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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
아브라함이 아들을 약속받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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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창세기 18. 18. 1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8/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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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 KLB –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 –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나무 숲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 다. 한낮의 가장 더운 시간에 아브라함이 자기 천막 입구에 앉았다가 눈 …
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1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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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장 요약 : 네이버 블로그 – NAVER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인격적으로 교통하시며, 사람과 함께 희로애락을 누리신다. 이것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체험하는 …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2/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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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8장
창세기 18장. 창18장을 읽으세요. 요약: 아브라함에게는 우연 같게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여 재차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Source: oldandnewtestament.tistory.com
Date Published: 7/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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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월 17일. 창세기 18장. – 하늘품은교회
창세기 18장. 중보기도. 18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사라의 웃은 일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계획을 알리신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
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2/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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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형상으로 오시다(창세기 18장 1 ~ 5절)
창세기 17장에서 지난시간 우리가 본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집에 방문하신 일이 17장에 기록되었는데 또 다시 18장에 역시 또 기록한 내용이 …
Source: www.korbaea.com
Date Published: 3/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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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금) “창세기 18:1-33” / 작성: 김종필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외면합니다. 어떤 때는 따르고, 어떤 때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2/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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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장1- 8절 – 성경묵상 – 설향목 – Daum 카페
{ 창세기 18장1- 8절 }.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 …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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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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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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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
아브라함이 아들을 약속받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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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창세기 18장 요약
[천사들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본장은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천사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아브라함이 중보 기도를 드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던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접대하였다(1-7절). 그런데 그들은 실상 여호와와 천사들이었고, 여호와를 환대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 아들을 얻게 할 것이라고 축복하였다(8-15절). 그후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임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다(16-21절). 이에 아브라함은 그들을 위해 간곡한 중보의 기도를 여섯 번이나 드렸다(22-33절).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다.
1. 천사들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대접
1) 천사들의 방문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개명되었고, 할례언약을 통하여 믿음이 견고해 졌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이제 창세기 18장에는 천사들의 방문을 기록한다. 천사들의 방문은 아브라함과 교제하고 교통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우리가 아브라함이 통과한 과정을 체험할 때, 동일한 원칙으로 우리에게도 하나님과의 교제와 교통을 위한 하나님의 방문을 체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장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어느날 오정 즈음에 장막문에서 쉬고 있을 때, 장막 맞은편에 사람 셋이 홀연히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들은 천사들이요, 그중에 한 분은 여호와 자신이었다. 처음에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 중 한 분이 주 곧 여호와이시며, 다른 두 사람은 천사임을 몰랐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사람과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체험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체험한다. 왜 하나님은 천사들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친근한 교통을 위해서이다.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이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났다고 하자. 아브라함은 매우 놀라고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친근한 교통을 하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모양으로 접근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틀 속에 갇혀두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호칭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신성에 초점을 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인성도 있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속성도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우리에게 어울리는 속성은 신성보다는 인성일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과 친근한 교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람과 가장 어울리고 친근한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할 때,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셨다. 주기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부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친근하고 달콤한 호칭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람 모양으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신 것은 의미가 매우 깊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육적 몸을 벗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고, 성령으로 인도받는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거의 대부분 사람의 수준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인격적으로 교통하시며, 사람과 함께 희로애락을 누리신다. 이것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친구처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친구 되시려고 천사들과 함께 그를 방문하셨다. 창세기 18장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마치 친구처럼 이야기했음을 보여 준다.
2) 아브라함의 영접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장막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들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숙하고 그에 따른 신령한 영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감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의 진면목을 분별하여 알아본다. 아브라함은 겸손한 태도로 몸을 땅에 굽히며 그들을 영접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듬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할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3-5절). 아브라함의 말에 하나님은 “네 말대로 그리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부인 사라에게 떡을 만들게 하고 종에게는 자신이 직접 고른 기름진 송아지를 요리하게 하였다. 하나님을 신속하게 영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대접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말한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성문화된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율법을 준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왜냐하면 누군지도 잘 모르는 나그네를 그의 장막으로 초대하여 융숭하게 대접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자신이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나그네를 초빙하여 겸손함과 진실함과 풍성함으로 대접한다면, 그 사람은 율법을 준행하고 있는 사람이요, 선지자들이 말한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특별히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을 대접하는 일은 천사를 대접하는 것 그 이상이다. 주님을 대신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교회생활에서 각 지체들이 서로 대접하는 일에 힘쓸 때, 하나님의 왕국의 실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2. 후손의 약속에 대한 재확인
1)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계시하심
아브라함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소재를 물으셨다. 그리고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축복하셨다. 18장 10절, 14절에서 하나님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두 번이나 말씀하셨다. 여기서 “기한이 이를 때”라는 말은, 원문으로 ‘봄날에’ 혹은 ‘생명의 때’라는 뜻이다. 사라에게 이삭이 출생하는 기한이 이를 때는 하나님의 방문이 있을 때이며, 그 때가 바로 ‘봄날’이요 ‘생명의 때’이다. 그러므로 사라의 몸에 이삭이 잉태했다면,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오신 것이며, 아브라함의 가정은 생명의 때를 맞이한 것이다. 이삭은 반드시 생명의 때에 잉태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다시 이삭 출생을 언급하신 것은 17장에서 약속하신 언약을 재 확증하신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17장에서는 할례언약과 함께 언약을 확증했다는 것이요, 18장은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통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계시를 받았다는 점이다. ‘계시’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고 확신에 넘쳤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친근한 교통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가져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된 언약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통 안에서 약속된 언약에 근거한 어떤 계시를 받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성숙해지고 견고해질 것이며 확신에 넘칠 것이다.
2) 사라의 불신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아들을 주실 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장막에서 이 말씀을 들은 사라는 웃으면서 그것을 의심했다. 이미 경수가 끊어져 버린지 오래된 사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라에게 그 약속은 너무나 기쁜 것이었지만, 오랜 인생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라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성을 초월한다. 이삭의 출생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어떻게 100세가 되어 죽은 것 같은 몸과, 90세의 경수가 끊어져 생산기능이 사라진 몸에서 아들이 출생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처럼 죽은 나무에서 잎이 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삭의 출생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므로 약과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의 방법을 초월한다.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한 동정녀의 몸에서 아이가 잉태되어 출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 의심치 않고 마음에 믿어진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라고 말한다.
3)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라를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방법으로 지적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복하여 약속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는 그가 약속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라에게 의심을 극복하고 믿음을 갖도록 하셨다.
우리에게 의심이 있을 때 하나님의 속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성경 66권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구구절절 하나님의 속성이 계시되어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에스더서는 ‘하나님’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에스더서가 포함된 이유는, 그 책에 선택된 백성들을 악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하나하나 체험해 갈 때마다, 우리 안에는 의심이 사라지고 그 대신 믿음이 점점 견고해져 갈 것이다.
3. 의인의 간구
1)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계획을 알려 주심
장막에서 환영만찬이 끝나자 세 사람은 일어나서 소돔을 향하고, 아브라함도 그들을 전송하려고 함께 나갔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인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기가 막힌 말씀을 계시하셨다. 17-1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신 이유는 여호와의 도(길)를 지켜(순종) 이 땅에서 의(옳은 일)와 공도(바른 행위)를 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도, 즉 하나님의 길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다. 옳은 일과 바른 행위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이런 하나님의 길을 가야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이루질 것이다. 그러나 역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우상의 길을 갔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신약시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도 하나님의 길을 가야 한다. 주 예수님과 사도들이 모범을 보이며 그 길을 갔다. 하나님의 길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신약시대 예수교회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세상 길을 간다면, 그 결과는 세상과 함께 멸망이다.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를 말씀하신 다음,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에 대하여 계시하셨다. 특히 소돔과 고모라를 아브라함의 가정과 대조하신 것이 인상적이다. 이는 소돔 고모라는 여호와의 길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죄악이 심히 중하고 결국 멸망당할 상황이었다. 두 사람의 천사는 멸망의 증거들을 확인하기 위하여 소돔으로 향했다. 그러나 여호와는 가지 못하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애절하고 끈질긴 중보기도가 시작된다. 우리도 주변에 하나님의 길을 떠난 자들을 볼 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할 필요가 있다.
2)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하나님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 성을 구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청을 했다. 인간들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아브라함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섯 번의 간청 끝에 의인 10명만 찾을 수 있다면 소돔을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냈다. 소돔의 멸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예표한다.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인하여 그분께 감사하자.
4. 교훈
1) 본장은 축복과 심판을 대조하고 있다. 부지중에 하나님을 대접하고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다. 아브라함과 소돔과 고모라 사이에 나타나는 축복과 심판의 대조 양상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악인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이중적 섭리 형태를 보여 준다. 이러한 섭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며 칼뱅은 이것을 선택과 유기로 설명하고 있다. 즉 택함받는 자들의 영생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나 유기되어 심판받는 자들은 오로지 그들의 죄 때문이므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본장의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2)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은 유목인들의 전통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세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 것은 그것이 비록 유목민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사건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평적인 이웃 사랑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3) 한편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는 자신의 혈육만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어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기도였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는 오늘날 죄로 인해 심판으로 향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성도들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에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해 주고 있다.
창세기18장
창세기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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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아브라함에게는 우연 같게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여 재차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사라의 불신앙으로 인해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게 되고 자신의 행위까지 부인하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계획을 듣게 된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마실 것을 탄원한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시니라 (1절) ©
여호와께서는 17:21에서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당일에 모든 남자의 할례를 시행한 그에게 다시 나타나셨다.
마므레 상수리 나무들 근처에 있는 아브라함의 집(장막)에 찾아오심으로, 이제 임박한 아들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자녀생산의 복은 부부간의 사랑이 있는 가정에서 이루어지고 ㈁집을 지키며 여호와의 약속을 직접 듣지 못했던(17:21~22 참조) 사라가 있는 장막으로 오셔서 직접 말씀하시려는 뜻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정(午正) 즈음에 (1절)
NLT Bible 이 “about noon” 이라고 하여 (개역한글인) 본문과 같게 번역되었다. 하루 중 가장 더울 때에(in the heat of the day, KJV NIV NASB), 날이 뜨거울 때에(개역개정), the hottest part of the day (Message Bible) 로도 번역되었다.
사람 셋 (2절, 9절, 10절, 13~15절, 22절) ©
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거나 이런 저런 해석을 하는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설명해 보고자 한다.
② 분명한 것은 ‘사람 셋’ 이라고 표현했지만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10, 13, 14절로 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세 사람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여호와와 두 천사(two angels)로 보는 것 이 옳은 것 같다. 어떤 해석은 여호와의 사자와 두 천사로 보기도 했는데, 보통 여호와의 사자를 천사와 동일하게 보므로(16:7 이하) 어색한 해석이다.
③ 1절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다’고 했고, 9절에서 그들(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말하는 중에 13절에서 아브라함과 말씀하시며, 22절에서 그 사람들(천사 둘)은 떠나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섰다고 한 것과, 19:1에서 ‘소돔으로 떠난 사람들’이 ‘두 천사’로 확실히 설명되었다.
④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이 대접하는 상을 차린 가운데 9절에서 두 천사가 사라를 찾고(실제로는 사라를 찾는 것이 아니고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임), 10절에서 여호와께서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이는 14절에서 다시 한 번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고 반복하심으로 같은 여호와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0절에서 ‘내가’의 ‘나’(I)는 ‘그가’의 ‘그’(He)와 같은 ‘하나님’으로 보아야만, 14절과 불일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역한글 성경은 10절에서 ‘그가 가라사대 ’ 로 표현하여 ‘여호와’로 본 것 같다.
⑤ 9~10절을 모두 천사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갑자기 대화에 끼어드시는 모습이 되는데 상황 전개 상 어색한 모습이 된다.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2절)
100세 된 노인이요 많은 종들을 소유한 아브라함이 손수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굽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모습도 있는 그였지만, 겸손하고 베푸는 행동에서 하나님을 대접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떡을 조금 가져 오리니 (5절) 세 스아 (6절) ©
우리 문화에서도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 놓고도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많이 드세요’ 라고 인사를 한다. 아브라함도 귀한 손님을 갑자기 대접하게 되어 그렇게 인사를 했나 보다. “떡(빵)을 조금 준비할 테니 잡수시고 가세요”
그러나 그가 사라에게 준비하라고 한 (밀)가루의 양은 ‘세 스아’나 된다. ‘스아’는 7.3리터 이므로 7.3X3= 22리터 가 된다. 우리에게 친숙한 단위인 ‘말’로 환산하면 약 1.2말 이 된다. 이 정도의 가루로 빵을 만들면 30명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쾌활(快活)케 하신 후에 (5절)
더운 날씨에 지나가시는(사실은 아브라함을 방문하시려는 목적) 손님들이 잠시 쉬고 음식을 통해 심신을 상쾌하게 하시라는 뜻이다.
고운 가루 (6절) ©
제분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은 몇 백년 전까지도 예를들어 ‘파스타’ 같은 음식은 귀족들의 요리였다고 한다. 하물며 아브라함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엄청나게 많은 노동력이 들어갔을 것이고, 제분 효율이 낮아서 고운 가루는 귀한 식재료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런 귀한 재료를 넉넉히 사용하여 손님을 대접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성을 보셨을까?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리라 말씀하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 계획도 알려주신다.
나중에 이 고운 (밀)가루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소제(grain offering)에 사용되었다(출29:40~41, 레2:1 등).
뻐터 (8절)
이것은 굳어진 우유 즉 응유(凝乳)(curd)를 말한다. 이것으로 치즈를 만든다고 하니, 뻐터라기 보다는 차라리 치즈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모셔 서매 (8절) ©
14장에서 본 바와 같이 최소한 천 명이상 되는 많은 하인을 거느렸을 아브라함이 직접 손님들 옆에 서서 시중을 들고 있다. 믿음의 조상이라기 보다 겸손의 조상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중을 들 때 까지만 해도 누구신지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3절에서 극존칭이긴 하나 사람들에게 쓰는 주(主)(lord)로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로부터 ‘내 주인’(my lord)으로 불렸다(12절).
기한이 이를 때에 (10절, 14절)
개역한글 성경은 두 절을 같이 표현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10절의 ‘기한이 이를 때에’ 를 ‘내년 이맘 때’ 로 바꾸었다. NIV NLT NASB 도 공히 ‘about (at) this time next year’ 로 번역했다.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10절, 14절) ©
이 말씀을 사라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성취되리라’ 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고, 두 절 모두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12절) ©
11절에서의 설명과 같이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버린 사라가 ‘아들이 있겠다’는 말씀에 허탈한 웃음을 짓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태도라 보여진다. 우리라도 사라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주시려면 가임기간에 주시지” 하면서 말이다.
실제 사라도 이런 넉두리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樂)이 있으리요”. 이제 하나님께서는 너무 늙어 남자의 구실을 못하고, 때가 너무 지나 여자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석남석녀(石男石女)가 되어버린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다.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15절) ©
장막문 뒤에서 “아들이 있으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못해 웃음으로 넘겨버린 사라를 부르셨을 때, 그녀는 두려워했다. 아마도 그녀는 ㈀장막문 뒤에서 혼자 자신만 알게 웃었는데 그것을 들킨 사실이 두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아신 분이 여호와셨고, 그 분을 대면하게 되자 두려웠을 것이다.
사라는 두려워서 자신이 웃은 것을 ‘승인치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부인(否認)했다’는 뜻이다. NIV에서는 ‘거짓말하다’(lie)로 번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책망을 듣지 않았는데 그것은 너무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우연히(?) 듣게 되고, 두려워하는 그녀의 입장을 생각하신 것 같다. 다만 여호와께서는 “네가 웃었느니라” 하시며 사실만은 확실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17절) ©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누구와 상의하시거나 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다. 융숭한(?) 대접 후에 떠나는 손님들을 전송까지 하는 아브라함에게, 마치 친한 친구 사이에 비밀이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17절에서 볼 수 있듯이 ‘소돔과 고모라 멸망작전’을 예정에도 없이 아브라함에게 알려주려 하신다. 18~19절에서와 같이 아브라함을 특별한 존재로 선택하신 이유까지 말씀하시며, 그렇게 가까운 사이이기에 그에게 숨길 것이 없음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 (20절) ©
고모라는 소돔에 부속된 별도의 성읍으로 봄이 좋겠다. 소돔이 고모라에 비해 규모가 컸기에 16, 22, 26절에서 소돔만이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의 소돔을 향한 청원은 소돔과 고모라 모두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두 성읍에 통틀어 10명의 의인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제 내려가서 (21절) ©
① 11:7에서 내려오셔서 바벨탑 사건을 해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판단하시려 하신다.
②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상을 모르셨고, 그곳의 죄악이 너무 중해 울부짖음이 터져나오는 상황을 알 수 없으셔서 내려 오셔서 직접 확인하시겠다는 것인가?
③ 19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公道)를 행해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나안 지역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장소로서 아주 중요하다. 소돔과 고모라는 가나안 전체를 죄악으로 전염시키고도 남을 만큼 심하게 악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13:13을 다시 한번 보라! 타락했다는 오늘날에도 금기시되는 동성애(특히 게이)가 당시에 만연해 있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④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암세포 제거 작전을 아브라함 당대에 ‘미리’ 수행하시려는 것이다.
⑤ 그렇기에 21절은 소돔과 고모라의 상태가 하나님께서 손을 보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무르익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아브라함의 의인(義人) 숫자 탄원 사건 ©
①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의 조카 롯이 생각났을 것이다. 욕심 많은 조카지만 그가 사로잡혀 갔을 때 사병(私兵)까지 동원하여 손수 구해 온 롯이 아니던가.
② 아브라함이 처음 의인의 숫자를 50명(50이라는 숫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별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음)으로 제안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즉시 그 숫자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나 보다. 45 à 40 à 30 à 20 à 10 으로 줄여가는 아브라함이 측은했던지 아니면 10명도 안 될 것을 아셨기에 그러셨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먼저 제안을 하고 감원을 수차례 탄원하고 그것을 승락하시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게 된다.
③ 사사로운 내 욕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아브라함의 간구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구해도 좋겠다.
[문제18-1]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①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보자 달려나가 영접했다.
② 세 사람은 대접하겠다는 아브라함의 제안을 수용했다.
③ 한 낮 즉 가장 더울 때 그들은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했다.
④ 아브라함은 떡(빵)을 조금 준비하겠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양을 준비시켰다.
⑤ 여호와께서는 세 사람과 별개로 나타나셨다.
[문제18-2] 다음 중 맞는 것을 고르세요.① 송아지 요리는 아브라함이 직접 했다.
② 손님 대접은 아브라함의 장막 안에서 이뤄졌다.
③ 사라는 두려워서 웃지 않았다고 말했다.
④ 아브라함은 떡을 하인들이 만들도록 했다.
⑤ 사라는 거짓말을 하여 크게 책망을 받았다.
[문제18-3] 다음 중 틀린 것을 고르세요.① 아브라함은 떠나는 손님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다.
②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
③ 아브라함의 자식과 집안 모든 자(者)들은 여호와의 도(말씀)를 지켜야 할 것이다.
④ 아브라함이 의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소돔은 멸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의인과 악인을 동등하게(같게) 대우하시지 말 것을 간청했다.
암송할 구절
10절
14절
19절
32절
정답
[문제18-1] ⑤ [문제18-2] ③ [문제18-3] ④Copyright © 2009 by Paul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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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월 17일. 창세기 18장. > 매일말씀묵상
창세기 18장. 중보기도.
18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사라의 웃은 일과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계획을 알리신 것 입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내 주여 ” 하나님께 적용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세 명 중에 한 분만 하나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았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 분 중에 소돔과 고모라에는 두 천사가 나타났으므로 이 세 분 중에 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두 분은 천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
2.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찾았고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또다시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14절: “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 하신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 사라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환경을 넘어서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담장을 넘어서듯 , 넘어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사람의 뜻과 계획과 힘으로 난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씨로 태어나 자를 의미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실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왜 아브라함에게 그대로 드러내실까요? 소돔과 고모라에 행하실 일이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아브라함의 지위나 역할과 깊은 관계가 있다 는 것을 암시합니다(18-19절). 또한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복의 근원이 되는 독특한 지위를 허락하신 목적이, 대대로 그의 집, 곧 그에게 속한 구별된 무리에게 명하여 하나님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 하신 것 이며,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에 말씀한 일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4.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한 나라임을 말씀하신 이후에, 이와는 정반대가 되는 소돔과 고모라 를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폭력이 횡행하여 그 억울함과 고통을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극에 달하였다고 하십니다(20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라는 공의와 정의의 나라이지만, 세상 나라는 즉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께서 그 죄악을 처리하실 나라입니다. 단순히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심판만 다루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소돔과 고모라를 나란히 말씀하십니다. 성격이 전혀 다른 이 두 나라를 나란히 배열하신 목적 은 무엇일까요?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 나라와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죄악의 나라이며 , 부패한 도성이기 때문입니다 .
5. 저주와 심판이 선언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 단순히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가 세상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이것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가장 명확하고 뚜렷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존하지 못할 세상 나라를 향한 의인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드러냅니다. 아브라함은 성중에 의인만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고, 의인을 인하여 그 성을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노와 심판의 저주 아래 있는 죄악의 도성 소돔을 위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 가장 타락한 도성이라 할지라도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에는 여전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른 자세임을 보여줍니다.
6. 주의할 것은 , 아브라함의 기도가 소돔과 고모라 전체의 구원을 위한 기도였지만 , 기도의 초점과 관심은 “ 성중에 있는 의인 ” 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며, 악인으로 인해 의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음도 있겠으나, 소수의 의인에 의해 소돔과 고모라 전체가 지탱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 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이 그 안에 존재하는 의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는, 하나님의 심판을 늦추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인의 존재가 이렇듯 중요합니다 . 우리의 일상 , 우리의 가정에 직장에 교회에 나라와 민족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인의 존재입니다 . 즉 의인은 세상을 향한 축복의 존재가 되며, 하나님 나라의 존재는 세상 나라를 멸하고 정복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세상 나라에 하나님 나라가 새로워지고 복과 은혜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7. 세상을 위한 기도 , 그 안에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는 간절하여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필사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7)” 그리고 “ 노하지 마옵시고 ….. 말씀하게 하옵소서 …. 감히 아뢰나이다 .” 이렇게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비록 소돔과 고모라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으나, 아브라함의 기도는 헛되지 않아서 소돔 성중에 거하면서도 소돔의 죄악에 속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던 롯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은 멸망당할 도성과 같아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대적하며, 심판을 받을 세상이지만, 이러한 세상에서 저들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입을 열어, 그저 우리 자신의 잘됨과 성공과 번영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저들을 품을 수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의 형상으로 오시다(창세기 18장 1 ~ 5절)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 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창세기 17장에서 지난시간 우리가 본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집에 방문하신 일이 17장에 기록되었는데 또 다시 18장에 역시 또 기록한 내용이 비슷한 시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17장 방문 있은 후에 18장 방문까지가 1년이나 시간이 걸린 것 같지가 않고 그의 같은 시기에 방문한 이야기를 쓰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17장 보시면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기록도 있고 18장 10절에 보면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는데 그러면 같은 한번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두 가지로 전례된 것인지 따로 예를 들어서 17장 방문이 있은 후에 몇 개월 안에 또 오셨다는 이야기 인지 어떻든 그 한해 안에 있었든 일입니다. 같은 해에 99세 때에 그 이듬해는 아들이 태어나니까 그런 이야기가 필요 없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이른 내용도 보면 아마도 아브라함 집에 방문한 이야기가 두 가지로 구전으로 내려온 겁니다. 두 가지 이야기가 그런데 어느 하나도 우리가 창세기 1장 창조기사와 2장 창조기사가 많이 다른데 그걸 섞어서 편집을 하지 않고 둘 다 버릴 수 없어서 그냥 나란히 배열한 것처럼 17장 방문기사와 18장 방문기사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 졌는데 약간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한곳에 섞어서 재편집을 한 게 아니라 두 가지 구전된 전승을 나란히 배열한 것 같다.
문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글쎄 한 번 더 오시고 그 해 안에 한 번 더 오시고 그럴 수 있지만은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요. 아들 있다는 얘기를 한번 했으면 되었지 두 번 와서 하실 리는 없거든요. 그래서 어떻든 마르레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에 오셨다는데 마르레가 어디냐면 헤브론 쪽에서 약 3킬로 남짓 데는 멀지않은 곳인데 거기는 아브라함도 거기 살았던 적인 있고 이삭도 헤브론 마르레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중해성 기후를 뛰고 있는 그런 팔레스타인 지역이 대체로 더운 지역입니다. 덥기 때문에 서늘한 곳을 찾아가려면 표고가 높은 쪽으로 가야 되요. 해발 600-700고지가 넘어야 그런 데로 사람이 살만하다 하는 곳이고 평지는 더워서 살기가 힘드니까 꼭 그 도시가 800-700 그런 산꼭대기에 도시가 발달합니다. 헤브론은 근 1,000미터 가까이 되는 높은 곳에 있고 예루살렘도 780고지 좀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거기가 아브라함이 사는 곳이 지금 우리 개념으로 하면 동네에 우리는 살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산다든지 할 때는 동네에 사는 경우는 많지 않고 외딴 천막입니다. 외딴곳에 따로 천막 한 채만 있는 겁예요. 장막에. 오래있지도 못하고 양떼가 많고 풀밭은 제안되고 하면 또 옮겨가고 이렇게 하는데 자기 집 장막 하나 밖에 없는데 거기 손님 왔으면 지나가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자기 집에 온 사람인 거죠. 그래서 동네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아브라함 장막 한 개만 있는데 사람 셋이 오니까 우리 집에 오셨는가 보다고 볼 수도 있고 거기가 길목이라면 지나가시는 가보다 이런 정도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내 집에 오셨는데 그냥 지나가지 마옵시고 들어오시면 제가 물을 가져 올 테니까 발을 씻으시고 또 요기 할 것을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지난번에 아브라함에 덕목을 이야기 할 때 말씀드렸죠. 손님 대접하기를 잘 했다. 그런데 이거는 아브라함만 마음이 있어 되는 게 아니야, 사라가 즐거워해야 되고 종들이야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하겠습니다마는 사라에게 가서 6절에 보면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세 스아라는 것은 아마도 한 스아가 한 사람분의 빵이 되는가 봐요. 그러니까 세 사람이 왔기 때문에 삼명분의 가루를 가지고 반죽을 하여 떡이라고 했는데 빵인 거죠.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장막 뒤쪽에 그늘이 있어서 손님을 모시고 장막 안에서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 그런 구조 같아요.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생리가 끝났다는 거예요.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속으로 어떻게 웃는 거예요? 속으로 한번 웃어 봐요. 속으로 비웃었다는 게 이분들이 아직은 셋이 하나님과 천사라는 의식이 없거든요. 어떻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냥 대접을 했으면 드시고 가시지 저렇게 빈말을 하시나, 내가 생리가 끊어진 것도 모르고 하시는 것 보다.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러 번 말씀하시는 거든 요. 그러면 그때까지는 애기를 가졌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는 얘기죠. 다시 말하면 입덧도 그런 것도 없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사라가 전혀 인식을 못하고 있는 거 보면 그렇다면 99세 때 아까 17장에 나타났던 것도 100살에 있을 거니까 시기가 같아요. 그의 다 방문한 시점이 18장 방문과 17장 방문이 그의 이삭이 태어나기 1년 전이기 때문에 그래야 말이 되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한번 방문에 대한 두 가지 전승인지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승되는데 구전으로 왜냐하면 이런 얘기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옵니다. 처음부터 노트에 받아 적은 것이 아니고 구전으로, 구전으로 내려오는데 족장 가문에는 글자 없을 당시에는 양치는 지팡이가 제법 길어요. 한길 넘어 정도로 양들이 멀리가면 사용해야 되니까, 그런 지팡이에다가 자기 가족 역사를 그림으로 새겨 놓아요. 그런 식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면서 계속 입에서 입으로 후손 대대로 전승되는 그런 스타일로 창세기 기사들이 오랫동안 전승 되다가 지금 현재 모습으로 기록된 거는 에스라 때 기록된 걸로 보기 때문에 두 가지 전승으로 내려온 것 같다는 거죠.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통 거짓말은 아니죠. “겉으로 웃지 않았으니까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속으로 웃어서 네가 무섭다.” 하나님하고 사라 사이에 웃었다 웃지 안했다 승강이 하는 것처럼.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이렇게 그냥 가 버릴 줄 알았는데 17절에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에게는 이야기를 해야지, 뭔가 일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틀어놓아야겠다. 아브라함에게는 알게 해야겠다는 뜻 인데.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 택한 목적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 자식과 권속들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다. 여러분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야, 모든 하나님 백성들 과거, 현재, 미래에 모든 하나님 백성들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선택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였다. 우리는 그저 맨 날 믿음으로 구원받아 고치겠다. 이렇게 습관화 되어 있는데 근본 원 개념, 택한 목적의 원 개념은 여기 창세기 18장 19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고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믿음만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였다.
의와 공도는 대게 공평하고 정의로운 윤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공평하고 정직한 윤리를 행하지 아니한다. 하면은 참 신앙생활이 아니다. 맨 날 우리는 오직 믿음 오직 믿음 하면서 그냥 교회만 다니고 예수 믿고 세례만 받으면 끝나는 걸로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셨다는 겁니다.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이 말은 좀 번역이 여러 번역을 대조해 봤는데도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탄원하는 누군가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하는 그런 것이 컸다는 말인지 아니면 어떤 번역은 소돔 안에서 그렇게 소돔의 악한 죄악 때문에 거기서 눌린 사람들, 억압된 사람들의 비명 절규 같은 그런 부르짖음이 크다. 양쪽으로 다 해석할 수 문젠데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히브리어라는 언어가 우리 언어와 다르기 때문에 하여간 그곳은 악이 너무 크고 죄가 중하고 거기서 들리는 소리가 기도소리든 절규하는 소리든 간에 하나님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르짖음이 크다. 그래서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여러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꼭 내려가서 봐야 압니까? 그냥 하늘에서 모르실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것은 아까 우리가 시편 89편에서 읽은 데로 주의 성실하심에 기인한다. 안와 봐도 아시죠. 전지전능한 분이 그것을 모르겠어요. 그러나 확인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내 안가 봐도 다 알아, 안 가보는 것은 성실하다고 할 수 없어요. 가서 실제로 그런지 가본다.
여러분 가끔 우리가 이번에 포항지진이나 아니면 제천에 화재 사건이나 뉴스 보면 알 수 있는 것이고 하지마는 그래도 총리나 대통령 이런 분이들이 뉴스 봐도 알지마는 직접 가본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도 그 성실하심 때문에 이미 충분히 알 수 있지마는 직접 또 가서 보신다.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말씀하시고 그 내용을 대충 들었을 때 아브라함 심중에는 두 가지가 이제 확실한 거죠. 소돔, 고모라가 악하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모를 리가 없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내려오셨다. 내려오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봐도 소돔은 심판 받아 마땅하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한 성읍에서 악한 사람들이야 심판받아 마땅하지마는 그 중에 의인이 있다면 의인도 함께 멸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뜻을 품하는 거죠.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만일 그 성에 의로운 사람 50명이 있으면 그들도 함께 다 죽어야 되는지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게 아니지 이렇게 여쭈어 보는 겁니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 말은 소돔, 고모라 성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 10명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볼 때 제법 의로워 보여도 그런 의가 대부분 위선이거나 별거 아니야, 어떤 사람은 죄 짓는 게 서툴러서 다 들통 난 것이고 어떤 사람은 죄를 더 크게 짓고도 잘 넘어간 것뿐이지 아니면 교양이라는 포장으로 약간 포장을 한 것뿐이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정말 의로운 사람은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해요. 평화롭고 좋을 때는 모르는데 교회나 총회나 사회나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고 이해관계가 걸리고 그럴 때 보면 사람이 교양 속에 감추었던 본색이 막 드러나요.
저는 노회에 가서 목사, 장로만 모인 데에서도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래서‘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곁으로 하루, 이틀 봐서 잘 몰라요. 33절 보면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아브라함 심중에 실제로 의인 50이나 40이나 있다고 안다는 것이 아니죠. 만일이라고 갖다 부치고 하는데 그 배후에는 롯을 좀 생각하는 거죠. 자기 조카 롯. 그러니까 참아 아브라함도 염치가 있어서 그런지 내 조카 롯, 그 말은 못해요. 그 말은 못하지만 나중에 소돔성이 망할 때 보면 소돔성을 엎어시는 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지라 멸망시키시는 중에 롯을 내 보셨더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꼭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님 알아 들어시는 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 그런 분 아닙니다. 그렇게 말 귀를 못 알아듣는 그런 분이 아니고 아브라함 중심에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니는 거예요. 기도가 염치가 있잖아요. 차마 내 조카 롯 그 말은 못했어요. 못했지만은 하나님은 아브라함 속에 무슨 말이 남아있는지 아신다는 거예요.
성경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관계 속에서 오고 가는 대화나 기도나 혹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때 참 인격적이 시다. 하나님이 아주 젠 틀 하시고 지극히 인격적이시다. 그런 면면을 여러 군데에서 보게 돼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이렇게 매달리는 모습을 어디서도 볼 수 없어요. 자기 조카 롯이 점점 소돔 문화에 젖어 들어가는데 롯은 들 하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 롯의 아내와 딸들이 점점 소돔 문화에 젖어가는 거예요. 그것은 이게 지금 2,000년이니까 이 소돔, 고모라 사건은 약4,000년 전 이야기거든요.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확실히 이 세상 문화에 잘 젖어드는 사람들이 여성들인 것 같습니다. 또 여성들은 어떻든 도시 문화에 젖어 살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소돔, 고모라에 롯은 소돔문화에 물들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내와 딸들이 그러니까 세상 적이고 도시문화를 좋아하고 지금도 똑같아요. 별 차이가 없어요. 여기 산청에는 농촌이고 산촌이고 그러니까 논, 밭에 일들이 많은 곳이고 농업 노동이 굉장히 극심한 곳이야, 우리가 어릴 때부터 우리가 한 17-18살, 20살 안팎 그럴 때 청년들이 다 나갔습니다. 농촌에 남아있는 남자들 몇 사람은 있어요. 지금도 우리 고향 가면 내 친구들이고 나하고 동갑내기 사람들인데 그의 농촌 지키고 있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는 한명도 없고 다 도시로 갔어요.
우리 때는 나가도 들어가도 결혼도 하고 했는데 지금도 농촌에 남아 있는 총각들은 결혼을 못해요. 다 도시로 가버리고 하도 안 되니까 월남사람, 중국사람 수입해 와야 해요 처녀를. 그렇게 여성들은 도시 문화에 매료되는가 봐요. 남자도 그런 면이 있지마는 저는 모르겠어요. 촌놈이라 그런지 도시문화라는 것에 처음에는 와 하다가 얼마 안가서 매력이 없어요. 아무리 봐도 아무른 매력을 못 느껴요. 지금보다 더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꽃이 피고 해야지 시멘트 콘크리트 문화에 어떻게 살아간다는 건지 저는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돼요 지금도.
여기 와서 에스라 근방에서 2-3년 3-4년 살아보신 분들은 대게 같은 말합니다. “목사님 도시에 가봤는데 정말 못살겠어요.”힘들다는 거요. 그리고 너무 시끄러워, 서울에 가서 보니까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전부 큰 소리 치고 다니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바빠서 정신이 없는 거예요.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거기서 어떻게 정신을 차리는지 그런데도 저는 여성들이 참 담대하다. 우리는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은데.
여러분 소돔, 고모라에 살고 있든 롯과 그 아내, 딸들이 물들어서 나중에 19장에 보면 알겠지마는 롯은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그 아내하고 딸들은 결국 못 빠져 나와요. 딸은 빠져나왔지만은 나중에 타락하게 되고 어떻든 소돔, 고모라에 살아서 롯이 아내는 잃어버렸고 딸들은 나중에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서 그래서 결국은 모압과 암몬 족속이 되고 말았는데 그 죄 얼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거예요. 여간 정신 차리지 않고는 세상문화 속에서 자기 영혼을 지키기 쉽지 않다.
여러분 창세기 18장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하고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에 일가친척이나 누구 또 소돔, 고모라 문화에 빠져 들어간 사람이 없는지 생각해봐야 돼요. 그리고 지금 우리사회는 그 소돔, 고모라 못지않게 타락해가고 있고 변질되어가고 있고 윤리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도시생활 속에 경건한 사람도 혹 있지마는 문란한 사람들에 이야기는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옛날 소도, 고모라 못지않게 타락하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데 그 아이들이 과연 정상적인 인격이 형성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 우리 기독교는 자녀 교육에 실패합니다. 유대교는 이방선교나 이런 것은 잘 못해요. 유대인들이. 그런데 수직선교, 종적인 선교, 자기자녀 손자손녀로 내려오는 가족, 자녀선교는 확실히 하거든요. 그래서 유대교인으로 태어나서 유대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가는 일은 그의 없다시피 합니다. 자기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역사를 가르치고 탈무드를 가르치고 하는 것만큼은 완벽하게 해요.
반면에 우리 기독교는 해외까지 선교를 가는데 자기 자녀선교를 못해요. 대부분 자녀들이 불경건한 쪽으로 갑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공부 안하고 커닝하고 남에 리포트, 논문 빼기고 하는 이런 사람은 전부 목사, 장로 자녀들이야, 아주 뺀질뺀질 못되고 공부도 안하고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실컷 놀다가 기도실로 가요. 공부를 안했는데 기도한다고 실력이 나옵니까, 떨어지면 또 교수에게 가는 거야, 무릎 꿇고 학점을 받아내는 거죠.
그래서 자녀교육을 거의 다 실패를 해요. 이것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문화 자체가 정착이 안됐고 또 교회에서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없고 아버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인격도 안 되거나 실력이 안 되거나 그래서 어설프게 하는 주일학교에 거기다가 맡겨놓으면 되는 걸로. 전혀 부모들이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돼버린 거예요.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제인데 이게 꼭 하나님을 믿데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믿으면 좋겠는데 꼭 롯의 가정처럼 비슷하게 돼요. 오늘 기독교인들의 신앙 상태가 은근히 롯의 가정하고 같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가정 같지 않고 롯의 가정하고 비슷하다.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유럽도 다 실패했고 기독교는, 미국도 실패했고 한국도 여지없이 똑같이 실패합니다. 자녀교육이 안돼요. 부모들이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예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성경을 읽어주는 정도 가지고 안 되고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길이 없나? 아이들하고 부모가 성경공부를 정말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데 그것을 유대인들은 지금도 하거든요 지금도 그의 아버지가 가르치고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랍비에게 물어요. 우리는 묻는 게 없는 문화예요. 교회에서도 묻지 않고 학교에서도 질문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부하지 않는다는 거든 요. 유대인들이 머리가 나빠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부지런히 묻고 또 랍비가 묻고 학교에 가서도 묻고 끝없이 질문을 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창세기 18장에서 혹시라도 우리가정에 신앙상태가 롯의 가정처럼 되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믿는다 할지라도 어머니하고 딸들이, 자녀들이 롯의 자녀들처럼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참 심각한 문제야, 그래서 어려서부터 우리엄마 우리아빠는 성경에 도사들이다. 이런 신뢰를 가지고 가정에서 엄마, 아빠에게 성경을 묻도록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될 텐데 너무 오랫동안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안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2018년도에는 창세기 18장을 생각해 보시도록 우리가정이 혹시라도 롯의 가정처럼 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깊이 각성하고 늦었지만은 여러분 우리교회 성도들이라 해서 마음이 나태해서 샤론교회에만 다니면 다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가정에서 성경이야기가 계속되는 그런 변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영주에 갔을 때 영주반산교회 담임목사님이 우리교단인데 자기가 에스라 성경강좌를 알게 된 것은 자기 동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처음에 형은 형이기도 하고 신학을 했고 목사가 되었고 동생은 동생이기도 하고 신학도 안한 주제에 만나면 성경이야기를 꺼내서 형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거야, 곤욕스럽게 하고 형이 아는 게 잘못됐었다. 틀렸다. 그런데 대게 기분 나쁜데 형이 그래도 가끔 맞는 소리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날 때 마다 싸움이 벌어지고 성경강좌 말하지 마라, 목사라는 사람이 동생보고 이렇게 할 정도로 맨 날 다투었는데 한해 두해 한 게 아니고 여러 해 명절 때마다 집안사람이 말릴 정도로 싸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싸우면서 들어도 하도 많이 들으니까 한번 들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래서 보나마나 불법 시디인데 들어 보았다는 거예요. 들어보니까 처음에는 반발하던 그 연장선상에서 속으로 반발하다고 하다가 들리고 보이고 하니까 ‘이것 봐라, 이것 봐라’하면서 목사님이 변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 부터는 성경이 열리고 보이면서는 형제가 만나면 다른 일가친척들은 다 저리가라하고 둘이서 성경가지고 얼마나 희희낙락을 하고 둘이 좋아하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둘만 똘똘 뭉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최근에 동생 되는 분도 신학을 시작 한 거예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래서 지난 1월 1일 집회에 동생 되는 분이 왔더라고요. 신학을 시작했는데 여기 온 거예요.
그래서 가족끼리도 모이면 다른 걸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성경을 깊이 있게 서로 대화하고 질문하고 피차 가르치고 이런 게 되어야 돼 가족들이. 명절이 곧 구정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럴 때도 자꾸 쉬쉬하고 피할게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이야기 하는 그런 분위기로 가야 되는데 이게 하도 익숙하지 않아서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안하면 일가친척이나 자녀나 가족이나 할 것 없이 성경강좌에 참여 하도록 더러 권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자, 완전 불신자를 전도할 때도 여기 성경강좌에 한번 참석하도록 권해 보세요. 최고의 전도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여러 분, 교회 발도 대보지 않은 분들이 여기 4박5일 참여하고 완전히 거듭나서 정상 신앙으로 오래 믿은 사람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그런 케이스를 많이 보거든요.
우리 저기 마산서 오시는 뒤에 앉아 계시는 분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 전혀 교회 안다녀 보셨는데 누가 꼭 가보라 해서 제가 전에 얘기 한번 한 것 같아요. 마산에서 마산제일극장하든 극장주인의 아들인데 마산 창동에다가 피자집을 엄청나게 규모 있게 했어요. 인테리어만 11억을 들어서 인테리어를 했어 피자집을 했는데 이탈리아 최고의 브랜드‘ 루메롱 우노’라고 하는 그런 간판을 걸어놓고 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오는 것 같더니 얼마 있다가 하루에 피자 10판도 안 팔리는 거예요. 인건비하며 인테리어하고 신협에서 대출을 내었는데 어떻게 돼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고스란히 날려버리고 회복 안 되서 정말 인생에 파탄이 나버릴 정도로 그 사람이 피자집을 개업할 때 잘 아시죠.“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착 붙여놓고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꾸로 시작은 창대했는데 나중에 아주 미약하게 되어서 피자 열판도 안 팔리고 인테리어를 너무 잘해놓으니까 피자 먹는 사람이 얼마나 비싸나 해서 목에 안 넘어가요 겁이 나서 그래서 팔리겠어요. 그래서 11억 빚을 안고 결국은 갚지 못하고 파산했을 겁니다. 그러고 있다가 누군가가 제가 강의한 성경강좌 그때는 카세트테이프 이걸 담아 보냈는데 그때 24개가 되었어요 90분으로. 듣다가 다 들어가는데 다 듣고 나면 목사님 찾아뵀겠습니다. 전화가 왔더라고요. “안보고 믿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다. 오지마시라.”그랬더니 기어이 왔어요.
올 때 자기가 상상을 했데요.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니까 키가 짤막하고, 깡말라가지고 대게 깐깐한 그런 분 일거다 하고 날 만나면 끌어안고 울어버린다고 그러고 왔는데 키가 너무 커서 울어 버리지도 못하고 전혀 음성하고 모습하고 매칭이 안되어서 어리바리 하다가 울도 못하고 넘어갔어요. 강의 중에 그런 말이 있거든요. 네 시작은 미약하다는 말은 잘못 된 거다. 전부 자기보고 한 말인 것 같더래요.
저보고 종이에다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고 힘을 다하여 너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저것을 써 주시면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시작은 창대하리라.”떼 내고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붙여놓고 하고 싶다고 제가 미쳐 못써드렸어요. 내가 마음이 좀 준비가 되고 하면 붓글씨로 써서 드리겠다. 했더니 결국 못 기다리고 자기 본 교회 돌아가서 김기현 목사 문창교회 담임목사에게 써달라고 했는데 목사님이 만년필로 쓰더라고요. 만년필로 써서 자기 카운터에 놓고 그렇게 정말 하나님을 이기적으로 믿었던 잘못된 신앙을 내려놓고 정말 이제는 장사가 안 되어도 내가 그랬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은 장사가 망해도 품위 있게 해야 된다.
그래서 ‘루메롱 우노’피자집 문 닫을 때 패업 예배를 피자를 많이 구워서 했다는 거예요. 망할 때도 예수 믿는 사람은 품위 있게 망해야 된다. 그래서 예수 믿고 피자집이 쫄딱 망했지만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래도 그때부터 열심히 전도했는데 이 사람은 병원에 냄새, 공기, 분위가가 싫어서 일가친척이 아파도 병원방문 잘 안하는 사람인데 성경강좌 듣고 변화되어서 병원전도를 일을 삼고 다니면서 그래서 많은 사람을 전도해요 지금도.
그러나 가정은 얼핏 들었는데 이혼해버리고 부인이 도망가 버리고 그렇게 어려우면서도 힘을 다해 전도하는 거예요. 나보다 훨씬 더 낫다. 그렇게 지금도 열심히 전도해요.
여러분 우리가 2018년도에 우리가정들이 자치하면은 아브라함 가정하고 두 가정을 지금 보여주는 거든 요. 아브라함은 중보 하는 가정, 롯의 가정은 중보를 통해서 겨우 혼자 구원받고 딸들도 교육도 제대로 못하고 아내도 잃어버리고 이런 가정도 다 하나님 믿기는 믿는 가정들입니다. 그러나 소돔 땅에 오래 사는 동안에 롯의 가정은 변질되었다는 거예요. 혹시 우리가정들이 아브라함 가정처럼 되지 않고 롯의 가정처럼 세속문화에 물들어 가는 게 아닌가? 또 자녀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게 아니가 깊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2018년도 두 번째 주일에 주님에 전에 와서 하나님 말씀 들어볼 때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헤야 할 텐데 소돔 문화 속에 우리 자녀들이 혹은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게 하옵시고 다시 우리가 가정에 경건과 신앙이 회복되어서 다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정들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또 전도하는 그런 한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드리고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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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금) “창세기 18:1-33” / 작성: 김종필
본문 창세기 8장 1-33절
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창세기 18장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되면 우리는 신학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우리의 상식과 지성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의심과 질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의심하고 질문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 18장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좀더 나은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우리의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좀더 깊은 통찰에 이르게 됩니다. 14절입니다.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 되고, 사라가 89세 될 때 천사 둘과 함께 직접 장막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24년 전 아브라함이 75세 때부터 줄곧 말씀하신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내년,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될 때, 사라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수년 간 수차례 말씀하셨고, 어느덧 사라의 나이가 89세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그 말을 듣고서는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속으로 웃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가 웃는 것을 보고 하신 말씀이 14절 말씀입니다. “내가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두 노인에게 장난치는 짓궂은 분이 아니실텐데, 무려 24년간이나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말만 하시고 실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두 사람은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생리가 끊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실행될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들을 주신다고 하신지 24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폐경이 되었습니다. 혹 주셔도 낳을 힘도 없습니다. 주시려면 폐경 전에 주셔서 출산 할 수 있게 하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은 능하신 분 맞으십니까?’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성경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고, 특별한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 부부를 통해, 오고 가는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본보기로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란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중에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는 자의 표상이 되어야 했습니다(롬 4:17).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더 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는 마지막 상황으로까지 몰려갑니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 것일까? 약속하신 하나님은 진실로 신실하신 분이실까?
우리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천재적인 귀재들입니다. 자기중심적 사고가 치밀하고 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가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데에 명수들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만, 기어이 내가 잘했다고 밝혀 칭찬받고 싶어 합니다. 내가 남들보다 지혜로웠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라 합니다. 내가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응답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성경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내가 겸손하기 때문에, 내가 인내했기 때문에, 내가 내 욕망과 권리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셨다고 자랑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높이는 듯하지만, 실상은 ‘내’ 가 한 것이기에, 모든 칭찬과 시선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자기중심성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자기중심적 죄의 속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완전히 자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도저히 하나님 외에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성취했다고 할 수 없을 지경까지 몰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조금도 인간의 순종과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 으로만 가능함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연마하고 단련하고 훈련받아서 얻어내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지적인 추구와 열심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반복된 경험으로 다다르게 되는 경지도 아닙니다. 믿음은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마지막 순간, 도무지 자기 힘과 지혜로는 얻을 수도, 알 수도, 살 수도 없는 자기 포기의 순간에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과 사라를 ‘기한이 찰 때’까지 계속 담금질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못지않게 우리도 믿음이 부족합니다. 아니, 믿음의 크기가 겨자씨만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지연될 때, 우리는 우리의 상식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을 쉽게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변경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외면합니다. 어떤 때는 따르고, 어떤 때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아니 바로 그 바랄 것 없는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단 1%의 가능성이 없더라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일지라도, 그 누구도 책에 기록하지 않은 신비한 영역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이라면 말씀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소망하고 기다리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매사를 견디고, 이 믿음으로 힘을 얻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하루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기도한 것들이 지연되고 거절되고 하나님께조차 잊혀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설령 그럴지라도 내 경험과 내 상식과 내 지식을 의지하지 않고, 내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며, 약속의 말씀만 붙들며 우직하게 인생길을 믿음으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라가 웃은 이유는 무엇입니까?(10-12절) 사라의 웃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아직 응답되지 않은 기도, 이미 포기한 기도가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십니까?
3.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20-21절)
4. 소돔과 고모라 심판에 대해 아브라함이 항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23-25절)
5. 아브라함은 롯의 가족들을 위해 심판의 지연과 중지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마치 하나님과 흥정하듯 치열하게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작성: 김종필)
창세기 18장1- 8절
2018년 7월 16일 월요일
♥오늘의 말씀 묵상♥
※ Hallelujah!
– 오늘도 폭염과 열대야 속이지만 복되고 귀한 새아침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 어제는 섬기시는 교회 위에 성령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아서 심령에 충전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 하나님의 택한 자녀의 삶을 끝까지 보살피시고 책임지심을 믿는다면, 겸손히 순종으로 아브라함처럼 남을 잘 섬기고 대접하여 기적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 내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 창세기 18장1- 8절 }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제 목 ♥♥♥
☞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본문 이해와 요약 ♥♥♥
☞ 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 제도를 통하여 당신의 약속을 확증하신 후 인간의 형상을 취하신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와 함께 나타나셨습니다.
– 무엇보다 평소에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잘 영접하다가 부지중에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은 구약 성경에 크게 강조되었고, 예수님께서도 힘써 지키도록 권하셨으며 초대 교회에서도 꾸준히 강조 된 계명입니다.
– 이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삭을 통한 구원의 언약을 확증 해 주셨습니다.
–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심판을 통고하셨습니다.
–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 곳에 사는 조카 롯과 죄인들을 위하여 담대하게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증하기 위해 두 천사를 대동하고 찾아오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의 약속에 대한 재확인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 여호와께서 능치못할 일이 있겠느냐?” 물으시니 반드시 하신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갖어야 합니다.
– 또한 아브라함은 중보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속성을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성에 호소하며, 한두 번의 간구로 그치지 않고 꾸준히 계속했던 것입니다.
–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를 구원하려는 열망에 가득 차 겸손하면서도 단호한 자세로 간구함 같이 우리도 세상과 이웃에 대하여 이런 자세로 영혼 구원을 위해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 본장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장차 되어 질 일을 밝히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러므로 성도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진실로 경외하는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믿음은 대접 잘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18장2,3절)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성숙한 신앙인의 삶은 이웃을 대접할 때에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에게 그의 후사와 소돔과 고모라에 관한 당신의 뜻을 계시하고 그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찾아오시는 분임을 알 수 있으니 지나가는 손님을 잘 영접하면 하나님을 대접하여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 특히 2,3절을 살펴보면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라고 하였습니다.
–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막 앞을 지나는 나그네들을 보자 ‘곧’ 달려 나가 그들을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가 손 대접하기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손님대접은 한마디로 친절이므로 정성을 다하여 기쁨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자세가 충분히 아낌없이 드리는 것에 익숙하면 손해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사업에 절반은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 사실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나이가 얼마였습니까? 몸을 움직이기도 귀찮은 99세의 고령이었습니다.
– 이때는 중동지방의 한낮은 몹시 따가운 햇볕 때문에 보행하가가 힘든 때 정오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그네를 보고 곧장 달려 나가서 영접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평소 대접하는 것이 자발적이고도 기쁜 마음에서 섬겨온 것임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웃을 대접할 때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복이 됩니다.
– 갈 6: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 벧전 5:2절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에 성령님께서 나에게 “평소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섬기고 있느냐?”라고 묻고 있으니 솔직하게 스스로 자문자답 해 봅시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다짐하여 친절과 봉사의 정신으로 결단 해 봅시다.
– 무엇보다 성도들은 평소 품성훈련을 통하여 이웃 사람들 앞에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섬기며 삽시다.
– 2절 하반절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몸을 굽혀’ 나그네를 영접하였습니다.
– 특히 3절을 살펴보면 나그네를 향해 ‘주’라 칭하고 자신을 ‘종’이라고 칭하는가 하면 자신이 나그네에게 은혜를 베풀면서도 축복하고 또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그 뿐만이 아니라 4절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실제로 자신을 종과 같이 낮추어 나그네들의 발을 씻겨 드리고 대접하려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되 많은 식솔을 거느린 대부족의 족장으로서 거만하게 대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마치 종과 노예와 같이 낮추면서 성심으로 대접하였습니다.
– 이러한 아브라함의 태도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사 종의 형체를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를 예표하는 행동으로서 마지막 때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지극히 아름다운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 그러므로 성숙한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이 항상 이웃에게 겸손함으로 자비를 베풀기에 힘씁시다.
– 나아가 그것으로 인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 임했음을 알고 하나님과 자기의 자비를 베푼 분에게 감사하며 겸손한 삶을 삽시다.
– 하나님은 내가 베푸는 삶을 살 때 더 큰 은혜와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잠 11:25절에서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눅 6: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눅 22:26절에서 “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약 4:10절에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아브라함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낮추며 겸손한 신앙 인격의 품성을 다듬어 섬김의 훈련을 생활화 합시다.
–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했다가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하는 축복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 친절한 마음으로 작은자 한 사람이라도 정중히 모시다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여 심판 때에 좌편 아니라 우편에 앉게 되며 인정받고 칭찬받게 되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오늘도 무덥지만 내가 먼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본받아서 작은 자와 병들고 헐벗고 굶주릴 불쌍한 사람들을 돌아보며 기도하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겸손하게 베풀며 섬길 때에 부지중에 예수님을 대접하는 복을 누리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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