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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도 우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 영상을 보시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기도와 그렇지 않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들어 아시듯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의 대명사이기도 했습니다. “바리새”라는 명칭은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서, 그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성경 말씀대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것이 시간을 흐르면서 형식만 남고 내용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시되, “또 자기를 의롭다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라고 하여, 이 비유가 율법주의와 위선으로 가득 찬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인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결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어떠하였습니까?
그의 기도는 오직 자신의 의와 만족을 위한 기도 아닌 기도였습니다. 먼저 그는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눅 18:11). 그는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 서서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따로 서서 기도했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그의 교만한 자세를 보여줍니다.
더 심각한 것은 여기서 “따로”라는 단어(‘프로스 헤아우톤’)가 문자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아니라, 자화자찬하는 독백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기도는 자기 혼자 떠드는 독백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겸손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드립시다. 우리의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세리와 그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세리는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누구에게나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배신자요, 범죄자요, 로마인의 앞잡이로서 모든 거룩한 것을 대적하는 원수 취급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런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했는데, 그는 “멀리 서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눅 18:13). 또한 그는 바리새인과는 달리 고개조차 들지 못했고, 눈을 아래로 향하고 자신의 가슴을 쳤습니다(13절). 그리고 그는 그 마음의 고통을 이제 말로써 표현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그의 기도는 짧고 간절했습니다. 오직 그는 빈손 들고 하나님 앞에 섰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에게 의롭다 하심을 선언하셨습니다(14절).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이 기도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통회하고 자복하는 그 심령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들어야만 하는 복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14절)고 말입니다. 교만하게 자신의 의를 내세우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세리처럼 나라는 우상을 버리고, 나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 나의 추한 모습 이대로, 나의 부족한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 가슴을 치며,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할 때, 우리 주님은 결단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사 우리의 간구를 들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바라고 기도하기는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님들이 병든 심령, 깨어진 가정, 무너진 교회, 혼란 가운데 있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신음하고 있는 지구촌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눈물을 흘리며 중보 기도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찾아오사,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새 힘주시고,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주안장로교회 #주승중목사 #5분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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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 동행일기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Source: www.llsmc.org
Date Published: 6/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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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비유설교(26)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 블로그 – 네이버
‘바리새인’ 그러면 오늘의 대부분 기도교인들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바리새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즉 바리새인들은 …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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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
Source: www.wilshireumc.org
Date Published: 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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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누가복음 18:9~14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로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다. … 이 비유는 두 남자의 기도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
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4/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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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눅 18:9-14) – 목회자료 – 기멀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체험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바리새인와 세리에게 예수님이 오신다면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예수님을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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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가 말씀하고자 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되 단순히 낙심하지 말고 열심을 내어 끈질기게 기도하자는 …
Source: revealer.tistory.com
Date Published: 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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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 예수님의 비유강해 9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기도와 그렇지 않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게 …
Source: ppa.covadoc.vn
Date Published: 12/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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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있는 영적 암 덩어리: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
Source: www.bschurch.net
Date Published: 7/27/2021
View: 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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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 Author: 주안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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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8.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lY3xThVG89I
본문 연구.
누가복음 18:9~14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로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다. 제임스 보이스(James Boice)가 지적한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탕자의 비유”와 같이 예수님의 가장 잘 알려진 비유 가운데 하나다.1
이 비유는 두 남자의 기도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더 주된 주제는 겸손에 대한 것이다. 본문의 바로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린아이에 대한 칭찬 이야기(눅 18:15~17)와 그 뒤를 잇는 예수님과 부자 관리의 대화 이야기(눅 18:18~30)도 기본적으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2
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비유로서 당시 청중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그런 면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대조적인 두 명의 사람을 등장시켜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본문의 두 등장인물은 기도를 통해 두 가지 다른 유형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결국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 즉 어떤 태도를 받으시고 축복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은 그 청중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밝히면서 시작된다. 그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9절)이다. 바로 뒤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바리새파는 주전 2세기 후반에서 주후 1세기 후반까지 팔레스타인 땅에서 활약했던 주요 유대인 그룹으로서 율법의 보호자요 해석자로 여겨졌으며 당시 유대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3 복음서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맹렬한 반대자이자 자기 의에 사로잡힌 집단으로 묘사된다. 누가가 9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그들은 다른 사람들, 특별히 죄인들을 멸시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 바리새파에 속한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는 말로 시작된다. 바리새인이 아닌 다른 한 사람은 당시 유대의 종교적·사회적 스펙트럼에서 바리새파와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었던 한 세리였다. 사람들은 세리를 “악하고 사람을 속이며 돈만 밝히는 로마의 세리”로 불렀다.4 그들은 죄인의 대명사였으며 로마를 위해 자기 백성을 배신하는 배신자로서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다.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당당히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는 자신이 남의 것을 빼앗는 자, 불의한 자, 간음자,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일주일에 두 번(아마 월요일과 목요일) 금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사실에 대해서도 감사했다. 물론 그는 이 놀라운 경건의 행위들을 실제로 했다. 그것은 그에게 종교적인 성취를 나타내는 일종의 배지와도 같았다. 그는 그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그의 기도는 시편의 찬양 시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기도는 데렐 박(Darrell Bock)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자랑하는 왜곡된 찬양 시다.5 그의 기도는 “하나님, 제가 이처럼 위대한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라는 말과 다름없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경우 하늘을 향해 손과 눈을 드는 것이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였다.6 그러나 세리는 그런 일반적인 자세를 취하지도 못할 만큼 마음이 낮아져 있었다. 그는 바닥을 내려다보았고 자신의 가슴을 쳤다. 가슴을 치는 것은 큰 애도나 비통의 표시로서 이 경우에는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회개를 나타낸 것이다.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았다. 하나님께 내세울 만한 그 어떤 것도 자신에게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비통한 목소리로 기도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절). 세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오직 하나, 바로 하나님의 자비였다. 여기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덮어 주소서’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7 그는 그저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한 것이다.
이 비유는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로 끝이 난다. 그분의 결론은 당시 청중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의 겸손을 인정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기도가 응답된 자는 종교적 성취와 자신의 경건을 들먹인 존경받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비를 호소한 죄인 세리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 이는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낮추시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겸손의 필요성에 대해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어디 있는가?
설교의 전개 방식
이 설교는 비유라는 장르를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귀납-연역 방식을 택했다. 간단한 서론 후 먼저 귀납적으로 본문 이야기를 설명했다. 이야기가 흥미롭게 들리도록 약간의 살을 붙였고 그런 과정에서 본문의 내용과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근거한 상상력을 사용하기도 했다.8 예를 들어 바리새인이 경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성전 마당의 한 구석에 있는 세리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설교의 교훈은 본문 이야기의 설명이 끝난 다음 연역적으로 제시된다. 본 설교에서는 3개의 교훈을 나누었는데 어떻게 이런 교훈을 도출했는지를 본문과 연관해서 간략히 설명하고 적절한 예화와 상황화(contextualization), 그리고 권면을 통해 청중에게 적용했다.
1. J. 보이스, 「예수님의 비유강해설교」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7), 114.
2. Darrell L. Bock,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Luke (Grand Rapids: Zondervan, 1996), 460.
3. S. Taylor, “Pharisees”,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ed. Walter Elwell (Grand Rapids: Baker, 1984), 849.
4. 보이스, 앞의 책, 116.
5. Bock, 앞의 책, 461.
6. 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서울: IVP, 1998), 276.
7. Bock, 앞의 책, 462.
8. 설교 시 상상의 사용을 위해서는 워렌 위어스비의 「상상이 담긴 설교」 (서울: 요단출판사, 1997)를 보라.
설교문.
미국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로 뽑힌 어느 목사님에게 교인들은 다음의 글귀가 적힌 메달을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겸손한 목사님께!” 그러나 교인들은 그 메달을 바로 다음 주일에 다시 빼앗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이 그것을 목에 걸고 설교하러 나왔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이 겸손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여자 성도 한 분이 다가와 감사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한 건데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겸손한 것 하나만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겠더라고요! 겸손이 저의 장점이에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설교를 들어봐야 자신이 겸손한지 아닌지 알겠습니까? 겸손은 말하기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물론 듣기 쉬운 주제도 아닙니다. 겸손과 그것의 반대인 교만은 상당히 교묘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상 교만으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겸손을 가장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기도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교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혼자 겸손하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겸손은 정의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겸손은 자기 비하나 자신감이 결여된 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유약한 성격이나 우울한 기질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타이론 에드워즈라는 사람은 “겸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묘사도 있습니다. “겸손은 미끄러운 수박씨와 같다.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A. B. 브루스의 것도 좋습니다. “겸손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보이고,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숨기는 것이다.” 그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겸손에 대한 정의는 앤드류 머레이의 것입니다. “겸손은 마음의 완전한 고요함이다. … 겸손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내게 행해진 일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겸손은 아무도 나를 칭찬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내가 멸시나 책망을 받더라도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다. … 겸손한 자는 자신에 대해 낮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겸손은 너무도 중요한 주제입니다. J. C 라일은 “진정한 회심의 확실한 표적은 겸손이다”라고 했습니다. 겸손하지 않고 참으로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정한 인식이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면 겸손하지 않고 구원받을 길은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는 그래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겸손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우리 주님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십니다.
극과 극의 두 사람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두 등장인물인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해 잠깐 살펴보도록 합시다. 잘 알다시피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더불어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 집단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와 유전 존중을 강조했던 종교적 보수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들은 소위 ‘모세의 자리’라는 곳에 앉아 가르칠 만큼 영향력이 대단했고 그들 가운데는 구약 학자인 율법사도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은 계속 이 바리새파와 부딪치고 논쟁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문제 삼으신 가장 큰 것은 그들의 위선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그들은 영적 지도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바리새인도 그랬을 것입니다.
세리는 그 스펙트럼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켄 가이거의 표현처럼 “유대 사회의 신발에 묻은 똥”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냄새나고 혐오스러운 집단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의 허가 아래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쳤습니다. 안 그래도 세금을 거두는 관리를 좋아할 리 없거늘 이들은 자기 백성의 혈세를 짜내어 로마에 넘겼으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거기다 온갖 부당한 징수 방법으로 상당 부분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 도둑들이었으니 오죽했을까요?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요 매국노요, 로마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두 사람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니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들어보나 마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하여 청중들에게 겸손에 대해 정말 충격적인,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교훈을 남기기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본문 9절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파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메가톤급 어퍼컷을 한방 제대로 먹이기 원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또 한 번 싸움을 거신 것입니다.
어느 기도회의 대반전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루에 세 번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오전 9시와 오후 3시, 그리고 해질 무렵의 저녁 6시가 그때였습니다. 이때가 되면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 정기 기도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물결처럼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서쪽 문을 지나 이방인의 뜰을 지나고 이스라엘인들을 위한 안쪽 마당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 무리 가운데 바리새파에 속한 한 사람과 세리 하나가 섞여 있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정기 기도 시간을 빼먹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다른 사람들이 다 바캉스를 떠나는 휴가 기간에도 기도하러 오고 자기 나라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놓고 다투는 그 순간에도 중계 방송을 보지 않고 기도하러 오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기도 시간을 빼먹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앞쪽 중앙에 자리를 잡고 일단 주위를 둘러봅니다. 죄인들이 더러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어정쩡한 자세로 구석에 서 있는 세리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비웃음이 배어 나오면서 경건한 자신과 저절로 비교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국회 의원 후보 합동 연설회를 우연히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한 야당 후보가 원래 야당이었다가 여당으로 당을 옮긴 다른 후보를 향해 “변절자”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말투와 표정이 얼마나 경멸에 가득 차 있었는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표정도 그랬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에 대한 만족감으로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았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팔을 길게 뻗고 손바닥을 위로 편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경건한 모습입니까?
그는 거룩한 톤으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1~12절에 그 기도문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 보통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엄격한 금식을 했습니다. 포도당 주사를 맞거나 건강 보조 음료 등을 마시면서 하는 그런 금식이 아니라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 제대로 된 금식이었습니다. 십일조도 세금과 보너스 공과금까지 다 뗀 후 계산하는 방식이 아니라 율법에서 추론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다 모으면 소득의 20% 정도가 되었다)을 드렸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본이 된 자신이 너무 대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달랐습니다. 누가는 13절에서 그가 멀찍이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마 뒤쪽 구석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감히 성전 마당을 가로질러 앞으로 갈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이 거룩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부끄러운 죄들이 양심을 때립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과 거짓과 비겁함과 정의롭지 못한 모든 죄악들을 다 지우거나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다른 사람들이 기도할 때 흔히 하는 것처럼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통회의 표시로 가슴을 치며 비통한 목소리로 자비를 호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의 결론은 당시 청중들에게 충격 그 이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경건의 모델과도 같았던 바리새인의 모범적 기도와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의롭다고 평가하셨습니다.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모임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며 도덕적으로 똑바른 삶을 사는 장로님보다 생전 처음 어쩌다 교회 전도 집회에 나온 마약 장사가 더 의롭다고 하신 격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모임 출석이나 십일조가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마땅히 해야 하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도덕적으로 똑바른 삶에 문제가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교리는 당연히 윤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럼 뭐가 문제였나요? 교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
겸손은 많이 받은 자들일수록 갖기 힘든 덕성이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겸손이 참 힘든 덕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많이 받은 자들에 대해 부러워합니다. 때로는 왜 이렇게 하나님이 불공평하냐고 원망도 합니다. 그러나 많이 받았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이 받은 자들에게 더 많이 요구하십니다. 특별히 많이 받은 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겸손이라는 덕목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대단한 성취를 했거나 명문 학교를 나왔거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겸손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들도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스튜어트 브리스코 목사는 목사에게 내재된 직업적 위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목회 초창기 시절 자신이 설교하면서 손으로 예배당 뒤쪽을 가리켰더니 모든 고개가 그쪽으로 다 돌아갔던 경우를 회상했습니다. 당시 묘한 쾌감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한 번 더 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죠. 그는 그때 자신이 교만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조종하고 싶고 자기를 드러내고 싶고 관심의 집중이 되고 싶은 저급한 욕구에 휩싸일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바리새인은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엘리트 그룹이었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남들이 받지 못하는 교육을 받았고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특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겸손히 사람들을 섬겼어야 하나 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와 종교적 열정과 도덕성을 자랑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많이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좋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학교를 나온 자, 훌륭한 직책을 가진 자, 찬양이나 가르침, 미술, 운동, 기술 등의 남다른 재능을 가진 자, 남들보다 좀 잘 생기고 신체 조건이 더 좋은 자, 더 높은 위치에 있거나 더 부유한 자, 더 많은 영적 경험을 했거나 더 오래 교회 생활을 한 자, 유달리 도덕적이고 나름 의롭게 사는 자, 종교적 열심이 뛰어난 자, 이 중에 어느 하나라도 걸리면 여러분은 많이 받은 자입니다. 그 말은 겸손하기가 그만큼 더 어렵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천사 중 가장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그가 교만하여 타락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을 일삼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고린도전서 4:7에서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라고 질타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자랑하지 맙시다. 더 낮아져서 섬기며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립시다. 더 받은 자들일수록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가능하다
첫 번째 교훈이 경고성이라면 두 번째 교훈은 겸손을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입니다. 겸손하기 위해 우리는 존경받는 유대교 교사 엘리에셀 벤 히르카누스가 임종 시 그 제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가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비유의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들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그는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는 자, 더러운 세리를 보며 자신의 비교 우위를 확인하고 만족해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면에서 세리보다 바리새인을 더 닮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기보다 좀 못한 사람과 비교하고는 우쭐해합니다. ‘흠 저 사람은 아까 밥 먹을 때 보니까 기도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나를 봐. 나는 커피랑 치즈 케이크 한 쪽 먹을 때도 5분간 기도하지!’ ‘교회 오다가 저 집사가 모는 차를 봤는데 신호 위반 세 번에 끼어들기 한 번, 거기다 속도위반은 무지막지하더구먼. 그러나 나는 신호 위반 딱 한 번밖에 안 했고 그 후에 바로 회개 기도 했어!’ 이런 식의 비교는 우리를 교만하게 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게 만듭니다. ‘저런 부도덕한 사람 같으니라고. 저런 무능한 인간을 봤나, 저런 무식한 놈 좀 보세요.’
그러나 이런 태도는 위험할 뿐 아니라 바보 같은 짓입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서로를 비교하여 자기를 자랑하는 고린도 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에 대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질타했습니다(고후 10:12). 왜냐하면 그들은 비교의 기준을 잘못 골랐고 참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상 주시는 이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으며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자꾸 인식한다면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겠습니까? 한때 제가 섬겼던 교회의 청년부는 축구를 참 잘했습니다. 교회끼리 붙으면 지는 적이 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그 팀이 처음으로 목동 잔디 구장에서 경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팀의 주장 선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대로 된 구장에서 경기를 하니까 일단 구장이 무지하게 크고 공을 차도 잘 안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국가 대표팀 골키퍼들이 골킥을 하는 것 보면 하프라인을 훌쩍 넘기는데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잘하는 교회 팀이라고 해도 국가 대표와는 견줄 수조차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분 앞에 있음을 인식하십시오. 쓸데없는 자랑이 나오려는 순간 모든 것을 주신 그분을 기억하십시다. 낮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인정과 긍휼을 받게 한다
예수님의 오늘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스스로에 도취되어 멋있게 기도했습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인상을 받고 ‘야, 그 사람 정말 기도도 잘 하고 역시 영빨이 보통이 아니야!’라고 찬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겨워 견딜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경우는 정반대입니다. 누가 그를 눈여겨봤겠습니까? 그의 기도에 누가 관심을 기울였을까요? 욕하는 사람은 좀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뭐 저런 것까지 여기 와서 기도한다고. 나 참, 꼴값도 가지가지 떨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마당 구석진 곳에서 무너져 내리는 그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그 사람을 향한 자비로 넘쳐흘렀고 그분의 눈은 그에 대한 인정으로 빛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겸손은 단순히 사람과의 인간관계에 얽힌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덕성입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감과 겸손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를 말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야고보서 4:6의 말씀은 가장 단도직입적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고 싶습니까? 그분의 인정과 축복을 경험하기 원하나요? 겸손하기 바랍니다.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특별히 그리 크지 않은 교회를 목회하면서 경험하는 한 가지 축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계속 느끼게 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우쭐거리려 하다가도, 조금 자랑하고 싶다가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입이 쑥 들어갑니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많은 실패를 통해 교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조금씩 배워 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저는 제 삶을 통해, 그리고 제 주변에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푸심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무엘 로간 브렝글 박사의 이야기도 그것을 보여 줍니다.
사무엘 브렝글은 뛰어난 미국 대학생이었고 그 해 수석 졸업생으로 대표 연설을 했습니다. 졸업에 즈음하여 크고 영향력 있는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를 했고 그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에 머물며 계속 설교를 했지만 그의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더 많은 불신자들과 접하며 복음을 좀 더 퍼뜨리기 원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구세군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소문이 별로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유력한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런던으로 갔으며 구세군의 지도자 윌리엄 부스 밑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스는 그의 역량을 시험해 보기 위해 20여 명의 후보생들과 함께 그를 훈련 요새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열성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브렝글이 처음으로 맡은 일은 산더미같이 쌓인 동료들의 진흙 구두를 닦는 일이었습니다. 진흙을 털어 내면서 그의 마음에는 굉장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일류 교회를 버리고 런던에 온 것이 겨우 이 일을 하기 위해서인가?’ 마귀의 음성에 거의 굴복했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의미심장한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주께서)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요 13:4). 그는 마귀의 교활함을 간파하고는 외쳤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수건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으실 수 있으셨다면 제가 후보생들의 더러운 구두를 못 닦을 이유가 없습니다.” 겸손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고 그의 사역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위대함으로의 하강
하나님 나라에는 많은 역전의 법칙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낮추면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자기 과시와 카리스마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이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땅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심으로 지극히 높은 이름을 얻었습니다. 빌립보서 2:6~11은 그 사실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려면 우리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빌 하이벨스는 겸손에 대해 ‘위대함으로의 하강’이라는 멋진 표현을 썼습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까? 낮아지십시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우리가 똑똑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원이 더 있기 때문에, 우리가 더 정통 교리를 신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약해지고, 더 낮아지고, 더 마음으로 겸손해질 때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리처럼 참으로 가난한 마음으로, 상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주께 부르짖으십시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눅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눅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주님의 비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 깜짝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의인이라 믿었던 바리새인이 불의한 자가 되고 죄인이라 믿었던 세리가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그는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이나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협박하고 그래서 물질을 빼앗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의를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간음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즉 말씀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았던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신앙적으로 경건하다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헌신 또한 대단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경건한 사람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이라고 하지만 24시간 금식이 아니라 해 떠 있을 동안 행하는 금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금식은 물도 먹지 않는 절대 금식으로 해가 뜨겁게 내려쬐는 중동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또한 소득의 십일조를 철저히 했던 사람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마23:23), 달리 표현하면 집에서 나는 극히 사소한 작물에 대한 십일조까지 엄격히 계산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태도는 정말 존경할만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십일조를 잘 내기로 유명하지만 과외로 들어오는 소득까지(예컨대 선물) 십일조로 계산하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기도할 만도 합니다. 그들은 민족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사람들입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를 통치하면서 국세는 직접 걷어 갔지만 지방세는 세리들에게 맡겼습니다. 세리들은 일정액만 로마에 바치면 되었기에 백성들에게 사기치고 협박하여 더 많은 돈들을 거두어갔습니다. 이것을 토색한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치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소속되지도 못했고 모든 공민권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들은 죄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바리새인이 더 경건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어떠합니까? 충격적일 정도로 우리의 판단과 상반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이 번역은 마치 바리새인도 의롭지만 세리가 더 의롭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처럼 오역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개역개정판은 다음과 같이 정확히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마치 바리새인과 세리 둘 사이에 재판이 벌어졌는데 하나님이 세리가 옳다고 손을 들어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리새인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세리는 도대체 무엇을 잘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이 세리가 삭개오처럼 자기 재산을 절반을 내어놓았다거나 자기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는 구체적인 회개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가슴을 치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세리가 옳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바리새인은 왜 실패했는지 또 세리를 옳다 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 분명히 깨닫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바리새인의 실패 1.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함
바리새인은 기도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실패는 곧 그들의 삶의 실패와 같습니다. 기도는 그의 내면의 의식구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한대로, 또 간구하는 대로 그렇게 변화되어 갑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즉각 문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고,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며 기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청원하거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등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에서는 전혀 이런 면을 볼 수 없습니다. 11절과 12절의 기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여기에 무슨 청원이 있습니까? 여기에 무슨 찬양이 있습니까? 그는 실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랑은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는 데서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아마 관례적으로 성전에 기도하러 나왔을 것입니다. 그때 저 멀리서 세리가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이런 감사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세리와 비교해 보니까 자기는 너무 근사한 사람처럼 보이고, 자기는 너무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기도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옆을 바라보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사람을 향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기도가 사람을 향할 때는 비교의식이 들어 열등감에 빠지거나 반대로 교만해지기도 합니다. 우리 기도는 위를 바라보는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는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거나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는 기도입니다. 위를 바라볼 때는 결코 교만이나 자기 의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느꼈던 감정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6장 5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선지자는 말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제일 먼저 자기 입술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거짓과 허물이 다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게 되었을 때 그의 첫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5장 8절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기만 잡으며 일상사에 잡혀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움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기 죄인 됨의 발견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진정한 우리 모습은 세리처럼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하는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전에 왔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자기의 종교적 경건만 자랑하고 나옵니다. 아마 이런 삶은 다른 곳에서도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성경 공부와 연구 모임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자기 지적인 만족만 취하고 나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것들은 실상 하나님의 사랑이나 하나님 체험이 빠져버린 무미건조한 교리일 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자기의 신념과 욕망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실상은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그것은 올더스게이트에서 진정한 회심을 하기 전의 요한 웨슬리와 같다 할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입니다. 감리교를 영어로는 Methodist 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형식주의자 또는 율법주의자의 의미입니다. 그만큼 웨슬리가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율법주의자처럼 살았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역에서 열매가 없었고, 본인은 늘 불안해하며 살았습니다. 율법주의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비판의 시각을 갖기도 쉽고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 대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만든 기준에 합당할 때는 스스로 자기가 의로운 존재처럼 착각하며 그렇지 않은 세상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올더스게이트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그의 사역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그의 말을 듣기 시작하고 그의 말을 통하여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구원역사가 그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전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아무리 많은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 선생이라고 불렸을지라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를 향하여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3:5). 거듭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절대 자기 스스로를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세리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의 기도들은 우리의 모범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금식하며 재를 무릎 쓰고 나아갔으며 이렇게 회개하였습니다.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1:7)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의 잘못 2. 다른 사람을 멸시함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사람을 판단하고 멸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의 자세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달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긍휼의 마음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해의 눈이 생기는 것이지요. 같은 죄인으로서 느끼는 동병상련과 같은 마음입니다. 거대한 적을 앞두고 서 있을 때는 약한 자들끼리는 서로 단합하고 함께 싸우는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설수록 인간은 연대성은 더 견고해집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하면서도 내 마음이 더 무뎌지고 사람에 대한 판단의 마음이 든다면 실상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의에 취해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리처럼 기도하고 난 이후에 다른 사람을 판단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오히려 다른 이도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은 결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 신념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 신념을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도덕 기준으로 보니까 세리가 기분이 나쁩니다. 그와 한 지붕 아래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주 불쾌합니다. 그래서 세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세리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고 분리시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도덕주의자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마음이 없습니다.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며 그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격리시킵니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그가 사람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속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는 자기 일만 열심히 해야 합니다.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누가 그 은밀한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참으로 무거운 양심으로 하나님과만 상대할 때에는 타인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거기서 전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홀로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알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타인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비밀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우리는 그에 대해서 판단할 수도 알아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바리새인은 교만하게 함부로 한 인간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곁에 세리와 같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용납해야 합니다. 내 판단으로는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또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옳고 정확합니다.
이렇게 기도한 세리의 이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혹시 이 세리는 삭개오가 아니었을까요? 아마 삭개오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를 세리 삭개오와 연결시킬 수는 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19장 1절에서는 세리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처럼 세리와 같은 기도를 올리고 있었지 않았을까요? 자기 인생을 후회하며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있었지 않았을까요? 그러다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 기뻐 예수님을 만나러 갔고 여의치 않자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코믹하면서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는 결정적인 만남이 이렇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당장 나온 반응은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어놓겠다는 고백입니다. 자기가 토색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스스로 의롭다는 바리새인은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가고 결국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반면에 죄인중의 죄인이었던 세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길로 갔습니다. 누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오류는 전도현장에서 왕왕 벌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앙인을 보면 그가 전혀 신앙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취급을 하려 합니다. 자기는 마치 구원의 확신에서 한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에게 접근합니다. 그러나 누가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는데 그 안에는 예수님은 빠져 버리고 냉랭한 사영리 식의 구원교리만 붙잡고 있는지. 상대방은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실상 그가 세리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인지.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마음에 이런 판단의 마음이 없지는 않은지 조심해야 합니다. 또 스스로도 항상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리와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리는 하나님 앞에 고개도 못 들고 죄인의 모습으로 나갔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다 드러내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은 그가 의롭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마치 자신은 의롭고 구원에 확신도 있는 사람처럼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로 다른 사람도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속지 마십시오.
상한 심령의 기도
세리의 기도는 단순히 바리새인과 비교되는 기도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가장 모범적인 자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체험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바리새인와 세리에게 예수님이 오신다면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또 그 기쁨 또한 세리가 더 클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 그가 더 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우리에게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7장 41절에서 43절에서 다음과 같은 비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빚진 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니리온의 빚을 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주인이 둘 다 갚은 갚을 것이 없으므로 빚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러면 둘 중에 누가 더 고마움을 느끼겠습니까? 당연이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 두 기도에서 세리는 더 많은 죄를 지었기에 더 많이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신의 빚이 적다고 하여 하나님께 덜 감사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빚쟁이이면서도 자기는 덜 빚졌다고 하며 스스로 당당해 하며 한편으로는 세리를 나무라고 있는 격입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서 많이 발생했습니다. 바리새인 중 하나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눅7:36-39).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서 영접하며 입 맞추지도 않았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죄 많은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고 새 인생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고마워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스듬히 누워 계신 데 그 뒤 모습만 보아도 감사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이 예수님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여자는 자기 머리털로 그 눈물을 닦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 맞추고 그 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왜 이런 행위를 하였습니까? 많은 죄를 탕감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갈 때 이런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이런 은혜의 마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세리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물론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입술만의 상투적인 고백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바리새인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 저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모르는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며 기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찢는 기도입니다. 14절 말씀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나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할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을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의인인 채 하며 자기를 높일수록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51편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불쌍한 자를 보면 참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울고 있는데 외면 할 사람이 없듯이,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애통하는 심령을 못 본 채 외면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프면 온 신경이 쓰입니다. 그렇게 아파해야 피와 면역체들이 그쪽으로 몰리고 그래서 낫게 됩니다. 상한 심령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이 땅으로 끌어내리는 통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이 고백하였듯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습니다.”(대하14:11) 사람들은 강한 자를 따라가지만 하나님은 약한 자를 도우십니다. 약한 자가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리처럼 겸손하고 자기 가슴을 치는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 예수님의 비유 강론 13
누가복음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가 말씀하고자 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되 단순히 낙심하지 말고 열심을 내어 끈질기게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천국 비유라면 이 비유 역시 기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상에서 무시하는 과부와 같이 이 땅에 오셔서 진짜 믿음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는 분이시기에 인자가 다시 오실 때에 그분이 주신 믿음을 발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하심을 담고 있다면 기도하되 낙망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천국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는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9절)라고 시작한다. “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앞의 비유와 연결하여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흔히들 이 비유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어떤 것인지를 교훈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유의 서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바리새인과 세리가 하는 기도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신 것뿐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라는 종교적인 행위 속에 드러난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을 통해 천국을 말씀하신 것이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10절)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였는데 그 상황은 확연히 달랐다. 성전에서 제사가 이루어지면 제물을 가진 자들은 제단 가까이 모여 들었다가 제사장이 그 위에 놓인 양을 잡아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게 된다. 제물을 잡는 예식을 마치면 제사장은 성소 안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제사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마치면 다시 제단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제사장이 제단을 떠나 성소에 들어간 때에 제사에 참여한 자들은 각자 기도를 하는데 바리새인과 세리가 한 기도는 이때 행한 기도라 할 수 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라고 하였는데 바리새인이 서서 기도하였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라 할 수 있다.
기도에서 드러난 이 바리새인의 삶은 토색하지 않으며 불의와 간음을 행하지 않고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자이다. 또한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경건한 자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바리새인의 기도는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인정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리가 저지르고 있는 죄들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흔히 오늘날 교인들의 기도와 같이 무엇을 달라고 기도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란 누구를 암시하고 있는가? 기도를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바로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있는 자였다. 믿는다고 하는 말은 아주 확신한다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보면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다 진짜 믿음이 아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이런 것이 바로 우리 모든 죄인들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주”(히 12:2)라고 하셨다면 이 땅의 인간들의 믿음은 다 가짜라는 말이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믿음이다. 그런 바리새인이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고 하였는데 여기 “다른 사람”(9,11절)이란 말은 ‘나머지 사람들’, ‘남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즉 자기 외에 나머지 사람들을 멸시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자기 의와 비교하여 아주 하찮은 사람들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죄인 중의 죄인이라 할 수 있는 세리와 같지 않음에 대해 감사한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라고 하였다. 이것이 세리의 기도였다. 아니 이것이 세리의 마음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세리는 로마 정부로부터 할당받은 세금의 양을 바치기 위해 동족들에게서 그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 일부 착복한다는 인식 때문에 유대인들은 죄인의 대표상으로 치부하였다. 그래서 “세리와 창녀”(마 21:31-32), “세리와 죄인들”(마 9:10-11, 눅 15:1)을 같은 부류의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이란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나 흠이 없는 자들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건한 자들의 대표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세리보다 바리새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자,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였고 비유의 결론을 그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예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절).
비유의 결론은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기도를 비교하신 것이거나 종교 생활을 비교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새인과 세리가 그 다음 성전에서 내려가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말씀하고자 하신 것도 아니었다. 본문은 세리가 기도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그 다음 삶에 대해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의롭다고 하시느냐 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한 자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세리였다. 본문에서 세리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는데 헬라어에는 앞에 정관사(헬, 호)가 붙어 있다. 즉 ‘내가 그 특정한 죄인’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온 세상 가운데 누구도 탓할 자가 없고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은 자기 자신 혼자라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완전한 절망 가운데 있어서 도무지 하나님의 의에는 도달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리가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대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의 근거가 우리 쪽에 있는 것으로 여기고 말씀을 또 율법으로 붙잡아 버린다. 우리 자신을 이렇게 낮추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우리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었다(눅 16:15). 우리 역시 마찬가지 인간이다. 토색하지 않고 불의, 간음하지 않은 것이 결코 의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이 의가 되지 못한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Q.T를 하며 매일의 삶을 말씀으로 살려는 결심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의는 가짜 의이기 때문이다. 의롭다고 하심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1-26)
그러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낮추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페이노오’라는 말인데 이 말은 ‘타페이노스’(떨어뜨리다, 내던지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리고 “높이다”라는 말은 ‘휩소오’라는 말인데 ‘휩소스’(하늘, 고도)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스스로 높이는 자는 자기를 의롭다 여기는 자이고 곧 자신이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결국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곧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를 떨어뜨리시고 자신을 완전한 절망 가운데 내던져져 있음을 인정하는 자를 하늘로 보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늘로부터(위로부터) 의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눅 1:78, 24:49).
하나님은 이렇게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뜻을 좇아서 사람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것과는 반대로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의로 여기고 자신의 의를 기준으로 해서 살아간다. 상대를 자신의 의에 맞추기 때문에 항상 나는 의롭고 다른 사람은 의롭지 못하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괜찮은 존재인가? 결코 착각하지 말라! 의가 없는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렇다면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결코 종교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다.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된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셔야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앞에서 불의한 재판장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을 선포하였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라고 하셨는데 그때에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그 믿음”을 가진 자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은혜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다(20180812 강론/김영대).✞
비유13. 눅 180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pdf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 예수님의 비유강해 9: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64) 13650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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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있는 영적 암 덩어리: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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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내용
1. 문맥: 무엇에 관한 가르침인가?
이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단순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이 무엇일까요? 얼른 보면 이 비유는 기도에 대한 교훈으로 보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도 기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고, 이 비유 자체도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두 비유가 기도라는 배경을 전제하고 있지만, 결국 두 비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시고 그 의로움을 인정해주신다는 점에서 접점을 가집니다. 이 비유의 결론에서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신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14). 단순히 기도 응답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맥상 이 비유 뒤에 있는 말씀들도 이 생각을 지지합니다. 15~16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17~30절에서는 부자 관리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어린 아이나 부자 관리의 기사를 통해서 가르치는 교훈은 그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자기 무력 무능함을 알고(기꺼이 인정하고) 부모만 의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바라는가 아니면 부자 관원처럼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있고 무엇을 행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을 신뢰하고 재물을 의지하는가 하는 도전입니다. 교만과 겸손이라는 주제가 전체 말씀에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두 기도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과 들어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 비유와 의미 이해
A. 비유의 대상(9)
비유를 살펴보지요. 9절은 주님께서 누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그 대상은 한 마디로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교만에 대한 아주 예리한 정의이며 이것은 결국 하나님 보다 자기를 믿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불신앙이거나 불신앙적입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B. 기도하는 두 사람(10)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앞의 비유에서 힘 있는 재판장과 무력한 과부를 대조하신 것처럼, 이 비유에서도 주님은 당시 유대사회의 양극단에 자리한 두 사람을 대조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흠 없는 대법관과 전과 10범의 살인범의 대조 같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은 종교 위선자의 대명사로 들리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존경을 받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로마를 대신하여 동족에게 세금을 뜯어가는 매국노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사회적 혐오의 대상입니다. 이 두 사람이 각각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갑니다.
C. 기도하는 두 사람의 태도/자세(11a, 13a)
먼저 두 사람이 기도하는 자세 혹은 태도가 대조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고(11)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13). ‘서서 따로’ 기도했다는 말은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 자리를 잡고’ 기도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예레미아스). 저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생 때 교회에서 수양회를 가서 저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기도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고 기도의 골방까지 따라 들어가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아무도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세리는 어떻습니까? 그는 성전에서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성전 밖 이방인의 뜰이었을 것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아픔에 압도당한 것 같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는 말이 그것을 설명해줍니다. 유대인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한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또 그는 가슴을 쳤습니다. 가슴은 죄의 자리로 간주되었습니다. 가슴을 치는 행위가 형식적 회개의 상징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본래의 의미는 죄가 단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가슴을 침으로써 비통함과 뉘우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두 사람의 태도의 차이점입니다.
D. 기도하는 두 사람의 언어(11b~12, 13b)
이 두 사람의 기도의 언어도 대조적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b).” 기본적으로 그의 기도가 감사라는 사실을 주목해야겠습니다. 이 자체는 나무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익을 위해서 신앙을 타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가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의 정조를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토색 즉 도둑질, 불의나 간음을 하는 자 그리고 유대인의 혐오의 대상인 세리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제가 동성애자가 아닌 것, 제가 낙태나 동성애와 같은 이슈들에 대해서 분명한 성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 제가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는 것, 제가 그런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 제가 교회들이 타락한 시대에 복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기도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의 기도는 계속 이어집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2).” 율법에 금식을 명한 것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의 금식뿐입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 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정기적으로 했습니다. 그는 율법이 명한 것에 넘치게 순종한 것입니다. 율법은 수확의 십일조를 명합니다. 그런데 여기 ‘소득의 십일조’라는 표현은 수확이나 일정 수입의 십일조를 넘어 돈으로 구매한 것이나 음식에서도 십일조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23:23 참조). 역시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발적 헌신이라고 할 때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의 삶이나 행위 자체를 비난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세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제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b).” 이 짧은 한 마디 기도의 언어 속에서 우리가 쉽게 발견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만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 두 길, 두 결과(14a)
이제 주님께서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4).” 첫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리새인 보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당락의 문제입니다. 그 당락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두 번째로 주목해보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 비유가 기도 응답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행위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다 기도하기 위해서 한 길로 성전에 나아갔지만, 두 사람의 길은 결국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또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다 기도했지만 인생의 종착지가 달랐습니다. 주님의 이 결론은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야 익숙한 이야기지만, 이 결론은 그들의 상식과 판단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아니라 예배당의 끝 자리에 왔다가 예배가 마치기가 무섭게 도망가듯 예배당을 떠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3. 문제는 마음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았는가, 그들이 어떤 기도의 언어를 사용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자세와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언급할 한 가지는 바리새인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그의 눈에는 토색, 불의, 간음하는 사람들과 세리들이 의식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자리에서 살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종교적 경건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윌리암 바클레이의 말대로, 그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자랑하는 나쁜 간증입니다. 바리새인의 비교 대상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과 비교할 대상이 없었고 하나님만을 의식합니다. 그의 기도의 언어에는 오직 하나님과 죄인인 자신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의식, 즉 마음의 문제입니다. C.S.루이스는 “경쟁적이고 상대 비교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교만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은 비교 기준이나 비교 대상에 상관 없이 자신을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느끼도록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의식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이런 마음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 기도하는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려고 한 대상들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이 교만은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은 가장 은밀한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기도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인 교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의 관심, 기도까지도 타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경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을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얼마든지 현대판 바리새인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너는 복음도 모른다.” “그 교회에는 복음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얼마나 그런 자리에 빠져들어가기 쉬운지 저는 압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로 무서운 일이고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경고를 늘 인식해야 합니다.
4. 바리새인의 편에서 성경을 읽어라.
신학자 대럴 구더(Darrel Guder)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을 우리 현실에 맞게 이해하고 싶다면 바리새파에 속한 한 사람 편에서 신약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듣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문구를 천박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 정도로 기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배웠고 알기에 적어도 바리새인처럼 대놓고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리처럼 기도합니까? 물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의식, 우리의 마음 속에는 누가 그리고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은 진짜입니다. 우리가 일상적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생각이나 대상은 많습니다. 들어왔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은밀히 기도하는 시간, 그 자리에서 우리의 의식을 채우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지배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자기의 의로움을 믿을만한 근거들이 충분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는 늘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늘 율법에 순종하되 넘치도록 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이라고 여기는 행위들과는 멀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런 모습, 행위, 삶을 기억해 주셔야 한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이고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가장 무서운 영적 암 덩어리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가능한 선행이나 의로움이나 업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는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신 것이며,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의, 곧 자기 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넘어졌고 우리들도 넘어집니다. 주님께서 가장 통렬하게 비난하셨고 지적하신 것이 바로 자기 의라는 교만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본성을 가진 자들이기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바리새인의 편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읽으라는 말입니다.
5. 은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14b; 시 51:17; 사 57:15).
주님께서 최종 교훈을 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b).” 바리새인은 버려졌고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자들만이 세리의 자리로 옮겨가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세리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정직하게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자기를 발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의 양심을 통하여 무엇을 얻게 하실까요?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고, 은혜가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서 그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시편 51편의 참회시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절망한 자, 마음이 상한 자를 품으시는 하나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런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고 알고 경험하고 동행하는 삶에서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의와 교만이라는 암 덩어리와 싸울 수 있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런 하나님을 만났기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사 6:5).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눅 5:8).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한 번이 아니라 지속되는 경험입니다.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깊은 고난을 통과하고 그가 하는 고백은 이것입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0:4; 42:5~6).” 하나님께서는 이런 은혜를 우리 모두의 삶 속에 허락해주시기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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