부모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때에 부모는 자식을 대견히 여기고 자식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느끼십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구원을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하나님의 여러 은혜들을 찬양하면 주께서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깊이 감사하십니다. 우리들의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 하나님의 감사까지 받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주님과의 관계에서 감사와 기도와 선행의 삶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행복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우리들은 주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돌이켜 보며 깊이 감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하루 동안에 그다지 크고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평범한 하루 속에서 극히 작은 감사의 소재를 놓고 하나님께 감사해 보십시오. 그것은 경건과 겸비의 행위입니다.
작은 감사로 주님을 쉽게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도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심히 부족하여도 주님께 감동을 일으켜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기뻐하십시오. 나의 감사로 인해서 주님의 하루가 감격의 하루가 되게 하십시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주님은 쉽게 감동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로부터 감사의 추수를 거두시고 기뻐하시면서 우리들에게 “생큐”(Thank you!)의 상을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추수감사절이 매해 한 번의 행사로 끝나게 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하나님의 감사’를 받는 추수의 날이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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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 코리아 위클리
11.26.14
왜 나는 감사해야 하는가? —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청소년은 묻는다 ···
왜 나는 감사해야 하는가?
“세상은 내 덕에 사노니”—월트 디즈니가 각색한 「피노키오」의 한 등장 인물은 그렇게 노래했다. 오늘날 살고 있는 많은 청소년이 받아들인 생활 철학이 바로 그런 것 같다. 그러한 청소년은 어느 누구에게도—부모, 사회 또는 심지어 하나님에게조차도—특별히 은혜를 입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실시된, 16세에서 22세까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그들 대다수는 자기 생활을 “가족, 국가 또는 종교에 대한 존중”보다도 우선적으로 자기가 좋을 대로 자유스럽게 영위해 간다고 한다. 당신은 그런 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의 배경과 장래 전망을 볼 때 자신의 인생의 몫에 대해 감사해야 할 뚜렷한 이유가 없다고 여길지 모른다. 당신은 부모가 한분밖에 없거나 심지어 부모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수많은 청소년 중 하나일지 모른다. 또한 학교에서는 무관심한 교사에게서 배웠을지도 모른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실업자로 직업 경력을 시작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무정한 세상에서,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이고 사랑도 못받고 배운 것도 없고 마땅한 직업도 없다고 느끼는 청소년이 있는 것은 놀랄 일이 못된다. 그러므로 무엇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음
부모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17세기에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에게 이렇게 외치게 한 바 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는 뱀의 독니보다도 훨씬 날카롭도다!”
공정히 말해서, 오늘날 많은 청소년이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들이긴 하지만 그 잘못은 종종 그 부모 탓이라는 데 별 이견이 없다. 오래 전에 한 현인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하리라.”—잠언 29:21.
이 말은 제멋대로 자란 아이들에게 적합하다. 그런 아이들은, ‘세상은 내 덕에 살아간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왜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다행히도, 모든 부모가 자녀를 제멋대로 키우는 것이 아니며, 또 모든 자녀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녀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양친이 있는 가정에서 양육받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그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물론 완전한 부모는 없다. 그러나, 그 점이 부모가 베풀어 준 은혜를 모른 체 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당신을 낳은 이래 부모가 바친 시간과 돈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아마 낳아 주도록 요청하지 않았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렇기는 하지만, 당신은 분명 살아 존재하고 있으며, 누군가가 여러 해 동안 당신을 보살펴야만 했었다. 수많은 자녀를 유기하는 부모들이 많으며, 그 모두가 입양되지도 않는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을 인자하게도 부양해 왔으며, 양육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모에게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설령 양부모에 의해 양육받았다 하더라도 감사해야 한다. 당신을 낳은 책임이 없기 때문에 특히 양부모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은 당신을 기를 권리를 얻기 위해 돈을 상당히 지불했을지 모른다. 또는 당신의 거주지에 따라 그 나라가 당신을 양육하도록 양부모에게 돈을 주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돈으로는 사랑과 보살핌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홀어버이 가정에서 자라났을 수도 있다. 현재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은 혼자 힘으로 자기를 키워준 어머니에 대해 그가 어렸을 적에 보였던 태도를 돌이켜 본다. 그는 이렇게 쓴다. “청소년은 자기 부모가 완벽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어요. 내가 청소년이었을 적에 그 점이 사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서야 내가 어머니에게 합당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깨달았지요. 이렇게 자문한 것은 크게 도움이 되었어요. 어머니는 나쁜 사람인가?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참으로 좋은 분임을 확신하였어요. 어머니는 항상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신 분이었어요. 그러나, 내가 불완전한 것처럼 어머니도 불완전하였지요. 그래서 그 점을 파악하기 전에 행한 철없는 행동을 매우 후회하고 있읍니다.”
감사를 받을 만한 다른 사람들
인생의 중대한 시점에 있는 청소년 중에는 그럴 의무가 없는 누군가로부터 도움과 지침을 받은 청소년이 참으로 많다! 친척, 학교 교사 또는 그리스도인 회중 내의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도움을 주었을지 모른다.
고대 잠언이 말한 바처럼, “때에 맞은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잠언 15:23) 적시에 주어지는 좋은 충고는 비극적인 결과를 방지해 줄 수 있다. (사무엘 상 25:33) 분별있고 경험있는 여자는 젊은 여자에게 귀중한 지침을 줄 수 있다고 성서는 알려 준다. (디도 2:3-5) 특히, 그리스도인 회중의 장로는 청소년이 함정을 피하고 인생의 훌륭한 목표를 추구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디모데 후 2:20-22 참조.) 확실히, 한마디의 지침은 청소년의 인생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시기 적절한 교훈으로부터 유익을 얻은 일이 기억나는가? 그렇다면, 감사를 나타냈는지도 기억하는가?
프랑스의 젊은 그리스도인 여성인 리디는 16세 때 겪었던 어떤 위기를 돌이켜 본다.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이 된 후에, 리디는 학교 공부에 몰두함에 따라 그리스도인 활동 및 집회에 대한 관심이 식어져 버렸다. 그래서 어느날, ‘증인’의 집회와 전파 사업에 더 이상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의 부모는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이어, 세명의 회중 장로가 리디와 이야기하자고 했다. 리디는 그들이 ‘자기를 성경으로 몰아세워서 나가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들 줄로 알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장로들은 리디의 불평거리를 잘 들었으며 친절한 이해심을 보여 주었고 친 형제처럼 도움을 주었다. 리디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정말 놀랐읍니다! 그 친절한 태도에 감격하고 말았어요. 그 사랑에 넘친 도움 덕분에 나는 제정신을 차렸읍니다.” 리디는 지금 전 시간 그리스도인 봉사자로서 봉사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감사함
의심의 여지 없이, 요즈음 많은 청소년이 나타내는 가장 나쁜 배은 망덕한 태도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 중 거의가 하나님보다 물질적인 것을 우선으로 한다.
다행히도, 세계 도처에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를 깨닫는 청소년이 많다. 젊은 미셸은 프랑스 코르시카섬의 외딴 작은 마을에서 ‘증인’인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깨어라!」 통신원이 미셸에게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이유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라고 요청하자, 그는 24가지를 열거했다. 먼저 생명의 선물과, 그 생명을 유지하고 즐기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시작한 다음, 생각에 잠기더니—믿는 어머니 그리고 자기 가족을 도우러 기꺼이 장거리 여행을 하는 영적 형제들을 비롯하여—자신이 누리는 영적 축복들을 적어 내려갔다.
미셸처럼 수많은 청소년이 “살아 계신 하나님”, 곧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사도 14:15-17; 17:24-28) 이러한 청소년에게는, 동배의 세상 청소년이 나타내는 배은 망덕이란, 우리가 현 악한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날”에 살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에 불과하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이것을 알아두시오. 마지막 날에 어려운 때가 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과장하고 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II 디모데 3:1, 2, 새번역.
수십만명의 젊은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이제 곧 올 의로운 “새 땅”에서의 찬란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베드로 후 3:9, 13) 한편 그들 중 대다수는 다른 사람에게 이 웅대한 희망에 관해 말해 주는 데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바치므로 그 감사함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육적 가족이 그 믿음에 참여해 주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전세계적인 형제들의 영적 가족의 온화함을 누리고 있다.—마가 10:29, 30.
그러므로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부모이든, 담당 교사이든, 교훈을 주는 경험많은 친구들이든, 특히 “소망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이든 간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마 15:13; 골로새 3:15, 새번역.
[20면 삽입]“이렇게 자문한 것은 크게 도움이 되었어요. 어머니는 나쁜 사람인가?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참으로 좋은 분임을 확신하였어요”
[21면 삽화]자녀들도 간단한 방법으로 감사를 나타낼 수 있다
[정인수 목사 칼럼]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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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명한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해야 하는가?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예수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그 분 안에는 구원이 있다. 평강이 있다. 은혜가 있고 말씀이 있다. 죄 사함이 있다. 기쁨과 삶의 의미도 있다. 치유가 있고 자유함이 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 없다 할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다.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았는가?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별로 없다.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았는가?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가?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온다.두 번째,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왜 그런가?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라 보내 주시기 때문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잔소리 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 내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줄께.” 순종만 하면 된다 라고 말씀하신다.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감사합니까?” “할 수 있어. 내가 네게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이다.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믿을 수 있다. 요즘은 누구나 앞길이 막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하는가?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니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압니다. 감사합니다.”감사하는 것만큼 믿게 된다.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다. 천만불짜리 멘선 하우스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작은 소형 아파트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그러므로 의도적으로 감사해야 한다. 의지적으로 감사해야 한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 하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을 감사하면,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던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날보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감사해야 돼.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돼.’ 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좋아진다. 우리가 행복해진다. 우리가 강해진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다.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워 감사를 상실한 조건이 가득한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전히 감사의 인생을 살아가기로 결단해야 한다.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기다리는 아름다운 명령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멋있는 감사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신다!
+ 왜 감사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까지 선교 교육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냈다. 책 서문에 감사의 인사를 넣는 것이 필수다. 나는 지금까지 책 서문에 한결같이 제일 먼저 후원자들께 감사의 표현을 하였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허락하심이지만 그 하나님의 도우심은 후원자들을 통한 도우심이다. 후원자들로 인해 내가 선교사로 지금까지 살고 있으며 사역을 할 뿐 아니라 그분들 때문에 책을 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후원자들이 내게 책을 내라고 직접적인 요청을 하지 않았지만 그분들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책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의 첫 번째 감사의 대상이다. 이는 앞으로 쭉 그럴 것이다. 그분들이 나의 선교사로서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기독교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유명하고 훌륭한 사람이지만 바울이 있기까지는 바나바와 수많은 동역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람들은 바울만 기억하지 바나바와 그의 동역자들은 잘 기억하지 않는다. 내가 선교사로 살아 갈 수 있는 것과 선교사로서의 사역의 열매도 마찬가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동역자(후원자)들의 것인데 사람들은 선교사를 기억하지 그 뒤에서 후원하는 동역자들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동역자들이 나의 모든 사역의 원동력이요, 사역의 결과와 열매를 얻어야 할 주인공으로 여기고 산다. 실제로 동역자들이 없었다면 나는 책을 낼 수도,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의 동역자들이 내게 참으로 귀하다. 아니 내게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귀하다.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그분들의 기도와 작은 후원 하나하나가 하나님 나라에 꼭 필요한 중심이며 핵심이다. 우리는 이 사실이 선교사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떤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음식을 놓고 기도하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지만 그 음식이 상에 차려질 때까지 하나님이 사용하신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분들께 감사하는(그분들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 누구도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없다. 조금이라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나를 도운 사람들의 은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안정적으로 산다거나, 혹은 좀 더 돈을 번다거나, 혹은 건강하다거나, 혹은 사역을 할 수 있다거나, 혹은 아름다운 가정을 가졌다거나, 좋은 친구를 가졌다거나, 좋은 집을 가졌다거나,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 어떤 것이라도 나의 노력만으로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물론 거듭 강조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반대로 혹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다면 그것 또한 은혜로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지금 숨 쉬고 살 수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보다는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렇게 느낄 뿐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 더 잘 나가는 사람, 더 능력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들도 내가 겪는 어려움이나 고난을 다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논리가 아니라 사실이다. 모든 인간은 고난과 고통과 자괴감을 가지고 산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에 대해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것이다. 비교할 필요도 없고, 잘 낫다고 우쭐댈 필요도 없으며, 못 낫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모두가 연약한 중에 서로 위로하며, 도우며, 사랑하며 사는 것일 뿐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나눌 때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되며, 자신이 좀 더 가진 것을 나눌 때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원리이다. 오늘도 주님께 감사하고 내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추수감사절] 왜 감사해야 하나? (시 50:23)
왜 감사해야 하나?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왜 감사해야 되느냐’그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인간은 타락한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천성 중에 두드러진 성품이 불평하는 것입니다. 불평은 안가르켜 줘도 어릴 때부터 잘 압니다. 좀처럼 감사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불평은 그 원인이 마귀에게 있습니다. 마귀는 불평의 아비입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평을 갖고 반역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의 역사는 불평과 원망이었습니다. 계속 불평하고 계속 원망하고 결국에 하나님께 버림받을 정도까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살펴보아도 사실 불평하는 때가 감사할 때보다 많지 않아요? 훨씬 불평하는 때가 많습니다. 불평은 썩은 음식찌꺼기와 같아서 파리 떼같이 귀신들을 불러들입니다. 왜 우리의 삶에 감사가 중요한지 우리는 알고 힘써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첫째로,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는데 불평하는 자식이나 부하를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어느 부모도 있는 힘을 다해서 자식을 돌보았는데 항상 어머니, 아버지가 잘못 해준다고 불평과 원망을 하면은 부모의 마음속에 불쾌해지고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도 부하가 늘 상사를 뒤에서 욕하고 불평하면 그 소리를 들은 상사가 마음이 즐겁고 평안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웃는 얼굴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부모를 좋아하고 늘 방실방실 웃는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즐겁고 쾌활하고 명랑한 부하를 거느린 상사는 마음이 즐겁고 그 부하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보통 20대 이전의 얼굴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40대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살면서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 얼굴 모습이 변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버마 선교사 저드슨은 못생긴 편에 속했지만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기쁨의 얼굴’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저드슨은 믿음의 사람으로 늘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마음은 비록 얼굴의 이목구비는 잘생기지 못했을지라도 환하게 기쁨을 소유한 얼굴을 만들어 주변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었습니다. 누구든지 저드슨 선교사를 만나면 즐거워지고 평안해지고 명랑해졌습니다. 그 얼굴의 외모는 못생겼지만 마음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으니까 얼굴에 환하게 늘 빛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활 하면서 불평하는 자식이나 부하를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항상 웃는 얼굴로 감사하는 자식이나 부하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기쁨과 평안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도 늘 우는 얼굴 찡그린 얼굴과 불평과 탄식하는 얼굴을 가지고 나오면 하나님이 고개를 돌리실 것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닌 세계 60억의 인구를 돌보는 하나님이 60억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면 어떻게 감당을 하시겠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방실방실 웃는 자식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찬양하고 나오는 자를 하나님 기뻐하시고 품에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와 찬송이 있으면 얼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항상 불평과 원망만 있지 감사는 없는 것입니다. 대설교가 크리소스톰은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한 죄라고 말한 것입니다. 톨스토이도 감사하는 사람은 젊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늘 원망, 불평하면 얼굴이 찡그려져서 늙어지지만은 감사하는 사람은 젊은 얼굴이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짐승의 제사보다 감사의 제사를 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항상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짐승의 제사보다도 당신의 백성들이 감사로 제사 드리는 것을 더 기뻐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69편 30절로 31절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야훼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50편 14절로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감동하시는지 환난 날에 하나님이 친히 건지고 영화롭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으니 하나님이 감사하는 자를 얼마나 기쁘게 생각하시는지를 이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하므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며 찬미로 그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성소의 문에 들어가며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겠습니까? 옷을 단장해야 들어가겠습니까? 얼굴에 예쁜 화장을 해야 들어가겠습니까? 코를 높여야 됩니까? 눈썹을 새로 그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외모 형상이 어떠하든지 감사를 하면 하나님 성소에 들어갈 문이 쫙 열리고 찬미로 나아가면 그 보좌 앞으로 이끌어 들려지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 3절로 4절에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 할 찌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면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과 탄식하면 하나님이 그 연기를 맡기 싫어하시기 때문에 하늘 문을 닫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감사하므로 하늘 문이 열리고 찬미하면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귀는 감사하는 자에게 기울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손은 찬미하는 자를 붙잡아 주려고 내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미가 우리 신앙생활에 절대적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는 감사할 줄 알아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찬미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역사적으로 교회에 큰 부흥이 다가왔을 때 찬미가 힘차게 불러졌습니다. 웨일스에 부흥이 있을 때 웨일스교회는 찬양으로 뒤덮여진 것입니다. 미국에 부흥이 크게 일어날 때마다 찬양의 부흥이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보혈을 찬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으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하지 않고 냉랭한 교회, 찬미하지 않는 냉랭한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와 찬양의 향기를 좋아하지 원망과 불평의 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향기로운 감사의 제사를 드리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밀림의 성자’로 불리는 슈바이처는 임종을 앞두고 불란서 친구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자네가 이 편지의 회신을 보내기 전에 아마도 난 죽을 것 같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게나.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축복받은 자라고 생각하네.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60여 년 간이나 할 수 있었고, 오늘 90세의 노구를 이끄는 이 순간까지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 때문이었다고 확신하네 나는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다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죽는 순간에도 친구에게 편지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편지인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생을 마치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평화로운 상태에서 자신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사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찬양을 드리고 나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감사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둘째로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복을 주십니다.
성경에는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 조차 빼앗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먼 여행을 가면서 종들을 불러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사람에게는 한 달란트 주어서 장사하게 한 것입니다. 먼 훗날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를 하는데 다섯 달란트 사람은 기쁨이 충만해서 “다섯 달란트로 열심히 일해서 열 달란트를 만들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은혜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이 주신 두 달란트로 열심히 일해서 네 달란트로 만들었습니다. 또 역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적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일을 맡으라”고 한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얼굴이 삐죽하게 와서 한 달란트를 수건에 싼채로 펼쳐놓고 하는 말이 “주인님, 주인께서 주신 한 달란트를 나는 땅에 파묻어 놓았다가 그대로 파헤쳐 가지고 왔으니 받으십시오.” 주인이 진노하셨습니다. “차라리 한 달란트를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증식하게 하지 그대로 가지고 오다니 이 게으르고 악한 종아!” 밖에 쫓겨 나가서 이를 갈고 슬퍼하라고 말하시고 그 한 달란트를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하신 말씀이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감사에 대한 큰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속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헤아려 생각하고 감사하면 더욱 감사할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없는 것을 바라보고 불평과 원망하면 있는것 조차 하나님이 빼앗아 버리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이너스의 인생은 더 마이너스가 되고 플러스 인생은 더 플러스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 감사할 것을 찾으면 많이 찾을 수 있고 불평할 것을 찾으면 많이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면을 택해서 감사할 것을 들어서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언제나 있는 것을 찾아야 되고 없는 것을 찾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큰 독에 물이 반쯤 가득한 것을 보고 한 사람은 “할렐루야! 물이 반쯤 가득하구나!” 다른 사람은 또 고개를 설레설레 하면서 “아이고 물이 반 쯤 텅 비었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독에 물이 반이 있는데 한 사람은 가득한 것을 보고 한 사람은 반 빈 것을 본 것 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이 은총을 주신 것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없는 것을 바라보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로 없는 것을 가지고서 원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줍니다. 감사하는 자에게는 더 감사하게 만들고 찬양하는 자에게는 더 찬양하게 만들지만 원망 불평하는 자에게는 주는 것도 다 빼앗았습니다. 스펄천이 말한 것처럼 촛불을 가지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가지고 감사하면 달을 주시고 달을 보고 감사하면 태양을 주신다고 말하고 태양을 보고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는 자꾸 감사할 것을 더 많이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자꾸 더 원망과 불평할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 받았지만 결국 못 들어 가고 광야에 들어가서 40년 방황하다가 첫 세대가 다 죽은 것은 원망과 불평입니다. 하나님이 광야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기적을 베풀었습니까? 만나를 허락해 주고 바위에서 물이 나오고 메추라기가 오고 신발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고 병든 자가 다 고침을 주는 놀라운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하지 아니하고 항상 길이 험하다. 잠자리가 좋지 않다. 음식이 박하다. 괴롭다. 여행하기가 고통 스럽다.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나중에 버림을 당코 만 것 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분 우리에게 감사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큰 유익이요, 축복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란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도 보면 예수님이 길을 가는데 문둥이 열 사람이 고함을 쳤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그래,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는 동안 보니까 문둥병이 나았어요. 모두다 감사를 해야 될 것인데 그중에 아홉 사람은 당연지사로 생각하고 그냥 가는데 이방인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고함을 치고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며 되돌아오는 길을 뛰어가서 예수님께 무릎을 꿇어 “주님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니까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열사람이 나았는데 아홉 사람은 다 어디가고 이방인인 네가 와서 감사하느냐?”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께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여러분 나병이 걸리면 손가락이 잘라지고 코가 문드러지고 발가락이 잘라지지 않습니까? 문둥이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감사하니까 손가락도 도로 생겨나고 코도 도로 생겨나고 발도 도로 생겨나서 완전히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치료받는 것하고 구원 받는 것은 틀립니다. 치료는 있는 그대로 치료받지만 구원을 받은 것은 원상복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문둥이는 떠나갔지만 잘린 손가락 문드러진 코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은 이 사마리아인은 감사하니까 하나님께서 원상복구를 해서 아름다운 신체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감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가져오는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의 미시간 호수에서 대형 여객선이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마침 주변에 있던 대학생들이 승객들의 구조에 나섰습니다. 그 중에 에드워드 스펜서라는 학생이 침몰해 가는 배에서 17명을 구조하곤 지쳐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간 것입니다. 가면서도 그는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의 무리한 구조 활동으로 병을 얻게 되어 에드워드 스펜서는 이후 7년간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신문 기자의 방문을 받고 그 날의 소감을 질문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날 밤에 제가 구출한 사람은 17명인데 나에게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한 명의 소녀 뿐이었습니다. 이 소녀는 7년 동안 크리스마스가 되면 감사의 카드를 보내왔습니다.” 보십시오. 17명을 목숨을 바쳐서 물에서 건져냈는데 다 당연지사로 지나가 버리고 소녀 한사람만은 매년 한 번씩 크리스마스에 카드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 한국 말에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면 보따리 찾아 내라고 한다고 오히려 안 건져 주었으면 고통 안 당했을 것인데 건져 주고 고통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 이러면 안 되지요. 감사는 꼭해야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물에서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고 하는데 거꾸로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한은 물에 새겨서 원한은 떠나 보내고 은혜 받은 것은 끝까지 돌에 새겨 평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었는데 그중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가는 길을 되돌아 와서 감사를 전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3. 감사는 기쁨과 행복을 가져 온다
셋째로 감사가 마음을 긍정적이게 하고 기쁨과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마음은 밝고 맑고 환한 태양이 떠오르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 감사하십시오, 이웃 간에 감사하십시오. 여러분 부부간에라도 오래 살면 너무 무관심해 지는 것입니다. 큰일을 해주어도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잘못된 것이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특별히 은혜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조그마한 일을 해줘도 크게 감사하고 아내가 조그만 도움을 베풀어도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감사해야 마음이 밝아지고 맑아지고 환해지고 서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웃 간에도 조그만 일을 해주어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가장 깜짝 놀란 것은 가족들이 밥상에 둘러앉아서 스푼 좀 전해 달라. 물 한잔 달라고 하는데 아버지와 자식들 간에 어머니와 아버지 간에 꼭 땡큐, 감사합니다. 당연지사인데 내가 그때는… 우리는 한국에서 어릴 때 자랄 때 숟가락 주세요. 주면 그뿐입니다. 물 줘. 물주면 그뿐입니다. 밥 줘. 밥 주면 그뿐입니다. 감사란 말은 안했습니다. 당연히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 할일을 해줬는데 뭘 감사하냐. 그렇게 생각했는데 미국에 가서 보니까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라도 꼭 해준 것은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내 마음속에 찡하게 느끼고 그 다음부터 저도 한국에 와서 해주는 것마다 감사하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나를 쳐다봐요. 저 사람 좀 돌았나? 무엇 때문에 자꾸 감사하다고 그러냐.
감사가 우리 한국의 생활 습관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4절에는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했으며
골로새서 2장 7절에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감사를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고려대 신경정신과 이민수 교수는 몇 년 전 40대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그 증상과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은 부부간의 싸움이었고 그 다음이 고부갈등으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40대 우울증 환자는 여자가 남자보다 3배 정도 많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 부부간에 서로 감사하면 우울증이 안 걸릴 것인데 서로 자꾸 원망하고 무시하고 천시하니까 우울증에 걸린다는 것입니다. 존 밀러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감사를 깊이 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만큼 행복한 것입니다. 감사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가족 간에 감사하십시오. 감사가 마음을 긍정적이 되게 하고 기쁨과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기쁨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감사 할 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지막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한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 보내 셨으면 죄 값을 우리가 어떻게 갚겠습니까? 여러분 모든 죄는 보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큰 죄는 큰 보상을 해야 되고 적은 죄는 적은 보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보상을 해야 진실로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어떻게 보상합니까? 그 보상은 죽음입니다. 죽음이어야 하나님께 지은 죄를 보상할 수 있는데 그 죄를 누가 보상해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죽음으로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셔서 생명을 쏟아 보상을 해주었으니 그 감사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보상을 받지 않았었으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다 들어올 수도 없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고 하늘나라에 영원한 거처를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상을 통해서 우리는 넉넉히 하나님과 화목하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인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끊임없이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한 두번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을 드리고 천국에 들어가서도 늘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나중에 지옥에 가보십시오. 언제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중심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할 것은 십자가의 그 고달픈 고생과 고통을 우리 때문에 주님이 감당한 것이므로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영광까지 얻게 되었으므로 감사하지 아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하는 사람은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어떻게 되어도 감사해야 돼요. 내가 암으로 죽어가는 우리 지역장 한분에게 가서 예배를 봐드리는데 지역장이 너무나 암으로 고생을 하고 몸부림을 치면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역장님에게 “지역장님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해주시니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눈을 둥그렇게 뜨고 벌떡 일어나더니만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세상에 머리 두고 사는 사람 누가 하나님께 감사 안할 수가 있습니까? 좋다고만 감사하고 아프다고 원망 불평합니까? 나는 그러지 않습니다. 내가 아픈 것은 내가 잘못해서 아픈 것이지 하나님이 내게 병 준 것 입니까? 내가 식생활 잘못하고 생활 습관 나빠서 병든 것을 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립니까?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프더라도 소망이 있는 것은 언제 내 육신을 떠나도 천당에 가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새빨게 졌습니다. 너무나 내가 깊이 없는 신앙이요, 염치없는 신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좋을 때만 하는 게 아닙니다. 좋지 않을 때 감사하는 것이 진실한 감사인 것입니다. 어려울 때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8편 28절로 29절에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 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야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23편 6절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이끌어 주시고 나중에는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살게 해주시니 우리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미국인으로 중국에서 사역했던 헨리 프로스트는 선교사에게 하루는 고향에서 슬픈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그 일로 선교사는 마음이 우울해지고 마음이 답답하고 기도가 그치고 염려, 근심이 꽉 들어 찼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고 염려, 근심이 그 마음을 점령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 영혼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아무리 기도해도 그 흑암의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선교본부에 갈 일이 있어 선교본부에 문을 여는데 벽에 이런 글자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Try Thanksgiving’ 감사를 해보라. 그 말이 마음에 부딪혀서 그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고향에서도 돌아온 슬픈 소식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합니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그 시각부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흑암은 물러가고 내 영혼에 빛이 비취기 시작하였습니다. 마귀가 떠나간 것입니다.
영국의 종교가이며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진 윌리암 로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족과 행복을 가장 빠르게 찾는 비결은 범사에 감사하는데 있다.”
원망과 불평은 원수 마귀가 가져와서 우리 마음을 억압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감사인 것입니다. 감사 찬양을 드리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오기 때문에 마귀는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마음을 긍정적이 되게 하고 기쁨과 행복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넉넉히 부어 주는 것입니다.
4. 감사는 내적 치료를 가져 온다
넷째로, 감사는 내적 치료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불평은 미움, 분노, 불안, 절망, 탄식 등을 가져오나 감사는 이 모든 독을 해소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뱀에게 물리면 뱀의 독이 몸속에 들어가서 피를 응고시키는 것입니다. 피가 굳어져 버리면 간장도 심장도 활동을 중지하고 죽는 것입니다. 뱀에게 물려서 피가 응고할 때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해독제 주사를 빨리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해독제를 맞으면 해독제가 몸속에 들어가서 응고되는 피를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주고 묽게 만들어 주어서 독사의 독이 해소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물어서 불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움, 분노, 불안, 절망, 탄식이 꽉 들어차서 인생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빨리 해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해독제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야 해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펼쳐 읽고 하나님께 감사하기 시작하면 해독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귀신들이 쫓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14절에 “야훼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야훼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이 하나님을 반역하매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와서 그를 괴롭혔습니다. 악령으로 말미암아 몸부림치고 야유를 하고 고함을 치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와서 그를 치료한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다윗이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수금을 타니까 악령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감사와 찬양은 여러분의 마음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의 독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고 우울하고 원통할 때 다른 것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엎드려 주님이 주신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큰 소리로 감사하고 찬양하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독이 다 해소되어 버리고 깨끗하고 밝고, 맑고, 환한 마음이 되고 행복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는 내적치료를 가져오므로 교회와서 많은 찬양을 드리고 많은 감사를 드리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속이 시원해지고 여러분 인생이 밝고, 맑고, 환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5. 감사는 기적을 체험하고 역경을 이기게 한다
다섯째, 감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역경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한 것 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이 임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겠다는 것은 기적적인 은총이 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무엇이든지 잘돼요.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들에 가면 들이 잘되고 집에 들어오면 집이 잘되고 떡 반죽 그릇을 만지면 그릇이 잘되고 짐승을 기르면 새끼까지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모든 환난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서 10년 동안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 할지라도 성경은 다른 말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더라. 그러니 요셉이 종으로써 형통하여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서 3년 동안 갇혀 있었으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이 감옥에서 갇히게 하셨더라. 그래서 간수장이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하나님이 같이 했으므로 요셉이 결국에는 국무총리가 된 것 입니다. 어떠한 역경에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잘됩니다. 마귀가 같이 있으면 못됩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늘 같이 하게 한 것입니까? 감사를 하면 하나님이 같이 계십니다. 부엌에서 감사하면 하나님이 요리를 잘되게 하시고, 집안에서 감사하면 부모 자식들이 잘되게 하시고, 장사터에서 감사하면 장사 잘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원망, 불평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마귀가 오므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역사를 베푸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갇혔을 때 인 것입니다. 실라와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등이 얻어터지도록 얻어맞고 피를 흘리고 배를 굶고 빌립보 깊은 감옥에 갇혔을 때 밤중에 그 두 사람이 일어나서 기도하고 철 고랑을 마주치면서 감사 찬송을 드렸습니다. 얼마나 깊이 감사했던지 죄수들이 듣고도 조용했습니다. 그러자 온 빌립보 옥토가 뒤흔들리고 전부 쇠고랑이 다 끌러지고 감옥 문이 열리고 해방과 자유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들이 감사 찬양을 할 때 감옥에도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빌립보 감옥에 바울과 실라만 옥에서 쇠고랑이 끌러진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다 쇠고랑이 끌러지고 만 것 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면 가난의 쇠고랑, 궁핍의 쇠고랑, 저주의 쇠고랑이 다 끌러지고 우리 덕분에 안 믿는 사람들의 쇠고랑도 다 끌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우리를 자유케 하고 해방케 하는 능력과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묶였으면 감사 찬송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작년 이맘때 11월 감사의 달을 맞아 한 일간지 논설에 한국인의 ‘감사 결핍증’에 대한 글이 실린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물건을 사고 나올 때 손님이 인사를 하면 주인은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또 오십시오.’ 이기적인 인사를 한다고. 아이들에게도 장난감을 사주면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야~ 신난다’, 택시 정류장에서 바뻐서 허둥거리는 젊은이에게 먼저 타도록 양보해도 젊은이는 고맙다는 말을 한마디 안하고 택시에 들어가서 문을 꽝 닫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감사하다’라는 말로 이들은 옷을 살 때에도, 신문 한 장 살 때에도 ‘감사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서양인의 이러한 태도는 서구 사회가 기독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신문 사설에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는 좋은 일은 더 좋게 만들고 좋지 않은 일은 감사의 능력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매일의 삶 속에서 ‘감사’하는 생활을 습관화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 입니다. 감사는 좋은 일은 더 좋게 하고 더욱 아름답게 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일은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큰 역사로 믹서같이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불평할 것을 찾지 말고 무엇을 감사할 것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삶속에 무엇을 감사할까, 아내의 삶속에 무엇 잘난 점이 있느냐. 무엇을 감사할까.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이웃 간에도 자꾸 잘난 점을 찾아서 감사를 하고 찬양을 해야지 잘난 점은 다 두고 못난 점만 자꾸 찾아서 불평과 원망을 하면 서로 미워하게 되고 불리하게 되고 싸우게 되고 마찰이 있고 알력이 있고 불평하고 불행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평탄하게 살게 하고 복을 받게 하고 성공하게 하는 비밀인 것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우리에게 독을 뿌리고 우리를 깨물어도 독이 우리 속에 아무리 넘쳐와도 감사만 하면은 독이 다 해소되어 버리고 마귀가 무력화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힘, 불행을 이기는 힘, 좌절과 절망을 이기는 힘, 마음에 병을 고치는 힘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감사의 제사를 끊임없이 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형식적, 의식적으로 감사주기를 맞이해서 감사주일을 지낼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이웃에게 진정으로 감사를 하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더 많이 감사하면 더 은혜가 풍성해지고 더욱 많이 감사하면 더 축복이 넘쳐나고 더욱 훌륭한 인격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바로 가까이 우리 마음에 있고 우리 입술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서 감사를 충분히 넘치게 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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