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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 16 (토) [하루 한 장]“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히브리서 3장은 고난과 박해 속에
소망을 잃고 자칫 방황하기 쉬운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이 시기를
믿음으로 이겨낼 핵심을 전합니다
그것은 사도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대는 바뀌고 환경은 달라져도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
우리에게 오신 사도이시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끊어진
다리를 연결하는 대제사장이셔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대신이자
하나님께는 우리의 대표자로
서 주시는 분이십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그렇게 높이는
모세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
쓰임 받는 종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지으신 분이며
참 주인이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분께서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든든하게 세워가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mp3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분홍목사의 사역 신청 문의도 아래 전화번호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 051-204-0691 (담당 : 성민교회 박지선 간사)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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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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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qZriBdeKdQA
히브리서 3장 주석
히브리서 제 3장
=====3:1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 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
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
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8:5;
9:23;11:16;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
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 )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
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19:6;벧전2:9,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두 가지 칭
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 )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
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
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
으나(마10:40;눅10:16;요4:34;5:23,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1)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b.Qidd.23b;Ned.35b;Yoma19a-
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 )가 헬라어 ‘아포스톨로
스'(* , ‘사도’)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
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2)’사도’라는 호
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
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
3:10,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
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
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대제사장 – 신약셩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
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한 것과 같으니 – 저자는 본절
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충성과 모세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다. 민12:7에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
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온 집을 맡은 충성된 청지기로서 인정받은 것을 나타낸다.
모세는 예수님과 같이 완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
경하는 조상 중의 하나인 모세를 충성된 자로 인정하면서 3절이하에서는 예수를 보다
우월한 자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혹자의 기적대로 저자가 2:9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는 예수를 보니’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의 충성을 인정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Hewitt).
하나님의 온 집에서 –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 )는 ‘가족’, ‘가
문’ 혹은 ‘재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느1:6)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킨다(엡2:21,22;딤전3:15;딤후2:20;벧전4:17). 따라서 ‘하
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권속을 뜻한다. 한편 ‘온’
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로'(* )는 모세의 충성과 예수의 충성 사이의 차이점을 암
시한다. 모세와 같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종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에게 충
성하였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전 영역에서 온전하게 충성하였음을 시
사한다(Morris).
=====3: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 저자는 2절에서 예수와 모세가 서로
‘충성되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와 모세의 차
이점, 즉 모세에 비해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강조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
는 사환으로서(5절) 자신을 세우신 이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그는 출애굽 직후 40일동안 시내 산상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그의 얼
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얼마간 간직했었다(출34:29-35;고후3:7). 그러나 그의
영광은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했다(고후3:7,13).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2:9) 하나님의 본체시며(빌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시므로(요
1:4,5,9) 모세가 받은 영광은 예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될 만한 영광스러
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 비유는 예수께서 모세보
다 더욱 영광받아야 하는 이유를 묘사한다. 본절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쿠’
(* )는 2절의 ‘온 집’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구원받은 무리’를 의미한
다. 모세는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하더라도 그 집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으나 예수는 그 집을 자신의 피로 세우신 분으로(행20:28) 그 집에 속해 있는
모세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이시다. 따라서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큰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3:4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서
언급한 ‘집 지은 자’와 연결된 변론임을 시사한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 본절의 상반절에 있
는 ‘집’은 하반절에서 ‘만물’로 대치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로 묘사된다(사40:28;45:7,LXX). ‘집’이 존재하는 것은 ‘집 지은이’가 존재함을 시사
하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3:5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
고 –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복음에 대하여 증
거하는 것이었다(Calvin). 즉 그는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전하는 소개자였
다. 한편 저자는 모세를 ‘사환’으로 표현한다. ‘사환’은 ‘종’의 의미를 가지는 말로
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며 70인역에서는 자주 모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출4:10;14:31;민11:11;12:7;신3:24;수1:2;8:31,33,LXX). 이 용어는 하나님과 친밀하
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위엄과 존귀를 지닌 ‘종’을 가리키나 동시에 여전히 ‘주
인’에 예속된 ‘종’임을 암시한다(Morris, Hewitt, Lane).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 모세는 비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
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
로서 충성하였다.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는 모세와 예수께서 충성
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저자는 모
세에게는 전치사 ‘엔'(* , ‘…안에서’)을 사용하여 ‘집에서’ 충성하였다고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에게는 ‘에피'(* , ‘위에’)를 사용하여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
였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결국 이것은 모세에 비해 그리스도께서 질적으로 우월하심
을 시사한다(Lane). 즉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탁월한 존재이긴 하였으나 본
질적으로는 일반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자이며 아들
로서 질적인 우월성을 갖는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 본절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의 충성스러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을 갖고 바라봄을 의미한다(Lane, Morris). 그리
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이 소망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담대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 )은 ‘신뢰’를 뜻한
다. 본래 ‘파르레시안’은 헬라 문화 속에서 헬라 시민들 상호간의 개방적이고도 솔직
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이런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하
나님 앞에서 개인 신앙의 ‘확신과 담대함’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다(Philo).
(2)자랑 – 이로 번역된 헬라어 ‘카우케마'(* )는 자랑하는 ‘행동’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이 되는 ‘내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성
도들이 갖는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을 뜻한다(Morris). 한편 ‘집’
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신약시대에서
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
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집’이다(2절).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으로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리라는 확신과 자랑스러
움을 인내 속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3:7
그러므로 – 헬라어 ‘디오'(* )는 8절의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에 연결된 것
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함을 시사한다
(Morris, Robertson, Lane).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 저자는 7-11절을 시95:7-11에서 인용하면서 이것을 성
령께서 하신 말씀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사실은 저자가 인용한 시편의 내용이 하나님
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있음을 시사한다(Hewitt).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본문은 선지자나 천사나 모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이란 의미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적인 복종과 아울러 즉각적인 행동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Hewitt, Morris).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의 지도로 출애굽할 때에 발생했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반역 행위를 나타낸다. 비
록 그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거나 거역한 적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
께서 세우신 그들의 지도자 모세에게 대적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반역하였다(출
14:10-14;15:24;16:2-9;17:1,2). 이스라엘 백성의 수많은 반역 중에서 본절의 내용이
말하는 반역은 출17:1-7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물이 부족하자 모세와 더불어 다투었던 사건이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물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는데 그 곳의 이름을 ‘맛
사’ 혹은 ‘므리바’라고 칭하였다(출17:7).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맛사’와 ‘므리바’라
는 지명(地名) 대신에 ‘격동'(* , 호 파라피크라스모스)과 ‘시험’
(* , 호 페이라스모스)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번역자가 시편
95:7-11을 번역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
지 못한 사실에 비추어 해석한 듯하다(Lane).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 본 구절의 ‘마음’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중심적
인 요소인 ‘속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벧전3:4) 인간의 ‘지성'(욥9:4;38:36;잠
10:8;11:29), ‘감정'(신28:47;삼상25:31;시34:18;사21:4;겔27:31)과 ‘의지'(4:12;시
64:6;잠6:18;전10:2;눅24:25;롬10:10;고전2:9;엡6:6)의 좌소(坐所)이다. 한편 ‘강퍅
케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스클레뤼네테'(* )에서 ‘메'(* )는 부
정어이며 ‘스클레뤼네테'(* )는 ‘말라서 굳은’, ‘딱딱한’의 뜻을 갖는 ‘스
클레로서'(* )에서 파생한 동사이다. 이 ‘강퍅함’은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
이적을 보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했던 것처럼(출9:35)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일절 거부하는 성향으로 굳어져 버린 인간의 심성을 가리킨다.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 ‘거기서’
(* , 후)는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방황했던 ‘광야’를 말한다. ‘나
를 시험하여 증험하고’의 헬라어 ‘에페이라산 엔 도키마시아'(*
)에서 ‘에페이라신’은 ‘시험하였다'(tested, NIV)의 뜻이며 ‘도키마시아’
는 ‘입증하는'(proving)의 뜻으로 본 구절의 뜻은 ‘입증하기 위하여 시험하였다'(tes-
ted in proving)라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그
대로 믿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로 하나님의 ‘행사'(* , 에르가)를 보고자 하였다.
사십년 동안에 – 맛소라 사본과 70인역에서는 이 40년을 하나님의 진노의 4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저자는 본절에서 70인역을 인용하면서도 이 40년을 하나님의 은
혜와 축복에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Lane, Schroger, Kistemaker). 이것은 저자가
진노의 40년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
셨음을에 초첨을 맞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본절을 구약성경에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동안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예수께서 죽임을 배척하는 태도에 양
자의 유사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Morris, Hewitt).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WWW)는
70인역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디오’를 본 인용문에 삽입함으로 시
편을 인용한 본절의 내용을 보다 명백히 하고 있다. 한편 ‘이 세대’가 가리키는 ‘세
대’는 문맥상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던 이스라엘 열조들을 가리
킨다(16절).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KJV, RSV, NIV)과 공동번역은 ‘그 세대'(that
generation)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에 대해 격노하셨다. ‘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
로소크디사'(* )는 ‘증오’ 혹은 ‘극도의 혐오’를 느끼는 감정을 의미하는
헬라적 용어로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뢰하지 않음과 강퍅한 마음에 대
해 얼마나 강하게 분노하셨는가를 암시한다(Delitzsch).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 ‘미혹되어’의 헬
라어 ‘플라논타이'(* )는 ‘방황하다’, ‘속다’, ‘잘못하다’라는 의미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음을 시사한
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無知)에 의해서가 아
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가르쳐주어 ‘하나님의 길’을 알게 해주었음에도 불구
하고 그들 스스로가 거부해 버렸음을 암시한다(Delitzsch, Moffatt).
=====3:11
내가 노하여 – ‘노하여’의 헬라어 ‘오르게'(* )는 10절의 ‘노하여'(*
, 프로스크디사)와는 다른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
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한다(Morris).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부함으
로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그에 상응하는 진노와 심판을 행하셨다.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 이 인용
구는 민14:21-23, 28-30절의 말씀과 유사한 것으로 특히 민 14:30의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와 일치를 보이고 있다. 하
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실 것을 맹세하셨다. 이러한 맹세와 심판은 그
들의 죄악에 대하여 정당하고도 적절한 보응이다(Lane). 한편 심판의 내용은 ‘안식’
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안식'(* , 카타파우신)이란 창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그후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의 규례가 제정되었다(출20:8). 출애굽 당
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신12:9).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 안식은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완성
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악의 세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의와 공평이
실현된 곳이다(행7:49;계14:13).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 ‘삼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레페테'(* )는 ‘조심
하라’는 의미로 ‘명령’임을 뜻한다.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 ‘너희 중에 누가’라는 표현으로 보아
저자는 성도들 중에 더러는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들어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음을 암시한다(Hewitt). 그들은 유대교에서도 기독교에서 섬기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므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배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
었다(Morris). 저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해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었다고 설명한
다. ‘믿지 아니하는'(* , 아피스티아스)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
닌 말로서 새로운 문단의 시작인 본절과 새 문단의 마지막 결론이 되는 19절에서 등장
하고 있다. 이 불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민14:11과 연관
된다(신1:32;9:32;시106:24). 또한 ‘악심’역시 민 14장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
악한 회중’이란 표현으로 두 번 나타난다(민14:27,35). 이와같은 민 14장에 대한 저
자의 암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민 14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믿음이
나 신뢰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거부’를 뜻하기
때문이다(Lane). 따라서 본절의 ‘믿지 아니함’도 믿음에 대한 부족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그것은 참으로 ‘악한’ 것임을 시사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 저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아계신’이란 수식어를 첨가하여 자주 사용하였다(9:14;10:31;12:22). 이 수식어는
죽어 있어서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할 수 없는 이방신들과 대조를 보이기 위하여 흔
히 사용된 문구였다(시115:4-8;사44:9-20;렘10:1-16;합2:19). 한편 ‘떨어지다’의 헬
라어 ‘아포스테나이'(* )는 ‘분리되다’, ‘떠나다’, ‘배신하다’라는 의미로
불신앙의 결과를 나타낸다. ‘믿는 형제들’ 가운데 소수가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인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으로 옛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과 비교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
과의 완전한 분리를 초래하는 행위이다(Bruce).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 ‘오늘'(* , 세메론)이
란 표현은 시95:7의 인용이다. 이것은 저자가 성경을 근거로 수신자들을 권면하고 있
음을 나타낸다. 본절의 ‘오늘’은 과거의 ‘오늘’ 즉 시편이 쓰여질 그 당시 상황에서
의 ‘오늘’이라기 보다는 성경과 사도들의 복음 전승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현재로서의 오늘’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시간의 긴박성을 암시한다. 저자
는 배교의 위험성이 있었던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게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는 긴박
감을 가지고 서로를 권면하여 경건한 삶을 이루어 가도록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로 인해 죄와 이단에 대해 방어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강퍅케 됨’의 헬라어
‘스클레륀데'(* )는 8절에 나오는 ‘스클레뤼노'(* )의 제1부정 과
거 수동태로서 저자는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하는 주체가 ‘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죄’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약속을 좇아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죄를
말한다(민14:19,34,LXX,Lane).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 이것은 본절 하반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여기서 ‘시작할 때’란 예수 그
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를 의미한다(Morris). ‘확실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
타세오스'(* )는 ‘본질’ 혹은 ‘정수’를 뜻하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확신’을
뜻한다(confidence, KJV, RSV, NIV, JB).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과 마찬가지로 구
약성경 민수기의 내용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에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떨어
져나가려고 했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민14:3,4), 수신자들로 하여금 조상들의 그러한
전철(前轍)을 밟지 말고 그들이 처음 가졌던 믿음의 확신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다
(Hofius, Lane).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
, 메토코이 투 크리스투)에서 헬라어 ‘메토코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시45:7의 인용이며 영원한 하늘나
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동료'(compan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fius, Bru-
ce). (2)혹자는 ‘메토코이’가 파피리 문서(the papyri)에서 일반적으로 쓰여진 ‘동반
자'(partner)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ane). (3)혹자는 ‘메토코이’가 그리스도 안에
서 ‘함께 나눈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to share in, NIV, RSV, Morris, Moffatt,
Hewi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
예한 자’란 그리스도를 믿어 낙심치 아니하며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할 자를 의미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을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인이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3:15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 본절은 시95:7,8의 인용이다. 본절과 전후절의 관련성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절이 지금까지 진술해 온 것에 대한 요약으로 앞절인 14절
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Morris, Lane, NIV). (2)혹자는 본절이 새로운 문단의 시작
으로서 다음절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Hofius). (2)의 견해로 본다면 16절 첫머리에
있는 접속사 ‘가르'(* , ‘왜냐하면’)에 대한 해석이 애매하게 된다. 따라서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 가데스의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수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Lane,
7,8절).
=====3: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 ‘격노케 하던’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크라난’
(* )은 ‘화나게 하다’, 혹은 ‘반역하다’라는 의미로 15절에서는 ‘노하
심'(* , 파라피크라스모스)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
성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지나는 도중에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불평하여 하나님
을 여러 번 진노케 한 사실을 나타낸다(Lane).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 본문의 강조점은 모세에게 있는 것
이 아니라 출애굽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의 음성을 ‘모두’듣고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친히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
에 봉착할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애굽을 그리워함으로 ‘모두’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 한편 ‘좇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 ‘…통하여’)는 모세가 이스
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끌어내었다(lead out of Egypt, NIV) 는 의미라기
보다는 ‘모세를 통하여(* , 디아 모위세오스)나왔다’는 의미이다. 이것
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애굽을 탈출하였음을 시사한다(Morris).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가서 다시 애굽을 탈출한 것을 후회하였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 본절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
성의 광야 40년 생활을 하나님의 진노로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연유된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40년의 광야 방랑 생활 속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40
년의 진노하에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
혜를 베푸셨다.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
진 자’란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나온 자들로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
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민 14:29,30,32). 이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를 대적하던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로서(Henry) 하나님의 현존과
약속을 불신앙하고 거부한 결과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과 답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이 출애굽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것과 같이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도 동일한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 본절은
민14:43의 반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그들의 불순종임
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도 않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시험
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출 5:21; 14:11;15:24;16:2;17
:2,3;32:1;민11:1,4;12:1;14:2,22,23).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믿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5:9;11:31;신30:20;롬1:5;6:17;
10:16;16:26;갈5:7). 이러한 불순종은 불신앙의 정점이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멸
시(민14:23)이며 반항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
하게 되는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Lane).
=====3:19
이로 보건대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블레포멘'(* )은 저자
가 지금까지 시편 95편에 대한 것을 해석한 결론임을 시사한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것이라 – 저자는 본절에서 이제까지 인
용하여 수신자들에게 제시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다.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불신앙’이다. ‘믿지 아니하므로'(*
, 아피스티안)는 비록 시편 95:7-11에는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으나 같은 내
용을 담고 있는 민14:11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
나님께 대항함으로 맞이하게 된 비참한 결과를 암시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기는 본서의 수신자들이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겼
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가데스에서의 조상들처럼 그들도
같은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헬라어 히브리서 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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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덴 아델포이 하기오이 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 메토코이 카타노에사테 톤 아포스톨론 카이 아르키에레아 테스 호몰로기아스 헤몬 예순
개역개정,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새번역,1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의 고백하는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 여러분, 우리 신앙 고백의 사도이며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어NIV,1 Therefore, holy brothers, who share in the heavenly calling, fix your thoughts on Jesus, the apostle and high priest whom we confess.
영어NASB,1 Therefore, holy brethren, partakers of a heavenly calling, consider Jesus, 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our confession.
영어MSG,1 So, my dear Christian friends, companions in following this call to the heights, take a good hard look at Jesus. He’s the centerpiece of everything we believe,
영어NRSV,1 Therefore, brothers and sisters, holy partners in a heavenly calling, consider that Jesus, 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our confession,
헬라어신약Stephanos,1 οθεν αδελφοι αγιοι κλησεως επουρανιου μετοχοι κατανοησατε τον αποστολον και αρχιερεα της ομολογιας ημων χριστον ιησουν
라틴어Vulgate,1 unde fratres sancti vocationis caelestis participes considerate apostolum et pontificem confessionis nostrae Iesum
히브리어Modern,1 לכן אחי הקדושים חברים לקריאה של מעלה הביטו אל השליח וכהן הודיתנו הגדול אל המשיח ישוע׃
성 경: [히3:1]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8:5;9:23;11:16;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19:6;벧전2:9,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두 가지 칭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나(마10:40;눅10:16;요4:34;5:23,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1)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b.Qidd.23b;Ned.35b;Yoma19a-b).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 ‘사도’)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2)’사도’라는 호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3:10,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대제사장 – 신약성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Hewitt).
피스톤 온타 토 포이에산티 아우톤 호스 카이 모위세스 엔 홀론 토 오이코 아우투
개역개정,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새번역,2 이 예수는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안에 성실했던 것과 같이, 자기를 세우신 분께 성실하셨습니다.
우리말성경,2 그분은 자신을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기를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 모세가 “하느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었듯이” ,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세우신 분께 충실하셨습니다.
영어NIV,2 He was faithful to the one who appointed him, just as Moses was faithful in all God’s house.
영어NASB,2 He was faithful to Him who appointed Him, as Moses also was in all His house.
영어MSG,2 faithful in everything God gave him to do. Moses was also faithful,
영어NRSV,2 was faithful to the one who appointed him, just as Moses also “was faithful in all God’s house.”
헬라어신약Stephanos,2 πιστον οντα τω ποιησαντι αυτον ως και μωσης εν ολω τω οικω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qui fidelis est ei qui fecit illum sicut et Moses in omni domo illius
히브리어Modern,2 אשר הוא נאמן לעשהו כמו גם משה בכל ביתו׃
성 경: [히3:2]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한 것과 같으니 –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충성과 모세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다. 민12:7에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온 집을 맡은 충성된 청지기로서 인정받은 것을 나타낸다. 모세는 예수님과 같이 완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 중의 하나인 모세를 충성된 자로 인정하면서 3절이하에서는 예수를 보다 우월한 자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혹자의 기적대로 저자가 2:9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는 예수를 보니’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의 충성을 인정한 증거라고 할수 있다(Hewitt).
하나님의 온 집에서 –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는 ‘가족’, ‘가문’ 혹은 ‘재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느1:6)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킨다(엡2:21,22;딤전3:15;딤후2:20;벧전4:17). 따라서 ‘하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권속을 뜻한다. 한편 ‘온’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로'(*)는 모세의 충성과 예수의 충성 사이의 차이점을 암시한다. 모세와 같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종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에게 충성하였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전 영역에서 온전하게 충성하였음을 시사한다(Morris).
플레이오노스 가르 후토스 돜세스 파라 모위센 엨시오타이 칻 호손 플레이오나 티멘 에케이 투 오이쿠 호 카타스큐아사스 아우톤
개역개정,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새번역,3 집을 지은 사람이 집보다 더 존귀한 것과 같이, 예수는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우리말성경,3 그러나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존귀한 것같이 그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가톨릭성경,3 그러나 집을 지은 이가 집보다 더 존귀하듯이, 예수님도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셔야 마땅합니다.
영어NIV,3 Jesus has been found worthy of greater honor than Moses, just as the builder of a house has greater honor than the house itself.
영어NASB,3 For He has been counted worthy of more glory than Moses, by just so much as the builder of the house has more honor than the house.
영어MSG,3 but Jesus gets far more honor. A builder is more valuable than a building any day.
영어NRSV,3 Yet Jesus is worthy of more glory than Moses, just as the builder of a house has more honor than the house itself.
헬라어신약Stephanos,3 πλειονος γαρ δοξης ουτος παρα μωσην ηξιωται καθ οσον πλειονα τιμην εχει του οικου ο κατασκευασα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3 amplioris enim gloriae iste prae Mose dignus habitus est quanto ampliorem honorem habet domus qui fabricavit illam
히브리어Modern,3 כי כבוד גדול ממשה נחל זה כאשר בנה הבית חשוב יותר מן הבית׃
성 경: [히3:3]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 저자는 2절에서 예수와 모세가 서로 ‘충성되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와 모세의 차이점, 즉 모세에 비해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강조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환으로서(5절) 자신을 세우신 이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그는 출애굽 직후 40일동안 시내 산상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얼마간 간직했었다(출34:29-35;고후3:7). 그러나 그의 영광은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했다(고후3:7,13).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2:9) 하나님의 본체시며(빌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시므로(요1:4,5,9) 모세가 받은 영광은 예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될 만한 영광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 비유는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욱 영광받아야 하는 이유를 묘사한다. 본절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쿠'(*)는 2절의 ‘온 집’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구원받은 무리’를 의미한다. 모세는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하더라도 그 집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으나 예수는 그 집을 자신의 피로 세우신 분으로(행20:28) 그 집에 속해 있는 모세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이시다. 따라서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큰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파스 가르 오이코스 카타스큐아제타이 휘포 티노스 호 데 판타 카타스큐아사스 데오스
개역개정,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새번역,4 어떠한 집이든지 어떤 사람이 짓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말성경,4 집마다 누군가 지은 사람이 있듯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톨릭성경,4 어떤 집이든 그것을 지은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영어NIV,4 For every house is built by someone, but God is the builder of everything.
영어NASB,4 For every house is built by someone, but the builder of all things is God.
영어MSG,4 Every house has a builder, but the Builder behind them all is God.
영어NRSV,4 (For every house is built by someone, but the builder of all things is God.)
헬라어신약Stephanos,4 πας γαρ οικος κατασκευαζεται υπο τινος ο δε τα παντα κατασκευασας θεος
라틴어Vulgate,4 omnis namque domus fabricatur ab aliquo qui autem omnia creavit Deus
히브리어Modern,4 כי כל בית יש לו בנה אבל בונה כל הוא האלהים׃
성 경: [히3:4]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서언급한 ‘집 지은 자’와 연결된 변론임을 시사한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 본절의 상반절에 있는 ‘집’은 하반절에서 ‘만물’로 대치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 묘사된다(사40:28;45:7,LXX). ‘집’이 존재하는 것은 ‘집 지은이’가 존재함을 시사하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카이 모위세스 멘 피스토스 엔 홀로 토 오이코 아우투 호스 데라폰 에이스 마르튀리온 톤 랄레데소메논
개역개정,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새번역,5 모세는, 하나님께서 장차 말씀하시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온 집안 사람에게 성실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5 또한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가톨릭성경,5 모세는 하느님께서 장차 말씀하시려는 것을 증언하려고, “종” 으로서 “그분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었습니다.”
영어NIV,5 Moses was faithful as a servant in all God’s house, testifying to what would be said in the future.
영어NASB,5 Now Moses was faithful in all His house as a servant, for a testimony of those things which were to be spoken later;
영어MSG,5 Moses did a good job in God’s house, but it was all servant work, getting things ready for what was to come.
영어NRSV,5 Now Moses was faithful in all God’s house as a servant, to testify to the things that would be spoken later.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ι μωσης μεν πιστος εν ολω τω οικω αυτου ως θεραπων εις μαρτυριον των λαληθησομενων
라틴어Vulgate,5 et Moses quidem fidelis erat in tota domo eius tamquam famulus in testimonium eorum quae dicenda erant
히브리어Modern,5 והן משה נאמן בכל ביתו כעבד לעדות העמדות להאמר׃
성 경: [히3:5]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었다(Calvin). 즉 그는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전하는 소개자였다. 한편 저자는 모세를 ‘사환’으로 표현한다. ‘사환’은 ‘종’의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며 70인역에서는 자주 모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출4:10;14:31;민11:11;12:7;신3:24;수1:2;8:31,33,LXX). 이 용어는 하나님과 친밀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위엄과 존귀를 지닌 ‘종’을 가리키나 동시에 여전히 ‘주인’에 예속된 ‘종’임을 암시한다(Morris, Hewitt, Lane).
크리스토스 데 호스 휘오스 에피 톤 오이콘 아우투 후 오이코스 에스멘 헤메이스 에안페르 텐 파르레시안 카이 토 카우케마 테스 엘피도스 카타스코멘
개역개정,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새번역,6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안 사람을 성실하게 돌보셨습니다. 우리가 그 소망에 대하여 확신과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 사람입니다.
우리말성경,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충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긍지를 굳게 잡으면 우리는 곧 그분의 가족입니다.
가톨릭성경,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집안입니다. 우리의 희망에 대하여 확신과 긍지를 굳게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영어NIV,6 But Christ is faithful as a son over God’s house. And we are his house, if we hold on to our courage and the hope of which we boast.
영어NASB,6 but Christ was faithful as a Son over His house whose house we are, if we hold fast our confidence and the boast of our hope firm until the end.
영어MSG,6 Christ as Son is in charge of the house. Now, if we can only keep a firm grip on this bold confidence, we’re the house!
영어NRSV,6 Christ, however, was faithful over God’s house as a son, and we are his house if we hold firm the confidence and the pride that belong to hope.
헬라어신약Stephanos,6 χριστος δε ως υιος επι τον οικον αυτου ου οικος εσμεν ημεις εανπερ την παρρησιαν και το καυχημα της ελπιδος μεχρι τελους βεβαιαν κατασχωμεν
라틴어Vulgate,6 Christus vero tamquam filius in domo sua quae domus sumus nos si fiduciam et gloriam spei usque ad finem firmam retineamus
히브리어Modern,6 אבל המשיח הוא הבן על ביתו ואנחנו ביתו אם נחזיק בבטחון ובתהלת התקוה ולא נרפנה עד הקץ׃
성 경: [히3:6]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 모세는 비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충성하였다.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는 모세와 예수께서 충성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저자는 모세에게는 전치사 ‘엔'(*, ‘…안에서’)을 사용하여 ‘집에서’ 충성하였다고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에게는 ‘에피'(*, ‘위에’)를 사용하여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결국 이것은 모세에 비해 그리스도께서 질적으로 우월하심을 시사한다(Lane). 즉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탁월한 존재이긴 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일반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자이며 아들로서 질적인 우월성을 갖는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 본절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의 충성스러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을 갖고 바라봄을 의미한다(Lane, Morris).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이 소망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담대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신뢰’를 뜻한다. 본래 ‘파르레시안’은 헬라 문화 속에서 헬라 시민들 상호간의 개방적이고도 솔직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하나님 앞에서 개인 신앙의 ‘확신과 담대함’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다(Philo). (2)자랑 – 이로 번역된 헬라어 ‘카우케마'(*)는 자랑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이 되는 ‘내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이 갖는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을 뜻한다(Morris). 한편 ‘집’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신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집’이다(2절).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리라는 확신과 자랑스러움을 인내 속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디오 카도스 레게이 토 프뉴마 토 하기온 세메론 에안 테스 포네스 아우투 아쿠세테
개역개정,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새번역,7 그러므로 성령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시 95:7-11(칠십인역)
우리말성경,7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으면
가톨릭성경,7 그러므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영어NIV,7 So, as the Holy Spirit says: “Today, if you hear his voice,
영어NASB,7 Therefore, just as the Holy Spirit says, “TODAY IF YOU HEAR HIS VOICE,
영어MSG,7 That’s why the Holy Spirit says, Today, please listen;
영어NRSV,7 Therefore, as the Holy Spirit says, “Today, if you hear his voice,
헬라어신약Stephanos,7 διο καθως λεγει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ον σημερον εαν της φωνης αυτου ακουσητε
라틴어Vulgate,7 quapropter sicut dicit Spiritus Sanctus hodie si vocem eius audieritis
히브리어Modern,7 לכן כמאמר רוח הקדש היום אם בקלו תשמעו׃
성 경: [히3:7]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그러므로 – 헬라어 ‘디오'(*)는 8절의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에 연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함을 시사한다(Morris, Robertson, Lane).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 저자는 7-11절을 시95:7-11에서 인용하면서 이것을 성령께서 하신 말씀으로 설명하였다. 이런 사실은 저자가 인용한 시편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있음을 시사한다(Hewitt).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본문은 선지자나 천사나 모세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든’이란 의미로 수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아울러 즉각적인 행동을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Hewitt, Morris).
메 스클레뤼네테 타스 카르디아스 휘몬 호스 엔 토 파라피크라스모 카타 텐 헤메란 투 페이라스무 엔 테 에레모
개역개정,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새번역,8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받던 날에 반역한 것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우리말성경,8 광야에서 시험받던 날에 반역한 것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가톨릭성경,8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처럼 반항하던 때처럼.
영어NIV,8 do not harden your hearts as you did in the rebellion, during the time of testing in the desert,
영어NASB,8 DO NOT HARDEN YOUR HEARTS AS WHEN THEY PROVOKED ME, AS IN THE DAY OF TRIAL IN THE WILDERNESS,
영어MSG,8 don’t turn a deaf ear as in “the bitter uprising,” that time of wilderness testing!
영어NRSV,8 do not harden your hearts as in the rebellion, as on the day of testing in the wilderness,
헬라어신약Stephanos,8 μη σκληρυνητε τας καρδιας υμων ως εν τω παραπικρασμω κατα την ημεραν του πειρασμου εν τη ερημω
라틴어Vulgate,8 nolite obdurare corda vestra sicut in exacerbatione secundum diem temptationis in deserto
히브리어Modern,8 אל תקשו לבבכם כמריבה כיום מסה במדבר׃
성 경: [히3:8]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로 출애굽할 때에 발생했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반역 행위를 나타낸다. 비록 그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반항하거나 거역한 적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들의 지도자 모세에게 대적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반역하였다(출14:10-14;15:24;16:2-9;17:1,2). 이스라엘 백성의 수많은 반역 중에서 본절의 내용이 말하는 반역은 출17:1-7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때 물이 부족하자 모세와 더불어 다투었던 사건이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물을 주기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호렙산의 반석을 쳐서 물을 내었는데 그 곳의 이름을 ‘맛사’ 혹은 ‘므리바’라고 칭하였다(출17:7).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맛사’와 ‘므리바’라는 지명(地名) 대신에 ‘격동'(*, 호 파라피크라스모스)과 ‘시험'(*, 호 페이라스모스)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번역자가 시편95:7-11을 번역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에 비추어 해석한 듯하다(Lane).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 본 구절의 ‘마음’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중심적인 요소인 ‘속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벧전3:4) 인간의 ‘지성'(욥9:4;38:36;잠10:8;11:29), ‘감정'(신28:47;삼상25:31;시34:18;사21:4;겔27:31)과 ‘의지'(4:12;시64:6;잠6:18;전10:2;눅24:25;롬10:10;고전2:9;엡6:6)의 좌소(坐所)이다. 한편 ‘강퍅케 하지 말라’의 헬라어 ‘메 스클레뤼네테'(*)에서 ‘메'(*)는 부정어이며 ‘스클레뤼네테'(*)는 ‘말라서 굳은’, ‘딱딱한’의 뜻을 갖는 ‘스클레로서'(*)에서 파생한 동사이다. 이 ‘강퍅함’은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이적을 보면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했던 것처럼(출9:35)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일절 거부하는 성향으로 굳어져 버린 인간의 심성을 가리킨다.
후 에페이라산 호이 파테레스 휘몬 엔 도키마시아 카이 에이돈 타 에르가 무
개역개정,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새번역,9 거기에서 그들은 나를 시험하여 보았고, 사십 년 동안이나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았다.
우리말성경,9 너희 조상들이 거기서 40년 동안 나를 불신해 시험했다. 또한 내가 행한 일들을 보았다.
가톨릭성경,9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며 시험하였다.
영어NIV,9 where your fathers tested and tried me and for forty years saw what I did.
영어NASB,9 WHERE YOUR FATHERS TRIED Me BY TESTING Me, AND SAW MY WORKS FOR FORTY YEARS.
영어MSG,9 Even though they watched me at work for forty years, your ancestors refused to let me do it my way; over and over they tried my patience.
영어NRSV,9 where your ancestors put me to the test, though they had seen my works
헬라어신약Stephanos,9 ου επειρασαν με οι πατερες υμων εδοκιμασαν με και ειδον τα εργα μου τεσσαρακοντα ετη
라틴어Vulgate,9 ubi temptaverunt me patres vestri probaverunt et viderunt opera mea
히브리어Modern,9 אשר נסוני אבותיכם בחנוני גם ראו פעלי ארבעים שנה׃
성 경: [히3:9]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 ‘거기서'(*, 후)는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방황했던 ‘광야’를 말한다.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의 헬라어 ‘에페이라산 엔 도키마시아'(*)에서 ‘에페이라신’은 ‘시험하였다'(tested, NIV)의 뜻이며 ‘도키마시아’는 ‘입증하는'(proving)의 뜻으로 본 구절의 뜻은 ‘입증하기 위하여 시험하였다'(tes-ted in proving)라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그대로 믿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로 하나님의 ‘행사'(*, 에르가)를 보고자 하였다.
사십년 동안에 – 맛소라 사본과 70인역에서는 이 40년을 하나님의 진노의 4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저자는 본절에서 70인역을 인용하면서도 이 40년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Lane, Schroger, Kistemaker). 이것은 저자가 진노의 40년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음을에 초첨을 맞추고 있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본절을 구약성경에서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동안 하나님을 거역한 것과 예수께서 죽임을 배척하는 태도에 양자의 유사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Morris, Hewitt).
테쎄라콘타 에테 디오 프로소크디사 테 게네아 타우테 카이 에이폰 아에이 플라논타이 테 카르디아 아우토이 데 우크 에그노산 타스 호두스 무
개역개정,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새번역,10 그러므로 나는 그 세대에게 분노해서 말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마음이 미혹되어서 내 길을 알지 못하였다.’
우리말성경,10 그러므로 내가 진노해 그 세대를 향해 말했다. ‘그들은 항상 마음이 미혹돼 내 길들을 알지 못했다.’
가톨릭성경,10 사십 년 동안 그리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세대에게 화가 나 말하였다. ‘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영어NIV,10 That is why I was angry with that generation, and I said, ‘Their hearts are always going astray, and they have not known my ways.’
영어NASB,10 “THEREFORE I WAS ANGRY WITH THIS GENERATION, AND SAID, ‘THEY ALWAYS GO ASTRAY IN THEIR HEART; AND THEY DID NOT KNOW MY WAYS’;
영어MSG,10 And I was provoked, oh, so provoked! I said, “They’ll never keep their minds on God; they refuse to walk down my road.”
영어NRSV,10 for forty years. Therefore I was angry with that generation, and I said, ‘They always go astray in their hearts, and they have not known my way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διο προσωχθισα τη γενεα εκεινη και ειπον αει πλανωνται τη καρδια αυτοι δε ουκ εγνωσαν τας οδους μου
라틴어Vulgate,10 quadraginta annos propter quod infensus fui generationi huic et dixi semper errant corde ipsi autem non cognoverunt vias meas
히브리어Modern,10 לכן אקוט בדור ואמר עם תעי לבב הם והם לא ידעו דרכי׃
성 경: [히3:10]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는 70인역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디오’를 본 인용문에 삽입함으로 시편을 인용한 본절의 내용을 보다 명백히 하고 있다. 한편 ‘이 세대’가 가리키는 ‘세대’는 문맥상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했던 이스라엘 열조들을 가리킨다(16절).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KJV, RSV, NIV)과 공동번역은 ‘그 세대'(thatgeneration)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을 하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한 마음에 대해 격노하셨다. ‘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소크디사'(*)는 ‘증오’ 혹은 ‘극도의 혐오’를 느끼는 감정을 의미하는 헬라적 용어로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뢰하지 않음과 강퍅한 마음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분노하셨는가를 암시한다(Delitzsch).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 ‘미혹되어’의 헬라어 ‘플라논타이'(*)는 ‘방황하다’, ‘속다’, ‘잘못하다’라는 의미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無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가르쳐주어 ‘하나님의 길’을 알게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가 거부해 버렸음을 암시한다(Delitzsch, Moffatt).
호스 오모사 엔 테 오르게 무 에이 에이셀류손타이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 무
개역개정,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새번역,11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1 내가 진노해 맹세한 것처럼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시95:7-11
가톨릭성경,11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영어NIV,11 So I declared on oath in my anger, ‘They shall never enter my rest.'”
영어NASB,11 AS I SWORE IN MY WRATH, ‘THEY SHALL NOT ENTER MY REST.’ ”
영어MSG,11 Exasperated, I vowed, “They’ll never get where they’re going, never be able to sit down and rest.”
영어NRSV,11 As in my anger I swore, ‘They will not enter my rest.'”
헬라어신약Stephanos,11 ως ωμοσα εν τη οργη μου ει εισελευσονται εις την καταπαυσιν μου
라틴어Vulgate,11 sicut iuravi in ira mea si introibunt in requiem meam
히브리어Modern,11 אשר נשבעתי באפי אם יבאון אל מנוחתי׃
성 경: [히3:11]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내가 노하여 – ‘노하여’의 헬라어 ‘오르게'(*)는 10절의 ‘노하여'(*, 프로스크디사)와는 다른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한다(Morris).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부함으로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그에 상응하는 진노와 심판을 행하셨다.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 이 인용구는 민14:21-23, 28-30절의 말씀과 유사한 것으로 특히 민 14:30의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와 일치를 보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실 것을 맹세하셨다. 이러한 맹세와 심판은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정당하고도 적절한 보응이다(Lane). 한편 심판의 내용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안식'(*, 카타파우신)이란 창 2:2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그후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의 규례가 제정되었다(출20:8).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다(신12:9). 그러나 신약시대에 이 안식은 영적인 의미의 안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악의 세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의와 공평이 실현된 곳이다(행7:49;계14:13).
블레페테 아델포이 메포테 에스타이 엔 티니 휘몬 카르디아 포네라 아피스티아스 엔 토 아포스테나이 아포 데우 존토스
개역개정,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새번역,12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2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려는 악한 불신의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가톨릭성경,12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영어NIV,12 See to it, brothers, that none of you has a sinful, unbelieving heart that turns away from the living God.
영어NASB,12 Take care, brethren, that there not be in any one of you an evil, unbelieving heart that falls away from the living God.
영어MSG,12 So watch your step, friends. Make sure there’s no evil unbelief lying around that will trip you up and throw you off course, diverting you from the living God.
영어NRSV,12 Take care, brothers and sisters, that none of you may have an evil, unbelieving heart that turns away from the living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βλεπετε αδελφοι μηποτε εσται εν τινι υμων καρδια πονηρα απιστιας εν τω αποστηναι απο θεου ζωντος
라틴어Vulgate,12 videte fratres ne forte sit in aliquo vestrum cor malum incredulitatis discedendi a Deo vivo
히브리어Modern,12 ראו עתה אחי פן יש באחד מכם לב רע וחסר אמונה לסור מאלהים חיים׃
성 경: [히3:12]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 ‘삼가’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레페테'(*)는 ‘조심하라’는 의미로 ‘명령’임을 뜻한다.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 ‘너희 중에 누가’라는 표현으로 보아 저자는 성도들 중에 더러는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고 유대교로 들어갈 위험성이 있다는것을 인식하였음을 암시한다(Hewitt). 그들은 유대교에서도 기독교에서 섬기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므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배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Morris). 저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해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었다고 설명한다. ‘믿지 아니하는'(*, 아피스티아스)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로서 새로운 문단의 시작인 본절과 새 문단의 마지막 결론이 되는 19절에서 등장하고 있다. 이 불신앙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민14:11과 연관된다(신1:32;9:32;시106:24). 또한 ‘악심’역시 민 14장의 영향을 반영한 것으로 ‘이악한 회중’이란 표현으로 두 번 나타난다(민14:27,35). 이와같은 민 14장에 대한 저자의 암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민 14장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믿음이나 신뢰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거부’를 뜻하기 때문이다(Lane). 따라서 본절의 ‘믿지 아니함’도 믿음에 대한 부족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며 그것은 참으로 ‘악한’ 것임을 시사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 저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에 대해 ‘살아계신’이란 수식어를 첨가하여 자주 사용하였다(9:14; 10:31;12:22). 이 수식어는 죽어 있어서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할 수 없는 이방신들과 대조를 보이기 위하여 흔히 사용된 문구였다(시115:4-8;사44:9-20;렘10:1-16;합2:19). 한편 ‘떨어지다’의 헬라어 ‘아포스테나이'(*)는 ‘분리되다’, ‘떠나다’, ‘배신하다’라는 의미로 불신앙의 결과를 나타낸다. ‘믿는 형제들’ 가운데 소수가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다시 돌아가려는 것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인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것으로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과 비교될 수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분리를 초래하는 행위이다(Bruce).
알라 파라칼레이테 헤아우투스 칻 헤카스텐 헤메란 아크리스 후 토 세메론 칼레이타이 히나 메 스클레륀데 티스 엨스 휘몬 아파테 테스 하마르티아스
개역개정,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새번역,13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말성경,13 도리어 아직 ‘오늘’이라 일컬을 수 있는 그날그날에 여러분 가운데 누구라도 죄의 속임수로 완고해지지 않도록 서로를 격려하십시오.
가톨릭성경,13 “오늘” 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영어NIV,13 But encourage one another daily, as long as it is called Today, so that none of you may be hardened by sin’s deceitfulness.
영어NASB,13 But encourage one another day after day, as long as it is still called “Today,” so that none of you will be hardened by the deceitfulness of sin.
영어MSG,13 For as long as it’s still God’s Today, keep each other on your toes so sin doesn’t slow down your reflexes.
영어NRSV,13 But exhort one another every day, as long as it is called “today,” so that none of you may be hardened by the deceitfulness of sin.
헬라어신약Stephanos,13 αλλα παρακαλειτε εαυτους καθ εκαστην ημεραν αχρις ου το σημερον καλειται ινα μη σκληρυνθη τις εξ υμων απατη της αμαρτιας
라틴어Vulgate,13 sed adhortamini vosmet ipsos per singulos dies donec hodie cognominatur ut non obduretur quis ex vobis fallacia peccati
히브리어Modern,13 אך הוכח תוכיחו איש את רעהו יום יום עד שיקרא היום למען אשר לא יקשה איש מכם את לבו במדוחי פשע׃
성 경: [히3:13]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 ‘오늘'(*, 세메론)이란 표현은 시95:7의 인용이다. 이것은 저자가 성경을 근거로 수신자들을 권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본절의 ‘오늘’은 과거의 ‘오늘’ 즉 시편이 쓰여질 그 당시 상황에서의 ‘오늘’이라기 보다는 성경과 사도들의 복음 전승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현재로서의 오늘’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시간의 긴박성을 암시한다. 저자는 배교의 위험성이 있었던 당시 유대인 공동체에게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는 긴박감을 가지고 서로를 권면하여 경건한 삶을 이루어 가도록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통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그로 인해 죄와 이단에 대해 방어할 수있는 힘을 얻게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강퍅케 됨’의 헬라어 ‘스클레륀데'(*)는 8절에 나오는 ‘스클레뤼노'(*)의 제1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저자는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하는 주체가 ‘죄’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죄’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의 약속을 좇아 행동하기를 거부하는 죄를 말한다(민14:19,34,LXX,Lane).
메토코이 가르 투 크리스투 게고나멘 에안페르 텐 아르켄 테스 휘포스타세오스 메크리 텔루스 베바이안 카타스코멘
개역개정,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새번역,14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4 이는 우리가 처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4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영어NIV,14 We have come to share in Christ if we hold firmly till the end the confidence we had at first.
영어NASB,14 For we have become partakers of Christ, if we hold fast the beginning of our assurance firm until the end;
영어MSG,14 If we can only keep our grip on the sure thing we started out with, we’re in this with Christ for the long haul.
영어NRSV,14 For we have become partners of Christ, if only we hold our first confidence firm to the en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μετοχοι γαρ γεγοναμεν του χριστου εανπερ την αρχην της υποστασεως μεχρι τελους βεβαιαν κατασχωμεν
라틴어Vulgate,14 participes enim Christi effecti sumus si tamen initium substantiae usque ad finem firmum retineamus
히브리어Modern,14 כי נתחברנו למשיח אם נחזיק בראשית הבטחה ולא נרפנה עד הקץ׃
성 경: [히3:14]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 이것은 본절 하반절의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다. 여기서 ‘시작할 때’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를 의미한다(Morris). ‘확실한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세오스'(*)는 ‘본질’ 혹은 ‘정수’를 뜻하는 것으로 본절에서는 ‘확신’을 뜻한다(confidence, KJV, RSV, NIV, JB).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 민수기의 내용 즉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렀을때에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려고 했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민14:3,4), 수신자들로 하여금 조상들의 그러한 전철(前轍)을 밟지 말고 그들이 처음 가졌던 믿음의 확신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한다(Hofius, Lane).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 메토코이 투 크리스투)에서 헬라어 ‘메토코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있다. (1)혹자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시45:7의 인용이며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동료'(companion)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ofius, Bru-ce). (2)혹자는 ‘메토코이’가 파피리 문서(the papyri)에서 일반적으로 쓰여진 ‘동반자'(partner)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Lane). (3)혹자는 ‘메토코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눈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to share in, NIV, RSV, Morris, Moffatt, Hewitt).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란 그리스도를 믿어 낙심치 아니하며 그와 함께 하늘나라를 상속할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일을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얻게 되는 특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엔 토 레게스다이 세메론 에안 테스 포네스 아우투 아쿠세테 메 스클레뤼네테 타스 카르디아스 휘몬 호스 엔 토 파라피크라스모
개역개정,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새번역,15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반역하던 때와 같이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 ㉣시 95:7; 8
우리말성경,15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들으면 광야에서 시험받던 날에 반역한 것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때 시95:7-8
가톨릭성경,15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반항하던 때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하셨는데,
영어NIV,15 As has just been said: “Today, if you hear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 as you did in the rebellion.”
영어NASB,15 while it is said, “TODAY IF YOU HEAR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 AS WHEN THEY PROVOKED ME.”
영어MSG,15 These words keep ringing in our ears: Today, please listen; don’t turn a deaf ear as in the bitter uprising.
영어NRSV,15 As it is said, “Today, if you hear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 as in the rebellio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εν τω λεγεσθαι σημερον εαν της φωνης αυτου ακουσητε μη σκληρυνητε τας καρδιας υμων ως εν τω παραπικρασμω
라틴어Vulgate,15 dum dicitur hodie si vocem eius audieritis nolite obdurare corda vestra quemadmodum in illa exacerbatione
히브리어Modern,15 כאשר נאמר היום אם בקלו תשמעו אל תקשו לבבכם כמריבה׃
성 경: [히3:15]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하지 말라 – 본절은 시95:7,8의 인용이다. 본절과 전후절의 관련성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절이 지금까지 진술해 온 것에 대한 요약으로 앞절인 14절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Morris, Lane, NIV). (2)혹자는 본절이 새로운 문단의 시작으로서 다음절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Hofius). (2)의 견해로 본다면 16절 첫머리에 있는 접속사 ‘가르'(*, ‘왜냐하면’)에 대한 해석이 애매하게 된다. 따라서 두가지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하다. 저자는 본절의 인용문을 통해 가데스의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수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Lane,7,8절).
니테스 가르 아쿠산테스 파레피크라난 알 우 판테스 호이 엨셀돈테스 엨스 아이귚투 디아 모위세오스
개역개정,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새번역,16 듣고서도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 모두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말성경,16 듣고도 반역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이 아닙니까?
가톨릭성경,16 듣고도 반항한 자들은 누구였습니까? 모두 모세의 인도를 받아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영어NIV,16 Who were they who heard and rebelled? Were they not all those Moses led out of Egypt?
영어NASB,16 For who provoked Him when they had heard? Indeed, did not all those who came out of Egypt led by Moses?
영어MSG,16 For who were the people who turned a deaf ear? Weren’t they the very ones Moses led out of Egypt?
영어NRSV,16 Now who were they who heard and yet were rebellious? Was it not all those who left Egypt under the leadership of Moses?
헬라어신약Stephanos,16 τινες γαρ ακουσαντες παρεπικραναν αλλ ου παντες οι εξελθοντες εξ αιγυπτου δια μωσεως
라틴어Vulgate,16 quidam enim audientes exacerbaverunt sed non universi qui profecti sunt ab Aegypto per Mosen
히브리어Modern,16 מי אפוא אלה אשר שמעו ויריבו הלא כל יצאי מצרים ביד משה׃
성 경: [히3:16]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 ‘격노케 하던’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크라난'(*)은 ‘화나게 하다’, 혹은 ‘반역하다’라는 의미로 15절에서는 ‘노하심'(*, 파라피크라스모스)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지나는 도중에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불평하여 하나님을 여러 번 진노케 한 사실을 나타낸다(Lane).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 본문의 강조점은 모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모두’듣고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친히 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애굽을 그리워함으로 ‘모두’가 하나님을 격노케하였다. 한편 ‘좇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통하여’)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이끌어내었다(lead out of Egypt, NIV) 는 의미라기보다는 ‘모세를 통하여(*, 디아 모위세오스)나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원해서 애굽을 탈출하였음을 시사한다(Morris). 그러나 그들은 얼마 못가서 다시 애굽을 탈출한 것을 후회하였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티신 데 프로소크디센 테쎄라콘타 에테 우키 토이스 하마르테사신 혼 타 콜라 에페센 엔 테 에레모
개역개정,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새번역,17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죄를 짓고, 시체가 되어서 광야에 쓰러진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말성경,17 또 하나님께서 40년 동안 누구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죄를 저지르고 시체가 돼 광야에 쓰러진 사람들에게 아닙니까?
가톨릭성경,17 또 하느님께서는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화가 나셨습니까? 죄를 지은 사람들, 시체가 되어 광야에 쓰러진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영어NIV,17 And with whom was he angry for forty years? Was it not with those who sinned, whose bodies fell in the desert?
영어NASB,17 And with whom was He angry for forty years? Was it not with those who sinned, whose bodies fell in the wilderness?
영어MSG,17 And who was God provoked with for forty years? Wasn’t it those who turned a deaf ear and ended up corpses in the wilderness?
영어NRSV,17 But with whom was he angry forty years? Was it not those who sinned, whose bodies fell in the wilder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7 τισιν δε προσωχθισεν τεσσαρακοντα ετη ουχι τοις αμαρτησασιν ων τα κωλα επεσεν εν τη ερημω
라틴어Vulgate,17 quibus autem infensus est quadraginta annos nonne illis qui peccaverunt quorum cadavera prostrata sunt in deserto
히브리어Modern,17 ובמי התקוטט ארבעים שנה הלא בחטאים אשר נפלו פגריהם במדבר׃
성 경: [히3:17]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 본절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생활을 하나님의 진노로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연유된 하나님의 진노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40년의 광야 방랑 생활 속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 40년의 진노하에서도 끊임없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란 출애굽 당시 애굽에서 모세의 인도로 나온 자들로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민 14:29,30,32). 이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를 대적하던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로서(Henry) 하나님의 현존과 약속을 불신앙하고 거부한 결과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과 답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통해 구원의 은총을 체험한 것과 같이 수신자인 유대인 공동체도 동일한구원의 은총을 체험하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 것을 암시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티신 데 오모센 메 에이셀류세스다이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 아우투 에이 메 토이스 아페이데사신
개역개정,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새번역,18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말성경,18 또한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까? 불순종한 사람들이 아니고 누구입니까?
가톨릭성경,18 또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 당신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그 사람들이 아닙니까?
영어NIV,18 And to whom did God swear that they would never enter his rest if not to those who disobeyed?
영어NASB,18 And to whom did He swear that they should not enter His rest, but to those who were disobedient?
영어MSG,18 And when he swore that they’d never get where they were going, wasn’t he talking to the ones who turned a deaf ear?
영어NRSV,18 And to whom did he swear that they would not enter his rest, if not to those who were disobedient?
헬라어신약Stephanos,18 τισιν δε ωμοσεν μη εισελευσεσθαι εις την καταπαυσιν αυτου ει μη τοις απειθησασιν
라틴어Vulgate,18 quibus autem iuravit non introire in requiem ipsius nisi illis qui increduli fuerunt
히브리어Modern,18 ולמי נשבע לבלתי בא אל מנוחתו אם לא לסוררים׃
성 경: [히3:18]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 본절은 민14:43의 반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유가 그들의 불순종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도 않았고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출 5:21; 14:11;15:24;16:2;17:2,3;32:1;민11:1,4;12:1;14:2,22,23).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믿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5:9;11:31;신30:20;롬1:5;6:17;10:16;16:26;갈5:7). 이러한 불순종은 불신앙의 정점이며 하나님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민14:23)이며 반항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Lane).
카이 블레포멘 호티 우크 에뒤네데산 에이셀데인 디 아피스티안
개역개정,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새번역,19 결국, 그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임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말성경,19 이로써 우리는 그들이 불신앙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을 봅니다.
가톨릭성경,19 우리가 보듯이, 과연 그들은 불신 때문에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영어NIV,19 So we see that they were not able to enter, because of their unbelief.
영어NASB,19 And so we see that they were not able to enter because of unbelief.
영어MSG,19 They never got there because they never listened, never believed.
영어NRSV,19 So we see that they were unable to enter because of unbelief.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βλεπομεν οτι ουκ ηδυνηθησαν εισελθειν δι απιστιαν
라틴어Vulgate,19 et videmus quia non potuerunt introire propter incredulitatem
히브리어Modern,19 ואנחנו ראים כי לא יכלו לבוא על אשר לא האמינו׃
성 경: [히3:19]
주제1: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주제2: [순종에 대한 권고]
이로 보건대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블레포멘'(*)은 저자가 지금까지 시편 95편에 대한 것을 해석한 결론임을 시사한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 저자는 본절에서 이제까지 인용하여 수신자들에게 제시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생활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다. 이스라엘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불신앙’이다. ‘믿지 아니하므로'(*, 아피스티안)는 비록 시편 95:7-11에는 직접 언급되고 있지는 않으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민14:11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항함으로 맞이하게 된 비참한 결과를 암시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상기는 본서의 수신자들이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가데스에서의 조상들처럼 그들도 같은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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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장 헬라어 주석 강해]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히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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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3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시켰다면 예수님은 전 인류의 선택한 백성을 구원시켜주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육적인 것을 구원시켰다면 예수님은 원죄에 죽었던 영혼을 구원시켜주셨습니다. 우리는 모세보다 더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모세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구원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도 모세보다 우월하신 영원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히 3:1-6)
1절 호덴 아델포이 하기오이 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 메토코이 카타노에사테 톤 아포스톨론 카이 아르키에레아 테스 호몰로기아스 헤몬 크리스톤 이에순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클레세오스 에푸라니우)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것을 의미하는 말로서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특히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이란 명칭 대신에 ‘하늘’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여(6:4; 8:5; 9:23; 11:16; 12:22)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거룩한 형제들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이 하기오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서만 나타나는 유대적인 표현이다(출 19:6; 벧전 2:9, Hewitt).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의 대제사장적 역할로 인하여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저자는 본절에서 예수를 두 가지 칭호를 통해 소개하면서 그 예수를 깊이 상고하라고 권면한다. ‘믿는 도리’의 헬라어 ‘호몰로기아스’는 ‘고백'(confession)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4:14, Lane). 이 ‘호몰로기아스’는 ‘사도’와 ‘대제사장’ 모두를 수식하는 것으로 본절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와 대제사장'(the Apostle and High Priest of the rel-igion we profess, NEB)을 의미한다(Bruce).
사도 –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자주 표현하고 있으나(마 10:40; 눅 10:16; 요 4:34; 5:23,24) ‘사도’로 표현된 신약성경에서 본절뿐이다.
예수를 ‘사도’로 호칭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유대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전권 대사’로 간주되었다. 이 하나님의 전권대사를 뜻하는 용어 ‘쉴리’가 헬라어 ‘아포스톨로스'(‘사도’)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Manson).
(2)’사도’라는 호칭은 예수를 구약의 모세와 비교해 언급한 것이다. 모세는 비록 구약에서 직접 ‘사도’로 불리지는 않았으나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라는 표현으로 보아(출 3:10, LXX) 모세가 사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절에서 제자가 예수를 ‘사도’로 표현한 것은 모세와의 역할을 비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시사한다(Jones).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더욱 타당하다.
대제사장 – 신약성경에서 본서만이 예수를 대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 ‘대제사장’이란 예수의 칭호는 예수의 사명 가운데 제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시사한다(Morris, Hewitt).
2절 피스톤 온타 토 포이에산티 아우톤 호스 카이 모세스 엔 홀로 토 오이코 아우토
히 3:2 그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한 것과 같으니 – 저자는 본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충성과 모세의 충성을 비교하고 있다. 민 12:7에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온 집을 맡은 충성된 청지기로서 인정받은 것을 나타낸다.
모세는 예수님과 같이 완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 중의 하나인 모세를 충성된 자로 인정하면서 3절 이하에서는 예수를 보다 우월한 자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혹자의 기적대로 저자가 2:9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는 예수를 보니’라고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의 충성을 인정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Hewitt).
하나님의 온 집에서 –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는 ‘가족’, ‘가문’ 혹은 ‘재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느 1:6)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킨다(엡 2:21,22; 딤전 3:15; 딤후 2:20; 벧전 4:17).
따라서 ‘하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권속을 뜻한다. 한편 ‘온’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로’는 모세의 충성과 예수의 충성 사이의 차이점을 암시한다. 모세와 같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종들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에게 충성하였으나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가 시행되는 전 영역에서 온전하게 충성하였음을 시사한다(Morris).
3절 플레이오노스 가르 독세스 후토스 파라 모센 엑시오타이 카드 호손 플레이오나 티멘 에케이 투 오이쿠 호 카타스큐아사스 아우톤
히 3: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3: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 저자는 2절에서 예수와 모세가 서로 ‘충성되다’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와 모세의 차이점, 즉 모세에 비해 예수께서 더 우월하심을 강조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환으로서(5절) 자신을 세우신 이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영광을 받을 만하다.
더욱이 그는 출애굽 직후 40일 동안 시내 산상에서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을 얼마간 간직했었다(출 34:29-35; 고후 3:7). 그러나 그의 영광은 결국 사라져 없어질 것에 불과했다(고후 3:7,13).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2:9) 하나님의 본체시며(빌 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시므로(요 1:4,5,9) 모세가 받은 영광은 예수의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될 만한 영광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 본 비유는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욱 영광 받아야 하는 이유를 묘사한다. 본절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쿠’는 2절의 ‘온 집’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 혹은 ‘구원받은 무리’를 의미한다. 모세는 그가 아무리 탁월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하더라도 그 집의 한 부분에 불과하였으나 예수는 그 집을 자신의 피로 세우신 분으로(행 20:28) 그 집에 속해 있는 모세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이시다. 따라서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큰 영광과 존귀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4절 파스 가르 오이코스 카타스큐아제타이 휘포 피노스 호 데 타 판타 카타스큐아사스 데오스
히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3:4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서 언급한 ‘집 지은 자’와 연결된 변론임을 시사한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 본절의 상반 절에 있는 ‘집’은 하반절에서 ‘만물’로 대치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 묘사된다(사 40:28; 45:7, LXX). ‘집’이 존재하는 것은 ‘집 지은이’가 존재함을 시사하며,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5절 카이 모세스 멘 피스토스 엔 홀로 토 오이코 아우투 호스 데라폰 에이스 마르튀리온 톤 랄레데소메논
히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3:5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복음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었다(Calvin). 즉 그는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전하는 소개자였다. 한편 저자는 모세를 ‘사환’으로 표현한다. ‘사환’은 ‘종’의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며 70인 역에서는 자주 모세에 대하여 사용되었다(출 4:10; 14:31; 민 11:11; 12:7; 신 3:24; 수 1:2; 8:31,33, LXX). 이 용어는 하나님과 친밀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위엄과 존귀를 지닌 ‘종’을 가리키나 동시에 여전히 ‘주인’에 예속된 ‘종’임을 암시한다(Morris, Hewitt, Lane).
6절 크리스토스 데 호스 휘오스 에피 톤 오이콘 아우투 후 오이코스 에스멘 헤메이스 에안페르 텐 팔레시안 카이 토 카우케마 테스 엘피도스 메크리 텔루스 베바이안 카타스코멘
히 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 모세는 비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충성하였다.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는 모세와 예수께서 충성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저자는 모세에게는 전치사 ‘엔'(‘…안에서’)을 사용하여 ‘집에서’ 충성하였다고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에게는 ‘에피'(‘위에’)를 사용하여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음을 대비시키고 있다.
결국 이것은 모세에 비해 그리스도께서 질적으로 우월하심을 시사한다(Lane). 즉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탁월한 존재이긴 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일반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자이며 아들로서 질적인 우월성을 갖는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 본절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예수의 충성스러움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확신을 갖고 바라봄을 의미한다(Lane, Morris).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이 소망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1) 담대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안’은 ‘신뢰’를 뜻한다. 본래 ‘파르레시안’은 헬라 문화 속에서 헬라 시민들 상호 간의 개방적이고도 솔직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하나님 앞에서 개인 신앙의 ‘확신과 담대함’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다(Philo).
(2) 자랑 – 이로 번역된 헬라어 ‘카우케마’는 자랑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이 되는 ‘내용’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집에서 성도들이 갖는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을 뜻한다(Morris). 한편 ‘집’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신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집’이다(2절).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리라는 확신과 자랑스러움을 인내 속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고후 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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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히브리서 03장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실하심을 그 첫째 이유로써 제시한다(2절). 그리스도는 마치 모세가 자기의 지파들에게 충실하였던 것처럼 자신을 보낸 하나님에게 신실하셨다.그리스도는 임명받은 중보자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 과업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또 인준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보는 아버지에게 용납될 수 있는 것이다.그리스도는 명령받은 직책에 충실하셨다. 그는 중보자로서의 행해야 하는 모든 규례와 임무를 이행하였고 또 아버지와 성도들에 의하여 자신에게 지워진 그 진리를 완벽하게 수행하셨다.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실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임명하신 하나님에게 충실하셨다. 구약에서 보면, 모세는 유대 교회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직책에 대한 책임을 충실히 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세와 같이 자기 직책을 충실히 행하셨다. 이러한 바울의 논증은 모세의 충실함과 대해 높은 신임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논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세의 충성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충실함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둘째 이유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뛰어남이 모세의 영광과 뛰어남 보다 훨씬 상위에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3-6절).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일원일 뿐이었으나 그리스도는 그 집을 지으신 분이었다. 이 집이란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을 지은 자이시며 그들의 대장 되시는 그리스도 아래 모여서, 또한 그의 법을 따라 임명된 신하들로서 그리고 그의 베푼 제도를 준수하는 신하들로서의 그들이 모여서 이룩한 하나님의 교회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이 집 즉 하나님의 교회의 설립자이시다. 모세는 그 집의 일군이었다. 모세는 그리스도 아래서 그 집을 다스리고 그 집에 속한 백성들을 교화하는 도구 역할을 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이 모든 집을 지으신 분이시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이시며 또 하나님 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자는 어는 누구도 교회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를 만드는 것 못지 않게 교회를 짓는 데도 큰 힘을 필요로 한다. 세상은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므로 아무나 세상을 만들 수는 없었다. 반면 하나님의 교회는 그 성원이될 자격이 없는 온갖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교회의 평면도를 그렸고, 재료를 준비하시고, 전능하신 힘으로 그 재료들을 모두어 교회의 형태를 이루어 놓으셨다. 그리스도는 이 집을 단장하고 통합하셨으며, 그 집의 질서를 세우시고 순수 자신이 함께 하시므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영광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은 바로 하나님의 집의 진정한 영광이다.그리스도의 설립자인 동시에 이집의 주인이셨다(5,6절). 이 집은 하나님의 아들의 집으로써 설계된 것이었다. 모세는 장차 계시될 모든 사실들을 증거하기 위한 충실한 하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교회의 소유권을 지니신 분이며 절대적 통치자이시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복음으로 보다 분명하고 완벽하며 아름답게 계시될 교회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한 타나날 것의 그림자로서의 통치자였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 받으셔야 되며 더욱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억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논증을 다음의 말로써 결론지었다.바울 자신과 모든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 이 집에 속한 다른 사실을 확신어린 어조로 말함으로 위의 논증을 맺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집이라”고 하였다(6절). 개별적으로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성령의 성전이다. 또한 우리가 신앙을 지닐 때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러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그의 교회를 이루게 된다. 즉 규례와 복음에 의거한 훈련과 예배라는 끈에 의해 하나가 되는 것이다.이 집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묘사함으로 바울은 위의 논증을 결론 짓는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즉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고백한다면 그 기초 위에 은혜와 영광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세워질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소망의 기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를 섬김에 있어서 부딪치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출발도 잘 해야 할 뿐 아니라 끝까지 그 길에 굳건히 서야 하며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집의 존귀와 특권에 참여하려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그들은 마음과 생각 가운데 복음의 진리를 간직해야만 한다. 둘째, 그들은 진리 위에 근거하여 축복에 대한 소망을 세워야 한다. 셋째, 그들은 그들이 가진 진리를 자랑스럽게 고백해야 한다. 넷째, 그들은 믿음의 증거를 분명히 보존하고 있는 동시에 또한 그 증거에 입각하여 살아야 한다. 그들이 바라는 바 소망을 얻으려면 끝까지 모든 일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믿는 자들은 그들의 주가 오실 때에 그가 그들을 인정하고 또 칭찬하실 수 있도록 복음을 믿고 또 그대로 사는데 있어서 꾸준하고도 용기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를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그리스도에 대하여 깊고 정중하게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를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거룩한 형제들, 하늘 나라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더욱 생각하기 위해서 서로 더욱 더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까지도 대부분 그리스도를 가벼이 생각하거나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우리가 그리스도를 성서가 전해 주는 모습 그대로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쓸 데 없는 추상이나 상상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않고 성경의 기록에 근거하여 그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Ⅱ. 우리는 이 모든 높고 존귀한 명칭을 지니신 분에게 갚아야 할 빛이 있다. 즉 그것은 그를 위와 같은 분으로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신에게는 어떤 존재이며 우리에게는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이 후로 영원히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전심을 다해 생각을 그리스도께 집중하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생활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를 우리 신앙의 완성자와 근본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이 권면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 있게 전하여지기를 바라서 바울은 수신인들에게 영예스러운 호칭을 사용하였다. 즉 그들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1절)이라고 불렀다.바울은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형제들은 나의 형제를 말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말하며 또 모든 사도들에게도 형제가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형제이며 서로 사랑해야 하고, 형제처럼 살아야 한다.그들을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들의 성도들이라는 칭호가 거룩하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면에 있어서도 거룩하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을 멸시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 칭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들이 바로 자칭 거룩한 형제들이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자신을 해치는 위험스러운 조롱인 것이다. 그러므로 “조롱군이 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사실을 더욱 단단히 하게 되는 결과만 초래한다”고 하였다. 이같이 경멸받고 조롱당하는 사람들로 정녕 거룩한 형제가 되도록 힘쓰고 격려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인정받도록 격려하도록 하자. 성도들은 그러한 명칭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불신자들의 조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비난받음으로 인하여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축복 속에 참여하게 되는 날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때에 거룩한 형제단에 속하게 될 것이다.그들을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이 은혜의 참여자가 되었다는 말이요, 성령의 참여자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참여한 이 은총에 의해 실제로 어둠에서 놀랄 만한 빛 가운데로 이끌려 나오게 되었다. 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되었고 하늘 백성으로의 성품과 생활을 영위하게 되며 또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길이 이 은총에 의해 준비되는 것이다.바울이 그리스도에게 사용한 호칭. 바울은 수신인들로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하고자 하였다.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로서 즉 복음 교회의 최고 대장으로서 또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일을 위하여 인간에게 보낸 사자로서, 또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그 믿음과 우리가 가졌노라고 고백하는 그 소망의 위대한 계시자로서 바울은 칭하였다.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 고백의 대제사장으로서, 즉 신 구약 시대의 최고의 다스리는 자로서, 어떤 상황과 섭리 아래에서도 교회의 우두머리이신 분이라고 바울은 칭하였다. 대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속죄와 중제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또 사도와 대제사장의 두 가지 일을 능히 해낼 수 있는 그리스도 메시야로서 바울은 예수를 호칭하였다.또한 바울은 그를 예수로서 즉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메달아 올렸던 구리뱀에 의해 상징되는 우리 영혼의 치료자이자 영혼의 위대한 의사로서 칭하였다. 모세가 구리뱀을 높이 매달아 올린 것은 이 무서운 뱀에 물린 자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3:7
배교에 대한 경고(히브리서 3:7-19)
위의 구절에서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시종일관 신중한 조언과 충고를 계속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를 위해 시편 95편 7절을 인용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Ⅰ.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충고한 내용.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하여 신속하게 또 즉시 귀를 기울일 것을 충고한다. “너희는 그의 음성을 듣거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또한 그 말씀을 사모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하라. 또한 그 일을 오늘 당장 착수하라. 내일이면 너무 늦기 때문이다.”
Ⅱ.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준 경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거나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경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악함과 거룩함의 우월성을 말씀하실 때, 그리고 주를 신앙으로 너희들의 구세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필요성을 말씀하실 때, 이 같은 말씀에 너희 귀를 막거나 마음을 완고히 가지지 말라.” 마음을 완고하게 가지는 것이 온갖 죄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Ⅲ. 바울이 히브리인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제시한 실례. 바울은 광야에서의 그들의 조상인 이스라엘 족속이 저지른 완고함 때문에 본문에서 그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고 반역하던 때처럼”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가 여기서 말한 사건은 맛사라 또는 므리바에서 있었던 유명한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출 17:2-7).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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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유혹 앞에서는 넘어가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다는 사실이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 주시고자 하실 때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죄라는 사실이다.다른 사람들의 죄 특히 우리 친족들의 죄는 우리들에게 경고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조상들이 저지른 죄와 심판을 기억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함으로 조상들의 악함의 선례를 따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조상들이 저지른 죄가 본문에 다음과 같이 회고되고 있다.유대의 조상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이 처했던 상황. 그들은 애굽을 떠나서 아직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애굽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였을 것이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유대의 조상들이 저지른 죄. 그들은 유혹을 받았고 또 하나님을 노하게 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모세에 대하여 불평을 하였으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들의 죄를 더욱 용서받을 수 없게 만든 요인.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했던 광야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애쓰시고 있는데 죄를 지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므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또 매일 광야에서 기적을 통해 그들을 도와주시고 있는데도 죄를 지었다. 그들은 이같이 하나님께 죄를 짓기를 40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런 하나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죄를 더욱 용서받을 수 없게 하였다.이러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근원과 원인.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그들이 마음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의 잘못이 입술과 생활로 여러 가지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그들은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인도하시는 대로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도,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통하여 행하고자 하시는 섭리의 법도도 몰랐고,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수행해야 할 의무의 법도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나 또는 하나님의 정의의 질서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였다.유대의 조상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대진노. 사실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들에 대하여 인내를 베푸시었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인하여 슬퍼하여”(10절)라고 본문에 말씀되고 있다(역주: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모든 죄 특히 하나님께서 특권을 주신 사람들이 저지른 죄는 하나님을 노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사실이다.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들을 멸망시켜 시기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오랫동안 참으신다.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향하여 죄를 지은 때와 또 죄를 지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해드린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성령의 계속 슬프시게 한다면, 결국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 자신의 영혼이 괴로움을 받게 되든지 또는 긍휼을 입게 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이전의 무거운 죄로 인하여 깊이 슬퍼하게 될 것이다.죄의 대가로 마침내 유대의 조상들에게 내려진 파기할 수 없는 형벌.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그들을 그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시었다. 여기서 말씀된 안식이란 지상의 가나안에서 그들이 되도록 예정된 안식이거나 또는 하늘 나라에서의 안식을 말하든지일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죄가 오랫동안 지속될 때 그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마침내 격발케 하여 죄인들을 향해 쏟아지게 한다.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멸망시킴은 정당한 일이다. 하나님은 성급하게 노를 발하지 않으시고 공의에 입각하여 노를 발하신다. 또한 그가 일단 노를 발하시면 그의 노를 입은 사람은 구제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만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도 평안을 누릴 수는 결코 없다.
Ⅳ. 바울이 조상들의 무서운 종말의 예를 든 이유(12,13절). 그것은 히브리인들을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랑에 넘치는 호칭으로 그들을 부름으로 그의 경고에 대해 그들이 깨우치도록 배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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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히브리인에게 적절한 경고를 주었다. 본문에 보면 blevpete – 즉 삼가 즉 너희가 조상들의 예를 “돌이켜 보라”고 하였다. 너희 주변을 돌아보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적이 들어올까 경계하고 주의하도록 하여라. 너희들은 수많은 너희 조상들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 광야에 엎드려지게 되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너희도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조상들과 꼭 같은 죄와 유혹과 무서운 형벌 속에 떨어질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으뜸이 되시고 모세보다 위대한 분인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너희가 그리스도를 멸시한다면 그것은 조상들이 모세를 멸시한 죄보다 더 큰 죄가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들은 너희 조상보다 더욱 무서운 벌을 받게 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파멸은 우리에게 그들이 미끄러져 떨어진 바위에 조심하라는 경고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스라엘의 파멸은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경고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고전 10:11)”라고 하였다. 또 우리들은 이 이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늘 나라에 안전하게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 주변을 돌아보며 조심해야 한다.바울은 사랑이 넘치는 호칭으로 그들을 부름으로 경고에 대한 그들의 경각심을 촉구하였다. 그는 그들을 “혈육으로나 하나님 안에서나 하나가 된 형제들아 내가 사랑하며 복을 원하는 형제들아!”라고 불렀다. 또 바울은 이 구절에서 경고의 범위를 넓힌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12절).”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믿지 않는 마음은 악한 마음이다. 불신은 카다란 죄이며 인간의 마음을 해친다.악한 불신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이탈하는 우리들 죄의 기본이다. 불신은 배교로 이끄는 첫 걸음이다. 만약 우리가 한 번이라도 하나님을 불신하면 우리들은 곧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만다.기독교의 형제들은 배교에 대하여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섰다고 하는 자들은 떨어지지 않도록 삼갈지니”라고 하였다.바울은 경고와 함께 권면도 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불신이라는 악심을 예방하도록 다음과 같은 말로 충고하였다. 즉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권면하라(13절)”고 하였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우리들이 함께 있는 동안이란 짧고 불확실한 기간이지만, 그 동안에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서로에게 선을 행하여야 할 것이다.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최선의 개선책을 모색해야 한다.만약 그리스도인이 피차 매일 권면하지 않는다면, 죄의 유혹을 받아 마음이 완고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죄 안에는 많은 속임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죄는 정당하게 보이나 추잡스럽고, 유쾌한 듯 보이나 유해한 것이다. 죄는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아무것도 이행하지는 않는다.죄의 속임수는 영혼을 완고하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죄를 지으면 또 다른 죄를 짓게 된다. 또한 잦은 범죄는 습관으로 되고 만다. 양심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은 양심을 마비시킨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경계심을 품도록 스스로 또 서로 권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행해야 하는 일이다.바울은 잘 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잘 하고 있고 또 끝까지 신앙을 지킬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우리가 시작할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절).”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성도가 누릴 특권.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된다. 즉 성령과 그리스도의 성품과 은총과 공의와 그리고 그의 생명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에는 무엇에나 관여하게 된다. 즉 그가 계신 곳에가 그가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에 그는 동참할 수 있게 된다.성도가 특권을 누릴 수 있기 위하여 시행해야 하는 조건. 그 조건은 그들의 끝까지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대담하고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실천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믿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구원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을 향하여 전진하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이 구원을 잘 지키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그럴 때 그리스도는 그들로 경계하는 마음과 부지런한 마음을 주사 배교로부터 그들을 보존하신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시작할 때 품은 정신을 끝까지 유지하고 증거해야 한다. 신중하게 생동하는 열정을 가지고, 또 거룩한 결의와 겸손한 신뢰심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은 같은 정신을 계속 지니도록 해야 한다.그러나 믿기 시작할 때는 용기도 있는 것 같고 또 신앙이 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는 사람은 적다.믿음 안에서 참고 견디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신실성을 나타내는 최선의 길이다.바울은 앞서 시편 95편 7절에서 인용한 것을 다시 요약하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적용하고 있다(15,16절).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되어 있는 말씀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인용한다. “전에 너희에게 성경을 인용하여 전한 말은 이전 시대뿐만 아니라 너희 당대와 또한 후세에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말씀이다. 너희는 조상들과 같은 저주 아래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삼가라.”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님을 히브리인들에게 말한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의 대부분이 그것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지만 그 말씀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구원을 받게 되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에 처하게 될 것이다.하나님에게는 자신의 목소리에 복종하는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돌보고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만약 복종하는 이들이 운명의 재난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들은 영원한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복종자들은 영원히 멸망한다.바울은 먼저 언급한 사실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또 그 답변을 제시하였다.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였느뇨? 범죄한 자가 아니라?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였느뇨……”(17-19절).하나님은 다만 그를 향해 죄를 짓고 또 계속하여 죄를 짓는 자들 때문에 슬퍼하신다.하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죄를 짓기 때문에 괴로워하시며 진노하신다. 죄가 전염될 때 하나님은 가장 노하신다.하나님은 널리 성행되는 사악함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슬퍼하시고 또 참으시나 마침내는 그들을 공의로 심판을 하시고 쉬실 것이다.불신은(불신의 결과로는 반역이 따른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를 받은 자들의 불신은 가장 저주받을 죄이다. 이 죄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차단하고, 하늘의 문을 닫아버린다. 불신은 그들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처하게 하며 그곳에 머무르게 만든다. 스스로 진리로 우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는 죄인들을 영원히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19년 1월 10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를 버릴 타당한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히브리서 서론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4장: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분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 6장: 확실한 소망 7장: 더 좋은 소망 8장: 더 나은 직분 9장: 영원한 단번 속죄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 11장: 믿음의 선조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서론 히브리서는, 요한일서처럼 서두에 서신의 관례적 문안인사가 없으나 끝부분(13:22-25)은 본서가 서신임을 보인다. 본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책이다. 본서는 동방에서는 대체로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되었으나 서방에서는 오랫동안 논란되었다. 그러나 일찍이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갑, 순교자 저스틴 등은 본서를 인용했다. 주후 200년경에 쓰여진 체스터 베티 파피러스(p 46 )에는 히브리서가 바울 서신들 가운데 나온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바울이 히브리서를 히브리어로 썼으며 누가가 그것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말했고( 교회사, 6. 14), 오리겐은 반복해서 히브리서를 바울의 글로 인용했다. 유세비우스 자신은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고 로마의 클레멘트가 번역하였다고 주장했다. 아다나시우스는 본 서신을 바울의 14권의 서신들(목회서신 전에) 중에 포함시켰고 그 후 헬라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본 서신을 바울 서신으로 보았다. 주후 397년 제3차 칼타고 회의는 신약정경 27권 목록을 선언하면서 바울의 13권의 서신을 열거한 후 “동일한 저자에 의해 기록된 히브리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히포 회의(419년)와 후에 화란 신경은 바울의 14서신을 말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로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를 잘 모른다거나 저자가 바나바라는 견해도 있었다. 내용적으로, 본 서신에는 사도 바울을 저자로 보이는 것 같은 점들이 있다. 사도 바울의 오랜 동역자 디모데에 대한 언급(13:23)이나 또 바울 서신들과의 언어적, 사상적 유사성, 예컨대 1:4 (빌 2:9), 2:2 (갈 3:19), 2:10 (롬 11:36), 7:18 (롬 8:3), 7:27 (엡 5:2), 10:33 (고전 4:9), 11:13 (엡 2:19), 12:22 (갈 4:25-26), 13:5 (딤전 3:3; 6:7-8) 등이 그러하다. 본 서신의 서두에 바울 자신의 이름을 언급지 않은 것이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이 바울 저작의 반대되는 증거로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사상의 일치성 때문에 그것들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본 서신의 수신자 는 예루살렘 부근의 유대인들이었고, 저작 연대 는 주후 67년경, 즉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 아직 성전이 있었던 때인 것 같다. 본 서신에서 성전과 제사장에 대한 언급에 현재시제의 구절들이 많기 때문이다(8:4, 13; 9:4-5, 9; 10:1, 8, 11; 13:10-11). 본서의 특징적 주제 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다. 본서는 구약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완성되고 폐지되었음을 밝히 증거한다. 히브리서 7: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브리서 8:13,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신약 아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더 나은’ 혹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13번 나온다(1:4; 6:9; 7:7, 19, 22; 8:6, 6; 9:23; 10:34; 11:16, 35, 40; 12:24). 히브리서의 진리는 신약성경의 진리, 특히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의 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 로마서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린도후서 3:9, 11,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장: 천사보다 뛰어나심 [1-2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구약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비롯하여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여러 방식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양으로 직접 나타나셨고 꿈이나 환상 중에 나타나셨고 불과 구름으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음성으로 말씀하셨고 기적들을 행하셨다. 또 그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 중에 자신의 뜻을 선지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을 명백히 구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이렇게 임하셨다,’ 혹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렘 1:2; 호 1:1). 성경은 하나님의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기적을 행하신 모든 행위들을 기록하고 설명한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특별계시들을 성경책에만 기록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 이 책의 내용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신 4:2; 12:32; 계 22:18-19). 하나님께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라는 말은 신약시대를 말한다. 신약시대를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부른 것은 그 시대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역사에서 마지막 시대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임을 보인다. 구약 계시와 신약 계시를 비교하면 계시의 내용상 진전이 있었지만, 신약 계시가 마지막 계시이기 때문에 신약 계시를 넘어서서 어떤 내용의 추가나 보충이 없을 것이다.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마리아에게서 나심, 그의 교훈과 기적 행하심,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신약 계시의 내용이다. 아들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가 책에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독특한 성격과 신적 권위성이 여기에 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상징(예표)와 예언들의 성취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바로 거기에 그 내용들의 신적 권위성도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신약성경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약 계시는 구약 계시보다 뛰어난다. 왜냐하면 구약 계시에서는 상징적으로 또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내용들이 신약 계시에서는 실체적으로 드러났고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계시의 상징의 실체이시며 예언의 성취이시다. 구약시대에 감취어 계셨던 그는 때가 되어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뜻인 택자들의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계시하기를 원하신 만큼, 또 우리가 알아야 할 만큼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계시하였다. [2-3절] . . .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우리의] 1)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본문은 신약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께서는 피조물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해]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 ‘만유의 후사’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표이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방법이시며 목표이시다. 시편 2:8,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마태복음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골로새서 1:16,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목표이며 목적이심을 보인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넷째로,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 이 표현들은 물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도 적용될 수 있지만(요 14:9; 고후 4:4, 6), 문맥적으로 볼 때(2, 3절) 그의 성육신 이전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영원한 관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 빌립보서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자이시다. 이것은 천지만물을 보존하시는 섭리 사역이다. 골로새서 1:17,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섭리하시는 자이시다.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죄를 정결케 하신 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다. 죄는 인간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었고 죄 문제의 해결은 주 예수께서 하신 바로 그 일이었다. 마태복음 9:6,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그의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 . .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심과 또 그가 온 세상과 교회를 통치하심을 보인다. [4-5절]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하셨는가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그가 천사보다 뛰어나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더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시편 2편은 메시아에 대해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예언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신성(神性)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이시다. [6절]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70인역, 신 32:43을 인용). ‘맏아들’이라는 원어( 톤 프로토토콘 ) 2) 는 ‘첫 번째로 나신 자’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마리아가 낳은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고(마 1:25 전통본문; 눅 2:7), 또 예수님 믿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으나(롬 8:29), 본절에서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뜻으로 보인다.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3) 들어오게 하신다”라는 구절은 그의 탄생을 가리킨 것 같다( KJV, NIV ). 주께서 탄생하셨을 때 그 밤에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송했다(눅 2:13-14).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에게 찬송을 받고 계신다(계 5:11-12). 그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한 분이시다. [7절]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선한 천사는 죄가 없고 거룩하므로 죄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바람과 같이, 불꽃과 같이 사용되는 자들임을 알아야 한다. [8-12절]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주께서] 의를 사랑하고[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주께] 부어 네[주의]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또 주여, 4)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천사들과 달리 친히 ‘하나님’으로 불리신다. 인용된 시편 45편은 메시아를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그의 보좌는 영원하며 그의 나라의 홀(笏)은 공의로운 홀이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1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요한일서 5:20은 ‘참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디도서 2:13은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시편 102:25-27을 인용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피조 세계는 다 쇠하여지고 낡아지지만,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영존하시다. 본문은 메시아께서 이 피조 세계에 속하지 않는 신적 존재이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13-14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모든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하신 일들, 특히 천국을 기업으로 얻을 자들의 구원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영들이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는 말을 들으셨고, 그는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아무 천사도 가지지 못하는 능력과 권세와 영광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약 계시가 최종적, 절정적 계시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내용과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다. 구약시대에는 예표적, 예언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계시들이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실체적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하나님의 특별계시 중의 특별계시이시다. 신약계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절정적 계시이다. 우리의 구원과 온전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충분히 다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가치를 인식하고 신약성경을 넘어서서 더 이상의 특별계시가 없고 이 책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려는 것은 극히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29-31). 우리는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해야 한다. 신약성경 외에 특별계시를 말하는 자는 이단이다. 요한계시록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둘째로, 우리는 신약계시의 중심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그의 신적 영광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의 후사이시다. 죄 없는 새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그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 그는 섭리자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셨다. 그것이 그가 하신 가장 큰 일이었다. 또 그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과 권세로 세상과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귀한 이름을 얻으셨고 하늘의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고 하나님으로 불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천사들은 바람 같고 불꽃같이 사용되지만,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 그를 믿고 소망하며 찬송하자. 2장: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 [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시므로’라는 뜻이다. ‘모든 들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가리킨다. 이미 1:2-3에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계가 창조되었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고 만유의 후사이시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창조와 섭리의 일을 하시고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영광을 누리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모든 진리들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한다. ‘삼간다’는 원어( 프로세코 )는 ‘주의한다. 주목한다’는 뜻이다. ‘더욱 간절히’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이다.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는 말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이라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들은 것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배운 많은 성경 진리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한다. [2-4절] [이는]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공의로운]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피할까 함이라.]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본문은 우리가 모든 들은 것을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은 구약시대에 주신 율법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같이 큰 구원’이라고 말한 것은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이며 죄사함과 영생을 주시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값없이 받은 은혜의 구원을 어떻게 소중히 여기고 간절히 주의하고 주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천사들을 통해 주신 율법도 어길 때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았다면, 천사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우리가 소홀히 여길 때 얼마나 더 큰 심판을 받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요 3:36). 이것은,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범죄치 말고 진지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본문은 이 구원의 확실함에 대해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이 구원은 처음에 주(主)로 말씀하신 바이다. 구원의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내용이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둘째로, 이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이다. ‘들은 자들’은 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던 제자들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저자가 ‘들은 자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확증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았던 증인들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셋째로, 하나님도 기적들과 초자연적 은사들로 함께 증거하셨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기적을 표현하는 세 단어이다. 표적(sign)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어떤 진리를 확증하심을 보인다. 기사(奇事, wonder)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줌을 나타내고, 또 능력(power)은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인다. 또 ‘성령의 나눠주신 것’이라는 말은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 즉 방언, 예언, 병 고침, 기적 행함 등을 가리킨다. ‘자기 뜻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심을 의미한다. 기적들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수단들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은 여러 면으로 확증된 확실한 것이요, 결코 불확실한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고, 그의 교훈들과 행한 일들을 직접 듣고 본 제자들이 확증한 바이었고, 또한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친히 증거하신 바이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확실한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 등한히 여긴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5-9]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휘페르 판토스 )[각 사람을 위하여](관사가 없을 때)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은 복음의 내용인 천국을 가리킨다. 본문에 인용된 시편 8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케 창조하셨음을 노래한 시이다. 본문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 잠시 천사보다 5) 못한 존재가 되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의미한다. ‘잠깐’이라는 원어( 브라퀴 )는 ‘잠시’ 혹은 ‘조금’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일생인 100년과 인류의 역사 6,000년은 ‘영원(永遠)’에 비추어 볼 때 ‘잠시’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려 하셨으나, 사람은 타락 후 오히려 만물에게 복종하고 있다. 우상숭배가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마침내 만물을 다스리도록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본문은 시편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맛보셨다. 예수께서 택함 받은 각 사람을 대신해 죽음을 맛보신 것은 죄의 형벌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죄는 자신의 죽음이나 구주의 대리적 죽음을 필요로 하였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10절] 만물이 인하고( 디 호 타 판타 )[만물이 그 분 때문에 있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라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은 택함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킨다. 구원의 목표는 영광 곧 죄가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다는 말은 인간 예수께서 고난을 받음으로 온전한 구주가 되셨음을 말한다. [11-13절]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시며,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성도들이다. ‘다 하나에서 났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우리와 같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다(마 28:10; 요 20:17). 메시아 예언시인 시편 22:22에서도 그는 성도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또 ‘내가 그를[하나님을] 의지하리라’는 말씀도 그의 인성의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보인다. [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6) 예수께서 성도들과 같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들을 돕고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목적은 네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로, 그것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기 위함이셨다. 마귀는 죄와 어두움의 세계의 왕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그는 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택자들의 모든 죄와 그 형벌을 담당하여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파하셨다. 둘째로, 그것은 죽음의 공포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모든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일평생 죄와 돈과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17-18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셋째로, 그것은 구원의 일에 있어서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救贖)하려 하심이셨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에 증거되어 있고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가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책은 히브리서가 유일하다. ‘구속(救贖)한다’고 번역된 원어( 힐라스코마이 )는 ‘유화(宥和)한다,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성경적 속죄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노를 누그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넷째로, 그것은 친히 시험과 고난을 당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택한 백성들을 도우시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셨고, 또 죄가 없으셨으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난과 비천함, 모욕과 핍박과 비난, 고난과 죽음을 경험하셨고 특히 인간의 시험과 연약을 다 경험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구주가 되셨다.
히브리서 2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이 크고 확실한 구원을 잘 보존해야 한다(1, 2절).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이루신 큰 구원이며 많은 증인들의 증거와 하나님 자신의 기적들과 은사들로 증거하신 확실한 구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거나 도적을 맞는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귀한 보화일수록 보관을 잘해야 한다. 구원이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가치 있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귀에게 도적 맞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고귀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주목하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사역의 핵심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의 죽음이었다.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일평생 종노릇하며 살던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마귀의 권세는 파하여졌다. 우리의 모든 죄책과 죄의 형벌이 단번에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넷째로, 우리의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받는 그의 택한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다. 그는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의 가난과 비천한 환경을 경험하셨고 사람들에게 모욕과 비난,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그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를 친히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3장: 모세보다 뛰어나심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아 거룩한 자들이 되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도’로 불린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입은 자이시다. 그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하셨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중보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2절]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자이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보내시고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고(요 4:34)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빌 2:8).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가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리셨다(계 1:5; 3:14). [3-4절] [이는]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같음이니라]. [이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하나님이심이니라]. 모세는 구약시대에 큰 인물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 가운데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쓴 자이었다. 그는 선지자들 중에 큰 선지자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대면하여 아시던 자이었다(신 34: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시다. 본문은 모세와 주 예수님을 집과 집 지은 자에 비교한다. 집을 보면 그것을 지은 사람이 있음을 알듯이, 우주 만물은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 놀라운 우주를 물질이 우연히 발전해서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비이성적이다. 집은 피조물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 백성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창조주이시다.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장래의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상징적으로 증거하였다. ‘사환’이라는 원어( 데라폰 )는 ‘수종자, 종’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맡은’이라는 원어( 에피 )는 ‘위에서’라는 단어로 ‘다스림’을 나타낸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본문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우리가 곧 그 집임을 증거한다. ‘담대함’이라는 원어( 파르레시아 )는 ‘담대함’ 혹은 ‘확신’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 아니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과 우리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시편 95:7-11이 ‘성령의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이나 선지서들뿐 아니라, 시가서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하나님의 권위로 인쳐졌다는 것을 증거한다(딤후 3:16).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또 성경적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말고 다른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원망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 뒤따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서져야 한다. [9-11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저] 7)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시험한다’는 말( 페이라조 )이나 ‘증험한다’는 말( 도키마조 )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기적들이나 두려운 징계들이나 긍휼의 구원들이나, 그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고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만나를 내려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저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우리가 장차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안식의 땅이다. [12-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교회의 신자들 중에도 믿음이 없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극히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근본적인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의 생활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오늘이라는 날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권면한다’는 원어( 파라칼레오 )는 ‘권면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했다(살전 5:11, 14).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이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온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사람을 속인다.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 준다. 죄는 속이는 자이다. 죄의 속임으로 사람이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죄는 병균과 같아서 몸 속에 놔두면 해롭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해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범죄함으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힘쓰고 또 다른 이들이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믿음과 선행의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는 원어는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러한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모든 성도는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한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가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되고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15-16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격노케 하였었다.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으로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던 것이다. [17-19절] 또 하나님이 40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의 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불평, 원망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었다. 본절에 ‘그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또한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참 평안과 안식을 가리켰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천국의 예표이었다. 순종치 않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들의 불신앙과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왔다.
히브리서 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셨다. 우리는 그를 바로 알고 믿고 사랑하며 존숭하며 그의 명령과 교훈을 따르자.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보다 더 뛰어나신 자이시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였고 구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처음 다섯 권의 책을 썼다. 그는 구약 종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연약한 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며 충성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고 존숭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굳게 믿고 순종하며 또 피차 권면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하며 고통 중에 신음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출되었으나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세우신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고 거역하고 불순종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다 멸망하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신약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 실패의 역사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믿고 확신하고 순종해야 하고 또 피차 권면하고 위로 격려해야 한다. 4장: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1-2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는]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자들이다.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성도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갔다(눅 23:43). 또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 모두는 다 변화를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인들 중에 낙오자가 없도록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3절] [이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들어감이니라].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이미 믿는 우리는 죽은 후에 하나님의 안식, 즉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또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는 이미 하나님의 안식과 평안을 맛보며 누린다(마 11:28; 요 14:27). [4-6절] 제7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7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있고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복음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서 수고로이 사는 인생들에게 안식의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셔서 부르실 자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았으나 순종치 아니함으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다.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7-9절]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었다. 영원한 안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수고로운 삶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왔다(창 3:17-19).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수고에서 구원을 얻고 평안과 안식을 정신적으로 이미 누리고 있고(마 11:28) 또 장차 천국에서 그것을 영육으로 풍성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누리게 될 것이다. [10-11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님 믿고 죽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눅 16:22, 25; 23:43) 지금 천국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다(계 14:13).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라고 권면한다. 신앙생활과 성화(聖化)는 우리의 성실한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그러한 노력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본에 떨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야 한다. [12-13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드러남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숨은 불신앙과 불순종을 남김 없이 다 들추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마땅한 의무에 대해 깨달음이 부족하여 게으르고 부족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람을 구원시키기에 유능하다.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숨은 생각과 뜻을 꿰뚫어 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심을 다시 한번 더 언급하면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구약시대에 에녹과 엘리야를 통하여 예표되었고 신약시대에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서 증거되었다(행 1:9-11).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능력과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심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신 신적 구주이신 큰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할 때 큰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고 말한다. ‘믿는 도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말한다. 그것의 핵심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속죄사역을 이루셨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그 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것을 굳게 믿고 확신해야 한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체휼하다’는 원어( 쉼파데사이 )는 ‘동감하다, 동정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을 경험하셨고 미움, 비난, 욕, 배신, 매맞음, 또한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목마름과 고통까지 경험하셨다. 또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참 사람이시며 또한 참 하나님이셨으므로, 그의 인성(人性)은 그의 신성(神性)의 도우심과 보호 속에서 무죄 상태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상, 그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죄인들을 위한 대속(代贖)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죄인은 자신의 죗값을 받아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 제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대속 제물이 되기에 합당하셨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시기에 합당하셨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크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 승천하신 자,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자, 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신 자가 계시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부족하거나 연약하지 않았다면 이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신적 구주를 주셨던 것이다. ‘때를 따라 돕는’이라는 원어( 에이스 유카이론 보에데이안 )는 ‘때를 따라 적절한(timely) 도움을 위해’라는 뜻이다. ‘담대히’라는 원어( 메타 팔레시아스 )는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때마다 그의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그의 이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를 원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거울 삼아 불신앙과 불순종을 버리고 믿고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시다. 그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후에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시시때때로 도우시는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말씀을 통해 그를 더욱 알고 믿고 확신하고 따르자. 셋째로,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그는 우리의 부족과 연약을 잘 아시는 자이시므로 우리를 더욱 동정하시고 도우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적절한 도움을 얻기 위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5장: 멜기세덱 같은 대제사장 [1-3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대제사장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하나님께서 직접 그 역할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그 일을 한다. 대제사장을 사람들 중에서 택하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을 위해 속죄제물을 드릴 때 무지하고 미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백성을 위해 속죄제사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본 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2: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좋은 대제사장이시며 좋은 구주이시다. [4-6절]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대제사장은 스스로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아론처럼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야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대제사장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높이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 그에 관하여 ‘너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고 하셨다. 이 메시아 예언들은 각각 시편 2:7과 시편 110:4에 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구절에서 ‘반차’라는 원어( 탁시스 tavxi” )는 ‘반열, 특질’이라는 의미이며, 시편 본문에 나오는 원어( 디브라 )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멜기세덱의 특질을 가진 혹은 그 모습을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이 세상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일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 22장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눅 22:41-44). 이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의 신비를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우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신 인성(人性)을 가진 사람이시다. 예수께서는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는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과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나,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심을 인해 들으심을 얻었다는 말씀은 참으로 신비하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성경이 증거하는 바이다. [8-10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난을 당하며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빌 2:8). 그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특히 그의 인성(人性)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의 신성(神性)은 본래 완전하셨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완전함이 증거되셨다. 그의 순종과 의는 완전해졌고 그의 속죄사역은 다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과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이렇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며 온전케 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18). 비록 믿는 이들의 순종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믿고 실제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 곧 한번 받으면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11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구약성경 시편 110:4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그는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싸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맞으며 축복했던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창 14:18-19). 그때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창 14:20). 살렘 왕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에는 깊은 예표적인 뜻이 있었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점점 더 경건해지고 의로운 인격이 되며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지식이 많아지고 말씀의 깨달음이 깊어진다. 그러나 서신의 수신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12절] [이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되었음이라]. 본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은 믿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마땅히 영적으로 성장하여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선생들이 되어야 했었다. 신자는 믿은 지 여러 해가 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사람은 복음 진리를 듣고 거듭나 믿고 회개함으로 새 생활이 시작되고, 성경말씀으로 양육되어 그의 지식이 자라고 견고해지고 점점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새 신자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우유나 마시고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할 자들이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다. 하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이다. 전자는 엄마의 젖이나 우유만 먹는 어린아이들과 같고, 후자는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는 성장한 자들과 같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들 즉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만 받을 수 있는 정도의 교인들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모든 교리와 모든 생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교인들이다. 세례 대상자들을 위한 학습반 공부의 내용들은 전자를 위한 것이지만, 신구약성경의 자세한 강해나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 지식과 윤리적 문제들이나 여러 이단적 신학 사조들에 대한 강론은 후자를 위한 것이다. [13-14절]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계속 실천함으로 인해 지각이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본 서신을 받는 자들은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와 같았다. ‘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가리킨다. 성경말씀의 내용과 목적은 의(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면 그것이 의이다. 성경의 목표는 의이다. 그것은, 의가 없었던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은혜의 복음과 또 이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할 교훈들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실제로 의롭게 사는 것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 실제로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수신자들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부족했다. 영적 성장은 단지 이론적 지식으로 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 우리의 지각과 감각이 연단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됨으로 이루어진다. 영적 성장은 성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또 선악을 분별하는 지각과 감각이 자람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우리를 위한 영원하신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대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사람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는 많은 고난을, 특히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신비를 다 알지 못하지만, 그는 우리의 연약을 경험하신 우리의 좋은 대제사장이시며 좋은 구주이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고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대속을 이루셨다. 그는 우리의 죄사함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는 우리의 놀라운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자.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그를 믿고 순종하자. 넷째로, 우리는 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만 이해하고 어려운 말씀들을 감당치 못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아직 남을 가르치거나 돌볼 힘이 없고 진리를 위해 싸울 힘도 없다. 그러나 교회에는 영적으로 성장한 자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감당하는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굳게 서서 의를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씀의 실천을 통해 지각이 연단되어 선과 악을 분별하는 힘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교회 안에 믿음이 약한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 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진리들에 머물지 말고 성경의 어려운 말씀도 읽고 연구하며 배워야 한다. 또 모든 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교회 안에 처음 믿는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붙들어주는 자들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우고 실천함으로 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6장: 확실한 소망을 가지자 [1-2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성도가 믿은 지 오래되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넘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적 내용으로 몇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이다. 죽은 행실이란 죄로 죽은 행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불경건, 우상숭배, 돈 사랑, 불의, 미움, 음란, 거짓, 탐욕 등이다. 죄를 회개함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며 기본이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다. 회개한 자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섬기는 것은 경건의 기본적 요소이다. 회개와 믿음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다(행 20:21). 셋째는, 세례들이다. ‘세례들’은 죄씻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물세례는 그것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또 성도는 실수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의 샘에 나아가 씻음을 받는다. 그 씻음은 반복적이다. 넷째는, 안수이다. 세례식의 안수는 죄씻음을 상징하고, 임직식의 안수는 회중으로부터 그 직분의 구별을 나타내고, 병자에게 안수함은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구하는 뜻이 있다. 다섯째는, 죽은 자의 부활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5:29).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다.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하다. 천국이 영원하듯이, 지옥도 영원하다(막 9:43). 우리는 이런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에만 머물거나 그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한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영적 성숙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의의 말씀을 경험하며 선악을 분별하는 영적 성숙을 말한다. [3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구원적 신앙의 시작이나 그 신앙의 성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시다(히 12:2).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이 세상에서 그의 허락하심 없이 되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구원과 믿음도, 믿음의 성장도 그러하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라나게 하신다(고전 3:6-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신앙의 성숙함에 나아갈 것이다. [4-6절] [이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없음이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본문은 우리가 초보적 진리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보인다.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씀은 복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한 내용들, 즉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내세에 있을 부활과 천국의 기쁜 일들과 심판과 지옥의 두려운 일들에 대해 믿게 된 것을 뜻하는 것 같다. ‘타락한 자들’이란 기본적 신앙에서 떨어져 배반한 자들 즉 배교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혹은 공공연하게 욕을 보였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하여 배교자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우리는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도가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 즉 소위 ‘성도의 견인(堅忍)’을 밝히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요 10:28; 빌 1:6),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과 중보 사역의 완전함, 성령의 인치심의 진리들은 그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자들은 잠시 연약할 수 있으나 마침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가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이해하지 말고 가상적인 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타락하여 믿음을 배반했다면 그는 참으로 중생한 자가 아닐 것이다. [7-8절]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단비, 은혜의 단비를 받아 성장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기는커녕 가시와 엉겅퀴 같은 나쁜 열매를 맺으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마침내 지옥 불에 던지울 것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타락과 배교의 위험한 경계선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성장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리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9-10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이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사랑의 수고로](전통사본)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하심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 편지 수신자들이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 ‘구원에 가까운 것’이라는 원어( 에코메나 소테리아스 )는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KJV, NASB, NIV) . 그것은 그들에게 구원에 수반하는 행위의 열매들이 있다는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하며 배교를 경고했지만, 실상 그들 속에 좋은 것들과 선한 행위의 열매들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셔서 그들의 행위와 그들이 성도들을 섬긴 것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행위’라는 말은 그들의 선한 행위를 가리킨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의 수고로 성도들을 섬겼고 또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도들을 섬기는 행위로 표현되었다. 사람들은 우리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도 곧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다 기억하신다. [11-12절]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저자의 간절한 소원은, 첫째로, 이 서신을 받는 수신자들이 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희 각 사람이’라는 말은 이 권면의 말씀이 교회의 일부 사람들에게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기를 원함을 나타낸다.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말은 열심 있는 성도들과 비교하여 그들의 부지런과 동일한 부지런이라는 뜻이다. 모든 성도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둘째로, 성도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소망의 풍성함’이라는 원어는 ‘소망의 충만한 확신’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살았고 마침내 약속들의 성취를 받았다. 그들이 받은 약속들이란 죽은 후에 그들의 영혼들이 들어간 천국과 거기에서의 안식이다. [13-15절]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받았음이니라]. 본문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의 예로 아브라함을 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처음 주신 것은 하란에서이었다고 보인다. 그때 그의 나이는 75세이었다(창 12:4).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는 것은 이 75세부터 그가 이삭을 아들로 받았던 100세까지 약 25년 간의 세월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25년 간의 세월을 의심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기대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오래 참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내용이었고, 이것은 메시아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의 약속이었다. [16-18절]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어떤 것의 참됨을 엄숙히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모든 논쟁에서 진실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맹세하며 말씀하심으로 그 약속을 보증하셨다(창 22:16-18).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첫째로 그의 약속하심 자체이며, 둘째로 그의 맹세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19-20절]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성도의 소망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휘장’이라는 말( 카타페타스마 )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가리킨다(히 9:3).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의미한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께서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으므로, 우리의 소망은 더욱 견고하다.
히브리서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을 넘어서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들은 회개, 믿음, 세례, 죽은 자들의 부활, 심판 등이다. ‘완전한 데’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둘째로, 우리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보적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의 변질이며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다. 우리는 이런 불신앙과 불순종에 떨어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동일한 부지런을 가지고 확실한 소망에 이르자.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로 주신 확실한 내용이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과 같다. 우리는 그 소망을 확실하게 붙들자. 7장: 더 좋은 소망 [1-2절]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평화, 평안]의 왕이요. 멜기세덱은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살렘 왕으로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가서 싸워 이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한 신비한 인물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히브리어는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다. 또 살렘 왕이라는 말은 ‘평안의 왕’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는 공의로 다스리실 평안의 왕이실 것을 예언하였다(사 9:6-7). [3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자이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덱을 신비한 베일에 감추신 것은 그를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 삼기 위하심이었던 것 같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비슷한 자로서 역사상 잠시 언급된 후 언급이 없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메시아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4-7절]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변론할 것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점은 두 가지다. 첫째로,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아론의 자손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형제들에게 십일조를 받았지만, 레위 족보에 들지도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둘째로,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 [8-10절]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 지파 제사장들은 죽을 자들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지만, 멜기세덱은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자로서 십분의 일을 받았다. 이 점에서도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보다 뛰어났다. 레위는 아직 그 조상 아브라함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할 수 있다. [11절]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은 부족하였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이 부족함이 없었다면 아론의 반차[반열, 모습]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반열, 모습]를 좇는 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 직분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말한 온전함은 ‘완전한 사죄와 완전한 의, 완전한 화목과 완전한 교제의 회복’을 가리킨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흠과 점이 많았고 종종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부패되었고 육신적으로도 죽을 자들이었다. 또 그들의 제물들도 죄인들에게 참으로 사죄(赦罪)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실상 장차 오실 메시아의 속죄사역의 상징과 예표(豫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모습을 좇은 제사장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구약시대의 율법 제도는 폐지되고 복음의 새 시대가 시작된다. 율법은 그의 대속 사역에 대한 상징과 예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의 율법을, 즉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다(마 5:17). 그의 십자가의 대속 사역으로 죄인들에게 완전한 사죄와 완전한 의, 완전한 화목과 완전한 교제의 회복이 이루어졌다(롬 3:21-22; 10:4). [12-13절] [이는]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변역할 것임이니] [이는]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것임이니라]. 제사장 직분의 변화는 율법 제도의 변화를 보인다. 율법에 의하면, 제단 일은 레위 지파 제사장들 즉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 맡겨진 일이고 다른 지파 사람들은 그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전혀 다른 족속에 속한 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10편에서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을 메시아로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다. 여기에 신약시대의 새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암시되어 있었다. [14-15절] [이는]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분명함이라].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를 영원하게 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메시아가 유다 지파에서 나게 하지 않으시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나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을 보면,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와 율법 제도가 폐지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 [16-17절]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아론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아 구주가 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구주가 되셨다. ‘무궁한 생명’이란 이 세상의 삶에 제한된 육신의 생명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과 달리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 그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18-19절] [이는]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페하였음이라.] ([이는]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못함이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보내신 이유는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가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여지기 때문이었다.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하였다. 사람은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롬 3:20). 율법은 사람의 죄 문제를 참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제도나 율법 제도는 그 자체로는 연약하고 무익했다. 그것은 앞으로 오실 완전하신 메시아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러므로 메시아께서 오셨으므로 율법 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 좋은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義)가 되셨기 때문이다. [20-21절] 또 예수께서 제사장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써 제사장이 되셨다는 점에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율법 제도 아래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심으로 메시아를 제사장으로 세우셨다(시 110:4). [22절]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이’라는 원어( 카타 토수톤 )는 ‘이렇게 큰 것에 의해’[이만큼]라는 뜻이다. 여기에 ‘큰 것’이란 하나님의 맹세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더 좋은 언약’이란, 구약이 예표적 성격의 언약이었으나 신약은 실체적 성격의 언약임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위해 새 언약을 세우셨다. [23-24절] 저희 제사장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신다는 점에서도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으시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효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변하지 않고 영원하다. ‘갈리지 않는다’는 원어( 아파라바토스 )는 ‘임시적이지 않다, 변하지 않다, 영속적이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하시다.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자기를 힘입어’라는 말( 디 아우투 )은 ‘그를 통하여’라는 뜻이고, ‘온전히’라는 말( 에이스 토 판텔레스 )은 ‘끝까지, 영원히 (Vg, Syr, NASB) , 완전히 (Thayer, NIV) ’라는 뜻이다. ‘간구한다’는 원어( 엔튕카노 )는 ‘중재한다, 중보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끝까지, 영원히,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의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26-27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시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셨고, 단번에 자신을 드려 우리를 위한 속죄사역을 이루셨고 의(義)를 이루셨다. ‘단번에’라는 말( 에파팍스 )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완전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제사가 필요 없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이루신 의(義)는 완전한 의이다. [28절] [이는]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세우셨음이라].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속죄사역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속죄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였다.
히브리서 7장의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시다. 구약시대 아브라함 때에 나타났던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었다. 멜기세덱이라는 말은 ‘의(義)의 왕’이라는 뜻이며 그는 살렘 왕인데, 평안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것들은 다 메시아의 명칭이다.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없었다. 메시아께서는 그의 신성(神性)에 있어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으시며 족보도 없으시며 시작한 날이나 죽은 날도 없으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고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의 아론의 자손들인 대제사장들보다 더 높음을 보인다. 이런 모든 점들에서, 그는 메시아의 예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 같은 인물이시다. 그는 의의 왕이시며 평안의 왕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신적 존재이시다. 그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보다, 또 율법 제도보다 더 높으시다. 우리는 그를 믿고 사랑하고 섬긴다. 둘째로, 구약의 율법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폐지되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과 율법 제도가 사람에게 도덕적 완전함 즉 의(義)를 주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이루실 의에 대한 예표이었다. 성경이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다른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에 대해 예언한 것은 메시아의 오심으로 구약의 제사장 제도가 변경될 것을 보이며 그것은 또한 구약의 율법 제도의 폐지를 암시한 것이었다.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제 구약의 제사장 직분과 율법 제도가 폐지되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알아야 하고 구약의 율법 제도의 폐지를 이해해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악이 없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는 실제로 속죄사역을 성취하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의가 되셨고 거룩함이 되셨다.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우리에게 더 좋은 소망이 되셨고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또 그는 항상 살아계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중보의 사역을 하신다. 그는 그를 믿는 자들을 영원히,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의 사역을 감사해야 한다. 8장: 더 나은 직분 [1-3절]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 레이투르고스 )[장막에서 섬기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살아계시고 자신을 단번에 드려 죄인들을 대속(代贖)하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고 주께서 친히 만드신 하늘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셨다. 그는 땅 위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택자들을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4-6절] [이는]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것임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디아포로테라스 )[더 나은, 더 뛰어난]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장막의 봉사자가 되신 까닭은 땅에서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레위 자손 제사장들이 땅에서 섬겼던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 위에서 그에게 보이셨던 본을 따라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제 바로 그 하늘 성막에서 섬기는 자가 되신 것이다. 그는 이제 더 나은 직분을 얻으셨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율법 아래서의 레위 자손 제사장들의 사역과 비교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들의 사역과 비교하여 ‘더 나은’ 정도는 그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 즉 새 언약의 중보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7-9절]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들과 맺으셨던 옛 언약과 비교된다. 이 두 언약은 다 하나님의 은혜언약 안에 속한다. 그러나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없는 완전한 언약이 아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언약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에 대해 예언하신 것을 보면(렘 31:31-34) 첫 번째 언약은 흠이 있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 예언된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우신 언약이다. [10-12절]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이다. 첫째는 내면성이다. 옛 언약은 두 돌판에 새겨져 있고 후에 율법책에 기록되어진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할례, 마음의 변화, 즉 중생(重生, 거듭남)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난다. 새 언약은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언약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족속에서 택하신 자들과 맺으신 언약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셋째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다. 옛 언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었다. 또 그들은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사람이 그를 경외하고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다(신 6:4-7). 그러나 이사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사 1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족속,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다. 오늘날 신약교회는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들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있다. 넷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이다. 옛 언약에서 죄사함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반복적으로 속죄의 제사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우리의 대속(代贖)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영원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3절]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옛 언약이 일시적이고 때가 되면 폐지될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실 필요가 없었고 또 주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이제 그가 새 언약을 말씀하셨으므로 그것은 옛 언약이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없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구약시대에 예언되었고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옛 언약은 폐지되고 이제 그것이 새 언약으로 대치될 수밖에 없다.
본장은 몇 가지 진리를 증거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서의 제사장들보다 더 나은 제사장 사역을 하신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단번에 드려 대속(代贖)을 이루셨고 지금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고 영원히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새 언약의 중보를 의미한다. 예언된 새 언약의 특징은 네 가지인데, 첫째는 내면성, 즉 중생(重生, 거듭남)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변화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며, 셋째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지식의 충만함이며, 넷째는 완전하고 영원한 죄사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옛 언약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셨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셋째, 옛 언약은 일시적이며 폐지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제 옛 언약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대제사장, 더 나은 언약, 즉 새 언약의 중보자를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代贖)을 굳게 믿고 담대히 그러나 겸손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9장: 영원한 단번 속죄 [1-5절]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구약시대의 성막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성소(聖所, 하기아 a{gia )라고 불린다. 성소 안에는 예수님의 세상에 빛 되심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사역을 상징하는 등대가 있었고, 또 예수님의 생명의 떡 되심을 상징하는 떡상과 그 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쌓아놓은 떡(진설병 陳設餠)이 있었다. 둘째 부분은 지성소(至聖所, 하기아 하기온 )라고 불린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중보 사역을 상징하는 금향로 8) 와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가 있었다. 속죄소를 덮는 ‘그룹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특히, 속죄소는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통해 이루실 속죄사역을 상징한다. 그것은 율법으로는 정죄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 구원을 증거한다. [6-7절]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제사장들은 보통 성소에 들어가 섬기는 일들을 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유대의 달력으로 7월 10일 속죄일에 1년 1차씩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 날 대제사장은 아마 3번 지성소에 들어갔던 것 같다(레 16:12-15). 그는 향로를 가지고 들어가 지성소에 연기가 가득하게 했고, 또 자신을 위한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뿌렸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을 상징하였다. [8-10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 하기온 )[지성소](KJV, NIV)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에이스 톤 카이론 톤 에네스테코타 )[현재의 때를 위한](원문, KJV, NASB, NIV)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구약 제도 아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길, 즉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구약 제도는 비유적, 예표적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위한 것이었다. 구약의 제물들은 그 섬기는 자들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었다(7:11, 19). 사실, 짐승의 피는 사람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없다. 그것은 개혁할 때까지 주신 것이었고 그 개혁의 때가 신약시대이다. 예언된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구약의 예표는 성취되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사함의 구원을 얻는다(히 7:27). [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장래 좋은 일’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일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영원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하늘 성소 곧 천국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이 일을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는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의 속죄의 핏값은 너무 크고 완전하기 때문에 ‘영원한 속죄’라고 불린다. 또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매년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표현되었다. 그의 죽으심은 한번으로 충족했고 더 이상 반복되실 필요가 없다. [13-14절]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구약시대에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서 사람들의 몸의 부정을 깨끗케 하고 거룩케 하였다. 그렇다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흠 없는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더 효력이 있겠는가? ‘영원하신 성령’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가리켰다고 본다. 무죄하신 신적 구주 예수님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속량할 수 있었다. 그 피는 효력이 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은 행실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하며 우리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담대히 섬기게 만든다. 구약 성도들도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를 통해 죄사함과 새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은 더 크고 확실하다. [15절] [그리고]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또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영원한 기업 곧 천국의 약속을 얻게 한다. 영원한 나라, 영생의 나라인 천국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다. [16-17절] [이는]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없음이니라]. ‘유언’이라는 원어 ( 디아데케 )는 앞절의 ‘언약’이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언약은 유언적 성격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기업 상속을 유언했다면, 아버지가 죽은 후 그 유언이 효력이 있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효력을 가지게 된다. [18-21절]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책에 기록하고 피를 취하여 그 책에 뿌리고 또 모든 백성에게 뿌렸고 그 책은 ‘언약서’라고 불리었고 그 피는 ‘언약의 피’라고 불리었다(7, 8절).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대로, 그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바 . . . [새] 언약의 피”이었다(마 26:28). [22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는 생명을 가리키며 피흘림은 죄사함의 의미가 있다(레 17:11).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필요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받으셨고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다. [23절]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성막 제도는 하늘의 원형에 대한 모형에 불과했고 짐승의 피뿌림도 장차 이루어질 완전한 제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인 성막 기구들은 짐승의 피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지만, 하늘에 있는 성막 자체는 더 좋은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드려져야 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실제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자신의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다. [24절]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나타나심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완전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그 속죄의 피를 가지고 천국 곧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셨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그것은 그의 계속적 중보 사역을 의미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부족과 실수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가 흘리신 속죄의 피 공로를 끊임없이 적용하시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중보 사역을 계속하신다(롬 8:34). [25-26절]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드리지 아니하셨나니] 그리하면[왜냐하면 만일 그러하였다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께서 역사의 마지막 시대에 오셔서 자기 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그 피는 완전한 속죄의 피이다. [27-28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죽으셨고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다. 재림의 주님은 죄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단번에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히브리서 9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때까지의 예표이었다. 구약의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였다. 특히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사역을 예표하였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예표의 실체로 오셔서 친히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의 사역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친히 자기 몸을 드려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의 속죄의 죽음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중보 사역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효력은 크고 영속적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 그가 자신에게 주셔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하신 자들, 성령께서 인치셔서 중생시키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이 연약할 때마다 아버지께 중보 사역을 하시며 그들을 성화의 길로 인도하신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목표는 영광의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그는 의인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0장: 담대히 서로 격려함 1-18절,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 [1-4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죄에 대한 의식, 죄책에 대한 의식]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율법 제도는 장차 오는 좋은 일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그림자 즉 예표이었고 참 형상 곧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는 부족했다. 율법 제도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절기 때마다 제사를 반복해 드렸다. 만일 제사가 사람을 온전케 하였다면 그것은 해마다 반복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해마다 죄를 생각나게 할 뿐이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사람들의 죄를 없이 할 수 없었다. 여기에 구약시대의 율법 제도, 즉 구약 제도의 부족이 있었다. 즉 상징적인 짐승의 피는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 하거나 사람들을 온전케 하지 못하였다. [5-7절] 그러므로 [그가]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제사를 원하지 않으심과 메시아를 통해 한 뜻을 이루실 것을 예언하였다. 본문은 구약의 시편 40:6-8의 헬라어 70인역을 인용한 것이다. 헬라어 70인역 본문은 히브리어 본문과 조금 다르다. 헬라어는 로마 시대에 공용어였다. 헬라어 70인역 구약성경은 사도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성경이었던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이 헬라어역 구약성경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인용된 시편 본문의 내용은 메시아께서 짐승의 번제물과 속죄제물로가 아니고 자신의 몸을 드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과 이것이 두루마리 책 곧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고(요 5:39), 또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7).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사역에 대해 예언하였다. [8-9절]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번제와 속죄제는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께서는 오셔서 그 첫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 곧 자신의 몸을 드려 이루실 사역을 이루실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 제도, 제사 제도의 폐지와 그 대신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사역의 완성이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10절]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려 우리의 속죄를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얻었다. 여기에 ‘거룩함을 얻었다’는 원어( 헤기아스메노이 )는 완료시제로서 우리의 거룩함이 시작되거나 진행 중인 것이 아니고 완료된 것임을 말한다. 같은 표현이 고린도전서 1:2에도 나온다. 거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라고 말하였는데, 원문에는 역시 완료시제이므로 ‘거룩하여졌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을 얻었다. 이것이 법적인 거룩과 의, 즉 법적인 구원인 것이다. [11-13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우데포테 oujdevpote)[결코]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제사들은 범죄자들의 죄를 결코 없애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 곧 속죄제사를 드리셨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속죄제사의 행위였다. 그의 피흘리심은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贖)하는 행위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에는 죄를 위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그의 원수들인 사탄과 악령들과 그 종들이 다 굴복하게 되기까지 거기서 기다리시다가 그때가 되면 심판자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다. [14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온전케 하셨다’는 원어( 테텔레오켄 )도 완료시제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케 하심과 의롭다 하심이 완전하였음을 증거한다. 물론, 이것은 법적 개념이다. 실제적으로는 아직 우리 속에 불결과 죄성이 있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거룩과 의를 얻은 자들이 되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하였다(롬 10:4). [15-18절]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삶은 구약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성령의 법으로 산다. 성령의 법은 종의 법이 아니고 자유의 법이다. 성도는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와 불법을 기억지도 않으신다. 죄를 위해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완전하다. 이 구원 안에서 우리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고 천국의 영광을 확신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율법 제도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짐승의 제물들이 사람들의 죄들을 없이하지는 못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주 예수께서는 인류의 참 구주로 오셨다. 그는 인류를 위해 참으로 좋은 일을 하셨고 율법이 예표한 참 형상이셨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고 그를 믿는 자들은 법적으로 거룩함을 얻었고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 사역을 하신다. 셋째로, 그러므로 다시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은 완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그래서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미사는 이 복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단지 순종생활에 힘써야 한다. 19-39절, 믿음의 담력과 인내가 필요함 [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 톤 하기온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그의 피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피’이다(히 9:12). 죄인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으나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자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께서 성소 휘장을 찢듯이 자신의 육체를 찢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다. 그 길은 구약 제도 아래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 길이며 생명력이 넘친 길이다. 누구든지 이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 [21-22절]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악한 양심이 깨끗케 되고](NASB, NIV)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크신 제사장이시다. 우리는 그의 피로 악하고 더러웠던 양심이 깨끗해지고 우리의 몸을 맑은 물로 씻은 바 되었다. 이것이 죄사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온전한 믿음으로’라는 원어( 엔 플레로포리아 피스테오스 )는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라는 뜻이다. 우리는 충만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23절]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 텐 호몰로기안 테스 엘피도스 )[소망의 고백]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우리는 소망의 고백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의 소망의 주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할 이유는 약속하신 이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들이 더 가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별로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24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우리는 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바울은 디도서 2:14에서 “[주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이 의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돌아보며 서로 격려해야 한다. 여기에 성도들 간의 교제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서로 교제하며 권면해야 한다.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천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자고 덧붙여 교훈한다. 사람에게는 게으른 성질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이기를 폐하고 그것이 습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본받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주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 모이는 것은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시간이다. 그것은 또 성경말씀의 교훈을 받아 힘을 얻고 자라가는 기회이다. 또 그것은 서로 교제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좋은 기회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주 모여야 한다. [26-27절] [이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헤쿠시오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있을 것임이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말은 ‘구원받은 후’라는 뜻이다. ‘죄를 범한즉’이라는 원어( 하마르타논톤 , 현재분사)는 ‘계속적 행위’를 가리킨다. 즉 ‘만일 우리가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버리고 그와 정반대로 행하여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한다면’이라는 뜻이다. 이런 자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을 것이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심판의 선언은 구원받은 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경고이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반드시 소유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믿다가 타락한 사람은 가룟 유다처럼 외형적으로 믿음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만 사실상 중생하지 못한 자라고 본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종종 경고의 말씀을 준다(마 7:21; 롬 8:13; 11:22; 히 6:4-8). [28-29절]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시대에 비추어 그의 경고의 말씀을 강화시킨다. 그는 인간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의 벌도 엄중하였다면,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제로 오셔서 주신 복음 진리를 저버린 죄의 벌이 얼마나 더 크고 엄중하겠는가라고 말한다. [30-31절] [이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앎이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복음 진리를 저버린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심히 강포했던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고(창 8-10장) 심히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을 유황불비로 심판하셨고(창 19장) 또 모세를 거역했던 고라와 그 동료들을 산 채로 땅 속에 묻으셨다(민 16장). 우리는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32-34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이는] 너희가 갇힌 자[나의 갇힘들] 9) 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하늘에 있는] 10)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빛을 받은 후’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뜻이다(고후 4:6).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예수님 믿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경험하였고 그 싸움에서 잘 참았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일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환난을 당했고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더 낫고 영구한 기업 즉 천국을 확신하였고 그 소망이 견고했기 때문에 옥에 갇힌 주의 종들을 동정했고 자기들의 재산과 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당하였다. [35-36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확신](KJV, NASB, NIV)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이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함이니라]. 우리는 믿음의 담대함과 확신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 ‘큰 상’은 믿음의 결과인 영생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 또 성도의 믿음의 길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은 인내를 통해 온전케 된다. 참으로 믿는 자는 끝까지 참을 것이다. [37-39절] [이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생략) 11)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하셨음이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잠시 잠깐 후’라는 표현은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께서는 3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고 세 번째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2:7, 12, 20).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한다. 불신앙은 멸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믿음은 구원을 가져온다(막 16:15-16; 요 3:3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즉 믿음의 충만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내용들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의인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 우리 각인은 사랑과 선행을 힘쓸 뿐 아니라, 그 일을 서로 격려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증진에 유익하다. 다섯째로, 우리는 고의적으로 계속 범죄하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중생한 자는 배교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고는 필요하다. 사실, 거듭난 자만 이 경고를 듣고 순종할 것이다. 여섯째로, 우리는 믿음의 담력과 인내를 끝까지 가져야 한다. 11장: 믿음의 선조들 본장은 ‘믿음의 장’으로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한다. 12)
1-7절, 믿음의 선조들 아벨, 에녹, 노아 [1-2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얻었음이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이루어질 것이지만 믿음을 통해 현재 우리 속에 있고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는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들을 보지 못하나 그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것들은 장차 사실로 증거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선진들이 믿음으로써 증거를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인물들을 가리킨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사람들 중에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 맨 마지막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한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알려주신 진리이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모세는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쓰면서 첫 번째 책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의 근본이 되는 진리이며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이 11번 나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상 행하신 많은 일들과 말씀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통해 믿게 되었다.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지 않고 그 세계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들은 나타난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보이는 물질세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가 실상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그런 비슷한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나고 있다. 사람의 생각이 사람의 몸을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나 힘이 기계들을 움직인다. 우리는 물질이 전부라거나 물질이 영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영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해야 하고 또 창조주와 섭리자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전지전능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4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본문은 믿음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보다 나은 점은 정성과 피의 제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린 것은 그의 정성을 증거한다. 또 그가 그 양을 죽여 피를 흘린 것은 그의 속죄 신앙을 보인다.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언제 어떻게 아벨에게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벨은 아마 하나님께서 짐승을 죽이고 그 가죽옷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사건을 듣고 짐승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내어보내시기 전에 그들을 위해 한 짐승을 죽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가 짐승을 죽이신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죽음을 본 사건이었다. 그는 가죽옷을 통해 장차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들의 죄가 가리어질 것을 암시하셨다. 아벨은 이 사건을 통해 짐승 제사를 이해했을 것이다. 짐승 제사는 장차 오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을 암시하였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들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으나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속죄 신앙이며 아벨에게 있었던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었다고 본다. 아벨은 지금도 이 믿음을 증거한다. [5-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할 것임이니라].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므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기웠다. 에녹의 옮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며 천국이 참으로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었다. 본문은 에녹이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한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고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녹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고 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은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옮기워졌다.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죽일 것이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믿었고 방주를 예비하였다. 이것은 노아의 평소의 믿음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준비하여 마침내 그의 모든 가족들을 다 구원하였다. 이와 같이,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 즉 장차 임할 홍수 심판과 그때 얻을 구원을 믿었다. 노아의 믿음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믿음이었다. 노아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다.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았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義)의 후사가 되었고 모든 성도들은 그의 믿음을 본받는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성경에 근거하여 믿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믿자. 이것은 신자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책인 성경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믿음이다. 셋째로, 우리는 아벨처럼 최선의 정성과 속죄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아벨은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정성과 속죄의 제사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최선의 정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를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에녹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자.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고 300년간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죽지 않고 천국에 들어갔다. 다섯째로,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자. 노아는 장차 있을 홍수 심판 경고와 방주 건립에 대한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순종했다. 우리도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자. 8-22절, 믿음의 족장들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한 민족의 조상을 삼으려 하셨을 때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순종하며 나갔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두고,’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즉시 그를 따랐다(마 4:18-22). 천국을 향한 우리의 걸음도 비슷하다. 우리는 천국까지의 과정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9-10절]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BDAG) 건축자인,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다. 그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다.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도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았고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도 영구적인 집을 건축하지 않았다. 본문은 그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한 성을 만들어주실 것을 내다보았다. 지혜롭고 실력 있는 설계자이시며 뛰어난 건축자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실 도시는 이상적 도시일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은 생활, 장막 생활을 하고 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때때로 이리저리 이사하다가 마침내 몸의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전통사본에는 생략됨)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전통사본) 13)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났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내년 이맘 때, 그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는 처음에 믿지 않았던 것 같다(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 14) 은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다. 그러나 몇 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메시아께서 오셨고 그 메시아를 통해 세상의 모든 택자들이 구원을 얻고 있다. 아브라함은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에 거했고 사라도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그 자손들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겠고 그들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겠고 그 자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된 내용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약속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700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이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질 일이었다. 또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먼 훗날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믿고 소망했다. 또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하며 고백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상은 나그넷길이며 우리의 참 고향은 영원한 천국이다. [15-16절]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15) 을 사모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즉 천국이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자이신, 기초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이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하였고 이 세상의 것들을 바라지 않고 장차 올 것을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 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되어 있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성을 보았는데 그것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이었다(계 21:2, 11). 거기에서는 눈물이나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계 21:4). [17-19절]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서 믿음의 순종을 하였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다. 그 순종은 그의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다. 그의 외아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보인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부활 신앙도 포함했다. 그 사건에서 이삭은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한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과 같았다. 이것은 죽은 이삭이 다시 산 자가 된 것과 같았다. [20-21절]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고(창 27:29)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야곱도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둘째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첫째 아들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의 행위이었다. [22절]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으로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였다(창 50:24-25). 히브리서 11:8-22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순종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는 길은 미지의 길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가 명하시는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는 천국을 사모하자. 믿음의 족장들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실 성을 사모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 사는 동안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자신을 생각했고 하늘에 예비된 참된 본향, 즉 천국을 사모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마지막 목적지, 우리의 최종적 목적지는 천국이다. 주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3). 요한계시록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우리는 그 천국을 사모하자. 셋째로, 우리는 사라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자. 사라는 나이가 많아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고 아들을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그 아들을 출산하였다. 이삭도 에서와 야곱에게 장래 일로 축복하였고,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하였고, 요셉은 출애굽을 예언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을 포함하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능력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굳게 믿자. 넷째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부활 신앙을 가지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것은 그가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그의 부활 신앙을 증거한다. 우리는 죽은 성도의 복된 부활과 영생을 확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23-40절, 세상을 초월한 믿음의 사람들 [23절]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아이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애굽 왕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다. 비록 석 달 동안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아이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믿음이었고 그것은 귀한 믿음이었다. 그들이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선을 받으셨고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교육시키고 훈련시키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 모친이 그의 유모로 그를 기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애굽의 궁중 교육을 받았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처음 5권을 기록하는 데 충분한 언어적, 지식적 훈련을 포함하였다.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선택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으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커서 이 세상의 즐거움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선택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메시아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모세도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었다(창 12:3; 22:18). 그것은 메시아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은 구원의 복을 얻을 것이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누렸던 애굽의 모든 보화들은 다 이 세상에 속한 것뿐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죄악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역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아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줄 것이다. [27절]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무서워 아니하였으니 이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참았음이며]. 모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났다. 그것은 430년 동안 살아 이미 고향같이 친숙해진 애굽을 버리고 어떤 일이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천국을 소망하며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모세는 애굽을 떠날 때 애굽 왕 바로의 분노와 위협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순종하였다. 그의 담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은 담력과 평안을 가져온다. 그러나 불신앙은 불안과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문의 양 기둥)와 문인방(문의 위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 상인방과 하인방)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이스라엘 집을 치지 않게 하려 한 것이었다. ‘유월’(逾越, pass over)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29절]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한다. 본문은 “믿음으로 저희가”라고 말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였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고 백성은 믿음으로 홍해 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다. 홍해는 육지같이 갈라졌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갈대 늪을 지나간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바닷물이 양쪽에 벽이 되어(출 14:22)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한 기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 큰 위기에서 구원하신 기적이었다. 그러나 바로와 애굽 군대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서 바다 속으로 들어왔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통과해 저편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바다가 원래대로 회복됨으로 다 물에 잠겨 죽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강퍅한 애굽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추가적 징벌이었다. [30절] 믿음으로 [저희가]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정복해야 할 첫 번째 성이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6일 동안 매일 여리고 성을 한바퀴씩 돌았고 제7일에는 성을 일곱 바퀴을 돌았다. 그것은 놀라운 믿음의 순종이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이었으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다. [31절] 믿음으로 기생( 포르네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라합의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의 창녀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악된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여인이었다. 그는 분명히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큰 죄인 라합 속에 믿음의 은혜를 주셨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일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그의 간청은 지혜로웠다.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다.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는 라합같이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들은 회개치 않고 믿지 않았고 다 멸망을 당했으나, 라합은 순종치 아니한 동족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고 은혜로 얻은 믿음 때문이었다. [32-34절]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의 많은 예들 중에 단지 몇 사람의 이름들을 추가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등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었다. 사무엘이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다. 또 다윗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다. 다윗과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군대의 진을 물리쳤었다. [35-38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혼 우크 엔 악시오스 호 코스모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아니하였도다](KJV, NASB, NIV))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다. 므낫세 때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 좋은 부활’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킨다. 유다의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다.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선지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했다. 또 선지자 예레미야도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웠다.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다. 또 전해오는 말 16) 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다. [39-40절]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다(요 19:30). 택자들의 구원은 역사적으로,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롬 8:29-30. 지나간 세대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모세와 같이 세상의 부귀 영광과 쾌락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하자.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며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불에 다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자. 둘째로, 우리는 애굽 왕 바로의 진노와 위협, 홍해와 여리고 성 같은 세상의 난관들을 믿음으로 극복해내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는 그런 난관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도우심을 믿고 나아가자. 우리가 믿음으로만 산다면 어려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세상을 초월하는 믿음을 가지자. 건강이나 물질적 복이나 세상적 출세와 성공도 복이지만, 우리는 그것들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몸의 부활,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믿고 사모하며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2장: 거룩함을 이룰 것 1-13절, 믿음의 경주와 징계 [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17)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그들은 믿음의 선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은 때때로 고난 중에 외로워 보이지만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니다. 달리기 경주자가 가벼운 복장을 하고 달리기에 임하듯이, 믿음의 경주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온갖 종류의 세상 염려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의식주에 대한 염려, 돈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아내와 자녀들 등 가정에 대한 염려를 포함한다. 얽매이기 쉬운 죄들은 형제에 대한 미움과 시기, 음란, 거짓과 탐욕 등의 죄악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벗어버려야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할 수 있다. 또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도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성도의 경건생활도 하나의 훈련과정이며 거기에도 인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36은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 피곤해지거나 낙심하여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며 그 경주를 끝까지 잘 마쳐야 한다. [2절] 믿음의 주( 아르케곤 )[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텔레이오텐 )[완성자](KJV, NASB, NIV)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작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자이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가 시작하셨고 그가 온전케 하실 일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고, 또 빌립보서 1:6에서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모범을 보이셨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란 그가 하나님 보좌 오른편에 앉게 되실 일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에게 비난을 들으셨고 침 뱉음과 매맞음을 당하셨고 벌거벗기어 십자가에 못박혀 수치와 고통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그런 고통을 끝까지 참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고 달려야 한다. [3절] [이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함이니라].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자들 때문에 또 심지어 때로는 교회 안의 거짓 형제들의 위선과 부족 때문에 피곤해지고 낙심케 되기 쉽지만, 그때 예수님의 고난과 인내를 생각하며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의 경주에서 피곤해지거나 낙심치 않고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예수께서는 위선적 유대 지도자들에게 미움과 정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셨다. 또 옛날부터 순교의 피를 흘린 신실한 종들이 없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경주와 고난은 아직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렘 12:5). [5절]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하심도 있다. ‘징계하심’이라는 원어( 파이데이아 )는 징계를 포함해 사람에 대한 모든 교육과 훈련을 뜻한다(엡 6:4; 딤후 3:16).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을 가볍게 여기지도, 낙심치도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의 책망과 징계를 잘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매를 경히 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악하고 패역한 마음이며(사 1:5)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에게는 더욱 엄한 징벌과 단련을 주실 것이다. [6-8절] [이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채찍질하심이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미워하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징계하지 않고 버려두시고 무관심하신다. 버려두심과 무관심은 징계보다 훨씬 더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의 징계와 징벌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랑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그가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는 표이며 증거이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징계한다. 좋은 아버지일수록 자녀에 대해 충실히 징계한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 대해 징계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사생자이며 참 아들이 아닐 것이다. [9-10절] 또( 에이타 )[더욱이]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자녀는 그를 징계하는 아버지를 공경해야 한다. 그러하다면 하물며 우리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공의의 섭리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복종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녀가 그를 징계하는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육신의 부모는 그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징계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즉 그들에게 선하게 생각되는 대로 징계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즉 우리로 그의 의와 거룩하심에 참여시키기 위해 징계하신다. 즉 징계의 목적은 우리의 성화(聖化)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감사히 받아야 한다. [11-13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늘어진]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4). 그러나 교훈과 훈련과 징계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의로운 삶은 또한 ‘평안’의 삶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지만, 의인에게는 평안이 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징계를 통해 의의 평강한 열매 즉 의롭고 평안한 삶을 누린다. 성도의 삶은 거룩과 의의 훈련 과정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 심신으로 연약해져 손도 늘어지고 무릎도 연약해지고 다리도 절뚝인다.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는 징계가 구원받은 참 성도의 표요 자신의 성화에 유익한 것임을 깨닫고 힘을 잃지 말고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잘 해야 한다. 우리는 외롭지 않고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싼 많은 증인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와 격려가 된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버려야 한다. 또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경주해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의 시작자와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친히 고난 중에 오래 참으신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에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지만, 우리는 그 징계를 달게 받고 잘 참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 징계는 참 아들의 표이다. 하나님의 징계하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있는 것이며 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자녀 곧 중생한 성도가 아니고 사생자일 것이다.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즉 징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에 참여케 된다. 징계는 받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잘 받고 나면 우리의 인격과 삶은 좀더 거룩해지고 의로워지고 성화를 이루고 온전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낙심치 말고 잘 참아야 한다. 14-29절, 화목과 거룩함을 좇으라 [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또 거룩한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성도간에 원수를 맺는 일은 육신의 죄성에서 나오는 일이다(갈 5:20).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가 화목을 원해도 상대방이 우리를 오해하고 미워하고 악한 마음으로 우리를 해하려는 경우가 있겠지만,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악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물론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고린도후서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사랑은 악을 인정하거나 용납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5-6). 또 거룩함도 하나님의 뜻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거룩하여졌다(고전 1:30; 히 10:10, 14). 그러나 이제 이 거룩은 실제적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지만,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좇으라’는 말은 우리의 성화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함을 나타낸다. 데살로니가전서 4:1,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서 ‘이것’(남성관계대명사)은 거룩함을 가리킨다. 거룩한 자만이 주님을 뵈올 것이다. 예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8). 그들은 언제 주님을 뵈올 것인가? 그들은 천국에서 그를 뵈올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에베소서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15-17절]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베벨로스 )[불경건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표가 없는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교회에 그런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불평, 원망을 가진 자를 가리킨 것 같다. 그런 자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고 더럽힌다. 셋째로, 우리는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음행은 사람에게 있는 대표적 죄악이다.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복을 가볍게 여기고 장자의 특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파는 자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세상 것과 바꾸려는 자가 그러하다. [18-21절] [이는]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黑雲)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아님이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우리가 모든 사람과의 화목함과 거룩함을 좇으며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와 쓴 뿌리와 음행하는 자와 불경건한 자가 없도록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시내산이 아니고 천국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불붙는 산과 캄캄한 구름과 어두움과 번개와 천둥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친 음성으로 율법을 받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짐승이라도 산에 오르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었고 모든 백성은 다 심히 두려워하며 떨었었다. [22-24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구약 백성과 달리, 우리는 시내산 대신 천국으로 나아간다. 시내산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평안이 있는 곳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너희가 이른 곳’이라는 말은 신약 성도들이 영적으로 이미 천국에 들어왔음을 보인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6에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했고, 골로새서 1:13에서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하였다. 본문은 천국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다. 첫째로, 천국은 ‘시온산’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의미한다(계 14:1). 둘째로, 천국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1:10이 말한 ‘하나님께서 설계자이시요 건축자이신 성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셋째로, 천국은 ‘천만 천사’가 있는 곳이다. ‘천만’이라는 말( 뮈리아스 )은 ‘수많은’이라는 뜻이다. 천사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넷째로, 천국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이름들이 다 천국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로, 천국은 ‘만인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다. 그는 만민의 심판자이시며 거기서 자신의 영광을 특별하게 나타내신다. 여섯째로, 천국은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들’이 있는 곳이다. 예수님 믿어 죄사함의 구원을 얻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은 지금 다 천국에 들어가 있다. 그들은 죄성이 없는 온전케 된 영들이다. 일곱째로, 천국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이 계시며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가 있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다. 아벨의 피는 단순히 무죄한 의인의 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더 나은 피, 곧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피이다. [25-27절]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 랄룬타 )[계속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신약 성도들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위엄 중에 말씀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도 성경을 통해, 바른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계속 들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믿고 진지하게 순종해야 한다. 과거에 시내산에서 경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게도 엄한 벌이 내려졌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 음성을 무시하고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더 엄한 벌이 내려지겠는가? 이전에 땅을 진동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키실 것이다. 이것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를 영원히 있게 하시기 위해, 진동할 것들을 변화시키려 하심이다. 마지막 날 하늘과 땅이 다 불타 없어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다(벧후 3:10-13). 천국은 진동치 아니할 나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벧전 1:4) 나라이다. [28-29절]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감사하자](NASB, NIV, Thayer, BDAG).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진동치 않을 나라인 천국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는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뜻을 거스르고 그를 업신여기는 자들에 대해 심판의 불로 소멸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쁨과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화목과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 우리에게 잘못을 행한 자에 대해 일흔 번씩 일곱이라도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 우리는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지 말고 또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혹시 마음에 상한 것이 있으면 속히 풀어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며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며 죄 없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천국의 백성답게 이 세상에서도 사랑과 거룩을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란 믿음과 회개와 순종의 삶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둘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쓴 뿌리는 불신앙, 원망, 불평의 말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런 자는 교회를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들을 더럽힌다. 셋째, 우리는 우리 교회에 음행하는 자나 불경건한 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또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과 영생과 천국 기업의 상속권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우리는 말씀하시는 자를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도 징벌을 받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고 거역하는 자들은 어떤 큰 징벌을 받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구원의 복을 감사하며 경외함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불과 같이 두려우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무시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되며, 특히 그가 주신 신구약 성경말씀을 헛되이 받지 말고 진지하게 읽고 듣고 받고 믿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13장: 사랑과 선행에 힘쓸 것 1-13절, 형제 사랑, 음행, 돈 사랑, 인도자 본받음 [1절] 형제 사랑하기( 필라델피아 )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이다(요 13:34). 주 안에서 형제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성격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한다”(4-5절)고 잘 증거되어 있다. 이것은 거룩하고 고상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사랑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 또 우리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물론, 형제 사랑은 단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실로 해야 한다(요일 3:17-18). [2절]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은 손님 대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창세기 18장과 19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은 손님을 잘 대접했고 그러다가 천사들을 대접하였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할 때 겸손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또 정성껏 하였다. 돈은 선한 일을 위해 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디모데전서 6:17-18은, 부자들에게 마음을 높이거나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교훈하였다. [3절]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형제 사랑은 옥에 갇힌 자나 학대받는 자를 돌아보는 일로도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는 앙과 염소의 비유에서, 형제들 중에 작은 한 사람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행위라고 말씀하셨다(마 25:35-40). [4절]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결혼은 모두에게 귀하며 잠자리는 더럽지 않으나](KJV). [그러나](전통본문) 18)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결혼과 부부관계는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주셨던 아름다운 일이며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가 서로를 사랑하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남편이든 아내이든 간음하거나 음행하는 것은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성 관계에 대해 매우 조심하며 처신해야 한다. [5-6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우리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된다(딤전 6:10).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도우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보배로 삼는 자는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양보할 수 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또 성경적 설교 즉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의 태도가 합당하였다고 증거하였다. 물론, 목사와 장로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먼저 성도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지만(벧전 5:2-4), 성도들은 그들의 바른 교훈과 지도를 잘 따라야 한다. 교인들은 그들의 인도자들의 삶의 마지막을 주의해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좋은 모범을 보인 목사들은 바른 설교와 삶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그들의 마지막도 좋을 것이다. 물론 사이비한 이단 사상들을 전하고 돈과 명예와 육신의 쾌락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경고를 받아야 하지만, 특히 진실한 목사들과 장로들, 모범적인 인도자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참 인도자이시다. 마태복음 23:8-10,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요](전통본문) 19) 너희는 다 형제니라. . .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참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또 세상 종말까지, 영원한 천국에서도 동일하시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 [9절] 여러 가지( 포이킬로스 )[다양한] 다른( 크세노스 )[이상한]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란 세상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부패시키고 변질시키는 사이비한 목사들의 교훈들을 가리킨다. 그것들의 근원은 사탄과 악령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변하심은 그에 관한 교리의 불변성을 보인다. 기독교 진리는 가감할 수 없이 명확한 내용을 가지고 있고 시대마다 변할 수 없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이 교회들 안팎에 많이 있다.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비성경적 교회연합운동, 성경 계시를 넘어서는 이단적인 은사주의, 종교다원주의, 열린예배, CCM 등의 풍조가 교회 안에 가득하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오늘날 유행하는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이끌리지 말고 바른 교훈, 즉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굳게 서야 한다. 우리는 그 옛길, 그 건전한 길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신앙이 추구하는 바이다. 성경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이며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육신에 관계되는 것뿐이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단지 음식을 먹는 교제가 아니고 성경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고 강건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 [10-13절]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대제사장이 죄를 위해 그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간 짐승의 고기는](KJV, NASB) 영문(진영 陣營)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 오네이디스모스 )[비난, 불명예, 모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율법에 규정된 대로, 속죄제물 중에 그 피를 제사장이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은 경우는 그 고기를 제사장이 회막 뜰에서 먹을 것이지만, 성소에 들어간 경우는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그것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살라야 했다(레 4:5-11; 6:26, 30).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사이었다. 대제사장이신 그는 그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므로 그의 육체는 진 밖에서 불살라지셔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의 성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이다. ‘그 능욕’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가리킨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비난과 불명예와 모욕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에서 생활해야 했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또 우리의 목숨이 끝날 때까지 거룩하고 진실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타지에서 온 형제를 영접하고 감옥에 갇힌 형제나 학대받는 형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결혼과 부부관계를 귀하게 여기며 결혼의 순결성을 지켜야 한다. 성도는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결코 간음하거나 음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판받을 죄이다. 셋째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가진 것을 족한 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이 시험과 멸망에 빠지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고 말했다(딤전 6:9-10). 넷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진실한 인도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야 하며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그 믿음과 행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하고 이상한 교훈들에 끌리지 말고 옛길, 바른 길을 붙들고 주를 위해 고난과 죽음까지 각오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되자. 14-25절, 찬송과 선행, 복종과 기도, 축원 [14-15절] [이는]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찾음이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고난의 생활일지라도,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사함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며(사 43:21) 또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또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16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열매이다. ‘서로 나눠주기’라는 원어( 코이노니아 )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힘써야 할 내용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들이다. [17절]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이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함이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회중의 인도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인들의 영혼들을 위하여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자들처럼 깨어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그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럴 때 인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해 즐거움으로 일하게 되며 근심으로 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교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봉사의 일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18-19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확신함이니]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되는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주 기도의 요청을 하였다.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히브리서 저자가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이유는 두 가지이었다. 첫째로, 그는 그와 그의 일행이 선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선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둘째로, 그는 더 속히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히브리서 수신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가 지금 이곳에 있다. 설교자는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며, 교인들은 설교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절]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평안]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저자의 기원은 예수님에 관해 세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님은 양의 큰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부르셨었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불렀다(벧전 5:4).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의 크시고 참되신 목자이시며, 인간 목사들은 교회의 작은 목자들에 불과하다. 둘째로, 예수님은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리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대주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구약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그림자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새 언약은 수정될 수 없는 영원한 언약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역사적 사실이다. 그가 죽고마셨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7:31은,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고 말했다. 본문은 또 하나님을 ‘평안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평안은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었다(사 57:21; 롬 3:17). 그러나 주 예수의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죄사함 받은 심령들 속에 평안이 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신 평안의 하나님이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을 온전케 하시기를 소원하는 기도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선행과 순종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선행과 순종은 단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21절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진 말씀이라고 본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증거한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5:12의 말씀과 같다: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22-25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 너희를 인도하는 [모든] 자와 및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에게 그의 권면을 용납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겸손한 태도이다. 그는 본 서신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서신은 길지만, 이것을 ‘간단히 쓴’ 서신이라고 표현한 것은 저자가 그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권면하고자 한 내용은 이것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보인다. 우리는 성경책을 읽을 때 ‘너무 긴 내용,’ ‘너무 많은 내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많은 내용들을 ‘간추린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디모데를 ‘우리 형제 디모데’라고 표현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3:2에서 디모데를 ‘우리 형제’라고 표현했다. 그 저자는 디모데와 매우 친근한 사이임에 틀림없다. 또 본절은 디모데가 옥에 갇혔다가 놓인 것을 증거한다. 그 저자는 디모데가 속히 오면 그와 함께 그들에게 가서 만나보겠다고 말한다. 서신 수신자들은 두 부류로 표현된다. 첫째는 ‘인도하는 모든 자들’ 즉 목사들과 장로들이며 둘째는 ‘모든 성도’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3장 성경 좋은 말씀] 모세보다 뛰어나심(히 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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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뛰어나심(히 3:1-19)
1-6절,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 . . .본문은 또 말한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하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효력 있게 부르시는 부르심을 가리킨다. 우리는 다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거룩한 형제들’이란 앞장 11절에서도 증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성도’(거룩한 자) 또는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불린다. ‘믿는 도리’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가리킨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입은 구주이시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하셨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등).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 드리고 기도하는 중보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2절]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 . . .본문은 말한다.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원문에서 본절은 앞절의 예수님을 수식한다. 이와 같이 1, 2절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시며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자로 묘사되어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고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다. 요한복음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빌립보서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렀다(계 1:5; 3:14).
[3-4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 . . .본문은 말한다. “[이는]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같음이니라]. [이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하나님이심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는 그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큰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큰 선지자이었고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이었다(신 34:10).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신 것이다.
본문은 모세와 주님을 집과 집 지은 자에 비교한다. 집은 이스라엘 곧 구약교회를 암시하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암시한다. 예수님을 집 지은 자에 비교한 것은 그가 곧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다는 말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보인다. 집을 지은 자가 없다면 집이 있을 수 없다. 피조세계의 정교함, 질서정연함, 목적성이 있음 등의 사실은 그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집을 보면 집 지은 자가 있음을 알고 정교한 기계를 보면 그것을 만든 자가 있음을 알듯이, 우리가 우주 만물을 보며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믿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오히려 이 질서정연한 우주를 우연이나 물질에 돌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이다.
[5-6절]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 . . .본문은 말한다.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장래의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증거한 것이다. 모세는 이 상징적 계시의 내용들을 다 증거하고 기록했다. ‘사환’이라는 원어(데라폰)는 ‘수종자, 종’이라는 뜻을 가진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모세와 비교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다. ‘맡은’이라는 원어(에피)는 ‘위에서’라는 뜻으로 ‘다스림’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 안에서(엔) 종으로 충성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위에서(에피) 아들로 충성하셨다. 본문은 또 우리가 곧 그 집임을 증거한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담대함’이라는 원어(파르레시아)는 ‘담대함’ 혹은 ‘확신’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한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며 성도의 소망이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표현되었다. 첫째는 예수께서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가장 큰 인물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마다 모세의 권위와 역할을 인정할 것이다. 모세를 통해 기록된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은 구약 전체의 기초요 핵심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수종자와 종으로 충성하였을 뿐이었다. 이에 비교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자로서 충성하셨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를 귀히 여기는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둘째는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집은 교회를 가리킨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다면 우리가 바로 그 집이다. 그런데 집을 지은 자는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다. 집을 지은 자란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리킨다. 집 지은 자가 집보다 더 존귀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르셔서 교회로 삼으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이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분명하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사람이나 세상이나 세상의 것이어서는 안 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집인 교회이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우리가 과연 그런가? 우리가 돈에 대한 관심보다도, 자녀에 대한 관심보다도, 사업에 대한 관심보다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더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하자. 우리는 우리의 첫 번째의, 주된 혹은 많은 관심을 심히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일들에 빼앗기며 살고 있지 않는지 반성하자. 우리의 신앙생활은 인간 지향적이거나 세상 중심적이지 말고 하나님 지향적이며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또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자!
7-13절, 매일 피차 권면하라
[7-8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 . . .본문은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구약 시편 95:7-11이 ‘성령의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영감성(靈感性)을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율법서들과 선지서들은 물론 시가서들까지도 영감되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딤후 3:16).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또 성경적 설교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말고 다른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고 원망했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었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 뒤따른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것이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서져야 한다. 그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함이 있고 온유한 마음이 생긴다.
[9-11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 . . .본문은 말한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저]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시험한다’는 말(페이라조)이나 ‘증험한다’는 말(도키마조)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많은 일들을 목격했다. 그것들 중에는 기적들도 있었고 두려운 징계들도, 긍휼의 구원도 있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도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만나를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다.
그러나 광야에서 저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주시는 참 안식과 또 장차 들어가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참 안식의 땅이다.
[12-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 . . .본문은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중에 불신앙을 품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악심’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마땅하고 기본적인 일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것이 곧 근본적인 악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밀착하여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 상황을 가리킨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하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바로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좋은 과거로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며,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바로 할 때 우리의 내일도 좋아질 것이다. 오늘이 중요하다.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권면한다’는 원어(파라칼레오)는 ‘권면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불붙는 장작을 각각 따로 놓으면 쉽게 꺼지지만, 서로 포개어 놓으면 더 잘 붙듯이,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이다. 죄는 사람을 속인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온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죄는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온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 준다. 죄는 사기꾼이다.
죄의 속임으로 사람이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든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한다. 죄는 병균과 같기 때문에 몸 속에 오래 놔둘수록 해롭다. 그것은 즉시 퇴치되어야 한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해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는 발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중에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함으로써 믿음과 선행의 삶을 힘써야 한다.
7절부터 13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약성경의 영감성을 알자.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95:7-11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말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거기에는 모세의 율법책들과 선지자들의 글들뿐 아니라, 시편 등 시가서들도 포함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믿고 순종하자.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를 거치는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였고 강퍅한 마음으로 행했다.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그들의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안식의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그들과 같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자.
셋째로, 우리는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불신앙에 떨어지는 자가 없도록 힘쓰자.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람은 참으로 부족하고 연약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끊임없는 말씀의 권면이 아니고서는 불신앙과 시험과 죄의 유혹에 떨어지기 쉽다. 불경건 곧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모든 죄의 근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든 연약과 실수와 죄에 빠지게 된다. 또 사람이 작은 죄라도 죄를 지으면 그 심령이 무디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도록 날마다 서로를 돌아보며 서로 권면하며 충고하고 또 필요하다면 책망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함께 실천해야 한다.
14-19절,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잡으라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 . . .본문은 또 말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라는 원어(텐 아르켄 테스 휘포스타세오스)는 직역하면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가리킨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을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는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고 누가복음을 썼다(눅 1:1-4).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하였다(딤후 3:14). 진실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또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많은 말씀들이 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모든 성도는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곧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불신앙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한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붙잡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된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됨을 의미한다.
[15-16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 . .본문은 또 말한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모세를 좇아(디아)’라는 원어는 ‘모세로 말미암아,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직접 음성으로 십계명을 말씀하신 후 모세를 산 위로 부르셔서 그에게 모든 율법들을 주셨다(출 19:19; 20:21-22; 24:18).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구출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었다.
[17-19절]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 . . .본문은 또 말한다.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다. 죄의 값은 죽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원칙이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의 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거역하고 불평, 원망하였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 바네아에 와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열 정탐꾼의 보고는 불신앙적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낙망시켰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들을 하였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노하였고 맹세하며 그들에게 징벌을 선언하셨다.
신명기 1:26-28,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신명기 1:34-35,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본절에 ‘그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신 1:35). 그 땅은 애굽이나 광야와 비교해 볼 때 안식의 땅이었다. 노예생활로 시달렸던 애굽이나 불안정하고 위험한 광야에 비하면, 가나안 땅은 비교적 안정된 곳이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만 사람들에게 참 안식이 된다. 그것은 천국의 안식이다.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순종치 아니하던 자’라는 원어(토이스 아페이데사시)는 ‘믿지 않던 자들’(KJV)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믿지 아니하므로’라는 원어(디 아피스티안)는 ‘불신앙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으로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인 자들에게 진노하셨고 그들이 약속의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14절부터 1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시작할 때 확실한 것’ 곧 확신의 시작 혹은 처음 확신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가리킨다. 이런 확신은 성경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우리 모든 성도는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한다. 확신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필요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순종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진리들을 확신하게 하기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그 말씀을 믿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고자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확신 중에 붙드시고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셋째로, 성경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안식에 참여할 것이다. 믿음과 순종은 영생 복락을 누리는 길이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격노케 만들며 천국의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한다.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우리가 참으로 천국의 영광과 안식을 원한다면, 우리는 믿는 자, 확신하는 자가 되고 또한 성실하게 순종하는 자가 되고, 결코 불신앙과 불순종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로마서 9장 성경 주석 성경 좋은 말씀] 예정과 선택(롬 9:1-33)반응형
히브리서 3장
150121 히브리서 3장.hwp
자, 오늘 우리 공부할 성경 본문은 계속 우리가 연초부터 시작한 히브리서입니다. 오늘은 3장이 되겠습니다. 히브리서만이 아니라 이 성경 전체가 오래된 책입니다. 우리가 보통 500년 전에 쓴 것만 하더라도 오래된 책이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고려시대로부터 이조로 넘어온 이성계 이야기, 뭐 그런 거 오래됐다고 해서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성경은 자그마치 2처년, 구약까지면 3천년 그런 정도의 전에 책입니다. 정말 까마득한 옛날에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험,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을 기록한 거거든요. 하여튼 역사적으로 오래된 책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제 히브리서라고 해서요.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인들, 그러한 뜻입니다. 이게 교회의 이름은 아닙니다. 그리고 히브리라고 하는 사람 이름도 아니고 어느 민족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리고 히브리라고 하는 사람이 쓴 것도 아니고 이 저자는 우리가 확실히 모릅니다. 주로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구약적인 배경이 굉장히 깊은 어떤 사람이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오늘은 제 3장입니다. 1절부터 19절까지 있네요. 우리 한 바퀴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으실까요? 성경 다 가지고계시죠?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절,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절,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절,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7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절,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절,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절,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절,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절,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절,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절,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절,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9절까지 있네요. 아주 긴 장은 아니고 정당한 길이의 장이네요. 우리가 함께 읽으면서 대충 내용은 파악이 됐습니다. 여기에 특별히 어려운 단어가 어디 있을까요? 일단 단어나 문장이나 그 자체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어디 있나 보실까요? 특별한 거는 없어 보입니다. 9절에 보면 약간 우리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가 나와요. 증험한다, 증명하고 경험 한다 그런 뜻일까요? 시험한다, 같이 연결되는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이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거고 시험했고 또 증거가 되려는 것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한 뜻입니다. 다른 단어나 문장 특별한 건 없습니다. 제가 3장의 제목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불신앙과 불순종. 조금 부정적인 표현이죠. 그거는 불자만 빼면 적극적인 겁니다. 순종과 신앙,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3장 전체가 얘기하려는 것은 유대 역사에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리고 올바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된 걸까요?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말을 역사적으로 보면 출애굽 한 다음에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야 되잖아요.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들이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이게 대다수가 못 들어갔어요. 심지어는 모세도 못 들어갔으니까 아주 어렸던 사람들만 들어갔고 스무 살 이상 되는 친구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다고 하는데 대다수가 들어가지 못했어요.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걸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있다. 그 이유가 불순종, 불신앙, 이거다. 그렇게 역사를 해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에 대한 해석인거에요. 정확하게 바라봐야 됩니다. 신학성경 다른 복음서 같은 것도 예수님의 역사죠. 벌어졌던 이야기들, 사도행전은 사도들에게 있었던 역사들, 그런 것들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제목으로 이거를 공부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유인물을 보시면 거기 서론 부분에 그 이야기를 썼어요. 잠깐 서론 부분만 보겠습니다. 18절, 19절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그거를 불순종과 불신앙이라고 한다. 세 가지 단어, 하나님의 안식, 근데 이게 뭘까요? 생각해보십시오. 안식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안식이요. 종교적인 용어들을 우리는 다 놓치고 있습니다. 굉장히 세속적이랄까? 어떤 종교적인 깊이를 현대인들 놓치고 우습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여기 정말 성서 언어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겉도는 그러한 게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이 성서 기자들이 어떤 경험을 했고 뭘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하고 불순종과 불신앙, 이런 겁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은 공부 끝날 때 제가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겠고요.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만 조금 더 보도록 합시다. 안식이라고 하는 것은 쉰다고 하는 거예요. 안식하면 안식을 이것도 연관이 되죠. 안식일, 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사람에게는 쉼이 참 안됩니다. 그냥 쉽게 얘기하면 돈벌이라든지 사람들이 경쟁하고 이 세상살이가 쉼이 없어요. 그런 것들은 아주 부지런해가지고 그리고 경쟁하기 위해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실존 자체가, 실존이라고 할까요? 본질이라고 할까요? 그게 우리의 안식하고는 거리가 멀게 되어있습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요?
이런 거죠. 자기가 자기를 완성하려고 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그건 나쁜 게 아니에요. 굉장히 우리가 성실하게 산다, 뛰어나다, 그렇게 많이 얘기하는 그러한 삶들이요. 그런 것들은 결국 자기를 스스로 노력해서 채우려는 것들 아니겠습니다. 다 좋은 것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율법 같은 것도 다 채워나가는 건데 그건 아무리 죽도록 해봤자 안식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상황 자체가, 살아있다고 하는 자체가 안식하고는 좀 거리가 먼 그러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열심히 해서, 노력해서 어떤 걸 이룬다고 하더라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이루기만 한다면 좋을 것 같아서 마음이 간절한데 이루고 나면 그걸로 안식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어거스틴 유명한 시, 기도문에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 안에서 내가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 얘기입니다. 그거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모르고 삽니다. 그냥 인생살이가 그렇지, 애쓰고 힘들고 그래도 그게 인생이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이 성서 기자들은, 영성가들은 정말 안식, 어떤 것을 경험한 거예요.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해탈이라고 할까? 똑같은 개념은 아닙니다만 자기를 이렇게 저렇게 얽어매고 있는, 그리고 스스로 자기가 이루어 보려고 했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그럴 때만 안식이 가능한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우리는 전제하고 이제 하나님을 믿는 그러한 신앙의 훈련, 그 쪽 방향으로 우리가 나가야 되는 겁니다. 네 그게 서론 부분이에요.
1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요약문으로는 다 자세하게 제가 설명하지는 않고 토막토막 필요한 부분들만 설명했습니다. 1절만 보더라도 참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될 거리가 많습니다. 보세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게 느껴집니까? 어떤 건지.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얘기하잖아요.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소명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이제 대충 알긴 압니다. 신학교에 갈 때도 신학생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건 아무도 증명은 못합니다. 이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자기가 착각할 수 있는 거고요. 하늘의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 어떤 건지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하늘의 부르심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거죠. 그래서 거룩한 형제들아 그렇게 얘기해요. 다시 한 번 그 문장 읽어 보겠습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이렇게 부르고 있어요. 그거만 하더라도 참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늘, 부르심, 거룩함, 형제, 이렇게 나가고 있어요. 거룩하다고 하는 거는 보이지 않는 거죠.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구별됐다고 하는 그러한 뜻인데요. 구별됐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뭐로 알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우리가 세상과 구별됐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이게 표시는 안 나잖아요. 예수 믿는 다고해서 우리가 다 잘돼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늘 마음이 평화로운 것도 아니고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어떻게 거룩한 형제들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됐다는 뜻인데요.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딱 부러지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거는 궁극적으로 얘기하면 종말론적인 사건이고요. 종말에,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셨죠? 우리를 종말론적으로 구원 시키신다, 그런 점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게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거를 종말에, 죽음에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구별된다고 하는 데에 막연하게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게 오늘 현재에 어떻게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하는 게 기독교 영성의 핵심인거예요. 이게 잘 안돼요. 자꾸만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기 확신을 하려고 하거든요. 자기최면, 자기도취라고 할 수 있거든요.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래서 이게 숙제입니다. 그건 꾸준하게 공부하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세계, 구원의 세계, 성서가 말하는 세계에 가까이 가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게 구별되었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 같은 1절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벌써 예수님을 두 가지로 호칭하네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여러분 나왔어요. 지난번에도 나와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대제사자이라고 불렀죠? 앞에서 공부하신 거 기억해 보십시오. 중보자니까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러한 중보자의 역할을 예수님이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떤 뜻인지를 여러분들이 설명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그건 하나의 공식이고 수학에도 어떤 공식이 있잖아요. 피타고라스의 공식에 이등변삼각형의 무엇 무엇은 어떻다 이러한 것 말이죠. 그런 것처럼 지금 말씀드린 이런 거는 기독교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그 공식 안에, 피타고라스 공식에 많은 수의 세계가 들어있는 것처럼, 이러한 기독교의 고백문, 이러한데도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요. 이걸 차근차근 따라가야 정말 실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이 대제사장, 지금 제가 다시 한 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화해가 돼야 하는지,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인지, 그냥 우리가 예수님 없어도 맘 착하게 살면 되자 않냐 사람들은 생각할 텐데 기독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죠. 왜 생각하지 않는지를 더 알아야 됩니다.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건 흔히 들었던 이야기고 또 하나는 사도라는 나와 있어요. 조금 이상하죠? 예수님을 사도라고 얘기하는 건 조금 맞지 않아요. 예수님의 제자를 사도라고 얘기하는데 이 사도라고 하는 표현은 예수님의 제자와 같은 그러한 차원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그러한 뜻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도라고 표현하는 구절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 하나에요. 다른 데는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어떤 관점에서 이 사람이 여기 쓴 것 같습니다.
그 다음, 2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여러분들 요약문에는 3절로 되어 있는데 오타네요. 2절부터 봐야 되겠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 여긴 이제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대목입니다. 2절부터 6절까지요. 그냥 제가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겁니다. 딱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고요. 이 모세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에게서 시작 한 게 율법이죠. 물론 여러분들 짐작하시기겠지만 모세가 율법을 다 쓴 건 아닙니다. 그거는 이스라엘 역사에 오랫동안 축적된 법조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함무라비 법전이 있듯이 유대인들에게도 법전이 있는데요. 그게 율법인거죠. 가장 유대 사회에 준거가 되는 거라서 준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인 모세 이름을 붙여서 율법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모세 율법이라고 많이 얘기를 합니다. 율법이 하나고요. 또 하나는 같은 율법의 문제인데, 모세에게서 시작된 게 제사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제사 행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게 왜 이렇게 연결이 되냐 하면, 그 전에도 개인별로 아브라함이라든지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식으로 하면 예배, 제사를 드린 게 구약 성경에 나오죠. 그건 개인적으로 한 거고요. 이집트에 들어가서는 가나안땅에 살면서, 요셉과 더불어서, 그 쪽으로 이민을 떠나지 않습니까. 3, 4백년 살았는데 어떻게 지냈는지 구약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3, 4백년은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거기엔 성서 기자의 관심이 없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서도 나름대로 활동을 하기는 했을 텐데 전혀 언급이 없어요. 역사가 비약해가지고 모세가 등장하게 되는데. 모세가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때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아닌데 성전의 원형이라고 하는 회막이라고 하는 그런 것이 있었어요. 거기서 제사 드리는 그런 일들이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모세하고 연관된다 하는 거예요.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오늘 히브리서 기자의 판단에 따르면 모세는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집의 주인이 아니라 종이라고 하는 거예요. 대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 이렇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종과 아들, 왜 그런 얘기를 할까요? 종은 하나님의 아주 성실한 일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뛰어난 일을 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토대를 놓은 사람이잖아요. 일단 율법이니 핵심적으로. 율법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회가. 좋아져요. 건강해집니다. 그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율법대로 그 사회를 끌어오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 성경에 있는 율법만이 아니라 불문법,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뭐 미드라쉬인가, 제가 이름을 다 거명을 못하겠습니다만 굉장히 많은 시행세칙들, 헌법이 있으면 나머지 법률들이 있고 시행세칙, 대통령령, 지금도 그렇게 있는 것처럼 유대도 율법을 중심으로 한 법칙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대로 하면 정말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신약성서기자들은 그것으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거죠. 판단한 것만 아니라 증명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주의자들과 예수님과의 충돌이 많이 있었어요. 이런 거예요. 율법이 좋기는 한 건데 그걸로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그걸로 만족하고요. 율법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뭔가 불안하고 그런 거예요. 늘 상대적인 가치, 가치론적인 거예요. 아, 그렇게 표현하면 되겠네요. 율법은 가치에요. 조금 더 괜찮은 삶이 있고 좀 못 미치는 삶이 있고, 그러한 상대적인 겁니다. 그런데 그래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거죠. 연봉을 1억 갖고 사느냐 8천만 원 갖고 사느냐 조금 더 밑으로 떨어져서 5천만 원을 갖고 사느냐 삶의 어떤 형식들은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걸로 다 문제가, 오천만원 받는 사람보다 1억 원 연봉 받는 사람의 삶이 완전히 질적으로 다르게 괜찮아진다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비슷하잖아요, 약간의 차이만 있지. 율법은 그러한 한계가 있습니다. 이 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노력하는 자체는 괜찮은 겁니다. 그런 것을 종의 역할이다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아들이라고 그랬어요. 6절 보시면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6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아 아들로서 그렇게 하셨으니 확실하게 그를 붙들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특별히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죠.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앙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런데 제가 이런 용어를 쓰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아니면 아무 생각이 안들 수도 있어요. 대다수의 신자들은 생각안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만 그냥 대충,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아들인가부지 생각하지 그게 이제 우리가 극복해야 할 한계에요. 그렇게 알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에요. 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호칭했을까?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지. 이건 말이 되지 않는 거예요. 누가 대답하실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조금씩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정리가 들 겁니다. 이게 신학적인 거고 인문학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단어, 용어에 있는 어떤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가 있다는 뜻이에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하다 이러한 뜻입니다. 그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왜 그렇게 경험을 했을까요? 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 영적인, 종교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라고 인식했을까요? 그건 뭐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시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뭘 경험했다고요? 생명을 경험한 거예요. 이건 어떤 것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그것을 경험한 겁니다. 율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근원적인 경험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서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럼 예수님에게서 경험한 생명, 궁극적인 생명이 뭐냐 이런 얘기를 하려면 더 많이 필요하니까 지금 우리가 다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튼 방향은 그렇다. 자꾸만 그런 쪽으로 여러분들이 생각을 정리 하셔야 됩니다. 2절에서 6절을 봤습니다. 모세는 사실은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종이었다. 아들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래서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된다, 그의 집이 된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7절에서 11절입니다. 여기에 구약성경이 많이 인용이 됩니다. 여러분 각주에 보면 ‘ㄹ’이렇게 되어있어요. 시편 95편 7절 이하의 내용들이 인용이 돼요. 신약성경이 구약을 인용할 때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시편 95편 7절을 찾아보면 똑같은 이야기는 아닌 거예요. 그러나 비슷한 게 있고 부분적으로 겹치는 게 있고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원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잖아요. 히브리어 성경이 원래 있고요. 그러나 여기 신약성서 기자들이 주로 인용한 성경은 히브리 성경이 아니라 70인역이라고 해서 구약 히브리 성경을 헬라말로 번역한 성경이 있어요. 그걸 주로 많이 인용을 했습니다. 왜 헬라어로 번역을 했을지는 여러분들 상식적으로 생각하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틴에 살지 않고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라 말, 언어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히 알랙산드리아인가, 거기서 모여서 학자들 70명 정도가 번역을 했다고 해서 그 성경을 가리켜서 70인역, 얘기하는데 권위가 있는 성경입니다. 주로 그거를 많이 인용을 한 것 같아요. 내용은 간단한 겁니다. 광야 생활을 다시 한 번 언급하는 거예요.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 너희들 조상들이 거기서 고집을 피우다가 망하지 않았냐. 그러니까 너희들 그렇게 하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그걸 이제 시편 95편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인용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는 거죠. 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여기서 시험하던 날에는 구약에 나온 어떤 사건들인지는 대충은 아시죠? 뭘 시험 했냐 그러한 거죠. 만나, 메추라기, 사실은 이거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기보다도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결과인거예요. 하여튼 그래서 계속해서 이 유대인들은 40년 동안, 여러분들이 출애굽기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만 불안했어요. 가나안땅에 들어간다는 확신도 없었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집트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도 많이 하고요. 그리고 모세에 대한 불평, 불만 이런 것들도 많이 있었고요. 굉장히 그렇습니다. 약간 전문적인 말씀을 드리면 애굽에서 뛰쳐나온 사람들 있잖습니까. 이 사람들을 히브리인들이라고 하는데 그 히브리라고 하는 말이 꼭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그 근동 지역의 하층민들을 가리키는 히브루라는 용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정말 순수하게 유대인 자기 민족만 끌고 나온 게 아니라 욕구 불만, 사회 불만이 있는 사람들, 하층민, 노예들 이런 사람들을 끌고 나와서 반란을 일으켜서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문제를 많이 일으켰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걸 다 시험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완고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있어요. 완고하다. 여기 보면 8절에도 있고요 13절에도 나오고 15절, 이건 다시 반복한 시편 인용문인데 완고하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완고하다고 하는 건 신앙하고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저 사람 완고하다고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이상한 사람들, 괴팍한 사람들,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것, 사실 그런 게 완고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 강의 요약문 잠깐 보실까요? 7절에서 11절 부분 정리했는데 잠깐 보겠습니다. 세 번째 문장부터 봐요. 성령은 신구약을 관통하게 하는 진리의 힘이다. 그러니까 시편을 인용하면서 성령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를 유대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부분이 못했어요. 이유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마음이 완고한 것이다. 완고하다는 표현이 반복된다.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를 신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완고, 교만 비슷한 겁니다. 대게 우리는 그렇게 살죠. 저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복하기가 참 쉽지 않아요. 우리 어떤 전 이해에 너무 강하고 이렇게 저렇게 교육받은 것도 있고 자기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그래서 거기서부터 벗어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교회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그런 위험성은 있다고 볼 수 있죠. 결국 11절에 보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 한다 그러한 경고를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경고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요약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제가 정리한 거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죽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뜻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이러한 표현들이 여러 군데 나오니까요. 이건 그냥 의인화한 거예요. 하나님이 살고, 말고 그런 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건 어떤 다른 걸 가리키는 거예요. 영적인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문제에요.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 그건 이제 하나님이 살아있지 않은 거죠.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렇게 경험하는 우리의 영적인 태도에서 가능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살아있게 경험 한다 아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제가 어저께 밤에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올린 커피에 대한 이야기 잠깐 드리면 이렇습니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이게 색깔, 향, 잔, 찰찰 넘치는 거품 등등이 있어요. 그리고 커피를 갈아서 넣고 거기 관계되는 많은 것들, 물을 넣어서, 물이 이제 중력에 따라 내려와서 커피가 내려진다는 말입니다. 그 사건 자체가 어마어마한 이 우주 전체에 신비한 생명의 힘들이 작용한 거다 전 그렇게 보여요. 커피 알 갈고, 가루, 물, 수증기, 색깔, 이런 것들이 어마어마한 온 세계를 담고 있다는 거예요. 그거는 느끼는 사람은 느낄 수 있고 없는 사람은 그냥 지나갑니다. 그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지금 빨리 한 잔 마시고 나서 다른 일 해야 된다고 마음이 쫓기게 되면 우리 일상에 대한 모든 것들을 놓치는 거하고 비슷하게 하나님 경험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이게 계시는 건 아닌 거거든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경험 하냐하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거를 제가 요약문 안에 정리를 했습니다. 보시면 되겠어요.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해야만 우리는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늘 여기서 반복해서 얘기하듯이, 그건 13절에 나와 있는 그대로입니다. 완고한 마음, 이런데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게 하라. 하나님을 살아있게 경험할 때만 가능합니다. 보통 이런 글들을 읽으면 도둑질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생각하시는데요. 성서는 그렇게 유치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도덕가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죄의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교묘해서 선으로 위장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집중이라고 하는 게 죄인데 자기를 스스로 성취하려고 하는 아주 강력한 욕망, 이게 죄에요. 이상하죠? 우리는 보통 자기 긍정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르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유혹하면 이상한 것 생각하지 말고요. 아주 파렴치한 그런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 떼어낼 수 없는 강력한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는 유혹,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것에 있게 되면 완고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경험이 점점 줄어들게 되죠. 시간이 많이 돼서 제가 30분까지 정리를 해야 되는데요. 좀 빨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15절에서 19절입니다. 이게 오늘 결론이기도 하지요. 다시 한 번 요약문을 보겠습니다. 7절에서 인용된 시편 95편 7절이 다시 인용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요청입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입니다. 이건 귀를 기울이려고 억지로 해봐야 사실 되지 않습니다. 이건 자기의 영혼이 그쪽으로 마음이 가야되는데 이게 쉬운 가요. 안되잖아요. 이거 저걸로 우리가 쫓기고 있는데 어떻게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소리에 귀가 가겠습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인거죠. 크게 엄청나게 잘못한 거보다도 살인, 강도, 이거는 그냥 정말 파렴치한, 파괴적인 행위고요. 성서는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 불순종이고 불신앙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오해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순종을 통해 놀라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순종이라고 하는 게 신앙하고 비슷한 얘긴데 어려운 거예요. 순종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그런 것들이 잘 잡히지가 않으니까 순종한다는 것이 뭘까. 내가 교회 열심히 나와서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뭐 그런 건가. 아니면 심지어는 주의 종, 목사에게 순종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자꾸만 생각을 해요.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거 거부하고 청백하고 깨끗하게 살라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정리가 잘 안됩니다. 자기합리화에 빠질 수도 있고요.
제가 요약문에 예수님의 경우를 썼어요.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순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그렇죠? 십자가라는 것은 인류 구원의 길이 아니라 이거는 자기 파멸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파멸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잖아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 하나님 나라가 올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십자가가 점점 가까이 오니까 이게 받아들이기가 힘든 겁니다.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도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아마 그래서 제자들은 피하라고 많이 얘기 했잖아요. 그건 아주 상식적인 거예요. 그런데 결국 예수님은 순종하신 거죠. 자기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자신의 생각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 그분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에게 자기 운명을 완전히 맡기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일종의 결단이죠.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것을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야 뭐 그렇게 엄청난 인류 구원,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냥 일상적으로 기독교인답게 살아가야 되는 건데 이런데서 순종이 뭐냐 한, 두개로 제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하게 어떠한 말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아야하는지 이거 결정하기도 힘든 문제고요. 제 삼자가 말해 줄 수도 없는 문제고 본인이 감당해야 합니다. 이게 순종해야될 거냐 아니냐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그거 어떤 구체적인 사항보다도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조금씩 가까이 가는 것, 그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들어간 것만큼 어떻게 말하고 행동을 하는지 그러한 방향이 잡히겠죠. 문제는 용기가 있냐, 없냐, 그러한 건데. 그럼 안 되는 것을 희생해가지고 억지로 해라 전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건 자학적인 거 그걸 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얻는 길인 거예요. 손에 잡히는 거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내가 당연히 가야될 길이라고 생각해서 자기가 선택해서 가는 것. 그럴 때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생명을 얻게 되는 거죠. 신앙의 선진들은 다 그런 길을 갔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 강의 요약문에 나와 있는 것 몇 줄만 읽으면 되겠습니다. 순종, 또는 그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그 대상을 더 깊이 알아야 된다. 내가 따라가야 할 대상을 알아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 대한 공부가 필수다. 두 번째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공부는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게 아닌 거예요. 다 보이는 게 아닌 거예요.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그 대상에게 자기의 운명을 완전히 맡길 수 있어야 된다. 저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이다, 구도적인 거다, 죽을 때까지 계속 그 긴장이 있어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계속 공부를 해야 되고요. 정말 이건 필요한 건데 우리 수요 공부팀은 그런 면에서 좋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따로 공부실수도 있는 거고요. 꾸준하게 그러한 길을 가면서 우리의 운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그러한 수행과 구도로써의 기독교인의 삶이 돼야 되지 않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히브리서 3장,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우리들에게 전해준 그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눴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을 시험하여 결국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그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그 생명에, 궁극적인 현실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이 어려운 시절에 우리의 신앙이 날로 달로 더 심화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히브리서 3장(3:7-19) 해석과 구조, 적용,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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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틀에서 볼 때 히브리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광야 세대처럼 구속과 안식, 약속과 성취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내용만 가지고 살펴볼 때 히 3:7-19은 광야 세대의 실패 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 볼 히브리서 3:7-19의 내용은, 광 야 세대가 실패했던 것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광야 세대가 실패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광야 세대는 조상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이집트의 노예와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축복을 누렸지만, 불순종과 믿음 없음으로 인하여 안식(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실패를 겪었습니다 . (광야 1세대는 다 죽고 2세대만 들어가게 됐죠)
이것을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면 이런 내용인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죠. 약속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3:7~19)의 구조
3:7-11 : 시편(95:7-11)의 내용을 인용
3:12-19: 약속의 땅(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반면교사 삼아, 믿음과 순종을 강조
히브리서 3:7-19는 시편 95:7-11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한번 비교해볼까요? 인용된 내용을 굵은 글씨와 밑줄로 표시했습니다.
히브리서 3:7-19 시편 95:7-11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 이 돌보시는 양 이기 때문 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 에서 시험 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8 너희는 므리바 에서와 같이 또 광야 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 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 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 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 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 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그렇다면, 인용된 시편 95편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시편 95편은 광야에서 반란이 있은 지 여러 세기가 지나서, 한 시편 기자가 광야의 경험을 그 후대의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지은 시입니다. 히브리서 4:7은 이 시편의 내용을 ‘다윗의 글’이라고 소개합니다.
오랜 후에 다윗 의 글 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히브리서 4:7)
시편 95:7-11의 내용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일어난 일을 상기시키면서 불순종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음성을 들을 때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야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광야 세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약속의 땅, 곧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광야 세대의 근본적인 실패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실제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광야 세대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광야 세대의 아픔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것을 잊지 말 것을 상기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광야 세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그들은 축복을 누렸으나 늘 불평, 불만이 가득한 세대였습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애굽에서 죽거나 광야에서 죽는 게 낫습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칼에 쓰러지게 합니까?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애굽의 압제에서 자유케 하신 은혜는 금세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야 세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우리는 몇 가지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불평, 불만하지 말자
두번째, 주신 축복을 기억하며 감사하자 입니다.
광야 세대는 “만나”도 질린다고 불평했던 사람들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메추라기를 보내 고기를 먹게 하셨을 정도로 완악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사랑해주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불평대신 감사를 올려드렸어야 할 이 세대가, 마음이 굳어져 완악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며, 불평의 입술, 불만의 입술은 멈추고 감사의 입술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광야 세대와 같은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 은혜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점검해 봅시다. 나는 불평의 입술인가요? 감사의 입술인가요? 오늘 하루 시작하실 때, 주님! 감사의 입술이 되게 하소서. 감사가 더 많은 감사를 낳을 줄로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고 결단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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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성경 알아가며 나도 변하려고 :: 히브리서 3장.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현재적 믿음)
히브리서 3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천사와의 비교에서 모세와의 비교로 옮겨가고 있다. 모세와 관련해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 신실한 종이었다면, 신실성에 있어서는 같이 인정을 받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집의 종의 신분이 아니나 아들의 신분으로서 신실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모세를 따르는 것에 잘못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더욱 큰 신실함의 혜택을 누리게 됨을 강조하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의 절대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수여자 모세를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그 보다 더 큰 예수를 알게 되었으니 그 분을 끝까지 의지하고 순종할 것에 대한 권면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들(조상들)이 항상 마음에 미혹을 받아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완고했던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처럼, 너희들(이 편지를 보고 있는 성도들)도 그렇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한다. 성도들끼리 서로 권면해서 너희 중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 하라고 경고하고 있다.(12,13절)
히브리서 3장에 중요한 주제중에 하나는 현재 성도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배교하거나, 예수 신앙을 떠나게 되는 사람들(아마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에게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세의 신실성보다 예수의 신실성이 더욱 큼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다분히 유대인들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더 큰 확신을 주기 위함으로 보인다.
더불어, 지금 현재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미혹에 의해서든, 완고함으로 믿음을 가지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든) 현재의 믿음(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버린다면 광야에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엎드러지게 될 것(심판, 그래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함)을 경계한다.
구원얻는 믿음이란 현재적으로 확인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적으로 믿음이 유지 되지 않았다면, 과거의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순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현재적으로 예수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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