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9 장 | 욥기 9장 8237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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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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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

욥의 대답.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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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5/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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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9(금) “욥기 9:1-35” / 작성: 정한조

본문 욥기 9:1-35 찬송가 363장 ‘내가 깊은 곳에서’ 오늘 본문은 8장에 있었던 빌닷의 독설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빌닷은 “고난은 틀림없이 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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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8/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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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9장 해석, 빌닷에 대한 욥의 변론 – 다음블로그

빌닷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변론 욥기9장 스크랩글, 편집 욥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꽤 어려운 신학적 논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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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9/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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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본문 설명

욥기 9장 본문 설명 · 1)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다. · 2)그는 전지전능하시다. · 3)그는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신다. · 4)그는 땅을 그 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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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yusikjung.blogspot.com

Date Published: 5/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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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성경 욥기 09장

9:20 비록 나에게 죄가 없다 해도, 나는 나를 꾸짖어야 하고 비록 내가 흠 없다 해도, 나는 나를 죄인이라 인정해야 할 걸세. 9:21 나는 죄가 없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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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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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 욥의 변론 – 하나님께 가까이

너가 이렇게 고통을 받는 것은 너의 죄 때문이다. 니가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알수가 있느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잘못했는지 알고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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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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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2월 10일. 욥기 9장. – 하늘품은교회

욥기 9장.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다. 1. 빌닷이 주장하는 대로, 욥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합니다. 아니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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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poom.or.kr

Date Published: 9/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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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6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욥기 9장 1-14절)

그러나 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욥기 9장 2절에 욥이 다음과 같이 빌닷에게 대답했습니다. “(욥 9:2)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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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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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 욥은 의인인가 아닌가? – Yuna Foundation

욥기 9장 21절에 쓰인 온전하다는 표현도 히브리어는 תָּם 이다. 즉, 자신은 온전하지만 의인이 아님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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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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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장
욥기 9장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욥기 9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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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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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

욥의 대답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9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1)그를 소환하겠느냐

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21 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22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25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26 그 지나가는 것이 2)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27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28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29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2018/03/09(금) “욥기 9:1-35” / 작성: 정한조

본문 욥기 9:1-35

찬송가 363장 ‘내가 깊은 곳에서’

오늘 본문은 8장에 있었던 빌닷의 독설에 대한 욥의 답변입니다. 빌닷은 “고난은 틀림없이 죄 때문이다”라는 사고에 사로잡혀서 전통과 조상들의 말을 빌어서 욥을 난도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의 자녀들이 한날한시에 참변을 당한 것도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함이며, 아버지 욥은 그들의 죄를 알고서도 방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고 말합니다. 그 때에 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1-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이 일’은 빌닷이 말한 8장의 내용입니다. 욥은 빌닷이 말한 ‘권선징악’이 하나님의 다스림의 원리임을 동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 논쟁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일천 마디의 말씀을 하셔도 인간은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서 사람이 온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빌닷과 욥의 말을 반려견들의 대화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내가 나이 많은 반려견들에게 들었는데, 우리 주인은 말을 잘 들으면 먹을 것을 많이 주고, 잘 듣지 않으면 혼을 낸 대? 네가 많이 맞은 것은 틀림없이 집을 나갔기 때문이지?”

“나도 알아 우리 주인이 말을 듣지 않으면 혼내고, 말을 잘 들으면 좋아하고, 먹을 것이 달라진다는 거! 하지만 난 집을 나간 적이 결코 없어.”, “우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주인 앞에서 잘났다고 자랑할 수 있겠어? 내가 숫자 몇 개 구분할 줄 안다고 수학교수님이신 우리 주인 앞에서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어?

계속해서 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1-14절입니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욥은 하나님이 앞에 계셔도 보지 못하고, 움직이고 계셔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도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6명의 사람이 한 공간 안에서 농구공을 서로 주고받는 3분 길이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몇 번이나 패스하는지 헤아려 보라고 했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난 뒤에, 진행자가 농구공 패스 횟수를 묻지 않고, 고릴라를 본 사람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30명이 그 영상을 보았는데, 고릴라를 본 사람은 단 2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릴라는 나오지 않았었다고 확신했습니다. 다시 화면을 돌렸더니 고릴라의 탈을 쓴 사람이 농구공을 주고받는 사이로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그 시간은 20초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에 고릴라가 있었는데 보지 못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눈 망막에는 시각적인 영상이 만들어질 수 없는 맹점(盲點)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욥이 자기 앞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시력의 한계도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더 더욱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욥은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도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물을 수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부분을 욥의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입니다. 욥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심을 인정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으로 되뇌는 한 문장이 더 있습니다. “단, 제 것은 손대지 말아주십시오.”입니다. 우리 속에는 병든 이기심이 있어서, 내 것은 내 것이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고백하게 됩니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맡겨놓은 것임을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온전히 인정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믿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또한 욥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풀지 아니하시면, 하나님께 말대답을 한 마디라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라합도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라합’이라는 말은, 여리고에 살았던, 정탐꾼을 숨겨주고 예수님의 조상이 된 기생 라합이 아닙니다. 욥기와 시편, 이사야서에 라합이라는 말이 몇 번씩 나오는데, 하나님의 적대세력을 상징하는 애굽을 가리키기도 하고, 7:12절에 나오는 ‘바다 괴물_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세상을 혼란시키는 대표적인 존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본문에서는 바다 괴물을 뜻합니다.

욥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17-18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폭풍으로 치신다고 하는데, 태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작은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문자 그대로 일엽편주(一葉片舟)일 것입니다. 게다가 셀 수 없는 주먹이 날아와 온 몸이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래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그 고통보다도 욥을 더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자신이 왜 그런 것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원인과 이유를 알면 버티기가 쉬운데, 알지 못하면 정말로 고통스럽습니다. “이유를 모름”, 그것이 욥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욥이 이렇게 항변합니다. 22-2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

이 말씀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심판하시는 분이시죠? 예기치 않게 재난을 당해 사람들이 죽고, 죄 없는 사람이 절망하는 것을 보시고도 멍청한 놈들이라고 비웃고 계시죠? 이 세상에 악인 판을 치는데, 악인들에게 벌을 받지 못하도록 재판관의 눈을 가리신 분이 하나님이시죠?”

이 말씀은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함께 심판을 당하고, 죄 없는 사람이 절망에 빠지고, 세상에 악이 판을 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이 이렇게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은 뭐하고 계십니까?”라고 하나님께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세상의 악에 대해서 말하는 속뜻은 욥 자신이 지금 너무도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혼란과 자신의 고통스러움으로 인해서 욥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25-28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욥은 자신의 인생이 가치가 없게 여겨짐과 허무함이 느껴질 정도로 빨리 가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경주자’는 당시의 ‘집배원’을 뜻합니다. 고대에 편지를 보내는 것은 모두 인편(人便)이었습니다. 집배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뽑을 때는 당연히 발이 가장 빠른 사람을 뽑았을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매일매일이 그 경주자(집배원)가 달려가는 것만큼이나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져, 자기에게는 좋은 세월이 없다는 것입니다.

‘빠른 배’의 문자적인 뜻은 ‘갈대배’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큰 갈대를 이용하여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 배들은 모두 길이는 길고 폭은 좁은 유선형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빨리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그처럼 빨리 지나간다고 합니다.

또 ‘독수리’는 동물계에서 최고의 시력을 가진 새 중에 하나입니다. 2km상공에서도 들쥐가 선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 독수리가 먹잇감을 발견하고서 하강할 때는 최고 시속은 200km에 가까울 정도로 비행합니다. 욥은 자신의 인생이 독수리의 하강 속도처럼 여겨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시궁창에 있는 것 같고, 고통은 여전해서 하나님께서 채찍을 거두어 주셨으면 좋겠다고 탄식합니다.

오늘 본문의 욥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탄식에서 또렷하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깊으심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면, 로마서 11:33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하나님의 깊으심이 욥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었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리는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사순절 셋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혹 우리의 삶에 고난과 고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여”라고 고백하십시다.

욥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사도 바울을 신비하게 인도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깊으심과 풍성함을 경험하며, 하나님께서 그려가게 하시는 은혜와 섭리의 지도의 한 지점을 사는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욥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 몸에 악성종약이 가득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가 아니라 정죄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자신을 하여금 이 고난과 고통의 과정을 겪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깊으심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으로 욥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신묘막측하고도 불가사의한 은혜와 섭리의 지도를 그려가게 하심으로 믿음의 사표로 우뚝 세워주셨습니다.

욥과 사도 바울의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심이 소망과 용기가 됩니다.

혹 우리의 삶에 크고 작은 고난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으심과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으신 삶의 자리에서 깊고 높은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복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찬찬히 다시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해 보십시오.

2. 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3. 욥은 자신의 인생이 경주자와 빠른 배, 독수리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당신의 인생은 무엇과 같이 여겨집니까?

4. 당신의 삶과 신앙에서 하나님의 깊으심과 풍성함을 느낀 것은 언제였습니까?

5.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심을 더 깊이 경험하기 위해서 무엇을 결심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냉수한그릇 창고

◈빌닷의 첫 번째 공박에 대한 욥의 변론 욥기9장 스크랩글, 편집

욥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꽤 어려운 신학적 논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1. 인간의 힘으로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정의 9:1~31

욥8:3에서 빌닷은 ‘하나님의 공의’를 무기로 해서 욥을 공박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빌닷에게 있어서 ‘하나님 = 정의의 집행자’라는 도식은 너무나 선명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엘리바스에게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확신 하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힘써 강조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겠으며,

사람이 창조주보다 깨끗할 수 있겠느냐?” 4:17

▶바로 이와 같은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서, 욥은 반론을 제기합니다.

2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

3 “사람이 하나님과 논쟁을 한다고 해도,

그 분의 천 마디 말씀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4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니, 그를 거역하고 온전할 사람이 있겠느냐?”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인간이 아무리 의롭고 정직하고 순전하다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요.

친구들이 권선징악적, 율법적 논리를 펴는 반면에,

욥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2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주장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다는

주장과도 연결됩니다. 바울은 롬3:10-18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은 모조리 죄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간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의로워진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편에서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힘과 지혜가 도무지 인간의 힘과 지혜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한하고

막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은 아예 비교가 되지 않고,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주장하는 것은,

아예 싹수가 없는 일이라는 절망이지요.

5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산을 옮기시며, 진노하셔서 산을 뒤집어엎기도 하신다.

6 지진을 일으키시어 땅을 그 밑뿌리에서 흔드시고, 땅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을 흔드신다.

7 해에게 명령하시어 뜨지 못하게도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어 빛을 내지 못하게도 하신다.

8 어느 누구에게 도움을 받지도 않고 하늘을 펼치시며, 바다 괴물의 등을 짓밟으신다.

9 북두칠성과 삼성을 만드시고,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시며,

10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 하나 제기됩니다.

정의의 문제를 논하는 것 자체, 즉 욥이 과연 자기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이 고통을 당하는지

아니면 아무 잘못 없이 무고하게 이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급수 차이가 너무 크게 나니까,

그와 같은 공통 기반을 설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지혜는,

인간의 힘과 지혜와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자기의를 주장하거나 무죄성을 변호할 길이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탄식이지요.

11 하나님이 내 곁을 지나가신다 해도 볼 수 없으며, 내 앞에서 걸으신다 해도 알 수 없다.

12 그가 가져가신다면 누가 도로 찾을 수 있으며, 누가 감히 그에게 왜 그러시냐고 할 수 있겠느냐?

13 하나님이 진노를 풀지 아니하시면 라합(혼돈과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바다괴물)을

돕는 무리도 무릎을 꿇는데,

14 내가 어찌 감히 그분에게 한 마디라도 대답할 수 있겠으며,

내가 무슨 말로 말대꾸를 할 수 있겠느냐?”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너무 멀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주장하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이라는 탄식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기 때문에

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은총을 비는 수밖에 없습니다.

15, “비록 내가 옳다 해도 감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

다만 나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심판하실 그 분께 은총을 비는 것뿐이다.”

그리고 33절에, 중재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소원이 숨어 있습니다.

33,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서두에, 욥기의 주제를

<자기 의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

즉, 욥기는 바로 신약의 로마서와 같다는 논지를 펼쳤습니다.

욥기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이런 내용이 더 명확히 나오겠지만,

본문 욥기 9장에서, 욥의 탄식을 통해서,

욥은 점점 그 <은혜의 신학>을 향해서, 더듬어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9장에, 그 내용이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위의 15절,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33절, 중재자의 필요성을 구하는 가운데..

욥은, <은혜의 신학>을 향해, 어둠 속을 더듬어 찾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33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계속되는 9:16~31절은, 욥의 탄식입니다.

16 비록 그분께서 내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해도,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귀기울여 들으실까?

17 그분께서 머리털 한 오라기만한 하찮은 일로도 나를 이렇게 짓눌러 부수시고,

나도 모를 이유로 나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시는데,

18 숨 돌릴 틈도 주시지 않고 쓰라림만 안겨 주시는데, 그분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실까?

여기 보세요. 바로 여기에 욥의 갑갑함, 하릴없는 절망이 묻어 있습니다.

분명 욥은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옳아도 하나님의 정의는 도무지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변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19절 말씀을 보면

욥은 자기 의와 무죄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기 문제를 재판에 부치고 싶어도

하나님을 재판정으로 불러 올 방법이 막연하다는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19, 강한 쪽이 그분이신데, 힘으로 겨룬다고 한들 어떻게 이기겠으며,

재판에 붙인다고 한들 누가 그분을 재판정으로 불러올 수 있겠느냐?

그리하여 욥은 마침내 절망에 빠집니다. 20-22절 말씀을 보세요.

비록 욥이 옳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기를 정죄하실 것이며,

흠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틀렸다고 말하실 것이며,

결국 하나님은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가지로 심판하시는

불공평한 분이라는 비관적 결론에 도달하고 맙니다.

20 비록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내 입을 시켜서 나를 정죄하실 것이며,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나를 틀렸다고 하실 것이다.

21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고,

다만, 산다는 것이 싫을 뿐이다.

22 나에게는 모든 것이 한 가지로만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은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 가지로 심판하신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욥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찾을 수 없음’, ‘헤아릴 수 없음’에 깊은 곤혹과 좌절감을 느낍니다.

23 갑작스러운 재앙으로 다들 죽게 되었을 때에도,

죄 없는 자마저 재앙을 받는 것을 보시고 비웃으실 것이다.

24 세상이 악한 권세자의 손에 넘어가도, 주님께서 재판관의 눈을 가려서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하는 이가 누구란 말이냐?

25 내 일생이 달리는 경주자보다 더 빨리 지나가므로, 좋은 세월을 누릴 겨를이 없습니다.

26 그 지나가는 것이 갈대 배와 같이 빠르고, 먹이를 덮치려고 내려오는 독수리처럼 빠릅니다.

26 온갖 불평도 잊어버리고, 슬픈 얼굴빛을 고쳐서 애써 명랑하게 보이려고 해도,

28 내가 겪는 이 모든 고통이 다만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것임을 압니다.

29 주님께서 나를 정죄하신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써서 헛된 수고를 해야 합니까?

30 비록 내가 비누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닦아도,

31 주님께서 나를 다시 시궁창에 처넣으시니, 내 옷인들 나를 좋아하겠습니까?

본문 욥9장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욥의 자기변명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매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 욥의 신앙상태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의 주제를 ‘자기 의의 깨뜨림’과 ‘구원의 은혜의 값없이 수용’이라고 볼 때,

욥기 9장 본문에서 욥은, 아직 ‘자기 의가 깨뜨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자기 의로움과 정당성을 주장하고’

‘하나님 앞에 당당한 욥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욥이, 나중에 42장에 가면, 완전히 깨어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 중재자를 요청하는 탄식 9:32-35

욥의 입장은 한 마디로 ‘인간은 하나님과 변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면, 사람과 개미가 함께 재판하거나, 변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서로 간에, 너무 큰 존재론적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욥의 경우, 자기 자신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고하게 고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친구들은,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반드시 그 원인이 있기 마련인데,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딜레마에 빠진 욥이,

만일 하나님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람이라면

함께 법정에 가서 재판관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으면 해결이 될 터인데..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닌 까닭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너무 커서,

자기나 하나님이 법정에 가서 공방을 펼칠 길이,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기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판단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하고 억울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32-33절 말씀을 보세요.

그리고 중재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중재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래서 욥기가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 신학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32~33절,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

(이렇게 욥은, 중재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의 정의 이해’는 인간적인 이해이고

‘하나님의 정의 이해’는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이 고통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단순히 양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 편에서 그 어떤 유비(類比 analogic)를 통하여 하나님을 설명해도

그것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유한한 한계 안에서 이해하는 불충분한 하나님이란 뜻인듯

욥도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간격,

즉 질적 차이 때문에 고뇌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금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처절한 고난을 당한다면

이유라도 알아야 할 터인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기관총 집중 포화를 맞고 있는 형국이지요.

하나님이 만약 사람이라면, 욥이 왜 이 고난을 당하는지 설명해줄 수 있을 터인데,

또 서로 간에 입장차이가 있으면,

법정에 가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판단해줄 수 있는 재판을 받으면 끝날 터인데

그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욥은 경건과 선행의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불의와 악행의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전통 견해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죄 없는 자기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가해자일 뿐이라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는, <의>에 관하여, 급수 차이가 너무 커서,

어떻게 하나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 교훈 및 결론

이런 가운데서, 결론은.. 욥이 중재자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5, :33

오늘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생길 때마다

양쪽의 입장을 다리 놓아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중재자를 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긴장과 간격을 메우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100% 참 하나님이시며, 100% 참 인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추어져 숨어 계신,

그리하여 도무지 헤아리기 어렵고 접근하기도 어려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욥이 예수 그리스도 오신 후에 이와 같은 고난을 당했더라면

그의 물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입니다.

욥에게는 중재자가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참 의로운 중재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9:32~35 사랑의 주님이 중보해주신다

…………………….

▶적용/ 너무 시시비비 철저히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지금 욥기 9장에서 (또는 욥기의 길고 긴 논쟁에서)

욥과 친구들과의 논쟁의 주제는,

‘욥, 너는 죄인이다. 그래서 벌을 받았다’는 친구들의 논지와

‘아니다. 나는 그렇게 큰 죄인이 아니다. 나는 의롭다’는 욥의 논지의 대결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묵상해 볼 것은,

너무 시시비비 철저히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는 것이다.

시바는, 다윗왕에게 가서,

다윗이 피난 갈 때에, 므비보셋이 합세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므비보셋이 배신했다고 말한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절뚝발이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피난길에 민폐가 될까봐.. 스스로 포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므비보셋을 고소한 시바는

그 주인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므비보셋과 시바 중에

시시비비를 결코 가릴 수가 없다.

성경이 명확하게 가려주지도 않는다.

압살롬이 죽고, 다시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었을 때,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나아가

자기 종이 거짓말 했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이때 우리 같으면, 시시비비를 따져서, 가리고 싶어 하나.

시바의 말과, 므비보셋의 말이 틀리니까

서로 대질심문하고, 증인 신청 할 것인데

다윗은 그것을 하지 않는다.

다윗은 아무 것도 확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므비보셋이 말한 내용을 그 자리에서 다 믿어준다.

그리고 시바가 말한 내용도 다 믿어 주었다.

그래서 므비보셋도 얻고, 시바도 얻는다.

지금 상황은,

압살롬의 반역 이후에

너무 큰 상처들이 있기 때문에

선악과로 시시비비 가려서

누구를 선하고, 악하게 규명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그냥 다윗의 왕국이 다시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바는 용납해 버리고, 므비보셋의 말은 믿어준다.

그래서 두 사람 다 얻는다.

두 사람 다 다윗 왕국에 편입시켜 버린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다.

가정도 천국이 될 수 있고, 지옥이 될 수 있다.

모든 일마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잘못한 자를 정죄하면..

그 천국 같던 가정도,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하게 된다.

욥이 지금 그 함정에 빠지고 있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것이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은혜 안에 머무는 것이다. 시시비비가 아니라! (이 단락, 펌)

쉬운성경 욥기 09장

9:1 <욥이 빌닷에게 대답하다> 그러자 욥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9:2 “나도 자네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9:3 하나님과 논쟁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천 번 말씀에 한 번이라도 대답할 수 있을까?

9:4 지혜로우시고, 강하신 그분 앞에서 누가 과연 그를 대적하여 이길 수 있을까?

9:5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산들을 옮기고 없애 버리시는데, 사람이 그것을 알 수 있겠나?

9:6 그분은 땅을 흔드시고, 땅을 떠받치는 기둥들도 흔들어 버리시지.

9:7 그분은 해를 뜨지 못하게 하시고, 별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실 수도 있다네.

9:8 홀로 창공을 우주에 펼치시고, 바다의 파도 위를 걸으시는 분,

9:9 그분은 북두칠성과 삼성, 묘성과 남방의 별자리들을 만드신 분,

9:10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과 수없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네.

9:11 그분이 내 앞을 지나가셔도 나는 그를 보지 못하고, 그분이 나를 스쳐 가셔도 알지 못하지.

9:12 그분이 가져가시면 누가 도로 찾을 수 있으며, 누가 감히 그에게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까?

9:13 하나님께서 진노를 풀지 아니하시면 라합 을 돕는 자들이 겁내고 움츠리는데,

9:14 하물며 내가 무슨 대꾸를 하고, 할 말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9:15 내가 의롭다 해도, 대답은커녕 그저 긍휼을 빌 수 있을 뿐인 것을.

9:16 설사 내가 그를 불러서 그가 대답하셨다 해도, 그가 내 주장을 들으셨다고 믿을 수 없네.

9:17 그분이 태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시네.

9:18 숨쉴 틈도 주시지 않고, 그저 나에게 괴로움만 더하시네.

9:19 힘으로 말하자면, 그분같이 강한 분이 누가 있으며, 의로움으로 말한다 해도, 누가 그를 재판한다고 할 수 있을까?

9:20 비록 나에게 죄가 없다 해도, 나는 나를 꾸짖어야 하고 비록 내가 흠 없다 해도, 나는 나를 죄인이라 인정해야 할 걸세.

9:21 나는 죄가 없지만,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일 힘도 없이 그저 내 삶을 경멸할 뿐일세.

9:22 그는 죄 없는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죽이시는 분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9:23 재앙이 내려와 죄 없는 자를 망하게 해도, 그분은 낙담하는 그를 비웃으시네.

9:24 악이 세상을 지배하고 재판관도 눈이 멀었으니,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누가 이렇게 하겠는가?

9:25 이제 내 삶이 달리기 선수보다 빨리 지나가니, 아무 소망이 없구나.

9:26 내 삶이 빠른 배처럼, 먹이를 낚아채려고 빠르게 내려오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는구나.

9:27 이제 내가 원망을 그치고, 얼굴빛을 바꿔 웃어 보려고 해도,

9:28 내 모든 고통이 두렵습니다. 당신은 나를 죄가 없다고 인정하지 않으시겠지요?

9:29 내가 죄인 취급을 받을 텐데, 공연히 수고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9:30 내가 깨끗한 물로 씻고 비누로 손을 닦는다 해도,

9:31 당신은 나를 구덩이에 밀어넣으셔서 내 옷조차도 나를 싫어하게 하실 것입니다.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시니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도 없고, 재판정에서 변호할 수도 없으니 안타깝구나.

9:33 우리 둘 위에 손을 얹고 둘 사이를 판단해 줄 판결자도 없으니 참 답답하구나.

9:34 제발 그분이 치시는 막대기를 거두시고, 나를 놀라게 하지 않으신다면 좋겠네.

9:35 그렇다면 내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구나.”

욥기 9장 – 욥의 변론

<오리온 = 삼성>

욥기 9장 – 욥의 변론

발닷의 말에 욥이 자신의 말로 변론을 합니다.

발닷은 죄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러시겠느냐? 그러나 빨리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라 라는 일반론적인 이야기로 욥을 책망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하지 말아야 할말도 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변론을 하여도 어떻게 그분을 이길수 있겠느냐? 지혜와 능력이 전능하시므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한마디도 이길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산도 옮기어도 사람은 이해할수가 없고 땅 은 지진을 일으킬수도 있으시며 해도 별도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통으로 잠못 이루는 밤에 바라 보았던 큰곰자리(북두성), 삼성(오리온 자리), 묘성(플레이아데스 성단)을 만드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앞에 계셔도 나는 볼수가 없고 하나님의 진노는 돌이키시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라합의 돕는 자들도 하나님 밑에 순종한다고 합니다.(여기에서는 큰파도와 같은 폭풍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에 나오는 라합이 아닙니다. )

욥은 하나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내가 의로와 봤자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니 그분이 나를 징계 하시면 나는 어쩔수가 없다.

내가 부르짖어 그분이 듣고 응답하셨다고 해도 나는 못믿겠다 라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에게 온 고난에서 하나님께서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한 서러움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악한자나 온전한자나 다 같이 멸망 시키신다고 하면서 하소연 합니다. 시간은 빨리 지나가는데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무슨 짓을 해도 해결이 안되니,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해결해 줄 존재가 없어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랜 고난으로 하나님의 응답이 오지 않자, 비관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하고 있는 욥을 보게 됩니다.

까닭없이 나를 내 상처를 깊게 하게 하시고 폭풍으로 치시고 나는 내 생명을 이제 천하게 여기게 되었고 나는 정죄를 당합니다.

사람은 오랜 동안 고난을 받고 해결함을 받지 못하면 비관적이고 절망적이고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됩니다.

안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내버려 두는 구나, 그래 하나님의 존재는 계시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분이야. 나는 그분께서 관심이 없으신거야.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기간이 짧고 그 어려움 정도가 약하면 상관없지만, 욥 정도의 강도 높은 어려움과 기간이 오면 버텨내기 힘듭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던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 마음이 하나님께서 부터 닫혀져 있거나 신앙생활을 에서 낙심하여 포기해버리는 경우를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형통한 날에는 괜찮지만 정말 어려움 속에서 그 믿음을 증명해 내고 마음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분께서는 정말 무슨 뜻이 있어서 그냥 지켜 보는것이지 나를 고아 처럼 내버려 두시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버텨야 합니다.

그런 어려운 속에서 흘리는 눈물 , 부르짖음, 나의 고통, 한숨 , 어디 하소연 할때가 없어서 엎드려 하나님께 이야기 하는 것들 그것들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때가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고 내가 고난 당해도 응답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때를 잘 버티고 넘겨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매일말씀묵상. 2월 10일. 욥기 9장. > 매일말씀묵상

욥기 9장.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다.

1. 빌닷이 주장하는 대로 , 욥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인정합니다 . 아니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 문제는 그 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이 도리어 욥을 절망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

2. 욥은 ‘라합’이라는 고대 문헌에 나타나는 바다 괴물(리워야단처럼)을 인용하는데(13절), 이러한 라합조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데, 그 라합을 따르는 자들뿐만 아니라, 욥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을 상대하겠는가 반문하며 절망합니다. 그것이 힘의 문제든 의의 문제든 , 욥은 의롭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하여 이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 설령 자기가 진정으로 의롭다 한들 ,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는 것뿐입니다 .

3. 이러한 욥의 절망은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믿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 때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에서 욥이 느낀 것 같이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원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지 않고, 심지어 매우 두려운 존재로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감히 가까이 설 수 없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큰 하나님인 것을 느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4. 하지만 욥기의 결론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바는 , 결국 이 위대한 하나님은 욥을 인정하시고 받아주시고 그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절망의 몸부림을 다 받아 주십니다 . 이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낸 분노에 찬 말들조차도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자녀들은 확인하게 됩니다 .

5. 욥은 지금 판결자를 원합니다 (33~34).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을 알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고, 절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모든 인간의 갈망일 것입니다. 결국 욥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35 절 ).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서고 싶고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고 싶어 합니다 . 결국 너무나도 희미하지만 , 자신의 절망 속에서 욥이 찾는 해결책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는 읽게 됩니다 .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크고 두려우며 공의로우신 전능자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분이 아닙니까 ? 이런 깊은 절망과 탄식을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 우리가 그리스도를 간절히 바라보게 되는 순간은 바로 , 욥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절망적 실존의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때때로 저희가 경험하게 되는 절망의 순간이 하나님께서 저희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저희로 하나님을 가장 깊이 원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가장 깊이 만나게 하시는 은혜의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과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깨달아 아는 시간이 되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1106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욥기 9장 1-14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http://thececc.com/wp-content/uploads/2018/11/20181106.mp3 욥은 이해할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에도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을 믿는 것이죠. 따라서 그는 지금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고통스런 재난에 대해서 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의 친구 빌닷은 욥이 죄를 지어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욥기 9장 2절에 욥이 다음과 같이 빌닷에게 대답했습니다. “(욥 9:2)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빌닷, 나도 자네 말이 옳다는 것을 안다네. 악인은 반드시 벌을 받고, 죄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일세.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욥이 3절에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욥 9:3)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이것은 왜 이렇습니까? 저것은 왜 저렇습니까? 하고 논쟁을 하려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 누가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우리의 가방이나 지갑 같은 소유물을 가져가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지금 무엇 하십니까? 그것은 제 것입니다.”하고 말하며,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이나 재물을 가지고 가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지금 무엇 하십니까? 그것은 제 것입니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니 주님께서 주실 권한도 있으시고 취해 가실 권한도 있으십니다. 욥은 분명히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신의 삶에 일어난 재앙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탄식하듯 12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 9: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앞서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라는 믿음의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욥은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러한 엄청난 고난을 주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욥은 억울합니다. 자신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자신을 못살게 괴롭히시는 것처럼 느껴져 억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고 괴로워합니다. “(욥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욥 9: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욥은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자기 스스로 죄가 없는 사람이며 의로운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해온 삶이라 할지라도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서 털어놓고 싶고, 하나님께 이러한 처사는 부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쌓이고 쌓여 있지만, 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욥은 재판장에 출석한 피고의 심정입니다. 그의 친구들이 욥이 죄를 지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욥은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이 너무나도 억울한 자기의 처지를 변론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아무리 말해 본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변론이 먹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자신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지금 아무런 상황도 고난은 심해져만 가고 고통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재앙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욥 9:17)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욥 9:18)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욥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을 가감없이 표출합니다. 동시에 그는 지금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치시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자포자기적 심경을 토로했습니다. 17절에 등장하는 ‘폭풍’이란 단어는 욥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고난 앞에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보여줍니다. ‘폭풍으로 나를 꺾으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나를 짓누르셨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르고 계신데 이 고통을 어떻게 빠져 나겠습니까? 나약한 욥이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까닭도 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상처를 입히시고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18절에 숨 쉬기 조차 어렵고 괴로움만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을 매몰차게 괴롭히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혹독한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있습니다. “(욥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욥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생각할 때는 아무런 죄가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이 현실도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비록 나에게 죄가 없다 해도, 나는 나를 꾸짖어야 하고 비록 내가 흠 없다 해도, 나는 나를 죄인이라 인정해야 할 걸세.” 21절 입니다. “(욥 9:21)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그는 자신이 순전한 삶을 살았으나 그러한 삶 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며 자신의 삶을 경멸히 여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욥의 말들을 통해서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인간의 심리적 갈등을 잘 보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머리로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인정 하겠으나, 마음으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내 삶을 어렵게 하시는지, 왜 하나님이 이렇게 삶 속에 고난을 허락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욥이 지닌 신앙의 한계 였습니다. 물론 그가 당한 고난의 크기를 보았을 때 그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기를 통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행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 같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재앙 같은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하신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 표현 가운데 “인생이 돌을 던지면 그 돌을 가지고 집을 지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이 발생하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고난을 통해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겠죠. 쉽지 않는 일입니다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병원 심방을 가보면 오랜 투병생활로 죽음 앞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은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도, 일이 조금이라도 엉키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하심을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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