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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5일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기한이 이를 때에\” (창세기 18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됩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 날입니다
새 날은 소생하는 날입니다
어둠을 뚫고 빛이 살아나는 날입니다
이날, 우리의 삶도 빛이되어 반짝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길 원합니다
오늘도 말씀 안에서 힘내세요~^^
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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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창세기 18 장 강해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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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5. 12.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H91W78Unc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예고
창세기 제18장 강해 –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예고
본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15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은 천사로 오신 하나님과 다른 두 천사를 잘 대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고, 사라는 자신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하여 웃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웃음을 들으신 내용입니다. 16-3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고지를 하시고, 아브라함은 이에 대하여 중보기도를 하는 내용입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곳은 아모리 사람 ‘마므레’라는 사람이 소유한 상수리 숲입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작별한 후 줄곧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후사와 기업에 관한 언약을 받은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정 즈음에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때는 점심 식사 때나 혹은 식사 후 휴식을 취할 때입니다. 대개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장막문 앞에 더위를 식히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세 사람 가운데 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나머지 둘은 천사로 봅니다.(19:1; 히 13:2)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현현하시는 이유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 풍습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관례 이상으로 적극적인 환대의 표시로 몸을 땅에 굽힐 정도의 예의를 보이며 나그네들을 환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나타난 3사람이 보통의 나그네가 아니며 그 중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달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아브라함은 나그네에게 “주(아도나이:אדני)”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엎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또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하여 겸손하게 여쭙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표현은 겸허한 자세로 간청하는 관용적 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과 천사들에게 그냥 가지 마시고 유숙하기를 간청하였습니다.
4,5: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 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나그네를 대접하는 방법 중 발을 씻도록 물을 가져다주는 것은 당시의 정중한 예법입니다. 고대에는 대개 샌들을 착용하였으며, 발이 가장 먼저 더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집 주인이 제일 먼저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이 관례입니다.(19:2; 24:32; 43:24; 눅 7:44). ‘쉬소서(솨안:שׁען)’라는 말은 ‘기대다, 팔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팔에 기대어 비스듬히 눕는 것은 팔레스틴 사람들의 일반적 식사 관습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쉬라는 의미만 아니라 식사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쾌활케’라는 말은 원기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고 장거리 여행으로 인해 지친 심신을 편히 쉬게 하라는 뜻입니다.
6-8: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접대하는 내용입니다. ‘스아(세아:סאה)’는 곡물의 양을 측정하는 단위로 한 스아는 7.33ℓ(4되)입니다. 이는 에바의 1/3에 해당합니다.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급히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누룩 없는 떡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떡은 화덕이나 불에 달구어진 뜨거운 돌 위에 놓고 구웠다고 합니다. 뻐터는 오늘날과 같이 우유에서 지방 성분을 추출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응고된 우유, 즉 엉긴 적(삿 5:25; 욥 20:17)를 가리킵니다. ‘진설’은 음식을 마련하여 상에 베푼다는 뜻입니다. ‘모셔 서매’ 이는 ‘그가 모셔 섰다.’라는 말입니다. 나그네에게 식사를 배설한 아브라함이 곁에서 시중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인이 손님과 함께 식탁을 받지 않고 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은 고대 근동인의 손님 접대법 중 최고의 예법이라고 합니다. 주님과 두 천사는 식사를 했습니다. 주님과 두 천사는 본래 ‘영(靈)’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지만, 이때는 사람으로 현현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과 두 천사의 현현이 단순한 환상이 아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비로소 나그네들의 방문 목적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을 알고 있었고 또 고대 동양인의 관습상 남의 아내를 호명하는 결례를 무시하고 사라를 찾는 것만 보아도 이들이 보통 나그네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내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즉 이삭을 낳을 시기에 다시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변개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오랜 기간을 아브라함에게 기다리게 하셨지만, 그의 고민인 후사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라는 장막 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1,12: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경수’는 여자로서 항상 있는 것으로 월경에 대한 완곡한 표현입니다. 사라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노쇠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는 사라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주님의 언약에 회의를 갖게 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웃었습니다. 이미 여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신다고 하니 우습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사라는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상징인 경수마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자조적인 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사람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바로 그 때가 또 다른 시발점입니다. 그 시발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불신앙적인 생각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사라나 인간의 편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연의 섭리와 질서를 거스리는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우주만물과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여자로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라가 자신의 육체의 현상에만 집착하고 있는 불신앙적인 태도를 불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때에 반드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으니라.
사라는 자신에 관한 대화를 몰래 엿듣던 중 자신의 속마음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심을 깨닫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네가 웃었으니라.’고 거짓말을 일축하셨습니다. 사라는 침묵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시인의 표시입니다. 물론 사라는 나중에 잉태하게 되고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들을 주신다는 언약의 확증을 심으시고 이제 소돔을 심판하기 위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두 천사를 배웅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까지 따라 나섰습니다.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께서 소돔 성의 심판의 비밀에 대하여 알려주시는 것은 첫째, 언약(12:1-3; 15장)을 재확인하여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통해서 이 땅의 온전한 역사를 펼쳐갈 것임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도, 즉 여호와의 신앙을 달려 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을 받고 참된 번영을 이루는 것임을 소돔의 멸망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셋째, 여호와의 거룩한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죄악을 도말(塗抹)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이 되는 것은 친히 택한 백성을 통해 실현하시지만, 그 첫 단계는 죄악을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라고 하는 것 위에 세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죄까지 회개하고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며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번성하게 하는 이유는 천하 만민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임을 가르쳐주십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여호와 한 분만을 올바로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삶 즉 여호와의 도를 지켜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게 택함을 받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극도에 다달았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범죄 도시의 대표적 유형으로 취급이 됩니다(계 11:8). 영어로 “소도마이트(Sodomite)”가 ‘남색자’(게이)란 의미를 갖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아마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두 천사를 배웅하기 위하여 같이 간 곳은 사해 부근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해 근방에 위치한 소돔과 고모라로 내려가고자 하시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자 하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가득 차 죄악이 절정에 달했는지의 여부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악행이 절정에 이르기까지 심판을 미루시는 이유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벧후 3:9). 하나님께서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죄악상을 다 알고 계시지만, 직접 내려가서 한 번 더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고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죄인이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22,23: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떠난 그 사람들은 두 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여호와 앞에 계속 머물러 서 있는 상황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구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는 구원을 베푸시고 악인에게는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심을 잘 알기 때문에, 혹시 소돔과 고모라에 있을지 모르는 의인을 언급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24,25: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 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 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악인에게 형벌을, 의인에게 구원과 상을 베푸시는 것을 ‘공의’라고 합니다. 이런 공의의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똑같이 다루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공의를 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기 위한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 오십 명’을 언급한 것은 단지 그 오십 의인만이 구원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민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구하는 내용의 요점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의인 오십을 찾게 되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공의 앞에서는 마땅히 멸망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구속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로 죄를 도말하기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이며, 또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요일 4:10).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가리켜 ‘티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는 최대의 겸손의 표시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절대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음을 감사하면서, 계속하여 아브라함과 자신과 같은 존재인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28-32: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일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친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50인에서 45인으로, 40인으로, 30인으로, 20인으로, 마지막에는 10인만이 있더라도 구원해 주십사고 하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잘 알기에 의인 10인을 위해서도 멸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까지도 죄인들을 위해 간구하셨습니다(눅 23:34).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인 지혜나 도덕에 의해 흥망성쇠를 결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 곧 성도들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일단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아브람에게 기도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기도가 끝났기 때문에 즉시 그 자리에서 떠나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기도의 모습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창세기 18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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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예라 엘라우 아도나이 베엘로네 마므레 웨후 요쉡 페타흐 하오헬 케홈 하욤
개역개정,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새번역,1 주님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우리말성경,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큰 나무들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한낮의 열기 속에서 장막 입구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영어NIV,1 The LORD appeared to Abraham near the great trees of Mamre while he was sitting at the entrance to his tent in the heat of the day.
영어NASB,1 Now the LORD appeared to him by the oaks of Mamre, while he was sitting at the tent door in the heat of the day.
영어MSG,1 GOD appeared to Abraham at the Oaks of Mamre while he was sitting at the entrance of his tent. It was the hottest part of the day.
영어NRSV,1 The LORD appeared to Abraham by the oaks of Mamre, as he sat at the entrance of his tent in the heat of the day.
헬라어구약Septuagint,1 ωφθη δε αυτω ο θεος προς τη δρυι τη μαμβρη καθημενου αυτου επι της θυρας της σκηνης αυτου μεσημβριας
라틴어Vulgate,1 apparuit autem ei Dominus in convalle Mambre sedenti in ostio tabernaculi sui in ipso fervore diei
히브리어구약BHS,1 וַיֵּרָא אֵלָיו יְהוָה בְּאֵלֹנֵי מַמְרֵא וְהוּא יֹשֵׁב פֶּתַח־הָאֹהֶל כְּחֹם הַיֹּום׃
성 경: [창18:1]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천사를 영접한 아브라함]
마므레 상수리 수풀 – 예루살렘 남방, 헤브론 근교에 위치한 곳으로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이 일찍부터 정착지로 삼아 지금까지 거주해 오고 있던 지역이다.
오정 즈음에(*, 케흠 하욤) – ‘때'(욤)와 ‘열'(하맘)이 합쳐진 말로 직역하면 ‘더운 그 때에’, 곧 태양이 하늘 중앙에 치솟은 때를 가리키는데 이때 팔레스틴 거민들은 대개 식사와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한다(창 43:16;아 1:7).
와잇사 에나우 와야르 웨힌네 쉐로솨 아나쉼 니차빔 알라우 와야르 와야라츠 리크라탐 미페타흐 하오헬 와이쉬타후 아르차
개역개정,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새번역,2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보니, 웬 사람 셋이 자기의 맞은쪽에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장막 어귀에서 달려나가서, 그들을 맞이하며,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다.
우리말성경,2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세 사람이 맞은편에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맞이하러 얼른 장막에서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가톨릭성경,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영어NIV,2 Abraham looked up and saw three men standing nearby. When he saw them, he hurried from the entrance of his tent to meet them and bowed low to the ground.
영어NASB,2 And when he lifted up his eyes and looked, behold, three men were standing opposite him; and when he saw them, he ran from the tent door to meet them, and bowed himself to the earth,
영어MSG,2 He looked up and saw three men standing. He ran from his tent to greet them and bowed before them.
영어NRSV,2 He looked up and saw three men standing near him. When he saw them, he ran from the tent entrance to meet them, and bowed down to the ground.
헬라어구약Septuagint,2 αναβλεψας δε τοις οφθαλμοις αυτου ειδεν και ιδου τρεις ανδρες ειστηκεισαν επανω αυτου και ιδων προσεδραμεν εις συναντησιν αυτοις απο της θυρας της σκηνης αυτου και προσεκυνησεν επι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2 cumque elevasset oculos apparuerunt ei tres viri stantes propter eum quos cum vidisset cucurrit in occursum eorum de ostio tabernaculi et adoravit in terra
히브리어구약BHS,2 וַיִּשָּׂא עֵינָיו וַיַּרְא וְהִנֵּה שְׁלֹשָׁה אֲנָשִׁים נִצָּבִים עָלָיו וַיַּרְא וַיָּרָץ לִקְרָאתָם מִפֶּתַח הָאֹהֶל וַיִּשְׁתַּחוּ אָרְצָה׃
성 경: [창18:2]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천사를 영접한 아브라함]
사람 셋 – 13절과 19: 1에 의거할 때 이 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둘은 천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가 이처럼 가시적(可視的)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형상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시므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뜻하는 바 계시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달려나가 – 생면 부지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진실된 사랑으로 영접한 행위이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로 굳어진 아름다운 풍습이긴 하지만(출 22:21;욥 31:32;마 25:35;딤전 5:10)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자 그의 삶이 항상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몸을 땅에 굽혀 – 귀한 방문자에 대하여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다.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창 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할 때(창 48:12) 또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를 맞이할 때(왕하 2:15)에도 이러한 인사가 행하여졌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을 묻지도 않고 이러한 예우를 표한 것은 그의 인격이 평소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와요말 아도나이 임 나 마차티 헨 베에네카 알 나 타아보르 메알 압데카
개역개정,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새번역,3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말성경,3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내 주여, 제가 주의 은총을 입었다면 주의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가톨릭성경,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영어NIV,3 He said, “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my lord, do not pass your servant by.
영어NASB,3 and said, “My lord, if now I have found favor in your sight, please do not pass your servant by.
영어MSG,3 He said, “Master, if it please you, stop for a while with your servant.
영어NRSV,3 He said, “My lord, if I find favor with you, do not pass by your servant.
헬라어구약Septuagint,3 και ειπεν κυριε ει αρα ευρον χαριν εναντιον σου μη παρελθης τον παιδα σου
라틴어Vulgate,3 et dixit Domine si inveni gratiam in oculis tuis ne transeas servum tuum
히브리어구약BHS,3 וַיֹּאמַר אֲדֹנָי אִם־נָא מָצָאתִי חֵן בְּעֵינֶיךָ אַל־נָא תַעֲבֹר מֵעַל עַבְדֶּךָ׃
성 경: [창18:3]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천사를 영접한 아브라함]
내 주여 –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에 대하여 단수인 ‘내 주여'(my lord))를 사용한 점은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이에 의거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즉시로 깨달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 이는 세 사람을 총칭하는 대표 단수이며 (2) ‘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남편(12절)이나 상전(24:12) 또는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의미도 함께 지닌 단어란점 (3) 아브라함이 부지중(不知中)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는 점(히13:1) 등에 의거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은 이후 서서히 그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17, 22절) 아직은 그들을 단순한 나그네로 알고 일반적 차원에서 존칭어를 사용한 것이다.
유카흐 나 메아트 마임 웨하라추 락레켐 웨힛솨아누 타하트 하에츠
개역개정,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새번역,4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우리말성경,4 물을 갖다 드릴 테니 발들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가톨릭성경,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영어NIV,4 Let a little water be brought, and then you may all wash your feet and rest under this tree.
영어NASB,4 “Please let a little water be brought and wash your feet, and rest yourselves under the tree;
영어MSG,4 I’ll get some water so you can wash your feet. Rest under this tree.
영어NRSV,4 Let a little water be brought, and wash your feet, and rest yourselves under the tree.
헬라어구약Septuagint,4 λημφθητω δη υδωρ και νιψατωσαν τους ποδας υμων και καταψυξατε υπο το δενδρον
라틴어Vulgate,4 sed adferam pauxillum aquae et lavate pedes vestros et requiescite sub arbore
히브리어구약BHS,4 יֻקַּח־נָא מְעַט־מַיִם וְרַחֲצוּ רַגְלֵיכֶם וְהִשָּׁעֲנוּ תַּחַת הָעֵץ׃
성 경: [창18:4]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천사를 영접한 아브라함]
발을 씻으시고 – 아랍과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모래와 먼지가 덮인 거친 사막 길로 되어 있다. 따라서 샌들(Sandal) 같은 간단한 신발만 신고 먼지 길을 오래 걸은 여행자들에게는 발 씻을 물이 절실히 요구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가져다 주는것이 필수 관행이 되었는데 이는 손님 접대에 있어서 최상 최적의 예우였다.
나무 아래서 쉬소서 – ‘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안'(*)은 ‘기대다’. ‘눕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곧 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며 식사하기에 편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이다. 오늘날도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왼팔로 몸을 바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서 혼히 찾아볼 수 있는 식사법이다(요13:23).
웨에크하 파트 레헴 웨사아두 리베켐 아하르 타아보루 키 알 켄 아발템 알 압데켐 와요메루 켄 타아세 카아쉘 딥바르타
개역개정,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새번역,5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정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말성경,5 빵을 조금 갖다 드릴 테니 기운을 차리신 후에 갈 길을 가십시오. 여러분께서 종에게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리하여라. 네 말대로 하여라.”
가톨릭성경,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5 Let me get you something to eat, so you can be refreshed and then go on your way–now that you have come to your servant.” “Very well,” they answered, “do as you say.”
영어NASB,5 and I will bring a piece of bread, that you may refresh yourselves; after that you may go on, since you have visited your servant. “And they said,” So do, as you have said. ”
영어MSG,5 I’ll get some food to refresh you on your way, since your travels have brought you across my path.” They said, “Certainly. Go ahead.”
영어NRSV,5 Let me bring a little bread, that you may refresh yourselves, and after that you may pass on–since you have come to your servant.” So they said, “Do as you have said.”
헬라어구약Septuagint,5 και λημψομαι αρτον και φαγεσθε και μετα τουτο παρελευσεσθε εις την οδον υμων ου εινεκεν εξεκλινατε προς τον παιδα υμων και ειπαν ουτως ποιησον καθως ειρηκας
라틴어Vulgate,5 ponam buccellam panis et confortate cor vestrum postea transibitis idcirco enim declinastis ad servum vestrum qui dixerunt fac ut locutus es
히브리어구약BHS,5 וְאֶקְחָה פַת־לֶחֶם וְסַעֲדוּ לִבְּכֶם אַחַר תַּעֲבֹרוּ כִּי־עַל־כֵּן עֲבַרְתֶּם עַל־עַבְדְּכֶם וַיֹּאמְרוּ כֵּן תַּעֲשֶׂה כַּאֲשֶׁר דִּבַּרְתָּ׃
성 경: [창18:5]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천사를 영접한 아브라함]
쾌활케(*, 사아드) – ‘세아드'(원조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견고케 하다'(잠 20:28), ‘힘있게 하다'(시 104:15), ‘원기를 되찾다’는 뜻이다. 장거리 여행으로 인하여 쇠진한 기력을 힘있게 회복할 수 있게끔 쉬라는 뜻이다.
와예마헤르 아브라함 하오헬라 엘 사라 와요멜 마하리 쉐로쉬 세임 케마흐 소레트 루쉬 와아시 우고트
개역개정,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새번역,6 아브라함이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가서,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
우리말성경,6 아브라함은 서둘러 장막 안에 있던 사라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얼른 고운 밀가루 3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해 빵을 만드시오.”
가톨릭성경,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영어NIV,6 So Abraham hurried into the tent to Sarah. “Quick,” he said, “get three seahs of fine flour and knead it and bake some bread.”
영어NASB,6 So Abraham hurried into the tent to Sarah, and said, “Quickly, prepare three measures of fine flour, knead it, and make bread cakes.”
영어MSG,6 Abraham hurried into the tent to Sarah. He said, “Hurry. Get three cups of our best flour; knead it and make bread.”
영어NRSV,6 And Abraham hastened into the tent to Sarah, and said, “Make ready quickly three measures of choice flour, knead it, and make cakes.”
헬라어구약Septuagint,6 και εσπευσεν αβρααμ επι την σκηνην προς σαρραν και ειπεν αυτη σπευσον και φυρασον τρια μετρα σεμιδαλεως και ποιησον εγκρυφιας
라틴어Vulgate,6 festinavit Abraham in tabernaculum ad Sarram dixitque ei adcelera tria sata similae commisce et fac subcinericios panes
히브리어구약BHS,6 וַיְמַהֵר אַבְרָהָם הָאֹהֱלָה אֶל־שָׂרָה וַיֹּאמֶר מַהֲרִי שְׁלֹשׁ סְאִים קֶמַח סֹלֶת לוּשִׁי וַעֲשִׂי עֻגֹות׃
성 경: [창18:6]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천사를 영접한 아브라함]
떡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가'(*)는 ‘레헴'(*, 떡, 빵)보다 더 고급스런 빵으로 뜨거운 돌에 구운 일종의 ‘펜 케이크'(pan-cake)를 가리킨다.
웨엘 하바카르 라츠 아브라함 와이카흐 벤 바칼 랔 와토브 와이텐 엘 한나알 와예마헤르 라아소트 오토
개역개정,7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새번역,7 아브라함이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요리하였다.
우리말성경,7 아브라함이 가축들이 있는 데로 달려가서 가장 살지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서둘러 요리를 했습니다.
가톨릭성경,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영어NIV,7 Then he ran to the herd and selected a choice, tender calf and gave it to a servant, who hurried to prepare it.
영어NASB,7 Abraham also ran to the herd, and took a tender and choice calf, and gave it to the servant; and he hurried to prepare it.
영어MSG,7 Then Abraham ran to the cattle pen and picked out a nice plump calf and gave it to the servant who lost no time getting it ready.
영어NRSV,7 Abraham ran to the herd, and took a calf, tender and good, and gave it to the servant, who hastened to prepare it.
헬라어구약Septuagint,7 και εις τας βοας εδραμεν αβρααμ και ελαβεν μοσχαριον απαλον και καλον και εδωκεν τω παιδι και εταχυνεν του ποιησαι αυτο
라틴어Vulgate,7 ipse vero ad armentum cucurrit et tulit inde vitulum tenerrimum et optimum deditque puero qui festinavit et coxit illum
히브리어구약BHS,7 וְאֶל־הַבָּקָר רָץ אַבְרָהָם וַיִּקַּח בֶּן־בָּקָר רַךְ וָטֹוב וַיִּתֵּן אֶל־הַנַּעַר וַיְמַהֵר לַעֲשֹׂות אֹתֹו׃
와이카흐 헴아 웨할라브 우벤 하바카르 아쉘 아사 와이텐 리페네헴 웨후 오메드 알레헴 타하트 하에츠 와요케루
개역개정,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새번역,8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만든 송아지 요리를 나그네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나무 아래에서 먹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서서, 시중을 들었다.
우리말성경,8 아브라함이 버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 요리를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이 먹는 동안 아브라함은 그들 가까이에 있는 나무 아래 서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영어NIV,8 He then brought some curds and milk and the calf that had been prepared, and set these before them. While they ate, he stood near them under a tree.
영어NASB,8 And he took curds and milk and the calf which he had prepared, and placed it before them; and he was standing by them under the tree as they ate.
영어MSG,8 Then he got curds and milk, brought them with the calf that had been roasted, set the meal before the men, and stood there under the tree while they ate.
영어NRSV,8 Then he took curds and milk and the calf that he had prepared, and set it before them; and he stood by them under the tree while they ate.
헬라어구약Septuagint,8 ελαβεν δε βουτυρον και γαλα και το μοσχαριον ο εποιησεν και παρεθηκεν αυτοις και εφαγοσαν αυτος δε παρειστηκει αυτοις υπο το δενδρον
라틴어Vulgate,8 tulit quoque butyrum et lac et vitulum quem coxerat et posuit coram eis ipse vero stabat iuxta eos sub arbore
히브리어구약BHS,8 וַיִּקַּח חֶמְאָה וְחָלָב וּבֶן־הַבָּקָר אֲשֶׁר עָשָׂה וַיִּתֵּן לִפְנֵיהֶם וְהוּא־עֹמֵד עֲלֵיהֶם תַּחַת הָעֵץ וַיֹּאכֵלוּ׃
성 경: [창18:8]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천사를 영접한 아브라함]
나무 아래 모셔 서매 – 나그네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고 ‘그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든 것'(공동번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손님에 대하여 극진한 예우를 갖추는 행동이다.
그들이 먹으니라 – 유대 주석가 및 일부 카톨릭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그들이 단지 먹는 척하였 뿐이지 실제로 먹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Josephus, Philo, Jonathan). 그러나 이것은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지지될 수 없는 해석이다. 물론 영적 존재가 육적인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과 수행 천사가 기꺼이 음식을 드신 까닭은 마므레의 환대 사건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사건었다는 점을 족장에게 확신시키고 동시에 아브라함과 보다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Keil, Delitzsch, Lange).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것(눅 24:41-43)과 같은 이유이다.
와요메루 엘라우 아예 사라 이쉬테카 와요멜 힌네 바오헬
개역개정,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새번역,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우리말성경,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지금 장막 안에 있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9 “Where is your wife Sarah?” they asked him. “There, in the tent,” he said.
영어NASB,9 Then they said to him, “Where is Sarah your wife?” And he said, ” Behold, in the tent. ”
영어MSG,9 The men said to him, “Where is Sarah your wife?” He said, “In the tent.”
영어NRSV,9 They said to him, “Where is your wife Sarah?” And he said, “There, in the tent.”
헬라어구약Septuagint,9 ειπεν δε προς αυτον που σαρρα η γυνη σου ο δε αποκριθεις ειπεν ιδου εν τη σκηνη
라틴어Vulgate,9 cumque comedissent dixerunt ad eum ubi est Sarra uxor tua ille respondit ecce in tabernaculo est
히브리어구약BHS,9 וַיֹּאמְרוּ אֵלָיו אַיֵּה שָׂרָה אִשְׁתֶּךָ וַיֹּאמֶר הִנֵּה בָאֹהֶל׃
성 경: [창18:9]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거듭된 이삭 탄생 예언]
사라가 어디 있느냐 – 세 나그네가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보통 여행자들이 아님을 시사해 주는 질문이다. 즉 이들은 이미 족장의 아내인 사라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라에 대한 특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특별히 방문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와요멜 쇼브 아슈브 엘레카 카에트 하야 웨힌네 벤 레사라 이쉬테카 웨사라 쇼마아트 페타흐 하오헬 웨후 아하라우
개역개정,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새번역,10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들었다.
우리말성경,10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년 이맘때쯤 반드시 네게 돌아오겠다. 그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뒤에 있는 장막 입구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영어NIV,10 Then the LORD said, “I will surely return to you about this time next year, and Sarah your wife will have a son.” Now Sarah was listening at the entrance to the tent, which was behind him.
영어NASB,10 And he said, “I will surely return to you at this time next year; and behold, Sarah your wife shall have a son.” And Sarah was listening at the tent door, which was behind him.
영어MSG,10 One of them said, “I’m coming back about this time next year. When I arrive, your wife Sarah will have a son.” Sarah was listening at the tent opening, just behind the man.
영어NRSV,10 Then one said, “I will surely return to you in due season, and your wife Sarah shall have a son.” And Sarah was listening at the tent entrance behind him.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ειπεν δε επαναστρεφων ηξω προς σε κατα τον καιρον τουτον εις ωρας και εξει υιον σαρρα η γυνη σου σαρρα δε ηκουσεν προς τη θυρα της σκηνης ουσα οπισθε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10 cui dixit revertens veniam ad te tempore isto vita comite et habebit filium Sarra uxor tua quo audito Sarra risit post ostium tabernaculi
히브리어구약BHS,10 וַיֹּאמֶר שֹׁוב אָשׁוּב אֵלֶיךָ כָּעֵת חַיָּה וְהִנֵּה־בֵן לְשָׂרָה אִשְׁתֶּךָ וְשָׂרָה שֹׁמַעַת פֶּתַח הָאֹהֶל וְהוּא אַחֲרָיו׃
성 경: [창18:10]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거듭된 이삭 탄생 예언]
그가 가라사대 – TEV는 ‘그’를 ‘그들 중 한 사람'(one of them)으로, RSV는 ‘주'(the lord)로, 공동 번역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밝히려 하시는 것이다.
기한(*, 에트 하야). ‘시간'(에트)과 ‘생명'(하야)이 복합된 말로 직역하면 ‘생명의 시간’이다. 이는 ‘소생할 때’, ‘해가 바뀔 때’란 의미로 만사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네게로 돌아오리니 – 하나님에게 있어 ‘임하다’ ‘돌아오다’ 등의 표현 (출 3:18;민 10:36;시 50:3;90:13;슥 14;5)은 그분이 어떤 사건에 직접 개입하셔서 사역하시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지금은 약속만을 가지고 너를 방문했지만 다음에는 약속의 실현을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다’란 뜻이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이로 보아 아브라함 가족들의 거처인 장막은 나그네들이 앉아 쉰 나무 가까이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대 유목민들의 장막은 대개 칸막이가 처져 있어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바깥 부분은 주로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사랑방으로 남자들이 사용하였고, 안쪽은 생활 필수품과 취사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여자들이 내실로 사용되었다. 사라가 하나님의 말을 들은 곳도 바로 이 내실이었을 것이다.
웨아브라함 웨사라 제케님 바임 바야밈 하달 리흐요트 레사라 오라흐 카나쉼
개역개정,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새번역,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우리말성경,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난 상태였습니다.
가톨릭성경,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영어NIV,11 Abraham and Sarah were already old and well advanced in years, and Sarah was past the age of childbearing.
영어NASB,11 Now Abraham and Sarah were old, advanced in age; Sarah was past childbearing.
영어MSG,11 Abraham and Sarah were old by this time, very old. Sarah was far past the age for having babies.
영어NRSV,11 Now Abraham and Sarah were old, advanced in age; it had ceased to be with Sarah after the manner of women.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αβρααμ δε και σαρρα πρεσβυτεροι προβεβηκοτες ημερων εξελιπεν δε σαρρα γινεσθαι τα γυναικεια
라틴어Vulgate,11 erant autem ambo senes provectaeque aetatis et desierant Sarrae fieri muliebria
히브리어구약BHS,11 וְאַבְרָהָם וְשָׂרָה זְקֵנִים בָּאִים בַּיָּמִים חָדַל לִהְיֹות לְשָׂרָה אֹרַח כַּנָּשִׁים׃
와티츠핰 사라 베킬바흐 레모르 아하레 베로티 하예타 리 에드나 와도니 자켄
개역개정,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새번역,12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우리말성경,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어서 기력이 없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내게 과연 그런 기쁜 일이 있겠는가?”
가톨릭성경,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영어NIV,12 So Sarah laughed to herself as she thought, “After I am worn out and my master is old, will I now have this pleasure?”
영어NASB,12 And Sarah laughed to herself, saying, “After I have become old, shall I have pleasure, my lord being old also?”
영어MSG,12 Sarah laughed within herself, “An old woman like me? Get pregnant? With this old man of a husband?”
영어NRSV,12 So Sarah laughed to herself, saying, “After I have grown old, and my husband is old, shall I have pleasure?”
헬라어구약Septuagint,12 εγελασεν δε σαρρα εν εαυτη λεγουσα ουπω μεν μοι γεγονεν εως του νυν ο δε κυριος μου πρεσβυτερος
라틴어Vulgate,12 quae risit occulte dicens postquam consenui et dominus meus vetulus est voluptati operam dabo
히브리어구약BHS,12 וַתִּצְחַק שָׂרָה בְּקִרְבָּהּ לֵאמֹר אַחֲרֵי בְלֹתִי הָיְתָה־לִּי עֶדְנָה וַאדֹנִי זָקֵן׃
성 경: [창18:11,12]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거듭된 이삭 탄생 예언]
늙었고 – 문자적 의미는 ‘생명의 날들이 지나갔다’인데 이는 생식 능력의 때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단어이다.
속으로 웃고 –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적 상황이 근거해 자신의 수태 가능성을 불신한 자궤적(自潰的) 웃음이다(Calvin, Keil).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 ‘내가 어찌 부부간의 즐거움을 가지리요'(Modern Language Bible)라는 뜻으로 자신의 수태 불능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와요멜 아도나이 엘 아브라함 람마 제 차하카 사라 레모르 하아프 우메나 엘레드 와아니 자칸티
히브리어구약BHS,12 וַתִּצְחַק שָׂרָה בְּקִרְבָּהּ לֵאמֹר אַחֲרֵי בְלֹתִי הָיְתָה־לִּי עֶדְנָה וַאדֹנִי זָקֵן׃
개역개정,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새번역,13 그 때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
우리말성경,13 그러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라는 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는데 정말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느냐?
가톨릭성경,13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영어NIV,13 Then the LORD said to Abraham, “Why did Sarah laugh and say, ‘Will I really have a child, now that I am old?’
영어NASB,13 And the LORD said to Abraham, “Why did Sarah laugh, saying, ‘Shall I indeed bear a child, when I am so old?’
영어MSG,13 GOD said to Abraham, “Why did Sarah laugh saying, ‘Me? Have a baby? An old woman like me?’
영어NRSV,13 The LORD said to Abraham, “Why did Sarah laugh, and say, ‘Shall I indeed bear a child, now that I am old?’
헬라어구약Septuagint,13 και ειπεν κυριος προς αβρααμ τι οτι εγελασεν σαρρα εν εαυτη λεγουσα αρα γε αληθως τεξομαι εγω δε γεγηρακα
라틴어Vulgate,13 dixit autem Dominus ad Abraham quare risit Sarra dicens num vere paritura sum anus
히브리어구약BHS,13 וַיֹּאמֶר יְהוָה אֶל־אַבְרָהָם לָמָּה זֶּה צָחֲקָה שָׂרָה לֵאמֹר הַאַף אֻמְנָם אֵלֵד וַאֲנִי זָקַנְתִּי׃
성 경: [창18:13]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거듭된 이삭 탄생 예언]
사라가 왜 웃으며 – 낯선 여행자로서 족장 아내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9절) 그녀의 심중의 생각까지 감찰하고 있는 점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입증해 준다(요 21:17;히 4:13).
어떻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움남'(*)은 ‘참으로’, ‘진실로’, ‘확실히’란 뜻이다. 따라서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인 줄로 철저히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이파레 아도나이 다발 함모에드 아슈브 엘레카 카에트 하야 우레사라 벤
개역개정,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새번역,14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말성경,14 여호와께 어려워서 못할 일이 있겠느냐? 내가 내년 이맘때쯤, 곧 정해진 때에 네게 돌아올 것이며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14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영어NIV,14 Is anything too hard for the LORD? I will return to you at the appointed time next year and Sarah will have a son.”
영어NASB,14 “Is anything too difficult for the LORD? At the appointed time I will return to you, at this time next year, and Sarah shall have a son.”
영어MSG,14 Is anything too hard for GOD? I’ll be back about this time next year and Sarah will have a baby.”
영어NRSV,14 Is anything too wonderful for the LORD? At the set time I will return to you, in due season, and Sarah shall have a son.”
헬라어구약Septuagint,14 μη αδυνατει παρα τω θεω ρημα εις τον καιρον τουτον αναστρεψω προς σε εις ωρας και εσται τη σαρρα υιος
라틴어Vulgate,14 numquid Deo est quicquam difficile iuxta condictum revertar ad te hoc eodem tempore vita comite et habebit Sarra filium
히브리어구약BHS,14 הֲיִפָּלֵא מֵיְהוָה דָּבָר לַמֹּועֵד אָשׁוּב אֵלֶיךָ כָּעֵת חַיָּה וּלְשָׂרָה בֵן׃
성 경: [창18:14]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거듭된 이삭 탄생 예언]
능치 못할 일 – 문자적으로는 ‘너무 어려워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일’.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는 있을 수 없음을 역설하시면서(렘 32:27;마 19:26;눅 1:37) 사라의 불신을 불식시키는 약속을 거듭 주고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재삼 죄인에 대한 그분의 인내와 사랑의 열정을 깨달을 수 있다.
와트카헤쉬 사라 레모르 로 차하크티 키 야레아 와요멜 로 키 차하크트
개역개정,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새번역,15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였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우리말성경,15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다.”
가톨릭성경,15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아니다. 너는 웃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영어NIV,15 Sarah was afraid, so she lied and said, “I did not laugh.” But he said, “Yes, you did laugh.”
영어NASB,15 Sarah denied it however, saying, “I did not laugh”; for she was afraid. And He said, “No, but you did laugh.”
영어MSG,15 Sarah lied. She said, “I didn’t laugh,” because she was afraid. But he said, “Yes you did; you laughed.”
영어NRSV,15 But Sarah denied, saying, “I did not laugh”; for she was afraid. He said, “Oh yes, you did laugh.”
헬라어구약Septuagint,15 ηρνησατο δε σαρρα λεγουσα ουκ εγελασα εφοβηθη γαρ και ειπεν ουχι αλλα εγελασας
라틴어Vulgate,15 negavit Sarra dicens non risi timore perterrita Dominus autem non est inquit ita sed risisti
히브리어구약BHS,15 וַתְּכַחֵשׁ שָׂרָה לֵאמֹר לֹא צָחַקְתִּי כִּי יָרֵאָה וַיֹּאמֶר לֹא כִּי צָחָקְתְּ׃
성 경: [창18:15]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거듭된 이삭 탄생 예언]
두려워서 – 자신의 속마음이 확연히 드러나 버린데 대한 두려움이자, 단순한 나그네로만 알았던 자의 권능에 대해 느끼는 놀라움이다.
승인치 아니하여 – 자신의 잘못이나 은밀한 생각 등이 폭로될 때 당혹감 내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짓말, 변명 따위를 늘어놓는 것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에 기초한 일반적 성향이다(3:12, 13). 이러한 태도는 사라에게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는데 그녀는 말하고 있는 상대방의 정체가 하나님일 것이라는 순간적인 생각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불신이 드러난 데 따른 두려움에 못이겨 거짓말을 하고 만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더 이상의 거짓말을 용납치 않는 하나님의 엄숙한 선언이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불신앙을 거짓말로 은폐해 보려 했던 사라의 경솔하고도 어리석은 죄악을 책망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이에 대하여 사라가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 것은 하나님의 책망에 온전히 굴복당하고 말았음을 나타내 준다.
와야쿠무 미솸 하아나쉼 와야쉬키푸 알 페네이 세돔 웨아브라함 호렠 임맘 레솰레함
개역개정,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새번역,16 그 사람들이 떠나려고 일어서서,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데로 갔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바래다 주려고, 함께 얼마쯤 걸었다.
우리말성경,16 그리고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일어나 소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려고 그들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16 그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소돔이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영어NIV,16 When the men got up to leave, they looked down toward Sodom, and Abraham walked along with them to see them on their way.
영어NASB,16 Then the men rose up from there, and looked down toward Sodom; and Abraham was walking with them to send them off.
영어MSG,16 When the men got up to leave, they set off for Sodom. Abraham walked with them to say good-bye.
영어NRSV,16 Then the men set out from there, and they looked toward Sodom; and Abraham went with them to set them on their way.
헬라어구약Septuagint,16 εξανασταντες δε εκειθεν οι ανδρες κατεβλεψαν επι προσωπον σοδομων και γομορρας αβρααμ δε συνεπορευετο μετ’ αυτων συμπροπεμπων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16 cum ergo surrexissent inde viri direxerunt oculos suos contra Sodomam et Abraham simul gradiebatur deducens eos
히브리어구약BHS,16 וַיָּקֻמוּ מִשָּׁם הָאֲנָשִׁים וַיַּשְׁקִפוּ עַל־פְּנֵי סְדֹם וְאַבְרָהָם הֹלֵךְ עִםָּם לְשַׁלְּחָם׃
성 경: [창18:16]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소돔에 대한 심판 예언]
소돔으로 향하고 – 직역하면 ‘소돔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마치 심판주 하나님께서 왼편에 있는 저주받을 자들에게 얼굴을 향하듯(마 25:41) 심판을 위한 진노의 얼굴을 소돔 쪽으로 돌리는 장면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아브라함이 기거하고 있는 헤브론 지경에서 소돔까지는 약 30km정도의 거리로 멀리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점이다.
함께 나가니라 – 유대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일행들과 함께 헤브론 북동쪽에 있는 ‘카퍼바누케'(Capherbanuche)까지 동행했다고 한다. 이곳은 아주 높은 언덕에 위치한 지역으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사해와 그 연변의 여러 성읍들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아도나이 아말 함카세 아니 메아브라함 아쉘 아니 오세
개역개정,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새번역,17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우리말성경,17 그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는가?
가톨릭성경,17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영어NIV,17 Then the LORD said, “Shall I hide from Abraham what I am about to do?
영어NASB,17 And the LORD said, “Shall I hide from Abraham what I am about to do,
영어MSG,17 Then GOD said, “Shall I keep back from Abraham what I’m about to do?
영어NRSV,17 The LORD said, “Shall I hide from Abraham what I am about to do,
헬라어구약Septuagint,17 ο δε κυριος ειπεν μη κρυψω εγω απο αβρααμ του παιδος μου α εγω ποιω
라틴어Vulgate,17 dixitque Dominus num celare potero Abraham quae gesturus sum
히브리어구약BHS,17 וַיהֹוָה אָמָר הַמְכַסֶּה אֲנִי מֵאַבְרָהָם אֲשֶׁר אֲנִי עֹשֶׂה׃
성 경: [창18:17]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소돔에 대한 심판 예언]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멸하시려는 계획을 알려 주신 이유는 이어 나오는 18, 1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1) 축복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택한 민족 이스라엘의 조상이될 뿐 아니라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아브라함(18절)에게는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는 것'(19절)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자식과 후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과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2)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심판이 없는 구속은 의미가 없으며, 구속이 없는 심판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요 5:29;롬 5:9) 하나님께서는 구속과 심판, 축복과 저주의 두 길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함으로써(요 3:18) 오고 오는 그 모든 후손들이 소돔의 멸망을 경고로 삼아 축복받는 구속의 길을 택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웨아브라함 하요 이흐예 레고이 가돌 웨아춤 웨닙레쿠 보 콜 고예 하아레츠
개역개정,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새번역,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며, 땅 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말성경,18 아브라함은 분명히 크고 강한 민족이 될 것이며 땅의 모든 나라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영어NIV,18 Abraham will surely become a great and powerful nation, and all nations on earth will be blessed through him.
영어NASB,18 since Abraham will surely become a great and mighty nation, and in him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will be blessed?
영어MSG,18 Abraham is going to become a large and strong nation; all the nations of the world are going to find themselves blessed through him.
영어NRSV,18 seeing that Abraham shall become a great and mighty nation, and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 in him?
헬라어구약Septuagint,18 αβρααμ δε γινομενος εσται εις εθνος μεγα και πολυ και ενευλογηθησονται εν αυτω παντα τα εθνη της γης
라틴어Vulgate,18 cum futurus sit in gentem magnam ac robustissimam et benedicendae sint in illo omnes nationes terrae
히브리어구약BHS,18 וְאַבְרָהָם הָיֹו יִהְיֶה לְגֹוי גָּדֹול וְעָצוּם וְנִבְרְכוּ בֹו כֹּל גֹּויֵי הָאָרֶץ׃
성 경: [창18:18]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소돔에 대한 심판 예언]
천하 만민은…복을 받게 될 것 –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 태어날 그의 후손 메시야로 인해 지구상의 온 족속에게 미칠 구원의 축복을 가리킨다.
키 예다티우 레마안 아쉘 예차웨 엩 바나우 웨엩 베토 아하라우 웨솨메루 데렠 아도나이 라아소트 체다카 우미쉬파트 레마안 하비 아도나이 알 아브라함 엩 아쉘 딥벨 알라우
개역개정,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새번역,19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우리말성경,19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자녀와 그의 집안 자손들에게 명해 여호와의 길을 지켜 의와 공의를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말한 것을 그를 위해 다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영어NIV,19 For I have chosen him, so that he will direct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to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what is right and just, so that the LORD will bring about for Abraham what he has promised him.”
영어NASB,19 “For I have chosen him, in order that he may command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to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righteousness and justice; in order that the LORD may bring upon Abraham what He has spoken about him.”
영어MSG,19 Yes, I’ve settled on him as the one to train his children and future family to observe GOD’s way of life, live kindly and generously and fairly, so that GOD can complete in Abraham what he promised him.”
영어NRSV,19 No, for I have chosen him, that he may charge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to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righteousness and justice; so that the LORD may bring about for Abraham what he has promised him.”
헬라어구약Septuagint,19 ηδειν γαρ οτι συνταξει τοις υιοις αυτου και τω οικω αυτου μετ’ αυτον και φυλαξουσιν τας οδους κυριου ποιειν δικαιοσυνην και κρισιν οπως αν επαγαγη κυριος επι αβρααμ παντα οσα ελαλησεν προ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19 scio enim quod praecepturus sit filiis suis et domui suae post se ut custodiant viam Domini et faciant iustitiam et iudicium ut adducat Dominus propter Abraham omnia quae locutus est ad eum
히브리어구약BHS,19 כִּי יְדַעְתִּיו לְמַעַן אֲשֶׁר יְצַוֶּה אֶת־בָּנָיו וְאֶת־בֵּיתֹו אַחֲרָיו וְשָׁמְרוּ דֶּרֶךְ יְהוָה לַעֲשֹׂות צְדָקָה וּמִשְׁפָּט לְמַעַן הָבִיא יְהוָה עַל־אַבְרָהָם אֵת אֲשֶׁר־דִּבֶּר עָלָיו׃
성 경: [창18:19]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소돔에 대한 심판 예언]
이는…이루려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하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12:2, 3;15: 18-21;17:1 -8)에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여호와는 불변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언약한 바를 반드시 이행하시지만 여기에는 그 언약의 수혜자인 인간측의 마땅한 자세도 아울러 요구되는 것이다.
와요멜 아도나이 자아카트 세돔 와아모라 키 랍바 웨하타탐 키 카베다 메오드
개역개정,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새번역,20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 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우리말성경,20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겁다.
가톨릭성경,20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영어NIV,20 Then the LORD said, “The outcry against Sodom and Gomorrah is so great and their sin so grievous
영어NASB,20 And the LORD said, “The outcry of Sodom and Gomorrah is indeed great, and their sin is exceedingly grave.
영어MSG,20 GOD continued, “The cries of the victims in Sodom and Gomorrah are deafening; the sin of those cities is immense.
영어NRSV,20 Then the LORD said, “How great is the outcry against Sodom and Gomorrah and how very grave their sin!
헬라어구약Septuagint,20 ειπεν δε κυριος κραυγη σοδομων και γομορρας πεπληθυνται και αι αμαρτιαι αυτων μεγαλαι σφοδρα
라틴어Vulgate,20 dixit itaque Dominus clamor Sodomorum et Gomorrae multiplicatus est et peccatum earum adgravatum est nimis
히브리어구약BHS,20 וַיֹּאמֶר יְהוָה זַעֲקַת סְדֹם וַעֲמֹרָה כִּי־רָבָּה וְחַטָּאתָם כִּי כָבְדָה מְאֹד׃
성 경: [창18:20]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소돔에 대한 심판 예언]
소돔과 고모라 –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더불어 사해(死海) 남단 싯딤 골짜기에 있던 다섯 도시 중 두 도시이다(14:2, 3). 이곳 사람들은 극도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 두 도시는 ‘죄악의 도시’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부르짖음 –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 곧 원성(怨聲)을 뜻한다. TEV는 이를 ‘고소'(complaint)1로 번역하였다. 억울한 피는 땅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하늘을 향해 호소한다는 고대인의 사상에서 나온 말로(4:10),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겁고 큰 것이었음을 상징한다.
에라다 나 웨에르에 핰차아카타흐 하바아 엘라이 아수 칼라 웨임 로 에다아
개역개정,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새번역,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 온 울부짖음과 같은 것인지를 알아보겠다.”
우리말성경,21 내가 내려가서 그들이 한 짓이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고 알고자 한다.”
가톨릭성경,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영어NIV,21 that I will go down and see if what they have done is as bad as the outcry that has reached me. If not, I will know.”
영어NASB,21 “I will go down now, and see if they have done entirely according to its outcry, which has come to Me; and if not, I will know.”
영어MSG,21 I’m going down to see for myself, see if what they’re doing is as bad as it sounds. Then I’ll know.”
영어NRSV,21 I must go down and see whether they have done altogether according to the outcry that has come to me; and if not, I will know.”
헬라어구약Septuagint,21 καταβας ουν οψομαι ει κατα την κραυγην αυτων την ερχομενην προς με συντελουνται ει δε μη ινα γνω
라틴어Vulgate,21 descendam et videbo utrum clamorem qui venit ad me opere conpleverint an non est ita ut sciam
히브리어구약BHS,21 אֵרֲדָה־נָּא וְאֶרְאֶה הַכְּצַעֲקָתָהּ הַבָּאָה אֵלַי עָשׂוּ כָּלָה וְאִם־לֹא אֵדָעָה׃
성 경: [창18:21]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소돔에 대한 심판 예언]
내려가서 – 고지대인 헤브론에서 해안 평지 지역인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보고 알려 하노라 –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는 그분께서 타락상을 직접 보고서 확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주시겠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갈대아역(Chaldee)에는 ‘만일 회개하기만 한다면 내가 그들을 벌하기 않겠다’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뒤이어 아브라함이 중보 기도하였을 때 그들 중 열명만이라도 회개하였더라면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는 멸당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와이페누 미솸 하아나쉼 와예레쿠 세도마 웨아브라함 오덴누 오메드 리페네 아도나이
개역개정,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새번역,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떠나서 소돔으로 갔으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 ㉠마소라 본문을 따름. 고대 히브리의 서기관 전통에서는 ‘주님께서 아브라함 앞에 그대로 서 계셨다’
우리말성경,22 그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 소돔을 향해 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영어NIV,22 The men turned away and went toward Sodom, but Abraham remained standing before the LORD.
영어NASB,22 Then the men turned away from there and went toward Sodom, while Abraham was still standing before the LORD.
영어MSG,22 The men set out for Sodom, but Abraham stood in GOD’s path, blocking his way.
영어NRSV,22 So the men turned from there, and went toward Sodom, while Abraham remained standing before the LORD.
헬라어구약Septuagint,22 και αποστρεψαντες εκειθεν οι ανδρες ηλθον εις σοδομα αβρααμ δε ην εστηκως εναντιον κυριου
라틴어Vulgate,22 converteruntque se inde et abierunt Sodomam Abraham vero adhuc stabat coram Domino
히브리어구약BHS,22 וַיִּפְנוּ מִשָּׁם הָאֲנָשִׁים וַיֵּלְכוּ סְדֹמָה וְאַבְרָהָם עֹודֶנּוּ עֹמֵד לִפְנֵי יְהוָה׃
와이가쉬 아브라함 와요말 하아프 티스페 차디크 임 라솨
개역개정,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새번역,23 아브라함이 주님께 가까이 가서 아뢰었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시렵니까?
우리말성경,23 아브라함이 다가서면서 말했습니다. “주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쓸어 버리시렵니까?
가톨릭성경,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영어NIV,23 Then Abraham approached him and said: “Will you sweep away the righteous with the wicked?
영어NASB,23 And Abraham came near and said, “Will You indeed sweep away the righteous with the wicked?
영어MSG,23 Abraham confronted him, “Are you serious? Are you planning on getting rid of the good people right along with the bad?
영어NRSV,23 Then Abraham came near and said, “Will you indeed sweep away the righteous with the wicked?
헬라어구약Septuagint,23 και εγγισας αβρααμ ειπεν μη συναπολεσης δικαιον μετα ασεβους και εσται ο δικαιος ως ο ασεβης
라틴어Vulgate,23 et adpropinquans ait numquid perdes iustum cum impio
히브리어구약BHS,23 וַיִּגַּשׁ אַבְרָהָם וַיֹּאמַר הַאַף תִּסְפֶּה צַדִּיק עִם־רָשָׁע׃
성 경: [창18:23]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
가까이 나아가(*, 나가쉬) – 기본 뜻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접근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경배하다’, ‘함께 눕다’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따라서 이는 아브라함이 위치적으로 뿐 아니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영적으로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하겠다.
우라이 예쉬 하미쉼 차디킴 베토크 하이르 하아프 티스페 웨로 팃사 람마콤 레마안 하미쉼 하차디킴 아쉘 베킬바흐
개역개정,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새번역,24 그 성 안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 성을 기어이 쓸어 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우리말성경,24 만약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는데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고 정말 쓸어 버리시겠습니까?
가톨릭성경,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영어NIV,24 What if there are fifty righteous people in the city? Will you really sweep it away and not spare the place for the sake of the fifty righteous people in it?
영어NASB,24 “Suppose there are fifty righteous within the city; will You indeed sweep it away and not spare the place for the sake of the fifty righteous who are in it?
영어MSG,24 What if there are fifty decent people left in the city; will you lump the good with the bad and get rid of the lot?
영어NRSV,24 Suppose there are fifty righteous within the city; will you then sweep away the place and not forgive it for the fifty righteous who are in it?
헬라어구약Septuagint,24 εαν ωσιν πεντηκοντα δικαιοι εν τη πολει απολεις αυτους ουκ ανησεις παντα τον τοπον ενεκεν των πεντηκοντα δικαιων εαν ωσιν εν αυτη
라틴어Vulgate,24 si fuerint quinquaginta iusti in civitate peribunt simul et non parces loco illi propter quinquaginta iustos si fuerint in eo
히브리어구약BHS,24 אוּלַי יֵשׁ חֲמִשִּׁים צַדִּיקִם בְּתֹוךְ הָעִיר הַאַף תִּסְפֶּה וְלֹא־תִשָּׂא לַמָּקֹום לְמַעַן חֲמִשִּׁים הַצַּדִּיקִם אֲשֶׁר בְּקִרְבָּהּ׃
성 경: [창18:24]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
의인 오십 – 당시 소돔 성의 인구가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소돔이 비옥한 평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점(13절)을 감안할 때 오십 명이라는 수는 전체 인구수에 비해 지극히 적은 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은 수를 내세워 소돔 성읍의 구원을 간구하였던 것은 의인 오십이라도 크게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릴라 레카 메아소트 카다바르 하제 레하미트 차디크 임 라솨 웨하야 카차딬 카라솨 하릴라 라크 하쇼페트 콜 하아레츠 로 야아세 미쉬파트
개역개정,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새번역,25 그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의인을 악인과 똑같이 보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말성경,25 의인을 악인과 같이 죽이고 의인을 악인처럼 대하시는 것은 주께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인 주께서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톨릭성경,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어NIV,25 Far be it from you to do such a thing–to kill the righteous with the wicked, treating the righteous and the wicked alike. Far be it from you! Will not the Judge of all the earth do right?”
영어NASB,25 “Far be it from You to do such a thing, to slay the righteous with the wicked, so that the righteous and the wicked are treated alike. Far be it from You! Shall not the Judge of all the earth deal justly?”
영어MSG,25 Wouldn’t you spare the city for the sake of those fifty innocents? I can’t believe you’d do that, kill off the good and the bad alike as if there were no difference between them. Doesn’t the Judge of all the Earth judge with justice?”
영어NRSV,25 Far be it from you to do such a thing, to slay the righteous with the wicked, so that the righteous fare as the wicked! Far be that from you! Shall not the Judge of all the earth do what is just?”
헬라어구약Septuagint,25 μηδαμως συ ποιησεις ως το ρημα τουτο του αποκτειναι δικαιον μετα ασεβους και εσται ο δικαιος ως ο ασεβης μηδαμως ο κρινων πασαν την γην ου ποιησεις κρισιν
라틴어Vulgate,25 absit a te ut rem hanc facias et occidas iustum cum impio fiatque iustus sicut impius non est hoc tuum qui iudicas omnem terram nequaquam facies iudicium
히브리어구약BHS,25 חָלִלָה לְּךָ מֵעֲשֹׂת כַּדָּבָר הַזֶּה לְהָמִית צַדִּיק עִם־רָשָׁע וְהָיָה כַצַּדִּיק כָּרָשָׁע חָלִלָה לָּךְ הֲשֹׁפֵט כָּל־הָאָרֶץ לֹא יַעֲשֶׂה מִשְׁפָּט׃
성 경: [창18:25]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
공의를 행하실 것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에만 매달려 무조건적인 사유(赦宥)를 간구하지 않고, 그분의 공의에 근거한 재판상의 공정성을 호소하였음을 보여 준다(Keil).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관(神觀)은 당시 근동의 샤마니즘적인 여타 종교의 저급한 신관에 비해 대단히 차원 높고 성숙한 것이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윤리성을 결여한 여타 잡신들과는 달리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는 공의의 신이심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요멜 아도나이 임 엠차 비세돔 하미쉼 차디킴 베토크 하이르 웨나사티 레콜 함마콤 바아부람
개역개정,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새번역,26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에서 내가 의인 쉰 명만을 찾을 수 있으면, 그들을 보아서라도 그 성 전체를 용서하겠다.”
우리말성경,2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소돔 성에서 의인 50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해 그 온 땅을 용서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영어NIV,26 The LORD said, “If I find fifty righteous people in the city of Sodom, I will spare the whole place for their sake.”
영어NASB,26 So the LORD said, “If I find in Sodom fifty righteous within the city, then I will spare the whole place on their account.”
영어MSG,26 GOD said, “If I find fifty decent people in the city of Sodom, I’ll spare the place just for them.”
영어NRSV,26 And the LORD said, “If I find at Sodom fifty righteous in the city, I will forgive the whole place for their sake.”
헬라어구약Septuagint,26 ειπεν δε κυριος εαν ευρω εν σοδομοις πεντηκοντα δικαιους εν τη πολει αφησω παντα τον τοπον δι’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26 dixitque Dominus ad eum si invenero Sodomis quinquaginta iustos in medio civitatis dimittam omni loco propter eos
히브리어구약BHS,26 וַיֹּאמֶר יְהוָה אִם־אֶמְצָא בִסְדֹם חֲמִשִּׁים צַדִּיקִם בְּתֹוךְ הָעִיר וְנָשָׂאתִי לְכָל־הַמָּקֹום בַּעֲבוּרָם׃
성 경: [창18:26]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
온 지경을 용서하라 – 하나님께서 대표의 대야의 원리에 입각해 인간을 구원하심을 보여 준다. 이러한 대표 원리는 한 사람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셀 수없이 많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신약 시대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롬 5:18, 19). 이는 비록 죄인이라도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기보다는 돌이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에 기인한 큰 은혜이다(겔 33:11).
와야안 아브라함 와요말 힌네 나 호알티 레다벨 엘 아도나이 웨아노키 아파르 와에펠
개역개정,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새번역,27 아브라함이 다시 아뢰었다. “티끌이나 재밖에 안 되는 주제에,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우리말성경,27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비록 먼지와 재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내 주께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가톨릭성경,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영어NIV,27 Then Abraham spoke up again: “Now that I have been so bold as to speak to the Lord, though I am nothing but dust and ashes,
영어NASB,27 And Abraham answered and said, “Now behold, I have ventured to speak to the Lord, although I am but dust and ashes.
영어MSG,27 Abraham came back, “Do I, a mere mortal made from a handful of dirt, dare open my mouth again to my Master?
영어NRSV,27 Abraham answered, “Let me take it upon myself to speak to the Lord, I who am but dust and ashes.
헬라어구약Septuagint,27 και αποκριθεις αβρααμ ειπεν νυν ηρξαμην λαλησαι προς τον κυριον εγω δε ειμι γη και σποδος
라틴어Vulgate,27 respondens Abraham ait quia semel coepi loquar ad Dominum meum cum sim pulvis et cinis
히브리어구약BHS,27 וַיַּעַן אַבְרָהָם וַיֹּאמַר הִנֵּה־נָא הֹואַלְתִּי לְדַבֵּר אֶל־אֲדֹנָי וְאָנֹכִי עָפָר וָאֵפֶר׃
성 경: [창18:27]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
티끌과 같은 나 – ‘티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파르 와에페르'(*)는 ‘먼지'(아파르)와 ‘재'(에페르)가 복합된 말이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정확히 파악한 진솔한 신앙 고백이다(롬 9:21-23).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찰할 줄 알았던 아브라함은 먼지에서 시작하여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마는 자신의 존재(3:19)에 대하여서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중보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에 근거한 기도 였음을 알 수 있다.
우라이 야흐세룬 하미쉼 하차디킴 하밋솨 하타쉬힡 바하밋솨 엩 콜 하이르 와요멜 로 아쉬히트 임 엠차 솸 알바임 와하밋솨
개역개정,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새번역,28 의인이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섯이 모자란다고, 성 전체를 다 멸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거기에서 마흔다섯 명만 찾아도,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우리말성경,28 만약 의인 50명에서 다섯 사람이 모자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다섯 사람 때문에 그 성 전체를 멸망시키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45명을 찾으면 내가 멸망시키지 않겠다.”
가톨릭성경,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영어NIV,28 what if the number of the righteous is five less than fifty? Will you destroy the whole city because of five people?” “If I find forty-five there,”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영어NASB,28 “Suppose the fifty righteous are lacking five, will You destroy the whole city because of fiv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if I find forty-five there.”
영어MSG,28 What if the fifty fall short by five–would you destroy the city because of those missing five?” He said, “I won’t destroy it if there are forty-five.”
영어NRSV,28 Suppose five of the fifty righteous are lacking? Will you destroy the whole city for lack of fiv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if I find forty-five there.”
헬라어구약Septuagint,28 εαν δε ελαττονωθωσιν οι πεντηκοντα δικαιοι πεντε απολεις ενεκεν των πεντε πασαν την πολιν και ειπεν ου μη απολεσω εαν ευρω εκει τεσσαρακοντα πεντε
라틴어Vulgate,28 quid si minus quinquaginta iustis quinque fuerint delebis propter quinque universam urbem et ait non delebo si invenero ibi quadraginta quinque
히브리어구약BHS,28 אוּלַי יַחְסְרוּן חֲמִשִּׁים הַצַּדִּיקִם חֲמִשָּׁה הֲתַשְׁחִית בַּחֲמִשָּׁה אֶת־כָּל־הָעִיר וַיֹּאמֶר לֹא אַשְׁחִית אִם־אֶמְצָא שָׁם אַרְבָּעִים וַחֲמִשָּׁה׃
와요셒 오드 레다벨 엘라우 와요말 우라이 임체운 솸 알바임 와요멜 로 에에세 바아부르 하아르바임
개역개정,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새번역,29 아브라함이 다시 한 번 주님께 아뢰었다. “거기에서 마흔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우리말성경,29 아브라함이 다시 말했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40명만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40명을 위해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
가톨릭성경,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영어NIV,29 Once again he spoke to him, “What if only forty are found there?” He said, “For the sake of forty, I will not do it.”
영어NASB,29 And he spoke to Him yet again and said, “Suppose forty ar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o it on account of the forty.”
영어MSG,29 Abraham spoke up again, “What if you only find forty?” “Neither will I destroy it if for forty.”
영어NRSV,29 Again he spoke to him, “Suppose forty are found there.” He answered, “For the sake of forty I will not do it.”
헬라어구약Septuagint,29 και προσεθηκεν ετι λαλησαι προς αυτον και ειπεν εαν δε ευρεθωσιν εκει τεσσαρακοντα και ειπεν ου μη απολεσω ενεκεν των τεσσαρακοντα
라틴어Vulgate,29 rursumque locutus est ad eum sin autem quadraginta inventi fuerint quid facies ait non percutiam propter quadraginta
히브리어구약BHS,29 וַיֹּסֶף עֹוד לְדַבֵּר אֵלָיו וַיֹּאמַר אוּלַי יִמָּצְאוּן שָׁם אַרְבָּעִים וַיֹּאמֶר לֹא אֶעֱשֶׂה בַּעֲבוּר הָאַרְבָּעִים׃
성 경: [창18:28,29,30,31,32]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
앞 부분(23-25절)이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한 호소였던데 반해 이 부분은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더욱 의지한 간절한 호소이다. 마치 황금 사슬이 하나하나 연결되듯 의인 오십, 사십 오인, 사십, 삼십, 이십, 십 인으로 진행되는 이 간절하고 끈질긴 아브라함의 기도 속에서 소돔 성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타는 사랑과 그의 간청을 끝까지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엿보인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면모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데, 특히 그의 중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예표로 간주하기에 충분하다.
와요멜 알 나 이하르 라도나이 와아다베라 우라이 임마체운 솸 쉐로쉼 와요멜 로 에에세 임 엠차 솸 쉐로쉼
개역개정,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새번역,30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서른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거기에서 서른 명만 찾아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우리말성경,30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내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만약 거기에서 30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셨습니다. “30명을 찾으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겠다.”
가톨릭성경,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영어NIV,30 Then he said, “May the Lord not be angry, but let me speak. What if only thirty can be found there?” He answered, “I will not do it if I find thirty there.”
영어NASB,30 Then he said, “Oh may the Lord not be angry, and I shall speak; suppose thirty ar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o it if I find thirty there.”
영어MSG,30 He said, “Master, don’t be irritated with me, but what if only thirty are found?” “No, I won’t do it if I find thirty.”
영어NRSV,30 Then he said, “Oh do not let the Lord be angry if I speak. Suppose thirty are found there.” He answered, “I will not do it, if I find thirty there.”
헬라어구약Septuagint,30 και ειπεν μη τι κυριε εαν λαλησω εαν δε ευρεθωσιν εκει τριακοντα και ειπεν ου μη απολεσω εαν ευρω εκει τριακοντα
라틴어Vulgate,30 ne quaeso inquit indigneris Domine si loquar quid si inventi fuerint ibi triginta respondit non faciam si invenero ibi triginta
히브리어구약BHS,30 וַיֹּאמֶר אַל־נָא יִחַר לַאדֹנָי וַאֲדַבֵּרָה אוּלַי יִמָּצְאוּן שָׁם שְׁלֹשִׁים וַיֹּאמֶר לֹא אֶעֱשֶׂה אִם־אֶמְצָא שָׁם שְׁלֹשִׁים׃
와요멜 힌네 나 호알티 레다벨 엘 아도나이 우라이 임마체운 솸 에스림 와요멜 로 아쉬히트 바아부르 하에스림
개역개정,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새번역,31 아브라함이 다시 아뢰었다. “감히 주님께 아룁니다. 거기에서 스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스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우리말성경,31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제가 감히 주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만약 20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20명을 위해 멸망시키지 않겠다.”
가톨릭성경,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영어NIV,31 Abraham said, “Now that I have been so bold as to speak to the Lord, what if only twenty can be found there?” He said, “For the sake of twenty, I will not destroy it.”
영어NASB,31 And he said, “Now behold, I have ventured to speak to the Lord; suppose twenty ar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on account of the twenty.”
영어MSG,31 He pushed on, “I know I’m trying your patience, Master, but how about for twenty?” “I won’t destroy it for twenty.”
영어NRSV,31 He said, “Let me take it upon myself to speak to the Lord. Suppose twenty are found there.” He answered, “For the sake of twenty I will not destroy it.”
헬라어구약Septuagint,31 και ειπεν επειδη εχω λαλησαι προς τον κυριον εαν δε ευρεθωσιν εκει εικοσι και ειπεν ου μη απολεσω ενεκεν των εικοσι
라틴어Vulgate,31 quia semel ait coepi loquar ad Dominum meum quid si inventi fuerint ibi viginti dixit non interficiam propter viginti
히브리어구약BHS,31 וַיֹּאמֶר הִנֵּה־נָא הֹואַלְתִּי לְדַבֵּר אֶל־אֲדֹנָי אוּלַי יִמָּצְאוּן שָׁם עֶשְׂרִים וַיֹּאמֶר לֹא אַשְׁחִית בַּעֲבוּר הָעֶשְׂרִים׃
와요멜 알 나 이하르 라도나이 와아다베라 아크 하파암 우라이 임마체운 솸 아사라 와요멜 로 아쉬히트 바아부르 하아사라
개역개정,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새번역,32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우리말성경,32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내 주여,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거기에서 10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그 10명을 위해 멸망시키지 않겠다.”
가톨릭성경,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영어NIV,32 Then he said, “May the Lord not be angry, but let me speak just once more. What if only ten can be found there?” He answered, “For the sake of ten, I will not destroy it.”
영어NASB,32 Then he said, “Oh may the Lord not be angry, and I shall speak only this once; suppose ten are found there?” And He said, “I will not destroy it on account of the ten.”
영어MSG,32 He wouldn’t quit, “Don’t get angry, Master–this is the last time. What if you only come up with ten?” “For the sake of only ten, I won’t destroy the city.”
영어NRSV,32 Then he said, “Oh do not let the Lord be angry if I speak just once more. Suppose ten are found there.” He answered, “For the sake of ten I will not destroy it.”
헬라어구약Septuagint,32 και ειπεν μη τι κυριε εαν λαλησω ετι απαξ εαν δε ευρεθωσιν εκει δεκα και ειπεν ου μη απολεσω ενεκεν των δεκα
라틴어Vulgate,32 obsecro inquit ne irascaris Domine si loquar adhuc semel quid si inventi fuerint ibi decem dixit non delebo propter decem
히브리어구약BHS,32 וַיֹּאמֶר אַל־נָא יִחַר לַאדֹנָי וַאֲדַבְּרָה אַךְ־הַפַּעַם אוּלַי יִמָּצְאוּן שָׁם עֲשָׂרָה וַיֹּאמֶר לֹא אַשְׁחִית בַּעֲבוּר הָעֲשָׂרָה׃
성 경: [창18:32]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
이번만 더 –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신앙적 파렴치성'(F.Delitzsch)을 드러낸 말이다. 그러나 마치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듯한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기도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기도와 간구 자세를 원하시는데(사1:18;마 7:7-11; 눅 11:5-13;18:1-8)그 까닭은 인간의 그러한 파렴치성에도 불구하고 봇물 같은 사랑을 부어 주시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와예렠 아도나이 카아쉘 킬라 레다벨 엘 아브라함 웨아브라함 솹 림코모
개역개정,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새번역,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신 뒤에 곧 가시고,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우리말성경,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치시고 즉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톨릭성경,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영어NIV,33 When the LORD had finished speaking with Abraham, he left, and Abraham returned home.
영어NASB,33 And as soon as He had finished speaking to Abraham the LORD departed; and Abraham returned to his place.
영어MSG,33 When GOD finished talking with Abraham, he left. And Abraham went home.
영어NRSV,33 And the LORD went his way, when he had finished speaking to Abraham; and Abraham returned to his place.
헬라어구약Septuagint,33 απηλθεν δε κυριος ως επαυσατο λαλων τω αβρααμ και αβρααμ απεστρεψεν εις τον τοπ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33 abiit Dominus postquam cessavit loqui ad Abraham et ille reversus est in locum suum
히브리어구약BHS,33 וַיֵּלֶךְ יְהוָה כַּאֲשֶׁר כִּלָּה לְדַבֵּר אֶל־אַבְרָהָם וְאַבְרָהָם שָׁב לִמְקֹמֹו׃
성 경: [창18:33]
주제1: [세 천사의 방문과 아브라함의 중보]
주제2: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
즉시 가시니 – 하나님께서 이 땅을 떠나 하늘 거처로 올라가신 것 뿐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벗으시고 무형상적 실체로 돌아가신 것을 함께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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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18장 주석(요약자; 라이프)
창세기 제18장 주석(요약자; 라이프)
창세기; 아브라함이 아들을 약속받다
18:1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마므레 상수리 수풀 – 예루살렘 남방, 헤브론 근교에 위치한 곳으로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이 일찍부터 정착지로 삼아 지금까지 거주해 오고 있던 지역이다.
오정 즈음에(케흠 하욤) – ‘때'(욤)와 ‘열'(하맘)이 합쳐진 말로 직역하면 ‘더운 그 때에’, 곧 태양이 하늘 중앙에 치솟은 때를 가리키는데 이때 팔레스틴 거민들은 대개 식사와 함께 잠시휴식을 취한다(창 43:16;아 1:7).
18:2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사람 셋 – 13절과 19: 1에 의거할 때 이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둘은 천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가 이처럼 가시적(可視的)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형상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시므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뜻하는 바 계시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달려나가 – 생면 부지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진실된 사랑으로 영접한 행위이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로 굳어긴 아름다운 풍습이긴 하지만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자 그의 삶이 항상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몸을 땅에 굽혀 – 귀한 방문자에 대하여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다.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창 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할 때(창 48:12) 또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를 맞이할 때(왕하 2:15)에도 이러한 인사가 행하여졌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을 묻지도 않고 이러한 예우를 표한 것은 그의 인격이 평소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18:3절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내 주여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에 대하여 단수인 ‘내 주여'(my lord))를 사용한 점은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이에 의거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중 한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즉시로 깨달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1)이는 세 사람을 총칭하는 대표 단수이며 (2)’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남편(12절)이나 상전(24:12) 또는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의미도 함께 지닌 단어란점 (3) 아브라함이 부지중(不知中)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는 점(히13:1) 등에 의거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수있다. 즉 아브라함은 이후 서서히 그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17,22절) 아직은 그들을 단순한 나그네로 알고 일반적 차원에서 존칭어를 사용한 것이다.
18:4절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발을 씻으시고 – 아랍과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모래와 먼지가 덮인 거친 사막길로 되어 있다. 따라서 샌들(Sandal) 같은 간단한 신발만 신고 먼지 길을 오래 걸은 여행자들에게는 발 씻을 물이 절실히 요구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가져다 주는것이 필수 관행이 되었는데 이는 손님 접대에 있어서 최상 최적의 예우였다.
나무 아래서 쉬소서 – ‘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안’은’기대다’. ‘눕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곧 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며 식사하기에 편한자세를 취하라는 의미이다. 오늘날도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왼팔로 몸을 바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서 혼히 찾아볼 수 있는 식사법이다(요13:23).
18:5절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쾌활케(사아드) – ‘세아드'(원조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견고케 하다'(잠 20:28), ‘힘있게 하다'(시 104:15), ‘원기를 되찾다’는 뜻이다. 장거리 여행으로 인하여 쇠진한 기력을 힘있게 회복할수 있게끔 쉬라는 뜻이다.
18:6절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18:7절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떡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가’는 ‘레헴'(떡, 빵)보다 더 고급스런 빵으로 뜨거운 돌에 구운 일종의 ‘펜 케이크'(pan-cake)를 가리킨다.
18:8절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나무 아래 모셔 서매 – 나그네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고 ‘그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둥안 곁에 서서 시중든 것'(공동번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손님에 대하여 극진한 예우를 갖추는 행동이다.
그들이 먹으니라 – 유대 주석가 및 일부 카톨릭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그들이 단지 먹는 척하였뿐이지 실제로 먹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지지될 수 없는 해석이다. 물론 영적 존재가 육적인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과 수행 천사가 기꺼이 음식을 드신 까닭은 마므레의 환대 사건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사건었다는 점을 족장에게 확신시키고 동시에 아브라함과 보다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것(눅 24:41-43)과 같은 이유이다.
18:9절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사라가 어디 있느냐 – 세 나그네가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보통 여행자들이 아님을 시사해 주는 질문이다. 즉 이들은 이미 족장의 아내인 사라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라에 대한 특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특별히 방문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18:10절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그가 가라사대 -TEV는 ‘그’를 ‘그들중 한 사람'(one of them)으로, RSV는 ‘주'(the lord)로, 공동 번역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밝히려 하시는 것이다.
기한(에트 하야). ‘시간'(에트)과 ‘생명'(하야)이 복합된 말로 직역하면 ‘생며의 시간’이다. 이는 ‘소생할 때’, ‘해가 바뀔 때’란 의미로 만사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네게로 돌아오리니 – 하나님에게 있어 ‘임하다’ ‘돌아오다’ 등의 표현 (출 3:18;민 10:36;시 50:3;90:13;슥 14;5)은 그분이 어떤 사건에 직접 개입하셔서 사역하시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지금은 약속만을 가지고 너를 방문했지만 다음에는 약속의 실현을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다’란 뜻이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이로 보아 아브라함 가족들의 거처인 장막은 나그네들이 앉아 쉰 나무 가까이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대 유목민들의 장막은 대개 칸막이가 처져 있어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바깥 부분은 주로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사랑방으로 남자들이 사용하였고, 안쪽은 생활 필수품과 취사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여자들이 내실로 사용되었다. 사라가 하나님의 말을 들은 곳도 바로 내실이었을 것이다.
18:11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8:12절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늙었고 – 문자적 의미는 ‘생명의 날들이 지나갔다’인데 이는 생식 능력의 때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단어이다.
속으로 웃고 –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적 상황이 근거해 자신의 수태 가능성을 불신한 자궤적(自潰的) 웃음이다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 ‘내가 어찌 부부간의 즐거움을 가지리요’라는 뜻으로 자신의 수태 불능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8:1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사라가 왜 웃으며 – 낯선 여행자로서 족장 아내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9절) 그녀의 심중의 생각까지 감찰하고 있는 점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입증해 준다(요 21:17;히 4:13).
어떻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움남’은 ‘참으로’, ‘진실로’, ‘확실히’란 뜻이다. 따라서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인 줄로 철저히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14절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능치 못할 일 – 문자적으로는 ‘너무 어려워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일’.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는 있을 수 없음을 역설하시면서(렘 32:27;마 19:26;눅 1:37) 사라의 불신을 불식시키는 약속을 거듭 주고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재삼 죄인에 대한 그분의 인내와 사랑의 열정을 깨달을 수 있다.
18:15절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두려워서 – 자신의 속마음이 확연히 드러나 버린데 대한 두려움이자, 단순한 나그네로만 알았던 자의 권능에 대해 느끼는 놀라움이다.
승인치 아니하여 – 자신의 잘못이나 은밀한 생각 등이 폭로될 때 당혹감 내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짓말, 변명 따위를 늘어놓는 것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에 기초한 일반적 성향이다(3:12,13). 이러한 태도는 사라에게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는데 그녀는 말하고 있는 상대방의 정체가 하나님일 것이라는 순간적인 생각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불신이 드러난 데 따른 두려움에 못이겨 거짓말을 하고만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더 이상의 거짓말을 용납치 않는 하나님의 엄숙한 선언이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의 불신앙을 거짓말로 은폐해 보려 했던 사라의 경솔하고도 어리석은 죄악을 책망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이에 대하여사라가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것은 하나님의 책망에 온전히 굴복당하고 말았음을 나타내 준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빌다
18: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소돔으로 향하고 – 직역하면 ‘소돔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마치 심판주 하나님께서 왼편에 있는 저주받을 자들에게 얼굴을 향하듯(마 25:41) 심판을 위한 진노의 얼굴을 소돔 쪽으로 돌리는 장면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아브라함이 기거하고 있는 헤브론 지경에서 소돔까지는 약 30km정도의 거리로 멀리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점이다.
함께 나가니라 – 유대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일행들과 함께 헤브론 북동쪽에 있는 ‘카퍼바누케’까지 동행했다고 한다. 이곳은 아주 높은 언덕에 위치한 지역으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사해와 그 연변의 여러 성읍들을 한 눈에 관찰할 수있다.
18:17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멸하시려는 계획을 알려 주신 이유는 이어 나오는 18,1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1) 축복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택한 민족 이스라엘의 조상이될 뿐 아니라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아브라함(18절)에게는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는 것'(19절)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자식과 후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과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2)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심판이 없는 구속은 의미가 없으며, 구속이 없는 심판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요 5:29;롬 5:9) 하나님께서는 구속과 심판, 축복과 저주의 두 길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함으로써(요 3:18) 오고 오는 그 모든 후손들이 소돔의 멸망을 경고로 삼아 축복받는 구속의 길을 택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8:18절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천하 만민은…복을 받게 될 것 –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 태어날 그의 후손 메시야로 인해 지구상의 온 족속에게 미칠 구원의 축복을 가리킨다.
18:19절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는…이루려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하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여호와는 불변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언약한 바를 반드시 이행하시지만 여기에는 그 언약의 수혜자인 인간측의 마땅한 자세도 아울러 요구되는 것이다.
18:20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소돔과 고모라 –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더불어 사해(死海)남단 싯딤 골짜기에 있던 다섯 도시 중 두 도시이다(14:2,3). 이곳 사람들은 극도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 두 도시는 ‘죄악의 도시’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부르짖음 –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 곧 원성(怨聲)을 뜻한다. TEV는 이를 ‘고소'(complaint)1로 번역하였다. 억울한 피는 땅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하늘을 향해 호소한다는 고대인의 사상에서 나온 말로(4:10),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겁고 큰 것이었음을 상징한다.
18: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18: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내려가서 – 고지대인 헤브론에서 해안 평지 지역인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보고 알려 하노라 –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는 그분께서 타락상을 직접 보고서 확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주시겠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갈대아역(Chaldee)에는 ‘만일 회개하기만 한다면 내가 그들을 벌하기 않겠다’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뒤이어 아브라함이 중보 기도하였을 때 그들 중 열명만이라도 회개하였더라면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는 멸당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18:23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가까이 나아가(나가쉬)- 기본 뜻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접근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경배하다’, ‘함께 눕다’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따라서 이는 아브라함이 위치적으로 뿐 아니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영적으로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하겠다.
18:24절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의인 오십 – 당시 소돔 성의 인구가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소돔이 비옥한 평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점(13절)을 감안할 때 오십 명이라는 수는 전체 인구수에 비해 지극히 적은 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은 수를 내세워 소돔 성읍의 구원을 간구하였던 것은 의인 오십이라도 크게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18;25절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공의를 행하실 것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에만 매달려 무조건적인 사유(赦宥)를 간구하지 않고, 그분의 공의에 근거한 재판상의 공정성을 호소하였음을 보여 준다(Keil)이러한 아브라함의 신관(神觀)은 당시 근동의 샤마니즘적인 여타 종교의 저급한 신관에 비해 대단히 차원 높고 성숙한 것이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윤리성을결여한 여타 잡신들과는 달리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는 공의의 신이심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18:26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온 지경을 용서하라 – 하나님께서 대표의 대야의 원리에 입각해 인간을 구원하심을 보여 준다. 이러한 대표 원리는 한 사람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셀 수없이 많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신약 시대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는 비록 죄인이라도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기보다는 돌이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에 기인한 큰 은혜이다(겔 33:11).
18:27절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티끌과 같은 나 – ‘티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파르 와에페르’는 ‘먼지'(아파르)와 ‘재'(에페르)가 복합된 말이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정확히 파악한 진솔한 신앙 고백이다(롬 9:21-23).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찰할 줄 알았던 아브라함은 먼지에서 시작하여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마는 자신의 존재(3:19)에 대하여서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중보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에 근거한 기도 였음을 알 수있다.
18:28절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18:29절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18:30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18:31절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앞 부분(23-25절)이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한 호소였던데 반해 이 부분은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더욱 의지한 간절한 호소이다. 마치 황금 사슬이 하나하나 연결되듯 의인오십, 사십 오인, 사십, 삼십, 이십, 십 인으로 진행되는 이 간절하고 끈질긴 아브라함의 기도속에서 소돔 성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타는 사랑과 그의 간청을 끝까지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엿보인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면모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데, 특히 그의 중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예표로 간주하기에 충분하다.
18:32절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번만 더 –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신앙적 파렴치성’을 드러낸말이다. 그러나 마치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듯한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기도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기도와 간구 자세를 원하시는데(사1:18;마 7:7-11; 눅 11:5-13;18:1-8)그 까닭은 인간의 그러한 파렴치성에도 불구하고 봇물 같은 사랑을 부어 주시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8:33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즉시 가시니 – 하나님께서 이 땅을 떠나 하늘 거처로 올라가신 것 뿐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벗으시고 무형상적 실체로 돌아가신 것을 함께 의미한다.
호크마 주석, 창세기 18장
18:1
마므레 상수리 수풀 – 예루살렘 남방, 헤브론 근교에 위치한 곳으로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이 일찍부터 정착지로 삼아 지금까지 거주해 오고 있던 지역이다.
오정 즈음에( , 케흠 하욤) – ‘때'(욤)와 ‘열'(하맘)이 합쳐진 말로 직역하면 ‘더운 그 때에’, 곧 태양이 하늘 중앙에 치솟은 때를 가리키는데 이때 팔레스틴 거민들은 대개 식사와 함께 잠시휴식을 취한다(창 43:16;아 1:7).
18:2
사람 셋 – 13절과 19:1에 의거할 때 이 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둘은 천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가 이처럼 가시적(可視的)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형상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시므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뜻하는 바 계시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달려나가 – 생면 부지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진실된 사랑으로 영접한 행위이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로 굳어긴 아름다운 풍습이긴 하지만(출 22:21;욥 31:32;마 25:35;딤전 5:10)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자 그의 삶이 항상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몸을 땅에 굽혀 – 귀한 방문자에 대하여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다.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창 33: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할 때(창 48:12) 또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를 맞이할 때(왕하 2:15)에도 이러한 인사가 행하여졌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을 묻지도 않고 이러한 예우를 표한 것은 그의 인격이 평소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18:3
내 주여 –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에 대하여 단수인 ‘내 주여'(my lord))를 사용한 점은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이에 의거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중 한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즉시로 깨달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1) 이는 세 사람을 총칭하는 대표 단수이며(2) ‘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남편(12절)이나
상전(24:12) 또는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의미도 함께 지닌 단어란 점(3) 아브라함이 부지중(不知中)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는 점(히13:1) 등에 의거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수있다. 즉 아브라함은 이후 서서히 그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17,22절) 아직은 그들을 단순한 나그네로 알고 일반적 차원에서 존칭어를 사용한 것이다.
18:4
발을 씻으시고 – 아랍과 팔레스틴 지역은 대부분 모래와 먼지가 덮인 거친 사막길로 되어 있다. 따라서 샌들(Sandal) 같은 간단한 신발만 신고 먼지 길을 오래 걸은 여행자들에게는 발 씻을 물이 절실히 요구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가져다 주는것이 필수 관행이 되었는데 이는 손님 접대에 있어서 최상 최적의 예우였다.
나무 아래서 쉬소서 – ‘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안'( )은’ 기대다’. ‘눕다’, ‘의지하다’는 뜻으로 곧 나무 그늘에서 휴식하며 식사하기에 편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이다. 오늘날도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왼팔로 몸을 바치고 오른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식사법이다(요13:23).
18:5
쾌활케( , 사아드) – ‘세아드'(원조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견고케 하다’ (잠 20:28), ‘힘있게 하다'(시 104:15), ‘원기를 되찾다’는 뜻이다. 장거리 여행으로 인하여 쇠진한 기력을 힘있게 회복할수 있게끔 쉬라는 뜻이다.
18:6
떡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가'( )는 ‘레헴'( , 떡, 빵) 보다 더 고급스런 빵으로 뜨거운 돌에 구운 일종의 ‘펜 케이크'(pan-cake)를 가리킨다.
18:8
나무 아래 모셔 서매 – 나그네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고 ‘그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둥안 곁에 서서 시중든 것'(공동번역)을 의미한다. 이것은 손님에 대하여 극진한 예우를 갖추는 행동이다.
그들이 먹으니라 – 유대 주석가 및 일부 카톨릭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해석하기를 그들이 단지 먹는 척하였뿐이지 실제로 먹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Josephus,Philo,Jonathan) 그러나 이것은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지지될 수 없는 해석이다. 물론 영적 존재가 육적인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과 수행 천사가 기꺼이 음식을 드신 까닭은 마므레의 환대 사건이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사건었다는 점을 족장에게 확신시키고 동시에 아브라함과 보다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Keil,Delitzsch,Lange).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것(눅 24:41-43)과 같은 이유이다.
18:9
사라가 어디 있느냐 – 세 나그네가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보통 여행자들이 아님을 시사해 주는 질문이다. 즉 이들은 이미 족장의 아내인 사라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라에 대한 특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특별히 방문한 자들이었던 것이다.
18:10
그가 가라사대 – TEV는 ‘그’를 ‘그들중 한 사람'(one of them)으로, RSV는 ‘주'(the lord)로, 공동 번역은 ‘하나님’으로 각각 번역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밝히려 하시는 것이다.
기한( ,에트 하야). ‘시간'(에트)과 ‘생명'(하야)이 복합된 말로 직역하면 ‘생며의 시간’이다. 이는 ‘소생할 때’, ‘해가 바뀔 때’란 의미로 만사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네게로 돌아오리니 – 하나님에게 있어 ‘임하다’ ‘돌아오다’ 등의 표현(출 3:18;민 10:36;시 50:3;90:13;슥 14;5)은 그분이 어떤 사건에 직접 개입하셔서 사역하시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지금은 약속만을 가지고 너를 방문했지만 다음에는 약속의 실현을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다’란 뜻이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 이로 보아 아브라함 가족들의 거처인 장막은 나그네들이 앉아 쉰 나무 가까이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대 유목민들의 장막은 대개 칸막이가 처져 있어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바깥 부분은 주로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사랑방으로 남자들이 사용하였고, 안쪽은
생활 필수품과 취사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여자들이 내실로 사용 되었다. 사라가 하나님의 말을 들은 곳도 바로 아내실이었을 것이다.
18:11,12
늙었고 – 문자적 의미는 ‘생명의 날들이 지나갔다’인데 이는 생식 능력의 때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단어이다.
속으로 웃고 –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적 상황이 근거해 자신의 수태 가능성을 불신한 자궤적(自潰的) 웃음이다(Calvin,Keil).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 ‘내가 어찌 부부간의 즐거움을 가지리요'(Modern Language Bible)라는 뜻으로 자신의 수태 불능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8:13
사라가 왜 웃으며 – 낯선 여행자로서 족장 아내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9절) 그녀의 심중의 생각까지 감찰하고 있는 점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입증해 준다(요 21:17;히 4:13).
어떻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움남'( )은 ‘참으로’, ‘진실로’, ‘확실히’란 뜻이다. 따라서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인 줄로 철저히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14
능치 못할 일 – 문자적으로는 ‘너무 어려워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일’. 이러한 일이 자신에게는 있을 수 없음을 역설하시면서(렘 32:27;마 19:26;눅 1:37) 사라의 불신을 불식시키는 약속을 거듭 주고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재삼 죄인에 대한 그분의 인내와 사랑의 열정을 깨달을 수 있다.
18:15
두려워서 – 자신의 속마음이 확연히 드러나 버린데 대한 두려움이자, 단순한 나그네로만 알았던 자의 권능에 대해 느끼는 놀라움이다.
승인치 아니하여 – 자신의 잘못이나 은밀한 생각 등이 폭로될 때 당혹감 내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짓말, 변명 따위를 늘어놓는 것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에 기초한 일반적 성향이다(3:12,13). 이러한 태도는 사라에게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는데 그녀는 말하고 있는 상대방의 정체가 하나님 일 것이라는 순간적인 생각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불신이 드러난 데 따른 두려움에 못이겨 거짓말을 하고만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 더 이상의 거짓말을 용납치 않는 하나님의 엄숙한 선언이다.이 말 속에는 자신의 불신앙을 거짓말로 은폐해 보려 했던 사라의 경솔하고도 어리석은 죄악을 책망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편 이에 대하여사라가 더 이상 변명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킨것은 하나님의 책망에 온전히 굴복당하고 말았음을 나타내 준다.
18:16
소돔으로 향하고 – 직역하면 ‘소돔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마치 심판주 하나님께서 왼편에 있는 저주받을 자들에게 얼굴을 향하듯(마 25:41) 심판을 위한 진노의 얼굴을 소돔 쪽으로 돌리는 장면을 연상시켜 준다. 한편 아브라함이 기거하고 있는 헤브론 지경에서 소돔까지는 약 30km정도의 거리로 멀리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점이다.
함께 나가니라 – 유대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일행들과 함께 헤브론 북동쪽에 있는 ‘카퍼바누케'(Capherbanuche)까지 동행했다고 한다. 이곳은 아주 높은 언덕에 위치한 지역으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사해와 그 연변의 여러 성읍들을 한 눈에 관찰할 수있다.
18:17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멸하시려는 계획을 알려 주신 이유는 이어 나오는 18,19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1) 축복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택한 민족 이스라엘의 조상이될 뿐 아니라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될 아브라함(18절)에게는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는 것'(19절)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을 자식과 후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과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2) 구속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즉 심판이 없는 구속은 의미가 없으며, 구속이 없는 심판 또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요 5:29;롬 5:9) 하나님께서는 구속과 심판, 축복과 저주의 두 길을 아브라함에게 제시함으로써(요 3:18) 오고 오는 그 모든 후손들이 소돔의 멸망을 경고로 삼아 축복받는 구속의 길을 택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8:18
천하 만민은…복을 받게 될 것 –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 태어날 그의 후손 메시야로 인해 지구상의 온 족속에게 미칠 구원의 축복을 가리킨다.
18:19
이는…이루려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하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12:2,3;15:18-21;17:1-8)에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여호와는 불변의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언약한 바를 반드시 이행하시지만 여기에는 그 언약의 수혜자인 인간측의 마땅한 자세도 아울러 요구되는 것이다.
18:20
소돔과 고모라 – 아드마, 스보임, 소알과 더불어 사해(死海)남단 싯딤 골짜기에 있던 다섯 도시 중 두 도시이다(14:2,3). 이곳 사람들은 극도로 타락 하였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 두 도시는 ‘죄악의 도시’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부르짖음 –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한 부르짖음 곧 원성(怨聲)을 뜻한다. TEV는 이를 ‘고소'(complaint)1로 번역하였다. 억울한 피는 땅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하늘을 향해 호소한다는 고대인의 사상에서 나온 말로(4:10),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겁고 큰 것이었음을 상징한다.
18:21
내려가서 – 고지대인 헤브론에서 해안 평지 지역인 소돔과 고모라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적확히 표현한 말이다.
보고 알려 하노라 –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는 그분께서 타락상을 직접 보고서 확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주시겠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갈대아역(Chaldee)에는 ‘만일 회개하기만 한다면 내가 그들을 벌하기
않겠다’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뒤이어 아브라함이 중보 기도하였을 때 그들 중 열명만이라도 회개하였더라면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는 멸당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18:23
가까이 나아가( , 나가쉬) – 기본 뜻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접근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경배하다’, ‘함께 눕다’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따라서 이는 아브라함이 위치적으로 뿐 아니라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영적으로도 하나님께가까이 나아간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하겠다.
18:24
의인 오십 – 당시 소돔 성의 인구가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소돔이 비옥한 평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점(13절)을 감안할 때 오십명이라는 수는 전체 인구수에 비해 지극히 적은 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은 수를 내세워 소돔 성읍의 구원을 간구하였던 것은 의인 오십이라도 크게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18:25
공의를 행하실 것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에만 매달려 무조건적인 사유(赦宥)를 간구하지 않고, 그분의 공의에 근거한 재판상의 공정성을 호소하였음을 보여 준다(Keil)이러한 아브라함의 신관(神觀)은 당시 근동의 샤마니 즘적인 여타 종교의 저급한 신관에 비해 대단히 차원 높고 성숙한 것이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윤리성을결여한 여타 잡신들과는 달리 선과 악,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시는 공의의 신이심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18:26
온 지경을 용서하라 – 하나님께서 대표의 대야의 원리에 입각해 인간을 구원하심을 보여 준다. 이러한 대표 원리는 한 사람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셀 수없이 많은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신약 시대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롬 5:18,19). 이는 비록 죄인이라도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기보다는 돌이켜 살기를원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에 기인한 큰 은혜이다(겔 33:11).
18:27
티끌과 같은 나 – ‘티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파르 와에페르'( )는 ‘먼지'(아파르)와 ‘재'(에페르)가 복합된 말이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정확히 파악한 진솔한 신앙 고백이다(롬 9:21-23).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통찰할 줄 알았던 아브라
함은 먼지에서 시작하여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마는 자신의 존재(3:19)에 대하여서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중보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에 근거한 기도 였음을 알 수있다.
18:28-32
앞 부분(23-25절)이 하나님의 공의에 의지한 호소였던데 반해 이 부분은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더욱 의지한 간절한 호소이다. 마치 황금 사슬이 하나 하나 연결되듯 의인 오십, 사십 오인, 사십, 삼십, 이십, 십 인으로 진행되는 이 간절하고 끈질긴 아브라함의 기도속에서 소돔 성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
타는 사랑과 그의 간청을 끝까지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엿보인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면모를 충분히 엿볼수 있는데, 특히 그의 중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예표로 간주하기에 충분하다.
18:32
이번만 더 –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신앙적 파렴치성'(F.Delitzsch)을 드러낸말이다. 그러나 마치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듯한 이 말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기도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기도와 간구 자세를 원하시는데(사1:18;마 7:7-11; 눅 11:5-13;18:1-8) 그 까닭은 인간의 그러한 파렴치성에도 불구하고 봇물 같은 사랑을 부어 주시기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18:33
즉시 가시니 – 하나님께서 이 땅을 떠나 하늘 거처로 올라가신 것뿐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벗으시고 무형상적 실체로 돌아가신 것을 함께 의미한다.
본장에는 하례 계약을 체결한 후(17장),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확증하는 표시로 하나님이 친히 두 천사를 거느리고 그의 집을 방문하신 사건이 기록 돠었다. 이 방문을 통해 하나님은 대조적인 두 사건을 예언 하셨 는데 즉 이삭 출생을 재확인 하는 생명에의 소식과 소돔 성 멸망 이라는 죽음에의 소식 이었다. 이는 의인 에게는 영생을, 악인에게는 멸망이라는 하나님 통치의 2중성을 극명(克明)히 보여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예수의 재림시 있게 될 상급과 심판을 예시한 것이기도 하다(살후 1:8,9;딤후 4:8;계1:7)
.
한편 본장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두 천사를 대동하고 아브라함 가정을 내방 하셨고(1-8절)그때에 사라의 임신에 대한 확증적 계시(9-15절)와 타락한 성읍 소돔의 멸망에 관한 계시(16-21절)를 언급 하셨다. 이에 대해 소돔 성 구원 을 위한 아브라함의 끈질긴 중보 기도가 기록 되었다(22-33절).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언약 체결자인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해 주실 마큼 친근히 하셨음과, 아브라함 역시 자신의 문제보다 이웃의 생명에 더욱 관심을 보일 만큼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세 방문객을 환대하다(18:1-21)
폐쇄적인 신앙관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중히 여기고 대(對) 사회적인 의무를 등한히 할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과의 수직적 관계 뿐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도 중히 여기시며 당신을 경배하는 일이 이웃에 대한 봉사와 희생을 동반해야 함을 가르치신다(마 25:40; 롬 12장).
특별히 본문에서 이웃에 대한 평범한 봉사를 통해 부지중 하나님과 천사를 영접하게 된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제시하심으로(히 13:2), 이웃 사랑 의 중요성을 또 한번 역설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시고 그의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 두 가지 사실을 계시하셨다. 그 하나는 이삭의 출생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은혜스러운 계시였으며(8-15절), 또 하나는 극도의 타락으로 인해 멸망받게 될 소돔에 관한 공의로운 계시였다(16-21 절).
한편 은혜와 공의라는 상반되는 이중 계시를 제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출현하신 하나님은 미구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좋은 비교가 된다. 왜냐하 면 예수의 재림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기쁨과 은혜의 방문이지만, 불신자들에게는 환난과 공의의 내방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이웃에게 헌신적 노력과 사랑을 아끼지 않을때 부지중에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마 25:35-40).
* 하나님의 현현(顯現).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의 목소리를 들으셨으며, 그의 친절한 대접과 후한 봉사를 받아들이셨다. 그런데 문제는 영이신 하나님께서(요 4:24) 인간의 형상 을 취하고 나타나셔서 말하고 듣고 먹는 육체적 기능을 어떻게 수행하실수 있느냐는 것이다.
타락 이전 에덴에서 하나님은 인간 앞에 스스럼없이 나타나셔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으나 인간이 범죄한 이후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구속사에 필요한 특별 계시를 전달하실때 만큼은 여러 형태로 인간 앞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것을 신의 현현(Theophany)이라 한다. 이 현현은 대개 지진, 뇌우, 폭풍같은 자연현상을 통해서나(15:17; 출3:2; 욥38:1; 시78:14), 그룹들
사이에서(시 80:1;99:1), 아니면 천사를 통해서 실현된다(단 8:13; 슥 1:17).
특히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살아계심과 당신의 백성을 돌보고 계심을 알리신다(26:2;32:24). 이 인간의 모습을 하신 하나님은 구약에서 삼위 중 제2위인 ‘여호와의 사자'(16:13; 출23:20-23) 로 등장하며, 신약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으로 현현의 최고조를 이룬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로 인해 희미해진 영성을 가진 인간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시고 교제하시며 당신의 뜻을 전달하시는 은총을 베푸셨다. 만약 하나님께 서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으셨다면 인류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은총을 감사하며 지금도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 고(고전 3:16;6:19),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확연히 드러나실 하나님의 실존을 기대해야 한다(계 21:2,3).
* 하나님을 보위한 천사. 성경은 천사가 실재하며 지금도 활동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즉 성경 66권 중 34권에 천사의 존재가 언급되었고, 약 275회 정도 천사란 단어가등장하며,예수께서 이에 대해 친히 가르치시기까지 하셨다(마 18:10;26:53). 여기서 천사의 속성을 살펴보면 지(전 1:12) . 정(눅 2:13) .
의(유 1:6)를 지닌 인격적 존재이다. 우수한 영적 존재이다(히 1:14). 육체가 없으므로(마 22:30)보 수 없고(골 1:16)결혼이나 종족 번식을 할 수 없다(막 12:25). 그러나 본문과 같이 특별한 경우에 육체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남성으로 취급된다(1, 2절). 영이므로 죽음이 없다(눅 20:36). 선한 존재도 있는 반면(막 8:38; 눅 9:26; 계 14:10), 타락한 존재도 있다(요 8:44; 벧후 2:4).
한편 천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로 구성되며(히 12:22),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보다 특별한 조직을 형성한다. 천사들을 문류하면 다음과 같다.
그룹-하나님의 거룩을 수호하며 그분의 능력과 영광을 선포한다(3:24; 출 25:18; 삼하 22:11). 스랍-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둘러서서 찬양하며, 봉사하고 인간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힘쓴다(사 6:2,3,6). 정세, 권세, 능력, 주관 하는자, 보좌-천사들 중 등급과 위엄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는 계급적 명칭이다(엡 1:21;3:10;골 1:16;2:10;벧전3:22).이러한 각양의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사역이 매우 다양함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성경에 그 이름이 나타난 천사로는 두명이 있다. 가브리엘-계시 전달자 이자 해석자 역할(단 8:16;눅 119,26). 미가엘-천사장, 군장 으로서 악한 영게와 대항 해 싸우는 역할(단 10:13; 유 1:9;계 12:7). 천사들의 주 임무는 위의 분류에서처럼 하나님께 봉사하며 찬양하는 일이다.그 외에도 성도를 위해 봉사하고(히 1:14), 회개를 기뻐하며(눅 15:10), 기도 응답에 관여하고(행 12:15), 연약한 자를 보호하며(마 18:10), 위험시 용기를 제공하며(행 27:23,24), 하나님의 계시와 축복을 성도에게 전달하며(시 19:11;슥 1:12-14,행 5:19), 심판과 징게의 일에 관여한다(19:13;행 12:33;계 8,9,14장).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천사들이 모두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악한 천사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욥 38:6,7;골 1:16)타락하여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데(살후 2:4;유 1:6)그 무리의 우두머리가 사단이다(마 25:41).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천사가 기능과 본질을 이해하여 추호라도 영적 존재인 천사를 부인하거나 또는 반대로 섬기거나 혹은 악한 천사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것이다.
2.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18:22-33)
본문은 소돔 성 멸망 예고를 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 성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매달리는 장면이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물질적 배려, 정신적 위안, 몸을 바치는 자기 희생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 모두가 중요하며 정황에 따라 그 하나하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신앙인에게는 이것 외에 이웃의 영혼과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또 하나의 결 정적인 방법이 있다.이것은 모든 사건과 역사를 지배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만이 택할수 있는 최초의 방법이자 최후의 방법이다.
소돔 성 심판을 예고받았던 아브라함은 타락한 인간들의 멸망을 기뻐하기 보다 그들에 대한 깊은 동정을 품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요하리 만큼 끈질기게 인간애가 넘치는 기도를 하게된다. 이처럼 그가 간절한 기도를 할수있었던 것은, 첫째, 하나님의 긍휼을 믿었기 때문이다. 소돔은 오늘날까지 죄악의 도성을 일컫는 대명사로 여겨질 정도로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며(합 3:2), 당신을 찾는 자를 외면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기에 강력히 매달릴수 있었다. 사실 하나님께서 공의에 따라 인간을 냉혹히 심판 하신다면 인간은 아무도 존재할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휼은 심판을 능히 극복할 수 있게 한다(약 2:13).
둘째, 이기적인 욕망을 제어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혈육 롯 가족만을 위하지 않고 성중의 모든 생명을 위해 기도했다. 이처럼 사람은 이타(利他)적일 때 더 높고 깊은 이상과 정열을 지닐수 있다.
세째, 하나의 영혼도 놓칠 수 없다는 넘쳐나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에 근거한 행동에는 엄청난 추진력과 용기가 뒤따른다. 이 사랑의 모범을 보 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요 10:15).
한편 아브라함의 성숙하고 집념에 찬 기도에도 불구하고 소돔은 끝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러한 비극응 통해 인간의 죄악이 가져다 주는 파괴적 성향을 배울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교훈은 의인의 숫자가 심판의 가부(可否)를 좌우하는 열쇠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한 나라의 행. 불행을 결정짖는 역사의 주체 세력이라 할수 있다.
끝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를 결코 외면치 않으셨다는 사시를 놓쳐서는 안된다. 비록 소돔이 불 심판으로 멸망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기억하사(19:29), 롯과 두 딸을 구원하심으로(19:30) 그의 기도에 적절히 응답 하셨다. 이처럼 이웃을 위한 의인의 간구는 그 역사 하는 힘이 크다(약 5:16).
*중보 기도의 한계. 중보 기도는 하나님께서 모든 신앙에게 요구하시는 지상 명령으로 성도는 이러한 중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이웃과 더욱 긴밀한 관계르르 이룰수 있다.
이 기도는 병을 고치며(약 5:14-16), 심판을 돌이키며(민 14:11-21), 대적으로부터의 구원(삼상7:5-9), 이웃에 대한 용서(욥 42:8-10)와 이웃의 회개를 촉구하는(룸10:1-4)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더욱이 이 기도는 그 대상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며 더 나은 축복과 은혜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신앙인 에게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 중보 기도는 그 대상의 신앙 상태와는 무관하게 추복과 은혜를 전달하는 만는 도구가 될수 없다. 즉 구원과 축복의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과 개인의 단독적인 만남에서 실현 되는 것이지, 남의 중보 기도에 의해 하나님의 축복이 비신앙인에게 무조건 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중보 기도가 최대의 효과를 얻을수 있는 방법은 그 기도와 기도 대상자의 신앙이 아름답게 조화 되는 것이다.
이처럼 중보 기도는 구원과 축복응 이끌어 내는 자동 판매기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기억에 남을만한 행위로서 형재를 가장 사랑하는 한 방법이다. 따라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중보 기도의 아름다운 덕이 활발히 전개되야 할것이다(딤 전 2:1;약 5:16).
세일하머
6. 세 명의 방문객(18:1-33)
a.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 (18:18)
18장은 몇 몇 요점에서 신학적인 고찰에 대한 명백한 표시를 보여주는 확대되고 발전된 서술이다. 이 장에서 중점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들 (이삭의 출생에 관한 예고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서의 의인의 운명에 대한 문제)은 이 장 뿐만 아니라 17장(이삭의 출생에 관한 예고)과 19장(하나닙의 심판 가운데서의 의인의 운명) 속에서도 역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18장에서의 이들 두 주제에 대한 저자의 취급은 단순히 그 사건들을 알려주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것들을 신학 속에서의 한 교혹으로 발전
시키고자 하는 저자의 관심을 보여준다. 서술은 17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는 저자의 기사와 함께 시작된다. 서술의 첫 부분에서의 이러한 언급의 중요성은 간과되어서는 안되는데 그 효과는 서술의 가장 난해한 성질들 중에서 하나를 명확히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곧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의 임무는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언급으로 서술을 시작함으로써 저자는 어느 면에 있어서(비록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한 여호와의 출현을 대표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이러한 방법으로 서술을 시작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러한 시작은 몇 개의 새로운 문제점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심’에 대한 언급으로 서술을 시작하는 것은 18장의 나머지 부분을 통하여 하나의 안내 역할을 하는 중요한 문맥을 제공해준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이야기의 부분들을 어떻게 정리하건간에 이 장의 사건들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대한 언급은 이 사건들 가운데서의 아브라함의 소재를 재설정해준다. 마지막으로 언급되었을 때에 그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로 그의 장막을 옮겼다(13 18). 저자는 우리가 아브라함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정착한 이후로 이주하지 않았음을 알기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8장의 첫 부분에서 저자는 독자에게 아브라함의 소재에 대하여 새롭게 상기시킨다. 아마도 그 목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땀에 거주하게 되고 롯이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13:12) 이르게 된 13장의 마지막 부분의 장면을 재설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때 독자는 이미 소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하여 알게 된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13:13).
1절에서 히브리 본문은 NIV에서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라는 말이 없고 ‘그에 게’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선행사는 ‘아브라함’이다(17:26 참고). 18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언급은 6절까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18장의 첫 부분은 17장의 마지막 부분과 아브라함과 그의 집의 할례에 대한 설명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18장 전체가 아브라합에 대한 하나님의 출현에 대한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마지막 절에서 보여자는데(33절) 이 절은 여호와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즉시 가시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도 ‘여호와/하나님께서 나타나시니라’는 묘사의 결론은 여호와의 떠나심에 대한 간단한 언급으로 표시된다(17:1b와 22a, 35:9와 35:13 참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18장 전체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에 대한 설명 속에 잘 부합되고 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b. 세 사람의 도착(18:1b-8)
세 사람이 아브라함의 장막에 도착한 것에 대한 서술은 본문 속에서 몇 몇 불확실성에 의해서 복잡성을 띤다. 첫째로, 세 사람과 여호와의 출현(17:1a)과의 관계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 둘째로, 3절과 4-9절 사이의 동사형에 있어서 뚜렷한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3절에서의 동사와 대명사는 모두 남성단수형 인데 반하여 4-9절에서의 형태는 남성복수형이다(예를 들면 4절).
마지막으로 18장에서 제기된 불확실성과 그에 대응해서 19장에서 명백하게 제기된 것들 사이의 관계의 성격에 대한 의문이 있다. 예를 들면 ‘두 천사들'(혹은 사자들 19: 1)과 여호와 사이의 관계는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예를 들면 두 ‘사람들'[19:12]은 롯에게 그들이 소돔을 멸하리라고
말하지만[13절] 본문은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 게로서 유활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24 절]라고 언급하고 있다). 롯의 인사에 있어서의 모든 동사와 대명사는 남성복수형인데(예를 들면 19:2) 이것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계속되다가 18장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불규칙성이 다시 나타난다(예를 들면 19:17 ‘그 사람들이[남성복수형]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남성단수형]’ 혹은 19:18 ‘롯이 그들에게[남성복수형] 이르되 … [당신의] 종이(‘당신의’가
남성복수형)….)’. 또한 18:3과는 달리 19:2에서의 ‘내 주여'(my lords, NlV)의 맛소라 모음은 그것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대한 것임을 반영한다. 반면에 동일한 대상이 19:18에서 언급되었을 때에 ‘내 주여’의 맛소라 형태는 또 다시 오직 하나님께 대해서만 사용되는 형태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 장들의 본문이 매우 불규칙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현재의 서술 뒤에는 하나 이상의 사본이 놓여있을 것으로 추측하도록 만든다. 예를 들면 Hermann Gunkel은 “단수형과 복수형의 상호 교환은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원리를 따른 것이 아니고 완전히 그 동기를 알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평가에 반대하여 만일 우리가 모든 부분과 명백한 불규칙성의 중요성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서 그것을 읽는다면 현재의 본문은 하나의 일관된 해석을 제시해준다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어지는 주석이 시도하고 있는 설명과 같이 서술을 통하여 본문 속의 명확한 불규칙성은 여러 이야기가 함께 흔합된 결과가 아니라 저자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두 개의 중심적인 신학적 입장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균형을 유지하려는
시도의 결과로 보여진다. 서술 속의 그러한 불규칙성은 하나님의 초월성 곧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에 대한 신학적인 연관성을 동시에 강조하려는 시도의 결과로서 해석할 때에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서술에 있어서의 최종적인 불규칙성은 다양한 기원이나(현재의 모양에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많은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일관성에 대한 부주의한 무관심으로 추적해 올라가서는 안되며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의 중요한 신학적 문제 곧 하나님에 대한 두 개의 동일하게 중요한 관점을 동등하게 화함시키려는 필요성에 충실하려는 저자의 노력으로 추적 해 올라가야 한다.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방문한 것에 대한 설명과(18:1-3) ‘두 천사들/사람들’이 롯을 방문한 것에 대한 설명(19:1-2) 사이의 밀접한 유사성은 이 서술들이 그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단서를 위하여 더
연구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첫째로, 18장의 장면은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18:1) 앉아있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과 같이 19장의 첫 부분에서 롯은 ‘소돔 성문에’ (19:1) 앉아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에 그는 곧 달려나가 그들을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히고’ “내 주여 만일 내가”라고 말한 것과 같이 19장의 롯에 대한 설명에서 그가 두 천사들/사람들을 ‘보았을’ 때에 그는 일어나 그들을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며’ “내 주여”라고 말하였다. 이 두 설명 사이의 뚜렷한 유사성의 효과는 그들 사이의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 곧 방문객들이 영접을 받는 방법을 강조해 준다. 3절에서 아브라함은 방문객들을 ‘주여'(Lord)라고 부르면서 세 사람 모두에 대하여 단수형을 사용하였다(위의 내용을 보라). 반면에 롯은 방문객들을 ‘주여'(lords)라고 부름으로써 두 천사들/사람들에 대하여 복수형을 사용하였다. 독자는 이러한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가장 명확한 설명은 저자는 우리로 하여금 이제 막 언약 속으로 들어온(17장) 아브라함이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 나셨을 때에 그분을 알아본 반면에 소돔에 살고있는 롯은 여호와를 알아보지 못하였음을 깨닫기 원한다는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의 생애는 계속해서 대조를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았지만 롯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18:l에서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는 말씀이 독자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여호와’로서 영접 했음을 깨닫도록 준비 시키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롯이 두 사람을 단순히 ‘내 주여’로 영접한 경우에 있어서 독자는 역시 롯의 반응을 판단할 위치에 서게 된다.
18:21에서 독자는 여호와께서 소돔으로 가셨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두 천사들/사람들이 도달하였을 때에 가장 적절한 설명은 그들이 여호와의 방문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서술 속의 나중 부분에서 확증된다. 서술이 진행되면서 롯은 그의 방문자들이 여호와의 사자들임을 깨닫게 되는 시점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는 이들 두 천사들/사람들(19:18)을 마지막으로 불렀을 때에 그는/그들을'(복수형에 주목하라 19: 18) ‘내 주여'(Lord)라고 불렀다. 그는 아브라함과 같이 그들에 대하여 단수형을
사용하였다. 롯이 두 천사들/사람들의 신분을 깨달은 것과 일치하여 19:19에서 롯은 아브라함이(18:3에서) 자신의 세 방문객들에게 간구한 것과 같은 말로써 그들에게 간구하였다(19:19a에서의 롯의 말-‘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과 18:3에서의 아브라함의 말-‘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도 역시 비교하라).
18:3(단수형이 사용됨뢴)과 18:4 이후(복수형이 사용됨)에서 단수형과 복수형의 동사와 대명사 사이의 상호 교환은 저자가 서술 속에서의 핵심적인 사항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시도하고 있는 방법중의 하나로 보인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에게 자신을 친밀하고도 구체적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 이시다. 그분은 ‘말씀’과(1:3) ‘이상'(15:1) 혹은 자신을 대신하여 말하는 ‘천사'(16:7)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실 수 있다. 그분은 또한 12:7, 17:1, 그리고 18:l에서와 같이 개인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과 이상과 천사들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서술들은 신명기 4: 15(‘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의 구절에서와 같이 어떤 육체적인
형태의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강력한 금지에 친숙해 있는 모세오경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어려움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나타나시니라'(12:7, 17:1, 18:1)고 명학하게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은 자연히 어려운 의문을 야기시킨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는’ 동시에 그 모양이 보이지 않을 수 있는가(‘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신 4:15)?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시면서’ 또한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3)고 말씀하실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들이 18장의 서술의 뚜렷한 불규칙성 뒤에 놓여있는 것이다.
단수와 복수의 동사형을 통하여 서술 속의 인물들을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구분함으로써 저자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과 세 사람의 방문이 동일한 사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형태로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는 단수형과 복수형의 배열을 통하여 비록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는 뚜렷이 구분되지만 세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며 또한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단수형과 복수형 사이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서술을 읽을 때에 그것은 저자의 놀라운 기술과 시간 감각을 보여주며 또한 그의 신학적인 체계를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첫째로 우리는 저자가 이 장면을 여호와의 방문(“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18:1)과 동일시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보자 영접하면서 3절 전체를 통하여 단수형을 사용하여 그들을 주님(Lord)으로 불렀다. 일단 이것이 여호와의 방문이라는 사실이 설정되자 아브라함은 이 세 사람을 복수형으로 부르고 있으며 저자 자신도 4-9절의 세 사람에 대한 묘사에서 복수형을 사용함으로써(“그들이 가로되” 18:5,9) 아브라함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다.
10절에서 저자는 말하는 자를 다시 언급하지 않고 또 다시 “그가 가라사대”라는 단수형을 사용하여 서술을 전개시킨다. 10절에서 말하는 자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저자는 “그들이 가로되”(18: 5 9)와 같은 복수형과 “그가 가라사대”(10절)와 같은 단수형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균열을
최소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균열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첫째로, 그들이 말한 후에 의명의 ‘그’가(나중에 여호와로 지칭됨) 말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술 전체 속에서 ‘그’가 그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하였고 또한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말하였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독자에게는 전후 문맥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통하여 공백을 채워넣어야 할 과업이 남게 되는데 그러한 설명은 세 사람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육체적인 ‘나타나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비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육체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는 않으셨지만 세 사람은 하나님을 대표하였다.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3:2-3에서의 떨기나무 불꽃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육체적인 표현이었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육체적인 임재는 아니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언약 백성 안에서의 하나님의 실재적인 임재는 하나님께서는 육체적인 형체를 가질 수 있다는 인상을 남기지 않고도 확인되었다.
‘그’의 신분은 13-14절에서 명백하게 회복된다. 여기에서 저자는 동사의 주어로서 ‘여호와’를 언급하는데 이것은 10절의 표현과 계속해서 연결되고 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 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절). 그러므로 10절의 ‘그’는 비록 그의 말과 세 사람의 말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서술 속의 이 시점에서 그렇게 언급되고 있지 는 않지만 다름 아닌 여호와이다.
세 사람과 여호와 사이의 이러한 상호 교환은 서술 전체를 통하여 계속된다. 16절에서 세 사람은 소돔을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그들과 동행한다. 그러나 12절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17-19절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20-21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나 여호와께서
말씀을 마칠 때에 그들은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으로 향하였고(22절)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함께 머물면서(22절) 33절에 이르기까지 떠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서술은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있건 혹은 없건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수 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세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음을 가르쳐 준다(2a절).
마찬가지로 19:l의 ‘두 천사들’은(나중에는 단순히 ‘그 사람들’로 불린다. 예를 들면 10절) 롯이 그들이 여호와의 사자들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서술의 처음 부분에서 복수형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롯이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그들을 보냈는지를 알게된 후로는 그들을 복수형과(‘그들’ 18a 그리고 복수형으로 쓰인 ‘내 주’ 18b) 단수형(예를 들면, ‘당신의 종’19절)으로 부른다. 더군다나 이 서술에서 저자는 롯의 이러한 용법을 따르고 있다(즉 “그가 그에게 이르되”: 맛소라 본문은 이미
17절에서 단수형을 사용하였다).
18절의 복수형 대명사는 16절의 복수형 동사와 함께 맛소라 본문의 단수형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서 본문비평의 법칙에 따라서 그것이 더 선호되도록 만든다. 칠십인역, 페쉬타역(8세기경의 시리아 번역본: 역자주) 그리고 벌게이트역의 복수형은 18a의 ‘그들에게’라는 복수 대명사와 함께 16절의 복수형에 비
추어 볼 때에 단수형의 어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한 번역자들의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번역본들이 그와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초기 히브리 본문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도 가능하다.
21절에서 저자는 또한 복수형에서 단수형으로의 변화에 의해서 야기되는 균열을 완화시키기(그러나 제거하시는 것은 아니다) 위하여 ‘그’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 18:13에서와 같이 19:24에서 ‘그’는 궁극적으로 ‘여호와’로 확인된다. 이러한 확인은 단수형으로의 변화로 인하여 이미 야기된 어려운
균열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서술 속에서 단수형으로부터의 변경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주어진다. 그러나 독자는 여호와께서(18:20)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1절)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에 19장의 ‘두 천사들/사람들’은 여호와라는 사실을 이미 통보받았다. 이 구절을 통하여 독자는 19장 첫 부분에서 ‘두 천사들/사람들’의 방문은 18:21에서 언급된 성에 대한 여호와의 방문을 대표한다는 분명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것은 롯 자신이 이끌어내는데 실패한 결론이다. 여호와를 인식함에 있어서의 롯의 실패를 이렇게 묘사함으로써 저자는 독자에게 여호와의 임재에 대한 롯의 인식 상태를 볼 수 있는 선견을 가져다 준다.
C. 아들에 대한 약속(18:9-15)
아들의 출생에 대한 선포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지만 서술의 초점은 명백하게 사라의 반응에 모여진다. 그녀의 웃음(18:12) 속에서 이삭이라는 아들의 이름이 예시된다. 그러나 사라의 웃음의 중요성은 이것을 넘어선다. 그녀의 웃음은 서술로부터의 중요한 신학적인 초점을 그려내는 동기가 되는데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행하실 일은 심지어는 그 자신의 백성이 상상하기에도 ‘지나치게 놀라운 일'(14절)이 었다는 점이다.
(1) 사라가 어디 있느냐? ( 18:9-10)
이 구절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서술에 대한 배경을 설정해준다. 세 사람은 사라에 대하여 문의했지만 그들은 오직 아브라함에게만 말하였다. 비록 저자는 독자에게 사라가 대화를 들을 때에 그녀의 생각과 동기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지만 사라는 서술의 대부분을 통하여 ‘초점 밖에’ 머물러 있다. 오직 15절에서 그녀는 드디어 직접 언급하지만 그 때에도 그녀에게는 대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2) 사라의 나이 (18:11)
사라의 반응에 대한 배경으로서 저자는 한 설명을 삽입시킨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를 갖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 나이의 모든 여인들과 같이 사라는 더 이상 아이를 잉태할 육체적인 능력이 없었다. 히브리 문장의 구조는 마지막 언급이(‘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첫번째 의미의 반복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설명 속에서 이 구절과 창세기 25:1-4 사이의 조화를 구하려는 시도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25:l-4에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 후에 다른 아내를 취하였고 그 아내는 그에게 아들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의 나이가 장애 요소이기는 했지만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의 중요한 장애는 사라의 노쇠함이었다. 아브라함의 나이의 중요성에 비하여 사라의 나이의 중요성은 12절에서 그녀 자신이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드러난다.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의 노쇠함과 아브라함의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마지막으로 서술 자체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노쇠함에 대한 언급은 없이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라는 사라의 생각을 반복하신다.
요점은 이 구절들이 약속을 실패의 벼랑으로까지 몰고가서 그 성취의 불가능성을 그 이전 수준보다 훨씬 넘어서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라가 단산하였거나(11:30, 16:1) 아브라함이 늙은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왜냐하면 그는 나중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도 없이 다시 자녀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25:1-4). 이러한 장애들은 약속이 성취될 때에 그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제시할만큼 충분히 큰 것들이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를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만든다 사라는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육체적인 연령을 훨씬 지났다.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사라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14절).
(3) 사라가 웃음 (18:12-15)
이 짧은 구절의 의미에 대한 열쇠는 여호와께서 사라의 웃음에 대하여 아브라함에게 한 질문 속에 놓여있다. 사라의 생각에 있어서의 미묘한 변화는 여호와께서 단순히 그넉의 생각을 다시 언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독자에게 구절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져다줄 수 있다. 먼저 여호와께서는 사라의 모호한 말(“내가 노쇠하였고…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을 ” 내가 늙었으니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라고 다시 언급하신다. 그리고나서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사라의 언급(“내 주인도 늙었으니.”18:12)을 다시 그녀 자신에 대한 언급(“내가 늙었거늘.” 13절)으로 바꾸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실제적인 말을 넘어서서 그 말의 의도까지 언급하신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 아브라함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을 통하여 서술의 저변에 깔린 문제점이 독자들 앞에 드러나는데 그것은 사라를 통하여 육체적으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일단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육체적인 가능성에 대한 장애가 확고히 세워지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대한 그의 약속을 반복하신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 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b절). 서술 속의 이 시점에서 오직 “장막 문 뒤에서 듣기만” 했던(10절) 사라는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15절)라는 완고한 대답과 함께 대화에 참여한다. 저자는 이러한 대답을 즉시 거짓으로 판정하면서 계속해서 그녀가 ‘두려워’하였다고 설명한다(15b절 : NlV는 여기에서 문장의 순서를 바꾸지만 그 의미는 동일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서술은 독자가 이 시점에서 확실하게 알게 되는 사실 곧 사라가 웃었다는 것에 대한 하나닙의 반복된 언급으로 결론을 맺는다(15b절).
이처럼 간단하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서술 속에서 독자는 아들에 대한 약속과 그것의 잠재적인 성취에 대하여 새로운 수준으로 이해하게 된다. 약속은 모든 육체적인 가능성을 넘어선다. 아무도 사라 자신보다 더 이것을 알 수 없다. 서술의 과정을 통하여 저자는 약속에 대하여 사라가 가장 밀접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기술적이고도 섬세하게 독자에게 보여준다.이러한 요점을 세운 후에 저자는 즉시 서술에 결론을 내리며 이야기의 새로운 장면으로 넘어 간다.
d. 세 사람의 출발(18:16)
세 사람이 일어나서 소돔을 바라보았을 때에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기 위하여 그들과 동행하였다. 이들은 이상하게도 바로 앞 서술의 대부분의 장면 속에서 등장하지 않았지만 저자는 17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 직전에 그들을 다시 등장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다시 한 번 여호와의 임재와 세 사람의 등장 사이의 연관성을 확립시킨다. 16절 중간에서 저자는 세 사람이 떠나기 위하여 일어날 때에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들의 동작에 독자의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매우 기술적으로
서술을 19장을 향하도록 만든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그들의 시선이 멸망당할 성읍으로 향할 때에 저자는 독자들의 시선도 역시 다음 장의 사건을 기대하면서 그 성읍으로 향하도록 만든다. 그때까지의 서술에서 그처럼 두드러진 역할을 했던 이삭의 출생에 대한 예고를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던 것은 이제 갑자기 사라지고 두 장 이후에 그것이 성취될 때까지 (21:1)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 서술은 세 사람이 소돔을 향할 때에 그들의 시선을 따라간다.
e. 여호와께서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고하심(18:17-19)
17절의 구문은 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다음에 이어지는 것에 대한 배경으로 읽혀지도록 의도했음을 보여준다. 이 구절들이 없다면 서술은 16절에서 직접 20절로 연결되어 읽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 사이에 삽입된 구절들은 여호와와 아브라함 사이의 대화에 대한 중요한 배경을 제공해준다. 그 이유는 창세기 전체를 통한 직접 대화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의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님의 행위의 내적인 동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나의 하려는 것”). 여호와의 말씀은 간단하지만 멀리까지 미치는 효과를 가진다. 18장은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12:2 참고)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12:3 참고)이라는 원래의 약속을 되돌아 본다.
19절은 17:1(‘너는 내 알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의 개념이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아브라함에 대한 서술 전체 속의 사건들에 대한 회고적인 관점을 가지지 않는다.
첫째로, 여호와께서는 서술에 있어서 중심 부분이지만 아직 문자로 표현되지 아니한 것 곧 아브라함의 선택에 대하여 설명하신다. “내가..그를 택하였나니”
둘째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신 자신의 목적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이 목적은 앞의 서술에서 드러난 것을 넘어선다.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의와 공도를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내면적인 것에 그 시선이 집중된다(‘여호와의 도를 지켜’). 오직 이렇게 될 때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 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게 된다(‘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발견되는 내면적인 순종의 개념은 예언서에서 발견되는 새 언약의 개념과 매우 밀접하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이것은 또한 신명기의 신학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 30:6).
f.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18:20.21)
비록 20절은 계속된 여호와의 말씀이지만 그 구문은 그것이 앞의 것과 다른 배경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17-19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셨거나 혹은 저자가 여호와께서 인접한 사건의 연속 속에서가 아닌 다른 경우에 말씀하셨던 것을 단순히 회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떠한 경우이건간에
아브라함은 이 구절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20-21절에서 아브라함은 가장 명확하게 언급되고 있다. 20-2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대한 여호와의 말씀은 17절에서 여호와에 의해서 제기된
질문(‘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에 대한 대답이다. 20-21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행하실 일-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을 펴보기 위하여 내려가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셨다.
g. 그들이 떠나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남음(18:22)
우리는 서술이 먼저 “내가 이제 내려가서… 보고 알려 하노라”는 여호와의 말씀 이후에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22절)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여호와와 그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밀접하게 연결됨으로써 한편의 행위가 다른 편의 행위와 동일시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서술의 본질적인 논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러한 동일한 논리가 다음 장에서 적용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사람들’이 여호와의 사자들로서 일상 생활 가운데서 여호와의 임재를
대표한다면 22절에서와 같이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로 내려갈 때에 21절에서와 같이 (‘내가 이제 내려가서’) 여호와 자신이 이 성읍들을 방문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서술 전체를 통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 사람들’은 여호와의 임재를 대표하고 있지만 사실상 여호와와 동일하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이 떠난 후에 (22a절) 여호와께서 남으신 사실은(22b절) 여호와께서 소돔에서 ‘그 사람들’과 함께 롯에게 나타나신 것과 같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19:12, 16 위의 설명을 보라)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가 이제 내려가서… 보고 알려 하노라”고 말씀하실 때에 독자는 18장에서와 같이 19장의 ‘그 사람들’이 롯에 대한 여호와의 임재를 대표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만일 이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떠났다면 왜 오직 ‘두 천사’ (19: 1)만이 소돔에 도착했는가? 롯을 방문한 두 천사는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사람들’ 중에서 두 사람이라는 사실이 명백해 진다. 이것은 특별히 19장에서 ‘천사들’이 단순히 ‘그 사람들’로 언급되고 있는 사실로 볼 때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소돔을 방문하지 아니한 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몇 가지 고찰을 불러 일으켰다. 가장 보편적의 설명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현현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께서 성육신 이전에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그 사람들이 리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18:22a)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함께 남았으며(18:22b) 오직 ‘두 천사들'(19:1)만이 소돔에 이르렀다고 말할 때에 그들중 한 사람은 아브라함과 함께 남아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남으셨음을 알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여호와임에 틀림 없다. 아브라함은 ‘두 천사들'(19:1)과 동행하신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비록 이러한 설명은 서술의 많은 특징과 일치하지만 그 첫번째 난점은 비록 롯은 그것에 실패했어도 저자는 이 ‘두 천사들’이 18장의 세 사람들파 같이 여호와의 임재를 대표하는 것(예를 들면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18)으로 보도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18장에서의 그 사람들이 ‘여호와’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중 한 사람이 실제로 여호와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들 세 사람 모두가 여호와의 임재를 대표함을 의미한다. 만일 19장의 두 사람이 단순히 여호와를 대표하는 자들이지만 ‘여호와’께서 언급될 수 있다면 18장에서의 세 사람들 역시 그렇다(예를 들면. 18:3). 그러므로 저자는 롯이 오직 두 천사들의 방문을 받은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 후에 계속해서 그들을 18장에서와 같이 단순히 ‘그 사람들'(19:12,16)로
부른다.
그러나 만일 세 사람 모두 아브라함을 떠나서 소돔으로 향하였다면 왜 롯은 18장에서의 세 사람이 아닌 오직 두 사람의 방문만을 받았을까? 세번째 사람은 소돔으로 가지 않았다면 어디로 간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18장에서 이미 주어 지고 있다. 소돔의 두 사람은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는 여호와의 의도의 성취를 대표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어떻게 여호와께서는 ‘고모라의 부르짖음’을 조사하셨는가? 여호와께서는 고모라에도 내려가서 그들의 행위도 역시 보시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서술은 오직 그곳에 롯이 살고 있기 때문에 소돔에 대한 그들의 방문 사건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19장의 결론 부분은 여호와께서 소돔 뿐만 아니라 고모라도 멸망시키신 것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19:24) 과연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고모라의 부르짖음’도 역시 조사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이 서술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18잠과 19장의 서술의 논리에 의하면 (여호와께 이른 ‘부르짖음’은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18:21)이었으며 여호와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함께 멸망시키셨다(19:24)). 저자는 세번째 사람이 고모라로 가서 그 성읍을 조사하셨음을 암시하려고 의도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롯을 방문한 사람의 숫자를 명백히 함으로써 저자는 19장의 서술이 모든 면에 있어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돔을 방문한 사람의 숫자를 명시함으로써 저자는 독자에게 과연 여호와께서 의롭고 공평하게 고모라를 다루셨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곧 세번째 사람이 고모라를 방문함으로써 ‘온 지경'(18:25)에 대한 심판이 공평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주제가 삽입된 서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h. 아브라함의 중재(18:23-33)
아브라함과 여호와 사이의 대화에 있어서의 중심적 이슈는 아브라함의 질문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18:25). 서술 전체를 통하여 반영되고 있는 여호와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질문이 분명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칠문을 던진다.
아브라함의 계속되는 질문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는 성음 속의 50인의 의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10명의 의인에 대한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 왜 그는 10명에서 끝마쳤는가? 왜 계속해서 9명, 혹은 8명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는가? 그는 오직 4명에 이르는 롯과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가? 19:29의 서술은 저자가 롯을 대화 속에서의 ‘의인’의 중심적 인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은 성읍 안의 이 네 사람의 의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질문을 계속하지 않았는가?
한가지 가능한 해결책은 10명을 단위로해서 50명에서 10명까지 이어지는 것은 자연적으로 10명에서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 질문은 “만일 소돔성 중에 의인이 아무도 없다면…?”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브라함의 관심사가 아닌데 그 이유는 그가 악인의 멸망에 대한 포괄적인 질문이 아니라 오직 불의한 자 가운데서의 의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일반적인 대답을 들었으며, 정확한 숫자를 알기 위하여 질문을 계속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므로 서술의 저자는 그 이슈가 더 일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하여 10명에 이르러서야 그의 질문을 중단하였다.
롯에 대한 아브라함의 관심에 있어서 서술은 악인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에 있어서 의인(단순히 롯 뿐만이 아니라)을 어떻게 다루시는가에 대한 보다 큰 이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서술(19장) 속에서 소돔 성은 롯 때문에 유지되고 있음을 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 성읍은 멸망되었고 롯은 그 성읍 바깥으로 인도되었는데 이것은 창세기 18장에서의 아브라함의 계속된 질문 속에서는 예상되지 못했던 장면이다. 그렇다면 18장의 결론 부분의 서술 속에서 아브라함의 질문에 있어서의 갑작스러운 결말은 19장의 서술 속의 사건에 부합시키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성읍 속의 10명의 의인에 대한 질문으로 끝마침으로써 서술은 만일 10명 미만의 의인이 성읍 안에서 발견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에 대해서는 그 문을 열어놓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은 롯을 위하여 그 성읍이 보존되지 아니한 19장의 사건의 실제적인 과정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19장의 서술이 계속되면서 비록 소돔은 롯을 위하여 보존되지는 않았지만 ‘작은 성’ 소알이 롯을 위하여 보존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19:17-22에 대한 아래의 주석을 보라).
창세기강해(90)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은 누구였나?(창18:10~20)_2021-05-07(금)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창세기강해(90)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은 누구였나?(창18:10~20)_2021-05-07(금)
https://youtu.be/T7P-lAIeTms
1. 창 18장에 보면, 날이 뜨거울 때에 장막 문 앞에 앉아있던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세 사람들은 누구였나요?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키고 아브라함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세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 창세기 기자는 “세 사람들”이라고 하였는데 정확히는 “세 남자들”이라고 했습니다(창18:2).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그냥 사람들이나 천사들인 줄 알았지만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 중의 하나는 한 분 하나님이셨고(창18:14) 나머지 둘은 천사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창19:1).
2. 창세기 18장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분은 누구이며, 창18장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났던 분은 누구인가요?
창세기 18장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여러 번 아브라함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만해도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잘 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아브라함 앞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번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 앞에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하여 같은 분이기는 하지만, 여호와와 한 분 하나님의 차이를 조금이나마 비교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일 이전에 아브라함에 앞에 나타나신 분은 누구이셨습니까? 그분은 구약시대에 나타난 한 분 하나님으로서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 나타나신 그분은 “여호와”를 3인칭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서, 그동안 아브라함에게 역사했던 분이 여호와이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창세기 18:14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본문을 히브리어에서 직접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그에게 어찌 어려운(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내가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정한 때에 네게로 돌아올 것이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18:14) 그렇습니다. 그때 아브라함과 말씀하고 있는 분은 “내가(1인칭 단수)”라고 말씀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은 바로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언급하고 있는 이로서 “여호와”는 3인칭 단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8장 이전까지 당신을 “여호와”로서 계시하신 분이 이제 한 분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다른 점은 이번에 그분은 직접 사람의 몸을 취하신 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볼 때에도, 처음 있는 일이자 마지막 있는 일에 해당됩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을 구약시대 아브라함이 접하고 있을 때에는 “여호와”이십니다.
3. 한 분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 하실 때에 어떤 표현을 사용하셨나요?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는 아주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2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나는 나다)”(출3:14)는 표현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사41:4, 44:6, 48:12)”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일컬어 “한 분 하나님의 자기선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약시대의 경우 모세와 이사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먼저 그분이 “스스로 있는 자(나는 나다)”라고 하신 것은 그분만이 홀로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라는 뜻이자, 모든 것을 다 있게 만드실 수 있는 전능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하신 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시작하시는 분이심과 동시에 그분이 모든 것을 끝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분만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그분에 의하여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돌아가고 있으며, 그분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되기고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홀로 한 분이신 그분이 구약시대에 사람에 나타나서 말씀하시거나 일하실 때에 당신 자신을 “여호와”라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도 처음에는 당신 자신을 “여호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당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17:1, 28:3, 35:11, 43:14, 48:3, 49:25). 그러다가 모세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모세가 하도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비로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알려주셨습니다.(물론 지금까지 “여호와”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정확한 이름인지는 잘 모릅니다. 이것은 어떤 천주교 신부가 1,518년에 추정해서 만들어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누구신고 하니, 그분은 원래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혹 그분이 인간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세상 역사에 관여하지 아니하신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인간과 관련을 맺으시며 일하실 때에 그분은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으니 그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한 분 하나님의 자기 선언을 신약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나요?
네. 있습니다. 놀랍게도 한 분 하나님의 자기선언이 신약성경에도 고스란히 똑같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됩니다. 먼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나는 나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발견이 되고(요8:24,28,58),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발견이 됩니다(계1:17, 2:8, 22:13). 그런데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계셨을 때에 말씀하신 표현이라면,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는 표현은 그분이 죽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셨을 때에 말씀하신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를 입으셨던 예수님과 부활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홀로 한 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자기선언의 말씀을 똑같이 하신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예수님도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요 그분이 이 땅에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구약시대에부터 이미 밖에 나와 활동하고 있던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명을 받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만세 전의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당신이 누군지를 드러내신 것이니,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아들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시며 활동하신 것이라면, 신약시대에는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으로서 활동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니,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활동하실 때에는 하늘에는 아버지가 계셨으며, 동시에 이 땅에는 아들도 함도 계셨던 것입니다.
5. 우리는 왜 한 분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나요?
삼위일체로 존재하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분을 한 분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게 되면 이단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즉 그분의 삼위성(세 가지 인격)를 강조하다보면 “삼신론”으로 빠지기 쉽고, 그분의 하나를 강조하다보면 “일신론”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특히 삼위일체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도 있고 아들 하나님도 있으니, 어머니 하나님도 있어야 한다는 말에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는 자에게 이단은 결코 설칠 수 없습니다. 여호와도 한 분 하나님의 표현이요 아들도 한 분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을 아는 자는 홀로 한 분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며 전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가리켜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자를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가당치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러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으니 우리도 갚아야할 빚이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과 싸울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오셨고 그분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와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 오직 여호와만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들(유대인들이나 여호와증인들)까지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나 여호와증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유는 그들은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이며 그분만이 유일하다고 믿기 때문인데,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설명하면 그들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렇게 놀라운 일들인 것입니다.
2021년 05월 07일(금)
정병진목사
창세기 18장 강해, 언약의 중보
창세기 18장 강해, 언약의 중보
노승수 목사
창세기 16장은 천사로 말미암아 주어진 시내산 언약과 아들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루살렘(모리아)로 복음의 새언약을 하갈과 사라를 통해서 대비했다면, 17장은 할례언약을 통해서 할례언약의 당사자가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난 이삭과 맺어진 언약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할례는 율법의 모든 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언약으로 바울은 극심히 이방인이 이 언약을 시행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것이 얼핏 보기에 율법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창세기 17장의 맥락에서 이 할례언약의 당사자는 이삭이었고 이삭은 바울의 유비 속에서 성령을 따라 난 자,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유대인과 이방인을 통칭하는 거듭난 영적 자손을 일컫는다. 즉, 16장은 언약을 대비했다면, 17장은 언약의 당사자를 둘로 대비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18장은 언약의 중보인 씨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주어지게 될 것인가가 드러난다. 예컨대, 17장에서 전능한 하나님과 맺어진 할례언약의 쌍무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이 언약이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과 맺어질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술이 되어 있다면 18장은 예루살렘 언약으로 묘사되는 사라가 경수가 끊어진 여인, 곧 불임의 여인으로 묘사된다. 성경 상에서 불임이 그리스도 계시의 중대한 모티프가 되는데, 3명의 나면서부터 나실인이 된 사사(왕), 제사장, 선지자가 등장한다. 바로 삼손, 사무엘, 그리고 세례 요한이다. 이 셋의 공통점은 모두 불임 여인으로 부터 잉태된다는 점, 3명이 모두 날 때부터 나시르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천사가 나타나 수태고지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사무엘은 좀 다른 맥락이다. 사무엘서와 누가복음은 매우 묘한 병행을 이루고 있다. 한나의 기도와 마리아의 기도는 대비를 이룬다. 그리스도의 삼중직의 모형으로 이 세명의 구약의 인물은 불임 모티프 속에서 그리스도를 모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불임 모티프의 원형은 다름 아닌 사라이며 이 불임 이미지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의 이미지가 된다. 나중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원형적 모티프라고 할 수 있다. 이사야서에서 ‘처녀’가 낳을 아이에 대한 예언(사 7:14)도 자유주의자들은 젊은 여자를 들먹이지만 실제로 맛소라 사본의 독본을 보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탄생 교리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발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창세기 18장은 창세기 3:15 이후에 그리스도 계시의 더 구체적인 진전이다. 우리가 17장에서 할례언약을 설명하면서 언약의 당사자가 바로 성령을 따라 난 자, 곧 중생자의 모형이 되는 이삭을 언급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라는 씨가 불임 여인, 혹은 동정녀 출생에 대한 그림자로 생리가 그친 사라로부터 이삭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창 18:11).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감추시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인데, 단순하게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관한 것으로 보이지만 더 멀리 보면 아브라함에게 이것을 감추지 않는 것은 그가 바로 복의 근원이 되고 의와 공도를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릇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8-19). 그런 후에 아브라함의 소돔에 관한 중보가 나오는데 이것이 50에서 시작해서 10에서 마친다. 셋으로부터 노아까지가 10개의 계대이고 창세기의 엘레 톨레도트가 10개이며, 이 10개의 톨레도트가 지향하는 것이 구원의 씨로서 그리스도 출현에 관한 계시라면, 이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출애굽기의 10개의 저주와 복을 얻은 백성이 얻은 10가지 언약의 말씀으로 이어진다. 즉, 창세기 15장의 씨가 가져다주는 구원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맥락에서 주어지게 된다.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오순절 사건은 심판의 사건이자 구원의 사건으로 곧 추수의 사건으로 해석된다. 18장은 언약의 중보자의 구체적 출현 방식에 대한 예언과 함께 의와 공도로 다스림을 위해 택한 그릇이라는 설명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고 아브라함의 중보는 10명에 머무른다. 이는 근시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원시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심판과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18장이 계시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이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다서에서 이 소돔과 고모라는 종말의 지옥 불심판의 거울로 묘사된다(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씨의 계보를 나타내는 톨레도트는 진노의 심판의 은유인 애굽의 10개의 재앙과 구원받은 백성의 10개의 언약의 말씀과 더불어 10의 삼중성으로 드러난다. 창세기 18장은 이제 구체적으로 생리가 그친 불임의 여인으로부터 드러날 씨와 삼위 하나님께서 의와 공도로 다스리시기 위해서 택한 그릇으로서 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아브라함의 정체성이 곧 이 씨의 정체성이며 불임 여인으로부터 날 이 씨는 곧 소돔과 고모라를 진멸할 진노에서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씨, 곧 아브라함의 중보로 표상되는 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16장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 곧 율법은 복음 아래에서 복종해야 함을 계시하며 17장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묘사하는 두 인물, 곧 이스마엘과 이삭을 통해서 언약의 당사자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에게 접붙여진 영적 후손이자 거듭난 후손이라는 것을 할례언약을 통해서 보여준다. 게다가 17장의 할례언약은 생식시의 표피를 제거하는 표징으로 구약과 신약에서 지속적으로 이 표징의 의미가 마음의 할례, 곧 신명기 30:6이 말하는 것처럼 중생에 관한 것임을 말하고 언약의 당사자가 바로 이렇게 중생한 자들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18장에서는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가 오는 방식으로서 불임에 대한 계시와 그 씨가 상속할 아브라함의 지위와 위상을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이뤄질 심판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창세기 18장 – 아들약속과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 새벽기도 설교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방문하심에 대한 이야기인데 특히 나그네 곧, 이웃을 섬김으로써 부지중에 하나님과 천사를 영접하게 된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하여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을 보면 100세 노인인 아브라함은 정오 즈음에 자신의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세 사람이 지나는 것을 보고 달려 나가 그들을 영접하여 극진히 대접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님과 천사로 알고 대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그들을 평범한 여행자들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3:2에도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아브라함은 평상시에도 나그네와 이웃 대접에 힘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인 우리 또한 그를 본받아 항상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이웃과의 관계는 소홀히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되 그 사랑으로 어려움에 처한 형제와 이웃에 대하여 하나님을 대접하듯 항상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하나님을 대접한 것과 같이 우리 또한 주님을 대접하는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영접하면서 말하기를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를 오히려 나그네들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했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오늘날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여러분,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 내가 그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조금만 넓게 생각해보면 성도가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이웃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께서 선한 마음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한 능력을 주셨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아브라함과 같이 항상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베푸는 삶을 살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어지는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 때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1-12절을 보면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사라가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그녀 자신이 더 이상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라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봄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90세에 아기를 낳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뜻대로 온 세상을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라가 아들을 낳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13-14절에서 사라의 불신을 책망하며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일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이 사실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이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당면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나님께는 너무도 쉽고 간단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8절 이후의 분문은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하나님의 주권이 단지 택한 백성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까지도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1절에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사실인지 여부를 알아보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모르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에는 이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심판하시겠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표명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셔서 죄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내의 기한이 차게 되면 반드시 죄인들을 단호하게 심판하시되 아주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은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잘 예표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이어지는 본문은 소돔 성을 위한 아브라함의 간절한 간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소돔 성의 멸망 예고를 전해들은 아브라함은 우리 같으면, 에구 못된 것들 못된 짓들만 하더니만 결국에는 심판을 받는구나 하며 남의 일 보듯이 하겠지만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인들의 멸망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문제인 양 주께 간절히 매달려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은총을 간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간구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확신과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 이웃 사랑과 기도의 훌륭한 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 예고를 전해 듣고 즉시 소돔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를 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간구는 집요하리 만큼 끈질기고 간절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구원을 위해 무려 여섯 번이나 거듭거듭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기도에 매번 응답하시며 아브라함이 제시한 의인의 수만 충족되면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간구를 외면치 않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했던 소돔을 멸망시키시면서도 아브라함의 간구를 기억하시고 롯과 그의 두 딸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간구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잘 보여 주는 일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성도의 간구를 귀히 여기시고 그 기도를 다 들어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필요와 이웃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날마다 간구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하루도 이웃 사랑과 불의한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를 믿음으로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오시다(창세기 18장 1 ~ 5절)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 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창세기 17장에서 지난시간 우리가 본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집에 방문하신 일이 17장에 기록되었는데 또 다시 18장에 역시 또 기록한 내용이 비슷한 시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17장 방문 있은 후에 18장 방문까지가 1년이나 시간이 걸린 것 같지가 않고 그의 같은 시기에 방문한 이야기를 쓰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17장 보시면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기록도 있고 18장 10절에 보면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는데 그러면 같은 한번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두 가지로 전례된 것인지 따로 예를 들어서 17장 방문이 있은 후에 몇 개월 안에 또 오셨다는 이야기 인지 어떻든 그 한해 안에 있었든 일입니다. 같은 해에 99세 때에 그 이듬해는 아들이 태어나니까 그런 이야기가 필요 없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이른 내용도 보면 아마도 아브라함 집에 방문한 이야기가 두 가지로 구전으로 내려온 겁니다. 두 가지 이야기가 그런데 어느 하나도 우리가 창세기 1장 창조기사와 2장 창조기사가 많이 다른데 그걸 섞어서 편집을 하지 않고 둘 다 버릴 수 없어서 그냥 나란히 배열한 것처럼 17장 방문기사와 18장 방문기사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 졌는데 약간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한곳에 섞어서 재편집을 한 게 아니라 두 가지 구전된 전승을 나란히 배열한 것 같다.
문맥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글쎄 한 번 더 오시고 그 해 안에 한 번 더 오시고 그럴 수 있지만은 그럴 가능성이 많지 않아요. 아들 있다는 얘기를 한번 했으면 되었지 두 번 와서 하실 리는 없거든요. 그래서 어떻든 마르레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에 오셨다는데 마르레가 어디냐면 헤브론 쪽에서 약 3킬로 남짓 데는 멀지않은 곳인데 거기는 아브라함도 거기 살았던 적인 있고 이삭도 헤브론 마르레 상수리나무 수풀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중해성 기후를 뛰고 있는 그런 팔레스타인 지역이 대체로 더운 지역입니다. 덥기 때문에 서늘한 곳을 찾아가려면 표고가 높은 쪽으로 가야 되요. 해발 600-700고지가 넘어야 그런 데로 사람이 살만하다 하는 곳이고 평지는 더워서 살기가 힘드니까 꼭 그 도시가 800-700 그런 산꼭대기에 도시가 발달합니다. 헤브론은 근 1,000미터 가까이 되는 높은 곳에 있고 예루살렘도 780고지 좀 높은 산꼭대기에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거기가 아브라함이 사는 곳이 지금 우리 개념으로 하면 동네에 우리는 살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산다든지 할 때는 동네에 사는 경우는 많지 않고 외딴 천막입니다. 외딴곳에 따로 천막 한 채만 있는 겁예요. 장막에. 오래있지도 못하고 양떼가 많고 풀밭은 제안되고 하면 또 옮겨가고 이렇게 하는데 자기 집 장막 하나 밖에 없는데 거기 손님 왔으면 지나가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자기 집에 온 사람인 거죠. 그래서 동네 골목에서 사람을 만난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아브라함 장막 한 개만 있는데 사람 셋이 오니까 우리 집에 오셨는가 보다고 볼 수도 있고 거기가 길목이라면 지나가시는 가보다 이런 정도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내 집에 오셨는데 그냥 지나가지 마옵시고 들어오시면 제가 물을 가져 올 테니까 발을 씻으시고 또 요기 할 것을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지난번에 아브라함에 덕목을 이야기 할 때 말씀드렸죠. 손님 대접하기를 잘 했다. 그런데 이거는 아브라함만 마음이 있어 되는 게 아니야, 사라가 즐거워해야 되고 종들이야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하겠습니다마는 사라에게 가서 6절에 보면
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6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세 스아라는 것은 아마도 한 스아가 한 사람분의 빵이 되는가 봐요. 그러니까 세 사람이 왔기 때문에 삼명분의 가루를 가지고 반죽을 하여 떡이라고 했는데 빵인 거죠.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장막 뒤쪽에 그늘이 있어서 손님을 모시고 장막 안에서 밖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 그런 구조 같아요.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생리가 끝났다는 거예요.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속으로 어떻게 웃는 거예요? 속으로 한번 웃어 봐요. 속으로 비웃었다는 게 이분들이 아직은 셋이 하나님과 천사라는 의식이 없거든요. 어떻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냥 대접을 했으면 드시고 가시지 저렇게 빈말을 하시나, 내가 생리가 끊어진 것도 모르고 하시는 것 보다.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러 번 말씀하시는 거든 요. 그러면 그때까지는 애기를 가졌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는 얘기죠. 다시 말하면 입덧도 그런 것도 없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사라가 전혀 인식을 못하고 있는 거 보면 그렇다면 99세 때 아까 17장에 나타났던 것도 100살에 있을 거니까 시기가 같아요. 그의 다 방문한 시점이 18장 방문과 17장 방문이 그의 이삭이 태어나기 1년 전이기 때문에 그래야 말이 되거든요. 그래서 이것이 한번 방문에 대한 두 가지 전승인지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승되는데 구전으로 왜냐하면 이런 얘기가 오랫동안 구전으로 내려옵니다. 처음부터 노트에 받아 적은 것이 아니고 구전으로, 구전으로 내려오는데 족장 가문에는 글자 없을 당시에는 양치는 지팡이가 제법 길어요. 한길 넘어 정도로 양들이 멀리가면 사용해야 되니까, 그런 지팡이에다가 자기 가족 역사를 그림으로 새겨 놓아요. 그런 식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그림을 가지고 설명하면서 계속 입에서 입으로 후손 대대로 전승되는 그런 스타일로 창세기 기사들이 오랫동안 전승 되다가 지금 현재 모습으로 기록된 거는 에스라 때 기록된 걸로 보기 때문에 두 가지 전승으로 내려온 것 같다는 거죠.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통 거짓말은 아니죠. “겉으로 웃지 않았으니까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속으로 웃어서 네가 무섭다.” 하나님하고 사라 사이에 웃었다 웃지 안했다 승강이 하는 것처럼.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이렇게 그냥 가 버릴 줄 알았는데 17절에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에게는 이야기를 해야지, 뭔가 일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는 틀어놓아야겠다. 아브라함에게는 알게 해야겠다는 뜻 인데.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 택한 목적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 자식과 권속들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다. 여러분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야, 모든 하나님 백성들 과거, 현재, 미래에 모든 하나님 백성들은 여호와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선택 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였다. 우리는 그저 맨 날 믿음으로 구원받아 고치겠다. 이렇게 습관화 되어 있는데 근본 원 개념, 택한 목적의 원 개념은 여기 창세기 18장 19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은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고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믿음만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였다.
의와 공도는 대게 공평하고 정의로운 윤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공평하고 정직한 윤리를 행하지 아니한다. 하면은 참 신앙생활이 아니다. 맨 날 우리는 오직 믿음 오직 믿음 하면서 그냥 교회만 다니고 예수 믿고 세례만 받으면 끝나는 걸로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셨다는 겁니다.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이 말은 좀 번역이 여러 번역을 대조해 봤는데도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하면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탄원하는 누군가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하는 그런 것이 컸다는 말인지 아니면 어떤 번역은 소돔 안에서 그렇게 소돔의 악한 죄악 때문에 거기서 눌린 사람들, 억압된 사람들의 비명 절규 같은 그런 부르짖음이 크다. 양쪽으로 다 해석할 수 문젠데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히브리어라는 언어가 우리 언어와 다르기 때문에 하여간 그곳은 악이 너무 크고 죄가 중하고 거기서 들리는 소리가 기도소리든 절규하는 소리든 간에 하나님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르짖음이 크다. 그래서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여러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꼭 내려가서 봐야 압니까? 그냥 하늘에서 모르실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런 것은 아까 우리가 시편 89편에서 읽은 데로 주의 성실하심에 기인한다. 안와 봐도 아시죠. 전지전능한 분이 그것을 모르겠어요. 그러나 확인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내 안가 봐도 다 알아, 안 가보는 것은 성실하다고 할 수 없어요. 가서 실제로 그런지 가본다.
여러분 가끔 우리가 이번에 포항지진이나 아니면 제천에 화재 사건이나 뉴스 보면 알 수 있는 것이고 하지마는 그래도 총리나 대통령 이런 분이들이 뉴스 봐도 알지마는 직접 가본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도 그 성실하심 때문에 이미 충분히 알 수 있지마는 직접 또 가서 보신다.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말씀하시고 그 내용을 대충 들었을 때 아브라함 심중에는 두 가지가 이제 확실한 거죠. 소돔, 고모라가 악하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모를 리가 없죠.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내려오셨다. 내려오시기까지 하셨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봐도 소돔은 심판 받아 마땅하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악한 성읍에서 악한 사람들이야 심판받아 마땅하지마는 그 중에 의인이 있다면 의인도 함께 멸하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 뜻을 품하는 거죠.
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만일 그 성에 의로운 사람 50명이 있으면 그들도 함께 다 죽어야 되는지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게 아니지 이렇게 여쭈어 보는 겁니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 말은 소돔, 고모라 성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 10명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볼 때 제법 의로워 보여도 그런 의가 대부분 위선이거나 별거 아니야, 어떤 사람은 죄 짓는 게 서툴러서 다 들통 난 것이고 어떤 사람은 죄를 더 크게 짓고도 잘 넘어간 것뿐이지 아니면 교양이라는 포장으로 약간 포장을 한 것뿐이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정말 의로운 사람은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해요. 평화롭고 좋을 때는 모르는데 교회나 총회나 사회나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고 이해관계가 걸리고 그럴 때 보면 사람이 교양 속에 감추었던 본색이 막 드러나요.
저는 노회에 가서 목사, 장로만 모인 데에서도 그런 모습을 너무 많이 봤어요. 그래서‘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곁으로 하루, 이틀 봐서 잘 몰라요. 33절 보면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아브라함 심중에 실제로 의인 50이나 40이나 있다고 안다는 것이 아니죠. 만일이라고 갖다 부치고 하는데 그 배후에는 롯을 좀 생각하는 거죠. 자기 조카 롯. 그러니까 참아 아브라함도 염치가 있어서 그런지 내 조카 롯, 그 말은 못해요. 그 말은 못하지만 나중에 소돔성이 망할 때 보면 소돔성을 엎어시는 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신 지라 멸망시키시는 중에 롯을 내 보셨더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꼭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나님 알아 들어시는 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 그런 분 아닙니다. 그렇게 말 귀를 못 알아듣는 그런 분이 아니고 아브라함 중심에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니는 거예요. 기도가 염치가 있잖아요. 차마 내 조카 롯 그 말은 못했어요. 못했지만은 하나님은 아브라함 속에 무슨 말이 남아있는지 아신다는 거예요.
성경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관계 속에서 오고 가는 대화나 기도나 혹은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때 참 인격적이 시다. 하나님이 아주 젠 틀 하시고 지극히 인격적이시다. 그런 면면을 여러 군데에서 보게 돼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이렇게 매달리는 모습을 어디서도 볼 수 없어요. 자기 조카 롯이 점점 소돔 문화에 젖어 들어가는데 롯은 들 하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 롯의 아내와 딸들이 점점 소돔 문화에 젖어가는 거예요. 그것은 이게 지금 2,000년이니까 이 소돔, 고모라 사건은 약4,000년 전 이야기거든요.
4,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확실히 이 세상 문화에 잘 젖어드는 사람들이 여성들인 것 같습니다. 또 여성들은 어떻든 도시 문화에 젖어 살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소돔, 고모라에 롯은 소돔문화에 물들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내와 딸들이 그러니까 세상 적이고 도시문화를 좋아하고 지금도 똑같아요. 별 차이가 없어요. 여기 산청에는 농촌이고 산촌이고 그러니까 논, 밭에 일들이 많은 곳이고 농업 노동이 굉장히 극심한 곳이야, 우리가 어릴 때부터 우리가 한 17-18살, 20살 안팎 그럴 때 청년들이 다 나갔습니다. 농촌에 남아있는 남자들 몇 사람은 있어요. 지금도 우리 고향 가면 내 친구들이고 나하고 동갑내기 사람들인데 그의 농촌 지키고 있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는 한명도 없고 다 도시로 갔어요.
우리 때는 나가도 들어가도 결혼도 하고 했는데 지금도 농촌에 남아 있는 총각들은 결혼을 못해요. 다 도시로 가버리고 하도 안 되니까 월남사람, 중국사람 수입해 와야 해요 처녀를. 그렇게 여성들은 도시 문화에 매료되는가 봐요. 남자도 그런 면이 있지마는 저는 모르겠어요. 촌놈이라 그런지 도시문화라는 것에 처음에는 와 하다가 얼마 안가서 매력이 없어요. 아무리 봐도 아무른 매력을 못 느껴요. 지금보다 더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꽃이 피고 해야지 시멘트 콘크리트 문화에 어떻게 살아간다는 건지 저는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돼요 지금도.
여기 와서 에스라 근방에서 2-3년 3-4년 살아보신 분들은 대게 같은 말합니다. “목사님 도시에 가봤는데 정말 못살겠어요.”힘들다는 거요. 그리고 너무 시끄러워, 서울에 가서 보니까 내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전부 큰 소리 치고 다니고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바빠서 정신이 없는 거예요.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거기서 어떻게 정신을 차리는지 그런데도 저는 여성들이 참 담대하다. 우리는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은데.
여러분 소돔, 고모라에 살고 있든 롯과 그 아내, 딸들이 물들어서 나중에 19장에 보면 알겠지마는 롯은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그 아내하고 딸들은 결국 못 빠져 나와요. 딸은 빠져나왔지만은 나중에 타락하게 되고 어떻든 소돔, 고모라에 살아서 롯이 아내는 잃어버렸고 딸들은 나중에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서 그래서 결국은 모압과 암몬 족속이 되고 말았는데 그 죄 얼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거예요. 여간 정신 차리지 않고는 세상문화 속에서 자기 영혼을 지키기 쉽지 않다.
여러분 창세기 18장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하고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에 일가친척이나 누구 또 소돔, 고모라 문화에 빠져 들어간 사람이 없는지 생각해봐야 돼요. 그리고 지금 우리사회는 그 소돔, 고모라 못지않게 타락해가고 있고 변질되어가고 있고 윤리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도시생활 속에 경건한 사람도 혹 있지마는 문란한 사람들에 이야기는 우리 상상을 초월합니다. 옛날 소도, 고모라 못지않게 타락하고 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데 그 아이들이 과연 정상적인 인격이 형성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 우리 기독교는 자녀 교육에 실패합니다. 유대교는 이방선교나 이런 것은 잘 못해요. 유대인들이. 그런데 수직선교, 종적인 선교, 자기자녀 손자손녀로 내려오는 가족, 자녀선교는 확실히 하거든요. 그래서 유대교인으로 태어나서 유대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가는 일은 그의 없다시피 합니다. 자기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역사를 가르치고 탈무드를 가르치고 하는 것만큼은 완벽하게 해요.
반면에 우리 기독교는 해외까지 선교를 가는데 자기 자녀선교를 못해요. 대부분 자녀들이 불경건한 쪽으로 갑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공부 안하고 커닝하고 남에 리포트, 논문 빼기고 하는 이런 사람은 전부 목사, 장로 자녀들이야, 아주 뺀질뺀질 못되고 공부도 안하고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실컷 놀다가 기도실로 가요. 공부를 안했는데 기도한다고 실력이 나옵니까, 떨어지면 또 교수에게 가는 거야, 무릎 꿇고 학점을 받아내는 거죠.
그래서 자녀교육을 거의 다 실패를 해요. 이것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문화 자체가 정착이 안됐고 또 교회에서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는 게 없고 아버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인격도 안 되거나 실력이 안 되거나 그래서 어설프게 하는 주일학교에 거기다가 맡겨놓으면 되는 걸로. 전혀 부모들이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돼버린 거예요.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제인데 이게 꼭 하나님을 믿데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믿으면 좋겠는데 꼭 롯의 가정처럼 비슷하게 돼요. 오늘 기독교인들의 신앙 상태가 은근히 롯의 가정하고 같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가정 같지 않고 롯의 가정하고 비슷하다.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유럽도 다 실패했고 기독교는, 미국도 실패했고 한국도 여지없이 똑같이 실패합니다. 자녀교육이 안돼요. 부모들이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예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성경을 읽어주는 정도 가지고 안 되고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길이 없나? 아이들하고 부모가 성경공부를 정말 즐겁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런데 그것을 유대인들은 지금도 하거든요 지금도 그의 아버지가 가르치고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랍비에게 물어요. 우리는 묻는 게 없는 문화예요. 교회에서도 묻지 않고 학교에서도 질문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부하지 않는다는 거든 요. 유대인들이 머리가 나빠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부지런히 묻고 또 랍비가 묻고 학교에 가서도 묻고 끝없이 질문을 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창세기 18장에서 혹시라도 우리가정에 신앙상태가 롯의 가정처럼 되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믿는다 할지라도 어머니하고 딸들이, 자녀들이 롯의 자녀들처럼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참 심각한 문제야, 그래서 어려서부터 우리엄마 우리아빠는 성경에 도사들이다. 이런 신뢰를 가지고 가정에서 엄마, 아빠에게 성경을 묻도록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될 텐데 너무 오랫동안 부모가 자녀에게 성경을 안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게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2018년도에는 창세기 18장을 생각해 보시도록 우리가정이 혹시라도 롯의 가정처럼 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깊이 각성하고 늦었지만은 여러분 우리교회 성도들이라 해서 마음이 나태해서 샤론교회에만 다니면 다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가정에서 성경이야기가 계속되는 그런 변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영주에 갔을 때 영주반산교회 담임목사님이 우리교단인데 자기가 에스라 성경강좌를 알게 된 것은 자기 동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처음에 형은 형이기도 하고 신학을 했고 목사가 되었고 동생은 동생이기도 하고 신학도 안한 주제에 만나면 성경이야기를 꺼내서 형을 기분 나쁘게 한다는 거야, 곤욕스럽게 하고 형이 아는 게 잘못됐었다. 틀렸다. 그런데 대게 기분 나쁜데 형이 그래도 가끔 맞는 소리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만날 때 마다 싸움이 벌어지고 성경강좌 말하지 마라, 목사라는 사람이 동생보고 이렇게 할 정도로 맨 날 다투었는데 한해 두해 한 게 아니고 여러 해 명절 때마다 집안사람이 말릴 정도로 싸웠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싸우면서 들어도 하도 많이 들으니까 한번 들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그래서 보나마나 불법 시디인데 들어 보았다는 거예요. 들어보니까 처음에는 반발하던 그 연장선상에서 속으로 반발하다고 하다가 들리고 보이고 하니까 ‘이것 봐라, 이것 봐라’하면서 목사님이 변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 부터는 성경이 열리고 보이면서는 형제가 만나면 다른 일가친척들은 다 저리가라하고 둘이서 성경가지고 얼마나 희희낙락을 하고 둘이 좋아하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둘만 똘똘 뭉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최근에 동생 되는 분도 신학을 시작 한 거예요.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래서 지난 1월 1일 집회에 동생 되는 분이 왔더라고요. 신학을 시작했는데 여기 온 거예요.
그래서 가족끼리도 모이면 다른 걸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성경을 깊이 있게 서로 대화하고 질문하고 피차 가르치고 이런 게 되어야 돼 가족들이. 명절이 곧 구정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럴 때도 자꾸 쉬쉬하고 피할게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이야기 하는 그런 분위기로 가야 되는데 이게 하도 익숙하지 않아서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안하면 일가친척이나 자녀나 가족이나 할 것 없이 성경강좌에 참여 하도록 더러 권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자, 완전 불신자를 전도할 때도 여기 성경강좌에 한번 참석하도록 권해 보세요. 최고의 전도가 된다는 겁니다. 제가 여러 분, 교회 발도 대보지 않은 분들이 여기 4박5일 참여하고 완전히 거듭나서 정상 신앙으로 오래 믿은 사람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그런 케이스를 많이 보거든요.
우리 저기 마산서 오시는 뒤에 앉아 계시는 분 있지 않습니까, 최근에 전혀 교회 안다녀 보셨는데 누가 꼭 가보라 해서 제가 전에 얘기 한번 한 것 같아요. 마산에서 마산제일극장하든 극장주인의 아들인데 마산 창동에다가 피자집을 엄청나게 규모 있게 했어요. 인테리어만 11억을 들어서 인테리어를 했어 피자집을 했는데 이탈리아 최고의 브랜드‘ 루메롱 우노’라고 하는 그런 간판을 걸어놓고 했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오는 것 같더니 얼마 있다가 하루에 피자 10판도 안 팔리는 거예요. 인건비하며 인테리어하고 신협에서 대출을 내었는데 어떻게 돼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고스란히 날려버리고 회복 안 되서 정말 인생에 파탄이 나버릴 정도로 그 사람이 피자집을 개업할 때 잘 아시죠.“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착 붙여놓고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꾸로 시작은 창대했는데 나중에 아주 미약하게 되어서 피자 열판도 안 팔리고 인테리어를 너무 잘해놓으니까 피자 먹는 사람이 얼마나 비싸나 해서 목에 안 넘어가요 겁이 나서 그래서 팔리겠어요. 그래서 11억 빚을 안고 결국은 갚지 못하고 파산했을 겁니다. 그러고 있다가 누군가가 제가 강의한 성경강좌 그때는 카세트테이프 이걸 담아 보냈는데 그때 24개가 되었어요 90분으로. 듣다가 다 들어가는데 다 듣고 나면 목사님 찾아뵀겠습니다. 전화가 왔더라고요. “안보고 믿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다. 오지마시라.”그랬더니 기어이 왔어요.
올 때 자기가 상상을 했데요.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니까 키가 짤막하고, 깡말라가지고 대게 깐깐한 그런 분 일거다 하고 날 만나면 끌어안고 울어버린다고 그러고 왔는데 키가 너무 커서 울어 버리지도 못하고 전혀 음성하고 모습하고 매칭이 안되어서 어리바리 하다가 울도 못하고 넘어갔어요. 강의 중에 그런 말이 있거든요. 네 시작은 미약하다는 말은 잘못 된 거다. 전부 자기보고 한 말인 것 같더래요.
저보고 종이에다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고 힘을 다하여 너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저것을 써 주시면 “네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시작은 창대하리라.”떼 내고 신명기 6장 5절 말씀을 붙여놓고 하고 싶다고 제가 미쳐 못써드렸어요. 내가 마음이 좀 준비가 되고 하면 붓글씨로 써서 드리겠다. 했더니 결국 못 기다리고 자기 본 교회 돌아가서 김기현 목사 문창교회 담임목사에게 써달라고 했는데 목사님이 만년필로 쓰더라고요. 만년필로 써서 자기 카운터에 놓고 그렇게 정말 하나님을 이기적으로 믿었던 잘못된 신앙을 내려놓고 정말 이제는 장사가 안 되어도 내가 그랬거든요 예수 믿는 사람은 장사가 망해도 품위 있게 해야 된다.
그래서 ‘루메롱 우노’피자집 문 닫을 때 패업 예배를 피자를 많이 구워서 했다는 거예요. 망할 때도 예수 믿는 사람은 품위 있게 망해야 된다. 그래서 예수 믿고 피자집이 쫄딱 망했지만은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그래도 그때부터 열심히 전도했는데 이 사람은 병원에 냄새, 공기, 분위가가 싫어서 일가친척이 아파도 병원방문 잘 안하는 사람인데 성경강좌 듣고 변화되어서 병원전도를 일을 삼고 다니면서 그래서 많은 사람을 전도해요 지금도.
그러나 가정은 얼핏 들었는데 이혼해버리고 부인이 도망가 버리고 그렇게 어려우면서도 힘을 다해 전도하는 거예요. 나보다 훨씬 더 낫다. 그렇게 지금도 열심히 전도해요.
여러분 우리가 2018년도에 우리가정들이 자치하면은 아브라함 가정하고 두 가정을 지금 보여주는 거든 요. 아브라함은 중보 하는 가정, 롯의 가정은 중보를 통해서 겨우 혼자 구원받고 딸들도 교육도 제대로 못하고 아내도 잃어버리고 이런 가정도 다 하나님 믿기는 믿는 가정들입니다. 그러나 소돔 땅에 오래 사는 동안에 롯의 가정은 변질되었다는 거예요. 혹시 우리가정들이 아브라함 가정처럼 되지 않고 롯의 가정처럼 세속문화에 물들어 가는 게 아닌가? 또 자녀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게 아니가 깊이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2018년도 두 번째 주일에 주님에 전에 와서 하나님 말씀 들어볼 때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헤야 할 텐데 소돔 문화 속에 우리 자녀들이 혹은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게 하옵시고 다시 우리가 가정에 경건과 신앙이 회복되어서 다른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정들이 되게 하여 주옵시고 또 전도하는 그런 한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드리고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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